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 2041
로버트 스원.길 리빌 지음, 안진환 옮김, W재단 / 한국경제신문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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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향하는 기온의 절댓값보다는, 아래로 치닫는다는 지향 자체가 사람에게는 공포와 좌절감을 안길 수 있습니다. 극지에서 얼마나 차가운 물체, 대기, 적대적 동물과 자주 마주했느냐보다는, 안온한 삶을 버려두고 나와 내 동료들이 왜 이 극한의 도전을 계속 이어나가야 하는지의 회의가 자아내는 중도 포기에의 유혹이, 아뇌쿠네메(Anökumene)를 헤집고 지나가는 모험가와 탐험대를 더 괴롭히는 요인임을 이 책을 읽고서 깨달을 수 있더군요.

본디 영하로 기온이 얼마나 떨어지느냐보다는, 옷깃을 더욱 여미게 강요하는 칼바람의 위력이 보행자를 훨씬 크게 위협합니다. 버젓한 중위도 지역의 동장군 위세가 이 정도인데, 극지방이나 그 아래 한대 지역의 살벌한 냉기란 사실 일반인의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짐작이 불가능합니다. 이 책 중에도 나오듯, 겨울철이라곤 하나 겨우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근방에서 쓸만하면서도 저렴한 트롤선을 물색하러 돌아다닌 친구, 동료(즉, 피터 맬컴을 말합니다. 이 책 중의 사연[저자의 일생이라고 해도 될 기간]에서 끝까지 요긴한 역할을 해 주는 인물이죠)의 행색이 마치 얼굴에서 고드름이 뚝뚝 떨어질 듯한 행색이라 아무도 남극 탐험을 위한 그의 구상 설명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하니, 아마도 태평인 국외자들은 "이런 온대 지방의 추위도 제대로 감당 못 하는 자가 무슨 남극까지를 다녀오겠냐"며 더욱 못미더워했을지 모를 일이겠습니다.

지난주 일요일 SF 고전(?) <생명창조자의 율법> 독후감 중에서도 그런 풍자에 대해 언급했습니다만, 어리석은 인간, 마케팅의 부추김에 같이 미쳐 날뛸 줄밖에 모르는 하등한 지성을 가진 인간은, 어떤 "바람"에 의하지 않고는 행동의 동인을 마련하지 못합니다. 혹은 뿌리깊게 존재를 짓눌러 온 열등감의 폭발이든지 말입니다. 이 책은 탐험가의 단일한 지역 탐사, 혹은 모험 성과 보고서라기보다, 한 운동가(물론 저자)의 자서전에 가까운 내용이더군요. 유머러스하고 (탐험가치고는) 꽤나 현란한 수사법, 혹은 명언들의 습관적 인용을 특유한 스타일로 삼는 문장이었고, 세계관도 낙천적임을 엿볼 수 있었지만, 그가 장노년의 나이에 접어들어서도 끝내 서운함과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대목은, 어리석은 대중의 변덕, 꽉 막힌 관료제적 사고방식, 남의 단순 취향과 과학적 지식, 문학적 공통 원리를 분별 못 하는 천박한 트집 잡기 근성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가 직시하는 현실은 꽤 절박합니다. 그의 독단 같은 것(사실, 그가 지향하는 이념이야 대단히 숭고한 것이겠으나, 언행과 성격은 주변의 공감을 사기 무척 어렵지 않을지 짐작은 되더군요)에서 도출된 결론이 아니라, 극지방의 환경이 오염되거나 이상 징후를 보이면 다른 곳의 사정은 뭘 애써 분석하거나 검증할 필요도 없이 망가졌다는 뜻이죠. 저자는 책 여러 군데에서 "탄광의 카나리아"를 거론하는데(너무 잘 알려진 풍유라서 진부한 느낌마저 있지만), 사실 최초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카나리아에 빗댈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이미 최후의 보루가 무너졌다고나 봐야 합니다. 카나리아가 죽어나가도 위기 의식을 느껴야 할 판에, 내가 디딘 발 아래의 비계판이 아니라 지반 자체까지 무너져나가는 데도 태평이라면 그 무신경이란 이미 죽음을 자초할 만한 병적 근성이라고 봐야겠죠.

책은 아직 서른 살도 되지 않았을 무렵 그가 스스로 자금을 모으고 유력자의 후원을 받아 남극 탐험에 나섰던 엄청난, 말 그대로 "무모한 도전"에의 회고부터 시작합니다. 이런 모험에 나선 계기 중 하나는, 저자가 유, 청소년기부터 마음의 우상으로 떠받들던 로버트 스콧에 대해, 우파 극단주의 저술가(일단 저자는 그리 규정합니다)인 롤랜드 헌트퍼드(Roland Huntford)가 그간 과장되이 유포된 전설, 신화에 대한 조목조목의 반박을 담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역시 저자의 견해에 의하면) 그 영향으로 아직까지도 명예 회복이 되지 못한 현실에 개탄하여, "스콧의 발자취를 따라" 무지원 횡단을 벌여 보겠다는 각오를 품은 일이었다고 합니다. 역시 젊고 순수한 영혼만이 떠올릴 수 있는(또한 실천에 그 일부라도 몸을 담을 수 있는), 강단 있는 프로젝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헌트퍼드의 책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고, 일부 타당한 주장도 있는가 하면, 그의 비판이 꼭 스콧의 위업을 결정적으로 재평가(물론 평가절하)하는 모멘텀, 돌아올 수 없는 이정표가 되었다고 보기 힘든 면도 많습니다. 그가 거둔 객관적 위업에 대해서는 (저자가 주관적으로 어떤 애석함을 느끼든 간에) 아직도 절대 다수가 긍정적 평가, 존경을 품고 있습니다. 영국인이 아니라도 스콧이 위대한 탐험가인 줄은 다 알며, 다만 영국 외의 국가에서는 스콧보다는 아문센을 더 높이 치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고, 이 점을 헌트퍼드가 새삼 영국의 폐쇄적 독자들에게 각성시킨 업적은 분명히 있습니다.

또, 이 책 중에도 언급이 있지만, 사람이 끄는 썰매가 개썰매보다 낫다며 스콧과 에저튼 경 등이 극구 개를 감싸고 돈 건, 현대 같으면 계급의식의 발로가 아니냐며 큰 논란이 일었을 만합니다. 스콧 등은 당시 "말 못하는 개한테 고생을 시킬 게 아니라 더 처지가 나은 너희 인간들이 모범을 보이는 게 존엄의 발휘이자 의무 아닌가?" 같은 발언을 했으나(이 워딩은 스콧, 섀클턴을 소재로 삼은 여러 저서들에 두루 인용됩니다), 바로 이런 가치관이 귀족적 사고방식일 수 있죠. 이에 대해 저자는 다소 논점을 에두르며, 자신이 실제로 현지에서 적용해 보니 인간썰매가 개썰매보다 나은 점이 많다고 주장합니다. 실용적 근거를 대는 셈인데, 극지방은커녕 캐나다 타이가 지대에서 썰매로 교통수단을 삼아 본 체험도 없는 일개 독자로서, 탐험으로 잔뼈가 굵은 저자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데는 더 반박할 수 없긴 합니다.

