죽부인을 광에 넣어야 할 시기다. 아침 저녁으로 스멀스멀 찬 기운이 몰려온다. 하여 지난번에 장에서 사온 문풍지로 창이랑 문틀에 겨울맞이 대공사를 시작했다. 이런 일은 혼자 하면 다시 붙여야 할 일이 더 많다. 결혼 생활 동안 집 안 일에 일절 신경을 안 쓰다 보니 서툴러서 문풍지 하나 해결하기도 시간이 꽤 걸린다. 문득 헤어진 아내에게 미안함이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아저씨~도와드릴까요?]

  몸은 창틀에 기댄 채로 고개만 돌려보니 그 아가씨다. 계절이 계절인데도 여전히 짧은 팔에 반바지니 어색하다.

[이런 거 해본 적 없을 텐데..]
[월동 준비하느라 낙엽을 붙여봐서 할 줄 알아요]

  요즘 짐승들은 테이프를 사용해 월동 준비를 하나보다. 어찌되었든 손 하나가 생기는 건 반가운 일이다. 눈치도 빠르게 반대편으로 올라가 대롱거리는 문풍지를 잡아 쩍..하는 소리와 함께 붙였다. 그리고는 돌아다니며 바람이 들어올 만한 곳은 알아서 다 한다.

[제가 더 잘하죠?]

   해맑게 웃는 모습이 아내랑 비슷하다. 어쩌면 처음 부석사에서 보았을 때 낯설게 생각하지 않고 이야기를 하게 된 것도 그런 연유다. 그녀도 곧잘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우리 뭐 먹을까요?]
[응?]
[열심히 일 했으니까 배를 불려야죠]

   도와주었으니 인심을 써야하는 게 마땅하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먹을 것이 현재는 김치 밖에 없다.

[그럼..우리 집에 가서 먹을까요?]
[너희 집? 어디 있는데?]

   살면서 사람이 아닌 존재의 집에 놀러가는 사건도 생기다니, 오래살고 볼 일이다. 아가씨의 집은 부석사 뒤라고 하여 차로 가기로 했다. 10여 킬로를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걸어가기엔 꽤 멀다.

[우리 집에 놀러올 때 매일 이렇게 온 거니?]
[사람이랑 우리랑 같나요. 숲 속 지름길을 따라오면 금방 가요]
[지름길?]
[우리 엄마가 알려주신 전용 길이요]

  차를 몰고 부석사 경내까지 왔다. 주차장에 차를 댄 후 처음 아가씨를 만난 산책로를 따라 올라갔다.

[저~기 뜬 바위 보이시죠? 조금만 더 가면 되요]

   이 지역에는 바위 두개가 맞물려 붙어 있지 않고 쌓아올려져 “떠 있는 바위”라는 뜻의 뜬 바위가 있다. 그래서 절도 부석(浮石)사 라고 한다. 영주에서는 매우 유명하다보니 영주 사과를 “뜬 바윗골 사과”라고 부를 정도다. 나는 지금까지 부석사에 가면 뜬 바위를 보는 게 다라고 생각했는데 그 뒤편으로 무엇인가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여기 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뜬 바위를 지나 아가씨는 더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 교묘하게 가려놓은 가지들을 걷으니 동굴 입구가 나타났다.

[들어오세요]

  갑자기 쑥스러움을 느끼는지 얼굴을 붉히며 옆으로 비켜섰다. 나 역시 헛기침을 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넓고 촛불도 보인다.

[비좁아도 이해하세요]
[불을 밝혀두었네]
[아..보통은 안 그러는데 오늘은 청소를 하던 중이어서..]
[청소?]

   주변을 둘러보니 여러 가지 물건들이 바닥에 늘어져 있어 산만한 느낌이다. 게 중에는 목이 긴 도자기도 보이고 나비가 그려진 연적, 개구리가 앉아 있는 벼루 등, 생각외의 것들이 있어 놀랬다.

[도자기 수집이 취미야?]

  나는 호리병을 들어 불에 비췄다. 무엇을 하는지 어두운 구석에서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내던 아가씨가 웃는다.

물려받은 거예요. 청소할 때 같이 닦아주거든요. 가지고 싶으신 게 있으면 가져가세요, 여기 그런 거 많아요]

   아닌 게 아니라 구석에 많다. 도자기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싸구려는 아닌 듯 하니 어쩌면 의외로 좋은 골동품일지도 모른다. 호리병은 청자로, 긴 목의 중간 쯤 넥타이를 두른 것처럼 무늬가 그려져 있고, 넓은 면에는 고고히 하늘로 비상하는 학들을 세겼다. 연적의 나비도 날개를 활짝 펼쳐, 부르면 날아오르겠다. 사람과 짐승의 기준은 확실히 다른 듯, 이런 예쁘고 비싸 보이는 물건에 대한 욕심이 없다. 아마도 뭔가를 가지고 있다면 음식에 대한 본능 정도일터..아가씨가 어떤 종류의 짐승이든 현재까지는 사람의 말과 행동, 마음을 가졌으니 친구하기에 나쁘지 않다. 아니, 솔직히 요즘은 귀엽기까지 하다. 청산 할매가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도토리묵 장수만큼이나 안 보이면 궁금하다.

[차린 것은 없지만 드세요]

   말 그대로 차린 것은 고구마랑 도토리묵이 다였다. 김치 밖에 없는 우리 집 보다야 많지만 왠지 모르게 쓸쓸한 상차림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아가씨는 수줍게 웃으며 다음엔 언니네서 더 가져다 놓겠다고 덧붙인다.

[언니도 있어?]
[네. 시집갔지만 종종 놀러 와요]
[오호. 근데 너는 왜 시집을 안가니?]
[아직..마땅한 남자를 못 만나서요. 아저씨 같은 사람이 있으면 바로 시집갈 텐데..]

   희미한 양초 불빛으로도 얼굴이 붉어진 게 보인다. 이런, 이거 혹시 나한테 반했나..라는 생각을 하던 차에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머리를 올린 다소곳한 차림의 여자가 들어오자 아가씨는 반가운 듯 벌떡 일어섰다.

[어!]
[어머!]

   우리는 동시에 서로를 보며 놀랬다. 아가씨의 언니는 바로 얼마 전 학 알을 얻으러온 둔갑 너구리였다. 그렇다면 이 아가씨도 너구리라는 뜻이다.

[남편 분은..어떠신가요?]

  우리는 말없이 음식을 나누어 먹은 후에 차 한 잔을 손에 들었다. 내가 웃음을 참으며 묻자 그녀는 얼굴을 돌리며 새침한 표정을 짓는다. 행동이 비슷한 게 역시 자매가 맞다.

