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킹 - 누가 새로운 세상을 지배하는가
앨 라마단 외 지음, 신지현 옮김 / 지식너머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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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뜸 브랜드를 만드는 과제도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아니, 브랜드 코인은 고사하고, 이미 시장과 영역이 정해진 판도에서 품질로 남을 압도하는 일등 제품을 만들기도 무척 어렵죠. 그런데, 과업의 난이도 자체가 반드시 그 수행자에게 합당한 대가를 안겨 주는 것도 아니라는 게 중요합니다. 이른바 "삽질"을 피하고 영리하게 과실을 따먹으려면, 경제적으로 투입된 효율적인 노력이 더 중요합니다. 저자들은 이런 적실한 노력을 두고 일러, "카테고리 킹이 되기"로 요약합니다.

카테고리 킹이 무슨 뜻일까요? 특정 섹터나 시장에서 그저 1인자로 잘나간다고 카테고리 킹이 되는 건 아닙니다. 1인자의 장점은 영리한 후발자들이 금세 따라 배웁니다. 시장의 충성도도 언제까지나 유지되는 게 아니며, 대중의 변덕은 수시로 수면 위의 보트를 잔인하게 전복하게 마련이죠. "킹"은 선거로 뽑히는 존재가 아니라, (허구의 이론에 불과하지만) 신이 부여한 권리에 의해 핏줄을 따라 세습되는 존재입니다. "카테고리 킹"은 시장에서 불안정한 지위를 놓고 하위 신분과 경쟁을 하지 않습니다. 한 번의 압도적인 수(手)로, 그 확고한 위상을 대물림시킬 만한 막강한 아이템입니다.

세상에 일찍이 없던 상품의 존재 영역, 기능, 그 소비가 부르는 놀라운 환희를 만들고, 이 시장 전체를 그 브랜드로만 기억되게 하는 획기적 개척을 두고 "카테고리 만들기'라 부를 수 있으며, 미개척의 카테고리를 만든 히트 상품을 두고 "카테고리 킹"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상품의 상위 분류명이나 유개념을 정확히 거론 안 하고, 그냥 "호치키스"라든가 "OO밴드"처럼 부르는 게 다 이런 예입니다(사실은 GPS도 상표명에 불과한데,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않고 시스템 자체로 여긴다는 점에서 이 역시 확고한 카테고리 킹의 실례입니다). 소비자에게는 그 개별 아이템 자체가 해당 시장 전체와 동일시되고, 앞으로 그 대체품으로 갈아탈 기미도 별반 안 보이는 압도적 강자이자 유일한 "선수"를 지칭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국망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공적을 쌓은 이가 이후 왕좌에 오르기도 하듯, 카테고리 킹은 여태 없던 걸 세상에 처음 빚어놓은 과감하고도 창의적인 혁신으로 대중의 뇌리에 새겨지는 존재입니다. p75를 보면 제품 디자인, 기업 디자인, 카테고리 디자인에 동시에 성공해야 이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음을 잘 도시화합니다. 기존의 마케팅 이론에서는 제품이 그 자체로 뛰어나기만 해서야 성공할 수 없고(많은 스타트업들이 좌절하는 게, 그 자체로는 뛰어나나 시장의 운때와 맞추질 못해서입니다), 이른바 "시장과의 궁합"이 잘 맞아야한다고들 주장하죠. 이 책은 그 "막연한 논의"를, 제3장을 따로 할애하여 "카테고리 디자인"이 성공적이라야 시장에서 살아남는다며 체계를 구체화합니다.

저자들은 흥미롭게도 무하마드 알리를 카테고리 킹의 좋은 예시로 듭니다. 그 이전에도 복서들은 천부적인 재주를 타고난, 놀라운 스피드나 반사신경을 자랑하거나 강펀치를 뽐내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인성이나 인격, 깨끗한 매너까지 갖추어 타의 모범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도 대중은 복서 하면 그저 알리만 떠올리기 십상입니다. 저자들은 이를 두고 "쇼맨, 챔피언, 반항아, 떠벌이, 이 모두를 한데 합쳐 놓은 카테고리가 여태 없었고, 알리가 이를 처음으로 만들어내었기에 불멸의 킹이 되었다"고 평합니다. 앞으로 아무리 뛰어난 PR 솜씨와 종목 적성을 지닌 이가 나온다 해도, 그는 "짝퉁"으로밖에 인식될 수 없으며, 영원히 카테고리 킹을 따라잡지 못합니다. 어린이용 판타지 모험 소설 "카테고리"를 처음으로 주조한 JK 롤링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하는군요.

이런 범주화를 생각하면 삼성의 선전(善戰)이 새삼 놀랍게 각인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애플의 스마트폰이야말로 역사에 남을 "카테고리의 창조"라는 점 누구도 부인 못 합니다. 그만큼이나 현대인의 일상에 밀착되고, 그만큼이나 기능성과 제품 환상을 동시에 갖춘 아이템이 앞으로 한 세기 동안 또 출현이나 할지 의문일 정도로 말입니다. 헌데, 책의 이론대로라면 삼성 같은 후발주자, 2인자는 진즉에 애플에 압살을 당했어야 맞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가장 호평 받는 도전자로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이에는 구글의 안드로이드 체제 경쟁 지원이 한몫합니다만), 1인자의 신경을 여간 쓰이지 않게 만드는 쏠쏠한 실적을 올리는 게 대단하다는 뜻입니다. 하나의 왕국에서 이성 제후가 적통 1인자의 지위를 노리는 건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책은 워낙에 단호하고 박력 있는 말투로 "과연 카테고리 킹이라야 살아남겠구나" 같은 인식을 독자들에게 확실히도 전달하기에, 도리어 이런 예외가 더 두드러지고 훌륭하게 각인되늰 거죠.

하지만 카테고리란 기업이나 마케팅 책임자의 입장에서 최고의 기준으로 준수될 내부 규범에 머무를 수도 있습니다. 기업이야 "그렇군, 카테고리 킹을 빨리 만들어내야겠는걸?" 같은 절박함이 확고히 내면화할 수 있지만, 소비자들에게는 이를 어떻게 어필할까요? 애플도 과거 삼성과의 소송전이 한창일 때, 삼성더러 "그냥 공개 성명서로 우리는 애플의 카피캣입니다라며 인정만 하면 모든 소를 취하하고 봐 주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이게 생각보다 중요한 액션이었는데, 그저 감정상의 자존을 지키고 상대에게 굴욕을 주려는 데 그친 유치한 전략이 절대 아니라는 소립니다. 품질이나 기능 외에도 소비자 대중에게 "내가 카테고리 킹이요"라는 확고한 이미지를 주려면(=왕으로 등극하려면), 어떤 스토리를 통한 계기가 마련돠어야 합니다. 상대측의 공공연한 굴복은 매우 광범위한 실효를 내기도 하겠고 말입니다.

이걸 놓고 저자들은 POV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즉, 어떤 상품이 대중 사이에서 "카테고리 킹이다(이런 말 자체는 몰라도 그런 현실적 인식은 다들 공유합니다)"라는 공감대를 퍼뜨리려면, 그럴 만한 스토리가 먼저 유행하고 널리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 인간이 취약한 건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실화(사실은 100% 팩트가 아니며 그저 관점과 희구의 복잡한 대입, 윤색이 끼어들 뿐이지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우리 때문에 죄 없이 희생되신" 스토리 때문에 고대 로마 전역을 급속히 파고들었으며, 어떤 히트 상품도 그 창안자의 신화적 성공담이 제품 개성에 체화되어야 "카테고리 킹"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습니다. 아이폰을 보면 그 창안자의 잡스의 휘광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성공 맥락을 운명처럼 달고 다닙니다. "혁신의 아이콘"은 잡스에게 아호나 별명처럼 붙어 다니는데, 아이폰을 구매하고 이용할 때마다 소비자들은 그 혁신의 "기운"이 내게도 스며들기를 주술처럼 희구합니다. 이게 바로, 같은 상품 하나를 봐도 그 의미가 확연히 다른 색채로 다가오게 하는 마법인, "ponit of view"입니다. 그리고 어떤 상품을 카테고리 킹으로 만드는 건 다름아닌 효과적인 POV의 세팅과 파급입니다.