저자는 극지방 탐험 비용 마련(과 그 전 과정)을 위해 육체노동도 불사한 청년이었으나, 알고보면 출신은 금수저 중의 금수저였습니다. 집안은 대대로 옥스퍼드를 나온 엘리트층이었고, 가문의 후광으로 얼마든지 해당 대학 입학이 보장된 상황이었으나 그는 끝내 소신과 (무모한) 꿈을 위해 부친과 학교의 제안을 거부합니다(책 중에 간간이 언급되는 미모의 여친 여러 분을 보면, 이양반 은근 풍류남아이기도 한가 봅니다. 심지어 "극지방 체험담만큼 작업에 성공적인 소재는 없다" 같은 말도 있습니다ㅋ). 이후 극지방 탐험을 위해 여러 인사와 기관, 법인체들과 접촉하는데 사실 이런 만남 주선 자체가 초고위층의 연줄이 있어야만 가능한 기회입니다. 이런 고위층 중에는 정말, 우리가 알 만한 영국 유수의 대기업과 금융 기관 이름은 한 번씩은 다 나오고, 칠레나 아르헨티나의 유력 단체는 물론, 심지어 일본의 암웨이까지 등장하더군요. 무튼 연줄 자체로는 기회만 마련될 뿐이고, 기회를 성과로 빚어낸 건 그의 진정성과 인간적 매력이었습니다.

비용 마련을 위해 그는 여러 장소와 공동체를 누비며 강연에 열중합니다. 그 중 그가 만난 가장 든든한 후원자는, 한눈에도 빈곤층 밀집 지역(이스트엔드) 출신임이 드러나는 "눈이 툭 튀어나온 남루한 행색의 소년"이었습니다. 이 소년이 다가와서 강연을 마친 자신에게 쥐어 준 "50펜스 동전"이, 이후 역경을 마주하고도 초심을 유지하며 본연의 진로를 헤쳐나갈 수 있게 돕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첫번째 장정인 남극 탐사에 돌입합니다. 책 여러 곳에서 그는 "책에서 배우는 지식"과 "몸이 현지에서 비로소 절감하며 깨닫는 지식" 사이의 크나큰 괴리를 여러 번 토로하는데, 성공이라기보다는 서투른 시행 착오로 점철된 고난의 행군에 가까웠습니다. 남극에서 긴 세월(물리적으로도 길고, 주관적 체감으로야 또 얼마나 길었겠습니까)을 체류하고 의도했던 작업을 마쳤으나, 타고 돌아가야 할 서던퀘스트 호가 (마치 타이타닉처럼) 빙하에 부딪혀 침몰하는 바람에, 이 탐사대는 결정적 좌절을 인정하며 간신히 급파된 비행기편으로 문명 세계에 귀환합니다. 처음부터 그들의 시도를 비웃었던 대중과 미디어는 (그래도 무관심보다는 낫다 할) 싸늘한 냉소와 조소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저자 스스로도 "자신은 탐험가가 아니라 생존자"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오지에서의 생존과 귀환이라면 이분보다 더 뛰어난 전문가가 우리 한국에도 여럿 있을지 모릅니다. 저자는 그러나 본분이 탐험가라기보다는, 탐험의 시도를 통해 환경 보호의 명분을 널리 홍보하는 운동가에 가깝습니다. 그의 시도 중에는 실패도 있고 성공도 있었으나, 실패마저 위대한 도전으로 결국은 대중에게 각인시킨 그의 인간적 진정성이야말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뇌쿠메네에서 극한의 상황에 직면하며 그가 절감한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리더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념이 투철해야 하며, 자신의 자질에 대해서는 다른 누구보다 그 자신이 정확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비천한 인간은 권력 앞에서 아부하다가도 그 권력이 퇴조의 기미를 보이면 바로 적진의 사냥개로 돌변하여 물어뜯는 극악의 근성을 버리지 못합니다. 이런 인간은 환경의 변화에 카멜레온처럼 영합하며(그나마 기민하지도 못하죠), 현실의 다양한 정보와 양상을 진지하게 살피지는 않고 사냥개처럼 특정 진영의 가치를 폭주 맹종하는 데서 "깊이"를 찾는, 근본이 썩은 가치관을 지닌 종자들입니다. 저자 로버트 스원은 죽을 고비를 여럿 넘기며, 동료와 자신을 생존의 위기에서 지켜 주는 건 자기기만이나 환상이 아닌 현실에의 통찰을 거친 참된 확신임을 깨달았습니다.

존 밀스는 지난시절 영국과 헐리웃에서 만들어진 여러 고전에 출연한 이지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로 큰 인기를 누린 배우지요. 이분이 특별히 저자를 불러(이유는 저자가 존경해 온 스콧의 형상화란, 영화 속에서 이 대배우가 빚은 명연기가 전부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모금을 위한 대중연설에 아직도 서투른 청년에게 특별 지도를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거울을 봐. 누가 있나?"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 듣기 싫은 목소리로 뭐라고 하는군요."
"이봐, 평생을 배우로 살아온 나는, 지금 거울 속의 저 인간이 마음에 들고 그 목소리가 안 거슬릴 줄 아나? 다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쉽게 믿을 수 없었다고 하네요. 배우들은 자기 도취에 빠져 사는 부류가 아니었는지 하면서요)
"자네는 지금부터 거울 속의 저 사람과 대화를 해야 하네, 이 과정이 끝나면 보다 유려한 연설가로서 남들 앞에 나설 수 있을 거야."

스스로를 객관화하고, 객관화한 후에 비로소 드러나는 단점을 교정하여 스스로에게 자신을 가진 다음이라면, 다른 이들도 그의 매력에 호응할 수 있으리라는 가르침입니다. 탐험가 못지 않게 대중 운동가로서 평생을 헌신했던 그에게, 이 대배우와의 만남은 중대한 이정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책 제목은 남극 2041입니다. 2041년은 그간 잠정적으로 약탈적 경쟁을 자제해 왔던 북반구의 강대국들(여기에는 중국도 포함됩니다)이, 본격적으로 영토와 자원 확보 경쟁에 돌입할 수 있게 되는, 남극조약의 만료일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나치가 비행기로 극지방에 뿌린 수천 개의 스와스티카를 거론하며, 도대체 근시안적 탐욕에 절어 어머니 지구의 표면을 훼손하고 파국에의 질주를 서슴지 않는 이들 강대국 정부들의 작태가 나치의 만행과 우행에 다를 바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집니다. 무관심은 곧 공범 행각에의 참여나 마찬가지입니다.

저자는 부대원과 대중의 호응,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종전의 미숙한 청년에서 원숙하고 신념 강한 지도자로 인간됨이 거듭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평 앞에도 적었지만) 가장 방해가 된 건 주변의 마케팅 열풍에만 그 동기가 반응하는, 소비체제에 철저히 길들여지고 싸구려 진영 논리에만 중독되었으면서도 정작 자신을 깨어 있는 의식으로 과대평가, 착각하는 일부 대중들의 무관심한 작태였습니다.

남북극을 탐사하며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홍보하는 일 못지 않게참된 자신을 재발견하며 리더로 거듭났던 저자의 외침은 그래서 그 울림이 각별합니다. 지구의 환경을 수호하는 일에 동참하기란, 우리들 대중이나 독자들도 그저 적선이나 생색내기식 캠페인의 일부가 되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인격을 다른 단계로 도약시키는 노력이기 때문이죠.

