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부지런히 집안 대청소를 한다. 평소에는 한 번도 안 치우던 건넌방 문을 활짝 열어놓고 환기를 시켰다. 물걸레를 들고 3번이나 훔쳤는데도 여전히 먼지가 나온다. 사실 돌아온 뒤에 청소를 한 번도 안 했으니 이정도인 게 감지덕지다. 나는 내 방과 대청마루, 부엌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건넌방은 없는 곳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그런데 아내가 내려오기로 해서 불편하지 않게 준비를 해야 한다.

  어제 저녁에 아내는 잠시 내려가 있고 싶다며 전화가 왔다. 이 마을에 있는 빈 집에 살겠다고 하는 걸 건넌방을 쓰라고 말했다. 그녀에게 어떤 마음이 남아있어서라기 보다는 아직 안 좋은 상태의 사람을 귀신 나올 것 같은 빈 집에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선생도 참 신기한 사람이야]
[네?]
[둘이 그래 살꺼면 다시 합치지 뭐땀시 각 방이야]

  청산 할매는 안 쓰는 이불과 요를 가져가 쓰라며 나를 부르시고는 한마디 하셨다. 어르신들에게는 이상한 상황임을 알기에 그냥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점심이 지나고 나니 택시 소리가 나며 집 앞에 아내가 내렸다. 무거운 짐 가방을 건넌방에 넣어주었다. 장모님이 돌아가신지 한 달도 안 되었는데 얼굴 살이 많이 빠져 아파 보였다.

[고마워요]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되니까 편하게 해. 요나 이불은 옆집 할매껀데 혹시 싫으면 내일 장에 가자]
[아니에요. 엄마꺼랑 비슷해서 좋아요. 의사가 공기 좋은 곳에서 좀 쉬라고 해서 내려온 거예요]
[그래 잘 왔어. 푹 쉬면서 머릿속을 비워. 저녁에 고기 구워 먹자]

  아내는 흐릿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결혼 2년차쯤엔가 우울증이 매우 심해졌다. 그녀는 여리고 감성적인데다 소심한 구석이 있어 감정 기복이 잦았다. 결혼할 때는 그것이 우울증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채로 그저 잠시의 일이겠거니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가볍게 생각하고는 거의 매일 늦게 들어왔다. 그런데 의사의 말이 방치를 한 게 화근이란다. 중학교 교사라는 직업이 편해보여도 학부모나 아이들에게서 받는 스트레스가 상당한 데 나는 그것을 바로바로 떨쳐내는 반면,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아내는 마음속에 쌓아 놓아 결국 극단적인 일을 시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때쯤 우리의 결혼도 더 나아갈 길이 없을 정도로 표류 중이었다. 이런 저런 치료 프로그램을 다녀도, 부부관계 개선 프로젝트를 참가 해봐도 그녀는 그 상태, 그대로다. 뭔가 더 깊은 혹은 근원적인 부분에서 병의 뿌리가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결국 1년 후에 이혼을 했다. 그녀가 강력히 원하여 이루어진 일이라지만 나는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나쁜 일은 같이 오는 법인지 교사로서 큰 치명타가 되는 학생의 사고와 죽음이 이어져 모든 책임을 지고 사직한 후 떠돌다 학마을에 내려온 것이다.

  찐 고구마를 먹으라고 방문을 열었다. 역시 그녀는 곤히 잔다. 우울증 약이란 게 부작용으로 잠이 오는지 가끔 잘 시간이 아닌데도 시체처럼 늘어진다. 그녀의 머리맡에 고구마가 담긴 쟁반을 두고 나왔다. 대청마루에 앉아 수로를 바라보았다.  

[이거 안사람 줘. 기가 허하면 아픈 법이야]

  청산 할매는 산에서 캐온 것이라며 알싸한 향이 나는 약초를 주고 가셨다. 5시간 정도 잘 다린 후 먹으면 한결 몸이 가뿐해 진다고 하셨다. 나는 다락에서 약탕기를 찾아와 깨끗이 씻어 약을 달이기 시작했다. 한약방에 들어가면 나는 냄새가 솔솔 풍긴다. 책을 들고 그 옆에 있자니 어머니가 주시던 활명수와 환약이 생각났다. 6살 무렵에 배앓이를 할 때 활명수와 환약을 먹었다. 그 톡 쏘는 맛이 기가 막히게 좋아 그 뒤로 그게 먹고 싶으면 거짓말로 아프다고 바닥을 뒹굴었다. 입으로는 활명수, 활명수 했으니 거짓말을 아실법도 한데 막내인 나를 끼고 사셨던 어머니는 그 때마다 꼭 활명수를 구해오셨다. 그 당시 스케치북이 5원이고 활명수가 25원을 했는데도 형들 준비물은 못 사줘도 반드시 활명수는 가져오셨다. 며칠에 한 번꼴로 활명수를 입에 달고 사니 그것 때문인지 배가 뽈록 나왔다.

[저녁 먹어야 하니까 일어나]

  해가 넘어가는데도 소식이 없어 흔들어 깨웠다. 약에 취한 듯 몽롱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 겨우 정신이 들었는지 일어났다. 그녀는 수돗가에서 나물을 다듬고 나는 상을 차렸다. 고기를 구우려 불판을 데우고 한 점씩 올려서 굽자니 그녀도 과거가 생각나는 모양이다.

[우리 예전에 종종 해먹었는데..그 때 같아요]

  봄밤에 우는 이름 모를 풀벌레들의 소리와 함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한다. 마치 아프지 않았던 시절로 돌아간 듯하다.

  다음날 우리는 영주 시내에 다녀왔다. 얼마 동안 있든 기본적인 도구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김에 대형마트까지 가게 되어 차에서 내릴 때는 비닐봉지가 3개로 불었다. 아내와 내가 마당으로 들어서는 데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 너구리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소리를 들은 듯 벌떡 일어난다. 나는 마당에 잠시 멈추어 섰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옆으로 다가가 비닐봉지를 내려놓았다. 아내는 목례만 하곤 방으로 들어갔다. 너구리 아가씨는 아내의 방문이 닫힐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쳐다보았다. 내가 냉장고에 사온 것들을 넣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가자 따라와 도와준다. 

[같이 사는 거예요?]
[응]
[두 분..다시..결혼하세요?]

  너구리 아가씨는 설거지를 해준다며 등을 돌린 채로 물어본다. 나는 냉장고 문을 잡은 채 잠시 머뭇거리다가 중얼거리듯이 대답했다.

[지금은 저 사람이 아프기 때문에 도와줘야 해]

  어떤 말이 들려올 지 기다렸지만 더 이상의 말이 없었다.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사라지고 부엌엔 나 혼자였다.

  아내와 함께 생활하게 되면서 패턴이 바뀌었다. 울산댁네 장 닭이 와서 울고 나면 날이 더워지기 전에 아내와 마실을 나간다. 그리고 약초 같이 진한 향의 산나물과 함께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에 다시 숲 속 산책을 간다. 잠들기 전에 방에서 혼자 반주 한 잔. 이것이 요즘 모습이다.

