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은 차라리 바보인 게 낫다 - 귀를 닫고 사는 리더들을 위한 작심 발언
스즈키 다카시 지음, 민경욱 옮김 / 북클라우드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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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도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취임 초기 불량품에 대한 보고를 받고서, 아주 작심하고 직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불량품 화형식을 갖겠다. 모든 불량픔, 나아가 동일 라인에서 생산된 미검사 제품도 모두 끄집어내어서 쌓아두고, 임직원 막론하고 전원 현장에 도열하게 하라."

무 더기에 불이 붙으니 그 냄새가 이루말할 수 없었지만, 총수의 서슬에 감히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그때까지만 해도 세계 일류 브랜드하고는 천지차이가 있던 제품만 만드는 게 고작이었던 삼성맨들은, 뭔가 큰 충격이 자기 영혼을 관통하는 걸 느꼈습니다.

많은 이들은 이 순간을 회고하면서, 이 충격적인 이벤트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삼성이 세계 가전을 제패하는 일은 없었으리라고 말합니다.


특 히, 실속과 치밀함, 반듯한 회계 정리를 통한 잡손실 극소화를 미덕으로 추구하는 일본에서, 경영자가 만약 이런 행태를 보인다면 아마 조롱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 <사장은 차라리 바보가 되는 편이 낫다>의 저자인 스즈키 다카시 에스테 회장은, 바로 저 위의 이건희 회장의 일화에 나온 바와 매우 비슷한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기업의 재고 중에는 곧 소매상에서 고객을 맞아 제 임자에 넘어갈 것이 있고, 창고에서 먼지만 쌓인 채 회사의 주름만 더하는 이른바 "악성 재고"가 있죠. 스 즈키 회장이 갓 취임했을 때, 서서히 전망이 상실되고 형편이 기울어가는 이 회사의 창고에는 이런 악성 재고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회사의 명색은 화려해서 도합 860종의 아이템이 유통된다고 카랄로그에는 과시했지만, 정작 유통이 되는 물품은 그 중 1/3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회계 원칙을 아시는 분들은 짐작하겠지만, 기업에서 재고 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무시할 게 못 됩니다. 더군다나 악성 재고는, 그 재고가 남아 있는 동안은 재고자산으로 카운팅되어 대차대조표의 차변에 엄연한 자산으로 기록됩니다. 그 실질은 기업을 좀먹는 악성 종양이나 마찬가지인데(앞으로 판매의 전망이 없다는 점에서도요), 숫자로는 회사의 재무 상태를 실질보다 나아 보이게 하는 착시 효과까지 유발했으니, 스즈키 사장(당시 갓 취임)의 눈에는 미워도 이보다 미운 게 없었을 텝니다. "당장 다 갖다 버려!"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몇 개월이 지나도 이 명령은 수행되지 않았습니다. 사장이 고용사장이라 일선에 일일이 영이 먹히지 않았던 것도 한 이유가 되고, 어쨌든 회사의 라인에서 아깝게 생산된 물품인데 버리긴 왜 버리느냐는 반발심도 있었습니다.


"그거 버리는 비용이 더 듭니다."

"고물상에 팔아도 몇 푼은 건지겠습니다."

"유통 라인 중에는 그 아이템이 없으면 아예 거래가 끊기는 곳도 있습니다."


마지막 말에 스즈키 사장이 발끈했습니다. "아 그래? 내가 직접 그 소매점에 전화를 해 보지!"

결과는 역시, 직원이 거짓말을 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래도 상품은 직원들의 정성과 땀이 밴 것들이라, 누가 쉽게 버리려고 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 중에는 거짓말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하는군요. "이미 버렸습니다."

스즈키 사장은 날카로운 눈으로 거짓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아 그래? 나중에 어디서 한 개라도 발견되면 자넨 내 손에 죽어!

그렇게 아까운 물건이면 물건은 살리고 사람을 좀 버리는 쪽으로 나가 봐? " 이렇게 협박성 엄포도 삼가지 않았습니다.

어떤 직원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버리는 비용만 5억 엔 가까이 듭니다."

"내가 지금은 사장이야. 버리라면 버려! 이유가 뭐냐고? 내 취향이다, 왜!"


회 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 당시는 거품이 꺼지고 일본 경제가 본격 퇴조기로 접어드는 때였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기업회계는 보수주의를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시가주의"가 아닌 "취득원가주의"로 해야 기업의 정확한 실상이 잡힙니다. 이렇게 하면 예컨대 보유 유가증권의 가격이 급등해도 그 가액은 취득시의 그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에, 기업의 실질 가치를 일시적으로 부풀릴 우려가 적습니다. 또, 손익계산서상 당기 순이익에 "평가이익의 거품"이 지나친 비중을 차지하는 일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 런데 이것은 경기가 활황을 띨 때의 이야기입니다. 스즈키 사장이 취임할 무렵에는, 경기의 극적인 퇴조가 전 일본을 지배할 무렵이라(우리도 마찬가지였죠. 마찬가지가 아니라 나라가 금방이라도 망할 듯 더했습니다. 바로 외환 위기 시절이니까요), 취득원가주의를 고집하면 바로 그게 과거의 거품을 반영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스즈키 사장이 제일 먼저 노린 것은(책에는 이런 말이 명시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만), 과거 잘나가던 시절의 감상에만 젖어 있던 직원들과 회사 분위기의 환상을 깨버리는 작업이었습니다.