책 중 "구름 끝에 황금빛 경계가 보였다"는 표현은, "실버 라이닝"이라고 해서 영어에서 즐겨 쓰는 관용구를 살짝 바꾼 것입니다. 역주에 보면 "여기(라스베가스)에서 일어난 일은 여기에 머문다"에 대한 설명에서 이 구절이 "관능적"이라고 한 건, 바람을 피우든 외도를 하든 가정과 본업으로 복귀할 때 그 일이 발목을 잡지는 않을 테니 마음껏 기분 내다 가라는 속뜻을 담았기 때문이죠. 이 구절을 제목으로 삼은 헐리웃 영화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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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읽는 아시아 - 지정학적 이슈로 보는 아시아의 역사와 미래
장 크리스토프 빅토르 외 지음, 조민영 옮김, 기욤 쇼 지도제작 / 시공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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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는 그 자체에 제작자(혹은 배포자, 반대로 배포를 막거나 통제하는 자)의 의도와 권력 의지를 적나라하게 움켜쥔 살벌한 도구이며, 무엇을 드러내느냐보다는 오히려 무엇을 생략하고 감추는지를 더 눈여겨 봐야 한다는 점은, 작년 5월 19일에 독후감을 남긴 <압축세계사>에서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단, 그 책에서 주장한 내용이었는지 아니면 독자인 저의 감상일 뿐이었는지는 기억이 확실치 않네요) 그 책이 무난하고 소프트한 실용적 의도에서 집필되었다면(게다가 생략의 묘를 확실히 발휘?), 이 책은 몇 백 배는 더 심각합니다. 도법도 그렇고(지도 제작자들은 그간 더 세련되고 더 효율적인 방식을 개량시켜 왔습니다), 지도에 표시하고자 하는 국제 정세의 험악하고 살벌한 추이 역시도 그렇습니다.

이 책의 부제를 보십시오. "지정학적 이슈로 보는 아시아의 역사와 미래"입니다. 어느 지역이나 "역사"도 있고, "미래"도 아마 각자의 잠재력과 의지, 목표에 따라 다양히 전개되겠지만, 간단찮은 "역사"와 지극히 불투명한 "미래"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현재의 아시아만큼 위태롭고 난해한 지정학적 상황, 이슈에 맞닥뜨린 지역은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이 책은 난감하고 첨예하며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현재의 "지정학"을, 어느 보고서나 르포나 다큐멘터리보다 실감나고 정확하게 독자들에게 프레젠테이션해 주고 있습니다.

p17에는 화려한 원색으로 도시된 한 폭의 지도(뿐 아니라 이 책 전체가 이처럼 편집의 공과 기교를 아끼지 않은 걸작 도판으로 가득합니다만)가 나옵니다. 빨간색으로 표시된 지역은 우리 한국, 그리고 해협 건너 일본 열도뿐입니다. 무슨 지표를 상징하는 배치일까요? 여성 1인당 평균 출산아의 수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아시아에서 딱 두 군데뿐입니다. (아, 너무 작아서 안 보였지만 도시 국가인 싱가포르도 있네요) 텍스트는, "아시아는 본디 젊고 역동적인 인구 구조가 그 특징이다"라고 하는데, 일본은 세계 준비 통화로까지 대접받은 엔화를 운용하는 경제 대국이라고나 하지만, 우리는 그만한 고도 성장의 짜릿한 과실도 맛 못 본 채 이렇게 늙어가야 하냐에 생각이 미치니 다소 억울한 느낌도 지울 수 없군요.

영아사망률은 그 나라 복지와 후생을 판단하는 중요 지표입니다. 천 명이 보통 기준치이기에, 해수 염분의 농도처럼 ‰(퍼밀)이 단위입니다. 일본과 싱가포르는 2‰, 대한민국은 3‰, 중국은 12‰, 북한이 22‰인데 인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은 각각 41, 33, 70 수준입니다. 아프간은 71‰, 요새 부동산 개발이 한창인 라오스가 44‰, 캄보디아가 30‰나 되며, 반면 인접 타이와 베트남은 각각 11, 19 수준입니다.

서평 앞에서 "살벌한"이란 표현을 썼습니다만, p73을 보면 왜 아시아가 세계의 화약고가 되어가는지 그 현황이 잘 드러납니다. 방사형 부채꼴로 뻗은 그래프에서 청색은 미국, 적색은 중국(의 각종 지표들)인데, 어떤 것은 미국이 중국을, 다른 것은 반대로 중국이 미국을 압도합니다. 대체로 재래식, 양적 지표에서 중국이 미국을 앞설 뿐이고, 질적인 분야에선 여전히 미국이 우위를 점합니다만 어떻게 전개될지는 누구도 쉽사리 그 양상을 점칠 수 없습니다. 우리도 몇 년 전에 뉴스를 통해 안 바와 같이, 명목 GDP는 현재 미국을 중국이 추월한 상태입니다. 단순 길이가 아니라 방사형으로 퍼져 나가는 모양새라서 좀 과장된 감이 있습니다만 단순 인구 수에서 중국이 미국을 훨씬 추월하는 것도 엄연한 현실(저 앞 p15에 박스 아티클로 잘 설명되기도 합니다. 인도가 추세상 중국을 앞지르리라는 점은 우리도 이미 아는 사항입니다)이고, 이 두수(頭數)가 질적인 역량까지 담보할 때 무슨 결과가 촉발될지는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바로 맞은편 페이지에 보면 이른바 "진주목걸이 전략"이 도시되었는데, 이는 현재 인도양 곳곳에 배치된 중국 해군 기지의 분포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유명한 전략 컨셉으로 A2/AD라는 게 있는데, anti-access/area denial의 약칭이죠. 공해를 포함 해양 곳곳에 미국과 그의 동맹국이 자유롭게 지나지 못하도록 장애를 설정하여, 궁극적으로 자국 영토를 더 저렴한 국방비 지출만으로도 방어해 낸다는 중국의 전략입니다. 이 전략의 일환으로 재작년에서 작년까지 핫 이슈였던 이른바 "구단선"이 주목받았고, 이 책에 다소 무섭게 그래픽화한 "진주 목걸이" 역시 이런 원대한 구상의 맥락에서 파악해야 합니다. 지정학의 살벌함과 현실감은 그저 텍스트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이처럼 지도 같은 보조자료의 도움을 얻고 입체적으로 파악해야 그 심각성이 피부에 와 닿습니다.

아시아는 대륙, 해양의 거대한 영역을 포섭한 만큼 무슨 관점에서도 핵심의 비중을 지닐 잠재력이 충분합니다. p106에서는 운송의 허브 역할을 특히 거명하는데, 2014년 기준 세계 20대 항만 중 6개가 중국에 위치한다는 놀라운(아니, 더 이상은 놀랍지만도 않은) 팩트를 지적합니다. 아시아의 으뜸 공항은 순서대로 두바이, 첵랍콕(적렵각), 인천 등이 꼽히지만, 이 페이지에서는 저 서아시아를 커버할 분량이 편집되지 못했으므로 홍콩과 인천, 도쿄 등을 평면 동시 대조할 수 있을 뿐입니다.

흥미롭게도 운송과 교통의 허브를 설명하는 항목 바로 다음에 인구 디아스포라를 화제로 꺼냅니다. 인구는 많고 그 인구압을 감당하거나 부양할 능력은 못 되어 세계 각지로 흩어지는 현상을 "디아스포라"라고 하는데,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이 요즘도 이런 아픔을 겪지요, 중국, 인도의 디아스포라도 전통적으로 유명했는데 근래 들어서는 자국 경제가 활황, 안정기를 맞이할 뿐 아니라 국력과 발언권이 신장되어, 어떤 해외에서 겪는 "설움, 아픔"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진출"로 인식되는 면이 강합니다. 이들 디아스포라 인구를 받아들이기로 으뜸인 나라들은 태국(인접 국가라서 그렇겠죠), 저 멀리 캐나다, 미국 등이군요.

