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날이다. 한동안 출판물을 쓰느라 집에만 있었더니 먹을 것이 다 떨어졌고, 비누 등의 생활필수품도 없어서 갔다오기로 했다. 아내는 보건소에 다녀온다고 하여 차를 몰고 나가는 길에 내려주고 혼자 영주장에 갔다. 정선장처럼 크고 외지인들이 많이 오는 장은 아니지만 평소에는 볼 수 없는 할매 장수들이 많이 나타나 길거리 좌판을 벌리기 때문에, 돌아다녀보면 좋은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다.

[얼마에요?]
[전부해서 2000원]

  복잡한 장터를 뚫고 지나가다가 처음 보는 나물 앞에 쭈그리고 앉아 냄새를 맡아보았다. 요즘 먹을 만한 나물이 있을까 했는데 냄새도 좋고 생김새도 마음에 들었다. 본인이 직접 따서 말려두신 거라며 된장에 무치면 밥도둑이란다. 게다가 비닐봉지 가득 들어가고도 남을 양이 고작 2000원이라니 수지맞은 기분이다.

  도로 양편의 좌판들 사이로 지나가면서 봉지 수가 늘어났다. 고등어, 호박, 고추, 덤으로 얻은 상추 그리고 수제 비누까지 걸어가면 갈수록 사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한 시간쯤 지난 후에 양 손에 가득 비닐봉지를 들고 다시 차로 돌아가는데 너구리 아가씨의 언니를 만났다.

[태워다 드릴까요?]
[고맙습니다]

  더운 날을 의식해서인지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지만 어딘가 몸이 안 좋아보였다. 해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제안을 했다. 의외로 선선히 조수석에 올라타더니 인사까지 한다. 휴전인가 싶어 흘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내 시선을 느끼자 고개를 돌리고 밖을 내다본다.

[어디가 안 좋으세요? 낯빛이..]
[아기를 가졌어요]
[아~축하드립니다. 남편분이 좋아하시겠군요]
[네]

  그리고 침묵, 침묵. 제일 사고가 많이 나는 삼거리에서 차를 대기시키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그제야 입을 연다.

[지난번에 알아듣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말씀이신지..]

 그 말에 차를 한 쪽으로 세웠다.

[제 동생에게 여지를 두는 거 알고 있어요. 선생님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니까 수영도 못하는 애가 물에 뛰어 든 거에요. 그날 하마터면 죽을 뻔 했어요.]

  얼마 전에 너구리 아가씨가 나를 구해주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듯 빠르게 덧붙인다.

[그 애는 어리고 철이 없으니 좀 더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분이 냉정하게 행동해야하는 게 맞잖아요. 그게 어려운가요?]

  너구리 아가씨가 죽을 뻔 했다는 사실에 머릿속이 멍해져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말이 나오질 않아 앞만 바라보자 그녀가 한숨을 쉬면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는게 느껴졌다.

[차라리 이곳을 떠나시면 좋겠어요, 저희가 사라지게 만들지 마시고..]
[제가..있으면 떠난다고요?]
[어쩔 수 없잖아요. 이대로는 제 동생만 불쌍할 뿐이에요. 자신을 선택해주지 않는 사람을 쳐다보느라 어울리는 짝은 찾아보려고도 하질 않으니..]

 그 말을 끝으로 차 안은 적막해졌다. 나는 침묵 속에서 운전했다.

[저기 세워주세요] 

  가리키는 곳을 보니 학마을과 상석리의 분기점이었다. 거기서 조금 떨어진 내리막길에 누군가 서 있다. 차를 세우고 내리자 그가 다가왔다.

[남편이에요]

  두 사람이 멀어져 가는 걸 지켜보았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게 아름답다. 아지랑이 때문에 더운 길이지만 그들은 조금도 덥지 않은 듯 웃으며 간다. 거의 점이 되었을 때야 차에 올라타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대청마루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나와 함께 있으면 웃지 않는 아내. 나를 보며 행복해하는 너구리 아가씨. 나는 놓아준다고 하면서도, 친구가 되겠다고 하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물고기를 준다는 핑계로 얼굴을 보러 갔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 오지 않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오늘 아가씨의 언니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조만간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또 다른 뭔가를 했을 것이다. 나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가 어디도 가지 못하게 붙잡고 있다. 내 눈 앞에 두고, 내가 닿을 수 있는 반경 안에 있게 하려는 이기심. 보내주지도 못하고, 다가가지도 않는 게 맞다.

[선배, 제가 아는 분이 학원을 열었는데 강의 좀 맡아주세요. 선배의 출판물 때문에 인지도가 높아서 학생들이 몰릴거에요] 

  다음날 아침에 출판사 후배의 연락을 받았다. 뜻밖의 말이라 머뭇거리며 통화를 하는데 마당으로 들어오는 너구리 아가씨가 보였다.

[잠시 나올 수 있으세요?]

  다시 전화하겠다고 대답한 뒤 끊고 일어났다. 우리는 오후의 무더운 햇살을 피하고 싶어 깊숙한 숲 속으로 들어갔다. 너구리 아가씨가 잘 다니는 곳인지 앞장서서 걸어간다. 장마비로 쓰러진 나무에 걸터앉더니 하늘을 바라본다. 나는 그 옆에 조금 떨어져서 앉았다. 붕대를 감은 다리에 계속 눈이 간다.

[언니를 만나셨다고 들었어요]
[장에 다녀오는 데 힘들어 보여서 태워드렸어]
[아기를 가져서 그래요. 그 분은..좀 어떠세요?]
[약초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 고맙다고 전해달래. 다리는 괜찮니?]
[네. 별거 아닌데..언니가 붕대까지 감아줬네요]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들을 흔드는 소리가 들린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할지 생각 중인데 너구리 아가씨가 용감하게 먼저 나선다.

[언니가 무슨 말을 했든 신경 쓰지 마세요. 괜히 지래 짐작하고 그러는 거예요. 제가 좀 야무지지 못하니까 걱정을 많이 해요]

  그녀는 손바닥을 보며 이야기한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엄마에게서 도자기를 처음 받았을 때..그 아름다움에 반했었어요. 불빛에 비출 때면 같은 건데도 매일 다른 색과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죠. 연적도, 벼루도, 호리병도..아저씨는 저에게 그런 느낌이었어요. 볼 때마다 새로운 사람. 궁금해지는 사람]

  너구리 아가씨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은 눈물이 흐르지 않지만 가득 고여 있는 게 보인다. 그녀와 나 사이에 바람이 스쳐지나간다. 그녀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아무런 대꾸 없이 듣고 있다가 너구리 아가씨를 껴안았다. 잠시 그대로 있기를 바랬는데 놀랐는지 벗어나려고 한다. 그녀의 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잠깐만..이대로 있자]

  나는 주변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움직임과 나뭇잎들의 속삭임, 작은 새들의 재잘거림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따뜻한 숨결과 부드러운 살의 감촉을 마음에 새겼다.

[여긴 참 이상한 곳이에요. 어떻게 제가 사람의 모습을 할 수 있는지, 사람의 감정을 가질 수 있는지 신기해요. 도토리묵 장수도, 청산 할매도 모두가 나를 두려워하질 않아요]

  그녀를 집으로 데려와 상처를 다시 치료해주었다.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내 행동을 지켜보다가 중얼거린다. 지저분해진 붕대를 버리고 옆에 앉았다.