" 버리는 비용만 5억 엔입니다." 그러면 버리면 안 되죠. 회사 운영이 장난인가요? 회사가 아니라 가계의 운영 원칙도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지출 행태를 방치하는 건, 제 몸에서 건강한 피가 빠져 나가는 걸 방관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부친은 아주 예전에 어느 이사님이 현장을 돌며 "니네들, 한전하고 짰냐? 쓸데없는 불을 왜 이렇게 켜고 다녀?"라고 하던 말을 즐겨 회상합니다. 전기요금 아니라 그 흔한 수도요금 하나도, 쓸데없는 지출은 줄이고 또 줄이는 게 운영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스즈키 사장은 "뭐가 됐든 상관 없으니 갖다 버려!"라고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이런 "바보짓"을 한 이유가 뭐겠습니까? (이 책의 제목에 "바보짓"이 들어갔다는 점을 다시 상기해 주세요) 일시적으로 잡손실, 사무 비용이 발생하는 건 차라리 감수하고라도, 소속 직원들의 썩은 정신 상태를 바로잡고 그를 통해 다른 방향에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회복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혁신을 가로막는 것은 무능, 무경험의 비중보다, 과거 한때 잘 나갔던 경험과 쾌감에만 집착하여, 이미 크게 변화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그 타성이 더 무섭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스즈키 사장은 이 점을 간파하고, 직원들에게 "이대로는 죽는다!'라는 점을 호되게 깨우쳤던 것입니다. 비록 저자 자신의 입으로는 그 표현을 삼가고 있으나, 실상 하고 싶었던 말은, "악성 재고만큼이나 썩어빠진 니네들 정신부터 갖다 버려!"를 외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맨 위에 적은 이건희 회장의 사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엉뚱한 생각입니다만, 스즈키 사장 역시 과단성 있는 성격과 스타일로는, 이 회장에 뒤지는 바 없는 인물이었을 텝니다. 그런데 왜 "화형식" 같은 세레모니를 벌여, 더 확실한 효과를 보려 하지 않았을까요? 에스테가 다루는 작고 소략한 품목이 "화형식"에는 더 적합한 것들이었을 텐데도요. 우선, 스즈키 사장은 오너가 아닙니다. 고용된 사장이고, 더군다나 (책에 나오듯이) 이 회사로 부임한 지(상무부터 시작했습니다) 얼마 되지도 않은 입장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터줏대감들을 상대로 저 정도면, 그건 대단했다고 봐 줄 만합니다. 다 음으로, 역시 모든 수단에는 비례성 원칙이 통용되어야 합니다. 필요한 만큼만 충격을 주고 끝내야지, 지나친 것은 안 하느니만도 못한 때가 많습니다. 이건희 회장의 저 과격한 일화는 기업 뿐 아니라 해당 업계에 전설로 남아 있는데, 이 시점은 해당 기업(삼성) 이 위기를 맞이했을 무렵이 아니라, 바로 적당히 잘나가고 안정기에 접어들 무렵이었다는 게 중요합니다. 이런 시점이면 기업의 소유주와 직원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엇갈릴 무렵입니다. 직원은 적당히만 해도 현상 유지가 됩니다. 월급만 잘 나오면 그만인데 괜한 모험으로 해직의 리스크를 감내할 필요가 없죠. 반면 오너는 몇 십 년, 백 년을 내다보고 살 길을 도모하는 입장이라, 현재의 무사안일이 미래의 파국으로 돌아옵니다(그 좋은 예가 지금의 SONY입니다). 이건희 회장은 " 적당히 잘 나가는 바로 지금"이, 관료주의에 직원들을 매몰시켜 기업의 경직성을 체질로 굳게 할 위기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당시에 극적으로 개선된 체질이, 현재까지도 기업 고유의 생리, 개성으로 남아서 삼성을 글로벌 탑으로 굳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스즈키 회장은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장에게 필요한 건, 운과 감과 배짱이다."

기술적인 지식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업의 큰 전략적 방향을 결정함에 있어서는, 그다지 중요한 요소는 아닙니다.

운 이란 무엇인가. 결국은 실력의 일종입니다. 남들이 무심히 지나치던 사소한 경험도, 소중한 실무적 지식으로 잘 다듬고 체화하여, 한참 지난 후 결정적일 때 의사 결정의 기준으로 척 꺼내서 쓰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별 상관 관계가 없어 보여 "운"으로만 인식되지만, 내막을 캐고 보면 결국 다 실력의 확증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실전 경험을 무수히 쌓은 후, 아 이럴 땐 대충 이래야 하더라, 이럴 땐 참아야 하겠더라, 같은 "촉"이 발휘되는 거겠죠. 결국은 성실한 사람(성실하기만 한 사람이 아닌)한테 감도 발달하는 것이겠구요.

사장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미덕은 또한 결국 배짱입니다. 안전 위주로 가서는 아무 일도 안 됩니다. 승부를 걸 때 과감히 걸 수 있는 게 리더의 자질이요 책임감입니다.


이 모든 자질은 결국 실전 경험에서 연유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자 스즈키 회장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겉으로 내세우는 말에 현혹되지 말라"고 합니다. 그는 소학교 시절에 일제 패망을 맞이했는데, 학교에 가 보니 그간 배우던 교과서를 모두 먹물로 물들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합니다(이 이야기는 제가 지금 읽는 다른 책인 이시형 박사의 <배짱으로 삽시다>에도 나옵니다). "지금까지 배우던 건 다 거짓이었다." 그 잘난 지식으로 거들먹거리던 어른들이, 하루 아침에 비겁한 변절자가 되어 강자에 꼬리를 흔드는 아첨배가 되어 있더라는 거죠. 그 이후로 그가 마음에 새긴 것은, "말을 믿지 말고, 실상을 눈으로 직접 체크하라."였습니다, 물론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저자는 "자신은 절대 제국주의의 환상에 향수를 둔 군국소년이 아니었다."고 덧붙입니다(군국소년이 무엇인지는, 영화 <더 울버린 (2013)>에서 老 야시다 회장 케릭터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저자는 "실용주의.실리주의"라고 부릅니다. 실전만큼 인간의 영혼을 살찌우고 풍요롭게 하고 생산적으로 바꿔 주는 것은 없다는 생각으로 책을 덮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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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보스 이야기 - 세계 거물들은 올해도 그곳을 찾는다
문정인.이재영 지음 / 와이즈베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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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겉 모습이 그 내면의 실질을 배반할 때가 많죠. 스위스라는 나라는 요즘 우리 동시대인들에게야 한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관광의 천국과 낙농업의 선진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스위스인들이 오늘날처럼 부유한 경제 형편과 세계적으로 앞서 가는 사회 제도상을 일구기까지는, 바로 한국인들이 겪은 역경과 시련 못지 않은 엄청난 고난의 이력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피와 눈물, 그리고 죽음을 각오한 용기를 통해 쟁취한 자유와 시스템이 오늘날의 직접 민주주의 공화정 체제를 유지하는 스위스란 나라입니다.

평 화로운 외관이 내면을 배반하는 국면은 하나 더 발견됩니다. 이 지극히 안온하고 잘 정비된 국가 내에서도, 휴양지로 유명한 소도시 다보스, 바로 그곳에서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 모여 들어, 직접적으로는 자국과 소속(혹은 소유) 기업의 이해를 조정하고, 좀 멀게는 세계와 지구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머리를 맞대고 중지(衆智)를 모으는 동아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공식 명칭으로는 세계 경제 포럼(World Economic Forum), 대중들 사이에서 편하게 운위되기로는 "다보스 회의"라는 준상설기구입니다. 공식적으로는 UN 경제사회이사회의 옵저버 자격을 갖고 있을 뿐이지만, 이 기구는 그 참여자의 수적 규모나 질적 비중의 기준에서도 압도적이며, 그 실질적 영향력의 비중을 놓고 보면 오히혀 UN의 여타 기구를 능가하는 수준입니다. 세계 주요 국가의 원수급 인사들이 빠짐 없이 참여하며, 회비를 납부하는 굵직굵직한 기업의 총수들 역시 이 거대한 의사소통의 장에 참여함을 큰 명예로 생각합니다.



