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자격 - 내가 제대로 키우고 있는 건가
최효찬.이미미 지음 / 와이즈베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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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떤 소설을 읽어 보니, 아들이 위기에 처한 아버지의 목숨을,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 주면서 "낳아 주신 은혜에 대해 조금이라도  그 빚을 갚았다."고 말하는 대사를 봤습니다. "부모의 자격"이라는 타이틀을 단 이 책을 보면서, 처음에는 좀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습니다. 낳아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부모님인데, 그 부모 노릇을 하기 위해 또 다른 무슨 자격 같은 걸 꼭 갖춰야 하는 걸까요? 부모에 "자격"이 있다는 그 말 자체가 생소하고, 위화감을 느끼게 합니다. 저자를 보니 최효찬 소장님입니다. 평소에 우리 교육 문제, "교육"에만 치중하다가 사회 전반의 도덕성, 경제 기반이 붕괴하기에 이르렀다는 우려를 낳게 하는 우리의 현실에 대해, 명쾌하고 학문적 기반을 갖춘 진단을 여럿 내어 놓은 분이죠. 모두가 걱정하고 모두가 불만족스러워하지만, 아무도 그 근본 문제에 대해 선뜻 답을 내놓기를, 행동에 옮기기를 주저하는 교육 문제, 과연 어디서부터 그 시작을 잡아야 할까요?


우선 저자는, 재수, 삼수를 해서라도 명문대학에 가야만 한다는 강박 관념의 허상부터 지적합니다. 한국 사회를 비판하는 입장이건, 그렇지 않은 입장이건, 이 사회가 학벌 위주로 단단하게,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이 꾸려져 있다는 사실에는 대체로 공감합니다. 대학 입학 당시부터 대학의 서열화, 그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의 신분(카스트) 서열화가 이루어지고, 이로 인해 수많은 문제가 파생합니다. 그 와중에, 심적 부담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학생마저 나오는 현실입니다. 내 자신의 인생이 행복해 지기 위해 점수도 올리고 명문대도 가는 것인데, 우리의  현실은 주와 객, 목적과 수단이 도치되어, 점수를 위해 생명포포함한 다른 모든 가치를 희생해도 무방하다는 쪽으로 흐르고 말았습니다. 설사 좋은 대학을 나와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 직종에 종사한다 한들, 성장 과정서 바르게 함양되지 않은 인성 정립과, 사춘기에 적정한 자양을 흡수하지 못해 영혼에 새겨진 상처의 힐링은, 이후 어떤 물질적 보상, 세속적 성취를 통해 가능할 수 있을까요?


특히, 얼마 전 친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어느 학생의 예는, 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자성의 기회를 마련해 주기도 했습니다. "너는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해서, 명문 대학에만 진학하면 된다." 만약 누가 "부모의 자격"를, 이런 학업 뒷바라지 차원에서 거론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어머니는 유관 기관에서 훈장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훌륭한 자격을 갖춘 부모였을 텝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서 그처럼 각별한 모습을 보였음을 잘 알고 있음에도, "내가 원하는 자아"와 "어머니가 원하는 자아" 사이의 갈등,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점수 따기 경쟁의 와중에 자신과 부모, 그리고 주변 모두의 삶을 망치고 만 것입니다.



 

책은 이 모든 암울한 현실, 끝이 보이지 않는 악순환의 고리를 두고, "당신이 생각하는 그 방향이 옳은 것"이라며 독자에게 실증적 해법을 제시합니다. 현재 문과 계열에서 입학 점수 피라미드의 서열상 가장 높은 위상을 점하고 있는 서울대 경영학과 신입생들을 상대로 조사를 한 바가 이 책에 실려 있습니다. 이 결과를 보면, 신입생 중에 어려서부터 내내 1등만을 도맡아 하거나, 부모님이 특별히 베푼 배려로 해당 학과에 입학한 경우는, 생각보다 그 비중이 높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예 외적인 경우이긴 하겠으나, 집에 오면 게임이나 기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전혀 간섭 없이 방임하고, 휴일에는 신나게 축구를 하게 해 준 부모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분들의 말은 "그렇게 해서 풀린 스트레스, 좋은 기분, 컨디션 이런 게 2~3주는 가거든요."입니다. 설사 아이가 공부를 하겠답시고 방 안에 틀어 박혀 있어도, 그 동안 딴 생각으로 가득하거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해 받은 스트레스를 다른 데서 풒어야 한다."는 네거티브 이펙트로만 그 머리가 채워져 있다면, 앞으로의 공부 능률 상승을 기대할 수 없죠(극단적으로는 위에 예로 든 학생의 비극을 초래할 수도 있겠구요).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흔히 "강남 엄마식"이라고 하는 아이들 관리법을 모두가 따를 필요가 없다는 점입니다.

신 교수님은 언제 뵈어도 지적이고 안정된 풍모를 보이시는군요.


소위 "부모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경쟁적으로 이뤄지는 자식들의 "대리 경주마 노릇"은, 그 효과도 의문스러울 뿐더러, 나중에 따로 치러야 하는 부작용의 비용도 만만치 않고, 실제로 부모나 아이 모두 각양각색일 자질과 체질, 성향을 고려하면 따라할 수도 없다는 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아이를 강제로 혹사하고, 원치 않는 행동을 기계적으로 조련하고, 궁극적으로는 부모와 아이 모두 삶과 행복으로부터 소외되게 만드는 "미친 질주"는, 그 과정이나 성과 면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시지포스의 도로(徒勞)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부모님들은 아이들 교육을 위해 그저 노심초사입니다. 아빠는 "내가 벌어오는 수입이 부족해서 아이 사교육에 들이는 비용 조달에 지장이 있을지" 애를 태우고, 엄마는 그저 또래들과 정보를 교환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일반고에서 1등급하는 것과 특목고 1등급은 차원이 달라." "수능은 어차피 재수생한테 안 되고, 수시(그 중에서도 입사관 전형)는 자사고 애들한테 다 밀리게 되어 있지." "이렇게 애를 쓰는데 스카이를 못 가면 어쩌지? 어떤 엄마 자살했다고 신문에 날지 모르니 다들 알아서 봐." 마지막 말씀이 압권입니다. 아이를 제대로 뒷바라지 못 하면, 그게 부모 자격을 이미 상실한 것이고, 아이한테 해 줘야 할 도리, 나아가 이 사회 성원으로서 제 구실을 못한 낙오자라고 스스로를 단죄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누가 강제한 게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가 이런 불문율, 철의 규약을 이미 합의 하에 생성하여, 법보다, 도덕보다, 종교보다 강한 구속력으로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습니다.