저자들은 또한 이런 POV를 시장에 충격적으로 퍼뜨리는 기법으로 "라이트닝 스트라이크"를 강조합니다. 이는 말 그대로 번개나 벼락에 맞은 듯한 충격을 가리키는데, 현실의 자연에서 이런 기상 현상은 대피책도 있고 과학적으로 충분한 설명이 가능하므로 그리 무서운 존재가 아니지만, 마케팅에서의 라이트닝 스트라이크는 그야말로 날벼락처럼 경쟁사와 소비자 대중을 덮친다고 저자들은 말합니다. 저자들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 보면, "... 시장의 잡음을 이겨내고 시장을 컨디셔닝하기 위해 기업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는 전사적인 이벤트(p227)"인데, 이 말 자체도 라이트닝 스트라이크만큼이나 멋진 워딩입니다. 좀 오래된 예지만 IBM이 처음으로 1960년대 중반에 시스템/360을 각 기기업들에다 막대한 이윤을 남기고 보급(거의 독점이었고, 이를 감히 넘보는 기업은 존재도 하지 않았죠)하던 사실을 책은 환기합니다. 저자들은 "... 벼락이야 상대를 염두에 안 두고 무작위로 들판 아무데나 떨어질 뿐이지만, 기업의 라이트닝 스트라이크는 상대를 정확히 조준하여 그가 무슨 일을 당하는지도 모르게 가격하여 상품에 넋을 빼놓게 해야 한다(표현은 제 식대로 재구성한 거라 책과 불일치할 수 있습니다)"는 점에서 역시 일개 자연현상과는 차별을 짓습니다.

"카테고리 킹, 그거 매우 좋은 것이구나. 하지만 만들면 좋긴 해도 그게 현실에서 자주 가능하겠으며, 그저 남들 하는 만큼보다 조금 더 잘하기만 하면 시장에서 배겨낼 수 있지 않을까? 너무 허황된 대박을 꿈꾸는 건... " 대략 이 정도가, 특별히 패배자 아닌 우리들이 평균적으로 품는 마인드셋입니다. 다 그걸 하면 다 스티브 잡스게? 저자들은, 바로 이런 구시대적인 안이한 마음가짐을 품는 당신이야말로, 책을 읽을 자격이 없고 당장 책을 덮은 후 익숙한 루저의 루틴에 빠져들기나 해야 할 1순위 독자라고 합니다. 책의 매력은 천지개벽을 시킬 카테고리 킹의 이론화, 체계화 시도에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제는 모두가 카테고리 킹이 되지 않으면 아예 살아남을 수가 없는" 현실에의 각성과 촉구 어조가 더 선명한 개성으로 다가오더군요. 책은 독자를 느긋이 쉬게 내버려 두지 않고, 닦달하고 격동시키고 들쑤십니다. "당신 이렇게 가다간 고꾸라지게 되어 있어!" 가끔은 그 다급한 어조가 불안하게도 느껴지지만, 만인 생산자 시대가 도래하고 대량 소비 구조가 시대에서 퇴조하는 지금, 모두가 자기 범주 안에서 왕이 못 되면 노예로 살아야 할 미래가 코 앞임을 생각하면, 어쩜 당연할지도 모르는 화급한 경고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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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크라이시스 - 위기 후 10년, 다음 승자와 패자는 누구인가
루치르 샤르마 지음, 이진원 옮김 / 더퀘스트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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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역사가 그를 전후로 어떤 성격의 전환을 맞은 중요한 사건을 두고 기원으로 삼는 건 매우 드물게 보는 일입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천자가 새로 등극한다거나, 그 외 특별한 계기로 연호를 바꾸는 게 중요한 결단 때문이었지만, 현대에서 모두의 동의를 얻어 역법의 기원이 새로 바뀐다든가 하는 건 거의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가 2007~09년의 경제 위기를 하나의 새로운 기점처럼 삼자며 화두를 꺼낸 건 다분히 비유적 의도이긴 해도, 서서히 기억에서 잊혀져가는(우리의 무신경이 진정 놀랍죠) 그 사건이 그만큼 중대한 의의를 지녔다는 뜻도 됩니다.

많은 이들이 삶의 보금자리를 잃고, 직장에서 떠나기도 했고, 세계 굴지의 기업이 하루아침에 문을 닫기도 했습니다. 우리네의 일상에 파급이 크게 미친 그런 아픈 파문도 중요하긴 하나, 저자는 "그 일" 이후 국가나 정치 체제, 경제 시스템에 대해 인류 전체가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 혹은 얻었어야 했으나 위험하게도 태평스레 지나치는 중인지를 지적합니다. "지적"의 궁극적 의의는 무엇인가. 08년의 파문이 그나마 그 정도에 머물렀다면, 다가올 '18년(벌써 내년이기도 하지만, 정확한 지칭의 개념보다는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의도가 더 큽니다)에는 어느 정도나 우리를 위협할 큰 파장이 닥칠지를 선제적으로 대비하자는 게 저자의 의도입니다.

1장은 생산가능 인구에 대해 논합니다. 요즘 운위되는 4차 산업혁명은 더 이상 사람의 기여가 크게 여겨지지 않는 전면적 자동화, 기계화의 코드가 핵심 중 하나이지만, 일단은 그런 대세가 당장(적어도 가까운 미래에는) 닥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그래도 "여전히 중요한" 사람, 노동이라는 생산 요소애 대해 자세한 분석의 칼을 들이댑니다. 이 챕터를 보면 똑같은 인구라는 팩터에 대해서도 그간 각국이 참으로 다양한 태도를 취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책 전체에서 공통으로 느껴지는 분위기인데, 저자가 인용하는 팩트 중에 아주 새로운 건 없다시피합니다. 어느 정도는 우리 기억에 (뉴스를 통해서건 혹은 다른 경로였건) 자취가 남은 것들인데, 저자가 새로 구축한 맥락 속에서 접하니 대단히 신선하게 보입니다. 어떤 건 당시에 수긍했으면서도 이런 새로운 논의의 틀에서 바라보니 "믿을 수 없는" 것들도 나옵니다. 우리의 확신이나 막연한 기대가 기실 얼마나 근거부족이었는지 살피는 좋은 예증이었습니다.

경제이론은 돌고 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때 완전한 오류로 판명되거나 폐기처분에 가까운 취급을 받던 게, 세월이 흘러 여건이 변화하고 난 후 그 의의가 재조명되는 게 꼭 나옵니다. 음산한 맬서스가 냉소적으로 인구 위기에 대해 말을 꺼냈을 당시에, 생산에 큰 기여도 못 하면서 사회 불안 요소로만 작용(그의 관점에서)하는 하층 계급 노동 인구의 문제가 여튼 적지 않은(오늘날에는 상상이 잘 안 되지만) 동조를 부른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헌데 4차 산업혁명의 파고로 기존 노동력이 대부분 쓸모없는 취급을 받는 지금, 황당하게도 다시 맬서스 패러다임이 적용될 여지가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일각에서 신 맬서시안들이 대두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물론 이런 결론이 "역시 맬서스가 옳았던 거야!"같은 퇴행으로 이어져서는 곤란하고, 서평 앞에서 지적한 대로 "위기의 근원과 징후를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지옥의 도래를 막을 수 있음"을 다시 상기하려는 게 저자의 의도겠습니다.