[그냥..그렇지요]

   아가씨는 우리가 서로 알고 있음에 놀라워하더니 곧 아이같이 즐거운 표정으로 돌아다녔다. 나는 음식도 다 먹고 더 있기도 뭣하여 그만 가겠다고 말했다. 아가씨는 나비 연적과 개구리 벼루를 건네준다. 그녀의 언니는 기분이 별로 인 듯 눈살을 찌푸렸다. 왠지 이것을 받으면 그녀의 마음까지 가져가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지만 한사코 주는 바람에 어정쩡히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밤이라 책상 위에 도자기들을 올려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름답구나..무릉도원인가..]

   꿈이라는 걸 느낌으로 알지만 좀 더 즐기고 싶어 느릿느릿 거닐었다. 지난번에 본 호수가 눈앞에 있고 파란 색의 나비가 팔랑거리며 내 어깨에 앉았다. 날개를 흔들 때마다 파란 가루가 옷에 떨어진다. 또한 남빛에 가까운 파란 개구리가 호숫가 주변에서 뛰어다녔다. 그 때 멀리서 이 호젓한 장면에 어울리지 않게 닭소리를 내는 너구리가 나타났다. 깜짝 놀라 급히 눈을 떠보니 울산댁네 난봉꾼 장 닭이 방 안에 있다. 언제 들어왔는지 오른쪽에서 시끄럽게 울어댄다. 몸을 비틀어 장 닭을 피해 일어났다. 책상 위의 도자기들을 보니 왜 꿈 의 나비와 개구리가 파란 색인지 알겠다. 그녀의 도자기는 백자이고, 새겨진 것들이 바로 남빛에 가까운 파랑이다. 꿈의 마지막에 너구리가 난입할 정도로 그녀가 너구리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나보다.

[그러게 어울리지 말라고했지, 권선생도 말을 참 안 들어]
[이제 어쩌죠?]
[옛날엔..사람을 홀리는 짐승들은 죽였어]
[네?]
[혹시..권선생도 좋아해?]
[아뇨..다만..]
[일단 도자기부터 다 돌려줘. 나무관세음보살]

   청산 할매에게 상의를 하다보니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물건을 돌려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죽이는 건 싫다. 그동안 정이라도 들었는지 너구리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싫지 않다. 학마을에 살다보니 이런 일이 다 생긴다.

   고민을 하며 어제 갔었던 길을 더듬어 찾아갔다. 비닐봉지에 담아 온 도자기들이 짤랑짤랑 소리를 낸다. 대충 이쯤이다 싶은 지점에서 동굴 입구를 찾는데 어딘지 모르겠다. 하긴, 쉽게 사람의 눈에 띌 것 같으면 너구리가 맘 편히 살겠는가. 도자기 도둑이 들어 살생을 벌일지도 모를 일이다.

[못 돌려줬다고?]
[네. 아무리 찾아도 동굴이 안 보여서요]
[잘 가지고 있다가 오면 돌려줘, 쯧쯧]

   청산 할매는 난감한 표정의 나를 남겨두고 매정하게 가버리셨다. 책상 위에 다시 자리 잡게 된 나비 연적과 개구리 벼루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웠다.

   닷새쯤의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너구리 아가씨는 한 번도 오질 않았다. 매일 수로 너머를 보며 두 근 반, 세근 반 하던 것도 점차로 가라앉는다. 혹시 안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밥맛도 다시 생겨났다.

[으으..춥다]

   이제 늦가을마저도 끝나가는 지 이른 아침의 공기는 칼날처럼 차갑다. 몸을 비비며 대청마루로 나가니 고구마와 도토리묵이 도자기 접시에 소복이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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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2009-09-16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닭소리를 내는 너구리..ㅎㅎㅎ..상상을 하다가 웃음이 터졌습니다!
 


  하늘은 높아지고 말이 살찌는 계절이 가을이다. 학마을의 유일한 개인 장군이도 오동통통 살이 오르는지 볼 때마다 배와 엉덩이가 넓어진다. 딴 건 몰라도 무게의 변화는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이유가 내가 매일 수로에서 장군이를 건져주기 때문이다.   


[할매, 장군이가 너무 살이 찌는데, 잡아드실 거 아니면 다이어트 좀 시키세요. 너무 무거워서 구해주기도 벅차요]
[나는 고날이 고날이라 장군이가 그런지 몰랐어]
[이 참에 밥을 좀 줄이세요]
[알았어]

  우리는 마당에 서서 대화를 나눴다. 청산 할매는 수확물들을 말리기 위해 마당에 검은 헝겊을 깔고 계셨다. 축사 근처에는 빨간 고추들이 어느새 제법 말라 태양초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오늘처럼 해가 좋으면 버버리 할배는 도로에서 벼를 말리신다. 나는 완성된 출판물 파일도 보낼 겸 봉투를 들고 슈퍼 쪽으로 걸어 나가는데 역시 버버리 할배가 보였다.

[잘 마르고 있나요?]
[나..날..이..조..좋아..자..잘..말..라]
[수고하세요]

  땅은 열을 흡수해 낮 동안은 매우 덥다. 그 위에 수확한 벼를 널어놓으면 기계에 말리는 것보다도 좋다. 태양초, 태양초 하는 것처럼 태양쌀인 셈이다. 버버리 할배는 자신이 먹을 쌀만 농사 지으시기 때문에 저렇게 혼자 일을 하신다. 아침에 한 번 쫙 뿌려두었다가 대낮이 되면 발로 벼들을 살살 밀어서 안과 밖의 자리를 바꾸신다. 밤이 되기 전까지 말린 후 모아 두었다가 다음 날 그 과정을 되풀이 한다. 양이 많아서 좀 더 요령 있게 하실 때는 고랑을 만드시려고 발로 밀어주신다.

[장군아~]

  할배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를 스쳐지나가는 장군이가 보였다. 내가 부르자 잠깐 멈춰 서서 쳐다보더니 슈퍼 주인 할매네 집 뒤쪽으로 사라졌다. 그 근방은 풀이 높게 자라 다니기 불편한데 왜 장군이가 그런 지역으로 들어가는지 궁금해졌다. 슈퍼는 잠시 후에 가기로 하고 장군이 뒤를 따라갔다. 

[헉! 저 녀석..]

  어떻게 구한 건지 계란을 날름날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지난번에 너구리에게 주려던 학 알을 뺏어먹은 후 그 맛을 못 잊은 게 틀림없다. 이것이 바로 장군이가 살이 통통하게 오른 이유였다. 그런데 도대체 무시무시한 장 닭을 어떻게 피해 계란을 구하는 건지 궁금하다. 장군이는 내 기척을 느꼈는지 계란을 물고 도망쳤다. 그런데 멀리 갈 것도 없이 다리를 지나다보니 개울가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걸 목격했다. 그나마 몸이 날렵했을 때는 가장 자리 근처에서 징징거렸지만 상당히 무거워진 지금은 개울 한 가운데에 돌덩이 마냥 쓰러져있다. 지금 장군이를 구하러 들어가려면 출판물 파일을 분실하거나 잊어버리겠다 싶어 먼저 슈퍼에 들렀다가 도와주기로 결정했다. 하루 이틀 빠지는 게 아니다보니 구해주러 갈 때까지 어떻게든 버티는 기술을 익혀놓았음을 안다. 실제로 지난번에는 잊어버리고 있다가 2시간 후에 갔는데도 그대로 수로에서 기다렸다.