다 보스 포럼은 지도자들 "그들만의 파티"는 아닙니다. 반서방적 성향을 지닌 국가의 지도자들, 문화적, 종교적으로 소수파에 속한 이들을 대변하는 명망가들, 문학, 예술, 스포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전 인류에 긍정적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재능 있는 개인, 그리고 자신이 속한 직능 그룹이나 공동체를 이끌 수 있는 촉망 받는 차세대 지도자들까지 포함해서, 실로 지구촌의 얼굴과 영혼을 모자이크로 형성할 있는 멋진 사람들이 모이는 흥겨운 장터의 성격도 지닙니다. 모임의 성격 역시, 엘리트들만의 폐쇄적인 일방통행, 하향식 의사 전달 구조가 아닙니다. 다보스 포럼의 꽃은 "토론의 백가쟁명"입니다. 제아무리 돈이 많고 신분이 뛰어나며 배운 학식이 풍부하다고 해도, 온화하고 적확한, 아름답고 공감 유발적인 진솔한 언어로 상대를 설복하지 못한다면, 다보스에서 환영받을 수 있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다보스의 축제는 토론, 토론, 그리고 또 토론입니다. 토론만이 인간의 공존적 가치를 확보하며, 그 영혼의 공유적 숭고함을 담보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다보스 포럼이 지향하는 가치를 여럿 제시하고 있습니다.

1. 다중이해관계자 이론(Multistakeholder Theory)
구 미에서는 개인주의와 합리적 사무 처리를 지향하는 실용주의가 발달한 문화적 특성을 보입니다. 그 중에서도 Mind your own business란 말로 상징되는, 개별 실무에 있어 철저히 이해관계자(stakeholder)들의 절실한 입장을 대변하여 해당 과업을 마무리짓는 전통은 과거 오랜 시간 동안 자본주의의 발달을 지탱하는 정신적 동력으로 작용해 왔죠. 그런데, 폐쇄적 소수의 이해관계자만으로 이뤄진 문제 해결 과정은, 더 넓은 범위의 공동체에 장기적, 간접적으로 해를 끼친다든가, 나아가 소수의 원 이해관계자의 안위마저 보장할 수 없는 역설적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런 각성에서 태동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바로 "다중관계자"입니다. 이해관계는 사슬에 사슬이 물리고 물려, 오늘날과 같은 밀집연쇄적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사회 구조에서는 웬만한 이를 구속하지 않음이 없는 보편적 현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보스 포럼은 그 본질이, 다중 이해관계자가 한 장(場)에 모여 문제를 해결하자는 취지입니다.


2. 다음으로, 포럼은 그 영역이 "경제"에 속해 있는 만큼, 작금의 현황에서 지상 과제로 대두한 "혁신"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혁신은 다음과 같은 하위 4대 과제로 나뉘어집니다.


①조직 혁신(Organizational Innovation)
이 개념을 이해하려면 앞서 말한 "다중이해관계자"의 본질을 이해해야 합니다. 종래의 하향식, 폐쇄적, 배타적, 경쟁지향적 조직상으로는 현대의 복합적인 문제와 상황에 적응할 수가 없습니다. 조직이 효율을 지향하려면, 오픈되고 교감해야 한다는 게 절대적 요청입니다. 혁신의 기본은 바로 조직의 전면 쇄신에서 출발한다는 절박한 인식이 모두의 공감을 얻는데, 다보스 포럼은 혁신 논의의 장이지만 바로 그 자신이 혁신 조직의 멋진 실례이기도 합니다.


②토론의 혁신(Interactive Innovation)
앞 서 이야기했듯 혁신 조직의 이상형은 물론이고, 이 다보스 포럼의 근본적인 소통 방식 역시 토론입니다. 종래의 토론은, 발언권의 경직적 배분으로 인해 참여자의 총의(總意)가 진정성 있게 결집되기 힘들었습니다. 토론의 혁신상은 참여자의 진입이 가급적이면 제한을 두지 않고, 가능한 한 모든 참여자의 적실한 의사를 반영해야 하며, 그 토론의 산물이 건설적이고 생산적이어야 하며, 토론의 과정이 합의적 윤리와 규칙에 기반하여야 합니다. 다보스 포럼에서 벌어지는 모든 회의는, 인터넷으로 세계에 실시간으로 공개됩니다. 토론이 과연 혁신을 지향하며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동하는지는, 인류의 지혜에 의해 즉각적인 검증 피드백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③지식 혁신(Knowledge Innovation)
통 섭을 이야기하는 세상입니다. 학문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고립되고 규격화한 지식은 그 쓸모와 위신이 크게 위축되는 트렌드입니다. 지식은 횡적으로 인근의 경계를 넘어서 정수를 흡수하고, 원격지의 대응점을 찾아 수많은 하이퍼링크 구축을 통해 작용 밀도를 높여야 합니다. 지식은 또한 종적으로 지난 시대의 족적을 반성적으로 겸허하게 스캔하는 과정을 통해 연륜의 깊이를 쌓아야 하고, 먼 미래를 두려움 없이 내다봄으로써 인류에게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다양한 배경을 지닌 참여자들의 소통을 통해 그 다양한 실현 가능성이 구체화합니다.


④영향력 도출하기(Impact Driven Innovation)
아 무리 창의적이고 효율적인 알고리즘이 발견되었다고 해도, 물적 정신적 생산의 과정에서 적시적소에 투입되어 보다 많은 소비자들에게 배포되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영향력이란, 과거의 뉘앙스처럼 귄위, 권력적 관계를 암시함이 아니라, 소통적 친화성의 다른 말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다보스 포럼은 앞서 말한 것처럼 특권적 소수만의 잔치가 아닌, 전 인류를 향한 온정적이고 오픈된 의사 소통의 장입니다. 이곳 다보스 포럼에서 시도하는 소통과 영향력은, 그 자체로 혁신적 방법과 본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영향은 언제나 쌍방향적이며, 그 효과는 선(善), 정의(正義), 풍요의 향상과 확산을 기도합니다.