본래 사람들은 오스트레일리아를 폄하하려는 의도로 "다운 언더" 같은 말을 쓰곤 했습니다만, 이 책에서는 지도 제작의 한 기법으로 개념 소개를 합니다. 이처럼 오스트레일리아를 지도 중심에 놓고, 남극을 정북 방향에 배치하는 도법은 기존의 관점을 전복하고 보다 개방적인 시야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합니다. 우주는 본시 위도 아래도, 왼쪽 오른쪽도 없으며, 심지어 절대 좌표계의 존재마저 부정됩니다. 무엇이 표준이고 중심이며, 위와 아래이어야 하느냐는 지도의 다양한 비틀기를 통해 오히려 바로 볼 계기가 마련됩니다. 다만 두 세계 사이에서 어디에 속할 것인지, 포용과 배제를 놓고 무슨 가치를 선택할지는 여전히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이 치열하게 고민할 국가적 아젠다 설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래는 또한 에너지 확보를 위해 모두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자원 쟁탈의 장인데, 이는 벌써 세계 곳곳에서 그 서막이 이미 오른 전쟁이기도 합니다. 중국은 광대한 영토를 지녔기에 각종 자원이 풍부하지만, 자국의 인구가 워낙 많기에 남의 나라를 힐끔거리며 물색에 여념 없습니다. 이 책은 에너지를 두고 "아시아의 결정적 요인"이라고까지 평가하는데, 그 중에는 수 년 전 일본과 중국이 외교, 무역상 큰 마찰을 빚었던 희토류 이슈도 포함됩니다. 책에는 이례적으로 (화학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주기율표도 실렸습니다. 그린란드, 북한의 정주 인근이 희토류 매장의 새로운 보고라는 예측도 곳곳에서 제기되곤 하죠.

p111에는 아시아의 자원별 수요 추이가 누적 선형 그래프로 도시되었는데, 여전히 석탄의 비중도 높습니다만 재생 가능 에너지의 비율도 눈에 띄게 상승 중이며, 지구 온난화의 주범 중 하나인 중국이 최근 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감소 노력에 열심인 사실도 희망적이긴 합니다. 그래프를 보시면 알지만 재생가능 섹터의 비중이 유의미하게 크며, 추세도 현저한 성장 징후를 보인다는 게 무척 반갑지요.

아시아는 특유의 질곡 많은 역사 때문에, 백인 제국주의 세력이 물러간 후에도 여전히 국지적 분쟁에 시달리느라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책에는 여러 국가들의 심각한 내전 내분 양상이 잘 소개되었는데, 일단 카슈미르 지역은 본래부터가 파키스탄, 인도 양국 사이의 목숨을 건 각축장이었고, 인도가 파키스탄과의 전쟁에 골몰하느라 자국 내의 정치 난맥상 때문에 지리멸렬하던 사이 중국군이 진입하여 일부 지역을 점령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게 마오 시대의 일인데, 인도와 중국은 성격이 명확히 구분되는 문화권인데다 덩치 큰 제국으로서의 위신을 내세우는 인접국이었으므로 역사상 사이가 좋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단지 티벳 고원과 히말라야 산맥이라는 지형적 장벽 때문에 그간 대규모의 충돌이 없었을 뿐이죠. 지난번 중국의 한류 통제, 관광 제한 등 이른바 금한령이 실시되었을 때, 인도 총리가 한국을 향해 유독 구애의 제스처를 열심히 보낸 건 이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미국과 인도 사이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는데, 반 세기 전의 군사적 충돌, 그리고 최근에도 빚어지는 알력 때문에 이 둘은 근래 들어 부쩍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카슈미르 지역도 그렇고, 남쪽으로 내려오면 실론 섬(스리랑카)에도 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지역에서 분쟁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스리랑카에 원 거주하던 인종도 기질이 드세기 짝이 없는데다, 대륙 쪽에서 넘어온 타밀 족도 의지가 굳세고 상대를 향한 적대감이 잦아들질 않는 불굴의 전투 종족입니다. LTTE가 최근에 기세가 주춤해지긴 했으나, 정부군이 워낙 강경 드라이브를 펴기 때문에 (책에서도 나오듯) "지역 공동체 간의 화합은 매우 요원한" 상황입니다. 장 말미에 "최근에는 (전통적으로 가까웠던) 중국보다 인도와 더 가까워지는 추세"라고 하는데, 이를 보며 국제 정세에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음이 새삼 확인되죠. 스리랑카가 중국과 가까워지면 인도는 남으로부터 중국세에 포위되는 형국이거든요. 인도가 한국에댜 구애의 제스처를 취하니까 중국도 최근 금한령을 느슨히한 측면도 있는 겁니다. 책은 다양한 지도를 통해 이런 "지정학적 사정"을 잘 설명해 줍니다.

태국을 두고 저자는 "노란색과 붉은색이 대립하는 나라"라고 규정하는데, 태국이 본래 영토가 꽤 넓은 국가인데다, 인종 구성도 단일하지 않으므로 국가 통합 실현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과제입니다. 과거에는 공산화 위험 때문에 군부-왕실 간의 암묵적 카르텔로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현재는 북부의 빈곤층, 노동자층 vs 남부의 중산층, 왕당파 지지 세력으로 나라가 분열된 상황입니다. 전자가 붉은색, 후자가 노란색을 상징하는데, 말 많고 탈 많은 탁신 일가는 전자를 핵심 지지세력으로 삼습니다. 이 둘의 대립은 어느 한쪽을 간단히 편들고 말 일이 아닌, 대단히 복잡한 구도를 갖습니다.

한 국가의 사정도 이러한데, 동남아시아 전체로 시야를 넓히기까지하면 온전히 화합이 이뤄질 전망이 극히 불투명해집니다. 이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로 스케이프를 확대하면 대체 결과가 어떨까요? 현재 아시아의 운명과 장래 노선은 아시아가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게 당위이긴 합니다만, 아시아 국가라고 해서 서구 세력에 대한 지난시대의 반감만으로 무작정 강경대립노선을 걷는 건 온당치 못합니다. 미국의 부당한 압력도 거부해야 하며, 동시에 중국의 무모한 패권 행보도 견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시아가 온전한 자존을 갖추고 자신과 타국의 미래를 건설적으로 설계하기까지, 디뎌야 할 여정과 극복해야 할 과제는 여전히 험난할 뿐더러 산처럼 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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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문학의 종언시대 문화다북스 평론집 3
최강민 지음 / 문화다북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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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문학은 서유럽 문화의 황금 시대에 인문의 정수를 이끈 공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문예나 창작의 모든 분야에서, 우리 일반 소비자들과 별반 다를 바 없으나 다만 취향과 개성이 좀 특이한 크레에이터들이, 한 번의 대박 혹은 히트작으로 이름을 올린 후 꾸준히 화젯거리와 가벼운 최종소비재를 양산하는 게 대세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혹은 거물 작가라도 해도 반드시 "엘리트 문학"을 하는 분이라고 볼 수는 없을 만큼, 가볍고 독자에게 부담 안 주는 컨텐츠로 승부를 걸기도 합니다. 이런 배경에는 엘리트 문단이 스스로 제 발을 찍어 신뢰와 신비감을 걷어낸 패착이 크게 작용하기도 했다는 게 이 책 저자분의 시각입니다.