[할매, 신경써주세요. 이거 아주 중요한 거예요]
[그래그래, 걱정 말고 막걸리나 한 사발 하고 가]

  택배 기사가 물건이 있을 때만 오다보니 신신당부를 하며 맡겼다. 기왕 기다리는 거 조금 더 있으라고 중얼거리며 씨껍데기 막걸리 한 사발을 마셨다. 목울대를 퉁겨주며 넘어가는 술 맛이라니...

[저리가! 저리가!]

  슈퍼 주인 할매는 빗자루를 들고 무엇인가를 쫓으셨다.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서 보니 고양이다. 몇 십분 후에 택배 값이랑 술 값을 치르고 나올 때까지도 도로 건너편에 있는 고양이가 보였다. 아마도 다리를 다쳤는지 계속 핥으며 신음 소리를 낸다. 나는 고양이에게 다가갔다. 일반적인 야생 고양이는 사람을 매우 경계하여 조금만 가까이가도 도망가거나 위협적인 소리를 내는데 이놈은 멍하니 처다본다. 손으로 잡아들자 벙벙했던 모습과는 달리 약간 말랐다. 왼쪽 뒷다리에 피딱지가 앉아 흉한 게 덧에 걸렸거나 다른 짐승에게 당한 모양이다.

[안 키우려면 건드리지 마시게. 사람 손 탄 놈은 죽어]

  스쿠터를 탄 도토리묵 장수가 털털거리며 다가오더니 멈춰서면서 말했다. 그의 발치에 중국집 배달통이 보인다.

[자장면도 배달하세요?]
[돈 되는 건 다해. 먹고 싶으면 이리로 전화해. 근데 그거 어쩔 텐가?]

  발로 배달통에 적힌 번호를 가리키더니 다시 내 손에 들린 고양이에게 관심을 돌렸다.

[일단 치료부터 해주고 생각해보죠, 뭐]
[안 키울 꺼면 연락해. 약으로 팔면 제법 받아]

  그는 다시 털털거리며 멀어져갔다. 학마을에서 안 사람 중에 제일 기이한 인물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뭐든지 알고, 뭐든지 한다. 처음에야 놀랐지 이제는 그가 어떤 일을 하든 그러려니 한다. 이쯤 되면 그가 때때로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하니 학마을 사람이 다 된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집으로 돌아와 구급약 상자를 꺼내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른 뒤에 붕대를 감았다. 또 핥아댈까 봐 머리에는 두꺼운 종이로 깔때기를 만들어 묶어주었다. 예전에 아내와 함께 이런 놈을 “깔때기 고양이”라고 불렀다. 깔대기를 벗으려고 팔을 이리 저리 제치는 게 재미있다며 깔깔거린 추억이 스쳐지나갔다.

[앗! 장군이!]

  갑자기 개울가에 버려두고 온 장군이가 생각나 뛰어갔다. 성격이 진득하고 몸이 무거워 아직도 개울가 한가운데에 그대로 처박혀 있었다. 물을 뚝뚝 흘리는 녀석을 안고 돌아오니 청산 할매가 집에 없어 우선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갔다. 진흙을 닦아주려고 호수를 수도에 연결하는데 장군이 놈이 대청마루로 걸어간다. 순간 고양이가 생각나 돌아보았다. 내 걱정과는 상관없이 둘은 잘 지낼 것처럼 보인다. 더 정확히는 장군이가 고양이의 몸을 샅샅이 핥아준다.

[웬 고양이야?]
[아까 슈퍼 갔다가 발견했어요. 다친 게 불쌍해서 치료 좀 해주려고요]
[장 닭 조심시켜]

  학마을의 난봉꾼이자 무법자 장 닭에게 걸리면 이런 고양이는 사망할 수도 있으니 사람보다도 일차적으로 조심시켜야 한다. 청산 할매의 말대로 적당한 박스에 넣어주고는 마당의 풀을 뽑으며 오후를 보냈다.

  고양이가 나아갈 동안에 장군이가 변했다. 물고기를 물고 와 고양이에게 주거나 그것도 모자라다 싶으면 계란을 가져다준다. 톡톡 까서 터지면 발로 밀어서 먹으라고 한다.

[말 못 하는 짐승이 사람보다 낮구만]
[하지만 할매, 이건 좀 그렇잖아요]
[뭐가?]
[개랑 고양이가 잘 지내는 거는 그렇다 쳐도 장군이 하는 폼이 좀..]
[공수래공수거야, 보기 좋으니 됐지 뭘, 신경 꺼]

   뒷짐을 지고 흐뭇하게 바라보시기에 그냥 두기로 했다. 사랑을 하든, 미움을 하든 장군이의 선택이니 수로에 안 빠지면 내 신간이 편해져서 좋다.

  얼마 안 있으면 추석이라 이것저것 준비할 겸 장에 다녀왔다. 넷째네서 가져온 차가 고장이나 장날용 특급 버스를 이용하자니 번거로운 게 사실이다. 땀이 나서 빌빌거리며 다리를 건너오는데 장군이가 걸어가는 게 보였다. 오늘은 미스터리도 풀 겸 짐을 바짝 당겨 들고는 빠르게 쫓아갔다.

[엇! 어~어~]

  말 대신 감탄사만 나온다. 분명 “개”인 장군이가 나무를 타는 게 아닌가. 순간 원숭이가 환생했나 싶었다. 어찌나 잘 타는지 하루 이틀의 솜씨가 아니다. 저런 능력을 가진 놈이 왜 수로나 개울물에 빠지는 지 참 신기하다. 장군이는 내가 있는 걸 아는 지 모르는 지 두꺼운 나뭇가지 위에 엎드린다. 잠시 후 장 닭이 날아와 모이를 먹은 후 사라지자 나무에서 내려왔다. 주변을 살피더니 계란을 물고 사라진다. 장군이는 멍하니 구경하는 나를 슬쩍 본 뒤에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 우리 집으로 갔다. 이제는 다 나아 깔때기를 벗은 고양이가 장군이에게 다가간다. 둘은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사이좋게 계란을 나누어 먹었다. 짐을 내려놓고 대청마루에 앉아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할매, 장군이 좀 데려가세요]

  청산 할매의 소리가 들려 크게 외쳤다. 둘은 깜짝 놀란 듯 일어서더니 함께 청산 할매 집으로 갔다. 그리고 결국 고양이는 그 집의 새식구로 변신한다. 이름은 예쁜이.

