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억 명 - 전 세계 100억 인류가 만들어낼 위협과 가능성
대니 돌링 지음, 안세민 옮김 / 알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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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처 음 책을 받아들고는 기분이 뿌듯했습니다. 원래 두툼한 책만 보면 눈이 휘둥그레지게 좋아하는 저이지만, 이 책은 그 달고 있는 <100억명>이라는 제목에 참 잘 어울리게, 한 페이지도 소홀히할 수 없는 빼곡한 자료와 증거, 그리고 갖가지 학문적 도구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저자 대니 돌링 교수는 "꽉 들어차 있다"는 표현을 주로 부정적 뉘앙스로 책에서 여러 차례 언급하지만(실제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지배층들은, 위정자로서 골칫거리로 여겼던 도시 빈민들에 대해 부정적 태도 가득한 어조로 그 표현을 사용했지요), 독자인 제가 보기에는 "책 한 권이 이처럼이나 많은 지식과 정보를 전달해 줄 수도 있구나."하는 기쁨으로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었습니다.

천체 의 운동 방향과 위치를 예측하다가 수학, 물리학 등 갖가지 방면의 근대 학문이 태동한 것처럼, 생산적이고 유용한 주제는 때로 의도치 않게 여러 학문의 방법론을 발달시키기도 합니다. 근자에 모든 학문의 호수처럼 작동하고 있는 경영학도, 인근 경제학뿐 아니라 수학, 심리학, 행정학, 사회학 등 다양한 영역의 기법과 원리를 끌어다 쓰고 있죠. "인구학" 역시, 이 과제를 제대로 해명하여 많은 소비자, 대중, 정책 결정자들에게 만족스러운 답을 주려면, 역사학, 통계학, 사회학, 도덕철학, 고고학, 경제학 등 그야말로 전방위적인 학적(學的) 도구를 동원해야 합니다. 이런 다방면의 수단을 자유자재로 쓰려면, 연구 수행자 본인이 만능에 가까운 지성인이라야 하고, 기능의 발휘에만 치우치지 않게 적절한 양식과 균형감각으로 올바른 결론을 이끌어 낼 또다른 정신적 성숙함을 갖춰야 하죠. 저자 대니 돌링은 바로 이런 자격과 자질을 갖춘 사람입니다.

이 책은 인류학책 입니다. 기독교의 구약에도 나오는 것처럼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바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 원초적으로 부여된 미션입니다. 칭기즈칸이 그 무고한 생명을 무차별 살상하면서 기도한 바는 바로 "제 씨의 퍼뜨림"이었습니다. 20세기의 악귀 히틀러가 소위 "레벤스라움"을 확보하기 위해 저지른 대학살극 역시, 그 목표는 제 종족 유전자의 안정적 확산에 있었습니다. 인간은 불리한 육체적 조건만을 갖춘 채 이 땅에 던져졌고, 그를 극복하기 위해 갖가지 분투를 전개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문명이고, 역사이며, 전쟁이고, 또한 평화입니다. 저자 돌링은 시야를 9천 년 전으로 돌려, 그 시절 우리 조상들은 대체 무슨 생각과 의도로 나무에서 내려와 땅을 일구고 돌을 다듬으며 불을 피웠는지 조명합니다. 우리는 그간 아찔할 정도로 발달된 인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들의 삶에 대해 추측할 뿐, 사실 그들이 누구였는지에 대해 아는 바 아직도 거의 없습니다. 책은 주로 우리 당대의 전후 90년사를 다루니, 9천년이란 시간은 도무지 비교가 안 될 만큼 비대칭적으로 우월합니다. 그러나 돌링은 "역사는 그 기준을 시간만으로 삼아 나눌 게 아니다. 인구의 증가세를 통해 가를 수도 있다."는 전제 하에, 이 방대한 책을 집필했습니다. "지구상에 살았던 대부분의 인구는, 문자가 생기고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이후에 산 사람들이다." 이게 무슨 어처구니 없는 말일까요? 분명 우리는 크로마뇽인이 2만 년 전에 등장했고, 역사 시대의 시작은 기껏해야 3천 년 전으로 알고 있는데도 말이죠. 시대 구분을 그러나 양이 아닌 질에 의해 가중치를 둔다면, 분명 선사(先史)의 그 긴 기간은 인류의 수효가 극히 적었던 시절입니다. 이 지구에 태어난 대부분의 인구는, 분명 우리와 가까운 시대에 태어나 생을 마친 이들이고, 이런 관점에서라면 우리는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 제법 아는 바가 많습니다.