이 책은 저자가 쓴 여러 평론들의 모음집입니다. 어떤 글은 제목과 다소 동떨어진 주장을 담지 않았나 싶은 것도 책의 그런 성격(각자 다른 시기에 다른 매체에 기고된 여러 글들의 모음이라는 점)에서 연유하겠습니다. 여튼 어느 평론을 읽어 봐도, 첫째 한국에서 분명한 퇴조의 기미를 보이는 엘리트 문학의 병폐, 문단의 문제 있는 생리, 처음부터 잘못 잡고 들어간 미학 스탠스, 허위 의식과 위선 등을 공통적으로 꼬집으며, 둘째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바대로, "평론이라고 해도 일반 독자가 얼마든지 쉽게 감상할 수 있고, 무엇보다 평론가 본인의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전개된 문장, 생각으로 채워진", 그런 글들로만 책이 이뤄졌다고 보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단일하고 분명한 의도를 지향하며, 그런 걸 떠나 어느 독자라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넉넉한 동의, 공감을 보낼 수 있게 쓰여졌습니다.

"잡놈 평론가"로 자처하며 솔직한 글쓰기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잡으시는 듯한 저자는, 우선 "남의 글과 생각을 흉내내는" 문단 평론가나 일부 작가들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서유럽의 빼어난 사상가들, 미학자들이, 남들이 따라 배울 만한 멋진 관점을 제시하거나 완성하여 시대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문예에 큰 영향을 끼친 건 맞습니다. 그러나 평론가들, 혹은 어떤 크리에이터들도, 본연의 사명은 남의 흉내내기가 아니라 자신만의 독창적인 무엇인가를 만들어 독자와 청중의 호응과 감동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현학의 휘광을 거짓으로 지어내느라 갖은 번역어의 곡예를 부리고, 이 와중에 자신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거짓의 진입 장벽을 높인다는 지적은, 일반 독자 입장에서도 씁쓸한 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문인이나 예술가라면 그래도 진실을 독자들과 공유할 줄 알았는데, 그들조차도 거짓된 자체 지역 권력 구조의 구린내나는 일부임을 새삼 깨닫게 되니 말입니다.

우리 시대 큰 문인으로 추앙받아온 소설가 이문열이나 정호승 시인, 황석영 등에 대한 착잡한 비판도 실려 있습니다. 특히 저자는 "일반 반공 기획물에서 북한을 단죄하는 건 그 나름의 근거라도 있다. 그러나 정호승 시인의 지적은 그나마도 갖추지 못했다는 게 문제다."라는 진단으로, "방향성이 무엇이냐는 것보다, 훼절이든 개종이든 변심이든 그에 수반된 분명한 동기와 입장의 표명이 더 중요한데, 한국의 엘리트 문인은 그런 성의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또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은, 이른바 "이문열돕기운동본부"가 그의 저작들을 화장한 퍼포먼스에 대해, 저자는 "이런 식의 대응은 동해보복과도 같은" 유치하고 건설적이지 못한 방식이라며, 도덕적으로 우월한 명분을 갖췄다면 응수도 보다 성숙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어놓습니다.

책의 3장에서는 (어쩌면 책 전체의 기획에선 그나마 가장 먼 거리를 유지한) 본격 평론들이 이어집니다. 화제작이었던 장강명의 <표백>에서, 그는 이른바, 자살 세대, 표백 세대라는 화두를 끄집어냅니다. 표백은 내심을 고백하고 표현한다는 그 표백이라기보다, 현재의 20대들에게 사고하기를 멈추고 거대하면서도 화려한 소비의 컨베이어 벨트 위로 주저없이 자발적으로 탑승하라는 냉연하고 잔인한 체제의 주문과 그 결과를 상징합니다(쉽게 말해, 개성 없이 체제의 색을 뒤집어쓰라는, "표백제"라고 할 때의 그 표백입니다).

에밀 뒤르껭이 말한 맥락에서(이런 얘기 꺼내면 책의 취지에 정면 위배될까요?ㅋ 그러나 저자께서도 저 한참 뒤 p327등에서 장 보드리야르의 담론을 원용하시곤 합니다), 자살은 인간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고 실존에의 역설적 절규입니다. 그래서 자살은, 강제 漂白을 거부하는 깨어 있는 의식의 처절한 表白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여기까지는 몇 년 전에 이 작을 읽기도 했던 제 생각이고, 저자는 "초보 작가(장강명은 전직 기자 출신입니다)의 미달된 자질 함량이 빚은, 피상적 저항(형상화)의 시늉이자, 소영웅주의 혹은 나르시시즘에 그친 실패한 자살의 억지스러운 부각, 상상력의 부족" 등의 혹평을 내어놓습니다. 혹평이지만 작품의 선명한 특징이랄까 논란이 될 법한 대목만을 잘 짚어내셨기에, (재미있는) 혹평 때문에라도 작품이 더 궁금해질 분도 있을 것 같네요. 본래 평론은 주례사가 아니라(p312:1) 이처럼 애정에서 솟아 나온 가식 없는(그러나 양심의 소산인) 막말에 가까워야 합니다.

표준과 융화를 강조하는 일본 같은 사회에서 오쿠다 히데오 같은 삐딱한 문인이 나올 수 있다는 게 진정 놀라운데, 그의 <남쪽으로 튀어>에 대해 저자는 그가 창조해낸 "결코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마", "돈키호테" 같은 캐릭터 이치로에 대해, <광장>의 이명준이나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 등과도 같은 위계를 부여합니다. 희한하게도 오쿠다 히데오는 휴전선 이남에 거주하며 융통성도 센스도 없고 말도 안 통하는 "좀비 같은" 체제가 내내 께름칙한 감시의 눈길로 특정인들(현실이든 가상이든)을 "사찰"하는 현실을 염두에라도 뒀는지(전혀 근거 없는 추측은 아닌 게, 남한에 그의 독자들이 많다는 걸 작가님 자신도 잘 알테니 말입니다), 저처럼이나 의미심장한 어구를 제목으로 걸었습니다. "국정원이 귀찮아서라도 우리는 북으로 튀자고는 차마 못하겠고, 그저 튀려는 방향으로는 남쪽을 되뇔 뿐"이라는 저자의 퉁명스러운 한 마디는 그래서 재미 있습니다.

자폐아와 잉여 인간 화두를 내세우며 코믹한 진행 속에 기발한 시대 풍자를 담은 이시백의 <사자클럽 잔혹사>에 대해서 저자는 찬사와 응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극우파의 전성시대에 부르는 유신세대를 향한 장송곡"이라든가, 웃음의 배후에 가장 잔인한 억압과 폭력이 진을 치는 병든 시대의 작태가 신랄히 형상화된다는 점에서, 또 저자가 중시하시는 "등장 인물들의 유효적절한, 생동감 있는 활약과 주제의식의 만남"이 성공적이라는 이유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듯합니다. 이 작품은 제가 아직 못 읽어 봤는데, 시간을 내어 꼭 감상해 봐야겠습니다.

