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눈이 내린다. 토요일이라 일찍 하교하는 모습을 창에서 바라보고 있으려니 눈발이 날렸다. 눈을 본 아이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팔짝팔짝 뛴다. 강아지를 한 부대는 모아놓은 듯 서로 부딪히고 넘어지며 눈을 즐긴다.
[저런 모습을 보면 아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귀여워요. 애들은 역시 애들다워야..]
옆자리의 강선생이 커피 잔을 건네주며 한마디 한다.
[선배~오늘 나랑 술 한 잔 할래요? 부장한테 왕창 깨졌어요]
출판사 후배가 전화 너머에서 심통을 부린다. 내가 원룸으로 옮긴 후부터는 종종 들르더니 오늘은 술을 가져 오겠다고 한다. 나 역시 술 한 잔이 그리워 그러라고 하자 후배가 들고 온 비닐봉지에서 막걸리가 나왔다.
[너 원래 이런 거 안 마시잖아]
[예전에는 먹고 나면 두통이 심했는데..요즘은 제법 괜찮더라고요. 다음날 속도 편하고. 그래서 즐겨 마셔요]
밥그릇에 찰방찰방하게 따라주는 걸 보니 슈퍼 주인 할매의 씨껍데기 막걸리가 생각났다. 한 입 마셔보니 맛도 그만 못하다.
[형수님은 이제 좀 괜찮으세요?]
[퇴원했어, 엊그제. 학마을로 내려갔지]
[이젠 좀 살만하시겠어요]
[내가 언제는 죽겠다고 했나]
[말은 안하지만 얼굴에 다 쓰여 있었죠]
나는 말없이 막걸리를 한잔 더 들이켰다.
[근데 왜 형수님은 선배의 시골로 가신거에요?]
[거기..만날 사람이 있어서..]
[오호]
후배는 눈치가 빠르게도 알아들었다는 콧소리를 냈다. 아내는 지난주에 병원을 퇴원했다. 나를 보고는 환하게 웃으며 내려간다고 비행기 흉내를 냈다. 영주에는 비행기가 안 뜬다고 대답하자 옆구리를 한대 친다. 아내와 나는 가벼워진 마음으로 웃었다.
[이제야 진짜 당신을 놓아주고 새 출발 하네요]
[그동안은 뭐 붙잡기나 했어?]
[없잖아 그런 게 있었죠. 이제야 말이지만 그 아가씨랑 약탕기 앞에 있을 때 당신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더 다가가지 말라고요]
이제야 그녀가 친구가 되자고 한 이유를 알게 되자 마음이 아리다.
[안 보고 싶어요, 그 아가씨?]
[응]
[멀었다, 멀었어]
아내는 코미디언의 말투를 흉내 내더니 택시를 불러 세웠다. 타기 직전에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파이팅이라고 외쳤다. 그렇게 아내를 보내주고 나는 서울에 혼자 남았다.
[선배, 무슨 생각해요?]
[아..아무것도..뭐라고 말했니?]
[책 하나 더 쓰라고요. 선배가 은근히 글재주가 있어요. 학생들 사이에서 반응이 좋아요. 선배 책을 선정하는 학교도 많고요]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이거 네 덕에 발견했네]
[그럼 크게 한 턱 쏘세요!]
술이 부족하다며 후배는 후다닥 나가 막걸리를 세 병 더 사왔다. 모두 비우고 나니 졸음이 몰려와 후배가 가는지 확인도 못하고 잠이 들었다.
눈이 내린다. 내가 살던 집 마당에도, 수로 앞에도, 저수지에도. 하얗게 눈이 싸여간다. 청산 할매가 장군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마당 어디쯤엔가 서 있다. 대청마루에서 울음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너구리 아가씨가 무릎을 양 팔로 감싸고 앉아 운다. 눈이 점점 더 쌓여간다. 대청마루 근처까지 올라오고, 좀 더 있으니 너구리 아가씨의 무릎까지 도달한다. 그리고도 계속 내린다. 마침내 그녀의 모습과 집이 완전히 눈 속에 잠겼다. 울음소리는 눈을 뚫고 들려온다. 그 애달픈 소리에 나도 눈물이 흐른다. 차가워진 뺨에 체온보다 더 높은 눈물이 느껴진다.
몸부림을 치다 눈을 떠보니 창밖은 아직도 눈이 내린다. 기상특보인가 하는 게, 켜져 있는 티비에서 연신 떠들어댄다. 경상북도에는 눈이 엄청나게 내려서 고립된 마을이 많다고 말한다. 너구리 아가씨의 동굴은 괜찮을까 조바심이 난다. 학마을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했지만 눈 때문인지 연결되지 않는다. 급한 마음에 잠바를 입고 지갑과 핸드폰만 들고 나섰다. 버스터미널에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내려가야 하는데 갑자기 지연되거나 취소된 버스들 때문에 웅성거린다. 나는 영주행을 알아보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였다. 다행스럽게도 버스가 안동까지는 간다고 하여 무조건 표를 끊고 올라탔다. 안동에서부터는 택시를 타던지 그것도 어려우면 걸으면 된다. 예전에도 눈 속을 걸었으니 두 번째는 두렵지 않은 법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차 안에는 계속 라디오 소리가 울렸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기상에 대한 안내와 당부의 말, 도로의 사정이 실시간으로 내 귀에 들어온다. 아내의 핸드폰은 여전히 불통이다. 따뜻한 차 안의 열기에 깜박 잠이 들었다. 여러 가지 골치 아프고 복잡한 꿈만 꾸다보니 목도 뻣뻣하고 몸도 불편하다.