이 책은 그러나 사회학 책 이기도 합니다. 제법 자신이라는 종의 과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우리지만, 앞으로 전개될 미래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 없고, 이 때문에 생각이 갈리는 이들 간에 비생산적인 다툼을 치열하게 벌이기도 합니다. 책에 등장하는 대표적 그룹은 "이성적 낙관주의자(세상은 그 와중에서도 일종의 균형점을 찾아가게 마련)", "이성적 비관주의자(무슨 소리! 백약이 무효이며 다 죽게 생겼거늘)", 그리고 "합리적 개량주의자(어찌 될지 정확히야 모르지만, 가능한 것부터 하나하나 고쳐 나가자)"들입니다. 이들은 맬서스가 처음으로 이 논쟁적인 "인구"라는 이슈를 수면 위로 띄운 이래, 전혀 상대에게 그 최소한의 장점도 인정 않을 만큼 치열하게 대립해 왔습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선포한 이래 보-혁 논쟁은 그 열기가 상대적으로 잦아들었지만(저자 돌링 교수는 이 선언에 대해 "매우 경솔했다"며 비판합니다), 인구가 앞으로 어떤 추세로 변화할 것인지, 그에 대한 대비책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른 무상한 연구결과만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올 뿐입니다. 이 삼각 대립 구도가 그 배후 세력, 혹은 스폰서만 바꿔가며 날이 갈수록 풍성한 논거를 키우며, 어떤 가상의 수렴점에서 점점 멀어져만 가는 것도 희한한 특징입니다. 이른바 선진국 진영 내부에서도, 교토 협약 지지세력과 그 반대파, 지구 온난화와 오존 층 파괴의 실체에 대해 아예 부인하고드는 자본 측의 이해까지 얽혀, 도무지 합의의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책은 상당한 의미에서 도덕철학도 논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에게 그저 쌀쌀맞은 귀족들의 지배논리만 대변하는 나팔수로만 여겨지는 맬서스 역시, 원래의 의도는 기독교 성직자로서 "불결한 하층민들의 끝없는 성욕"에 대한 개인적 혐오였으니, 그 나름대로는 정결한 도덕의 회복을 지적하고자 헸었을 터입니다. 그러니 인구 문제는 그에게 있어서 곧 도덕의 문제였으며, 가난이 곧 죄에 대한 업보라고 보았던 점에서 3000년 전 아리아 족의 드라비다 족 정벌 동기와 다르지 않습니다(이후 일종의 종교로서 카스트 제도 확립). 종교라고 하면 무조건적인 박애가 연상되어야 하는데, 이처럼 냉혹한 규율 강요와 결부된다는 게 아이러니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이 책이 후반부에서 소개하고 있듯, 1970년대 말의 중국이 "산아제한만이 우리의 살길"이라는 결단으로 대대적 강제를 벌인 사실 역시 참 역설적입니다. 중국은 명실상부한 공산주의 국가였으며, 그 모든 구체제의 잔재를 전복하려 든 것도 인민 해방의 동기를 내세우고 벌인 캠페인인데, 정작 인민의 가정 생활 단속에 있어 지독한 귀족적, 금욕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그(ideologue)가 들고 나온 "대안"과 차이가 없었으니 말입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우리가 봐 왔던 연대기 기준, 정치 중심의 스토리를, 처음으로 50억, 60억, 70억 도달 단계로 끊어 이정표를 잡고, 이 사이에 있었던 각종의 대사건과 인구 변화를 추이를 하나하나 맞대응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책입니다. 인간의 존재는 양이 아닌 질에 의해 더 큰 영향을 받고, 그런 의미에서 지난 한 세기는 그 앞의 모든 시기를 능가할 만한 가중치를 지닙니다. 앞에 쌓아왔던 그 모든 업적보다, (놀랍게도)가 장 최근 100년 간에 쌓아올린 업적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 각종 통계, 즉 자원 소비량, GDP의 성장 등의 지표를 보고서도 알 수 있었지만, 저자는 인구라는 가장 직관적이고 단순한 수치를 통해 이를 "선언"합니다. 근거가 뭐냐고요? 우리는 오늘도 직장에서 열심히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귀가했습니다. 이게 다 무엇이 목적이냐, 바로 먹고 살고자 하는 일입니다. 인류는 무엇때문에 자연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애써 환경과 분투하는가. 바로 후손을 계속 남기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 목적이 달성되었는지 여부는 바로 인구의 수치가 증명하는 바 아니겠습니까?