저자들 역시(최 박사님의 저서를 여럿 읽어 온 독자들은 아시겠지만) 명문 대학을 나오고, 한국에서 상위 몇 %안에 드는 엘리트들입니다. 이런 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니만큼, 그 말이 주는 설득력은 남다릅니다. 원하는 대학을 가도 불행해지는 아이가 있으며, 남들이 선망하는 직장을 잡아도 그 안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는 이가 있습니다. 행복은 철저히 주관적인 것이며, 다른 이가 세워 둔 표준에 억지로 맞춘다고 없던 행복이 달성될 수 있는 게 아니죠. 저자들의 주장은 그것입니다. 1) 과연 내가 원하는 삶이 남들 따라만 한다고 이뤄질까? 2) 기계적이고 강요된 방식의 공부가, 과연 원하는 성적을 이뤄 낼 수 있을까? 이 두 문제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주체적 사고와 관점으로 기울여 보라는 것입니다.


입 시 경쟁의 가혹한 장은 그 자체로 참고 봐 주기 끔찍한 무질서입니다. 자살이니 죽음이니 하는 사례가 아무리 예외, 소수의 몫일 뿐이라 해도, 마치 환경의 피폐를 지표식물처럼 미리 감지하고 모두에게 경고하는 타산지석으로 새기지 못할 바 없습니다. 현재 한국의 눈부신 발전은 분명 엘리트 위주, 수월주의 교육으로 달성되어 왔고, 글로벌 거목으로 우 뚝 선 삼성의 성공 사례가 강남 엄마들이 악착같이 길러낸 인재들이 그 밑거름이 되었음도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획일화된, 그래서 전체의 피폐를 부르는 제로 섬 게임보다, 타인에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으면서 나의 행복도 도모하는 상생의 터전을 고민할 시점입니다. 저자가 우리에게 일러 주는 메시지는 이런 절충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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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패밀리
토니노 베나키스타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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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갱스터 러키 루치아노(이 책에도 "작전명 스트립티즈"라는 화제 가운데 등장하는 실존 인물입니다. 물론, "스트립티즈"라는 작전은 실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내 인생에서 후회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처리하지 않은 것이다." 그 말은, 굳이 폭력적이고 범죄적 수완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그 자신의 배짱과 두뇌 회전 속도였다면 성취(어폐가 있겠습니다만)의 상당 부분을 그대로 이뤄 냈을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렇다면 왜 일부 범죄자들("일부"라는 말을 반드시 써야 합니다. 대다수의 범죄자들은, 그렇게 할 수밖에서 없어서 그런 일을 저지르는 무능력자들이기 때문이죠)은, 사회적으로 공인된 룰과 방식에 따르지 않고 일탈의 길을 애써 걷는 것일까요? 유 쾌하고, 약간 무섭기도 하고, 문장 하나하나에 재치와 위트, 기발함이 넘치고, 무엇보다 스토리가 너무도 재미있는(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초호화 캐스팅으로 이미 만들어졌고 국내에서 상영도 되었는데, 흥행 면에서 뚜렷한 결과가 나오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조만간 DVD 상품이 출시되면 감상한 후에 그 후기를 올리겠습니다) 이 소설의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저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소설은 기막히게 재미있는 코믹 스릴러를 가장하지만, 기실 품에 담고 있는 의미심장한 메시지는 바로 이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인간 본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프레드, 아니 조반니는 그 점을 힘주어 강조합니다. "인간이 진정 사랑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라 복수다. 인간은 상대에게 먹을 휘두를 때 그의 존재 가치와 이유를 느낀다." 과연 프레드의 답이 옳은지, 그에 대해 동의를 보낼지 아니면 최후의 (정신적) 사형 선고를 내릴지는 역시 독자의 몫입니다. 


이 소설은 자신이 소속되었던 범죄 조직을 배신(이 단어를 곡 여기에 사용해야 하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는 이 "배신 행위"를 통해 자신이 마땅히 속해야 했던 정상인들의 공동체로 - 다소 불안하게나마- 복귀할 수 있었으니까요)하고, 미 연방 정부가 마련한 증인 보호프로그램에 따라, 멀리 대서양을 건너 프랑스 서해안에 위치한 어느 작은 마을로 은둔해 있습니다. 홀몸이면 사실 그 운신이 어려울 것도 없으나, 문제는 가족, 즉 아내와 딸, 아들이 딸려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여기서 외출도 자제하고, 마피아 중간 보스로서 자신의 과거가 드러날 수 있는 어떤 언행도 삼가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의 가족들에게도 이 같은 의무는 동일하게 부과됩니다. 과연 타고난 맹수, 혹은 무대 기질 가득한 스타가 제 본색을 언제까지나 숨기고 살 수 있을까요? 그 무서운 마피아의 우두머리들은, 버젓이 네 식구가 붙어다닐 수밖에 없는 이 뚜렷한 목표물이, 설사 지구 반대편에 숨어 산다 한들 과연 언제까지 시야에서 놓친 채 방치할 수 있을까요?