저자는 세계 각국을 순회하며 "당신만의 탁견을 제시해 주시길" 요청 받는 전문가, 권위자 중 한 사람입니다. 이런 분의 관심사에서 리더십의 문제가 빠지면 또 곤란합니다. 2장의 토픽은 4장의 주제("정부의 개입")와도 밀접히 연관됩니다. 많은 경우 번잡하고 느린 민주적 의사 결정 방식보다는, 신속하고 과단성 있는 전체주의 유사의 기제가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믿음이 지지를 얻어 온 것도 사실입니다. 08년 이후 중국이 무섭게 치고나올 기미를 보이고, 당 수뇌부의 기민하면서도 정확하고 먼 미래를 내다보는 영리한 조치가 눈에 띄자, 세계의 부자들은 앞다투어 베팅 경향을 바꾸었습니다. AiiB 설립 때 절대 다수의 서유럽 국가들이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돈보따리를 싸들고 온 것처럼 이때 중국이 성공했으면 진즉에 세계의 패권과 리더십은 중국에 안겼을지도 모릅니다. 저자는 대단히 조심스럽게나마, 그런 기대가 매우 설익은 것이었음을 시사합니다. 대개 책에서 지나치게 단순한 결론을 과도한 어투에 담아 확언하면, 신빙성이 떨어지는 수가 많습니다. 저자는 대체로 시원시원하게 논지를 펴는 편이지만, 이런 대목에서는 전문가의 신중함으로 행간에 결론을 심는 현명함을 보입니다.

역사의 결과를 빤히 알고 과거를 반추하면 모든 게 당연합니다. 성공한 자는 저렇게 했기 때문에 성공했고, 망한 조직이나 국가를 보면 저러니까 망할 수밖에 없었다며 경솔한 결과론을 마구 디미는 게 우리들입니다. 허나 가장 권위 있는 경제학자들이 내놓은 예측 중에는, 머지않은 장래에 소비에트 경제의 규모가 미국의 그것을 추월하리라는 보고도 들어있었다는 게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이런 "연구"도, 발표 당시에는 많은 동의와 추종을 유발한 게 사실 아니었겠습니까. 물론 이런 극단적으로 실패한 (일각의) 연구와, 현재 수치적으로 기정사실화한 "중국의 미국 추월(명목 GDP 기준)"을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세상에 통계만큼 못 믿을 게 없음"을 다시 지적하며, 세계에서 가장 기업하기 좋은 나라 중상위권에 오른 러시아는 왜 이토록 자국 기업의 망명이 러시를 이루며 외국에서 진입하기를 꺼리는지 설명이 안 된다고 합니다. 자고 일어났더니 내가 애써 가꾼 주식 상당수가 푸틴 측근들로 명의자가 바뀌어 있더라..... 어떤 기업가도 소름끼쳐할 악몽이 태연히 현실화하는 환경에서도, 통계는 현실을 무시하고 꿋꿋이 상향합니다. 마오 시대에도 관료들이 작성해 보고하는 통계만 보면 중국은 아무 문제 없이 성장을 지속하는 건전한 국가였습니다. 故 덩샤오핑의 위대한 점은, "믿을 수 없는 쓰레기 통계를 모두 폐기하고, 보기 싫어도 현실을 반영하는 자료를 작성해 올리라"는 지시를 단호하게 내렸던 데에 있습니다. 저자의 관점으로는, 그런 놀라운 리더십을 보였던 덩조차도 절정의 장악력은 (우리 통념과는 달리) 그리 긴 시간 지속되지 못했으며, 나머지 시간은 측근들, 잠재적 라이벌들과 공유하는 형식이었다고 합니다. 저자가 인용하는 명언은 "영웅이란 대중에게 얼마나 지겨워지기 쉬운 존재인가"입니다.

그 나라의 지리적 위치(지정학 여건)가 그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건 오래 전부터 통념으로 여겨졌습니다만, 저자는 이 역시 상대적 개념에 불과하다고 지적합니다. 물론 한 나라의 경도와 위도는 대격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불변입니다만, 세계의 역학 관계와 무역의 판도는 수시로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때 거들떠보지도 않던 지역이 새로운 교역 허브로 부상하기도 하며, 영원한 요충지로 번영의 샘이 마를 날 없어 보였던 지점도 퇴락의 순간을 맞습니다(pp. 270~271의 지도를 보십시오). 이를 국가 단위로 확장해 보면, 한 나라에서 가장 번성하는 도시와 바로 차순위 도시 간의 인구 격차가 3:1이 넘으면 위기, 부실, 불건전의 징후라는 게 저자의 "공식"입니다. 누구라도 흥미롭게 반응할 만한, 거의 미신에 가깝게 들리는 놀라운 단순화인데, 이 기준에 의하면 한국의 경우 부산과 서울이 1:3을 넘지 않으며, 서울이 최근 감소 추세임을 생각하면 이 경향이 추세적으로 유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인위적, 행정편의적 경계선이 문제가 아니라, 범 수도권 전역을 생각하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만) 여튼 현상적으로는 결과가 척척 맞아떨어지기도 하니 흥미로운 건 틀림없습니다.

"서비스업은 제조업을 대체할 수 없다." 많은 기업이나 자산가들은 윟험 부담이 크고 사회적 저항이나 마찰을 직접 맞닥뜨려야 하는 제조업에서 점차 손을 떼고,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금융업에 진출하려 듭니다. 그저 선진 금융 서비스의 원활한 제공만으로 국가 전체가 먹고 살 수 있겠다는 근거 없는 낙관에 빠져든 이들도 많았습니다. 각국의 거시 경제는 그러나 그런 손쉬운 환상을 쉬이 만족시켜 주지 않고, 제조업 기반이 부실한 환경에는 더딘 성장과 자주 반복되는 위기, 침체와 공황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했습니다. 인도는 언제나 중국을 잠재 적국으로 여겼으며, 경제적으로도 반드시 추월, 극복해야 할 목표로 삼는 중이지만, 요란하게 조형된 그들 고유의 힌두이즘 신상과 부적들마저도 "메이드 인 차이나"가 압도적 점유율을 보인다는 사실 앞에 할 말을 잃게 만듭니다. 21세기에 브릭스라며 신 성장 동력들로 꼽혔던 나라 중 그나마 현재까지 투자자의 기대를 유지하는 건 인도뿐(중국은 레벨이 달라졌으니 논외)이라는 게, 미디어와 평론가들의 호들갑이 얼마나 쉽게 꺼지기 쉬운 거품인지 다시 증명합니다.

세계 경제위기 이후 많은 개인, 기업, 정부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부실을 정리하고 재도약의 발판을 어렵사리 마련 중입니다. 헌데 이런 패턴은 08년 이전에도 이미 반복되던 것입니다. 한번 세찬 폭풍이 몰아닥쳐야 부실한 겉치레가 떨어져나가고 고갱이만 남기 마련인데, 저자는 훨씬 전에 벌어졌던 좋은 교훈을,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횡행했던 1970년대 말의 대처 과정에서 찾습니다. 당시 폴 볼커는 대중의 반응은 아랑곳않고 금리를 충격적으로 인상해서 스태그플레이션의 악순환 고리를 끊은 것으로 평가 받는데, 저자는 이 책 곳곳에서 "인플레이션이야말로 성과의 과실과 경제 전체를 좀먹는 암"임을 지적합니다. 저자가 당대의 논객들과 맞장 뜨며 타당성을 설파한 실제 경험담도 독자의 흥미를 자아내는데, 한국의 고도 성장이 과연 고도의 인플레이션을 감수하고 이뤄진 것인지 여부를 놓고 대단히 핫한 논쟁이 벌어졌던 "실황 중계"라서 특히 우리 한국 독자들의 눈길을 끕니다. 경제위기 당시 중국은 통화 전쟁의 일환으로 대거 발권력을 행사했는데, 지금의 궁색한 성장 둔화는 그때의 대가를 치르는 중이라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08년은 확실히 많은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만, 누가 세월이 부과한 시련을 이겨내고 최후의 승자로 떠오를지는 (책에 실린 흥미진진한 명시적, 암묵적 예언들과 함께) 더 지켜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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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 - 약사.대학생.직업 전문가가 들려주는 약사의 모든 것 꿈결 잡 시리즈
고기현 외 지음 / 꿈결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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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가운을 입고 상냥한 미소로 동네 주민들을 맞아주며 가벼운 질환 외에도 인생사나 공동체 속의 고충 상담도 도와 주던 약사(꼭 여성분에 해당하는 건 아닙니다. 남자분도 이런 타입이 있었어요)는 어린이들에게 충분히 선망의 대상이 될 만한 직업입니다. 모든 직업이 마찬가지이지만,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나와 적성이 맞는 게 있고 그렇지 않은 일이 따로 있습니다. 살벌한 수능 점수가 문제가 아니라, 내 성격 내 천품과 맞지를 않으면 평안 감사를 줘도 수행하기 어려운 거죠. 사회에 나와 보면 공부머리와 일머리가 다르다는 점 새삼 실감한다는데, 약사 같은 경우는 공부머리라고 해도 방향성이 좀 다릅니다.