[이 곳에서 사는 게 행복하니?]
[네. 학마을이 너무 좋아요]
[그렇구나]
[아저씨도..여기가 좋지요?]
[응]

  언니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그들이 사라지겠다고 한 말.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나도 모르게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너구리라는 걸 잊은 적 없으니..저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세요]

  그녀가 수로를 넘어 사라지는 걸 바라보았다. 멍하게 앉아 있다가 냉장고에 있던 막걸리 3병을 꺼내 모두 비웠다. 학마을 초입에 있는 다리로 걸어가 흘러가는 개울물을 바라보는데 언제 왔는지 도토리묵 장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엇이 가장 첫 번째인지 생각해보시게. 아내인지..너구리 아가씨인지..모든 건 자신이 얼마만큼의 의미부여를 하는지에 달린 것이네]

  그는 내 어깨를 두드려 준 후 멀어져 간다.

  그녀는 사랑 때문에 아파하고, 힘들어하며, 눈물을 흘린다. 나는 전 아내이지만 세상에 아무도 없어 손을 잡아주어야 하는 사람을 떠나지 못한다. 우리는 평행선 위에 있는 셈이다. 시간이 지나면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녀는 말했지만, 나도 그녀도 자신이 없다. 그럴 수 있을지...

  며칠을 고민하다가 후배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학마을에 내가 있으면 그녀는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며, 더불어 나도 그녀를 붙들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녀를 선택할 수 없는 나로부터 너구리 아가씨가 자유로워질 수 있게..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누군가를 만날 수 있게..사람과 어울려 사는 삶의 터전인 이곳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게 최선이다.

[그동안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 너를 놓아줘야 하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질 못했어, 예쁜 너를 볼 때면 내 이기심이 자꾸만 붙잡게 해서.. 널 더 이상은 불행하게 만들 순 없으니 물러나야겠다]
[저는..저는..행복한데..그냥 이대로는 안 되는 건가요? 아저씨 옆에 있기만 할게요]
[여기서 멈추는 게 좋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날 생각하던 마음도 사라질 거야. 너에게 맞는 좋은 사람을 만나면 다 잊혀질테니까]   
[이렇게 그만둘 만큼..저에게..조금도 마음이 없나요?]
[나도 널 좋아해. 하지만 가지고 싶은 걸 다 가질 수 없으니까..]

  너구리 아가씨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녀의 흐느낌이 가슴으로 전해진다. 나는 그녀를 안아준 뒤 건강하게 잘 지내라는 말을 남긴 채 뒤돌아보지 않고 내려왔다. 너구리 아가씨의 울음소리가 내내 등 뒤에서 들렸다.

  다음 날 나는 아내에게 서울로 가자고 말했다. 집 안을 정리하여 살림살이를 창고에 넣고 다락을 잠갔다. 누군가 내려와 살 사람이 생긴다면 사용할 수 있도록 비닐로 덮어 두었다. 아내는 내가 정리하는 동안 대청마루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원하는 거예요?]
[응] 

  마지막 밤을 자고 울산댁네 장 닭의 소리를 들으며 일어났다. 청산 할매는 보기 싫으시다며 어제 밤에 작별 인사를 하셨다.

[언제든 다시 오시게]

  다른 어르신들은 이른 새벽부터 정자에 나와 기다리신다. 차를 운전하여 서서히 마을을 빠져나가 아직 열리지 않은 슈퍼를 지나 도로에 들어섰다. 저 앞에 걸어가고 있는 도토리묵 장수가 보였다. 그는 이미 알고 있는 듯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하여 차를 세우지 않고 빵..소리만 내고 지나쳤다. 모두에게 인사를 다 마쳤다는 생각에 가속 페달을 밟았다. 아내는 학마을을 기억하려는 듯이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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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figjekd 2009-10-08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결국 권선생은 그런 선택을 했군요..진작에 똑바로 했으면 좋을텐데..아쉽네요
 

  아침에 일어나 수로 너머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말소리가 들렸다.

[권선생, 천렵갈텐가?]
[지금요?]
[응. 왜 바빠?]
[아니요, 별일 없어요]
[그럼 안사람과 빨리 나오시게]

  옆집에 놀러오신 황주 할매가 재촉 하신다. 아내는 잔다고 누워있다가 들었는지 방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천렵? 그게 뭐에요?]
[피크닉이라고 해야하나? 가까운데 놀러가는거야]

  아내는 어르신들의 뒤를 다소곳이 따라가면서 소곤소곤 물었다. 서울 토박이다보니 여기 말을 몰라 애먹는 일이 많다. 얼마 전에 메주를 만들 때였다. 잘 삶은 콩을 절구에 넣고 찧는데 청산 할매가 아내에게 “오봉”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아내는 머뭇거리다가 처음에는 쓰레기 봉투를, 두 번째는 막대기를 들고 갔었다.

[쟁반 가져오라는 말이야]

  학마을 사투리로 오봉이 쟁반이다. 사실 나도 아주 어렸을 때나 들은 말이라 처음에는 그게 뭐였지..하면서 고민했다. 그래서 아내는 오늘도 눈치를 보면서 알려달라고 옆구리를 찔렀다.

[색시가 모르는 게 당연한데 뭘 그렇게 주눅들어있나]

  청산 할매가 돌아보며 웃으신다. 아내는 다른 할매는 어려워해도 청산 할매와는 잘 지내는 편이다. 돌아가신 장모님이 생각난다고 하면서..나도 청산 할매랑 있다보면 종종 어머니가 떠오르니 다들 느끼는 건 비슷비슷하다.

[어디로 가는데요?]
[폭포]
[폭포? 학마을에요?]
[그럼! 여기도 폭포 있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릴 때이긴 하지만 8살까지는 학마을 주변을 안 다녀본 곳이 없다 싶게 돌아다녔는데 폭포는 없었다. 내가 떠나있던 20여년 사이에 인공 폭포라도 생겼다는 말인가.

[항상 있는 건 아니야. 딱 요맘때만 있어]
[그럼..신기루 같은 건가요?]

  이번에는 아내와 내가 웃었다. 학마을은 딱히 폭포라고 내세울만한 곳이 없는데 일년에 한 번, 혹은 2-3년에 한번 정도 폭포가 생겨난다고 한다. 특히 올해처럼 장마가 확실하게 있었을 때는 한 달 정도 존재하는데, 산꼭대기에 쌓인 물이 쏟아져서 폭포라고 부른다. 아마도 세상이 변해가면서 자연도 바뀌어 이런 현상이 만들어졌음에 틀림없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하지 않던가.

[와! 멋지네요]
[암. 천렵을 가려면 이런대로 와야 제 맛이지]

  석청을 따러 가던 길에서 왼쪽으로 꺾어져 울창한 숲 속으로 들어서니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관광 명소가 될 정도 웅장하지는 않으나 뒤로는 동굴 입구가 보이는 호젓한 폭포다. 할매들은 널찍한 바위에 짐보따리를 푸신다. 어떤 분의 짐에서는 고기와 채소가, 또 누군가는 막걸리를 꺼내신다. 아내와 나는 아무것도 가져온 게 없어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아따, 한 동네 사는데 뭘 그런걸 따져. 즐겁게 먹고 놀면 되지]

  우리네 민족은 풍류를 알고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라 고된 농촌 생활에서도 이렇게 천렵 갈 시간을 만든다. 가을은 추수를 하고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하느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바쁜데도 구경삼아 나오니 어르신들의 마음 씀씀이가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선생, 요즘 복잡하지?]
[할매..그게..]
[미물도 다 존재하는 이유가 있거늘..하물며 사람 일이란 건 더 큰 뜻이 있는 법이니까 쉬엄쉬엄 가시게]

  스스로도 혼란스러운데 무슨 말을 하겠냐 싶어 할매에게 상의를 안 했는데 어쩌면 전부 아시는 듯 느껴졌다. 오랜 세월을 사셔서 그런가, 가끔 앞일을 내다보시는 느낌도 들고 해답을 알고 계시는 데 말씀 안 하시는 듯 하다.