[안동 버스터미널입니다]
기사의 말대로 차창 너머에 반짝이는 터미널 건물이 보였다. 한밤중이지만 오고가는 사람들과 도착하는 버스들 때문에 환하다. 시내로 연결되는 반대편 문으로 나서니 눈발이 엄청나다. 동장군이 제대로 납시었는지 땅은 얼어붙었고 하늘은 여전히 눈을 쏟아 붙는다. 택시를 잡아타자는 생각에 정류장으로 뛰었다.
[영주 갑시다]
[영주 어디요?]
[학마을..그럼 영주 시내라도..부탁드립니다]
기사가 고개를 흔들어 시내로 최종 합의를 보고 의자에 등을 붙였다. 조심스럽게 주행한다. 마치 자전거로 영주까지 가는 듯하다. 언제 도착하려나 싶어 나도 모르게 손을 주물럭거렸다.
[손님, 포기하시죠. 못 넘어 가겠습니다]
영주 시내를 지나 운 좋게도 부석사 근처까지 왔다 싶었는데 굽이굽이 고개 앞에서 결국 택시가 멈추었다. 저런 곳은 위험하다며 다시 돌아가자고 한다. 나는 말없이 돈을 꺼내 건네주고는 내렸다. 바람이 매섭고 눈이 화살처럼 떨어진다. 택시 기사가 뒤에서 뭐라고 하지만 어차피 잘 들리지도 않아 모른 척 하고 고개를 걸어갔다. 이렇게 걷자니 너구리 아가씨의 언니를 만났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아내에 대한 어정쩡한 마음과 너구리 아가씨에 대한 인정할 수 없는 감정 사이에서 시간만 흘려 보내며 결정을 미루다가 결국 그녀를 버렸다. 그렇게 서울에 왔으면 잘 살아야 하는데 아내가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에도..가을이 지나 겨울이 올 동안에도..정리는 커녕 그리움만 깊어졌다.
후회와 자책으로 멍하니 걷다보니 굽이굽이 언덕길과 내리막길을 지나 학마을이 보인다. 초입에 도달했을 때 다리는 이미 눈에 쌓여 흔적도 없다. 다만 지금은 너구리 아가씨를 확인하는 게 먼저라 다리로 들어서는 대신 지름길을 찾아 도로를 계속 내려갔다. 길이 자취를 감추어 이런 날은 인가로 내려오는 동물들을 막고자 옹노를 설치해놓은 어르신들이 있을지 모른다. 동물들은 자신이 다니던 길로만 다니기 때문이다. 눈이 쌓여도 우직하게 다닌다. 어쩌면 너구리 아가씨도 그렇게 돌아다닐지 모른다.
부석사를 지나 동굴이 있는 쯤에 도착했다. 벌써 새벽녘이 되었는지 회색빛 구름 속이 차츰 밝아온다. 의외로 이번에는 동굴을 한 번에 찾았다. 입구가 훤하게 보일 정도로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다가가서 확인했더니 동굴은 바로 앞까지 눈이 쌓여 있고, 안은 비어 아무 것도 없었다. 너구리 아가씨가 살지 않았던 듯 먼지만이 켜켜이 앉아 내가 들어서는 순간 확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나는 그녀가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내가 돌아보면 항상 있던 그 곳에서 손을 흔들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오만과 이기심이 만들어낸 멋대로의 상상이었을 뿐, 그녀는 떠나고 없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돌아 나왔다.
[아저씨는..볼 때마다 새로운 사람. 궁금해지는 사람이에요]
그 날의 그 기억이 스쳐지나간다. 마음은 사람이든, 사람이 아니든 같은 곳을 볼 수 있다. 바라본다는 건 사랑한다는 것..너구리 아가씨는 항상 나를 보면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내 마음 안에 아내에 대한 연민이 있고, 걱정을 핑계로 그 손을 놓지 못하는 걸 이해했다. 또한 너구리 아가씨에게 끌려도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 그녀를 위한다는 변명으로 도망치는 비겁함도 탓탓지 않았다. 사람인 나보다 더 깊고 푸르다.
눈을 해치고 집에 도착하니 다락에 두었던 화로가 대청마루에 나와 있고 아내는 어디서 구한 것인지 묘하게 생긴 판초 모양의 윗옷을 걸쳤다.
[어쩐 일이에요, 연락도 없이?]
[전화가 안돼서..별 일 없는 거야?]
[아..]
그녀는 이 동네가 연락두절 상태라고 설명한다. 다른 할매네도 전부 그런 상황이라 대도시에 사는 자식들이 찾아왔단다. 나는 따뜻한 화롯가에 앉아 눈 쌓인 마당과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도토리묵 장수를 만난다고 장화를 신고 가버려 혼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요즘 매일이 행복하다. 사람과 있는 게 더 없이 좋고, 학마을에서 죽을 때까지 살고 싶단다. 언제 우울증을 앓았는지도 까마득하다며 활달하게 웃는다. 도토리묵 장수가 과연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럽다고 했더니 그녀는 상관없다고 덧붙인다. 마음이 맞고 함께 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났는데 그런 문제로 포기하기엔 아깝지 않냐며.. 아내가 저벅저벅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 말을 곱씹었다.
나는 다음 날 영주까지 걸어가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를 탔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조용히 떠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