전지적 작가(공교롭게도 주인공 프레드가 가장한 직업 역시 작가입니다)의 어투는 매우 코믹합니다. 전혇적인 수다스러운 이탈리아인의 현란한 수사를 유감 없이 맛보는 게 가능합니다. 그런 까닭에, 이 소설은 자칫하면 코믹 풍자물 정도로 오인 받을 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런 용도로 읽어도 본전은 충분히 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는, 마리오 푸조의 본격 크라임 노블에 못지 않은 짙은 향취와 사색, 그리고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이 들어 있다는 게 결정적인 차이점입니다.


우 선 이 소설에서, 의외로 중요한 역할을 맡으며 소설의 장엄한 엔딩에 한몫 단단히 하는 캐릭터는 아들 워런입니다. 누나인 벨은, 하늘이 부여한 선물, 압도적인 미모라는 자질에 기대어 어느 환경에서도 힘들이지 않고 제 갈 길을 나아갑니다. 아리러니컬하게도 그녀는 이 미모가 축복이 아닌 저주임을 깨닫고, 독자로서는 다소 뜬금없이 받아들여지는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려 들기도 합니다. 반면 키도 작고 어딘가 만만해 보이는 구석마저 있는 워런은, 현지 적응이건 기존 궤도 운행이건 삶이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워런이 누구인가. 바로 그 아버지 프레드의 아들입니다. 프레드가 누구인가. 뉴어크 특정 구역을 그 이름 조반니라는 석 자(?)만으로 벌벌 떨게 만든, 조직 개척의 대가입니다. 조직을 잘 꾸리고 실패하지 않는 사업 선택을 하는 재능만 뛰어난 게 아닌데, 이 자질을 아들이 고스란히 물려 받았음은 책의 마지막에 가서야 독자가 알게 됩니다.


주인공 프레드(조반니)는 겉으로 보아 똘기 가득한 깡패입니다만(세상에 성한 정신을 가진 어느 누가, 사람 목숨 해치기를 그토록 태연히 하며, 어제까지 친구였던 자를 눈도 깜짝 않고 저세상으로 보낼 수 있을까요?), 희한하게도 그의 단단한 두 어깨는 마치 세상 모든 범속한 이가 채 지지 못한 짐을 정직하게 그의 일생 동안 짊어져 온 보이지 않은 공덕이 있나 봅니다. 마지막에 그는, 타고난 완력으로나 육체적 나이로나 도저히 상대가 안 되는 무서운 히트맨, 암살자와 맨손으로 마주칩니다. 이상하게도 그는 이 자와 몸으로 부딪히면서, 가망 없는 싸움이라는 것도 알면서, 육탄의 희열을 느낍니다. 때 릴 때 뿐 아니라 맞는 순간에까지 엔돌핀이 솟는 상대를 보면서, 상대는 그만 "때리다 지치는 경지"를 느끼게 됩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프레드는 의자로 이 가공할 폭한을 가격, 자리에 누입니다. 화자의 말에 따르면, "잃을 게 더 많은 상대와 그렇지 않은 편 사이에 나는 승부"였다고 합니다. 맷집이나 펀치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거죠.


지 난 세기 대륙에서 빚어진 크나큰 말썽, 인류 절멸로까지 치달을 수 있었던 전화의 종막을 알리는 배경이 되었던 곳이 바로 이 노르망디였습니다. 이제 이 조용한 시골 마을에, 전직 마피아의 일가가 신분을 숨기고 잠입하더니, 다음에는 그의 목숨을 노리는 심판자의 무리가 운명처럼, 도둑처럼, 나중에는 점령군(이 대목이 특이합니다. 왜 이들은, 아무리 시골이라 하나, 그들의 철칙을 어기고 공개리에 대대적인 작전을 감행했던 것일까요?)의 양상으로, 세계사적으로 곡절도 많았던 이 고장을 접수합니다. 상륙은 두 차례에 걸쳐 이뤄지고, 탐(이른바 G-man)과 프레드는 둘의 힘만으로, 나중에는 한 손을 더 빌려, 하이눈의 게리 쿠퍼처럼 선량한 마을을 악의 손으로부터 구해 냅니다. 코믹하면서도 장엄하고, 감당 못할 촌극이다 싶으면서도 뭔가 숙연해지는 감이 있습니다. 소 설의 말미에서 어느 새 화자는 프레드로 바뀌며, 1인칭 주인공 시점의 변칙 템포로 전환됩니다. 사칭 얼치기에서 비로소 진짜 작가가 된,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잔뜩 들뜬 어투로 이어나가는 조반니, 아니 "브라운 씨"는, 어느 새 보편자의 입장에서, 영화 <대부>에서 마을 사람들의 facilitator로 봉사(?)하 던 비토 코를레오네처럼, 독자에게 인생 이면의 진실을 전달하는 author로 바뀌어 있습니다. 성자와 악한이 종이 한 장 차이이듯, 영웅 비토와 찌질이 헨리 역시 트럼프 카드 한 끗 차이임을, 이 코믹을 가장한 인생독본은 우리 독자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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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늘 불안한 걸까
마거릿 워렌버그 지음, 김좌준 옮김 / 소울메이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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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쯤에 "무기력증"에 대한 체계적인 대처법을 다룬 책을 읽고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아무리 팔팔하고 능력과 의욕이 넘치는 사람이라도, 무기력(helpless)이라는 함정, 벙커에 빠져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니, 직장에서 많은 활동과 성과를 내고, 영민한 두뇌로 창의력을 발휘하는 사람일수록, 전만큼 좋은 성과를 내지 묫했을 때 느끼는 좌절과 굴욕감이, 평균적인 다른 이들의 그것을 훨씬 상회한다고 합니다. "무기력"은 일종의 감정, 일시적인 기분에 불과할 줄 알았는데, 원인과 증상, 그에 따른 치유 방법이 정해진 질병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충격이 컸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문제로서 바로 보고, 그에 따른 정확한 대처를 하는 게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서 현명한 선택임은 분명합니다.


