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넷째 형의 전화를 받았다. 새 차를 구입하게 되어 쓰던 차를 가져가라고 하기에 넙죽 그러마..하고 대답했다. 학마을은 시내에서도 이십여 킬로를 들어 가야하는 지역으로 하루에 3번 정도 다니는 버스를 이용하여 시내에 나가니 이래저래 생활이 불편하던 차였다. 게다가 마을 주민 10여분들이 모두 고령의 어르신들이라 운전면허증이 없다. 그런 이유로 현재 서울에 가서 차를 몰고 내려오는 중이다. 풍기 인터체인지를 지나 시내로 들어서서 가짜 사과들이 진열된 가게들 앞을 지나갔다. 지금은 출하된 사과가 없어 작년에 저장해둔 냉동 사과를 팔다보니, 신선도 유지를 위해 길가에 사과 박스를 내놓거나 먹음직스럽게 가판대 위에 올려놓을 수가 없다. 대신 피같이 새빨간 모조 사과들을 박스에 담아 전시한다. 좀 더 현대적인 가게의 경우는 빨간 두건을 두른 마네킹을 세워놓았다. 이곳을 지나면 어디서나 봄 직한 시내로 들어선다. 여기서 이십여 킬로를 가면 학마을이다. 새벽에 넷째 형네 집에 갔다가 부리나케 출발했지만 어중간한 운전 실력이다 보니 시내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저녁이었다.
몇 분후 교차점에 도착했다. 신호도 없는 길이지만 안전을 위해 잠시 멈추어 선채 이정표를 바라보았다. 왼쪽으로 돌면 부석사로 갈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변덕스럽게도 그리로 차를 돌렸다. 부석사야 학마을에 사는 이상 언제든 갈 수 있는데도 돌아온 후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어쩌면 서울 사는 사람이 남산 타워에 가본 적 없는 것과도 비슷하다. 부석사로 연결된 길은 새로 포장을 하여 덜컹 거리지도 않고 참 좋다. 게다가 지금 정도의 봄이면 밤이라 하여도 꽃들이 가득 피어있어 기분이 상쾌해진다.
문득 시계를 보니 8시가 살짝 넘어섰다. 시골의 밤은 대도시보다 빨라 주변은 이내 완전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부석사에 가는 사람들이 없어 왕복 6차선 도로가 텅텅 비어 장난기가 발동하였다. 지그재그 운전도 하고, 가다 서다도 하며 놀다보니 10여분 걸리던 길이 배는 들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어슬렁어슬렁 걸어 올라갔다. 사찰 입구에 있는 3-4개의 음식점들도 닫을 차비를 하느라 간판의 불을 내리는 게 보인다. 고작 한 두 명의 동네 주민정도만이 소주를 걸치고 있으니 이 순간 부석사 입구는 참 고즈넉하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지금처럼 잘 정비해 둔 부석사가 아닌 약간은 우습고, 또 많이 낡았던 절을 뛰어다녔다. 어린이 대공원이나 롯데월드 같이 가족들이 손잡고 놀러갈 곳도 없고, 또 바쁘디 바쁜 농번기에 놀아줄 어른 역시 없는 시골에서는 아이들끼리 장난감을 만들고, 놀 공간을 점거하는 게 중요했다. 부석사 역시 그런 곳 중에 하나다. 우리들은 밤이면 부석사 경내에 모여 귀신 놀이를 했고. 낮에는 남자아이를 낳고자 치성을 드리는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몰래 숨바꼭질을 했다. 초파일에는 꿀맛 같은 산사 음식도 얻어먹었다. 지금은 잘 닦인 콘크리트길을 밟고 올라가면서 그런 감회에 슬쩍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저씨..지금 몇 시인가요?]
하늘을 바라보면서 걸어가는 데 갑자기 어여쁜 말소리가 들려와 깜짝 놀랐다. 절이라 귀신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자 목소리가 들리니 간이 작은 나로서는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다. 꺼지려는지 깜박거리는 가로등 근처 벤치에서 난 소리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고개를 새침하게 돌린 아가씨다.
[9시가 다 되가네]
[누굴 좀...기다리고 있어요]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처럼 대답한다.
[이 시간에 여긴 인적이 드물어서 위험한데..]
[곧 내려갈 거예요. 아저씨는 어디 가세요?]