[하트 모양이에요. 잠자리들이 저런 모습인 건 처음 봤어요]
[짝짓기 중이야. 쟤네들을 떼어놓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배가 불러와 산책 삼아 폭포 주변으로 걸어갔다. 폭포의 뒤쪽으로 동굴 입구가 보여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서다. 그리로 가려면 바위 몇 개를 지나고 숲 길을 따라가는데 그 길목에서 고추잠자리가 짝짓기 하는 걸 발견했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에는 또래 친구들과 제일 많이 한 일 중의 하나가 짝짓기하는 잠자리 떼어놓기였다. 수컷의 긴 꼬리가 암컷의 등 위로 굽어지고, 암컷은 약간 떨어진 상태로 자신의 꼬리를 수컷의 배 쪽으로 붙이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찌그러진 하트를 옆으로 눕혀 놓은 듯하다. 하여 도시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면 재미있어 한다.

  동네 개구쟁이 중 한 명이 날쌔게 손을 움직여 그들을 잡았었다.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떼어놓자고 말한 뒤 암컷의 꼬리를 잡아당기자 깨 같은 작은 알들이 떨어졌다, 마치 물고기들이 산란을 하는 것처럼. 아내에게 말로 설명하느니 직접 보여준다고 손으로 잡아챘다. 어린 시절의 날쌘돌이가 실력 발휘를 해 한번에 잡으니 아내는 감탄 한다. 어깨를 으쓱하며 꼬리를 떼어내고 알을 보여주니 또 터져 나오는 탄성.

[맑은 알이 실처럼 붙어서 내려오네요. 너무 예뻐요!]

  난 참 단순하다. 누군가가 이런 존경의 눈초리로 바라보면 기분이 좋아지니.

[아저씨는 정말 모르시는 게 없어요!]

  아내의 표정과 눈빛에 너구리 아가씨의 말이 떠올랐다. 헛기침을 한 뒤 잠자리를 놓아주고 다시 걸어 바위 두 개를 지났다. 폭포물에 머리와 어깨가 좀 젓었지만 몸을 비틀어 등을 바짝 대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폭포를 뚫고 들어오는 햇볕이 전부여서 동굴 안은 침침하다. 눈을 몇 번 깜박이며 어둠에 익숙해지고서야 안이 생각보다 넓다는 사실을 알았다. 안 쪽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항아리들이 놓여 있었다. 다가가 뚜껑을 열어보았다. 개망초 잎 말린 것, 개다래로 담근 술, 신선목 등이 가득히 담겨 누군가가 정성껏 모아둔 귀한 약재들이다.

[참 부지런하네요. 이정도로 모으려면 하루 이틀로 될 게 아닌데요]

  아내는 개다래주를 손가락에 묻혀 살짝 맛을 보며 감탄한다.

[여기서 뭐하세요?]

  동굴 안 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너구리 아가씨다. 그녀는 바구니를 옆에 끼고 나와 아내를 쳐다보았다.

[동굴 구경 왔다가..언제 왔니? 못 본거 같은데..]
[반대편에도 입구가 있어요. 그리로 다니니까 마주칠 일이 없네요]

  그녀는 다가와서 바구니에 약재들을 담는다. 아내는 그 옆에서 가만히 바라본다. 

[개다래주는 아저씨꺼에요. 언제든 드시고 싶을 때 가져다 드세요]
[내꺼?]
[네. 술 좋아하시는 거 아니까..기왕 먹는거라면 몸에 좋은 거 드세요]   

  너구리 아가씨는 아내에게 목례를 하고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 나보다 더 인간적이다.

  집에 돌아와 이런 저런 자질구레한 일을 한 뒤 저녁을 먹었다. 아내는 잔다고 들어가고 나는 마당을 빙글빙글 돌다가 개다래주 생각이 났다. 곧 야심한 밤이라 숲속을 혼자 가는 게 꺼림칙하지만 술꾼이 달리 술을 마다하겠는가. 잠깐의 고민스러운 마음을 접고 빈 병과 술잔을 담은 가방을 매고 길을 나섰다. 밤의 숲은 낮과는 다르다. 고고하고 아름답지만 어둠 속 어딘가에 두려움을 일으키는 소리들이 가득 존재한다. 시골에서 자란 나도 처음 듣는 소리들이 등 뒤에서 다가올 때면 온 몸의 털이 일어나는 기분이다. 아무 것도 없음을 확인하려고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며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갔다.  

[윽~]

  뒤를 돌아보던 차에 발을 헛디뎌 왼발을 삐끗했다. 다시 걸음을 내딛는데 발목이 시큰하다. 괜히 나왔다고 자책을 하는 와중에 비가 온다. 한 방울, 두 방울 이마에 떨어지니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아픈 발목을 끌며 바위 두 개를 지나 폭포 쪽으로 걸어갔다. 손전등을 가져올 생각도 못한 내 성격을 탓하며 더듬더듬 기다시피 전진했다. 손끝에 차가운 항아리가 만져진다. 하나, 둘, 셋. 낮에 본 그 항아리들이 맞다. 뚜껑을 더듬어 열었다. 확 밀려오는 잘 익은 술 냄새. 바닥에 앉으며 안도의 한숨을 나왔다. 심하게 긴장했던 몸이 술 한 잔에 풀린다.

[어이~나도 한 잔 줄텐가?]
[나도]
[나도]
[나도]

  어둠 속에서 처음 듣는 목소리가 술을 청한다. 술잔이 하나뿐이라고 대답하니 둔탁하게 잔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밤에 여기서 뭐하시나요?]
[천렵나왔어]
[아..네..]

  너무 깜깜하여 그들의 생김새를 전혀 알 수 없다. 너구리들이 둔갑했거나 또 다른 동물일거라고 추측할 뿐이다. 다만 그들은 비를 맞았는지 축축하고 찬 느낌이다. 술을 따라주느라 살짝 스칠 때면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갑다.

[안주도 없이 먹으려니 심심하네]
[나도]
[나도]
[나도]

  누군가 한 명은 제대로 말을 하는데 나머지는 메아리처럼 같은 말만 한다. 조용히 입 다물고 마시기만 하자니 할매들이랑 먹던 때가 그립다.

[우리..안주 삼아 먹을까?]
[나도]
[나도]
[나도]
[네? 뭘 먹으려고요? 술 뿐인데요]

  바닥에 술잔 내려놓는 소리. 그리고 스스스스 다가오는 느낌. 사람이란 어떤 감이란 게 있는 법이다. 왠지 모르지만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옆으로 몸을 굴렸다.

[에이..]
[나도]
[나도]
[나도]

  그들의 안주감은 나인게 분명하다. 술잔이 반대편으로 굴러가는 소리를 들으며 뒤로 기어나갔다. 다가오는 그들을 신경쓰며 서둘러 나오다보니 폭포를 피하질 못하고 떨어져버렸다.