최인석의 <이상한 나라에서 온 스파이>에 대해, 저자는 "상투적 서사와 현실 투영의 강박"을 지적하며, "불온함"이 그저 불온함 자체만을 드러내기 위해 과장되어서는 안 됨을 강조합니다. 기왕 불온함을 내세우려면 "그 극단"으로 질주해야 마땅하고, 어정쩡한 마스커레이드는 "상호 적대적 공존 속에서 상대방의 장수 만세를 기원하는 박수갈채(저는 이 표현이 너무도 재미있더군요. 마치 냉전 체제 하에서 미국의 군산 복합체가 소련의 원리주의 노선 폭주로 먹고살았듯)"일 뿐이라는 저자의 추상 같은 비판에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도 제가 못 접했는데, 88올림픽과 02월드컵을 버젓이 치러 낸 주권국가에서 탈식민의 꿈을 노래하는 작가(최인석)의 발칙함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또 (저자의 지적대로) 그 한계는 어디인지 꼼꼼히 읽고 저자의 평론을 복기해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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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한 장으로 보는 최신 IT 트렌드 - 개정증보판
Saito Masanori 지음, 이영란 옮김 / 정보문화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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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속에 아무리 (특정 주제에 대해) 전망과 설계가 잘 이뤄졌다 해도, 별도로 이걸 시각화하여 눈으로 봐 가면서 일을 진척시키면 확실히 능률이 많이 오릅니다. 그래서 웬만한 조직 사무실 상황판(불레틴)에는 차트, 도표, 하다못해 번잡스런 메모나 사진 조각들이 잔뜩 붙어 있는 거죠. 일목요연하게 정돈된 그래픽 포맷이면 좋은 텐데(또, 거대 조직에서는 실제로 전문 인력(고용이든 외주든)을 써서 이런 일을 맡깁니다), 그 역시 시간과 정력이 적잖이 소모되는 터라 어쩔 수 없이 최상의 엔트로피는 포기하고, 필요 최소한의 시각적 자극을 받는 단계에서 만족합니다.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의 시대입니다. 온갖 키워드와 트렌드 심벌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데다, 그 정확한 개념과 유래까지 파악하기까지란 번거롭고도 어렵습니다. 시각적 보조 자료란 그래서 누구(업무 수련도가 높건 낮건)에게나 필요하기 마련인데, 인포그래픽하고는 또 미묘하게 다릅니다. 더 융통성 있고, 더 범위도 넓으며 직관적으로 고안된 훌륭한 "시각" 자료(책의 표현을 따르면 "그림 한 장")들이 이 책에 가득 실려 있습니다.

비교적 어려운 개념에는 당연히 그림이 필요하고, 잘 아는 사실이나 원리에도 그림이 곁들여지니까 기존의 이해가 더 선명해지는 것 같더군요. 그림도 그림이지만, 항목들 선정이 참 좋았습니다. 사전류에서 흔히 시도, 편집하듯, 같은 서열에 놓인 개념으로만 내용을 나누면 독자 입장에서 지루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주제 논의의 상하위층을 자유롭게 넘나듭니다. 각론에서 지루해진 머리가, 책의 논의를 따라 불규칙적으로 총론으로 올라가곤 하니, 독서의 단조로움이 훨씬 덜합니다. 그뿐 아니라, 각론에서도 간간히, 큰 맥락(총론)에서의 위치를 짚어 주니, 하위 개념 단계에서만 기술적 의의를 파고드느라 근시가 되기 쉬운 안목이 더 넓어지는 장점이 분명히 있더군요. 논제에 대해 확실한 이해를 한 저자라야 이렇게 쓸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본문의 그래픽을 좀 찍어서 서평에 곁들이고 싶은데, 이런 책은 도판이 또 핵심이라서 사진 첨부는 자제하겠습니다. 그렇디고 텍스트가 평범하다는 게 아닙니다. 이 책 보면서 저는 오히려 그래픽보다 본문 서술의 시원시원함, 명쾌함에 더 끌리더군요)

p82에 보면 "약한 의미/강한 의미의 인공지능"을 준별합니다. 이건 제 개인적 사정인지 모르겠는데, 한창 인공지능 열풍이 불고부터 처음에는 무작정 (성취도나 완성도, 성능에 무관하게) 인공지능 예찬론 일색이다가, 일본 교수들이나 전문가들부터 슬슬 "의미의 강약/광협"을 나누기 시작하더군요(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 개인의 독서 편력에서는 그랬다는 뜻입니다). 이 책도 일본인 저자의 솜씨입니다. 아마도 일본에서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될만큼) AI에 대한 관심, 투자가 높아서일 수도 있고, 그런 관심 수준에 비례하여 반발이나 반감도 부상했었기에 날카로운 비판이 제기되었겠으며(제 추측입니다만), 이에 대해 논의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저런 분류법(혹은 면피성 핑계)이 등장하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저자는 1년 반여 전 알파고의 대국 승리를 거론하며, 대단한 기술적 성취이긴 하나 이 시스템이 하는 일이 고작 바둑 두는 일 하나라면 무슨 큰 의의가 있겠냐며, 이제서야 마케팅 광풍 때문에 사람들 시야를 가렸던 거품을 걷어내는 듯한 유력한 발언을 합니다.(참고로 저자는 IBM에서 잔뼈가 굵은 기업인 출신으로, 현재는 중견 IT 기업의 CEO입니다) 게임에서 수행해야 할 목표는 단순합니다. 바둑은 집의 수를 늘리면 이기는 방식으로, 비록 그 숱한 전술을 헤아리는 경우의 수는 우주 원자의 개수보다 많다고 하나 달성해야 할 목표의 성격은 오히려 체스보다도 단순합니다. 예기치 않은 장애가 발생했을 때 문제 해결을 능률적으로 해 내려면, 유기체 특유의 "의지, 직관"이 발휘되어야 하는데 기계에게 그런 게 있을 리 없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사회적 위상으로 볼 때 당연하지만) 언젠가는 강한 의미의 인공지능, 즉 스타워즈의 C3PO나 R2D2 등처럼 인간과 대등한 인식, 센스를 발휘하며 대화를 주고받을 날도 머지않아 다가올 것을 예견합니다. 단, 그 과정에서 넘어야 할 기술적 장벽이 여전히 만만치 않음도 분명히 짚는데 이는 민완 기업인 특유의 예리한 직관입니다. CEO들은 기술적 세부사항에 대해 정확한 이해도 하고 있으면서, 전체 국면을 보는 넓은 시야도 동시에 갖추었기에, 오히려 엔지니어들보다 대화하기에 더 유익하고 배우는 것도 많더군요. 이 책도 그런 유능하고 현명한 CEO의 솜씨라는 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4차 산업혁명은 많이 듣기는 들어도 정확히 뜻하는 바가 뭔지, 누가 먼저 개념정립을 한 것인지, 4차가 있으면 1차, 2차, 3차도 있었다는 뜻인데 어느 단계를 정확히 이르는 건지 아는 이들은 별로 없습니다. 레온티예프 장기 파동을 설명할 때(물론 창안자인 레온티예프의 설명이 오리지널이죠) 암묵적으로 1차, 2차를 구분하기도 했고, 경제사 교과서에 보면 2차 산업혁명을 두고 철도, 전기의 발명이 파급한 거대한 기술 혁신과 대호황으로 설명하는 태도가 흔히 보이긴 했습니다. 이거하고 "제3의 물결"은 또 다른 계열로 논하는 겁니다. 거기다가, "3차 산업(서비스업)"하고는 전혀 논의의 성격이 다르고요. "4차 산업"은 (완전히 정착된 개념은 아니지만) 지식 산업의 통칭이며, IT와 개략적으로 통하기도 합니다만 그보다는 넓은 개념이죠. 그러니 "4차 산업"이 일으키는 대변혁을 두고 "4차 산업혁명"이라 이르는 게 전혀 아님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건 오히려 "3차 산업혁명"이었죠)

역시 저자께서 보는 시야가 넓다 보니, 1960~70년대에 일본에서 시도되고 소기의 성과도 거두었으나 타 분야로 파급, 확장되지는 못한 여러 기술적 성취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아메다스(기상관측 시스템), 신칸센 제어 시스템에서 이미 "사물, 기기에 센서를 내장시켜 데이터를 수집하는" 기초 발상이 있었다고 하네요. 이런 게 지금와서 돌이켜 보면 해당 기업 입장에서 얼마나 아쉽겠습니까. 원천 기술로 특허를 내어 두고두고 미국, 독일의 선두주자들한테 우려먹을 좋은 계기였는데 말입니다. 우리도 그 비슷한 게 있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 삼성 pcs폰에서 채용한 음성 인식 기술(집, 여친 등으로 발성하면 자동 다이얼을 해 주는 식)이 (지금 생각하면) 꽤 시대를 앞서나간 쾌거였는데, 이후 그냥 묻히고 말았죠. 여튼 저자는 일종의 retronym으로 M2M을 회고합니다.