  몇 개월 뒤의 일이지만 예쁜이는 3마리나 새끼를 낳았다. 덕분에 장군이가 가는 곳에는 예쁜이와 그 새끼들이 줄줄이 따라다니고, 장군이가 수로에 빠지면 다 같이 합창을 해 더 빨리 구해준다.

[미물들도 다 생각이 있는 법이여, 알간?]

  청산 할매는 수로에서 건진 장군이를 건네주자 그렇게 말씀하시며 웃으셨다. 

-------- 

글쓴이의 한마디: 벼를 수확하고 나면 도로마다, 마을마다 바닥에 가득 널어놓은 벼들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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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2009-09-15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길을 읽다보면 고향이 떠오릅니다. 아지랑이 가득한 길..아침이면 들리는 닭들의 울음소리..저희 마을에는 개보다는 고양이가 많았습니다.

우주바다 2009-09-15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흘만에 들어오니 더 반갑네요..여전히 푸른하늘에 뭉게구름이 두둥실..사무실 창을 등지고 일하다가도 몇번씩 뒤돌아봅니다..저는 고양이는 쫌 무서운데 장군이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크고작은 네마리의 고양이를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푸하하..학마을에도 한번가보고싶고 작가님 앞마루에도 걸터앉아 그 푸른하늘을 보고싶습니다

최현진 2009-09-15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주바다님~반갑습니다^^
저희 마당이 시멘트가 부어지는 비참한 일이 생겨서..ㅠ.ㅠ 게다가 수로엔 풀들이 자라고 있어 점점 이상한 모습이 되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참 좋은 일은..요즘 사과들이 빨갛게 단장을 하고 있어서 보고 있노라면 참 뿌듯합니다. 저러다 사과나무들이 무겁다고 후두둑 버릴까봐 겁난다는 상상도...--;
 

  오래 전에는 마을마다 상여를 모아두는 곳이 있었다. 학마을은 그곳을 “상엿집”이라고 불렀다. 밭이 모여 있는 한 가운데에 간이 건물로 지어놨다. 누군가의 집에 초상이 나지 않으면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창문 하나 없어 들여다볼 수 없는 형태이다 보니 아이들은 그곳이 열리기를 학수고대했다. 우리 아버지의 관을 덮은 꽃상여 역시 그 곳에 보관되었다. 지금은 더 이상 마을 안에서 초상을 치르지 않다보니 상엿집이 철거되어 아무것도 없지만 그 존재는 종종 이야기 거리로 회자된다.

[날씨 좋~다]

  나는 음복 음식을 먹으러 울산댁 할매네 집에 다녀오는 길이다. 10월의 밤은 쌀쌀하기는 하지만 청명하기 그지없어 기지개를 쭉 펴며 하늘을 바라보니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사람이란 게 배부르면 만사 오케이에 긍정적이 된다.

[엇!]
[놀라기는..간이 그리 작아서야 뭐에 써?]

  시골은 도시에 비해 많이 어두워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나면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내가 울산댁 할매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다들 먹고 마시느라 정신이 없으셨는데 어느 결에 청산 할매가 오신 건지 참 빠르시다. 이 분도 도토리묵 장수만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신다.

[이런 날은 도깨비불이 다니니까 봐도 놀라지 마시게]
[도깨비불이요?]
[그게 다 혼령인기라..]

  내가 신기해하자 상엿집에 대해 이야기를 하셨다. 학마을에 제사가 있는 날은 상엿집이랑 도깨비불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할매는 살면서 하도 보다보니 안 오면 이상하단다.

[우리..아버지 제삿날에도 보셨어요?]
[그날 꽃상여 왔잖아. 권선생도 봐 놓구선 딴 말이야]

  아, 그날 아버지의 꽃상여는 할매도 보셨다. 할매는 이 세상 이치에 맞지 않는 일들을 어디까지 알고 이해하시는 걸까.

[아버지는 이제 안 오시겠죠?]
[미련이 없는데 왜 와?]

  할매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슬슬 밭 사이로 걸어갔다. 잠도 오지 않는 싱숭생숭한 기분에 바람이라도 좀 맞으면 수마가 빨리 인사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쓰르르, 쓰르르 가을 벌레들이 기운차게 노래를 하니 칠흑이어도 별로 무섭지 않다. 울산댁 할매네 제사는 같은 날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제법 크게 차리셨다. 두 분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비명횡사 하셔서 마을이 발칵 뒤집어졌던 걸 나도 기억한다.

[아..진짜 도깨비불이구나..]

  상엿집이 있었던 곳으로 기억되던 밭 가운데로 오니 정말로 청산 할매가 말하던 도깨비불이 보였다. 두 개가 빙글빙글 도는 폼이 하나는 할매, 하나는 할배다. 두 분은 제사에 참여했다가 그리운 상엿집에라도 들린 것인지 그 곳을 계속 맴맴 돈다. 나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무엇이든 알고 보면 무섭거나 두렵지 않은 법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살아있는 사람 아닐까..

[이봐, 빨리 와서 꺼내지 거기서 뭘 하는 거야?]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니 상엿집이 떡하니 보이고 문이 열려 있으며 남자들이 들락날락한다. 그 분들 중 한 사람이 나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 다가갔다. 아주 어린 시절에 밖에서만 바라보던 상엿집을 들어가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 아까워서다. 사람들이 비키고 안으로 들어서자 곰팡내가 확 밀려왔다. 안은 생각보다 넓고 높았다. 왼쪽으로는 천장까지 만장기가 줄줄이 서 있고, 한 가운데는 꽃상여가 보인다.

[저기 있는 거 꺼내시게]

  나를 부른 남자는 노랑, 빨강, 파랑의 만장기들을 가리켰다. 다른 이들은 꽃상여를 들어낼 모양인지 손에 침을 퇘퇘 뱉은 후 하나, 둘, 셋을 센다.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대나무 만장기 앞으로 갔다. 언제였던가..멋도 모르는 올챙이 적에 상엿집 안을 들여다보다가 만장기를 찢었다. 물론 나 혼자 한 행동은 아니어서 주동자들은 엄청나게 맞은 후 집집마다 용서를 빌러 다녔다. 그 정도로 상엿집 안의 물건은 소중히 다룬다. 태어날 때보다 돌아가셨을 때 화려하게 보내는 것이 우리네 문화고, 특히 만장기들은 좋은 곳으로 가셔서 편히 살라는 여러 가지 뜻을 담은 마음이니까. 나는 조심스레 하나하나 밖으로 꺼내 내려놓았다. 손으로 글이 쓰여 있는 헝겊을 살살 쓸어보자니 의외로 먼지가 없다. 누군가 주기적으로 닦아준 모양이다. 문득 지금도 상엿집을 관리는 사람이 있는 걸까 궁금해졌다.