[아저씨? 정신 좀 차리세요]

  물에 빠지는 순간 허우적대다가 기억을 잃었던 것 같은데, 너구리 아가씨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들어 쳐다보니 나는 바위에 누워있고 그 옆에 너구리 아가씨가 있다. 푹 젓은 얼굴과 팔에 생채기가 잔뜩 나있다. 그녀의 다리에선 피도 흐른다.

[큰일 날 뻔 했어요. 제가 못 봤으면 아저씨는 영영..]
[고맙다]
[이 밤에 여긴 왜 오신거에요? 위험하게..]
[그러게..너 다리는 괜찮은 거니?]

  피를 닦아주려고 일어나는데 왼쪽 숲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너구리 아가씨의 언니가 나타났다. 다가와서는 말없이 아가씨의 팔을 잡아끈다. 가기 싫다는 아가씨와 가야한다는 언니의 신경전을 보자니 미안한 기분이 가득하다. 결국 너구리 아가씨는 언니의 손에 끌려 다리를 절뚝이며 사라졌다. 가면서도 아저씨 다음에 봐요..를 외친다. 점점 내게 다가오는 그녀에 대해 고민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숨을 안 쉬는 자들이요]

  몇일 뒤에 만난 도토리묵 장수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신기한 인물이니 알고도 남음이라 역시나 간단명료하게 대답한다.

[여긴 정말 알다가도 모를 곳이네요]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지. 여긴들 특별할라고..]

  도토리묵 장수는 팔다 남은 거라며 내 손에 따뜻한 호빵을 쥐어주고 갔다. 한 낮의 더위에 파는 호빵이라니..그는 또 뭘까..싶다.  

 -------
 작가의 한마디: 제가 실수로..제 글을 지웠습니다..하여 다시 올립니다.--; 읽어주시고 추천해주신 분들께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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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2009-10-07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님~어쩌다 그러셨어요.ㅎㅎ 제가 늦게 들어와서 다행이네요. 추천하고 갑니다~

최현진 2009-10-08 15:3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제가 오타를 발견하여 수정을 한다는 게 그만 삭제를 했네요..덤벙대서...

한낮의사람 2009-10-07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렵..처음 듣는 단어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았어요. 오봉도요. 문득 작가님의 나이가 궁금합니다. 이런 단어들을 아시는 걸 보면..생각보다 많이 드셨을지도?

최현진 2009-10-08 15:33   좋아요 0 | URL
인터넷 검색까지..감사합니다^^
 

  학마을에는 어르신들의 99%가 여성이다. 나를 제외하면 버버리 할배가 유일한 남자이고, 없어선 안 되는 분이다. 송이, 석청, 산삼, 학알 등을 계절에 맞춰 가져오시니 학마을 분들이 연세에 비해 건강하신 게 버버리 할배 덕이다.

[이 꽃은 이름이 뭔가요?]
[꽃무릇이야. 상사화라고도 하지]

  할배와 석청을 따러 갔다 오는 길에 진홍색의 꽃밭을 만나 몇 개 가져왔다. 야생화를 좋아하시던 어머니가 생각나 키우고 싶어 뿌리째 캐오느라 애먹었다. 그래도 심어놓고 보니 매력적이다. 진홍색의 꽃송이가 줄기 끝에 달렸고, 꽃잎은 심하다싶게 뒤로 젖혀져 볼수록 기이하면서도 아름답다. 청산 할매는 석청을 맛있게 드시면서 말씀하셨다.

[권선생, 오늘 부터는 해지면 밖에 나오지 마시게]
[왜요?]

  할매가 뭐라고 대답하시는데 정확히 들리지 않는다. 다시 물어보려고 하니 바쁘시다며 사라지셨다.  

  시골은 도시보다 계절이 조금 앞서는 느낌이다. 도시라면 아직은 여름의 따뜻함이 가득 남아 있을 텐데, 학마을은 아침 저녁으로 계절이 바뀌어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할매가 나다니지 말라고 하셨지만 바람 쏘이고 싶은 유혹이 뭉클뭉클하다. 하여 부엉이 소리가 들리는 밤이 되자 참지 못하고 방을 나섰다.

[선배..오랜만이에요]
[수진이?]
[네. 술 한 잔 하고 싶은데..주실 수 있으세요?]

  이 늦은 밤에, 첩첩산골 학마을에, 3년 전에 죽은 후배가 버젓이 나타나니 안 놀래면 정상이 아니다. 수진이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떴는데 지금 내 앞에는 평소에 보던 고운 옷차림으로 다소곳이 서 있다. 게다가 술이라고는 한 잔도 못하는 사람이 갑자기 청하니 더 당황스러웠다.

[술 한 잔 마시면 원이 없을 것 같은데..이렇게 세워두실 건가요?]

  자세히 얼굴을 보았지만 무섭거나 요기가 느껴지진 않는다. 그저 슬프고 배고픈 표정이다. 잘 알던 후배이고 죽은 게 안타까워 술 한 잔의 인심이 뭐 어렵냐..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넌방은 불꺼진지 오래라 조금 소리가 난들 나올 것 같지 않아 대청마루에 작은 상을 펴고 김치에 막걸리를 내왔다. 내 기억 속의 수진이는 한 잔만 마셔도 바로 곯아떨어지는 소녀였는데 한 병을 다 마시도록 술꾼처럼 캬..소리를 내며 벌컥벌컥 들이킨다. 어찌나 잘 마시는지 냉장고의 막걸리 4병을 싹 비웠다.

[여기서 잔거에요? 술 마시고?]

  울산댁네 장 닭의 시끄러운 기상 소리 때문에 눈을 떴다. 굴러다니는 막걸리병이랑 바닥에 떨어진 김치 조각이 제일 먼저 보였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내려다보는 아내. 퉁퉁 부은 느낌이라 거울을 보니 학마을에서 제일 얼굴이 크신 슈퍼 주인 할매보다도 더 부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번으로 끝나질 않는다. 수진이를 만난 다음날 밤에는 어머니가 오셨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버지, 할아버지, 친하지는 않았으나 한 때 동료였던 사람까지-물론 죽었다, 교통사고로-찾아와 술을 청한다. 덕분에 아침이면 얼굴이 대보름달이다.

[요즘은 막걸리 먹으러 왜 안 와? 권선생 못 보니까 심심한데..]

  세제가 떨어져 사러 갔더니 슈퍼 주인 할매가 한 마디 하신다.

[밤마다 술 먹는데 낮에까지 마시면 버버리 할배처럼 술꾼 되게요]
[버버리는 먹어야 일할 힘이 나니까 그런 거고]

  버버리 할배는 낮에도 술, 밤에도 술이시다. 얼마 전에 석청을 따러 위험한 바위 위를 걸어갈 때도 술을 드신 상태라 조마조마했었다. 내가 그렇게 마셨다면 몸 가누기가 쉽지 않을 텐데 할배는 기운차게 잘 가신다, 바위 위를 펄펄 나시면서. 덕분에 우리 부엌 귀퉁이에는 석청꿀을 담은 항아리가 존재한다. 3년간 잘 숙성하면 세상에서 이 보다 더 귀한 물건은 없다고 하시니 욕심이 생겨 흐뭇하게 항아리를 바라보았다.