  너구리 아가씨는 그 이후로 몇 일간 안 오다가 어제 약초가 가득 든 바구니를 가져왔다. 아내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며 자신이 다려준다고 약탕기를 손에서 뺏어갔다. 그녀가 약탕기 앞에 앉아 있는 걸 보는데 아내가 건넌방에서 나왔다. 아내 역시 약탕기 근처에 자리 잡았다. 두 여인은 마당에, 나는 대청마루에 앉은 채 시간이 흘러간다. 침묵이 무거운 건 나만의 일인지 둘은 시종일관 묵묵히 약탕기만 본다. 결국 나는 둘을 남겨두고 숲 속으로 도망쳤다. 다 허물어진 사당 앞에서 청산 할매의 어머니와 함께 도토리묵을 먹었던 희미한 기억을 곱씹었다. 바람이 서늘해질 때까지 나무 앞에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둘은 약탕기를 보고 있었다.

[식기 전에 드세요]

  너구리 아가씨는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약탕기를 내려놓고는 사라졌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또 아내는 왜 아무 말도 없을까.  

  너구리 아가씨는 다음날도 약초를 가져왔다. 또 그 다음날도. 그녀는 내가 감기에 걸렸을 때 매일 환약을 가져왔던 것처럼 아내를 돌보려고 노력했다.

  비가 조금씩 내리는 저녁에 너구리 아가씨를 마중하려고 같이 걸었다. 그냥 가게 두면 비를 맞을 테니 씌워주고 싶었다.

[언제까지 약초를 가져올 거니?]
[나을 때까지요]
[만약에..오래 걸리면?]
[계속 가져올 거예요]
[이건 감기 같은 게 아니야. 네가 떼어낼 수 없어]
[사람의 병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계속 아프시면 아저씨가 힘들잖아요. 두 분을 귀찮게 하려는 게 아니에요. 도와주고 싶어요]

  비가 좀 더 세졌다. 갈림길에 도착해 너구리 아가씨에게 우산을 주었다. 그녀의 모습이 멀어져 하나의 점이 될 때까지, 그리고 그 점이 공중에서 자취를 감출 때까지 바라보았다.

[아저씨..우리 친구할까요?]
[그럴 수 있겠어?]
[아마도요]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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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2009-09-30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주 들어오질 못해서..올 때면 몰아서 봅니다. 다음회가 궁금해집니다. 작가님 좋은 추석 되세요.

최현진 2009-09-30 13:10   좋아요 0 | URL
해피님도 추석 즐겁게 보내세요. 신종플루 조심하시고요.

우주바다 2009-10-01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내나 너구리아가씨나 참...
잘하세요..누구에게라도 마음을 주면 책임이 따르죠..그렇다고 마음을 어떻게할수있는건 아니지만..
추석잘보내세요..저는 안동에 내려갔다올꺼예요..

최현진 2009-10-01 15:08   좋아요 0 | URL
우주바다님...추석 행복하게 보내세요~~안동..다음에 놀러가야겠어요^^
 

   시골 사람들이 낮에 쉬거나 낮잠을 자는 건 뙤약볕에서 계속 일하면 일사병이 생기기 때문이다. 해서 새벽부터 점심 전까지 일하고, 밥 먹고 쉬었다가 약간 해가 늘어지면 다시 움직인다. 나도 그런 생체 리듬이 생겨 아침과 저녁에만 소소한 일들을 한다. 마당의 풀도 일어나자마자 뽑고, 글쓰기도 저녁에 한다. 지난번에 출판사 후배가 내가 쓴 중고등학교용 참고서가 반응이 좋다며 다른 것도 요청하여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혼자 꿈이긴 하지만 이러다 학습지 계의 대부가 될 날도 오지 않을까 한다. 아무튼 모두들 한 낮에는 쉬자는 주의다.

[덥다. 아이스크림이나 사 먹을까?]

  점심밥을 먹고 대청마루에 앉아 책을 보자니 7-8월도 아닌데 이상하게 후끈하다. 기상 변화가 학마을에도 전이되었나 봄이 봄 같지 않다. 목도 마르고 땀도 나 평소에는 거의 먹지 않는 아이스크림이 생각났다. 슬리퍼를 끌며 집을 나와 정자가 있는 큰 나무 밑을 지나가는데 할매들의 고스톱 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울산댁 할매가 돈을 땄는지 한 턱 쏘라고 하신다. 그 소리가 정겹고 즐거워 미소를 지으며 다리를 건너갔다. 우리 마을을 지나가는 왕복 2차선 도로 앞에 있는 슈퍼에 도착했다.

[할매, 아이스크림이 너무 없네요]
[이가 시려서 먹는 사람이 없어. 왜?]
[너무 더워서..]
[옛날처럼 아이스케키 장사가 오면 좋을텐데..]

  이 슈퍼는 이용하는 사람들이 할매와 할배 뿐이니 과자나 아이스크림 같은 대도시에서 잘 팔리는 품목이 거의 없거나, 있어도 유통기한을 지난 것 뿐이다. 그나마 젊은 사람인 나도 안 찾으니 슈퍼 주인 할매는 구색을 갖추기 위해 버리지 않고 두었을 뿐 딱히 새로 들이시려고 안하신다. 

[오늘이 초여드래니까 쪼매만 있어봐라. 식품 장수가 올꺼야]

  학마을처럼 산으로 둘러쌓인 동네에는 아직도 떠돌이 장수들이 온다. 내가 어릴 때는 봄가을엔 생선 장수, 여름엔 아이스케키 장수, 그리고 계절을 안 가리고 찾아오는 소금 장수와 엿 장수가 있었다. 어른들에게는 소금 장수가 제일이라지만 아이들은 엿 장수가 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달짝지근한 음식이나 과자가 원체 없다보니 엿 장수의 가위질 소리만 들리면 온 동네 문이 벌컥벌컥 열리며 다 뛰어나왔다. 숨을 헐떡이며 나타나는 애들을 보면 고무신을 들고 있기도 하고, 깡통부터 놋그릇까지 별것이 다 가져온다. 엿을 먹고 싶은 마음에 물물교환을 하려는 것이다. 엿 장수 할배는 나무통을 내려놓고 아이들이 가져온 물건을 감정하셨다. 몰래 들고 나왔구나 싶은 좋은 품목들은 도로 가져가게 하시고 없어져봤자 조금 두들겨 맞을 정도의 고물만 자루에 담았다. 그렇게 심사를 통과한 아이들은 웃고, 못 먹게 생긴 놈들은 표정을 구기며 엿 통만 바라본다. 엿 장수 할배는 드디어 아이들 앞에 넓고 평평한 나무통을 옮겨 놓으며 싱긋 웃었다. 아이들은 눈을 반짝인다. 할배는 허리춤에서 철주걱을 꺼내 긴 엿 위에 올린다. 그리고는 노래를 부르며 장단을 맞춰 짤랑거리던 가위로 철주걱을 탁탁 내리친다. 신기하게도 손이 움직이면 엿은 예쁘게 3-4등분이 난다. 서로 달라붙지 말라고 밀가루를 뿌려 손에 올려주면 아이들은 다시 한 번 환호성을 지르면서 숲 속 어딘가로 뛰어가 버린다. 물물교환이 끝났으니 도로 받아오라고 어른들이 야단치기 전에 엿을 먹어버리려는 심산이다. 나 역시 그렇게 우리 집의 온갖 물품을 가져다주며 엿을 엄청 챙겼다.