이 책은, 성큼 다가온 국제화, 글로벌화의 흐름을 수도 서울 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고루 느낄 수 있는 지금, 또 세대간, 좌우 이념간의 대립을 성장통으로 격하게도 겪고 있는 우리 나라에서, 한창 자기계발에 힘쓰는 경제활동인구, 자신의 장래를 보다 건설적이고 입체적인 방면으로 설계해야 할 학생층에게 권해 줄 만한 내용입니다. 주요 2인의 저자에 의해 서술이 주도되고 있는데, 한 사람은 지긋한 나이의 진보적 지식인이며, 다른 한 사람은 비교적 젊은 나이라고 할 보수주의의 입장에 선 현직 국회의원입니다. 다보스 이야기가 만약 단일 저자의 시각에서 풀어지고 있다면, 아무리 유효하고 정확한 정보를 담아도 독자의 정서적 공감이나 각성을 "임팩트"있게 이끌어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 책은, 명실이 상부했다고할 만큼, 얼핏 교차점이 없어 보이는 대립적인 개성의 두 저자가 번갈아 가며 이 거대하고 매혹적이며 미래선도적인 단체, "마당"의 성격을 저술하고 있고, 경우에 따라 교호적 토론을 벌이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 다보스인가"를 이해하는 데에 최적의 교재, 도우미였습니다. 두고두고 인상이 남을 멋진 독서 체험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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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론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박하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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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를 흔히 스릴러 작가로 분류하곤 합니다만, 저는 그의 작풍(作風)을 두고, 특유의 쉽고 넉넉한 말투에 따뜻한 인간미를 가득 담아 공기 중 포자처럼 전파하는 휴머니스트의 옛이야기투라 일컫고 싶습니다. 이번 신작도 전혀 실망스럽지 않고, 익히 독자가 즐겨 왔던 그만의 톤이 물씬 배인, 허술한 듯하면서도 알고 보면 속이 꽉 찬 장편의 "미담"을 잘 감상했다는 느낌이네요 대만족입니다. 마무리가 약했다, 중반까지 예측이 뻔한 스토리였다 등등의 평을 하시는 다른 독자를 위해, 저 나름대로 그의 변호를 좀 해 볼까 합니다("변호"가 굳이 필요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제가 언제나 히가시노 선생의 작품을 읽으면서 느끼는 건, 어떤 장르적 외양을 하고 있건 간에 그의 작품은, 한 편의 훈훈한, 그리고 건강한 동화가 전달할 법한 감동을 독자에게 선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첫째 장치는 선하고 착한 캐릭터들의 면면입니다. 이 중에는, 환경의 보호 덕분이건 강인하고 일관된 선의지 덕분이건, 초심의 순수를 언제나 잃지 않는 믿음직한 인물들도 있고, 마치 "돌아온 탕아"를 연상시키듯 일시적으로 타락, 일탈의 모습을 보였으나, 못내 저버릴 수 없었던 양심을 회복하고 결정적 국면에서 "한 방"을 해 주는 성격들도 눈에 띕니다. 대체로 보면 그의 작품세계에 등장하는 악인들도, 근본부터가 완전히 잘못된 이가 드물고, 악하면서도 어딘가 허술한 점을 노출하여 결과적으로 "선의 회복, 실현"에 반어적, 비(非)고의적으로 기여하는 해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현실의 세상 만사가 이처럼 불변의 조리를 염두에 두고 진행되었으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우리가 잘 알듯 우리의 모습은 훨씬 사악하고 타락했으며, 일견 가망이 없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기에 밀폐 용기 속에 일시적 교란이 일어나도, 결국에는 제 조화와 균형을 찾아가는 히가시노 선생의 작은 가공의 세계가 더욱 애틋이 정감을 풍기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겨울에 그 상상만으로도 서늘한 설산(雪山) 스키장을 배경으로 한 픽션을 읽으면, 그 애초의 미학적 쾌감이 증대될까요, 아님 반감이 될까요? 납량(納凉)은 여름철에 실시해야 제격이라는 생각은, 이 소설에서 구리바야시 상이 어린 중학생 아들 슈토에게 예전 낡은 방식의 스키 이야기를 들려 주는 그 품새 만큼이나 시대에 뒤떨어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이 가볍고 작은 볼륨을 가방 안에 넣어가서, 하루의 코스가 끝난 뒤 다음 날의 질주를 기약하며 잠을 청할 때, 리조트의 숙소에서 읽기라도 하면 제격일 것 같습니다. 결국 장르소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얼마나 그 처음의 의도 관철에 성공했는지가 중요하지, 책을 펼쳐 든 독자의 주변 물리적 기후 조건이 문제될 건 없습니다. 어쩌면 겨울에는 이처럼 겨울 이야기를 읽어야 제 철을 건강하게 나는 방법인지도 모릅니다.

 

히가시노 선생은 연구를 성실히 하고서 새 작품을 내어 놓는 편입니다만, 그 서술 태도에는 과장이나 현학이 보이지 않아 좋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도, 자신이 예전에 알거나 익숙했던 패턴(예를 들면 과거에는 리프트가 대부분 저속[低速] 사양에다 1인용이 많았다는 식)을 구세대 캐릭터의 입을 통해 술회하면서, 다만 새로운 시대에 바뀐 양식은 이러이러하더라는 설명은 젊은 영혼의 역할로 배당합니다. 처음부터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작가적 가식이 없고, 모르는 건 독자들과 함께 배워나가겠다는 태도가 그대로 묻어나옵니다. 이러니 그 노령에도 젊은 독자들과 여전히 호흡을 함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려면서도 예컨대, "심설(深雪)은 특유의 부유감(浮游感)이 있어 좋다."는 진술처럼, 품격 있고 실용적인 감상까지 요약적으로 삽입하는 그 여유도 마음에 듭니다.

 

가식과 위세가 없음은 그의 캐릭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소설은 애초에, 평범한 선의를 지닌 사람들이 엄청난 규모의 재앙을 막기 위해 분투하는 내용이지만, 가가 형사 같은 뚜렷한 개성의 주역이 등장하는 다른 시리즈에서도 그 사정이 다르진 않습니다. 우리와 크게 지적 능력에서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추고 있고 적절히 발휘할 수 있는 추리력, 논리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결국은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해 냅니다. 그리고 이런 공훈을 세울 수 있는 결정적인 동기는, "진실은 밝혀져야 하고 정의는 회복되어야 한다."는 순수한 선의지, 공민 의식이라는 점도 거의 언제나 공통적입니다. 사실 장르물에서 기발한 트릭은, 예전의 고전들이 이미 소진시켰고, 현대에 남은 것은 대단히 기교적인, 그래서 오히려 가치가 떨어지는 번잡한 장치들 뿐입니다. 히가시노는 이 점을 알고, 기술적 수월성의 추구를 목표에서 배제한 채 작품 구축을 해 나갑니다. 그리고 독자라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공감할 휴머니티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런 시도는 이번 작품에서도 멋지게 성공했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평가하고 싶네요.