  다음날 그 맛이 궁금해 할배를 조르니 숨겨두신 항아리를 보여주신다. 뚜껑을 연 순간 꼭 된장처럼 불순물이 가득 떠있어 실망스러웠다. 이걸 어떻게 먹어..라는 생각 때문이다. 할배는 내 마음을 아시는지 씩 웃으시고는 국자로 불순물을 밀었다. 그 순간 와..하는 감탄사가 나왔다. 불순물 밑에 검정에 가까운 진한 갈색 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약..이..야..우리..어..매..가..]

  할배는 어렸을 때부터 천식이 심했는데 3년 숙성의 석청을 매일 먹으면서 싹 나았다고 하신다. 할배가 준 석청 그릇을 들고 집으로 걸어가는데 너구리 아가씨가 수로 앞에서 기다리는 게 보였다.

[꿀이다!]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멀리서부터 냄새가 다가오잖아요. 진짜 맛있겠다]

  입맛을 다시며 눈을 반짝이는 모습에 그릇을 내밀었다. 살짝 찍어 입에 넣으면서 또 다시 감탄사. 음식이란 자고로 맛있게 음미하면 그걸 보는 이 또한 군침이 도는 법이다. 하여 우리는 수로 앞에 서서 석청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저는요?]

 아내를 잊고 있었다. 그녀가 언제부터 우리를 봤는지 모르겠으나 찌푸린 표정이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하다. 너구리 아가씨와 있으면 아내를 잊어버리니 이런 미안한 일이 생긴다.

[오늘 밤에도 술 마실 건가요?]
[글쎄..아마도 그렇겠지]
[얼굴이 안 좋은데..그러다가 큰일 나겠어요]

 내가 봐도 요즘 말이 아니다. 술에 절어서 몸에 술 냄새를 달고 다닌다.

[할매, 저 좀 살려주세요]
[꽃무릇 때문인기라]
[네?]
[그 녀석이 죽은 이들을 끌고 오니 마음 약한 권선생이 술 안주고 배기나]
[그럼..꽃을 싹 뽑아버리면 되겠네요]
[꽃무릇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 한번 뿌리 내린 곳에는 계속 자라거든. 그 꽃이 활짝 피면 술 한 잔 청하는 망령들이 나타나서 지옥꽃이라고 부르는거야. 그걸 이쁘다고 가져온 게 잘못이지]

  절망적인 기분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일어서는데 비오는 날 꽃들을 마당 한 가운데로 옮겨 심으라고 하신다.

  할매와 이야기한 뒤 일주일이 지났다. 그 동안 비는 한 방울도 오지 않았고, 밤손님만 매일 나타났다. 어젯밤에는 황주 할매의 어머니까지 만났다. 막걸리의 “막” 자만 들어도 속이 울렁거리는 시점이 되어서야 비로써 비가 내린다.

 [여기면 될까요?]
 [그래]

  나와 아내는 우비를 입고 꽃무릇을 옮겨 심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파고 한 사람은 심고 손발이 척척 맞는다. 비는 점점 세지고 꽃무릇을 다 옮겨 심을 때쯤엔 수로를 정비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학마을의 불도 다 꺼질 때쯤에야 마당 한 가운데에 꽃무릇들이 자리를 잡았다.

 [이제는 뭘 해요?]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말라고 하셨어]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창으로 꽃무릇을 내려다보지만 칠흑의 어둠이라 붉디붉은 꽃잎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저기쯤에 피어있겠구나 짐작할 뿐이다. 사선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고 있는데 하늘이 번쩍한다. 이어 천둥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깜짝 놀라 창에서 떨어졌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데 다시 들리는 천둥소리. 이번엔 귀청이 찢어질 것 같다. 아마도 이 근처인 듯 하다. 숨을 몰아쉬는데 번개가 떨어졌다, 그것도 우리 마당에..지진만큼이나 놀라운 상황이다. 침을 꿀꺽 삼키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청산 할매가 나가보지 말라고 하신 게 천둥번개 때문이라면 어떻게 아신 걸까?

[꽃무릇이 부른거야]
[네?]
[비가 오는 날이면 꽃무릇은 번개를 불러. 그걸 맞아야 꽃이 지거든]
[그래요?]

  이불 속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는지 환하게 밝은 아침이었다. 방문을 열고 뛰어나갔더니 꽃무릇이 있었던 자리가 엉망이다. 청산 할매와 아내가 그 옆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한다.

[왜 꽃무릇이 사찰에 많은 줄 아나?]
[...]
[부처님이 망령들을 위로하시려고 꽃무릇을 모으시는 거야. 그들을 축복하시면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거든. 미물도 다 쓸모가 있는 걸 그분은 아시는 거지. 나무관세음보살]

  할매의 말처럼 내가 가져온 꽃무릇들은 산 속 사찰의 뒷마당 쪽에 군락을 이루었었다. 이래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세상에 대해 배워야한다. 그래도 덕분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나서 행복했다. 

------------- 

글쓴이의 한 마디: 꽃무릇입니다.  절에 가시면 꼭 찾아보세요. 이 꽃이 있는 절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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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2009-10-06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상사화..본 적있어요. 저는 그냥 예쁜 꽃이라고 생각하고 지나갔는데..이런 이야기가 되는군요. 재미있게 읽었어요. 추천하고 갑니다~

우주바다 2009-10-06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석잘보내셨어요..어제까지 쉬고 나오니 선생님글을 몇편 연달아 읽일수 있어 흐믓함에 따뜻한 커피까지 마시며 느긋해져 있습니다..꽃무릇사진있음 하나 올려주세요..나리꽃처럼 생겼나 싶기도 하고..마음씀이 예뻐서 점점 너구리아가씨에게 마음이 가는거겠죠..어쩌시려나..

최현진 2009-10-06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요일까지 쉬시다니..부럽습니다~ㅠ.ㅠ..저의 추석은 조용했어요. 집안에 아프신 분이 생겨서 시골에 가지 못했거든요.
사실..꽃무릇과 상사화는 약간 다릅니다. 꽃무릇은 우리나라산이고 상사화는 일본산이라고 들은 기억이 나요. 하지만 저희 시골이나 대부분의 분들이 꽃무릇을 상사화라고 부르고 저도 그렇게 입에 익어서..^^ 사진 가지고 있는 거 올릴께요. 별로 예쁘게 찍히지는 않았어요.
 

  몇일동안의 폭우로 학마을 곳곳에 문제가 발생했다. 버버리 할배네는 모내기를 해놓은 논에 물이 넘쳐 일 년 농사를 망쳤고, 청산 할매네 축사는 뒷 산에서 무너져 내린 흙 때문에 허물어졌다. 게다가 수로도 곳곳이 넘치고 막혀 물이 범람했다. 마을 복구 작업이 오늘에야 시작이 되었는데, 문제는 학마을 주민의 99%가 여자라 나와 버버리 할배가 바쁘게 뛰어다녔다. 또다시 비가 쏟아지면 이제는 마당 정도가 아니라 집 안으로 들어올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권선생, 욕 봤어]

  마지막으로 개울 쪽에서 연결되는 수로를 확인하고 올라오는데 슈퍼 주인 할매가 공짜 씨껍데기 막걸리를 따라주었다. 파김치처럼 푹 젓고 지쳤을 때 마시는 차가운 술 한 잔. 이건 억만금을 주어도 못 바꿀 맛이다.