  나는 옛 생각에 빠져 슈퍼 앞에 내 놓은 의자에 앉아 오래된 듯 한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다. 단팥 맛이 난다. 점심을 막 넘어 해는 중천이고 길은 아스팔트의 지열 덕에 슬리퍼가 달라붙는다. 이런 날 식품 장수가 다닌다니 무엇을 가지고 올지 기다려진다.

  근처에 바닷가가 없는 학마을은 제사에 문어를 올리려면 버스를 타고 멀리 나가 사와야 했다. 일 년에 한두 번 먹어보는 문어는 쫄깃쫄깃하기로 치면 천상의 맛이었다. 그러나 그건 손꼽을 만큼 어려운 일이니 대신 생선 장수가 들릴 때 먹는 고등어가 최고다. 봄이나 가을에만 오는 게 생선은 쉽게 상하고 장수들이 가지고 다니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주로 간을 해 오래 보관이 가능한 생선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흔하고 싼 고등어는 학마을 인기 메뉴였다. 대부분의 떠돌이 장수들이 그렇지만 각 마을에서 선호하는 물품을 따로 포장하여 가지고 간다. 그 외의 다른 것들은 주문 받으면 적어두었다가 그 다음에 올 때 가져왔다.

[할매, 식품 장수가 오면 장사가 안 돼서 곤란하시잖아요]
[그래도 여기 없는 건 거기서 떼어다 팔아. 안 그럼 시내까지 나가야하는데, 힘들어]

  도로 저편을 바라보니 엄청나게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그 아른거리는 파도 속에 파란 트럭이 다가온다.

[저 오네]

  슈퍼 주인 할매가 더 반가워한다. 왠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버리고 일어나니 파란 트럭은 회전을 하며 마을 다리를 넘어섰다. 이런, 떠돌이 식품 장수는 도토리묵 장수다. 그는 정말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한다. 정자 앞에서 차가 멈추고 그가 내려서는데 옷차림도 주머니가 많이 달린 장수들용 조끼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오래도록 이 일에 매진한 사람으로 보이겠다. 그는 빨간 확성기를 들고 식품이 왔다고 구성지게 말했다. 집에서 한 숨 자던 할매들이 하나 둘씩 몰려든다. 지갑을 들고 있는 분도 있고 파와 감자 같은 것들을 들고 나오시는 경우도 있다. 봄에는 시골에 돈이 말라 어려울 때라 옛날 방식의 물물교환을 한다. 도토리묵 장수는 장부를 확인해가며 부탁 받은 물건을 꺼냈다.

[청산 할매는 물받이용 큰 대야, 맞죠?]
[고마워]
[칼은 울산댁 할매꺼네]

  다들 급식을 받듯이 기다리다가 돈을 주거나 가져온 농산물을 건넸다.

[굴비 좀 줘]
[요건 얼마야?] 

  그는 하나하나 요령 좋게 처리하며 트럭 여기저기에서 필요한 것들을 꺼내주었다. 1톤 트럭이라 크지도 않은데 천장에 간이 칸막이를 달아 100% 활용한다. 진짜 아주 오래 이일을 한 사람 같다. 나는 딱히 무엇을 사려하기 보다는 그 풍경을 구경하였다. 고작해야 20-30분의 일이지만 참 재미있다. 가끔 가는 장 구경보다 좋다. 그는 모든 할매들이 돌아가자 마지막으로 슈퍼에 도매 가격 정도로 넘겨주는 물품들을 내려놓았다.

[아이스크림 하나 먹을 텐가?]

  그는 땀이 흐르는 목을 수건으로 닦으며 슈퍼 안으로 들어와 앉았다. 아이스크림 대신 씨껍데기 막걸리 한 잔을 요청했다. 나는 청하지도 않았지만 건너편에 앉았다. 그는 나를 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묵은 안 팔아요?]
[그건 밤에 하는 일이지]
[밤에 누가 산다고..]
[거기도 사고..저기도 사고..살 사람이야 많지]

  우리는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즐겁게 한 잔씩 비웠다. 운전을 해야 하니 술은 이이상 안 먹겠다며 자르는 게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이제 어디로 가시나요?]
[너구리네..]
[거기도 물건을 팔아요?]
[사람 사는 동네나 거기나 먹고 쓰고 하는 건 같지. 궁금하면 따라오든지]

  너구리들도 애용한다는 게 호기심을 유발했다. 지난해에 너구리 아가씨네 언니가 학 알을 달라며 가져온 돈이 나뭇잎이었다는 게 밝혀져 기함을 토했었는데, 그런 나뭇잎을 받고 물건을 주는 건가 싶어 눈으로 보고 싶어졌다.

[안돼요! 안돼요! 이러지 마세요~]

  그와 함께 다시 트럭에 오르자 인기 가요라며 크게 틀었다. 산 속의 호젓한 길에는 인적이 전혀 없어 트럭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장윤정의 구성진 노래가 울려 퍼졌다. 나도 모르는 길들을 한 참 가더니 마침내 시동을 끄고 볼륨도 줄이며 멈췄다. 그는 빨간 확성기로 식품 장수가 왔음을 알렸다. 너구리들이 본래의 모습으로 기어올지, 사람의 모습으로 걸어올지 궁금해 하며 기다리자니 풀 숲이 흔들렸다. 나무 가지를 젓치고 오는 게 사람의 모습이다. 아마도 대낮이니 누군가 지나가다가 볼지도 모르겠다 싶어선가 옷도 계절에 맞게 입었다.  

[이건 지난번에 부탁한 양배추와 알타리 무]

  처음 보는 여자는 고맙다고 하며 팔뚝만한 더덕을 두어 뿌리 내놓았다. 또 다른 남자는 약초를, 할매는 상황버섯을 준다. 그들은 모두 돈 대신 구하기 쉽지 않은 상급의 채집품들로 물물 교환을 하고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한 군데만 더 가면 되]

  그는 받은 것들을 한 쪽에 넣더니 다시 트럭을 운전하였다. 10여분을 더 가 도착한 곳은 기와가 좀 엉성하긴 하지만 상엿집보다는 낮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여자 둘이 나왔다. 너구리 아가씨와 그 언니다.

[어! 아저씨~]

  그녀는 반갑다고 웃으며 인사를 하는데 뒤에 서 있는 언니는 고개만 까딱한다. 나에게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닐 테니 나 역시 눈만 마주치고 말았다. 

[왜 여기 있니?]
[언니네 집이에요. 어제 놀러 왔어요]

  언니는 집에 들어가더니 청자로 된 밥그릇과 뚜껑을 들고 나왔다. 이 집은 도자기로 물물교환을 하는 모양이다. 도토리묵 장수가 나에게 받아달라고 부탁하여 들고 있자니 참 아름답다. 밥그릇을 따라 음각으로 국화 문양이 보이고 그 주변에 가느다란 실선이 화려하게 살아 움직인다. 뚜껑에는 잠자리와 물고기가 반짝 거린다. 아마도 이름이 청자 상감 잠자리 물고기 무늬 밥그릇 정도 되겠다.