" 무기력'이 질병이라면, "불안"은 어떻겠습니까? 무기력은 사람에 따라 전혀 그 심각한 피해를 겪지 않고 일생을 보내는 경우도 있겠지만, "불안"은 그보다는 훨씬 보편적인 증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영화 제목도 있었습니다만. 이 "불안감"이란 녀석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찾아 올 뿐더러, 그 남기는 피해 역시 훨씬 심각한 수준입니다. "불안"역시 일종의 질병으로 분명히 범주를 정해 준다면, 사람들은 자신을 괴롭히는 가장 보편적이고 심각한 "증상"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 마거릿 워렌버그는 의사입니다. 의사이기만 한 게 아니라, 심리학과 정신 분석학에도 깊은 소양을 지닌, 인문학 소양이 상당한 치유 전문가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전통적인 뇌신경 과학 분야에 정통했을 뿐더러, 풍부한 임상 경험을 통해 동시대인이 겪고 있는 가장 흔하고 심각한 정신 질환이 무엇인지, 그 해결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확고한 신념과 인식을 통해 완비된 처방을 제시하는 세라피스트입니다. "불안"이 그저 막연하고 모호한 감정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저 기분 전환이나 충분한 휴식으로 해결과 완치가 가능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바라보는 "불안"은 질병에 가깝기 때문에, 먼저 불안이 발생하는 원인을 신경과학적으로 정확히 분석하고, 이에 따른 다양한 대처 방법을 제시합니다. 여기에는 약물을 통한 치료도 포함됩니다만, 일상에서 간단히 시도할 수 있는 신체 동작, 호흡이나 자세 교정 세라피도 포함됩니다. 수시로 찾아 오는 불안감, 공황 상태 때문에 자주 곤란을 겪는 분이라면, 이 책을 상비해 두고 수시로 찾아 보면서, 그 지시하는 바를 따라해 보면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 단 저자는, "불안"을 야기하는 원인은 어디까지나 "뇌"에 있다고 합니다. 뇌는 신체와 외부 상황에 연관된 다양한 정보를 주고 받는 통로이자 최종의 저장소입니다. 정상적으로 정보를 수신, 발신하고, 그 결과가 왜곡 없이 처리되면,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평안하고, "뿔안" 따위가 건강을 해칠 우려가 없습니다. 뇌 부위 중 어느 한 곳이 이상을 일으키고, 신경 전달 물질의 작용에 이상이 일어났기 때문에, "불안, 공황" 따위가 느껴지는 거죠. 저자는 그래서 우리의 뇌 구조에 대한 지식, 그리고 각종 반응을 야기, 유도하는 다양한 호르몬에 대해 개략적인 설명을 제시합니다.


책의 주제가 "불안"이므로 이와 관련한 부위에 대해서만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신경계 (nervous system)

2. 스트레스 반응 시스템 (stress response system)

3. 대뇌피질 (cortex)

4. 변연계 (limbic system)

5. 기저핵 (basic ganglia)


이 중에서 특히 중요한 부위는 변연계입니다. 이 부분은 정서와 기억을 담당하는데, 우리의 불안이라는 건 따지고 보면 정서, 불안의 두 가지 팩터에서 모든 것이 연유되다시피하기 때문이죠. 변연계는 다시 다음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1. 시상 (thalamus)

2. 시상하부 (hypothalamus)

3. 해마 (hippocampus)

4. 편도체 (amygdala)


불안이란, 한 마디로 말해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 혹은 과민 반응, 잘못된 반응입니다. 따라서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호르몬의 작용 경로를 고찰해야, 이 불안을 효괴적으로 잠재울 수 있습니다. 위의 2. 시상하부(hypothalamus)는, 부신으로 두 가지 스트레스 관련 호르몬을 보내는 역할도 수행합니다. 그 두 가지 홀르몬이란, 아드레날린코르티솔입니다.


특히 불안과 관련해서 중요한 부위는 편도체입니다. 편도체가 담당하는 것은 감정과 관련된 기억인데, 그 중에서도 부정적이고 공포스러운 것들에 특히 치중하여 관리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뇌가 좌, 우의 두 반구(半球)로 구별되어 있다는 건, 현대 뇌신경과학자들 중에서는 부인하는 이들도 꽤 있는 형편입니다만, 이 책의 저자 워렌버그는 여전히 전통적인 입장을 유지하는 편입니다. 그녀의 입장에 따르면 오른쪽 편도체는, 현재의 위험에 대한 단서를 포착하는 기능을 맡고, 왼쪽 편도체는 그 단서를 과거의 기억과 비교하여, 얼마나 위험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비교 평가하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좀 허무하기도 하지만, "불안"이란 결국 호르몬 분비 교란 과정에서 발생한 신체 장애 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약물의 주입에 의해 이런 호르몬의 분비를 통제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불안이라는 증상이 다소라도 진정될 수 있다는 결론입니다. 실제로 약물 치료의 효과는 큰 편이지만, 문제는 많은 이들이 이런 약물을 통한 처방과 대처를 꺼린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면 언제가 이 약물 치료의 적기(適期)라고 할 수 있는가? 저자는 네 가지 정도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주기적으로 공황 발작, 어쩔 줄을 모를 만큼 당황하고 대처 불능의 심리에 빠지곤 하는지

-학교나 직장에 가기 싫고, 자력만으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는지

-배가 아파서 밥을 못 먹을 정도로 불편을 겪는지

-몸이 떨리고 얼굴이 붉어진다든가, 서 있기 힘들 만큼 신체가 불안정한지

-근심 걱정 때문에 일에 집중할 수 없고, 일로 정신을 쏟다가도 채 몇 분 만에 다시 불안감에 빠지는지


이상의 어느 한 가지라도 해당된다면, 약물 치료를 받는데에 주저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치료제로 제시되는 약물은 주로 1)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s), 2) 벤조디아제핀(benzodiazepine), 3) 부스피론(buspirone) 등이라고 합니다. 간혹 다른 계열의 약물도 동원되는데, 이것은 약칭 SNRIs, 즉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재흡수 억제제입니다. 이펙서, 심팍타, 프리스티크 등의 브랜드를 달고 있습니다. 제 지인 중에 해당자가 있어서, 특히 저 이펙서라는 약물 이름이 귀에 익습니다.