[크..할매, 고맙습니다]
[아녀. 또 일할게 있남?]
[청산 할매네 축사를 고쳐야 해요]
[고맙구만, 고생해]

  축사는 원래 통나무로 지었던 건물인데 나무를 새로 구하기가 어려워 부러지지 않은 것은 재활용하기로 했다. 나는 버버리 할배의 가르침에 따라 축사를 고치려고 벽에 매달렸다. 한 쪽에서는 할배가 작두로 짚을 자르신다. 작년에 잘 말려둔 것인데 다행히 비에 젖지 않았다. 이 짚과 흙을 섞어 바르면 짚이 마르면서 흙과 엉켜 단단하게 고정된다.

[이정도면 될까요?]
[아녀, 권선생 키 만큼 올려야돼]

  계속 손을 위로 든 채 일을 하려니 땀이 비 오듯 흐르고 팔이 부르르 떨린다. 9살 무렵부터 대도시에서 살아 힘든 일을 한 일이 없으니 60이 넘은 어르신보다도 먼저 지치는 문제가 생긴다.

[부석사 쪽도 물난리가 났데요]
[거기만 그렇겠나, 상석리는 과수원이 망가졌어]
[오다 보니까 뜬 바위 뒤 쪽도 난리가 아니드만]

  너구리 아가씨가 괜찮을지 걱정된다. 아무래도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아내가 저 만치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둘이 잘 되가는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저 사람이 아파서 요양 겸 같이 있는 거죠]
[색시가 참하게 생겼는데, 웬만하면 권선생이 지고 들어가. 사는 게 뭐 있남. 자식  낳고 살면 정도 생기고 그러는 거지]

  어르신들은 우리의 이혼 사유가 일반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신다. 만약 우리에게 아이가 있었다면 이혼을 안 했을까? 아내는 자살 시도를 포기 했을까? 나도 모르겠다.

  마실 나온 아내와 함께 마을을 돌아본 뒤 집으로 들어갔다. 적당히 뭔가를 먹도록 차려주고 나서 산길로 들어섰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또 다시 비가 쏟아지려는지 잔뜩 흐리다. 부석사 근처는 할매의 말대로 산이 무너져 내린 곳도 있고, 물에 쓸려 구멍이 생긴 곳도 보였다. 우리나라에서 목조 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절이라 여기저기 문제가 많이 있을 것이다. 다들 거기에 매달려 있으니 뒤쪽으로는 사람이 안 보인다.

  너구리 아가씨를 큰 소리로 불렀다. 몇 번을 불렀는데도 아무 기척이 없어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여기는 웬일이세요?]

  한참 만에 보는 얼굴인데 수척하고 지쳐 표정이 어둡다.

[괜찮은가 보려고 왔어]
[정직하게 말하면..나빠요, 상황이..]

  한 때는 동굴의 입구였던 부분이 무너져 내린 흙과 나무들로 가려져 있었다.

[언제 이렇게 된 거야?]
[모르겠어요. 언니네서 좀 전에 돌아와보니 이래요]

  너구리 아가씨는 혼자 해보겠다고 애를 쓰고 있었던 듯 옷이 흙 천지였다. 손이 엉망인 게 장갑도 없이 일을 한다. 나는 화가 나서 다그치듯 말했다.

[왜 이런 험한 일을 혼자 하려고 해? 아직 비도 완전히 안 그쳤는데 더 큰 사고라도 나면 어떻하려고!]
[도와달라고 할 사람이 없어서..]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한참동안 땅을 보던 너구리 아가씨는 작게 중얼거렸다.

[부탁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왜?]

  입을 꼭 다물고 있는 모습에, 나는 한숨을 쉰 뒤 바닥의 나무를 들어 옮겨 놓았다. 흙을 떼어내고 온갖 부스러기들을 치웠다. 그녀도 옆에서 함께 일을 한다. 깨금발일 때의 움직임, 끙끙거릴 때의 소리, 땀이 흘러 손으로 닦아내는 모습이 일을 하는 내내 눈에 들어왔다. 그녀도 나를 힐끔거리는 게 느껴진다.

[쉬어가면서 해]
[도자기들이 망가졌을까봐 걱정되요. 엄마가 주신건데..]

  너구리 아가씨에게도 엄마가 있다, 내게 어머니가 있는 것처럼. 이럴 때면 그녀가 사람으로 느껴진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거나, 수줍게 말하거나, 엄마를 그리워하는 음성을 들으면 정말 그녀가 사람인 것 같고, 사람이면 좋겠다는..그런 생각들이 파도처럼 다가온다. 이런 마음은 친구가 되는데 도움이 안 되니 어디론가 보내버려야 하는데 매 순간 사라졌는가 싶어 안도하면 어느새 옆에 있다. 

[위쪽이 뚫렸어요!]

  겨우 머리 하나 들어갈 정도인데도 너구리 아가씨는 진심으로 기뻐한다. 항상 긍정적이고 감사해하는 성격이라 뭔가를 같이 하면 나도 즐겁다.

[뭐가 보여?]
[아니요, 완전히 깜깜해요] 

  더 빨리, 더 열심히 일한다. 내가 벗어준 장갑이 큰지 추스르면서도 이리저리 움직인다.

[도와드릴까요?]

  갑자기 뒤에서 젊은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풍년 기원 의식 때 본 사람들이다. 내가 대답하기 전에 너구리 아가씨가 손을 흔들며 고마워하니 머쓱해진다. 장정 셋이 달려들어 도와주니 10배는 속도가 났다. 동굴의 입구가 점차 모습을 드러내 너구리 아가씨의 표정이 밝아졌다. 마침내 동굴의 입구를 대각선으로 가로막고 있던 큰 나무 조각을 떼어내니 생각 했던 것보다는 안이 덜 망가졌다.

[고맙습니다]

  젊은 너구리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언제든 부르라고 한 뒤 사라졌다. 나도 그만 가야하는데 너구리 아가씨를 두고 가기가 내키지 않아서 어정어정 거렸다.

[배고프지?]
[네]
[뭐 먹으러 가자]

  비가 완전히 그쳤지만 어두운 밤이다. 부석사 쪽으로 걸어가면서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맞잡은 손의 온기를 느끼고 가끔씩 들리는 작은 한숨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8시가 넘었지만 부석사가 한창 수리중이어서 인부들이 밥을 먹고 쉴 수 있도록 음식점 하나가 문을 열어두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도토리묵을 시켰다.

[오늘은 어디서 잘거니? 동굴 안이 좀 그렇던데..]
[언니네 갈거에요]
[여기서 멀어?]
[제 걸음으로 20분 정도요]
[데려다 줄게]
[혼자갈 수 있어요]

  도토리묵을 두 접시 째 시켜 먹으면서 우리는 옥신각신한다. 

[혼자 갈래요]
[안 돼]

  음식점을 나오자마자 도망칠까봐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집에 가보셔야 하잖아요. 아픈 사람은 혼자 있게 하면 안 돼요]
[자고 있을 거야. 신경 쓰지 마]

  숲속에 들어서자 그녀는 멈추어 서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왜?]
[이러면..친구가 되기 힘들어요]
[오늘 밤은 친구하지 말고 내일부터 하면 되]

  또 다시 한 숨. 이제야 더 이상 타박하거나 거절하지 않는다. 벌레 소리가 없는 길을 걸어가자니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말한다.

[혹시 걱정하셨어요?]
[그래. 넌 덤벙거리잖아]
[언니도 아저씨도 다들 걱정하게 만들었네요. 어쩌면 하늘에 있는 엄마도..]
[분명 그러실 거야. 물가에 내 놓은 애 같아서..]
[애라니요! 저 어려 보여도 여자라고요!]
[그래 여자다! 누가 뭐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더니 싫다는 듯 째려본다.