 

이 소설에서 가장 비난의 초점이 될 만한 악역은 물론 도고 소장입니다. 연구와 학술의 영역에서는 거짓과 허위의 태도가 엄격히 배제되어야 하는데, 이 사람은 일본 유수의 대학 기관의 고위 책임자이면서도 양심을 속이는 행태를 밥먹듯 보이는 위인입니다. K-55 개발 자체가 벌써 불법적인 용역 수임이었고, 그의 부조리한 관리 방식은 하급 연구원인 구즈하라에게 배신과 일탈의 동인을 제공하다시피 했습니다. 구즈하라의 악행이 물론 더 큰 악당의 잘못에 의해 합리화될 수는 없습니다만, 여기 이 소장은 지위상의 책임 뿐 아니라 개별 행위에 있어서의 과실도 함께 물려야 할 인물임이 분명합니다. 구즈하라는 비효율적이고 부도덕한 조직에서 더 이상 소속의 이유와 의무감을 찾을 수 없었고, 이런 조직이 버젓이 높은 평판을 유지하며 부당한 이익을 챙기게끔 용인하는 사회 전체에 대한 경멸감까지 갖게 됩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수십만 인명을 한순간에 희생시킬 수 있는 무서운 테러 예비 단계를 일개인의 몸으로 기획하는 결과를 낳으나, 때마침 천벌의 섭리라도 작동한 것인지 그는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습니다. 문제는, 테러의 주범이 돌연 사망함으로써 그 예방과 진압에의 길이 아주 오리무중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도고 소장은 처음에, 그저 사태를 묻어버리려고 했었으나, 가장 신임하는 부하 직원 구리바야시의 강력한 만류로 마음을 돌려먹게 됩니다. 구리바야시는 순수한 양심의 발로에서 나온 행동이었으나, 도고 소장은 결국 당국이 최종 귀책 사유를 반드시 자신에게서 발견하리라는 두려움, 그리고 구리바야시를 비롯한 다른 부하 연구원들의 입단속이 불가능하다는 인식 때문에, 첩첩 설산 중 한 그루의 나무 밑에 묻혀 있을 밀폐 용기를 찾아 나서는 일에 혈안이 됩니다. 두 사람의 행동 동기는 이처럼 큰 차이가 나는데, 다만 그 수행 방식의 비능률성과 무계획성만큼은 서로 닮았습니다. 도고 소장은 잔재주에만 능했을 뿐, 돌발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전혀 없다시피한 위인입니다. 예를 들어, 구리바야시가 원군을 보내달라고 하자, 소장은 "입막음 대상이 들어나면 사후 관리가 어려워진다."는 단순한 동기 하나로 주저하다가, 리조트 구호 요원(소장 입장에서는 그 이름을 알 수 없었을, 아니 알 필요가 없었을 네즈)을 잘 설득했다는 전화 연락 하나에 바로 기다렸다는듯 단념해 버립니다. 치밀하고 생산적인 악당에 되기에 너무나도 부족한 기량입니다. 그저 부하 직원에게 닦달하고 보채는 것 말고는 아무 계획이 없는 분수입니다.

 

구리바야시 역시 순전히 행운에 의해 그 정도까지라도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히가시노 선생의 작품에서 언제나 감지되는 바처럼, 그의 세계 속에서는 주인공들의 의식적인 분투 외에, 이해할 수 없는 제3의 손이 하나 개입하여, 사태의 바른 해결에 일조를 하곤 합니다. 구리바야시는, 만약 겨울 스포츠를 좋아하는 아들과 아들의 인맥이 없었다면, 스키장의 개략적 위치도 파악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을 것입니다. 스키장에서 네즈와 치아키 같은 선의의 인물들, 또 미하루, 이즈미, 유키 같은 아이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 사태는 과연 어떤 방향으로 굴러가고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을까요? 구리바야시, 그리고 도고 소장은 이 끔찍한 테러 전단계 사태를 수습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고, 어느 정도는 사태의 유발 책임자이기까지 합니다. 가가 형사 같은 믿음직한 추적자, 해결사가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공권력 당국은 처음부터 정보에서 배제되어 있었습니다. 네즈 등은 막막한 설산에서 그 누구보다 험지를 누비고 다닐 신체적 능력이 갖추어진 인물이지만, 거대한 음모와 기술적 난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소시민일 뿐입니다. 끔찍한 테러 발발이 목전인데, 이렇다 할 영웅이 없습니다. 사건은 파국으로 치닫는 게 상식에 부합하는 경로였겠으나, 알 수 없는 우연과 행운이 거듭되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나갑니다. 그런데 이런 설정이 조금도 어색하거나 무리스럽지 않게 다가옵니다. 왜일까요? 겉으로 보아 조금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일련의 상황이, 사실은 인간성 보편에 내재한 선의지로 인해 이미 수렴의 어느 한 지점을 예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말하자면, 우연이고 행운의 소산인 듯하나, 사실은 필연이요 사필귀정의 더 튼튼한 압설(壓雪) 정규 코스로 그 모든 사건들은 질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우연"의 배후에는 인간의 선한 마음이 먼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었고,이런 이심전심의 공감을 두고 우리는 "신의 섭리"라고 불러 줘도 됩니다.

 

히가시노 선생은 본격 소설가로 데뷔한 사람이 아니지만, 노력파 다운 성실성과 여유가 묻어난다는 점은 앞에서 얘기했습니다. 꼭 보면 소설 중간쯤 가서, 독자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는 웃음을 자아내는 재주도 선보입니다. 구리바야시는 네즈들의 추궁에 못 이겨, "섭씨 10℃ 이상이면 소멸해 버리는 특수백신"이라는 엉터리 핑계를 지어냅니다. 우리가 안 봐도(?) 짐작할 수 있듯, 구리바야시는 능란하게 낯빛을 바꾸지 않고 거짓을 늘어 놓을 위인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특별히 허술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 사명에 느슨하게 임하는 나쁜 습성이 있는 것도 아닌 네즈는, 이 말을 곧이 듣고 테디 베어의 수색에 나섭니다. 상관도 "어차피 너의 일 중 하나"라며 다른 직무를 면제해 주기까지 합니다. 이 동기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뭔가 미심쩍지만, 왠지 도와줘야만 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는 느낌이었죠. 실상 구리바야시는 분명 거짓말을 한 데다, 나쁜 세력의 도구로까지 움직이던 처지였습니다. 상대는 특별히 바보가 아니었는데도 그의 들러댐에 넘어가고, 나아가 근원적인 신뢰까지 보냅니다. 이는, 결국 저 먼 섭리적 차원에서 작용한, 보다 큰 공동선에의 이끌림 같은 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이야기를 나중에 보고받자, 도고 소장은 "섭씨 10℃ 이상에서 소멸하는 백신이라면, 인체에 무슨 수로 작용을 한단 말인가? 방귀만큼도 영향을 못 미치는 백신이라니 제대로 지어냈어야지!"라고 짜증을 부립니다(독자인 저도 앞에서 의아해했기에, 이 대목에서 크게 웃었습니다). 여기에 구리바야시는 그답지 않게" 그건 소장님 같은 전문가나 알아채지 일반인은 그냥 그러려니 할 뿐입니다!"고 받아치죠. 어찌보면 세상 사는 융통성이나 요령도 지지리 없는, 되다 만 악당과 졸개 사이의 웃지 못할 촌극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위험한 물질의 운명이, 이처럼이나 빈 구석 많은 엉터리들의 손에서 좌우되고 있을 무렵, 진짜 치밀하고 음험한 악당 한 명이 새로운 변수로 등장합니다. 겉보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감정도 의욕도 없는 무사안일 순종형 여직원이었던 오리구치 마나미가 바로 인물인데요. 이 사람은 알고 보니 진정 무서운 위험 분자였습니다. 그녀는 머리도 좋고 생각도 멀리, 깊이 할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빼어난 학업 성적을 올려 봐야 출세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괜히 남의 미움이나 받기 좋다"며 만점에 가까운 시험 성적을 하위 조작까지 하는 무서운 염세형이었습니다. "인생은 한방이다." 그는 투명인간처럼 굴신, 조신하여 남의 경계를 푼 후에, 결정적 찬스를 노려 거금을 우려낼 기회만 노리는 가공할 이중인격자였죠. 더 무서운 건 이런 여인의 가면 행각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녀의 진단과 판단이 맞다는 걸 확인시켜 주고 있는 사회 병리와 모순이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소설 마지막에 가서, 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도고 소장의 위임을 받고 물건을 인수하겠습니다."며 구리바야시를 찾습니다. 참 정말, 허무하리만큼 간단한 한 수입니다. 처음에 저는, 이 소식을 도고 소장이 알면 "뭐야? 난 그런 명령을 내린 적 없는데!"라며 길길이 뛰는 무능 악역의 클리셰 한 장면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더군요. 오히려 더 강한 한 방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리구치는 처음부터 도고 소장을 찾아가서 정식 명령까지 받아온 것이었습니다. 하긴, 그러지 않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소설을 꼼꼼히 읽고 이후 진행을 작가의 호흡에 맞춰 예측해 보면, 이처럼 히가시노의 센스 있는 스텝이 체감(體感)되어, 그 페이지 넘기는 재미가 더합니다.