이 책에 인터뷰가 실린 어떤 분은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 학교 공부도 힘들었지만 자격을 취득하고 사회에 나와 보니, 그저 시키는 바만 열심히 하면 되는 학교와는 달리 사회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자신이 판단해야 하는 점이 훨씬 힘들었다...." 사실 이 말은 약사뿐 아니라 모든 직업, 직종에 해당 안 되는 바가 없습니다. 약학 공부란 스토리가 없고, 어찌보면 건조하고 따분한 화학 지식 체계를, 토굴 속에서 마늘과 쑥만 먹으며 참고 인간 되기를 기대하는 곰처럼 묵묵히 해 나가야 하는 고충이 분명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 인터뷰가 실린 다른 어떤 분은, "... 스토리가 없기에 스토리를 억지로 만들어 나가며 힘든 공부를 했다"고 고백도 하시더군요. 요즘 같이 즐길 게 많은 시대에, 한창 때 좋은 청춘을 즐기기도 해야 하는 대학생들이 이런 힘든 공부를 이어나가기란 그리 쉬운 결단만은 아닙니다. 선배들의 진솔한 고백이 잔뜩 실린 이 책을 읽고, 사회에 나온 후의 진로도 진로이지만 우선 공부 자체가 나와 과연 맞는지 꼼꼼히, 심각하게 검토하고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꿈결JOB 시리즈 "약사"편은 처음에 펼쳐 들고 좀 놀랐습니다. 앞선 시리즈는 두께가 두툼했는데 이 책은 좀 얇은 편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역시 꿈결 기획답게, 버릴 내용이 하나도 없고 뻔한 상식성 정보가 중복되질 않아서, 다 읽고 나니 뒷목이 다 뻐근할 정도였습니다. 꿈결JOB은 정확성도 정확성이지만 솔직한 정보를 담아서 좋다는 게 제 느낌인데, 현재 약대가 6년제이고 입학도 어렵지만 졸업한다고 해서 반드시 안정적인 진로가 보장된다는 법도 없습니다(사실 이는 40년 전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동네 한 골목에도 웬만해선 약국이 20군데가 넘어서 경쟁이 치열했죠. 초기 투자금도 많이 소요되고...).

그래서 이 책 중 인터뷰하신 약사님들을 보면(이미 약사 자체가 확고한 전문직인데도) 투잡하시는 분들이 그렇게 많더군요. 물론 투잡도 시시한 생계형 투잡이 아니라, 다른 "전문직"을 골라 두 분야에서(다른 사람 한 분야에서도 제 밥값 못하는 일이 잦은데) 맹활약하시는 분들입니다. 아무래도 약대에 들어갈 정도면 머리가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고난도 자격증을 취득하는 데에도 그리 큰 추가 노력이 필요하지 않고, 또 약대를 가긴 했어도 적성이 다른 쪽에 더 컸음(물론 약사 적성도 뛰어나지만)을 발견하곤 일 욕심과 자아실현 욕구를 발휘활 수도 있는 거죠.



백진희 선생님은 병원 약사입니다. 어린 독자들은 병원에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만 계시지 약사분이 다 있나 하고 어리둥절해할 수도 있는데, 이 글을 읽어 보면 약사의 진로가 얼마나 다채로운지, 그리고 숨겨진 고충과 보람이 얼마나 큰지도 짐작이 가능할 겁니다. 제가 재미있게 읽은 건 공병의 잔여물 제거 작업을 백 선생님이 하고 계셨는데, 친정 아버님이 반찬을 주려 오셨다가 그 모습을 보고 밤에 한숨도 못 주무셨다는 겁니다.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러 허드렛일 담당으로 좌천되기라도 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죠. 생각해 보십시오. 그 공부 잘하고 영민한 따님을 금이야옥이야 양육하여 힘들게 이대까지 진학시키시고 버젓한 병원에 일자리를 맡게 하여 한시름 놓았더니, 따님이 그런 힘든 일을 하시는 걸 보고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셨겠습니까.

이는 물론 다분히 오해에서 비롯한 해프닝이지만, 토, 일에도 당직 근무를 서신다거나 (무려 17년 전 일이지만) Y2K 버그를 대비해서 세밑 신년에도 철야 근무를 선다거나 하는 게, 어디 예사 사명감으로 감당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백 선생님은 "...이미  PEET 시험도 치르고(백 선생님께서는 그 세대가 아니시겠죠), 각오와 다짐이 단단히 섰을 텐데도 조금 힘들다고 사직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며 젊은 세대의 다소 안이한 마인드셋을 지적하십니다. 어떤 약사의 부모는 백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애를 얼마나 혹사시켰으면 몸살까지 났겠냐"며 항의도 했다는데, 준비 덜 된 후배 약사 업무 지도까지 맡아 고충이 심했던 백 선생님으로서는 참 기가 막힐 일이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하지만 백 선생님께서도 어느 분의 귀한 따님이시고, 약사까지로 키워 놓으셨다면 그 부모 되는 분들의 자녀 아끼는 마음이 어떨지야 백 선생님 본인이 너무도 잘 아시겠으므로 그저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이니스트 바이오제약에 근무하시는 고기현 선생님은 이 회사의 마케팅 총책이십니다. 물론 마케팅 총괄역과 일반 현장의 영업사원은 대우나 고충 면에서 당연 천지차이지만, 저는 처음에 으레 약사 하면 그 약국에 영업 뛰러 오는 영업사원과 솔리시터- 클라이언트 관계이니 당연히 서로 반대 입장이라고만 여겨졌지, 약사가 영업 분야에서 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었습니다. 허나 고기현 선생님의 사연을 들어 보니, 오히려 이 일 역시 약사 아니면 맡을 수가 없는 직분이더군요.

앞서 백 선생님도 "...이런 단계에서부터 쉽게 좌절하고 피로를 느끼면 앞으로 더 힘든 일은 사회에서 어떻게 맡겠는지" 개탄하시는 대목이 있었는데, 고 선생님은 "회사라는 거대 조직에서 필수로 익혀야 할 대인 응대 요령, 입체적 관계의 통찰, 정치와 인사 고과의 미묘한 이치" 등을 잘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자기 발전에 엄청 유리했다고 말씀하십니다. 항상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게 나이로 정하는 연공서열식 권력 관계인데, 고 선생님의 경우 자신보다 나이 어린 상사 밑에서 일해야 하는 고충이 그래도 많이 덜어지는 편이었다는군요. 약사라는 전문직의 휘광이 있기 때문이죠. 기자가 "특종"이 일생의 사명이듯, 제약회사 직원은 "신약 개발(사실 이쪽이 훨씬 어렵습니다만...)" 하나를 바라보며 고된 일과를 버팁니다. 1조원의 매출이라.... 그 직원분이 회사에서 얼마나 큰 자긍심과 성취감을 누렸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사라지고 말 직업들이 요즘 여럿 거론됩니다. 제 생각에는 창의력도 없고 꼼꼼히 알고리즘을 분석할 능력도 없는 월급 루팡 삼류 좀비 프로그래머들이 제일순위로 사라지지 않을까 싶은데, 이범진 선생님은 아주대학교 약대 학장이십니다^^ 선생님은 서울대 약대를 나오고 그간 교육 분야에 긴 세월을 재직, 헌신하다 현재 산업계의 현실이 가장 거센 풍랑을 맞는 작금 거대 교육기관의 최고위 관리직에 오르신 셈인데요. 학장님께서는 "오히려 4차 산업혁명을 맞아 기계가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약리의 탐구, 미래에의 통찰, 인간에의 헌신" 등 덕목이 요구되는 게 약사의 본분이며, 이런 약사를 양성하고 사회에 배출하는 기능에 대한 무한한 자신감과 자부심을 피력하십니다.