[제일 처음에는 아저씨가 거인 같이 커보였어요]
[그래?]
[근데..푸쉬쉬쉬쉬..김이 빠지더니 지금은 요만해져서..]
[요 녀석이..]

  김이 빠지고 키가 점점 작아지는 흉내를 낸다.

[아저씨..그 분 사랑하세요?]
[예전에는..사랑했었어]
[지금은 뭐에요?]
[연민, 슬픔. 여러 가지가 얽힌 마음..]
[사람이란 복잡하네요. 우린 좋다, 싫다면 되는데..]
[그러 길래 뭐 하러 나랑 어울리니..]

  언덕길을 통과하자 저 멀리 불빛이 반짝인다. 내 눈에는 안 보이지만 언니가 문 앞에 나와 있다고 하면서 혼자 간다고 손을 놓았다.

[여러 가지로 감사했어요]

  허리를 굽히며 꾸벅 인사한다.

[그런 말은 안 해도 되]
[먼저 갈게요.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그녀는 돌아서서 뛰어간다. 나는 가만히 보고 있었다. 내 손에는 아직도 그 작은 온기가 남아 있어, 한 번 더 돌아봐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내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멈추어 서서 나를 쳐다본다. 이렇게 바라본다는 것은 좋아한다는 뜻일까..혹시나 사랑하고 있다는 말일까..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하다.

  마침내 그 희미한 불빛마저 완전히 사라지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집으로 돌아가려고 발길을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아무도 없는 어둠 속을 간간히 돌아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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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사람 2009-10-05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석이 지나서 좀 더 마음이 부산한 날입니다. 작가님도 많이 바쁘시지요? 다음 글 기다릴께요~

최현진 2009-10-06 10:13   좋아요 0 | URL
추석에 시골에 내려가질 못해서..이번엔 좀 여유있게 보냈어요.

유영 2009-10-05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지나가다 보았는데, 너구리 아가씨가 정말 너구리인가봐요! 신기하네요.^^

최현진 2009-10-06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석 잘 보내셨어요? 앞으로도 즐겁게 읽어주세요^^
 

  [개 사~개 사~]

  다시 복날이 왔다. 도토리묵 장수가 올 해도 개를 사고파는 걸 보니 학마을에 온지 어느새 1년이 되었음이 실감난다. 복 날의 공포에서 비껴간 장군이는 더 늠름해졌지만 여전히 수로에 빠져 나의 구조를 기다린다. 이 상황에서 예전에 비해 좋아진 건 예쁜이와 새끼들이 먼저 알려주러 온다는 사실이다.

[그 분..또 안와요?]

  봄에 내가 소백산에서 캐와 마당에 심어 놓은 야생화들을 쳐다보던 아내가 물어본다.

[오라고 해서 같이 저녁 먹을까?]
[지난번에 물고기 잡자고 했는데..]

  도토리묵 장수 이야기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우리의 고기 파티에 참가해 같이 먹은 날,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왔더니 아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무표정하지만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아내는 싱글벙글이다.

[물고기?]
[물 반, 고기 반이라고 하던데요]

  지난해에 지진으로 마당에 생겼던 연못을 말한다. 그건 잠시 나타났다 사라졌는데 그럼 올해도 또 온다는 소린가보다.

[언제라고 말 안 해?]
[조만간 이라고만..]
[그럼 기다려봐. 약속 지키는 사람이니까 낚시가자고 할 거야]

  워낙이 도깨비불보다도 더 번쩍거리는 사람이니 우리가 잠자는 와중에 불쑥 올 수도 있다. 혹은 지금이라도.

  비가 며칠 째 내린다. 몇 해 동안 지리멸렬하게 조금씩만 와서 올해 부터는 더 이상 장마 예보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기상청이 무색하게시리 대단한 비다. 그것도 올 해는 국지성 호우가 심하여 그저께 중부권에 시간당 300미리의 비가 올동안 여기는 화창했는데, 그 다음엔 장마 기단이 내려와 영주에 호우 경보가 발생했다. 방 안에 있기에는 덥고 습한데다 꿉꿉한 느낌이 들어 대청마루에서 비 구경 중이다.

[낚시 가시겠소?] 

  내 말처럼 도토리묵 장수는 예고도 없이 나타났다. 손에는 수제 낚싯대 3개와 통을 들은 게 아내 뿐만 아니라 나도 데려갈 모양이다. 낚시는 아내가 좋아하는 일이다. 조용히 사색 할 수 있다는 데, 나는 활동적인 스포츠가 더 좋아 같이 낚시를 간 적은 한 번 뿐이다. 그 때도 나는 수풀 속을 탐험하고 물고기 잡는 일은 전적으로 아내의 몫이었다. 도토리묵 장수를 본 아내는 밝은 얼굴로 우비를 입고 따라나섰다. 그가 왜 안 움직이냐는 듯 쳐다보고 있어 나도 덩달아 갔다. 그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앞장섰다. 정확히는 아내가 떠드는 거지만 나는 신기해서 귀를 기울였다. 아내는 이곳에 내려온 뒤로 입을 여는 일이 거의 없었고, 그나마 말을 해도 한 옥타브 낮은 목소리로 감정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웃고 떠드니 신기하다. 도토리묵 장수가 나에게 없는 무엇인가가 있어 아내를 바꾸어 놓은 듯해 고맙기도 하고 묘하기도 하다. 문득 일전에 너구리 아가씨가 풍년 기원 의식에 왔던 사람이랑 이야기 하던 걸 지켜보던 때가 생각했다. 그 순간에는 기분이 나빴다. 한 대 살짝 때려주고 싶기도 하여 술로 풀었다. 그리고 집으로 가려는 너구리 아가씨를 잡아 앉혔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느낌이 아니다. 묘하기는 하지만 나쁘지는 않은 정도..딱 그것이다. 이제 내가 아내에게 갖고 있는 감정은 보살펴주고 싶은 오빠이거나 부모, 혹은 동료이리라. 마음이라는 게 물처럼 흐르는 지, 지금 떠오르는 얼굴은 다른 사람이다. 다른 존재. 친구가 되겠다는 누군가.

[좀 흔들릴 테니 균형을 잘 잡으시게. 혹시 떨어지게 되면 잡아먹히지 않게 조심하고]

  어디를 가나 했더니 집 뒤의 저수지다. 그곳은 벚꽃이 만발할 때면 절경 중의 절경이지만 배를 띄울 정도의 깊이는 아니다. 그런데 벚나무에 줄을 맨 작은 배가 떠 있다. 비가 제법 거세서 그런지 출렁인다. 아내는 좋아서 냉큼 배 위로 뛰어 올랐다. 가을이면 갈치 낚시를 가자고 조르던 사람이니 이정도 흔들림에는 멀미도 안 하지만, 나는 올라서는 순간 구역질이 났다. 잘 먹은 저녁을 게워내고 있자니 아내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노래를 부른다. 낚시에 문외한인 나도 아는 한 가지는 물이 잔잔해야 고기가 잘 잡힌다는 사실이다. 과연 이 비에 잡힐 게 있나 싶은데 물 반, 고기 반인지 쑥쑥 잘도 올라온다. 도토리묵 장수와 아내는 번갈아 한 번씩 통에 담았다. 물고기 풍년이고 대박이다.  

[어어어...] 