 

과연 마지막이 "약했다"고 생각되십니까? 어설픈 악당들을 실컷 고생시키고 혼쭐을 빼 놓은 후에, 그녀는 완벽한 계획을 빈틈 없이 수행하고 유유히 출국할 태세입니다. 바로 그 직전, 그녀로서는 어이 없다 할 우연과 낭패가 개입하여,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죠. 제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마지막의 그 반전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미 소설의 앞 부분에서, 부자 간의 묘하게 엇갈리는 의지와 감정의 대치 속에, 복선이 마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위험은 임계 수위를 넘었고, 영웅은 없고, 통제의 기술 수준은 인간의 악의를 감당 못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무엇이 파국과 재앙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겠습니까? 오로지, 어린아이와도 같은 선의지, 양심, 연대 의식입니다. 히가시노는 마치 동화에서처럼 이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를 놓친다면, 우리 역시 두 눈 버젓이 뜨고도 감지 신호를 보내는 테디베어를 나꿔 채지 못한 빙원(氷原)의 초라한 낙오자나 다를 바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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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순간들 - 불멸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의 자전적 에세이 부글 클래식 boogle Classics
버지니아 울프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빅토리아 시대의 숨막힐 듯한 속박이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새 세기를 맞은 영국의 지식 계층은 다양한 방향으로 활로를 모색합니다. 다른 나라의 발달 국면과 비교하여 영국의 그것이 언제나 눈에 띄는 점은,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거대 담론과, 이른바 "시대정신"에 매몰됨 없이, 개인과 개성, 개별성의 건강한 성장이 언제나 제 색깔, 제 향기를 가지고 각각의 텃밭에서 피어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장 버지니아 울프의 동시대, 다른 유럽 국가의 사회상과 비교해 보십시오. 한다하는 지식인들도, 결국은 크고작은 소속의 "진영논리"에 물들어, 소집단의 얕은 명분과 구호 아래 파멸적인 분열상을 보이거나(스페인, 프랑스), 아니면 소수파를 압살하는 섬뜩한 전체주의를 풍선처럼 부풀려 개인과 자아의 바람직한 발달상을 저해하는 결과(독일)를 낳았을 뿐입니다. 영국은 이런 대륙의 조류에 휩쓸림 없이, 그저 뉴트럴하고 제 위치에서 한없이 진지한, 따라서 고유의 정서와 사유에 정직한 개인개인들로 공동체를 꾸려갈 수 있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우리가 잘 알듯, 결국 발작 끝에 비극적인 자살로 생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녀는, 특유의 섬세한 정서와 칼날 같은 이성이 주는 영혼에의 길항을 견딜 수 없었던 탓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만, 파국의 결단이 내려진 그 순간의 정신상태를 두고 의학적인 재단(정상/비정상)을 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특별한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소수 지식인들의 멘털은, 얕고 속된 상식론으로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직접적인 비교 대상은 아닙니다만, 지난 세기 말 프랑스의 천재적 맑시스트인 루이 알튀세르가, 자신의 부인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결국 책임조각사유가 증명되어 풀려 난 일도 있습니다.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정신은, 다른 기준에 의해 평가되어야 하죠.

 

이 책은 모두 세 챕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챕터는 자신의 조카 바네사 벨에게 쓰는 편지의 형식인데, 역자의 친절한 설명이 말해 주듯 이 조카는, 버지니아 울프가 이 편지를 쓸 무렵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역자 후기에 자세히 나오지만, 바네사 벨은 물론 편지라는 지면의 세계에서만 등장한, 상정된 존재가 아니고, 스페인 내전 당시에 참전까지 했다가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기도 한, 불꽃 같은 존재감으로 세상을 물들인 실존 인물입니다. 이처럼 태어나기도 전에 그 이모(버지니아 울프)의 사랑과 기대를 듬뿍 받은 일이 있었기에(성장과정에서도 마찬가지로 많은 애정을 쏟았다고 하는군요), 한 생명과 영혼이 그 건강과 순결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대체 앞으로 태어날 생명이 어떤 성품과 기질, 그리고 지향을 지닐 줄 알고 이처럼 자상한, 자세한 내력을 풀어 주고 있는 걸까요. 그녀 자신에게는 어머니가 되고, 태어날 생명에게는 할머니가 될 줄리아 스티븐은, 버지니아 울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이 편지에서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를 묘사하는 대목은, 아무리 혈족의 입장에서 행한 관찰과 분석이라고 하지만, 그 서술과 분석의 상세함과 미적 완결성이 주는 각성과 충격이 현대의 독자마저 혀를 내두르게 합니다. 딸이라고 해서 반드시 어머니를 속속들이 아는 것도 아니고, 그 반대 역시 언제나 참이 아닙니다. 이 대목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어머니를 설명하는 그 모든 기준과 분석틀, 언어는, 조금만 방향을 바꾸면 세상의 그 어떤 개성과 인격에도 적용할 수 있는 개념들입니다. 줄리아 스티븐은 물론 비범하고 예외적인 인물이었습니다만, 한 개인에 불과한 "존재"로부터 이렇게나 많은 "추억"과 "상념"이 도출된다는 게 그저 놀랍게만 다가왔습니다.