그 근거에 대해서는 종전 교육과정과 달리 보다 사회의 수요에 즉각적으로 부응하고 나아가 잠재적 기대에 선제적으로 부응하는 진취적 약사상을 해당 기관이 수립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학장님은 "지금까지는 그저 기술적 지식만 주입할 뿐, 사회적으로는 준비가 덜 된 약사들을 내보내는 경우가 많았다"는 자성 결들인 멘트를 하시며, 졸업 후에도 최신 지식에 역동적으로 업데이트가 가능한 "자기계발형 약사"를 이상적인 학생상으로 삼는다고 밝히십니다. 둘째 사회적 책임감과 봉사 정신에 철두철미한, 인성과 참여의식으로 무장된 약사를 배출하여 지역 공동체와의 유기적 합일을 이루는 열정적 인력상의 수립에도 진력하신다고 말씀하시는군요. 어느 회사, 혹은 공공기관에서도 상사와 동료들과 잘 융합하며, 그저 자영업자형으로만 인식되기 쉬운 약사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슈퍼 인재 = 곧 약사"라는 역동적 이미지를 국민에게 함양하는 게 목표라고 밝히십니다.

본래 공대 엔지니어들이 즐겨 품는 꿈이 변리사직입니다. 변리사는 자격시험만 통과하면 부여되는 직함이지만 경쟁률도 높고 시험도 어려운 걸로 알려졌습니다. 약사와 변리사를 선뜻 연결 못 시키는 통념도 있는데 공학 분야보다는 커버해야 할 범위가 좁을지 몰라도 약학계 역시 특허 관련 분쟁의 수위, 강도가 장난 아닌 영역입니다. 박종혁 선생님은 약학박사이실 뿐 아니라 변리사 자격까지 취득하신 전문직 중의 전문직으로, 현재 본인 명의의 법률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제 유관 단체의 제반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시는 등 가히 글로벌 엑스퍼트라 불릴 만한 화려한 커리어를 꾸려가는 분입니다.

박 선생님의 경우 약사로서의 정체감도 정체감이지만 법률 전문가로서 누리는 뿌듯한 성취감이 더 크신 듯, 이 책의 회고문 곳곳에는 그런 심회의 피력이 두드러지더군요. 혹시 말입니다, 학생 자신의 꿈은 좀 다른 쪽인데 집안에서는 (부모님의 직업이 약사라든가 해서) 약대 진학을 강권하는 분이라면(아니면 정반대로, 본인은 약사가 꿈인데 집안에서 다른 전문직을 권한다든가), 이 박종혁 선생님의 진로를 롤 모델로 삼을 수도 있을 겁니다. 약사라고 해서 흰 가운만 입고 동네 주민들 상대로 반복적인 일만 꼭 하라는 법이 아님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어느 정의로운 도서관 사서"의 이야기도 꼭 한번 읽어 보셨으면 합니다. 박 선생님이 특별한 존경심으로 기억하는 분 이야기라서 말이죠.



적성은 능력과도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능력이 빼어나도 그 일이 너무 싫으면 직역을 배겨낼 수가 없습니다. 이 책에 실린 많은 약사분들의 진정 담긴 사연을 들으면, 능력도 다들 빼어나시지만 적성부터가 남다르게 해당 직분에 잘 맞았다는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책 말미에는 꿈결 기획에 언제나 핵심 역할로 참여, 주도하시는 직업 전문가 고정민 선생님의 유익한(객관적 제3자로서의) 조언이 실렸습니다. 자신의 진로가 혹시 약사쪽이었으면 하는(아직 확신이 없을 나이들이죠) 학생들은 이 책을 읽고 꼭 치열한(아직은 행복한) 고민을 해 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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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혁명 2030 - 주거의 의미가 변화되고 확장되는 미래 혁명 2030 시리즈 2
박영숙.숀 함슨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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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뿐 아니라 사회 전분야에 전례도 없고 돌이킬 수 없는 "혁명"이 몰아닥치는 지금입니다. 소유보다 사용 중심의 패턴이 자리한다, 비혼자나 1인 가구가 증가한다, 무조건 큰 평수를 선호하기보다 여러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여 변화와 이동성을 추구한다, ... 주거 패턴에 대한 이런 변화의 전망은 새삼스럽지도 않고 벌써 6, 7년 전부터 여러 전문가들이 발표, 개진해 온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이상"을 담고 있습니다. 즉, 주거 패턴이 단순히 과거의 A에서 현재의 B, 미래의 C로 바뀐다는 표피적인 현상의 진단이 아니라, 사회 계층 구조, 사람들의 의식상 근본 변화, (어디에나 빠지지 않는) 4차 산업혁명의 큰 파고와 맥락 속에서 입체적으로 관측한, 혹은 예측한, "살아가는 모습이 진화하는 인간 사회"에 대한 총체적 논증입니다. 물론 주제가 주제이만치 별의별 희한한 주거상의 신 트렌드, 패턴에 대한 자세한 소개도 있습니다. 그러나 심층의 모멘텀에 의해 움직이는 "맥락"의 분석과 연동된 소개가 아니라면, 다양한 실례의 나열이 그저 잡담이나 공상에 그칠 위험도 있습니다.

이 책은 첫째 과연 우리 주변에서도 감지되는 두드러진 변화가 그저 변덕이나 국지적 예외가 아니라 트렌드 시프트의 시그널이었구나 하는 확인, 둘째 그럼 장단기 주거계획이든 재테크든 가까운 장래에는 사람 사는 모습이 이렇겠구나 하는 구체적 대비, 셋째 (이 책의 진짜 가치는 여기에 있다고 보지만요) 주거 패턴의 변화를 통해 역으로 짚어내는 "인류의 미래가 움직여가는 방향"입니다. 이 미래는 그저 기계적, 기술적 진보에 한정한 게 아니라, 하고많은 가능성 중에 하필 그 길(들)을 택한 사람들의 심층 심리까지 되짚어내어 담은 인문적 자화상에 가깝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책은 그저 "이렇게이렇게 될 것이다" 같은 점쟁이의 요설이 아니라, 인문적 영감까지 독자에게 제공하는 점이 큰 매력이었습니다.

1장은 한국과 세계의 주거상 변화를 공시적으로 정리합니다. 벌써 오래 전부터 지적되었듯 수도 서울의 인구는 공식적으로 감소하는 반면, 그 인근 "수도권"으로 몰려드는(밀려나는) 비중은 커지는 추세입니다. 흥미로운 건 2년 전 런던 주택임대료 폭등 사태가 세계적으로 큰 뉴스가 된 데서도 알 수 있듯, 도심의 렌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게 우리만의 현상이 아니라는 거죠. 이에는 초고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인력과 그렇지 못한 경제인구 사이의 격차가 갈수록 커진다는 이유가 작용합니다. 요즘의 추세는, 부모로부터 부를 물려받은 층의 소비, 경제 참여 패턴이 중요한 게(=주거난을 심화시키는 게)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4차 산업혁명을 맞아 또래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 새로운 고소득자 집단이 등장하여, 이들이 자신의 발밑에 있는 계층과의 주거지 선점 경쟁에서 호가를 높이 부르기 때문이죠. 반면 오랜 경제학상의 진리처럼, 토지는 공급이 제한되어 있어 생산자(제공자) 간의 경쟁이 벌어질 수가 없습니다. 수급의 사정이 이러하니 결과도 자명할 밖에요.