[그거 굉장히 예쁘죠? 전 불빛에 비추어 보는 게 좋아서 주기 싫은 데, 언니가 이번엔 비싼 걸 부탁했데요]

  너구리 아가씨는 발로 흙을 툭툭 치며 말했다. 마치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을 동생에게 줄 때 같다. 트럭에서 한참을 내려오지 않던 도토리묵 장수는 끙끙거리며 아이스박스를 내려놓았다. 그 안에 과연 무엇이 들었기에 힘 좋은 그가 고생하는지 궁금하다. 그에게 도자기를 건네고 살짝 열어보았다. 순간 얼굴에 비릿한 물이 튀겼다. 붉은 색과 흰 색이 섞인 화려한 비단 잉어들이다. 크기도 엄청 난 게 비싸보였다.

[이걸 왜?]

  어쩌면 실례일수도 있는데 호기심에 말이 툭 나와 버렸다. 

[형부 먹인데요]

  아하..사태 파악이 딱 된다. 언니가 얼굴을 붉히는 게 학 알 대용품이다. 아직도 발기부전이 해결 안 되었음이 분명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을 하더니 집 안으로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이번에는 혼자 하기 싫은지 도토리묵 장수가 도와달라고 하여 집 안으로 아이스박스를 들고 들어갔다. 너구리 아가씨의 집인 동굴과는 다르게 제법 살만하게 보인다. 남편이 너구리인지 다른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방도 있고 부엌도 보이는 게 일반 가정집이다.

[거기 놓고 가세요]

  쌀쌀하게 말하는 언니에게 너구리 아가씨가 눈을 흘기고는 나를 따라 문 밖으로 나왔다.

[언니가..요즘 예민해요. 다음 해가 지나면 애기를 못 났거든요]
[그런 게 정해져 있어?]
[음..나이란 게 있잖아요]

  어쩌면 너구리 아가씨도 보기와는 다르게 꽤 나이가 있을지도.. 나보다 더 먹었을까 싶어 그녀를 찬찬히 다시 보았다.

[왜요? 뭐 묻었어요?] 

[아니. 예뻐서..]

  얼굴을 확 붉히며 뒤로 물러서다가 엉덩방아를 찐다. 나는 웃으며 일으켜주었다. 이 정도의 농담은 정신 건강에 좋다고 속으로 변명하며, 돌아가자고 재촉하는 도토리묵 장수의 트럭에 올라탔다. 그녀는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 하였다. 마침내 일일 식품 장수 체험이 모두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찬 물로 몸을 씻으며 그가 준 문어를 초장에 찍어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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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di 2009-09-29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전에 바빠서 빨리 읽은 뒤에 다시 들어와 천천히 보았습니다.저 어릴 때는 그런 장수들이 없었지만 부모님께 들은 적이 있어서 기억이 새록새록 났습니다.
 

   3월이 좋은 이유는 천지에서 약동하는 기운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 집 마당의 잡초들도 다시 머리를 내밀었고, 수로 주변에는 봄나물들이 쏙쏙 올라와 신기하다. 집 주변에만 해도 쑥, 달래, 냉이, 땅두릅들이 있다. 특히 두릅은 땅에서만 나는 건 줄 알았는데 나무에도 순처럼 달려 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외국산 나무이거나 가시 없는 파인애플이 달렸다고 하겠다.

[저것도 두릅이라고요?]
[나무에 달린건 나무두릅이라고 해.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닭고기보다 더 맛나]

  학마을은 봄 동안에 매일 정자에서 점심을 같이 먹는다. 농사 준비를 하느라 바쁘지만 지금이 제철 나물을 먹기에 가장 좋아 어르신들이 돌아가며 밥상을 준비하신다. 사실 상차림이라고 부를 것도 없을 만큼 단출하다. 밥이랑 고추장, 된장찌개, 나물이 다다. 개중에는 나도 들은 적 없는, 도시 사람은 모르는 나물이 더 많다. 이곳에서 자랐지만 어릴 때는 놀러 다니느라 끼니는 후다닥 먹었고, 커서는 아내가 우울증 때문에 통원치료를 하느라 집안일에 신경 쓰기가 어려워 여전히 나물 이름은 알 기회가 없었다. 물어보니 오늘 점심에 먹은 것은 잔대나물과 비름나물이라는 데 좀 더 캐다가 먹고 싶다.

  점심식사 후, 버버리 할배는 논을 정비하러 가시고, 청산 할매는 감자랑 고추, 깻잎을 심을 밭에 이랑을 만들러 출정하셨다. 이랑이라는 게 어떤 작물을 심을지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기 때문에 초보자가 하기에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해보고서야 알았다.

[고추는 물을 싫어하니까 높게 만들어줘야돼, 권선생! 그게 아니야]

  허리가 굽으신 할매가 혼자 저 일을 언제 다 하겠냐 싶어 같이 나선 것인데 가만히 보니 오히려 일을 더디게 만든다. 내가 열심히 해 놓으면 할매가 엉덩이에 깐 포대자루를 밀고 따라와서 다시 손을 보시니 차라리 내가 없는 게 나을 성 싶다.

[할매, 저는 나물이나 캐오는 게 좋겠어요] 

[그래주면 저녁 밥 맛나게 차리지. 후딱 다녀와]

  역시나 그러시길 바라신다. 초봄이지만 햇빛은 여름 못지않게 따가워서 할매들이 쓰는 수건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쓰고 그릇과 과도를 들고 나섰다. 집 뒤의 사과나무 과수원은 천연의 나물 산이나 다름없어 멀리 가는 수고를 덜 한다. 슬렁슬렁 노래도 부르고 나를 따라오는 장군이와 장난도 치면서 걸어가는 데 저 위쪽으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뭐하세요?]  

[거름 주고 있소]

  도토리묵 장수다. 커다란 포대를 옆에 매고 저수지 근처의 나무 하나하나 마다 거름을 뿌린다.

[그냥 둬도 잘 자라지 않나요?]
[이렇게 하면 꽃과 열매가 더 풍성해져서 좋지]

  포대 안을 슬쩍 보니 겨우내 만들어둔 퇴비다.

[밤에 풍년 기원 의식이 있는데 오고싶으면 오소]
[어디서요?]
[다리 앞 울산댁네 밭]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 조상들은 초봄에 농사가 잘 되게 해달라고 중요한 의식을 치룬다. 일종의 춤인데 남자들만 참석한다고 귀띔해주었다. 남자들만의 의식이라..왠지 처음 보는 진기한 풍경일 거라고 상상하며 나물 캐기 작업에 들어갔다. 잘 자란 비름나물을 뽑으면서 내 어린 시절을 되짚어 보아도 그게 무엇인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왜 모를까하는 의아함이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어린 시절에 만난 사람이나 재미난 일들, 특별한 행사들은 빠짐없이 아는데 아무리 뒤져보아도 봄에 남자들만 참가한다는 의식은 처음이다. 결국 실마리를 찾아내지 못한 채 비름나물만 그릇에 가득 채워 집으로 돌아왔다.