  누구의 초상인지는 몰라도 다들 어깨에 꽃상여를 메고 출발 준비를 한다. 그 바로 뒤에 내가 꺼내온 붉은 만장기를 든 도토리묵 장수가 보였다. 나는 노란 만장기를 들고 그의 옆에 섰다. 내 뒤에는 처음 보는 남자들이 남은 만장기들을 들고 대기한다.

[오랜 만이네요]
[쉬!]

  그는 다시없을 엄숙한 표정으로 앞만 볼 뿐이다. 왜 도토리묵이랑 개랑 닭을 사고파는 장수가 이런 일까지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니 나름 마음이 놓였다. 동지의식이라고 할까, 귀신에게 잡혀가도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든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자니 앞에서 종소리와 함께 모두가 걸어간다. 가는 길은 오늘 제사를 지낸 울산댁 할매네 집이다. 역시 비명횡사하신 두 분의 상여였던가 싶어 숙연한 기분으로 만장기를 높이 들었다.

[잘 가시게, 잘 쉬시게]

  청산 할매는 집 앞에 나와 나무관세음보살을 읊으시며 합장을 하신다. 이어 지나가는 집집마다 어떻게 아셨는지 어르신들이 나와 배웅한다. 나는 그들을 뒤로 하고 산으로 들어가는 꽃상여를 따라 느릿느릿 걸었다. 산신을 모시는 신당을 지나 오르막을 넘어 상석리에 들어섰다. 그 곳 역시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인데 지금 우리의 눈앞에는 놀랍게도 부드럽게 포호하는 바다가 펼쳐졌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사람은 죽어 흙에도 뭍이지만 바다로도 돌아가지. 너무 놀라지 마시게나]

  도토리묵 장수는 오늘 밤 처음으로 이치에 맞는 듯 한 말을 들려주었다. 꽃상여를 맨 사람들은 산 길이 끝나면서 이어지는 검은 모래사장에서 멈추었다. 꽃상여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두고는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그저 종소리와 넋을 달래는 음성만이 공중에 휘몰아쳤다. 나 역시 만장기를 바닥에 세웠다. 뒤에서 따라오신 울산댁 할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남자들은 꽃상여 안에 있던 관을 꺼내들고 한발씩 파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다는 마치 알고 있는 듯, 문을 열어 활짝 반기는 것처럼 더욱 조용히 파도를 보내온다. 고고한 달빛 아래 사람들은 관을 파도 위에 올려놓았다. 조금도 가라앉지 않고 관은 두둥실 파도를 타고 멀어져간다. 하나의 점이 되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종소리가 울렸다. 도토리묵 장수의 손짓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만장기를 들었다. 모두들 조용히 마을로 돌아와 꽃상여와 만장기들을 상엿집에 넣은 후 문을 잠갔다. 내가 잠시 다른 곳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상엿집도, 도깨비불도, 사람들도 사라졌다. 그저 도토리묵 장수만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왜 안 가셨죠?]
[나는 여기 속해있으니까..]
[아..그렇군요]

  긴 대화가 필요 없을 때가 있다. 나는 사라진 상엿집과 도깨비불에게 안녕을 고했고, 또한 멀어져 가는 도토리묵 장수에게도 인사를 보냈다. 언젠가 우리 형제가 모두 모여 이렇게 어머님을 떠나보낼 수 있을까. 그 때도 그 검고 부드러웠던 바다로 갈 수 있을까.

  날아다니는 장 닭의 울음소리에 벌떡 일어나 보니 방 안이다. 어제 밤 일이 꿈인지 현실인지 몽롱하기만 하다. 하품을 하며 밖으로 나왔다. 수로에는 장군이가 빠진채 구해달라고 낑낑거리고, 비록 한 개 뿐이었지만 한국바나나를 매달고 있던 으름나무도 겨울을 준비하는 듯 시들시들하다. 모든 것이 일상적이라 왠지 기분이 더 묘해졌다. 수로에 들어가 장군이를 구하고 나왔더니 청산 할매가 어제 제사에서 남은 음식이라며 배추적을 가져오셨다. 간장을 조금 따라와 찍어 먹자니 입맛을 다시는 장군이가 귀여워 한 입 먹어보라고 배추적을 던져주었다.

[할매, 오래 사세요]
[시끄럽다, 그거나 먹어라]

  오늘 오후에는 밤 따러 산에 가야겠다. 

------

글쓴이의 한마디: 만장기..처음에 그 의미를 몰랐을 때는 그저 예쁜 깃발들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조상들의 마음과 지혜가 담겼음을 알고나니 숙연해집니다. (사진: 노대통령을 기리는 만장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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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go 2009-09-14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상여집과 만장기..예전의 문화가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너무 간소화된 느낌이랄까요..좋은 하루되세요.
 

  예전엔 막걸리의 별칭이 “카바이트 막걸리”였다. 먹고 나면 다음 날 어찌나 머리가 깨지게 아픈지 안 먹고 싶은 술 1위다. 막걸리는 원래 시간을 들여 스스로 발효가 되게 해야 전통의 술 맛이 나는데, 그 때는 빨리 생산해 한 병이라도 더 팔자고 인위적인 첨가물을 넣었기 때문에 두통을 유발했다. 몇 일전에 TV를 보니 일본의 막걸리 열풍에 이어 우리나라에서도 막걸리 붐이 일고 있다는 보도를 듣고 그런 기억이 떠올랐다.

[권선생, 막걸리 만드는 데 도와줄 수 있어?]
[막걸리도 빚으실 줄 아세요?]
[그럼, 옛날엔 집에서 해 먹었어]

  청산 할매는 아침 밭일을 가시는 길에 수로 너머에서 부탁하셨다. 내일 장에 가서 재료를 사오면 힘 좋은 내가 누룩 만드는 걸 도와달라고. 물론 다되면 수제 막걸리를 주신다고 하셨다. 나는 잔뜩 기대에 부풀어 인터넷으로 막걸리의 역사 등을 찾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청산 할매는 부지런히 장날용 특급 버스를 타고 다녀오셨다. 나는 마을의 단 한 개뿐인 정류장에서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버스 문이 열리고 내려오시는 모습에 반가워 한 걸음에 달려가 짐을 들어드렸다.

[역시 술꾼은 술이 최곤게..권선생, 침이나 닦아]

  청산 할매는 내 속을 다 아시는 듯 웃으며 농담을 하신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왜 갑자기 술을 빚으시냐고 묻자 남편 제사상에 올릴 예정이란다.