약 물치료가 여전히 거북하게 다가오는 분들을 위해, 저자는 1) 그렇다면, 당신이 섭취하는 것 중,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미연에 차단하라는 권고를 합니다. 이것은 C.A.T.S로 저자에 의해 부르기 쉽게 요약됩니다.

 C - 카페인

 A - 술

 T - 담배

 S - 설탕 등 감미료


심 지어 건강에 좋다는 녹차에도 다량이 함유되어 있을 만큼, 카페인은 너무도 보편적인 성분이라 우리가 이를 피해갈 방도가 없다시피 합니다. 카페인은 거의 모든 종류의 불안을 일으키는 주범으로서, 일상에서 겪는 단순 홍조, 손떨림 증상 등 거의 관여하지 않는 때가 없습니다. 술과 담배의 해악은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겠고, 설탕은 비단 불안 관련이 아니라도 이미 건강을 해치는 주범으로서 많은 이들에게 기피되고 있는 물질입니다. 저자가 관심을 가지는 물질은 아스파르테임(우리가 예전에 아스파탐이라고 불렀던)이라는 인공 감미료입니다. 이 성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일단은 주의가 필요함을 주장합니다. 설탕의 경우 특히 저혈당자가 섭취하면 스트레스 유발이 우려되며, 아스파르테임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인공 감미료는 섭취 제한이 건강에의 첩경이라는 뜻이겠습니다.


저 자의 주장 중 특히 눈이 가는 것은 "숨쉬는 방법을 완전히 바꾸라."는 것입니다. 핵심은, 교감 신경 흥분을 감소시키고, 부교감 신경을 자극하는 호흡 방법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동양에서도 전통적인 기 수련 방식의 일환으로 강조되는 것처럼, 복식 호흡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복식 호흡이 큰 효과를 보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대부분 방법을 잘못 익히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실습상의 경험담도 이야기합니다. 즉, 숨을 들이쉴 때, 배가 나오는지 들어가는지를 체크해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배가 나와야 정상이며, 들어간다면 그건 방법이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은 역시 아음의 작용으로 다스려야 직접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마음챙김(MINDFULNESS)를 대단히 유효한 요법으로 제시합니다. 이 마음챙김이란, 정념, 유념이란 다른 말로도 표현되는데, 그 방법은 불안을 유발하는 다른 잡념을 일절 떨쳐 버리고, 인식의 전환, 호흦의 교정을 통해 일종의 명상 상태에 진입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우리 한국에서 정신 통일, 집중 등의 이름으로 태권도장이나 학교 CA 황동 시간에 많이들 접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실습이 간편하고, 직접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입니다. 바로 스트레칭을 통해, 근육을 풀어 주고 몸을 가볍게 하는 요법이 되겠습니다. 스 트레칭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우리 몸에 누적된 스트레스를 일거에 떨치는 매우 유용한 수단입니다. 몸의 긴장과 경직은 결국 마음의 사소한 부분에까지 다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몸을 편하게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근육은 긴장과 이완 작용을 통해 정신 상태의 조절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신장(伸張)과 이완"이라는 명칭도 적절하다고 말합니다.


불 안은 어쩌면 우리 생에 있어 근본적인 문제를 제거하지 않고는 해결이 어려운 병증일 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불안을 느끼고 만성화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지나친 불안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는 데에 있겠죠. 이시형 박사도 그의 저서 <배짱으로 삽시다>에서, 마음을 편히하고 긴장을 놓아리며, "아 나는 그냥 적당히, 즐기면서, 일을 망쳐도 좋다는 자세로 편안하게 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오히려 훨씬 좋은 결과를 불러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박사가 그리 칭찬해 마지 않는 김연아나 박지성, 코마네치 등도, 평상심 발현의 대가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불안은 최소한으로 누르고 달래며, 진짜 문제의 실질적 해결에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는 게 두 분 저자의 공통된 결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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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짱으로 삽시다 - 30주년 기념 개정판 이시형 뒤집어 생각하기 1
이시형 지음 / 풀잎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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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표지에는 인상 깊은 두 구절의 카피가 적혀 있습니다.

"아버지가 읽고, 아들딸에게 권해 주는 책"

"출판사상 최초논픽션 밀리언셀러"


30년이라면 정말 긴 시간이죠. 아마도 30년 전이면, 이 책의 독자는 주로 남성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그 독자가 아버지의 입장이 되어, 그 아들 뿐 아니라 딸에게도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해 주는 모습... 우리는 여기서 여성 역시 당당한 사회 경제 활동의 주역으로 부쩍 성장한 현실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이 쓰여질 무렵이라면, 여성이 계산원, 비서직, 공장 노동 외에 딱히 진출할 곳이 없던 시절이기도 하겠기 때문이죠.