  밤 12시가 되기 전에 목욕재개를 하고 얇은 홑옷만 위 아래로 입고 집을 나섰다. 학마을은 어르신들이 일찍 잠드시기 때문에 지나가는 동안 불 켜진 집이 없었다. 내 빠른 걸음으로 몇 분도 안 돼 밭에 도착했다. 도토리묵 장수를 비롯하여 처음 보는 남자들 세네 명이 삽을 들고 서 있다. 삽질을 하려는 구나..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달도 가려져 유난히 어두운 이 밤에 해야 하는 것인가 싶었다. 돌아보니 버버리 할배는 보이지 않았다. 나이가 드셔서 빠지셨는지 그들도 기다리는 눈치가 아니다. 내가 인사를 하자 다들 말없이 옷을 벗는다. 깜짝 놀라고 당혹하여 도토리묵 장수를 쳐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옷을 벗으라고 말했다. 모두들 웃옷을 다 벗었다. 하여 나도 벗었다. 그리고는 바지를 벗는다. 어쩔 수 없이 따라했다. 마지막으로 팬티도 발로 차버린다. 속으로 억..하는 심정이었지만 이제 발을 뺄 수도 없어 똑같이 발로 차서 한 쪽 구석에 떨어뜨렸다. 결국 우리는 알몸이 되었다. 나는 창피하여 몸을 어찌해야할지 난감했다. 목욕탕처럼 당연히 벗어야 하는 장소가 아닌데 건장한 남자들이 알몸으로 둥글게 서 있다는 건 초유의 사태인 셈이다. 그들은 전혀 창피하지 않은지 태연히 바닥에 내려둔 삽을 든다. 나는 가지고 온 게 없어 멍하니 보는데 도토리묵 장수가 한 개를 건네준다. 엉거주춤 삽을 잡고 눈치를 보았다. 그들은 흩어지더니 말없이 땅을 판다. 다섯 걸음 앞으로 가서 두 번 삽질을 하고, 또 다섯 걸음 내딛고 두 번 삽질. 도토리묵 장수 말처럼 일종의 춤이자 의식이다. 하지만 이것이 왜 풍년 기원 의식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동네의 밭이란 밭을, 논이란 논을 다 돌아다니며 삽질을 하고 보니 온 몸에 땀이 흐른다. 이래서 벗으라고 했나 싶다.

[밭에 씨를 뿌려준다는 의미요]
[씨?]
[작물이란 음양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니, 산신께, 하늘님께 좋은 씨를 많이 주시고 잘 자라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지]
[왜 알몸으로 합니까?]
[새 생명을 만들 때를 생각해보시오]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았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벗어두었던 옷가지를 들고 개울가로 향했다. 나도 그를 따라 갔다. 개울물에 발끝을 담그니 서릿발처럼 차가운 기운에 쭈뼛하는 느낌이 든다. 나는 들어가기를 주저하며 왼발, 오른발 번갈아 드는데 그는 차력사처럼 바닥에 앉았다. 다른 남자들도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도 닦는 스님의 자세로 물속에 입수했다.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발목 전체에 붕대를 감았다. 대신 그는 평평한 바위에 앉아 나를 쳐다본다.

[지난번에 감사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더니 발목의 붕대를 가리킨다.

[일전에..눈 내린 날..다친 저를 치료해주시고 보내주셨던 것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새 해 첫 날 우리 형제들의 옹노에 걸렸던 너구리였다. 그럼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니 다른 이들도 그런가 싶어 슬쩍 둘러보았다.

[네. 우리는 의식을 돕고자 내려왔습니다]

  마치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본 듯 대답한다. 벌써 3월인데 아직도 붕대를 감고 있는 걸 보니 그 때의 상처가 매우 컸음이 틀림없다. 나는 미안한 기분에 술 한 잔 하자고 초대했다. 그는 기쁜 표정을 가득 지었다. 이 근처에 사는 사람이나 짐승은 모두 술꾼들인지 술이라면 저렇게 행복해한다. 

   새벽의 해가 보일 무렵 울산댁네 장 닭이 신나게 울며 날아갔다. 좀 있으면 마을 어르신들이 나올 시간이라 하나 둘씩 옷을 입고 사라졌다. 나는 밤을 새고 나니 몸이 노곤하여 어서자자..라고 중얼거리며 집으로 걸어갔다. 국화 농사 때도 그랬지만 팍팍한 노동을 하고 나면 잠이 잘 오는 법이다. 머리를 베개에 댄 후 숫자도 세지 않았는데 수마가 무섭게 달려들었다.

[아저씨~]

  저녁이 되어 불판을 준비하고 상추랑 고추 등등을 수돗가에서 씻고 있는데 너구리 아가씨가 수로 너머에서 반갑게 손을 흔든다.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냉큼 들어온다.

[이거 제가 캔 거예요. 아저씨 좀 드시라고 가져왔어요]

  그녀가 내미는 그릇 안을 보니 나물들이 특유의 냄새를 풍기며 가득 담겨 있었다. 하루 종일 열심히 일 했는지 손이 새까맣다. 그래도 상대가 기쁘게 받아주면 고생이 다 잊히는지 내가 잘 먹겠다고 하며 받아들자 입이 귀에 걸리며 통통 뛴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너구리 아가씨가 귀여워져 안아주고 싶어졌다.

[내가 너무 일찍 왔소?]

  뒤에서 기침 소리에 이어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토리묵 장수와 너구리들이다. 그들을 처음 보는지 아가씨는 내 등 뒤로 숨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쇠고기를 꺼내오라고 부탁하며 그녀를 부엌으로 들여보냈다. 너구리들은 동료임을 한 눈에 알고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따라 관심의 눈길을 보냈다. 뭐랄까 묘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도 짐승처럼 영역 표시를 하지는 않지만 네 것과 내 것의 구분은 한다고 생각하자 문득 너구리 아가씨에 대한 그런 눈길들이 반갑지 않았다. 술을 빼고는 공유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건배!]

  발목을 다쳤던 너구리가 어색한 공기를 무마하려는 듯 잔을 들고 즐겁게 말했다. 다들 쨍 소리가 나게 잔을 부딪쳤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너구리 아가씨만 빼고는 다들 술과 고기를 번갈아 먹었다. 한 너구리가 그녀에게 속삭인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살짝 웃는 너구리 아가씨와 가까이 붙어서 소곤거리는 모습. 겉으로 보기에도 대략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게 제대로 사귀면 이치에 맞을 성 싶다. 머리에서는 그것이 최선임을 알지만 내가 먼저 알고 지냈다는 유아기적 욕심이 마음에 검은 구름을 드리웠다. 그래서 다른 날보다 술을 많이 마셨다.