 

한편으로 그녀의 영혼 깊숙히 심어진 불안과 고뇌의 단초는, 바로 이런 비범한 어머니가 남기거나 지어 둔 인생의 족적, 그리고 그에서 파생된 인연(공교롭게도 이런 제목의 작품이 있죠)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편지의 수신인으로 예정된 바네사로서는 촌수를 따지기도 힘겨울 스텔라 덕워스는, 성(姓)이 잭슨(태생), 덕워스(첫남편), 스티븐(둘째 남편이자 버지니아 울프의 생부)으로 세 번이 바뀐 줄리아 스티븐의 첫째 남편과의 소생인, 씨다른 언니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그것이 통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도 순간의 알력과 다툼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달갑지 않은 복합가정에서의 인연과 교차였는데다, 개성도 그 이상 강할 수 없는 캐릭터들이 맞물리고 부딪히는 상황이었다면, 그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였을까요. 멜론이나 포도 한 입, 한 알도 입에 익은 토양의 소산이 아니면 임산부의 까탈마냥 그 미세한 미감의 변형을 못 견뎌 하며 토해 내었을 듯한 버지니아 울프(뿐 아니라 그 핏줄들이 다 마찬가지더군요)였다면, 그 알레르기반응의 격함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2부 과거의 스케치는 버지니아 울프 개인의 말년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자료입니다. 진정한 회고록 성격을 갖춘 건 이 부분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작가가 다루고 그려 내는 대상과 그 결과물에는 아무 제한이 없어야 원칙이겠지만, 상념과 묘사를 이런 스타일로 풀어내는 작업은, 남성에게는 그가 아무리 문학적 천재라도 불가능한 과업이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3부는 주로 그녀가 속한 클럽 회원들 앞에서 낭독을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다는 게 역자의 설명입니다. "낭독"이란 즉시의 청자, 청중을 전제로 하는 거동이며, 따라서 그 원고는 비평자의 즉각적인 반응을 언제나 예비하는, 오픈되고 교호적인 속성을 지닙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결코 고립된 정신세계를 지닌 영혼이 아니었으며, 역자의 표현을 빌리자면(그리고 독자 누구의 생각으로도 공감할) "손가락 하나만 잘못 대어도 바스라질 것 같은 섬세한" 그 정신세계가, 사실은 다른 개성의 지성으로부터의 즉각적인 판단 작용에 언제나 반응 태세를 갖춘 역동성을 지니고 있었음도 증명하는 셈입니다. "인생이란 기본적으로 슬픈 운명이며, 우리는 기껏해야 그 슬픈 운명을 용감하게 직시하는 선에서 그 최선을 기대할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나 많은 인식과 감성의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생을 마감한 그녀의 응원이 있기에, 우리는 그저 슬픔 이상의 어떤 적극적인 시선으로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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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집행인의 딸 사형집행인의 딸 시리즈 1
올리퍼 푀치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독일의 바바리아(바이에른)는 히틀러가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이후 나치의 발호를 가능하게 한 온상 구실을 (불명예스럽게도) 맡은 적도 있고, 대체로 대단히 보수적이며 시대의 계몽적 조류에 적응이 늦은 고장이었습니다(지금은 꼭 그렇진 않겠지만요). 지금으로부터 근 400년을 거슬러 올라가, 30년 전쟁이 독일 전역을 피폐하게 만들며 통일과 근대화를 몇 걸음 더 늦춰 놓는 재앙을 끼치고 끝났을 때도, 유독 이 지역은 분쟁의 참화를 더욱 아프고 파괴적으로 겪어, 이후의 발전을 독일 타 영방보다 늦게, 그리고 느리게 치런 낸 역사적 경험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이미지출처: www.ndr.de, stakedamsels.com)

 

현대 문명국에서는 직업의 자유라는 걸 당연히 여기고 이를 누리지만, 중근세에만 해도 직업의 선택, 수행, 심지어 종료의 모든 과정은 상위 신분자의 면허가 있어야 했고, 직업 조합(길드)의 통제를 따로 받아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곧 조상 대대로 물려 받은 가업일 가능성이 컸습니다. 유럽의 예를 들 것도 없이, 바로 우리 조상들의 사정만 해도, 자유민인 농민 계층은 대대로 부쳐 먹던 토지에 계박되어 있는 형편이었고, 가축 도살, 예인, 무속 등의 직분은 혈통과 함께 철저히 세습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들을 천민으로 고착하여 사회적 계층 이동을 철저히 막은 것은 아주 뿌리가 깊은 mores에 해당했죠. 개인의 힘으로는 이에 저항할 수 없었고, 타율적 근대화 조치인 갑오경장 이후에나 형식적으로 법적 제약이 해제되었습니다.

 

제가 조금 실망한 것은, 듣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사형집행인"을 직업, 가업으로 가진 주인공이, 그 인적 자질만은 비범하고 탁월하게 설정된 종래의 관습을 작가 올리버 푀치(Oliver Pötzsch)가 미처 떨치지 않고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었다는 점인데요. 천역에 종사하는 사람이, 그 인간적 품격과 능력까지 남의 멸시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점에서, 제 운명을 자력으로 개척하며 온갖 역경을 헤치고 마침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내러티브란, 언제나 읽는 이에게 감정의 고양과 정서의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특별한 업적을 세우는 일이야 따지고 보면 딱히 칭찬할 것도 아니지 않을까요? 오히려, 남들보다 그 처한 신분적, 신체적, 정신적 조건이 공히 열악했음에도, 그 모든 불운을 딛고 자신의 의지만으로 정점에 오르는 인생이, 오늘날의 독자에겐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대대로 사형집행인의 직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들의 천대만 받아 오던 한 사나이가, 자신보다 더 비참하고 억울한 지경에 빠진 자를 연대의식, 박애 정신을 발휘하여 구명하고, 불의하고 비겁한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는 구성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는 뜻입니다.