이 책은 역자께서 꽤 "현지화"를 시켜 놓은 번역이 눈에 띄더군요. p191 같은 데를 보면, "... 2007년 당시 한국의 휴대전화에는 이미 음악 플레이어가 내장되어 있었고... " 같은 서술이 다 있습니다. 이거는 수식어를 "일본"에서 "한국"으로 일관 변환한다고 문맥이 통하거나 내용 타당성이 유지되는 이슈가 아니거든요. (일본산 휴대폰은 그런 컨셉과 기술적 성취를 이뤄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노키아나 RIM 등을 서서히 추월해 가는 기색을 보이며 애니콜이 피처폰[당시에는 이런 말이 없었지만] 시장의 1인자로 떠올랐던 건데) 아무튼 외국인 저자의 책을 읽는다는 위화감이 안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이 외에도 p159를 보면 한미 양국의 비즈니스 문화 차이를 논했는데, 미일이 아니라 한미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런 대목들은 번역이 아니라 저자의 독창적인 연구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사실 저는, 예컨대 1980~90년대에 쓰이던 전화기 다이얼 방식을 보고 표준으로 채택된 프로토콜의 놀라운 확장성에 감탄하곤 했습니다. 기술적 발전이 아직 지원 못 하는 기능을 두고서도 엔지니어들이 장래의 진화상을 예상하여 물리적 구조를 그리 짜 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걸 가리켜 "워터폴 방식"이라고 하는데, 현재는 이런 패러다임으로 접근하는 게 어렵습니다. 말 그대로 기하급수적으로 기술이 진보하는 데다, 소비자의 기호 역시 변덕스러운 터라 가까운 미래도 예측이 어려우니까요. 사용 빈도가 높게 예측되거나, 업무에서 우선순위가 높은 기능에 먼저 전력 투구하는 방식이 요즘은 일반적인데 이런 걸 두고 "애자일(agile)" 방식이라고 부릅니다.

일반인들은 잘 의식 못하지만 업계에서는 그 혁신성과 편의를 두고 (시간이 상당히 지났지만) 극찬을 아끼지 않는 게 클라우딩 방식입니다. 기업에서는 (2차 산업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자체 발전 시스템을 도입해서 전력 수요를 충당했는데, 거대 전력 회사가 일원적으로 설비를 차려 낮은 추가원가(초기 설립비용이 막대할 뿐 한계비용은 상대적으로 미미하죠)에 전기를 공급하면서 기업들이 원가 부담을 크게 덜게 되었습니다. 업체마다 대용량 서버를 갖추기도 초창기에는 무시할 수 없는 하중을 떠안았는데, 이제는 마치 한전에서 공급하는 전기 상품을 종량제로 사용하듯, 클라우딩 업체에 사용요금만 내면 그만이니 말할 수 없이 편하죠. 게다가 표준적인 서비스를 기복 없이 소비할 수 있다는 장점도 큽니다. pp.146~147에 보면 프라이빗- 퍼블릭- 하이브리드 각각의 방식을 보기 좋게 도식화해서 독자의 이해를 돕습니다. "규모의 경제"란, 여기에서도 유효한 현상 포섭에 성공합니다.

대중적 GUI의 사실상 창안자이자 가장 큰 수혜자인 마이크로소프트의 브라우저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정작 준수하지를 않아 여전히 논란인 HTML 표준 규약에 대해서도, 이 책은 그간의 변천사를 정연하게 제시해서 독자의 인식 혼란을 바로잡습니다. 무엇이든 그 현재적 의의와 미래의 비전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프로토콜이건 패러다임이건 개별 상품이건 그 걸어온 지난 족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엔지니어의 저작은 대개 당대의 첨단 결과상만 집중 조명하기에, 현황을 살피기에는 좋아도 응용성과 유효기간에 한계가 뚜렷한 지식이라는 약점이 있습니다. 반면 이처럼 시야가 넓은 CEO의 설명, 담론은 무엇을 화제로 꺼내든 간에 통시적으로 일단 짚고 봅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현재의 기능이 어떤 맥락 속에서 진화했는지, 비교적 먼 미래까지도 그 발전상의 경로를 대강이나마 유추할 수 있는 도움도 받을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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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유령 - 불어판 완역 청소년 모던 클래식 4
가스통 르루 지음, 박찬규 옮김 / 구름서재(다빈치기프트)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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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칭 세계 4대 뮤지컬을 운위할 때 <오페라의 유령>은 거의 단연 첫손에 꼽힙니다. 개개인의 취향이 다양한 문명사회에서, 터무니없게도 어떤 획일적 표준을 강요하는 듯한 "3대, 4대" 타령은 정작 뮤지컬의 본고장에서는 입에도 안 올리지만, 일단 많은 이들 입으로부터 좋다고 정평이 난 작품은 챙겨 볼 필요가 있긴 하죠. 게다가, 뮤지컬 포맷의 완성도로 볼 때 <오페라의 유령>은 각 넘버들이 하나같이 명곡이기도 하며 어느 하나 흠 잡을 구석이 없는 클래식 중의 클래식입니다. 죽기 전에(?) 한 번쯤은 일류 배우들이 꾸며내는 무대로 꼭 감상을 해야 여한이 없을 명작임에는 누구로부터도 이론이 없습니다.

우리가 W A 모차르트의 오페라 부파 <피가로의 결혼>을 인류 전체가 기념할 만한 명작으로 기려도, 피에르 보마르셰의 희극 대본까지 일일이 고전으로 높이며 탐독하거나 칭송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모차르트의 명작이 남긴 휘광과 영향이 워낙 지대하기에, 음악의 참 가치를 온전히 평가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해당 텍스트에도 관심을 줄 뿐입니다(단, 보마르셰의 해당 작품은, 혁명 전야 점증하던 시민 계급[부르주아지]의 각성과 불만을 훌륭한 풍자 기법으로 표현했다는, 일종의 사회학적, 역사적 의의가 더불어 새겨질 만은 합니다). 음악 작품이 훌륭히 고유의 미학적 성취를 거두었다 해서, 평행 효과처럼 원작이나 영감을 준 원 미디어까지 덩달아 빼어난 고전으로 존중될 필요는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됩니다. 애써 걱정할 필요도 없이 완성도가 떨어지는 "원작들"은 대중에게겐 전문가, 평자에게건 세월의 풍화와 심판을 받아 잊혀집니다.

그러나 가스통 르루의 이 작품은 어떨까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너무도 유명하기에, 현대인들은 해당 작품과 공연에 "원작 소설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새삼 놀라기도 합니다. 혹 추리 소설 장르에 관심 많은 분들도, 그 유명한 소년 탐정 룰르따비유(훌타빌)의 창조자이자 그 탐정의 대표 활약 작품, 나아가 밀실 트릭의 고전인 <노랑방의 비밀>의 작가로만 알고 있기가 대부분이라서, 바로 그 원작 소설의 작가가 G 르루인 줄 깨닫고는 한 번 더 놀라기도 합니다. 추리 소설 애호가라면(설령 뮤지컬 등에 담을 쌓고 사는 이라도), G 르루의 이름을 봐서라도 이 작품에 눈길을 줄 만합니다. 대개 추리소설을 즐기는 이들은 지적인 취향이 대부분이라, 장르를 불문하고 어느 작품이든 작은 동기, 연계만 생겨도 그 가치를 충분히 즐길 만큼 빠져들 만한 집중력이 있더군요.