사실 이 책에 적혀 있는 모든 진단과 조언은 현재에 있어서도 유효합니다. 다만, 그 전제가 되었던 사항들은 아직도, 이 책이 쓰여졌던 시절의 사정과 견주어, 불변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외국계 회사(처음부터 외국에 소재한 회사 포함)에 근무하는 한국인은 언제나 뚜렷한 공통 패턴을 보인다. 평소에 아무 말 없이 참다가, 갑자기 사표를 내던지는 것이다. 왜 그러느냐고 이유를 물어 보면, 딱히 하는 말도 없다. 마치, 왜 그렇게 내 마음을 몰라 주느냐는 식이다. 반면, 정상적인 반응 양식의 직원들은 그헣게 행동하지 않는다. 불만이나 이견이 있으면 그때그때 이의를 제기하고, 만약 직장을 그만둘 일이 있으면 마음을 확실히 정한 후 조용히 주변을 정리하고 퇴사할 뿐이다."


어 느 분이 시기적으로 먼저 이 점을 지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고인이 된 이규태 조선일보 논설위원도 그의 어느 책에서 이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위원의 책은 좀더 구체적인 배경까지 거론하고 있었습니다. 주로 중동 건설 현장에서, 외국 업체에 고용된 한국인들이 이런 모습을 공통으로 보였다는 회고입니다. 그 시점은 따라서 1970년대 정도로 짐작됩니다. 두 저자가 모두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걸로 봐서, 외국인들이 지켜 보고 잘 이해하지 못했던, 그래서 지적 대상으로 삼았던 한국인의 사고 방식이 그 당시로서는 어느 정도 공통적이었던 것 아니었나, 대략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평소에 참고 참다가, 어느 시점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을 때 확 폭발시키는 것. 확실히 조직에나 해당 개인에게나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술자리에서 느닷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중정부장도 그런 유형에 해당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30년 전에는 분명 이런 분들이 많이 계셨을 겁니다. 주변의 눈치를 보고, 실속도 없는 체면을 중시하고,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생각에 제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못마땅한 게 있어도 억누르고 참고,... 하지만 지금 세대, 한창 경제활동에 자 신의 정력과 에너지를 쏟아 붇고 있는 층은 꼭 그렇지는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들은 대체로, 직장에서도 선배, 상사에게 제 할 말을 하는 편이고, 기획과 아이디어를 위한 회의에서도 이른바 "튀는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는 편입니다. 이런 직원을, 직장 내부 분위기의 다양성을 보존한다는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키우는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속담에서 말하듯 "벙어리 냉가슴 앓는 유형"도 여전히 주위에서 많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다만 그런 사람들은, 이제 평균적인 주변 사람들로부터 "저분 저런 스타일로 사회 생활 하기 참 힘들겠다." 같은 동정을 얻는 처지라는 게 30년 전과는 달라졌다면 달라진 점입니다. 사정이 이렇게 달라진 건, 이시형 박사님의 이 책을 30년 전에 읽고, 당대인들이 각성했고, 그들이 낳아 키운 자녀들이 그런 구태의연한 모습을 어려서부터 습득할 기회 없이 일찌감치 마인드에서 지워 버렸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공헌이랄까 영향력은 지대하다고 하겠습니다.


이시형 박사는 이런 사례로부터, 다음과 같은 취지의 결론을 내립니다.

" 그만둔다는 액션을 거창하게 벌이는 사람은, 알고 보면 정반대로, 그 속마음이 '난 전혀 떠나고 싶지 않다'는 걸 고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누가 제발 나 좀 잡아 줘 하는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행동은 주변과의 공존을 염두에 두지 않고, 모 아니면 도라는 심리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 주든가, 아니면 모든 관계를 종료하자는 자폭적 선택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대가 변했다고는 하나, 이 말은 지극히 타당합니다. 모름지기 훌륭한 의사가 되려면, 인체생리학적 기술 지식에 밝은 것만으로는 부 족하다는 게 이 점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사람의 심리를 알고, 성격적 특징을 알아야, 특히 정신적 병리에 대한 진단을 정확히 내릴 수 있겠습니다. 병이란 따지고 보면 마음에서 유래하지 않는 게 없습니다. 죽을 병에 걸린 사람도 의지의 강인함, 정신의 명철함으로 기사회생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사소한 질병으로도 크나큰 상심 끝에 생존의 의지를 놓아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명의는 인간의 속마음을 알고, 그를 꿰뚷어 보아야 합니다. 30년 전에 이미 이 박사는, 한국인이 가장 보편적으로 "앓고 있는" 심리적 병통을 이처럼 속시원하게,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었던 거죠.



이 책에는 이런 재미있는 일화도 전합니다.

" 어떤 사람이 친구네 집에 가고 있었다. 가는 도중 한 나루에서 그 친구의 아들을 만났는데, 분명 그 친구의 아들이 탄 배가, 강 한복판에서 가라앉는 걸 보고 만 것이다. 친구네 집에 당도해서도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친구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말았다. 그런데 친구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 게 아닌가?

- 이 친구야, 내가 봤는데 그 배에서 아무도 살아 나오지 못했어!

- 알겠네. 그런데 그런 배라면 아들놈은 아마 타질 않았을 걸세.

그 사람은 흉사(凶事)의 결과를 우길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그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과연 얼마 후, 친구의 아들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게 아닌가! 그 사람이 곡절을 물으니,

-처음에 탔었습니다만, 사공이 자꾸 승객을 태우는 걸 보고 도중에 내렸습니다.

틀림없이 화가 일어나지 싶어서요.

태연히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저는 이 일화를 처음 읽었습니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구나, 아버지만한 아들이 없구나, 같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이시형 박사님은 전혀 뜻밖의(저로서는) 결론을 내리고 있더군요.


" 보통 어려운 상황에서 무작정 버티는 사람을 강하다고 하나, 천만의 말씀이다. 어려운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눈을 감아 버리는 나약한 사람이라서, 과감하게 버리고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강한 사람은 상황이 불리하다 싶으면, 단호하게,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떠나 버린다."