  술이란 게 먹다보면 진화를 하는데 술 먹는 대상을 원숭이에서 호랑이, 뱀으로 만든다. 처음에 약간 들어가면 기분이 좋아 말도 많이 하고 퍼포먼스도 하다가 중간쯤 되면 으르렁 거린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몸을 배배 꼬며 땅을 기거나 누군가의 목을 확 졸라버릴 정도의 문제 행동이 나타나며 끝을 맺는다. 나는 지금 호랑이에 가까운 상태다. 평소 원숭이에 들어서면 딱 멈추고 잤는데 어찌된 셈인지 호랑이로 변신을 다 마치고 너구리 아가씨 옆에 앉아 있다. 도토리묵 장수가 슬쩍 쳐다본다. 그는 그만 마시라는 듯 술잔을 잡는다. 나도 한 힘 한다 싶어서 뿌리치려고 했는데 그는 바위처럼 꿈쩍도 안 했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자 너구리들이 술잔을 내려놓고 잘 마셨다고 말한 뒤 싹 사라져버렸다. 이제 불 판 앞에는 나와 너구리 아가씨, 도토리묵 장수만이 있을 뿐이다. 뒤이어 그도 일어서더니 이정도면 충분하다며 남은 술을 수로에 부어버리고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나는 의자에 기대어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은 초봄 하늘은 금가루를 뿌렸는지 별들이 빤짝인다.

[저도 그만 갈게요] 

[가지마. 좀 더 있어]

  오른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았다. 나보다 더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기분이 좀 가라앉았다.

[하늘에 별이 참 많네. 네가 사는 곳에서도 보일까?]
[아마도요]
[너는..아직도 내가 좋으니?]

  너구리 아가씨는 말없이 나를 쳐다본다.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길을 느꼈다. 만약에 여기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그만 둔다면 어떻게 될까? 뛰어내리는 대신 빠르게 반대편으로 걸어간다면 상황이 좋아질까, 나빠질까? 별들조차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모르는 듯 무심히 반짝거리기만 한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조만간 툭 떨어지겠다.

[늦었어요. 그만 가야겠어요]

  잡혀 있던 오른 손을 빼내더니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나는 그대로 꼼짝하지 않고 별만 바라보며 한 숨을 쉬었다. 그녀도 나도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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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2009-09-28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알몸으로..ㅎㅎ..권선생이 엄청나게 당혹스러웠겠어요..여담이지만..권선생은 너구리 아가씨와 어쩌고 싶은 걸까요?

최현진 2009-09-29 16:1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ㅎㅎ 좋은 한 주되세요.

우주바다 2009-10-01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내요.. 너구리가 아니라서 잘모르겠지만 여자들맘은 공유가 안되는거거든요..두가지의 마음을 가질수 없다는거죠..너구리아가씨의 맘을 받아줄수없음 벌써 그만 뒀어야햇는데..오늘은 더 큰 마음을 보엿으니..그건 나중에 더큰 상처가될것같아 어찌해야할지..

최현진 2009-10-01 15:11   좋아요 0 | URL
사는게 참 어려운 일이에요. 마음이란게 자신도 어쩌질 못할 떄가 있으니까요.
 

  곧 봄이 온다는 소식을 등에 업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아침이다. 밤새 요란한  꿈에 시달리느라 푹 자지 못하여 울산댁네 장 닭이 울기 전에 잠에서 깼다. 꿈에서 얼마나 달리고 숨었는지 입고 잔 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대청마루에 앉아 담배 한 가치를 입에 무는 데 핸드폰이 울린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받기가 꺼려졌다. 왠지 안 좋은 소식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꿈 때문이려나 싶어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 이혼한 아내였다. 장모님이 새벽에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한다. 잠시 어벙벙해져 아무 말도 못하다가 병원이 어디인지만 물어보고 전화를 끊었다.

[언제 돌아와?]
[5일 쯤 후에요. 상주를 맡을 사람이 없어요]

  집을 봐달라고 부탁도 할 겸 청산 할매에게 들렸다가 부리나케 차에 올라탔다. 장모님은 평소에 큰 지병이 없으시지만 오랜 식당일로 관절염 때문에 고생하셨다. 그래도 긍정적인 성격이시라 내가 찾아가면 불편한 몸으로 이것저것 만들어 주시며 헤어질 때는 또 오라고 손을 붙잡고 있을 만큼 정 많은 분이었다. 그래서 이혼 후에도 혼자 찾아뵐 정도로 나 역시 그분을 좋아했다.

   아내는 무남독녀에다가 부모님이 모두 고아여서 병원을 혼자 지키고 있을 것이다. 운전 솜씨를 최고로 발휘하여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갔다. 역시나 아내 혼자 울며 앉아 있다.

[고마워요]

    나의 지인들과 형제들, 아내의 동료들, 어머님을 아시는 분들까지 추모객들이 계속 찾아와 나는 끼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바빴다. 그리고 발인..어머니를 떠나보내며 목 놓아 울던 아내는 허토를 한 뒤 본격적으로 관에 흙이 올라가기 시작하자 기절했다.

  그녀가 이 모진 세상을 살아가고, 나와의 이혼 후에도 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뿐인 가족, 어머니 때문이다. 나 또한 그 분이 함께 계시기에 그녀의 우울증을 걱정하지 않았는데 다시 나빠질지도 모른다. 우리의 길지 않은 결혼 생활 동안에 그녀는 자살 시도를 했었기에 이제 잡아줄 사람 하나 없는 서울에 혼자 두어도 될지 걱정 된다. 어머니의 물건을 정리하면서, 집을 다시 줄이면서 그녀는 절망할 수 있다. 나는 장례식 내내 그런 걱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사랑의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아도 친구 혹은 같은 길을 갔던 동료의 마음이 커서 그녀의 검고 깊은 그림자가 신경 쓰였다.

[혼자 있기 싫으면 언제든 와. 힘들면 참지 말고..]
[알았어요, 고마워요]

  마침내 모든 일이 끝나고 장모님의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녀는 배웅하지 않겠다며 현관문을 곧바로 닫았다. 그 단절된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그녀가 지금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억지로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그것이 예전에 의사가 해 준 충고였다.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부드럽게..거부감이 없게 다가가야 마음의 병이 치유된다.

  돌아가는 길은 올라갈 때보다 먼 느낌이다. 오히려 지금이 더 많은 생각과 걱정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근 일주일여 만에 돌아온 학마을은 다리를 지나가면서 둘러보니 무척 반갑다. 정자에 앉아 계시는 분들께 인사를 하느라 지체해 한참만에야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아저씨..아저씨..]

  대청마루에서 울고 있는 너구리 아가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로 너머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지치고 힘들었던 몸에서 긴장이 빠져나간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왔다. 땀이 베인 뒷 목을 스치며 머리카락을 흩날린 뒤 마당으로 흘러가자 너구리 아가씨는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벌떡 일어나 수로를 한 달음에 뛰어 넘어 내게로 돌진했다. 온 몸을 실고 매달리는 지 몸이 잠시 휘청한다. 그녀의 젓은 얼굴이 가슴에 닿았다.

[아저씨! 아저씨!]
[왜?]
[진짜 아저씨 맞지요? 그렇지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무엇이 그리 좋은지 웃는다. 나도 덩달아 미소지었다. 그 순간 너구리 아가씨는 균형감을 잃었는지 헛발질을 해서 수로로 떨어졌다. 이 수로에서 장군이 이외에 다른 것을 구해야할 차례인 듯 하여 웃음이 나왔다.