저 자는 그러나 신중합니다. 100억의 인구는 "그간 열심히 잘해왔네"의 축복입니까, 혹은 "지구에 이만한 하중을 주었으,니 곧 그 대가를 치르리라"는 재앙에의 경고입니까? 어떤 의미에서 저자는 "사람이 우선이다."를 일관되이 주장합니다. 맬서스의 오류는 비관이냐 낙관이냐에서가 아닌, 도덕과 윤리(그 나름으로 생각한)를 인간보다 우선했다는 데서 비롯한지도 모릅니다. 무조건 남을 적대시하고, 책 한 권에서도 만인의 공적 하나를 찾아 일단 저주를 하고 보는, 정치에 매몰된 어리석은 독자 역시 방향만 반대일 뿐 이 오류에서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왜 "고작' 인구 변화 하나를 분석하기 위해 이렇게나 많은 도구가 동원되어야 할까요? 답은, 인구는 그저 인구가 아닌 생명의 탄생, 지속, 그에의 존중 그 모든 흔적의 총체이기 때문입니다. 덜 낳고 더 낳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태어날 인구를 어떤 시선에서 보고, 그 태어난 인구가 자신과 타인의 삶을 어떤 태도로 맞이하게 되는지에 따라, 이 100억의 인구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될 수도 있고, 진정 전 우주를 통틀어 유일하게 만발한 장미꽃 다발일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은 대니 돌링 교수의 "백억 대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박식, 따뜻한 유머 속에 녹아 있는 군데군데의 자기 고백이 어우러져 더 매력을 더합니다. "인간은 그저 소속 문화가 규정지은 권위에 굴복해야 생존이 가능한 나약한 존재"라며, 그 예로 조지 오웰이 스페인 카탈루냐에서 겪은 "손님 눈을 똑바로 보는 웨이터"에 대한 두려움 토로를 인용합니다. 돌링 교수처럼 빼어난 지성인이, 10대 시절을 시골에서 자란 개인적 체험을 이처럼 기록 문헌에 투영하는 점이 재미있었습니다. 통설에 의하면 조지 오웰의 "두려움"은 그런 동기가 아니었을 텐데 말입니다. 인간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과, 그런 토양에서만 자랄 수 있는 합리적인 대안, 혹은 그 맹아의 발견이야말로 이 책을 읽은 진정한 수확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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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첩 클라우즈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17
애너벨 피처 지음, 한유주 옮김 / 내인생의책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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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름다운 소녀가 있습니다. 이 소녀는 어느 날, 아직도 사형 제도가 엄존하고 그 제도의 고수에 대해 가장 긍정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미국 텍사스 주의 어느 사형수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소녀는 이 사형수에 대해, 그저 우연한 경로로 웹을 통해 접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소녀는, 그 사형수가 capital punishment에 처해지게 된 경위(아내의 부정에 대한 격분 끝에 우발적 살인[고살. 故殺], 이에 부수하여 증인이 될 위험이 있는 이웃에 대한 모살[謀殺])를 알고, 그에 대해 깊은 공감을 갖게 됩니다. 공감이라니 무슨 일일까요? 사형수는 거의 자신의 아빠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남자고,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람의 목숨을 둘이나 앗은 흉악범인데요. 그 이유는 곧 자신의 입을 통해 밝혀집니다.