헌데 이 작품은 그 이상입니다. G 르루의 작품이 아니라고 해도(읽어 보면 그만의 재기가 뿜어나오기에 아닐 수가 없긴 하나, 작풍이 사뭇 다르긴 해서 새삼 꺼내는 말입니다), 스케일도 크고 인간 본성의 제법 깊숙한 곳을 묘파하는 통찰도 돋보이는데다, 시대와 공간을 따지지 않고 언제나 누구에게건 어필하는 "러브 스토리"이기에, 웬만해서는 일단 펼쳐들고 끝을 보아야만 뒤커버가 간신히 덮일 겁니다. 쫄깃한 표현의 맛과 특유의 유머, 전설이나 야담류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연의 매력, 통속 소설만이 발휘하는 플롯의 흡인력과 장중한 고전의 덕목을 함께 갖추었을 뿐 아니라, 역자 후기에서도 지적되듯 미스테리물의 은근한 잔향도 함께 풍기는 등, 타고난 이야기꾼만이 빚을 수 있는 아름다움을 확고히 장착한 명작임이 분명합니다.

고전이라고 해도, 아니 고전이기 때문에, 역자의 주가 충분치 못하면 그 시대상을 이해할 수 없고, 맥락도 분명히 잡아내기가 힘듭니다. 이 책 p156을 보면 네 개(씩이나)의 각주가 특히 배치되었는데, 제가 전에 다른 번역본들을 읽곤 했을 때는 못 보았던 설명이, 이 구름서재판(박찬규 譯)에는 여럿 발견되어서 읽기가 편하더군요. 사정을 알고 지식에 밝은 독자에게도 주의 환기 차원에서 이런 각주는 필요합니다.

"쿠르티유 언덕길"에 대한 설명은, 이곳이 포도농원과 가까운 구 시가지(파리 역시 여러 번의 역사적 격변을 겪은 큰 도시라서, 문학 작품들에 등장하는 도심, 부심의 지리적 상황이 시대에 따라 다채롭습니다)라는 점을 알아야, 무도회를 앞둔 크리스틴과 라울의 심경을 독자들이 온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저 비련, 혹은 치정 스토리로 일관하느냐, 아니면 (같은 소재를 놓고서도) 세심하게 문학적 장치를 요소마다 배치하여 미학적 효과를 다층적, 입체적으로 꾀했느냐에 따라 통속물과 고전이 갈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줄거리만 (그것도 간신히, 힘들게) 따라갈 뿐, 작가의 이런 치밀한 의도를 못 잡아내고 다흘린다면 고전을 읽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고전은 이를 독자가 읽는 시기와 정서적 환경에 따라 그 느낌이 천차만별로 다가옵니다.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고, 작가가 그만큼 완결된 세계 하나를 지면에 정성껏 꾸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당대에 큰 화제가 되었다 해도, 통속물이라면 뻔한 줄거리에 뻔한 상업적 노림수로 이야기를 지어내고 공략 포인트를 지뢰처럼 깔아 놓기 때문에, 두 번만 읽어도 바로 질려버립니다. 허나 이 작품처럼, 천품이 뛰어난 재능 있는 작가가 공을 들여 구축한 픽션은, 마치 진지한 추상화가들의 명작처럼, 감상할 때마다 숨어 있던(관찰자가 간과했던) 다른 진귀한 면모를 노출합니다. 당시 가스통 르루의 상황이, 그만의 미학적 소명을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뭔가 당대인의 심금을 짠하게 울릴 로맨스 명작을 하나 내어놓아야만 했었기에(비슷한 언급이 역자 후기에도 나오더군요), 그 나름 썩 내키지만은 않았던 작업을 하면서도 자기 스타일과 고집, 원칙은 그대로 담아내었던 거죠.

이미 읽은 이들은 알겠지만, 이 소설은 좀 별나다 싶게 시점도 자주 변화하고, 내러티브 포맷도 갑자기 진술 조서투가 그대로 나오는 등 현대인들에게는 낯선, 아니, 이 시대 작가가 왜 이런 형식을 내세우는 건지 같은, 지레짐작했던 선입견, 스키마와 어긋나는 데서 유래하는 생경함 등이 느껴질 겁니다. 이게 그만의 무슨 실험 정신을 내세운 흔적은 아닙니다(그런 류의 진지함과는 전혀 거리가 먼 작가였죠). 그보다는, 자신이 진정으로 몰입했던 추리소설의 아련한 세팅 연장, 혹은 "여튼 나는 이 소설의 창작에 충분히 몰입하고 열정도 불어넣는다" 같은 시그니처 정도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런 형식상의 배리에이션은, 특히 추리 팬들의 마음을 끌 만한 기교(?)이겠습니다.

이미 다른 판본으로 읽거나 작품의 개성, 줄거리, 좀 특이한 설정 등에 대해 전해 들은 독자들은, 이 소설 후반에 느닷 페르시아인과 해당 지역의 사정이 등장한다는 점도 알고 있을 겁니다. 이 피처가 눈에 띄는 이유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 원안(그리고 세계 각처에서 현재 공연되는 대부분의 포맷)에는 이런 세팅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프랑스의 문인, 정치인, 귀족들은 여행차 페르시아를 심심치 않게 다녀왔고(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도 말이죠), 가뜩이나 오리엔탈리즘(에드워드 사이드 식의 의미나 담론이 아닌)에 열광이던 서구인들에게 페르시아만의 지방색이 각별히 어필했던 게 사실입니다(이뿐 아니라 문호를 개방하고 갓 국세를 떨쳐 나가던 멀리 극동의 일본에 대해서도).

이 무렵 페르시아는 카자르 왕조의 말기적 병폐가 극에 달하던 실정인데, 독일은 이른바 3B 정책을 내세워 당시 인기 있던 오리엔트 특급으로 활성화한 철도 교통을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바그다드까지 연장하고, 이웃 나라인 테헤란에까지 자국의 영향력을 넓히려 책동했으며, 독일과 전통적 라이벌 관계이자 이때로부터 불과 수십 년 전 패전의 쓰라림까지 맛 본 프랑스 역시 이곳에서 팔짱만 끼고있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문인 특유의 순진함으로, 영국의 위압적인 행보, 독일의 계산적인 접근과는 달리, 자국의 외교 행보에는 뭔가 따스한 온기가 담겨 있다고 편하게 착각할 수 있었겠죠. G 르루의 페르시아 관련 미장센에는 그런 특유의 나이브한 오리엔탈리즘이 분명히 풍깁니다.

역자 박찬규님의 문장이 그래서인지, 이 번역본은 전에 읽었던 판본들과 달리 더 달달하고 더 애잔하게, 이뤄질 수 없었던 딱한 사랑의 비극미가 독자의 심금을 살뜰하게 건드린 듯한 느낌입니다. 혹은 눈도 안 내리면서 스산하기만 한 겨울 날씨 탓에 기분이 그리 흘렀을 뿐일까요? 제 개인적 기억으로는 매번 이 고전의 독서가 우연히도 겨울에 이뤄졌던 터라, 어디까지나 텍스트 자체의 힘(그리고 예쁜 표지 디자인)이지, 그저 착각만은 아닌 듯하군요. 행복한 독서였습니다(추운 겨울에는 남들의 비련이 내 욕구를 달래는 특효약이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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