한편으로 탈 도심의 동인 중 하나는 대기오염 등 보건상의 불리한 여건도 한몫은 합니다. 이는 앞서 지적한 바와는 반대의 방향성으로, 부유층의 선도적 선택을 거쳐 향후 쾌적한 환경의 교외(한국과 중국의 사정을 동시에 예거합니다)로 대거 러시가 이뤄지리라는 전망입니다. 사실 이 두 현상은 모순이라기보다는 다른 국면 다른 동기에서 별개의 경로로 벌어진다고 봐야 하는데(혹은, 전자가 일시적 과거에 대한 설명이라면, 후자는 미래의 대세에 대한 언급이죠), 저자들은 조직의 업무 여건 개선, 초고속망의 진화, 이동성의 제고 등의 힘을 입어 점차 재택 근무가 늘어나고, "홈"과 "오피스"가 구별이 점차 어려워지리라는 추세("오피스 셰드", p37) 등을 들어 이런 예측에 방점을 진하게 찍습니다.

pp. 188~191에 보면 주택 양극화 현상이란 결국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8단계의 "주거 진화" 설명이 더 흥미롭습니다. 현재는 관리형 스마트홈에서 예측형 스마트홈으로 넘어가는 단계이지만, 앞으로는 자립형 주거나 하우스모핑(마치 살아 있는 듯 에너지 생산, 형태 변형. 하수 처리, 농경 등이 알아서 수행되는 패턴), 나아가 거주자와 일체가 되어 자아실현을 이상으로 삼는 구조까지 등장하리라는 전망입니다.

실제로 3년 전 홍콩에서 일어난 우산 혁명은 직접적으로는 대륙식 독재에 대한 저항이었지만, 직접적으로는 주거비 폭등 때문에 촉발되기도 했기 때문이죠. 책에도 나오듯 지금은 오히려 거품이 급격히 꺼져 그것대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부동산 가격 상승 현상은 이제 미래에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신기한 과거의 유물처럼 후손들에게 간주되리라는 게 저자들의 압도적인, 확신에 가득찬 진단입니다. 백 번 천 번 맞는 말씀이긴 하나, 그 "미래"가 현실로 닥치기 전까지는 우리는 과거가 남긴 룰의 잔재, 예외든 원칙이든 여전히 강력한 힘을 미치는 국지적 요동과 마주하고 살아야 합니다. 여전히 부동산 투자로 재미 봤다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나오는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p117에서는 특이하게도 "네트워크 시대에 특히 강조되는 생존 본능인 제7의 감각"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제가 몇 달 전에 따로 이 주제만 다룬 책을 읽고 독후감도 남겼지만, 저자들은 조슈어 라모의 저서를 인용하며 "복잡하지만 사실은 복잡하지 않고 제어가 가능한 것"과, "복잡하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은 제어가 불가능한 것" 사이의 차이를 짚습니다. 이는 흥미롭게도 근 30년 전에 발표된 마이클 크라이튼의 스릴러 소설 <쥬라기 공원>에도 제법 큰 비중으로 소개되는 화제입니다.

개체를 둘러싼 환경이 여러 요인의 새로운 개입으로 복잡성이 증가되면, 개체 중에서도 영리한 몇 녀석은 새로운 본능을 발달시켜 생존과 (궁극적으로는) 진화에 성공합니다.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분들도 있겠지만, 컨설턴트 라모는 "트럼프 같은 이는 자신보다 훨씬 압도적인 경력과 지원 세력을 거느린 부시 가문, 클린턴 가문의 거물 둘을 예선과 본선에서 차례로 꺾었는데(생각해 보니 그렇더군요?), 이는 그가 탁월한 생존 본능을 갖고 네트워크의 발달이 근본적으로 바꿔 놓은 룰을 정확히 파악하여, 불필요한 액션은 피하고 철저히 계산적으로 승부 결정에 필요한 수만 영리하게 두어 결국 승자가 되었음을 증명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사실 작년 대선이 끝난 직후 힐러리 클린턴도 자인하다시피한 사항입니다. 그들은 필요 없는 유세는 너무 많이 했고, 믿음직하지 못한 정보와 조짐에는 너무 안도하는 경향을 보여 결국 패착을 두었습니다.

이 책이 이런 토픽을 책 중에서 꺼내든 이유는, 주거 패턴의 향방을 가늠할 때 종전처럼 한두 가지 요인만 대입시켜 단선적 예측을 하는 게 아무 의미없는 상황이라는 인식 때문입니다. 이 책은 (서평 앞에서도 지적했듯) 그저 주거 현상에 국한된 논의만 전개하는 게 아니라, 현대 사회가 홍역처럼 치르는 여러 근본 변혁상을 두루 조망하되, 그 요인들이 "주거"에 끼칠 영향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두어 흥미로운 논의를 들려 줍니다. 몇 장 뒤로 넘어가면 에릭슨 연구소가 최근에 발표한 연구 결과를 인용하며 "5년 안에 AI가 스마트폰을 대체할 것"을 예측합니다. 이 역시 잘 생각해 보면 AI 만능론의 연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고작) 스마트폰 정도와 일상의 도구로서 경쟁을 벌여야 하는 한계점을 오히려 지적하는 취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책에도 나오는 것처럼) 스마트폰(이나 그 유사 단말기)는 (비록 요즘 분할 화면을 일부 지원한다고는 하나) 아직도 멀티 태스킹이 어렵고, 배터리 용량에 여전히 한계가 있으며, 작은 화면 때문에 유저를 답답하게 합니다. 반면 내 주변의 공간에 다양한 입체 좌표를 점하며 널려 있는 여러 (가상 아닌 실체를 지닌) 도구들은, 그것들의 재배열만으로도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곤 하죠.

아마도 이 책에서 (여전히) 독자들의 주목을 끌만한 화제는 콘투어 크래프팅일 것입니다(p93이하를 참조하십시오). 일본이나 미국 서부 해안처럼 지진이 잦은 지역에선 주택의 설계, 유지, 보수가 큰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와르르 무너져도 마치 레고 블럭 쌓아올리듯 간편하게 뚝딱 새 집을 지을 수 있다면 얼마나 이런 지역에서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한번 짓고 그 안에서 평생을 산다는 개념은, 이미 전통적 가족의 개념이 해체되고 이동성과 융통성을 강조하는 세태 속에 빛이 바랜지 오래입니다.

패션도 이미 자라 등의 업체가 리딩했던 트렌드대로, 짧은 시간 동안 걸치고 버리는(dispose) 컨셉이 젊은 층을 상대로 무시 못할 대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집이라고 해서 다른 이치가 적용되라는 법이 없습니다. 빨리 마르는 시멘트, 3D 프린터로 융통성 있게 취향대로 설계하고 기존 구조에 손쉽게 편입할 수도 있는 이런 기법(이 대목 말고도 p262 등도 참조하십시오)은, 이미 중국에서도 실용화, 상용화의 단계에 성큼 다가섰다고 합니다. 지진으로 무너졌으나 하루 만에 다시 입맛대로 지을 수 있는 집,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마치, 망가진 윈도우에 잠시 절망했으나 포맷 후 곧 운영체제 재설치하고 빨라진 컴을 즐기는 상황과도 비슷하죠.

앞에서 스마트 하우스에 대해 잠시 언급했는데, p202에는 더 구체적인 기술상이 소개됩니다. 빗물을 모아 정수하고 적절히 보관하여 바로 생수로 음용하게 처리하는 기술은, 특히 가뭄이 심하거나 상하수도 시설이 빈약한 시골(사람이 안 사는 이유는 이런 인프라가 빈약해서 불편한 이유가 크죠)에서 여건을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겁니다. 쓰레기나 하수 처리 역시 나노 기술의 혜택을 입어, 전혀 자연에 오염을 끼치지 않고 개별 가구 레벨에서 말끔히 해결합니다. 클레이트로닉스, 아포스트로피(p214 등)라든가 여타의 몰핑 기법 적용을 통해, 외관이나 내부 설계 자체가 필요와 시도에 따라 자유롭게 변형 가능하며, 집의 모든 표면이 홀로그램 발전을 통해 일종의 "터치 스크린"으로 바뀌어 주거자와 소통하며 업무를 돕습니다. 나노 기술의 다른 적용 양상은 pp. 231~232에도 다시 언급됩니다. 환경 보전 컨셉(재생 에너지 사용 등)이 반드시 삽입되는 것도 이들의 필수적인 특징입니다.