소 녀가 자기 입으로 아름답다고 말하는 대목은 없습니다. 하지만 소녀는, 학교 동급생 중 최고의 킹카인 맥스 모건이 자신에게 한 눈에 반하게 만들었죠. 여자애들이라면 누구나 친해지고 싶고, 가까운 거리에서 말이라도 한번 걸어봤으면 하는 선망의 대상이, 자신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할 만큼 빠져들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이 소녀가 학교 제일의 퀸카냐면 또 그건 아닙니다. 맥스 모건이 제 입으로 "너 여태 어디 있었니?"라고 말할 정도니까, 아마 특별한 개인 사이의 상성(相性)처럼, 그저 자신이 부족하다 싶은 부분을 강렬하게 보충해 줄 것 같은 그 개성에 맥스가 그저 이끌렸을 수도 있습니다.

이 쯤에서 짐작하시겠지만, 소녀는 영특한 아이입니다. 그렇다고 아주 학업 성적이 뛰어난 것 같지는 않지만, 이것은 소위 "포텐"이 터지지 않아서입니다. 동성 친구 로렌이 헛갈려하는 어려운 어휘를 교정해 주며 웃기도 하고, 저 맥스 모건에게 (그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힘든) 농담을 던지며 상대를 측은하게 바라보기도 합니다. 텍사스의 사형수에게 쓰는 편지에서, 고살과 모살의 차이를 논하는("아저씨, 맨슬로터에 비해 머더가 더 중한 형으로 처리되죠. 하지만 아저씨가 진짜 후회하는 건 사랑하는 아내를 죽인 일이지, 무례한 이웃 아줌마에 대한 게 아니겠죠?") 걸로 봐서 또래에 비해 조숙한 아이임이 틀림 없습니다. 어쩌면 그저, 두 분 다 변호사인 양친의 영향을 받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지 적인 여성은 보통 지적인 남성에게 끌리죠. 조이라는 익명을 소설(즉 사형수에게 보내는 편지) 안에서 계속 쓰고 있는 소녀는, 그래서인지 킹카 맥스에게 별로 마음이 안 갑니다. 맥스는 완전히 자신에게 홀딱 빠져 있고, 이런 맥스와 공인 커플이 되면 친구들 사이에서 위상이 한참 올라갈 거라는 속물적 기대가 들 만도 한데, 소녀의 내심은 정작 다른 데 있습니다. 그녀는 사실 애런이라는 똑똑한 상급생에게 마음이 팔려 있었는데, 알고 보니 애런은 맥스의 형이었던 겁니다.

소 녀 "조이"는 자기 입으로 아름답다고 말한 적이 없지만, 이 형제가 나란히 그녀에게 반한 걸로 봐서, 분명 평균을 훨씬 뛰어넘는 육제적 매력이 있는 아이입니다. 맥스는 잘생겼지만 아주 단순한 아이입니다. 사랑의 쟁취에 전략도 노림수도 없이 그저 좋아하는 아이를 두고 대뜸 고백부터 합니다. 그러면서도 순박한 데가 있어서, 찬스가 숱하게 있었지만 이를 악용하지는 않습니다(공교롭게도 그때마다 엄마 등 누군가의 방해를 받지만, 결정적인 건 아니었죠).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소녀 조이가 자신에게 완전히 마음을 안 주고 있다는 걸 눈치챕니다. 하지만 그저 기다리고, 틈이 날 때마다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전달하고 또 전달합니다.