[그 양반이 집에서 만든 거 아니면 안 먹어서..살아선 바람질로 괴롭히더니 죽어서도 요따구로 힘들게 한다니까]

  말은 그리 하셔도 할매가 돌아가신 남편을 그리워하신다는 걸 안다. 가끔 저녁에 마실 나가다가 창문 너머로 보면 할배 사진을 보고 계시니까. 아무튼 덕분에 수제 막걸리가 생기게 되어 나만 살판났다. 아니 학마을 최고 술꾼 버버리 할배도.

[더 세게 해야지, 권선생은 힘도 없나?]

  그날 점심 무렵에 나랑 버버리 할배는 청산 할매 집에서 반죽을 발로 밟느라 고생했다. 베보자기에 싼 반죽을 피자처럼 만든 뒤 발로 자근자근 밟으라고 하셨다. 그래야 제대로 된 반죽 상태가 나온다고 한다. 청산 할매는 호미처럼 굽은 허리에 뒷짐을 지시고는 시범을 보이신다. 

[할매, 이게 진짜 술이 되요?]
[내 20년 넘게 만들어 먹었는데 그걸 말이라 해? 누룩 반죽을 반그늘에서 사흘 밤낮으로 말리고, 고소한 맛이 날 때 빨리 거둬서 빠작 말려야 돼. 몰랐지?]

  이렇게 밟는 건 TV에서나 보았지 내가 할 줄은 정말 몰랐다. 학마을에서 태어나 학마을을 벗어난 적 없으실 할매가 이런 방법을 아시는게 신기할 따름이다. 얼마나 밟았는지 땀이 목을 타고 흘러내릴 무렵에야 다 됐다고 하시며 가져가셨다. 얼마간 숙성 시켜야 된다는 말과 함께 그 날은 매정하게도 위로주 한잔 입에 대보질 못하고 끝났다. 출판물을 손보느라 몇일 동안 두문불출하고 있으려니 할매가 다시 부르셨다.

[권선생, 술 익는 소리 들어봤나?]
[소리요?]
[그런 게 있어. 이 항아리는 권선생 줄 테니 가져가서 방에 두시게]

  발효되는 일만 남자, 두 개의 항아리 중에 작은 것을 내게 안겨 주셨다. 얼결에 받아온 항아리를 할매 말대로 방 안 아랫목에 두었다. TV에서만 보던 것이 내 코앞에 있으니 어찌나 기분 좋은지 혹시 소리가 들릴까 싶어 자주 귀를 가져가보았다. 술 익는 소리란 게 참 재미있다. 어떨 때는 도란도란 아줌마들이 이야기를 하는 것 같고, 또 어떨 때는 속닥속닥 할매들이 정겹게 말하는 듯하다. 바닷가에 가면 뽀드락 뽀드락 발밑에 밀려오는 파도의 느낌이다. 안을 들여다보면 더욱 신기하다. 어느 산 속, 사람이 오지 않는 옹달샘에 끊임없이 샘물이 솟아오르듯 둥글고 맑은 거품이 생겼다 꺼진다. 한 참을 보고 있어도 지겹지가 않다. 우리네 전통 술은 마음과 정성, 시간의 산물임을 또 한번 느낀다.

[동동주를 마시려거든 항아리 안에 체를 넣어 맑은 물만 건져내면 돼]
[아~그렇군요]

  다음 날 마실 가는 중에 만난 청산 할매는 동동주 만드는 팁을 알려주셨다. 빨리 익어라..빨리 익어라..나는 매일 산신에게 기도하듯 항아리에게 말을 걸었다.

[캬....좋다]
[소싯적엔 이 술통 숨기러 산 속으로 도망 다녔어]
[왜요?]
[집에서 술 만들면 잡혀갔거든. 벌금도 물고..그래서 조사 나오면 신발도 못 신고 뛰었어]
[그래도 이만한 게 없어. 설탕을 쪼매 타서 먹으면 맛이 기가막혀. 권선생도 어릴 때 꽤 먹어봤지?]

  할매들 말에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주전자 속 막걸리를 마시고는 물 섞어 내밀던 일과, 형이 설탕을 타줬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드디어 수제 막걸리가 다 된 날, 학마을 사람들은 밭 한 가운데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 달빛이 숨 막히게 뿜어져 내려오는 가운데 동그랗게 앉아, 녹슨 주발에 가득 담은 청산 할매표 막걸리를 한 입 들이키는 순간 절로 캬..소리가 나왔다. 아무리 먹을 것이 넘쳐나도 배추적에 김치만 있으면 이렇게 행복한 축제가 되니 학마을이 이 순간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배추적을 찢어 입에 넣자니 정녕 내 고향에 돌아왔다는 감회가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제사상에 쓸 것만 따로 두고 항아리째 들고 나온 술을 다 마셨다. 날 좋으면 모레 저녁에 다시 모여 우리 집에 둔 것도 마시자는 약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라?]

  자리에서 일어나 보글거리는 항아리부터 살펴보았다. 왠지 약간 줄어든 느낌이 술이 익으면서 자연스럽게 양이 적어지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맛만 좋다면야..라고 항아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출판물 재점검 작업에 몰두하였다. 저녁식사는 청산 할매네서 하고 들어와보니 또 술이 조금 줄어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눈금을 표시해 두었기 때문에 줄어들었다는 게 정말 확실했다.

[거참...]

  어차피 내일 밤이면 먹을 것이라..밤사이에 또 조금 줄어든 들 큰 문제 있을쏘냐 싶어서 다시 한 번 줄을 그은 뒤에 잠들었다.

[맛이 참 좋네]
[역시 이게 제일이야]
[맛이 깊은 게 누룩이 잘 떠진 모양이구만]

  잘은 안 들리지만 계속 뭐라고들 한다. 크..캬..신음인지 환호인지 미묘한 작은 소리들이 이어서 들려온다. 눈을 깜빡이다가 조금 고개를 들어보니 항아리 옆에 그림자가 많다. 앉아 있는 것 같은데 체구들이 상당히 작다. 마치 아이들이 모여 있는 듯한데, 목소리는 쉬었다. 애기 할배들?

[너구리도 부를걸 그랬지?]
[나중에 알면 삐져서 경을 칠 텐데..]
[신경 쓰지 말고 마셔] 
[도토리도 좀 가져오지]

  나는 살금살금 포복 자세로 문지방을 넘어갔다. 이제껏 조금씩 사라진 게 그들의 행동이었음을 알았지만 왠지 방해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술꾼들의 술 인심이야 대한민국 어디에나 같고, 맛있는 술을 인정해주는 이에게 조금 나누어 주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으니까.

[달빛이 참 좋죠?]

  대청마루에 앉아 있자니 이 늦은 밤에 길을 걸어가는 도토리묵 장수가 보여 말을 걸었다. 그는 봄에는 도토리묵을 팔고, 여름에는 개를 사며, 가을에는 닭을 매매하는 매우 버라이어티한 사람이다. 비록 키는 나보다 작지만 재미있는 구석이 있어 이제는 안 보이면 궁금하다.