앞에서 탈도심이 하나의 대세가 되리라는 전망이 책에 나온다고 했으나, 이와는 별개 목적으로 난도 높은 과업의 성취, 국력과 위신의 과시, 일자리 증진, 권력 이동 등의 이유에서 "매가 시티, 메가 프로젝트"의 추진이 현재 여러 국가에서 현저하기도 합니다. 이런 프로젝트 속에서는 오히려 산만해졌던 인구 분포가 개발 도심에 집중되기도 하는데, 이 역시 모순이라거나 혼란을 느낄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책에서 지적한 대로, 세상이 복잡해지니 그에 대응하는 생존 방식도 복잡해지는 겁니다. 제가 몇 주 전에 리뷰한 SA 시리즈 <미래의 도시>에서도 언급이 있었듯, 오히려 도시의 생존 조건을 첨단 기술을 통해 개선하는 게 유력한 미래 비전 중 하나이기도 하죠. 책에서는 두바이와 한국의 송도 국제지구 건설을 그 좋은 예로 듭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첨언하자면, 이런 프로젝트 추진 때문에 특정 지구는 부동산 가격 폭등의 주기적 출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겁니다. 대세는 대세고, 국지적으로는 전혀 다른 돌발사태가 벌어질 수 있음은 엄연한 역사상의 진리이죠.

왜 지표면의 70%가 해양인데도 인류는 이를 활용할 생각을 못 하는가? 우주보다는 바다가 더 수월한 개척대상이 아닌가? 아직은 많은 한계가 있지만 인공섬(이 아이디어 자체는 24, 5년 전부터 한국에서도 나왔습니다)도 대안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 몰디브는 수년 후, 그 외 방글라데시 여러 연안 거주지, 농경지도 해수면 상승을 못 견디고 수몰되리라는 게 전문가들의 거의 일치된 예측입니다. 탄소 연료 사용 절감은 별개 이슈로 삼더라도, 자립형 해양 주거지를 바다에 띄워 이 문제의 일부 해결을 보자는 제안은 꽤 매력적입니다. 그저 바다를 표류하는 바지(barge)선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공학자와 전문가들은 오늘도 기발한 착상을 번갈아 떠올리며 실용화에 주력합니다.

저자들은 "의, 식의 문제처럼, 곧 '주(住)'의 문제도 편의와 취향 차원에서 간단한, 실용적인 처방을 갖게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근본적인 발상을 바꾸면 의외로 결정적인 해답이 나오는 걸 우리는 자주 경험합니다. 단 인간은 관성과 집착의 동물이라, 쉬이 자신의 신조와 스키마를 몰핑 못 한다는 게 약점이죠. 결과로 도출된 방법은 간단할 지 모르지만, 그 방법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기술, 사회학, 심리, 역사, 정치(지정학), 인류학, 인문 등에 대한 광범위한 모색이 바탕이 되어야 유효한 해법이 간신히 나올 수 있다는 점, 저자들의 치열한 고민이 물씬 배어나는 이 책을 통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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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가지 비즈니스 모델 이야기 - 성공하는 스타트업을 위한, 2018 에디션
남대일 외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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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아이템보다는 컨셉이 중요하고, 기막힌 효용보다 더 어필하는 건 성공적인 포지셔닝이며, 사업가 개인의 수완보다는 무슨 비즈니스 모델로 승부하느냐가 더 큰 성공의 관건입니다. 머리도 잘 돌아가고 인간적 매력도 있고 해당 분야에 대한 기술적 지식도 빠삭할 뿐 아니라 의지도 충만한데, 왜 결과가 신통찮은가? 바로, 신통찮은 분야에 몸담고 아까운 자원과 정력을 낭비했기 때문이죠. 요즘같이 변화무쌍한 세상에 과거의 논리와 한물간 전성기의 가락만 붙든다면 적응이 잘 될 리가 만무합니다.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해도 그걸로 판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설령 좀 무능해도 "되는 판"에 몸만 영리하게 담을 줄 안다면 그런 사업가가 끝에 가서 전세를 엎고 승자로 남는 수가 많습니다.

스타트업이 결코 유망하지 못한 진로임을 잘 알면서도 많은 젊은이들은 이 험난한 경쟁의 트랙에 몸을 싣습니다. 자신의 창의력과 아이디어, 섬광처럼 찾아온 영감을 잘 가꾼 노력이 언젠가는 결실을 맺을 줄 알기 때문이죠. 헌데 꿈 자체는 나무랄 게 못 되지만, 소중한 씨앗을 어느 모판에다 심고 키우냐의 문제는 운수나 요행이 아닌 근본 판단력과 지혜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스타트업에게 중요한 건 원천 기술의 창의와 혁신성 못지 않게, "될성부를 모델을 찾아 올바로 몸을 담그는 단계"입니다.

저자들은 먼저 "비즈니스 모델"이 대체 왜 중요할 수밖에 없는지, 그 이론적, 연혁적 의의에 대해 설명합니다. 우리에게 "코즈 정리"로 너무도 유명한 로널드 코즈는 그의 거래비용 이론에서, "분명하게 확립된 재산권과 충분히 낮은 협상비용이 전제된다면"(출처: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437708&cid=58393&categoryId=58393) 오랜 시간 동안 경제학 자체의 이론적 허점, 혹은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 모순으로 꼽혔던 이른바 "외부 효과" 문제가 정부의 개입 없이도(정부가 개입하는 이유는 "시장의 실패" 때문입니다) 해결될 수 있다고 결론 내립니다. 그런데 이 말을 반대로 뒤집으면, 사회적 합의가 충분히 마련되지 않고, 유무형의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업가 개인이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듯 일을 벌이면, 외부 불경제가 너무도 크게 개입하기 때문에, 개인 차원에서는 극복 못 할 난관을 맞게 된다는 뜻도 되죠. 그래서 결론은, 이미 잘 짜여져 있거나, 암묵적으로 완성 단계 직전까지 간 모델에 개인들이 몸을 담아야, 일일이 개척적 수고를 할 필요 없이 본래의 목적을 향해 순항할 수 있다는 겁니다. 책 챕터 1에서 강조하는 포인트는 이것입니다.

저자들이 강조하는 건 "가치의 사슬"입니다. 세상의 산업에는 다양한 국면에서 생산되늰 부가가치가 존재합니다. 애덤 스미스의 고전에서 너무도 유명하게 인용되는 "분업의 이득"이란 꽤 확장성이 넓은데요. 챕터 2에서 저자들은 카네기의 철강회사를 예로 들며 철강 생산을 위한 온갖 단계의 부가 생산 공정을 "수직 계열화"함에 따라 생산 원가를 88%나 절감한 놀라운(잘 알려진) 이치를 강조합니다. 그런데 분업과 계열화의 효율은 반드시 수직방향으로만 이뤄져야 하는 건 아니며, 때로는 수평 방향으로도 얼마든지 구축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책에서 드는 예는 1회용 패션으로 시대의 새 트렌드를 띄운 의류업체 "자라"입니다. 노무 비용 상승이나 기타 업종 고유의 특성에 의해 수평 방향으로만 효율이 달성되는 분야도 분명 존재하며, 이 책에서 소개하는 기프가프의 경우 "대리점도 고객센터도 없이(p27)" 온라인상으로만 존재하며 유심 제조에만 전력하여 혁혁한 성과를 올리는 좋은 모범이라고 합니다.

"디자이너들은 본래 고용이 되어서는 안 되는 창의적 존재들이다." 이른바 개방형 네트워크 플랫폼의 대표 주자로 알려진 알레시의 창업자의 지론이라고 합니다. 사실 디자이너란 산업의 현실에선 스카웃의 대상도 되고 이직도 잦은 엄연한 고용인 신분인데, 예컨대 제 기억으로는 현기차의 경우 "그분"의 영입으로 특히 해외 소비자들에게 전폭적 지지를 얻어 오늘날과 같은 도약의 국면을 맞기도 했었지요(이제는 꽤 지난 과거가 어느덧 되어버렸습니다만).