  갑자기 배가 크게 휘청인다. 머리를 내밀고 토하던 나는 균형을 잃고 물속으로 빠졌다. 평소의 저수지라면 성인 남자의 가슴 정도의 깊이인데 아무리 발버둥을 처도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 사람의 두려움이란 급격하게 자라는 성질이 있어서 나는 1초, 2초 시간이 흐를 수록 죽음의 공포를 맛보았다. 게다가 무엇인가가 내 발 주변을 맴도는 듯하더니 칭칭 감는 느낌과 함께 바닥으로 끌려들어간다.

[살려..살려..] 

  있는 힘껏 발버둥을 치지만 점점 밑으로 내려가면서 숨도 차고 힘도 빠진다. 

[이봐..내 목소리 들려?] 

  눈을 크게 떠서 내 발을 잡아당기는 놈을 확인하던 찰라에 머릿 속으로 도토리묵 장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내 옆에 없는 걸 아는데도 공명을 하듯 말이 다가왔다. 숨이 턱까지 차는 걸 느끼며 발을 압박하는 이상하고 거대한 물고기를 두 손으로 잡았다. 좀 전에 잡은 은색 물고기가 20년 동안 자란 모습 같다. 길이도 내 키 만하다. 이 와중에도 뭐..이런게 다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손 놓으시게] 

  또다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 어처구니 없지만 혹시나 그가 이 물고기로 변신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숨을 참을 수 없어 온 몸의 힘이 빠져나가며 자연스럽게 손을 놓았다. 그와 동시에 입으로 물이 들어온다. 몸이 두둥실 흘러간다. 내 옆에 떠 있는 은색 물고기를 본 게 마지막으로 세상은 암흑으로 변했다. 

[어이~어이~] 

뺨이 아프다. 누군가가 있는 힘껏 치는지 맞을 때마다 몸이 흔들린다. 

[괜찮아요?] 

  아내의 목소리다. 눈을 떠보니 나는 바닥에 대자로 누워있고 두 사람은 양 끝에서 내려다본다.  

[제가 죽은거 아니었나요?]  

[죽기는..잠이 들었었나보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내나 도토리묵 장수나 표정이 없어서 진위확인이 어려웠다. 하여 찜찜하지만 입을 다물고 배에서 내렸다.   

[혹시 지난번에 먹었던 그 물고기들인가요?]
[그렇지]

    비가 쏟아져 장작불을 지필 수 없어 부엌에서 프라이팬에 굽는 데 그는 팔짱을 끼고 구경한다. 다 구워진 물고기들을 접시에 담아 대청마루에 앉았다. 냄새를 맡았는지 어느새 자리를 잡고 기다리는 장군이와 예쁜이에게 한 마리씩 주고 도토리묵 장수와 아내가 먹는다. 잠시 후 청산 할매가 왔었지만 그냥 돌아가셨다. 나는 막걸리 잔을 들고 아내가 맛있게 베어 무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개망초가 있으니 먹어도 괜찮아요]

  너구리 아가씨는 예전에 그렇게 말하며 용감하게 잘 먹었다. 맛있게 싹싹 베어 물고는 오물오물 씹어 꿀꺽 넘겼다. 지금 여기 있다면 아마 제일 좋아하면서 신나게 먹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마리 가져다주시게]

  그는 갑자기 자기 앞에 놓여있는 물고기를 밀었다. 내가 쳐다보자 웃으며 말한다. 그가 저렇게 부드러운 건 처음 본다.

[나누어 먹어야지, 이웃이랑]

  나는 두 사람에게 맛있게 먹으라고 말한 뒤 몇 마리를 비닐봉지에 담아 길을 나섰다. 아내는 손까지 흔들어준다. 도토리묵 장수와 함께 있으니 걱정하지 말자고 생각하며 수로를 건넜다. 지난번처럼 동굴을 못 찾고 헤매다 그냥 오게 되면 그 곳에 두면 된다. 아마 냄새를 맡은 너구리 아가씨가 나와서 가져갈 것이다. 기왕이면 직접 주고 싶지만, 친구가 되자고 한 이후로는 어떤 얼굴로 보아야할지 모르겠다.

  일전에는 차를 타고 부석사에 가서 뜬 바위 뒤쪽으로 걸어갔다. 그 이후로 너구리 아가씨가 가르쳐준 지름길을 익혀두어서 이번에는 숲 속 길을 통해 동굴 근처까지 5분여 만에 도착했다. 비가 내리고 있어 칠흑처럼 어두운 탓에 전보다도 더 찾기가 어렵다. 후각이 발달한 동물도 아니니 기억에 의존해야 하는데 그 나무가 그 나무 같고, 그 길이 그 길 같다. 표식을 해두지 않은 게 안타깝다. 20분이 넘도록 근처를 헤맸는데도 동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비닐봉지를 나뭇가지에 걸어두고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오니 저녁 식사가 모두 끝나 말끔히 정리되었고 아내도 자는지 건넌방은 어두웠다. 나는 우비를 걸어두고 대청마루에 앉았다. 내 몫으로 그릇에 담긴 물고기 한 마리가 노릇노릇하게 보인다. 배는 매우 고프지만 거대한 물고기와의 기분 나쁜 기억 때문에 참고 자기로 했다. 방으로 들어가 불을 끄고 누웠다. 문풍지를 떼어낸 창문이 바람에 흔들린다. 하늘엔 검은 구름이 가득하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 창밖을 잠시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자요?]
[아니. 왜?]
[배가 너무 아파서..]

  얼마가 지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아내가 배앓이를 호소했다. 나는 우비를 건네주며 그릇을 가지고 나무 밑으로 가라고 알려주었다. 아내는 내 말이 이해가 안 되는지 가만히 서 있었다. 다시 그녀에게 지난번에 내가 겪은 일을 말해주고 참으면 점점 더 아프다고 충고했다. 그래도 아내는 가지 않고 구급상자에서 활명수를 찾다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가장 어두운 나무 밑으로 달려갔다.

[이제..어떻게 해야 되요?]

  방 안의 불빛이 대청마루까지 비쳐 그릇 속에서 팔딱이는 은빛 물고기들이 보였다. 나는 저수지에 가서 놓아주었다. 아내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나를 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아마 내가 이곳에 와서 처음에 느꼈던 생각과 감정들이 왔다 갔다 할 것이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아내의 몫이다.  

  아침이 되자 비가 그쳤다. 이래저래 피곤했는지 울산댁네 장 닭의 기상 소리를 못 들었다. 책상 위의 시계가 10시를 가리키는 걸 보고 대청마루로 나오니 아내가 쟁반을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고구마와 도토리묵, 그리고 개망초의 어린잎을 말린 게 있었다. 너구리 아가씨가 와서 주고 갔다고 한다. 물고기 잘 먹었다고 전해달라는 말과 함께..나는 가라앉은 기분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안 먹어요?]
[응]

  아내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 듯 고구마와 도토리묵을 먹는다. 말라 색이 연해지고 비틀어진 개망초의 어린 잎을 보고 있자니 왠지 그녀가 수로 너머에 서서 나를 부를 것만 같다. 나는 아무도 서 있는 앉는 곳을 잠시 바라보다가 방 안으로 들어가 다시 누웠다. 손에는 개망초를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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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윤 2009-10-01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진 때 생긴 연못이 참 부러웠는데..저수지 안에 생겼으면 눈에 안 뜨이니 아깝네요..

happy 2009-10-01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해서..이 밤에 들어왔습니다^^; 마지막이 묘하게 여운이 남습니다..개망초를 든 권선생..추석 잘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