[그냥 산책 삼아 걷는 중...여기 사람 아닌가 보네]
어느새 나는 그 아가씨 옆에 앉아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한다. 처음 보는 내가 겁나지도 않는지 배시시 웃으며 곧잘 대답을 해 귀엽다.
[여기 사람이 맞기는 한데..억양이 서울 사람 같아서 그러시죠? 사투리가 나오면 왠지 좀 촌스럽잖아요. 그런 여자는 남자들에게 인기 없어요]
[난 정감 있어서 좋을 거 같은데..]
[아저씨나 그렇죠!]
말을 사쁜사쁜 걷는 것처럼 건네던 아가씨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슬쩍 쳐다보자 아무래도 안 오나보다..라고 중얼거리더니 내려가겠다며 일어섰다. 나 역시 굳이 더 걸어 들어가고 싶지 않아 같이 내려가기로 했다. 무슨 바람이었는지 마을 근처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말하자, 겁도 없는 아가씨는 팔짝거리며 차에 올라탔다. 이렇게 해서 혼자 온 부석사를 둘이서 떠나게 되었다. 얼마쯤 갔는지 세워달라는 말에 차를 도로 한편에 붙였다. 아가씨는 조만간 또 보자는 말을 남기고는 사쁜사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여전히 좋은 기분이라 휘파람을 불며 학마을로 돌아왔다.
[아저씨~]
아침이 되어 자리를 털고 나오며 오늘은 상추를 좀 따볼까 싶어 집 근처 노지에 나섰다. 뒤를 돌아보니 어제보다 더 해맑은 미소의 그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영주 안의 일은 눈감고도 알아요. 고만고만한 동네들이잖아요]
[하긴..]
시골이 그렇다. 내가 수로에서 장군이를 건져낸 사건이 1시간도 안 되어 다 퍼지는 마을이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상추 밭으로 들어갔다.
[권선생, 날도 더운데 쉬엄쉬엄 해]
허리가 아프다 싶게 숙이고 상추를 따는데 뒤편에서 슈퍼 주인 할매가 손을 흔들었다. 나 역시 말 대신 웃으며 끄덕였다. 할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옆을 보니 그 아가씨는 어디로 갔는지 없었다.
[왜 이제 오세요?]
상추를 그릇에 가득히 담아 마당으로 들어섰더니 사라진 줄 알았던 아가씨가 대청마루에 앉아 발장난을 친다. 게다가 내가 늦게 왔다며 핀잔이다.
[언제 돌아온 거야? 간다는 소리도 없이..]
[난 먼저 들어간다고 했어요, 아저씨가 못 들으신 거죠. 슈퍼 주인 할매가 보여서..]
[그 할매가 싫어?]
[젊은 게 놀고 있다고 혼나요]
[하긴..그 할매는 게으른 거 싫어하시지]
가져온 상추도 씻고 청산 할매네 밭에서 아삭한 고추도 따왔다. 조촐한 점심상이지만 간만에 신나게 먹었다. 개울가에서 물고기도 잡고 햇볕에 젓은 옷을 말리다 보니 벌써 해질 녘이다. 아가씨는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개울을 내려다보다가 먼저 떠나갔다. 나 역시 간만에 말이 통하는 젊은 사람을 보내는 게 슬퍼 터벅터벅 마을 슈퍼로 향했다. 왠지 막걸리 한 잔을 마셔야 잠이 오지 싶다.
[다 저녁에 뭔 술이야?]
[그냥..목이 컬컬해서요]
[하긴, 그리 돌아 다녔는데.. 한 잔 쭉 마시고 자]
역시나 시골은 비밀이 없다. 나랑 그 아가씨가 놀러 다닌 걸아시니..
[권선생, 너무 정주지 말아]
[네?]
슈퍼 주인 할매는 물건을 정리하느라 등을 돌린 채로 말을 하신다.
[그 처자랑 붙어 다니니까 하는 말이야]
[네?]
[아까 버버리 말이 개울가에서 같이 있다고 하더구만. 나도 아침에 상추 밭에서 보니 둘이 꼭 붙은 게 걱정돼서 그래. 시골은 고만고만해서 다들 알고 지내는 데, 이 근처에 그런 아가씨는 없어]
할매의 말에 먹던 막걸리 잔을 내려놓았다. 이게 다 무슨 소린지..