[에취..에취..]
[더 가까이 오지 그래. 감기 걸리겠다.]

  그녀를 구한 뒤, 차가운 화로에 불을 지폈다. 동시에 연탄보일러도 활활 타오르도록 불구멍을 바짝 열었다. 그래도 일주일 가까이를 비워두었던 집이라 냉기가 가득 흐른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춘3월이지만 수로의 물은 아직 차가워 감기가 올 수 있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아, 하나뿐인 이불을 꺼내와 덮어주고 화로를 대청마루로 내왔다. 그러나 너구리 아가씨는 가까이 오지 않고 대청마루 끝에 앉는다. 몇 번을 말해도 다가오지 않아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아내나 너구리 아가씨나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다. 여자들이란 다 그런 건가..하는 생각도 스쳐간다.

[왜 울고 있었어?]  

[떠나신 줄 알았어요]

  아내처럼 무릎을 세우고 양 팔로 몸을 감싼 뒤 고개를 숙인다. 표정이 보이지 않으니 지금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여행 가시는 거면 저에게 집 봐달라고 부탁하시지..] 

[장모님이 돌아가셨어]
[아..그랬구나..힘드시겠어요]
[응]

  달빛이 하얗게 내려와 창백한 너구리 아가씨의 팔을 비췄다. 나는 다가가 이불을 더 단단히 감싸주고 옆에 앉았다.

[너는..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니?]

  내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 타인의 마음을 아주 모를 만큼 둔하지도 않는데, 알면서 물어보는 내 진의가 더 의심스럽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한다.

[저는..제 위치를 잘 알아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나나 그녀나 지금 아슬아슬한 줄 위에 서 있다. 이 줄이 끊어질지 계속 이어져 둘이 마주칠지 현재는 모르겠다.

[찹쌀 떡~찹쌀 떡~]

  갑자기 너구리 아가씨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 덕분에 우리를 감싸고 있던 불안하고 부담스러운 공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거..맛있나요?]

[먹어보고 싶어?]

[네. 하나 사주세요]

  이젠 너무도 익숙하여 누구인지 안다. 때와 상관없이 자기가 팔고 싶은 것을 파는 도토리묵 장수다. 그는 내가 부를 걸 먼저 알았는지 수로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예전에 도토리묵을 팔 때 들고 다니던 성능 좋은 목제 통을 가로로 매고 있다.

[맛있어?]

[네. 아주..아주요]

  눈물을 흘리며 먹는 찹쌀떡 맛은 어떨까. 너구리 아가씨는 굵은 눈물에 젓어드는 찹쌀떡을 한 입, 한 입 조심스레 베어 물었다. 나는 그 옆에 조용히 앉아 있다. 그녀가 먹는 것을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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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2009-09-25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물이 배인 찹쌀떡..진짜 어떤 맛일까요?

우주바다 2009-09-25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뜩 흐린하늘과 부는바람에 습한기운이 가득한 아침입니다..오늘아침과 닮은 글을 읽으면서 마음한편히 짠해오네요..모두가 사는방법은 다르지만 각자의 감정에 충실하며 살고싶어하죠..어쩌면 아내분이 훌쩍 짐을싸들고 학마을로 들어왔음하는 개인적인 바램이..혼자는 외로우니..주제넘은 생각..
 

    2월이 끝나간다. 소백산으로 둘러싸인 우리 마을은 아직도 아침저녁으로 매우 쌀쌀하지만, 마실을 나와 보면 가지들마다 새 잎의 순들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흐뭇한 기분으로 바라보며 걸어갔다. 

  우리 집은 마을의 가장 뒤에 있어서 몇 걸음이면 숲 속 산책로로 들어선다. 거기서 다시 5분을 더 가면 오른쪽은 산신의 사당, 왼쪽은 황주 할매네 논과 저수지다. 그 집 할배가 돌아가시기 전에 만드신 저수지인데 봄이 되면 벚꽃이 그 둘레를 전부 에워싸고 흐드러지게 피어서 사진 작가들이 촬영을 오기도 하는 절경의 장소다. 내가 학마을에 내려온 것은 6월이 다 되가는 늦봄이라 벚꽃이 한창일 때를 보지 못했다. 해서 올 해는 말로만 듣던 절경을 꼭 보겠다고 다짐을 하고 기다리는 중이다.

[아직 좀 춥지?]
[네. 그러네요. 할매는 여기서 뭐하세요?]
[나물 좀 캘까하고..]
[쌀쌀해서 없는 것 같은데요]
[없기는..권선생이 여길 잘 몰라서 그러지 이르게 나오는 놈들이 꼭 있어]
 

  청산 할매는 사과나무가 심어져 있는 과수원 쪽으로 간다며 발길을 돌리셨다. 영주는 "뜬 바위 사과"가 일품이라 두 집 건너 하나가 사과나무 과수원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천지가 사과나무다. 저수지 위쪽으로도 한 때는 우리 집 땅이었지만 남의 손에 넘어가 지금은 사과나무 과수원으로 바뀐 곳이 있다. 일조량이 뛰어나 사과가 맛있는데, 할매는 그 햇빛 때문에 벌써 나물거리가 나왔다고 말씀하신다. 오늘 저녁에는 신선한 나물무침을 얻어먹겠다 싶어 군침이 돌았다.

  저수지에 도착하니 아직은 황량한 기분이 들었다. 저수지의 물이 탁하고 어두워 과연 뭔가가 살 수 있을까 싶고, 물가에는 잡초가 무릎을 넘게 자라서 수영금지라는 표지판을 곧 가리겠다. 게다가 영주시에서 도로를 새로 낸다고 저수지 옆쪽으로 표시용 붉은 깃발을 군데군데 박아 놓고 땅을 헤집어 놓아 전체적인 모양이 더욱 스산하다. 이래서야 올해는 벚꽃이 피어도 촬영 올 사람이 없지 싶다. 나는 뒤집힌 흙들을 대충 덮어놓으면서 저수지를 한 바퀴 돌았다. 벚꽃은 아직 싹도 보이지 않아 낙담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할매, 잘 먹었습니다]
[입맛이 돌지?]
[네. 무슨 나물인가요?]
[땅두릅이랑 잡 것들이야. 이것저것]

  역시 기대했던 대로 올 해의 첫 나물무침은 입 안에서 향긋함을 톡톡 내뿜어 밥을 두 공기나 먹었다. 배도 부르고 잠도 오지 않아 할매에게 그릇을 돌려준 뒤 마당을 세 바퀴나 빙글빙글 돌았다. 그래도 수마가 찾아오지 않는다. 요즘 머릿속이 산란하여 그런 것임을 알기에 더 열심히 돌아본다.