이렇게 하면 첫째 디자이너들도 개별 기업의 컨셉과 브랜드 개성에 함몰되지 않고 자기 스타일을 유지할 동기가 생기며, 기업들 역시 법정 고용 유지에 드는 각종 부담을 덜 수 있습니다. 이게 "무책임"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첫째 디자이너에게 자신들이 심미적 가치를 증진시킨다는 자부심과 목적의식을 심어 주는 게 중요하고, 다음으로는 알레시가 모범을 보여 주었듯 신진 기예를 발굴, 육성하여 알레시와만의 연계 의식을 함양하는 게 필요합니다. 한때 일본 엔지니어들이 소속사에 제기하여 큰 문제가 된 이른바 지적재산권 이슈에서도, 알레시는 상생의 정신으로 디자이너들에게 큰 폭의 권리를 계약으로 인정해 준다는군요.

비슷한 패러다임으로 시장을 대하는 게 로컬모터스입니다. 이 회사는 공개, 공유, 협력이라는 가치를 표방하며 철저히 고객이 원하는 맞춤형 자동차를 생산하는 게 사업 모델입니다. 한번 원형을 제안해 두면,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귀한 의견을 개진하고, "잠재적" 소비자들도 그 제작에 실질적 기여가 될 다양한 형태의 "참여"를 시도합니다. 이런 열린 프로세스에서 홍보와 제조가 동시에 이뤄짐은 물론이거니와, 탄생 과정을 일일이 지켜본 대중과 미디어 모두 신상의 쇼케이스까지를 응원하는 팬으로 끌어들이는 셈이니 기계적, 타산적인 재래식 마케팅에 의존할 필요가 없죠.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해도 효과 없지만 안 하면 괜히 찜찜하기만 한 게 광고라고요. 외부 엔지이너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바로 위의 알레시 사례와 매우 닮았습니다.

거래유형별 플랫폼으로 저자들은 세 가지를 듭니다. 첫째는 집합형인데 플랫폼 운영자가 실제로 판매할 제품, 서비스를 모두 보유한 구조를 가리킵니다. 제 생각으로는 종전 방식의 분류로, 자신이 직접 ware를 가지고 상대와 거래하는 "중계 무역"이라든가, 혹은 broker와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dealer 같은 게 있습니다. 브로커는 그저 상대를 연결시키는 역할만 하지만(쉽게 말해 공매도 같은 것), 딜러는 자신이 보유한 물품을 팔고 사기도 하는 책임지는 거래자죠.

이런 것과, 제품형, 다면형 플랫폼은 구분됩니다. 먼저 제품형 플랫폼으로는 책에서 플레이스테이션을 듭니다. 이 제품 하나에 얽힌 여러 산업과 제조 섹터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며, 그러면서도 고객을 직접 상대하는 일은 전문 업자가 따로 맡는다는 소립니다. 다면형으로는 책에서 페이스북을 예로 드는데, 요즘 우리가 TV광고에서 자주 보는, 구글 플레이에서 성공적으로 게임 개발자로 데뷔시킨 여러 프로그래머들이 구글 플레이 스토어를 바라보는 시각, 혹은 객관적, 실물적 관계가 바로 다면 플랫폼의 전형이겠습니다. 엄밀히 말해, 요즘 우리가 플랫폼 하면 대뜸 떠올리는 건 이 후자 두 경우뿐이겠습니다.

번화가를 걸을 때 최신 유행곡이나 캐럴이 울려퍼지면 보행자도 덩달아 신이 납니다. 이런 건 곡의 홍보도 될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사용료를 charging 할 방법도 없어 그간 찜찜하나마 법과 계약의 사각지대에 방치되었지요. 원트리즈 뮤직은 저작권자들의 이익 환수 대행 노릇도 할 뿐 아니라, 대형 매장에서 언제나 부담스러워할 만한 "우발적이고 갑작스러운 청구"에 합법적으로 대응할(=제값을 내고 쓰게 돕는) 창구, 경로를 마련해 줍니다.

여기에 그치면 기존 저작권 협의체와 다를 바 없는데(이런 협의체도, 앞에서 말한 대로 무형의 사회적 인프라이며 외부 불경제 효과를 해소하는 요긴한 에이전시입니다), 원트리즈는 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사실 매장에서 트는 음악은 이를 찾는 소비자가 그 매장(꼭 백화점 같은 곳뿐 아니라 일식집, 바, 클럽, 셀렉샵 등 다양하죠)을 기억하는 중요한 차밍 피처 중 하나입니다. 아니, 하다못해, 동네 마트에만 가도 어떤 점장님은 꼭 1990년대 히트곡 메들리만 줄창 틉니다. 그게 전략이건 그분 개인 취향이건 간에 소비자는 귓전을 쨍쨍 울렸던 BGM(?)으로 그 매장을 기억하기 마련이죠. 원트리즈는 매장과 협의하여 일종의 BGM 컨설팅까지 해 준다는 뜻입니다. 인테리어보다 어쩌면 더 세심하게 이미지 빌딩에 기여하는 게 음악일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더 놀라운 건, 음원 공급 면에서 타 업체에 기댄다면 원가 관리에서 유출적 요소를 결국 통제 못 합니다. 이 회사는 먼 미래를 내다보고 인재를 키워 자사가 보유할 만한 새 음원을 Db로 축적도 한다는군요. 배고픈 작곡가들과 윈윈하는 멋진 발상이 아닐 수 없죠.

쉐어블링은 이른바 커머스 3.0의 이념을 구현하는 모범적 플랫폼의 선두 업체입니다. 이 발상은 개인별로 비슷한 아이템을 구매, 착용해도, 그 효과나 조합은 상상 밖으로 다양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자명한 이치인데 왜 이때까지 다른 이들은 이를 사업 모델로 만들 아이디어를 못 떠올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책에서는 이 플랫폼만이 제공할 수 있는 효용으로, "개별 소비자들은 자신의 스타일링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고(p269)", 아울러 판매자 쪽에서도 낱개 품목이 아니라 세트(=번들) 단위로 다룰 수 있으니 더 큰 이익이라고 합니다. 확실히 사람이 짜내는 지혜와 꾀에는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SNS는 일부 불건전한 소통이나 과시적 게시물, 외적 지표에만 치중한 중독형 행태가 두드러지긴 하지만, 외국에서 예컨대 링크드인 같은 서비스는 진정한 인맥 구축의 통로가 될 뿐 아니라 온라인에서 공식적으로 오프라인상의 관계를 미러링하는 증명처럼도 활용되죠. 게다가 채용과 지원의 유력한 소스 교환, 열람의 장도 제공하니 허위와 선전, 일탈의 채널이 아닌 진정한 사교(social)의 "플랫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장기적으로 페이스북 같은 범용 놀이터보다는 분명한 목적과 실용에 특화된 이런 관계망이 훨씬 큰 성장 가능성을 지닌다고 봅니다.

책의 내용은 꽤 방대합니다. 이 중에는 기발한 혁신 모델도 있고, 기존의 제도를 영리하게 비튼 변용, 응용의 미학이 돋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것은 (책의 서문에서 강조한 바와는 다소 다르게)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 격으로 파천황의 성과를 낸 놀라운 창의와 도전의 전리품도 보입니다. 스타트업의 어려움만 유약하게 호소할 게 아니라, 이처럼이나 많은 선구자들이 진정한 "스타트업 정신"으로 이미 다져 놓고 일군 플랫폼, 모델이 이처럼이나 많다는 걸 알고 자극이나 좀 받아야겠습니다. 올라탈 거인의 어깨가 없다고 엄살 피울 게 아닙니다. 이처럼이나 무등 태워줄 의향과 의욕에 가득한 선배들이, 후배들의 견인차, 상생의 동반자 노릇을 하겠다고 줄을 섰지 않습니까?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난관이 축복의 꽃길로 탈바꿈할 수도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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