이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으로 적합할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지극히 타당한 결론입니다. 보통 그런 사람들은 불리한 상황을 개선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뭉개고" 있는 게 대부분입니다. 이런 경우는 거지반 실패로 귀결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이시형 박사님의 강의를 들어 본 분은 아시겠지만, 경삳도 억양이 아주 강한 어조죠. 저 도 가끔 경험하는 일이지만,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일부러 큰 소리로 사투리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른바 보상의 기전으로, 스스로 "촌놈 콤플렉스"가 강한 탓에 이런 과잉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TS 엘리엇의 예를 들며, 전성기에 그토록 세련된 귀공자의 분위기를 풍겼던 그이지만 대학 입학 초년 시절에는 촌티가 줄줄 흐르는 신세였다는 겁니다. 이를 감추려고 일부러 생전 먹어보지도 못한 메뉴를 주문했는데, 도저히 그 맛을 감당할 수 없어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는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는 거죠. 이 박사님 자신이 지방 출신이었고, 그런 모종의 "촌놈 컴플렉스"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분이기에, 이런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30년 전에는 기세 좋게 발전하는 신흥 개발도상국의 수도 서울에, 청운의 꿈을 안고 갓 직장 생활을 시작하는 이들이 대부분 시골 출신들이라, 아마 이런 이야기는 한 구절 한 구절의 독자의 가슴을 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30년이 지났습니다. 행동이나 말하는 투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열등 컴플렉스에 짓눌려 있고, 제 의사를 정직하게 표현 못 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이 런 책은 여전히 좋은 가르침을 전달해 줄 것입니다. 몇몇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 전 국민이 오랜 농경사회의 관행, 못 살고 못 입었던 데다 외국의 식민지로 추락하는 치욕까지 과거에 겪었던 상황에서, 30년 전의 한국이라면 이 책은 거의 국민 교과서의 노릇을 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지금은 최소한, 배짱이 부족해서 사회 생활에 곤란을 겪는 사람은 많이 드물어졌습니다. 배짱이 부족하기는커녕, 제 분수와 능력도 모르고 무모하게 아무데나 함부로 나서다, 종전보다 훨씬 못한 신세로 떨어지고, 가뜩이나 문제 많던 멘탈에 다른 문제까지 더하는 사람도 보곤 합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많은 명제들은 여전히 유효하며, 그대로 실천에 옮길 가치가 충분합니다. 다만, 세상을 보는 눈이 긍정적이라야 하고, 현실 인식에 왜곡이 없어야 하며, 유 아적 망상에서 벗어난 건전한 상식을 가진 마인드, 이것이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구비되어야 할 전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세울 것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골방에서 이 책만 읽다가, "아 배짱으로 살아야겠구나" 하며 세상으로 뛰쳐 나왔을 때의 그 결과란, 자신이나 사회에 더 나쁜 해독만 끼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의 영향 중 하나일지는 모르겠지만, "배짱만으로 사는 사람"이 너무 많아진 것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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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시작될 때 - 장기적 사고로의 가이드
매그너스 린드비스트 지음, 황선영 옮김 / 생각과사람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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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매그너스 린드비스트는 그 할아버지代부터 미래학을 연구해 온 학풍을 지닌 집안 출신이라고 합니다. 미래란 말 그대로, 아직 다가오지 않은 시간대입니다. 또한, 매그너스 린드비스트 자신과 그 할아버지가 주시하는 "미래"란, 둘이 서로 같은 내용과 범위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도 매우 당연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란 특정 시점에서 즉흥적으로 판단하는 관점보다. 더 오랜 세월을 두고 과거로부터 관찰해 온 눈이 더 넓은 폭과 성숙한 시야로 전망할 수 있다는 점도 맞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할아버지代 부터 차곡차곡 쌓여 온 미래학 연구의 내공을 어떤 식으로건 상속받은 저자라면, 그 당대를 출발점으로 삼은 다른 연구자보다는 훨씬 유리한 위치에 놓이며, 우리 독자들도 더 권위 있는 인식을 그로부터 힉득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 책의 부제는 "장기적 사고로의 가이드"입니다. 바로 이 부제가, 여타의 미래학 서적과 이 책이 질적으로 차별되는 면을 잘 알려 줍니다. 종 래 다른 미래학 서적은, "미래에는 이러이러한 사건과 발명, 풍요로운 생활상이 우리 주변에 잔뜩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같은 장밋빛 전망만을 제시하거나, 반대로 별반 근거도 없이 디스토피아 비전만을 나열하거나 둘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이 린드비스트의 책은, "미래를 어떤 방법으로 체계적으로 예측하고, 아울러 우리가 속한 현재의 모습을 정확히 파악하는 방법이 무엇이지"에 대해 보다 많은 비중을 할애하여 이 책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물고기를 입에 넣어 먹여 주는 게 아니라,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주는"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다른 책들과는 달리, "왜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게 (미래학자들이나 직접 이해관계자들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지"에 대해, 보다 체계적이고 분명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이유로 들고 있는 사항들을 잠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순환형 사회에서 진보형 사회로의 이행

이 사항은 우리 동양인들에게는 좀 가슴 아픈 대목이기도 합니다. 우리 동양 전통 사상은 언제나 회고적이고, 과거의 이상시대를 전제로 하여 타락한 현재를 교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단조로운 농경 사회의 반복적 생활 양식이 모두의 사고를 지배하는 분위기에서, 기술적 산업적 진보가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던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럽습니다. 저자가 책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순환형"과 대립되는 "진보형"이란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사실 분명합니다. 과거를 되돌아볼 필요가 감소한다면, 그 빈 자리를 무엇이 메꿀 수 있겠습니까? 미래를 내다보는 일은, 이제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필수 과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 운명이 아닌 기회에 의해 인도되는 것

저 는 이 장을 읽으면서도, 마치 저자가 우리 동양 사회를 염두에 특히 두고 서술한 것이 아닐까 하는 약간의 착각을 할 만큼 자극을 받았습니다. 모든 생활상이 고정된 패턴을 염두에 두고 이뤄지는 농경사회의 모습이라면, 개인은 자신이 보유한 재능과 자질이 어떤 것인가 하는 요소보다는, 출신 집안의 성격과 본질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물론 그런 낡은 구조가 아닙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다름 아닌 자신의 계발과 생존을 위해 중요한 task가 되는 것입니다.