조 이에게는 두 동생이 있습니다. 갓 취학한 여동생 소프와, 아직 부모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남동생 도트입니다. 소프는 언니와 동생 사이에 끼어 관심을 못 받는다고 불만이 대단하고, 도트는 안타깝게도 뇌막염 때문에 청각 장애가 있습니다. 하지만 피가 어디 안 가는지, 둘 다 지독하게 솔직하고 톡톡 튀는 개성을 도무지 주체하지 못합니다. 엄마 역시 아빠처럼 변호사였으나, 도트가 저렇게 된 이후에는 가사와 육아에만 전념합니다. 이 사연은 소설 후반부에 나오는데, 독자는 처음에 왜 엄마가 시댁 식구(즉 조이, 소프, 도트의 친조부모)들과 사이가 안 좋은지, 맞벌이가 많은 영국에서 왜 이 여성이 집에만 있으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조이도 가정에 문제가 있었고, 아빠가 로펌에서 정리해고를 당하는 바람에 이제 더 큰 문제가 생기려 하는 참이지만, 맥스 네(즉 애런 네)는 더 심각합니다. 맥스의 엄마(곧 애런의 엄마이기도 한) 샌드라는 착하고 열린 마음을 지닌 분이지만, 남편을 잃은 후에는 거의 알콜 의존증이라고 해도 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맥스의 아빠는 새 애인과 눈이 맞아 집을 떠난 상태이며, 다만 수입이 넉넉하여 자신의 전처 소생 두 아이에게 거액을 지원할 능력이 됩니다. 애런은 영리한 아이답게 현실을 인정하고 공부에만 몰두하지만, 착하고 단순한 맥스는 자기 분노를 참을 수 없습니다. 이런 두 가정의 소생이, 둘로서만 만나도 보는 이가 위태위태한 마음인데, 지독한 비극인 게 셋으로서 만났다는 사실이죠.

자 이제 다시 처음에 꺼낸 화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조이는 이런 이야기를, 사람을 죽이고 사형 선고를 받은 어느 중년 남자에게, 지극히 다정다감한 어조로 편지를 통해 털어놓고 있습니다. 대체 이유가 뭘까요? 부모에게도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그것도 사람의 목숨을 앗은 범죄자에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다니요. 이 점은 아마 소설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도 이해 못할 독자가 많을 줄 압니다. 모티브는 다름 아닌 죄책감입니다. 대외적으로는 이미 정리된 일이고, 무덤까지 갖고 갈 가능성이 큰 비밀, 그러나 "그 일"로 인해 상처입고 훼손된 양심은 여전히 두 눈 크게 뜨고 행위자를 응시합니다. 어린 나이의 조이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보속을 갈구합니다. 하지만 사제를 찾아갈 마음의 용기는 나지 않습니다. 죄책감이 크긴 하지만, 그런 무서운 죄를 저지른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사람이라야 그에게 죄를 털어 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텍사스의 사형수를 고른 이유는 이것이 답니다. 실제로 사형수는 소설 속에서 한 번도 제 목소리로 등장하지 않는, 그저 풍경보다도 낮은 비중이고, 과연 실존인물이기나 한지도 의문스럽습니다. 중요한 건 소녀 조이가 이 사람에게 철저히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는 점이죠.

왜 소녀가 이 자에게 자신을 투영할까요? 그것은... 바로 이 소설의 핵심 이벤트이기도 하지만... 소녀가 "누구"를 죽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연 "살인"이 무엇인지, 인과관계의 연쇄를 어느 범위까지 잡아야 하는지, 그 책임 귀속은 어느 원칙에서 이뤄져야 하는지는 아주 어려운 문제로서 현생 인류의 지혜로는 그 해결이 아직도 불가능합니다. 아무튼 소녀의 여린 양심은, 고해의 대상을 찾아야 할 만큼 사정이 절박합니다. 1996년 작 영화 <슬리퍼스>에는, 고해실에 몰래 숨어 든 동네 문제아 소년들이, 자신들을 사제로 착각한 어느 아주머니로부터 뜻하지 않게 그 사연을 듣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해(?)를 다 마치고 이 아주머니는 한 마디를 남기죠. "들어줘서 고마웠다. 얘들아." 사정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아주머니는 자신의 일을 그냥 진행했던 겁니다. 상대의 나이, 신분, 성숙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한 영혼과 다른 영혼이 교감, 소통한다는 그 사실이 중요하다는 걸 이분이 아셨던 까닭일 겝니다.