잘 이해는 안 되지만 왠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슈퍼를 나왔다. 학마을로 돌아와 살게 되면서 종종 기이한 일들이 생기는 데 한 밤에 만난 묵 파는 장수는 그러려니 해도 그 아가씨까지 이상하다면 참 묘해진다.
[계세요?]
달빛을 받으며 집으로 가는 길에 청산 할매 집에 들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커다랗게 TV 볼륨을 높여 놓으신 채로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계신다.
[낼 대거리를 한 번 해야겠네]
[대거리요?]
[권선생이 마음에 들었으니 또 올거야]
[그럼..귀신인가요?]
[귀신은 낮에 안 돌아다녀. 짐승이 둔갑한거지. 여긴 종종 그래]
청산 할매의 심드렁한 말에 안달하는 내가 오히려 무안해졌다. 그러려니 하되 끌려가지 말라는 조언을 듣고 덤으로 장군이까지 받아왔다. 수돗가에서 목과 얼굴을 대충 씻자니 잠깐의 기억이지만 즐거웠다는 생각도 들었다. 과연 잠이 올까 싶었는데, 저질 체력으로 하루 종일 놀았더니 걱정하는 마음과는 달리 잠이 팍 쏟아졌다. 살포시 감기는 눈 너머로 장군이가 엎드려 있는 대청마루 가 보인다. 장군이가 있으면 괜찮을라나..하는 생각을 하는데 어둠이 밀려온다.
[멍멍 멍멍]
하도 시끄러워 눈이 번쩍 떠졌다. 장군이는 물고기 잡이 선수지 개치고는 잘 안 짓는 놈인데 처음으로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방문을 열고나갔더니 아침 해가 눈이 부시게 내려온다. 수로를 사이에 두고 난처한 표정의 아가씨와 장군이가 서로 대치중이다. 그녀는 나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든다.
[아저씨~]
자세히 보니 매일 같은 옷차림이다. 하긴 20대의 젊디젊은 여자가 땀이 배였을 옷을 매일 입는데 그걸 이상하게 생각 안했다니 나도 참 둔하다.
[아저씨~]
나에게 계속 손을 흔드는데 참 난감했다. 머리는 끌려가지 않으려면 모른 척 해야 한다인데 마음은 나도 모르게 손을 흔들려고 한다. 아마도 나와 함께 이야기하고 놀 때 보았던 따뜻하고 귀여웠던 이미지 때문이다.
[훠이~훠이~어서 가거라!]
갑자기 붉은 돌들이 아가씨에게 날아왔다. 내 발밑으로 굴러온 돌을 보니 팥이다. 아가씨는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 소리를 내더니 혼비백산하여 산 쪽 길로 도망친다. 순간 머리가 쭈뼛하고 섰다.
[고 사이에 또 따라 갈려고 그랬지? 권선생도 참 걱정되이..]
[할매...]
장군이가 청산 할매를 보고는 반가워서 수로를 팔짝 뛰려다 물속으로 떨어졌다. 이제야 저 놈이 왜 자주 물에 빠지는지 알았다. 장군이를 구하느라 수로로 들어갔다 나오니 시원한 물 덕분에 꿈에서 깨어나는 느낌이 든다.
[고마워]
[뭘요...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람과 짐승은 가는 길이 다른 법이니..앞으로 조심해]
[네. 들어가세요]
반쯤 젓은 장군이를 두 손으로 받아 드신 청산 할매는 굽은 허리를 더욱 굽히며 자신의 집으로 걸어가셨다. 나는 그 아가씨가 도망간 숲 속 길을 잠시 바라보았다. 다음에 또 찾아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데, 내가 과연 모질게 대하거나 청산 할매처럼 팥을 뿌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제법 마음이 맞았으니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어제 먹다 남겨둔 상추가 기억나 비빔밥을 해먹자고 중얼거리며 부엌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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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한마디 : 영주에 가시면 이런 사과 과게가 많아요. 왼쪽에 있는 가짜 사과들이 실제로 보면 기가막히게 붉어요. 딱 가짜라는 걸 알죠--;
(사진출처: http://image.search.daum.net/dsa/search?w=imgviewer&q=%BF%B5%C1%D6+%BB%E7%B0FA&page_offset=0&page=3&shape=default&size=0&color=0&SortType=3&lpp=28&cp=&od=bJhcy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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