[그러게 말이요. 하도 좋아 달구경하러 나왔소]

  그는 슬렁슬렁 산 속으로 걸어갔다. 나 역시 방에서 나온 이상 그들의 술잔치가 끝날 때까지는 들어갈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를 따른다.

[술을 빚었으면 산신께 먼저 바치지 그랬나]
[아...미처 생각을 못했네요. 그럼 혹시?]

  그는 어찌 알았는지 막걸리 이야기를 하였다. 이제야 나의 집에 있는 키 작은 무리들이 산신들임을 알았다. 그는 기다 아니다 정확하게 어느 쪽 말도 안하지만 왠지 느껴진다. 산신도 찾는 수제 막걸리라니..나는 참 좋은 곳에 산다. 복 받은 인생이다.

[한 잔 하고 싶소?]
[그러고야 싶지만..술이 없어서..]

  그는 무너진 사당 쪽으로 가면서 그렇게 물었다. 서낭당 나무 아래 앉더니 어디에 숨겨 온 것인지 사발과 통을 내놓았다. 마음으로는 이 정도 크기라면 들고 있는 것을 못 보았을 리가 없는데...라고 생각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는 종종 사람이 아닌 듯 행동하니까 이럴 수도 있다.

[크....]
[이런 날, 이런 곳에서 마시는 것도 운치 있지]
[학마을은 정말 신기한 곳이에요]
[약간은...그럴지도]

  달빛에 흔들리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막걸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안주 하나 없지만 맨 술만 먹어도 우리네 막걸리는 속이 괴롭지 않다. 새벽이 밝아오는 것을 보고서야 조졸한 술 판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산신 무리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항아리 안의 막걸리는 역시나 조금 줄었지만 대신 작은 매화 한 송이가 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마주친 매화와 수제 막걸리의 맛. 가을이 이렇게 깊어간다.


----------  

글쓴이의 한마디: 배추적...시골에 내려갈때만 먹으니 아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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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차한잔 2009-09-11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처음으로 글을 남깁니다. 막걸리..한창 먹던 시절이 생각나서요. 그땐 머리가 너무 아팠던 게 딩딩 울렸죠.

우주바다 2009-09-11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뜩흐린하늘에 빗방울이 후두둑..비가오면 시골의 흙마당에선 마른흙내음이 확~올라오고 밭일을 나가지않는 집에선 배추적붙이는 냄새가~~~.쪽파나 부추가 흔하지않아 언제나 배추적을 노릇하게 부쳐 쩍쩍 찟어서먹었는데..아 정말 먹고파요..얼른 집에가야겠어요..막걸리도 한병 사야하나??
 



[구들댁이 있을 때는 어찌나 잘 피는지, 천지삐가리가 꽃이었어]
[참말로 그랬지]
[열매도 얼마나 실한지..]

  어르신들은 우리 마당을 보고 나시면 그런 식의 대화를 되풀이 하신다. 요는 우리 어머니가 이 집에 사실 때는 풀과 꽃이 마당 가득이었다. 게다가 열매도 잘 열리고 작물도 품질이 좋았단다.

[우리 어머니가 잘 키우셨나봐요]
[서방 처다보듯이 이쁘다, 이쁘다 했지. 왜 거짓말 같나?]

  믿기 어렵지만 어머니는 매일 들여다보시며 말을 걸고, 나뭇잎들을 닦아 주셨다고 한다. 일찍 남편을 여의다 보니 정 줄 곳이 없어서 그렇다고 할매들은 말한다. 하지만 자식이 7명이었는데 정 줄 곳이 없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정말 정 많으신 분이면 죽으나 사나 자식들을 끼고 사셨어야지, 왜 초등학교에 막 들어간 막내까지 서울로 보내버리셨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그 덕에 나는 이곳에 대한 기억이 8살까지만 있다.

[권선생, 구들댁이 밉나?]
[어머니를 미워하는 자식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원망은 하는구만. 좀 더 살아봐, 나무관세음보살]

  청산 할매는 뒷짐을 지고 산 속으로 난 길을 바라보셨다. 그 분은 내 예전 기억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를 도와주시고 붙잡아 주셨으니 어쩌면 더 많은 것들을 아실지도 모른다.

  내가 서울로 가고 다음 해인가 어머니가 강원도에 일하러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셋째형이랑 버스를 타고 어머니를 만나보겠다고 먼 길을 갔었다. 길이 최악이라 덜컹대는 버스에서 멀미도 하고 기진맥진하며 찾아간 곳은 탄광촌이었다. 흐릿한 하늘과 검은 벽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어린 마음에 그런 마을이 신기하다 싶어 주변을 정신없이 둘러보며 다니는데, 길 건너편에 음식 쟁반을 머리에 이고 지나가는 어머니를 발견했다. 나는 어머니를 부르며 달려가려고 했지만 형이 손을 잡아 끌었다. 일하시는 데 방해하지 말란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분명 그 때 형은 뭔가를 보았다. 돌아오는 내내 형에게 심통을 부렸는데, 형은 말없이 울었다.  


  나는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고 서울 살이를 하면서 어머니와의 사이가 더 멀어졌다. 자식들에게 바라기만 하시고, 만나면 아프다고 하시는 게 듣기 싫고 어떨 때는 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에게 부모로서의 노력은 안 하신 분이 어찌 그리 당당하게 받으려고만 하시나 싶었다. 그래서 결국 제대로 된 화해를 하지 못한 채 어머니는 반년 전에 세상을 뜨셨다. 사실 이제는 어머니에 대해 원망을 하는 건지, 미움이 있는 건지, 아쉬운 건지 도통 모르겠다.

[꽃들도 사랑 받기로 치면 사람과 같아. 그렇지 않고는 구들댁 죽고 나서 그리 다 시들 수가 없지]

  특히나 이름 모를 야생화들을 좋아하셔서 소백산에 산나물 캐러 가시면 가져와 마당에 옮겨 심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달 뒤에 돌아온 집은 폐가를 연상했다. 정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우리 마당의 역사가 멈췄나보다.

[할매, 근데 저게 뭐예요?]

  우리 마당 한구석에 있는 나무에 열매가 딱 한개 달렸다. 그것이 신기하여 매일 아침 지켜보는 데 크기가 점점 커진다. 현재는 어른 주먹보다 더 크다.

[으름이구먼]
[으름요?]
[우리 손주들은 바나나라고 불렀지만 으름이야. 근데 왜 한 개뿐이야?]

  청산 할매가 돌아가신 후 인터넷으로 뒤져보았다. 임하부인, 한국바나나라는 별칭이 있지만 진짜는 으름 넝쿨 식물이다. 예쁜 꽃이 핀 후에 생긴다는 데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 꽃을 보질 못했다. 그렇다고 절대 안 피었다고 말하기에는 내 관찰력이 세심하질 못하니 피었다가 진 게 틀림없다.