3. 다양한 선택 가능성의 대두와 이에 따른 복잡성의 출현

현 대는 인류가 굶어 죽는다든가, 추위와 자연 재해 따위에 속절없이 노출된다든가 하는 원초적 위험을 극복하지 못한 단계가 아닙니다. 즉. 기본적인 욕구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된 상태에서, 서서히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는 비교적 여유 있는 시대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여유가 생기면, 현재의 주어진, 고정된 조건만에 얽매이지 않고, "나 자신이 앞으로 변화할 수 있는 모든 선택안들"에 대해 느긋한 주시를 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 풍요는 풍요에 그치지 않고, 사회를 잘 작동하게 하는 기본적 메커니즘의 복잡화와 세분화를 유발합니다. 개인은 이런 고도로 발달된 구조가 요구하는 수준에 적응하게 위해, 이전 세대가 알던 지식보다 훨씬 높은 층위의 전문 기능으로 무장해야만 직장에서의 과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과거"가 아닌, "미래"를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습니다.


"미래"를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는 어느 정도 분명해졌다고 보고, 이제 "어떤 미래"를 바라보고 유의해야 우리의 이런 실용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겠습니다. 저자는 다섯 가지 정도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런 미래의 속성을 파악하는 일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미래가 시작될 때"를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어디부터가 "미래"이며, 어디까지가 "현재"인지를 구별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1. 느리고 점진적인 미래 - 아 무리 급격히 발전하는 미래상이 설사 확실시된다고 해도, 미래가 한꺼번에 이틀씩, 혹은 일년치가 닥쳐 오는 일은 없습니다. 미래는 언제나 하루 단위로만 우리에게 찾아온다는 말은 재미있기도 하지만, 핵심적인 진리를 깨우쳐 주기도 합니다. 과거는 언제나 엄청난 더께로 우리에게 놓여져 그 벅찬 이해를 강요하지만, 미래는 누구나 감당할 수 있을 만한 할당량으로 공평하게 우리를 찾아 오죠. 이런 까닭에 우리는 그 변화의 점진성을 종종 무시하며, 느린 변화를 "존재하지 않는(않을) 변화"로 착각하기까지 합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증거의 부재"를 "부재의 증거"로 착각한다는 멋진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아직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음이 증명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뜻이겠죠?


2. 빠르고 예상할 수 없는 미래

이건 앞에서 논한 것과 정반대의 속성입니다. 역설적이지만 둘 다 타당한 사항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1980년대의 히트작 영화 <터미네이터>를 들고 있습니다. 기발한 아이디어는 감독 짐 캐머론이, 호텔에서 임시 기거하며 먹을 것도 채 챙겨 먹고 있지 못한 시점에 느닷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아이디어나 요긴하고 기발한 발상은 이처럼, 불시에, 전혀 준비 안 된 우리를 방문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물론 현재의 소속물이 아닌 미래의 전유물입니다.


3. 실제의 미래, 상상 속의 미래, 절대로 다가오지 않는 미래

실 제의 미래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현재와 밀접하게 닿아 있는 최근접의 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미래는 미래라기보다, 어느 정도 현재에 가까운 속성입니다. 이런 미래는 현재의 패턴을 어느 정도 그대로 답습하기 때문에, 예측의 기술적 노력이 상대적으로 불필요한 대상이기도 합니다.

반면 우리가 "미래"라고 하면 대뜸 떠올리기 쉬운 게 바로 "상상 속의 미래"입니다. 이런 미래는 "백일몽"이라는 다른 말로 표현이 가능합니다. 이런 미래에서는 상상 속에 불가능한 게 없습니다. 그런데 건설적인 착상과 계획을 위해서는, 이런 불확실한 경계보다는 보다 구체화한 어떤 전망이 필요한 게 사실입니다. "절대로 다가오지 않는 미래"는 그 자체로 패러독스입니다. 하지만 하루살이에게 한 달은 그의 인식이 미칠 리 없는 억겁의 세월이나 마찬가지이듯, 우리 인간 역시 38억년이라는 지질 시대의 긴 호흡을 가늠할 길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에게 지나치게 긴 시간의 단위는 역시 "결코 우리가 맞이할 수 없는 미래"인 셈입니다. 억 년의 단위로 가면 우리 자손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구상에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생물이 존재한 게 불과 얼마 전인지 생각하면 이해가 빠릅니다.


미 래는 고정된 실체로서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된다거나, 허황한 공상의 요소로 채워진다거나, 반대로 철저히 무시된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다룰 수 없습니다. 과거와는 현저히 변화된 방식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현재, 그리고 바로 인접한 미래를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라도 "언제나 미래를 염두에 두는 방식"을 체질화해야 합니다. 이 책은 그런 사고와 태도의 본질과 실제 적용례를 잘 풀어 주고 있습니다. 분량은 불과 200여 페이지를 넘지 않지만, 다 읽는 데에 천 페이지 볼륨 이상의 시간이 걸린 건 개인적으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속이 꽉 찬, 몇 번을 두고 거듭 읽어도 모자람이 있는 깊이 가득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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