애 런은 소설 마지막에 자기 목소리로, 1인칭 시점으로 등장하더군요. "사랑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르는 법이야." 이 대사는 왠지, 매컬로 여사의 <가시나무새>가 떠오릅니다. 그 작품엔 이런 말도 나오죠. "증오는 그냥 받아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사랑은 대체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갈피가 안 잡힌다. 증오는 때가 되면 잦아들고 멈춘다. 그러나 사랑은 도무지 그칠 줄은 모른다. " 이 소설은, 한창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세상 번뇌와 추악함을 몰라야 할 소년소녀들이 겪는, 가장 비극적인 꼬임과 얽힘의 사연입니다. 독자는 "아니 대체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라며 미스테리를 푸는자세로 계속 일어나가지만, 사실 딱히 쇼킹한 반전은 없습니다(그런 건 있어서도 안 되죠). 푸른 하늘은 석양을 맞이하여 케첩처럼 붉은 빛을 띱니다. 하늘에 뜬 케첩은 구름을 물들이고, 끈적한 질감으로 시야에 위화감을 더합니다. 그 위화감은 곧 내 영혼에 침투하여, 옷에 묻어 잘 지지 않는 케첩 자국처럼 상처를 돋웁니다. 우리는 글러나 이 상처를 딛고, 달래고, 새 살을 키워 제 삶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Life Goes on. 그게 바로 앞서 간 망자의 희구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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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송복 지음 / 시루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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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거의 오백 년 전, 왜가 자신의 영역과 분수에 만족하지 않고 바다를 건어 이 강산을 침노해 왔을 때, 우리의 실력과 군비(軍備)는 지극히 유감스럽게도 도저히 그들을 상대할 수준이 못 되었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단합을 못 하고, 위정자는 무능과 부패, 향락에 맛들여 국가 기강의 문란이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백성은 생업에 힘 써 봐야 남는 게 없을 정도로 가혹한 수탈에 시달렸으니, 이는 상당 수의 국민이 전사와 생산자를 겸하는 준 병농일치의 왜국과 선명한 대조를 이뤘습니다. 게다가 왜는, 교활하고 능란한 수완으로 갓 열도를 통일한 풍신수길이라는 통치자의 손에 정비되어, 신생국 특유의 욱일승천 기세로 도통 두려움을 모르는 기세이기까지 했죠.

안팎으로 공히 감당 못할 압력이 들어오니, 통분하여 피를 토할 지경이지만 이 조선이라는 나라는 멸망의 운명을 면하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아무리 우리 조상들의 사정이라고 하지만, 무능하고 어리석었으며 심지어 도덕적으로도 그리 바르지 못했던 체제였기에, 그저 외부인의 객관적 시야라면 사망 선고에 주저함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은, 명재상 류성룡이 남긴 거의 모든 기록과, 한중일 3국의 연구 결과를 꼼꼼하게도 검토하신 저자 송 복 (전 연세대 교수) 선생의 제법 방대한 양의 저술이며, 이런 참담한 느낌과 결론은 독자로서 제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이 밀도 높고 진지한 저술이 원의 그대로 품고 있는 내용에 가깝습니다. 류성룡 뿐 아니라 이후 시대 내내 조선에서는 "재조지은"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 말 자체가 다른 경우에도 흔히 쓰는 표현이 아닙니다. 망해서 형체가 없어질 뻔한 걸 다시[再] 만들어주었다[造]는, 아주 극단적인 색채를 담은 어구죠.