 

혹시, 남주건 여주건 여전히 잘생기거나 아름다워야 하고, 혹 그게 안된다면 강인한 신체에 탁월한 정신적 능력을 발휘하는 세팅이라야지, 신분이나 조건까지 나쁜 판에 이런 일체의 매력조차도 결여한 설정이라면 도저히 몰입이 안 된다는 분이 있다면, 그런 독자는 이 책을 안심하고 고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주인공 야콥 퀴슬은 직분이 천역이라는 것 외에는, 머리가 비상하고, 듬직한 신체 조건에 완력도 상당하고, 그에 어울리게 용기와 배짱도 대단하며, 그와는 잘 어울리지 않게(?) 지식욕까지 왕성하여 타 분야의 전문가들을 부끄럽게 만들 만큼 체계적인 지적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억울한 처지의 희생양이 권력의 냉혹한 책략, 대중의 어리석은 광기에 의해 처단되고 목숨을 잃는 부조리를 눈 뜨고 못 봐줄 만큼 정의감이 강한 사람입니다. 사실 저는 이도저도 아무것도 못 갖춘 사람이, 선의지와 끈기, 성실성만 가지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는(혹은 그 일보 직전에 좌절하는) 이야기를 더 기대했습니다. 야콥 퀴슬은 이미 신으로부터 받은 축복이 많기에, 설사 이런저런 장애가 그를 가로막아도 이를 극복해 나가는 모습은 감동이라기보다는 당연해 보였던 게 제 입장이었습니다.

 

소년이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가혹한 폭행을 당하고, 숨이 채 끊어지지 않은 채 강물에 버려져, 이웃 주민들에 의해 발견됩니다. 그의 부친이 라이벌 도시 아우크스부르크의 운송 조합과 갈등 관계에 놓였기에, 처음에는 다들 그쪽으로 사태의 귀인을 잡아 갑니다. 헌데, 사체에는 흑마술의 징표가 새겨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단서 하나만으로 easy victim 하나를 상정한 채, 마을의 산파를 살인의 주범으로 지목하여 광기를 발산, 린치를 가하기 직전입니다. 산파를 사형(私刑)의 곤경에서구해낸 사람은 사형집행인 쾨슬이고, 선거후(선제후. elector) 공작 쪽에서 파견한 진용이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의 7일 간에 진범을 잡아내지 않으면, 그는 애꿎은 이웃, 자신이 결백하다고 믿는 무고한 인명을 제 손으로 죽여야 할 판입니다.

 

이런 설정은 참 역설적이면서 묘한 기시감까지 자아냅니다. 사형집행인이, 원사(寃死) 직전에 몰린 결백한 영혼을 구해낸다는 테마, 게다가 그 사형집행인은 가외로 익힌 약학, 의학 지식까지 전문가 수준으로 구비하고 있어, 주업은 사람을 죽이는 일, 부업은 사람을 낫우는, 때로는 살리는 영역에까지 확장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생과 사의 양 벡터가, 양심과 순수를 언제나 지향하는 이 쾨슬의 영혼을 파멸에의 죄의식으로부터 균형을 잡으며 지탱해 주고 있던 셈이죠. 또한, <환상의 여인>이나 <영구차로 돌진하라(조나선 라티머 작)>에서 보던 테마, 억울한 죄인이 감옥 안에서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 동안, 밖에서는 명탐정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러 동분서주하는 이야기도 우리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신분을 초월한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도 적절하게 끼어듭니다. 도시의 중산층, 신사 계급으로 편입되기 직전의 의사 가문의 젊은이는, 얄궂게도 공동체의 천민이자 제도외적 의약 처방으로 마뜩치 않은 경업(競業) 관계에 놓이기까지 한 사형집행인의 아름다운 딸(바로 이 책의 제목, 독일어로는 Henkerstochter입니다)을 좋아합니다. 막달레나라는 여성의 미모와 순결함 못지 않게, 그 부친이 지닌 방대한 의학서, 그리고 그것이 상징하는 집요하고 진지한 지식욕을 존경하는 청년입니다. 오늘날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안락과 사회적 기반을 마련해 준 그의 부친이지만, 정작 자신이 끌려하는 이런 요소들은 결여하고 있다는 게 그들 부자가 처한 비극이겠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젊은 세대들은, 그가 처한 사회적, 정치적 입장, 또 그가 속한 출신 계급에 무관하게, 시대의 부조리와 모순에 대한 강한 혐오감과 날카로운 타파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과업을 도와 앞에서 낡은 인습과 폐단을, 마치 단호하고 강력한 terminator의 뚝심으로 정지(整地)하는 소명을 지닌 듯한 장년의 쾨슬이 있습니다.

 

전근대적이고 인간의 계몽, 자유를 방해하는 신분 계급, 제도의 작폐도 문제이지만, 선의의 주인공들을 곤경에 몰아 넣는 데에는 다름 아닌 무지몽매한 대중의 광기, 집단 히스테리도 큰 몫을 합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일부에서 신드롬이라 할 만큼 대지를 황폐하게 했던 "마녀사냥"이라는 게, 대체 왜 발생하고 만연했는지에 대해 역사서는 많은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중 속시원한 논증에 성공한 시각이 별로 없더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이 소설을 읽고, 그런 집단 광기가 왜 역사적으로 존재했었는지 비로소 해명이 되는 느낌이었는데요. 전쟁으로 인해 억울한 피해를 겪고, 그 책임을 지배 계층에 따질 방법은 없고, 그 모든 불의와 상흔을 이성적으로 정리할 능력은 되지 않고, 어리석은 대중은 혁명이 아닌, 자기 부정, 자기 파괴의 방식으로 가장 약한 희생자를 골라 집중 한풀이의 대상으로 삼는 과오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카타리 파의 학살", "주기적인 유태인 사냥" 등 주로 권력층의 조장, 유도에 의해 이런 비극이 저질러진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민중 자신이 어리석고 우매하며 타락했던 탓에 더 크게 기인한 것 아닌가, 이 책에 등장하는 그런 집단 히스테리는, 인간 본성의 선의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희생되어야 한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까지, 고아나 취약 계층에 대해 적극적인 단죄와 공격에 가담합니다. 나치 체제 하에서, 가장 가혹한 박해의 대상이 된 것이 불구자, 정신병자, 유태인(부유한 자들은 일찌감치 빠져 나왔습니다. 중산층과 서민만이 수탈과 살상의 대상이 되었을 뿐입니다)들이었는데, 체제의 모순과 실패의 죄과를 결국 이들이 다 걸머지고 절멸된 셈이죠. 만약 또한번의 재앙이 닥친다면, 그 다음번의 희생양은 앞 단계에서 열심히 돌팔매질을 했던 대열 중 가장 약한 자들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지배층의 악의 못지 않게, 무지와 타락이 빚은 민중의 악덕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게 이 작품의 몇몇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천민 쾨슬의 존재의의를 가장 두드러지게 하는 건, 이런 암흑과도 같은 총체적 모순을, 보편적 지식과 이성의 힘으로 타개하려는 그 바른 의지에 있습니다. 살인범을 잡는다고 이 근본적 부조리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가 명탐정이기만 했다면, 공동체의 폭동 하나를 사전 예방한 공적에 그칠 뿐입니다. 하지만 그는 구원자, 치유자, atoner의 소명까지 가슴에 품었기에, 길고 긴 암흑의 한 기간을 제 나름의 방식으로 "종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무지와 타락에 최종의 사형을 선고하고, 이를 억센 두 팔로 집행한 진정한 영웅이었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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