[아저씨~]

  잊을 만하면 그 아가씨가 놀러온다.

[저거 맛있겠다. 언제 따 먹을 거예요?]

  아슬아슬하게 달린 으름을 가리키며 입맛을 다신다.

[글쎄..언제가 돼야 먹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럼 지금 먹어요]

  왠지 그러기에는 아쉽다. 겨우 반년 만에 뭔가가 보이는데..싶어 망설여진다. 고개를 저으니 아가씨는 먹을 때 꼭 자기를 부르라고 하며 사라졌다. 생각해보니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부르라는 건지..

  며칠이 지나고 보니 으름 열매가 제법 커져 이제는 주먹 3개 정도 인데 색은 아직 초록이다. 지나 가시던 어르신들은 모두 어느 정도인지 물어보신다.

[잘 익으면 소리를 내며 갈라져]
[소리가 나요?]
[함 들어보면 알아. 근데 저 놈은 아직도 안 익었네. 꼴았나?]

  어르신들의 말들을 종합해보면 이미 갈색으로 익어서 짝하고 벌어져 수확을 해야 마땅하다는 데 알 수가 없다. 어머니가 안 계셔서 그런 건가..라는 생각이 든다.

  주말 내내 가을비가 내렸다. 아마도 이 비가 그치면 날이 추워질 것 같다고 느껴져 방풍지를 사와야지..하고 메모해두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이제야 비로써 으름이 갈색으로 변해간다. 조만간 벌어질 것 같다.

[왜 막걸리 먹으러 안 와?]
[으름 열매 벌어지는 거 보려고요]

  산에 가시던 슈퍼 주인 할매가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 나에게 수로 너머에서 소리치셨다. 요즘 컴퓨터까지 대청마루로 내놓고 일 할 정도로 으름을 열심히 지키니 어르신들은 나를 보기가 어렵다며 이렇게 일부러 지나가주신다. 또 먹을거리도 가져오신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저 으름이 다 익어 벌어지면 꼭 나누어 먹어야지..라고 결심했다.

[쯔......]

  마당에서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기다리던 으름 열매가 드디어 입을 벌렸다. 너무도 반가워 야호..소리를 질렀다.

[뭐시여?]

  고추를 수확하시던 청산 할매가 고춧대 너머로 얼굴을 들고 쳐다보신다.

[열매가 다 익었는지 벌어졌어요. 할매, 드시러 오세요]
[그게 얼마나 된다고..권선생이나 먹어]

  할매는 많이 먹어보셨다며 한 번도 시식 못해 본 나에게 맛있게 먹으라고 하셨다. 그래도 시골 인심을 알기에 열매를 따서 쟁반에 담았다. 마을 슈퍼로 가져가 사람들을 기다리니 슈퍼 주인 할매가 전화로 불러 모으셨다.

[권선생네 으름이야]
[고놈 참 크네]
[잘 키웠네, 그려]
[머..먹..기..아..까..깝..네]

  웅성웅성, 시끌시끌. 오랜만에 슈퍼가 꽉 찼다. 두 개 밖에 없는 탁자에 어르신들이 모두 앉자 나는 벌어진 틈을 양 손으로 잡아 힘껏 당겼다. 반으로 쪼개진 으름은 흰 속에 검은 씨가 알알이 박혔다. 한개 뿐이다보니 배부르게 먹을 것도 없게 동나버렸다. 나는 왠지 아쉬운 기분에 산에서 좀싸리라는 가을 야생화를 캐와 으름 넝쿨 옆에 심으려고 땅을 팠다.

 [어?]

  땅속에 뭔가 뭍혀 있다. 꺼내보니 종이다. 그것은 흙이 잔뜩 묻어 있지만 잘 접혀 안쪽은 깨끗하다.

[함 펴봐]
[네]

  언제 오셨는지 어르신들이 주변에서 재촉하신다.

[권선생, 왜그래?]

  잠시 할 말을 잊고 종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궁금하신 어르신 한 분이 종이를 뺏어가셨다. 나는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응시했다.

[글씨네?]
[뭐라고 쓴 거야? 난 읽을 줄 몰라]
[나도 몰라]
[이름이구만..권선생 이름인데]
 
  유일하게 글을 아시는 슈퍼 주인 할매가 그렇게 말하자 다들 입을 다물고 나를 쳐다보았다. 내 손에 든 종이에는 “권형욱” 이름 석 자가 빼곡히 쓰였다. 누군가 글씨를 잘 쓰는 분이 써준 것을 보고 삐뚤삐뚤 따라 써내려간 연습장이다. 정성을 다해 꾹꾹 눌러써 종이의 뒤편이 울퉁불퉁하다.

[구들댁이 매일 이파리들 닦으면서 뭐라 했는지 아나? 자식들 이름을 불렀어]

  저녁 밥 때가 되자 청산 할매는 찌개가 담긴 냄비를 들고 와 대청마루에 놓으시며 말씀하셨다.

[이거는 형욱이꺼, 저거는 정욱이꺼..그렇게 말하는 구들댁 맘을 절대 모를 꺼야. 서방은 마음에 묻어도 자식은 그러질 못하는 게 어매야]

  몇 번을 데우셨는지 냄비 안 쪽 벽에는 국물이 졸아든 흔적이 보인다. 내 걱정이 되어 없는 반찬이라도 저녁상을 챙기려 하시는 이웃집 할매의 맘도 그럴 진데 배 아파 낳은 자식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오죽하랴. 살아오면서 원망과 슬픔만을 지녔던 내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35살의 마음 안에는 강원도에 찾아갔다가 그냥 돌아온 아이가 그대로 자라지 않았다. 어린 나이의 막내를 떼어놓아야만 먹고 살 방법을 찾을 수 있었던 어머니를 내 마음대로 왜곡해 버린 것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우리를 못 떠나 상여를 몇 번이고 돌려 찾아오신 일도, 매일 자식들의 이름을 부르며 우시던 어머니도 그 한 많은 마음을 7형제가 전혀 알아주지 못한 게 슬프다. 사랑..내리 사랑..그리고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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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한마디 : 으름 열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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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바다 2009-09-10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멋진 하늘 ..
그래도 오늘은 좀 슬프네요..오래전 돌아가신 외할머니도 생각나고..유년을 외가에서 보내고 초등3학년에 대구에 올라왔는데..기차를 태워주시며 눈물훔치던 모습도 생각나고..돌아가시기전 한동안 편찮으셨는데 가보지도못하고 장례도 못가보고..그래서 외손녀는 키워도 헛꺼라고 엄마가 그러셨는데..내 마음의 고향을 만들어주신분..편히쉬세요..

하늘푸른빛 2009-09-10 14:2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그래도..할머님에 대한 추억이 소중히 남아 있고..그런 것들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