[퐁퐁...퐁퐁]

  몇 바퀴 쯤 돌았는지 달이 환해진 한밤중이 되자 수로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재미있는 느낌이라 다가가 고개를 숙여 어두운 물속을 바라보았다. 내 눈 앞에 물 위를 떠가는 목련 꽃잎이 보였다. 둥실둥실 떠내려간다. 수로의 물길을 따라가는데 목련 꽃 잎 안에는 물이 반쯤 차 있었다. 그 물에서 퐁퐁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방울씩 거품이 올라온다. 그 재미있는 목련 꽃잎이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물길을 따라 고개를 돌리며 보는데, 새로운 목련 꽃잎이 또 나타났다. 그렇게 1분 정도의 간격을 두고 계속 떠내려 온다. 마을 앞에 있는 목련 나무는 오늘 아침에 보았을 때 이제 겨우 순이 올라오는 정도였다. 그 나무의 꽃잎은 절대 아니다. 나는 수로를 따라 걸어가 보기로 하였다. 우리 마을의 수로는 땅 위로 보이다 덮이다 하여 따라가기가 만만하지는 않지만 결국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안다. 비가 심하게 올 때면 수로의 물 길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이 수로의 물은 학마을 개울에서 시작하여 저수지를 지나 상석리 개울로 이어진다. 목련 꽃잎이 땅 밑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아도 먼저 저수지에 가서 기다리면 그 곳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중간에 푹 젖어 사라지지만 않으면..

  저수지는 고고한 달빛에 취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는 중이다. 수영 금지 표지판도 이 정도의 달빛에는 잘 보이지 않아 정취를 깨지 않는다. 나는 수로가 이어지는 지점 근처까지 내려가 쪼그리고 앉았다. 뛰어왔기 때문에 좀 더 있어야 처음 봤던 목련 꽃잎이 나타나리라 추측한다.

[하나, 둘, 셋, 넷..]

  기다리기 심심하여 카운트다운을 하듯이 숫자를 센다. 25쯤 되었을 때 퐁퐁 소리를 내는 목련 꽃잎이 짠하고 나타났다. 반가워서 잡아 보려고 하니 마치 내 손을 피하듯이 옆으로 틀어 다른 방향으로 간다. 저수지를 가로질러 반대쪽에 도달하는 게 달빛에 보였다. 즉시 일어나 그리로 돌아갔다.

[이제 왔나?]
[이리 앉으시게]

  산신들이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흔든다. 우리 집 수제 막걸리를 말없이 먹고 가신 분들인데 오늘은 달빛 놀이라도 나오셨는지 바닥에는 천을 깔아놓고 여러 가지 음식을 앞에 두고 둥글게 앉아 있다. 그들은 허리를 바짝 세우고 있지만 그래도 내 상체의 반도 안 된다. 난장이랑 거인 같은 기분. 그래도 초대를 받았는데 거절하기도 뭣하여 한 쪽에 자리를 잡았다. 첫 번째 목련 꽃잎에 이어 나머지들이 계속 산신들의 근처에 당도하는 게 보였다.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은 산신이 하나씩 건져내어 손에 쥐어준다. 10여 명이 모두 한 개씩 들자 건배를 제의했다. 나도 눈치껏 달빛에 높이 들어 보인 후 입 안에 퐁퐁 소리를 내는 물을 털어 넣었다.

[아...]
[어때?]

  눈물이 어리는 기분이다. 목울대를 퉁기는 샤한 느낌이 술인데도 술 같지 않고 뭔가 더 특별한 느낌이다.

[이 술의 이름은 망우주라네] 

[망우주...무슨 뜻인가요?]
[잊을 망, 근심할 우, 술 주. 마음의 근심을 잊게 해주는 술]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술이다. 정말 그런 술이 있기를 바랬는데 진짜로 있다. 맛도 좋은 게 천상의 술이다. 산신은 허리춤에서 파란 색의 병을 꺼내 퐁퐁 소리가 나는 술을 더 따라주었다.

[벚꽃도 만발하고 술도 맛있으니 이 아니 좋은가]

  산신 한 분이 일어나 덩실덩실 춤 추며 노래를 불렀다. 그의 말이 주문이라도 되는지 바람이 불어오면서 벚꽃이 쏟아져 내린다. 달빛에 물든 벚꽃잎은 내 머리에도 어깨에도, 그들의 등에도 가득 자리 잡았다. 그리고도 계속 비처럼 내린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저수지의 벚꽃 나무들이 허리가 휘어질 정도로 많은 꽃을 달고 있다.

   나는 입을 벌린 채로 바람 따라 흔들리는 가지와 벚꽃을 바라보았다. 올 해 꼭 보고야 말리라고 다짐한 벚꽃의 향연을 이렇게 접하니 자연의 경이로움에 근심과 걱정이 저만치 가버렸다. 과연 망우주에 망우화였다.

[이봐, 권선생~예서 자면 입 돌아가]

  황주 할매가 세게 흔드셔서 속이 느글거리는 걸 느끼며 눈을 떴다. 논을 보러 나온 길에 저수지 앞 풀밭에 잠들어 있는 나를 발견하셨다고 하신다. 옆으로 누워서 잤는지 오른쪽 어깨부터 다리까지 저리고 쑤셔서 쩔쩔 매며 일어섰다.

[술이 다가 아니잖아. 몸 상하겠네]

  절룩이며 집으로 들어가는데 밭에서 청산 할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마당을 가로질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자리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망우주 덕인지 속은 쓰려도 머릿속의 근심과 걱정은 이제 좀 덜하다. 

  그날은 끼니도 거르고 하루 종일 잤다. 다음 날 울산댁네 장 닭의 시끄러운 아침 인사에 맑은 정신으로 일어나 안개가 낀 동네를 걸어 다녔다. 마을 앞 목련 나무와 저수지의 벚꽃 나무에게도 다녀왔다. 물론 꽃잎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날의 절경은 마치 꿈같지만, 눈 감으면 생생히 기억나니 꿈이 아닌 꿈이다. 아름다운 한 순간이었다. 이제 벚꽃을 기다리는 일은 안 해도 될 듯하다. 그리고 산신이 선물로 주었는지 책상 위에는 그물무늬의 병이 나비 연적과 개구리 벼루 옆에 서 있다. 왠지 거기에 물을 넣어두면 퐁퐁 소리가 나는 망우주가 되지 않을까..하는 상상을 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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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바다 2009-09-24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햇살이 따가운 한낯입니다..점심때도지나고 한숨 잤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어릴적기억으론 그곳의 겨울은 차가운 바람..정말 바람이 차고 매서웠는데..봄이면 벗꽃은 기억이 없고 온통 하얀 사과꽃 천지여서 탱자나무 울타리를 지나가며 '과수원길'을 무수히 부르곤 햇는데..참..며칠전 부석사사과라며 시장에서 트럭을 갖다놓고 팔길레 반가운 맘에 얼른 두봉지나 샀습니다..작가님생각도나고해서..

최현진 2009-09-24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과..ㅎㅎ 조금 있으면 껍질이 아주 얇고 그냥 먹어도 되는 뜬 바윗골 사과가 출하될거에요. 작년엔 백화점에 납품 되기엔 작거나 제멋대로인 애들만 모은 걸 샀는데도 너무 좋아서 주변에 나누어주었어요. 언젠가 우주바다님께 그런 사과드리는 날이 오면 좋겠네요^^ 사신거 맛있게 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