 

임진왜란이 국망의 위기였다는 건 누구나 동의합니다. 그러나 평화롭게 잘 살던 나라에 갑자기 오랑캐들이 쳐들어왔고, 해전에서 병력의 절대 열세를 딛고 용기와 천재적 전술로 무장했던 충무공께서 나라를 구한 줄로만 정리할 뿐입니다. 우리의 역사인데도 정작 이 정도로 무지했었구나 하는 아찔한 느낌을, 이 알찬 책을 읽고 다지게 된 점에 지금 감사하고 있을 만큼, 책은 명재상 류성룡의 우국 충절과 현명한 통찰로 가득했으며,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 정리하여 어리석은 독자를 매 페이지에서 준열히 꾸짖고 깨우치는 저자의 열정과 해박한 지식에도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임란은 1592년에 발발했습니다. 동래진에 상륙한 왜는, 말 그대로 파죽지세로 조선 반도를 휩쓸었습니다. 지키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만큼 빠른 진군 속도였고, 산세가 험하다는 조선 지형에 대한 상식이 과연 맞는지 의문스러울 만큼 거칠 것이 없는 침략군의 위세였습니다. 죽어나는 건 백성들입니다. 애써 지은 농사를 모두 망치고 가진 건 약탈당했으며, 부녀자는 능욕당하고 애꿎은 장정들은 목숨을 빼앗겼습니다. 문제는, 나라를 지켜 줘야 할 나라님은 아무 생각과 방비가 없이 제 일신을 보전할 궁리만 했고, 긴 칼과 날랜 동작에 신무기 조총까지 갖춘 왜군을, 정면 상대로는 도무지 이길 수 없는 허약한 무력이 문제였습니다.

 

우리 힘으로 나라를 지킬 수 없는데 어쩌겠습니까. 평소에 극진한 예로 사대(事大)해 오던 명국에 도움을 청할 밖에요. 그런데 외교라는 게 본디 내정보다도 까다로운 사무이지만, 도와 주겠답시고 온 명국 군대와 그 우두머리들이 하는 짓이란 침략군보다 더 지독하고 가혹합니다.

 

저자는 조선 영의정 류성룡의 시점을 빌려, 현대인의 객관적 시야로 재구성한 국제 정세를 냉정히 분석 서술하고 있습니다. 명은 왜 조선을 방치하지 않고, 파탄지경의 자체 재정에 극심한 무리를 줘 가며 원군을 보냈을까? 이유는 지극히 간단합니다. 조선을 잃으면, 막강한 무력을 지닌 왜와 바로 국경을 접하게 됩니다. 압록강을 건너면 요동이고, 요동이 위태로우면 그 다음은 바로 북경이 넘보입니다. 왜 우환을 지근거리에 키우겠습니까? 어차피 침략 의도를 숨기지 않는 잠재적 적이라면, 남의 마당에서 싸우는 편이 낫습니다.

 

왜 명군은 벽제관 전투 이후, 전혀 전의를 보이지 않고 숙영에 머물렀을까? 답은 간단합니다. 맞서 싸워 보니,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책에는 명 측의 문서를 인용하여, 왜를 명 조정이 "부러워했던" 이유를 조목조목 대기까지 합니다. 물산이 풍요롭고, 애써 짓지 않아도 천혜로 누릴 수 있는 요새가 있으며, 군사력이 실로 막강하다, 이 정도입니다. 항목의 수가 문제가 아니라, 세 가지 아티클이 모두 승전의 필요충분조건이라 할 만큼 중요한 것들이네요. 풍요로운 물산은 전쟁 수행의 요체인 보급과 직결됩니다. 열도 면적의 40여 배에 달하는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는 명 제국이, 좁은 왜의 풍요를 부러워한다? 이는 두 가지 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첫째, (이 책에도 잘 나와 있듯) 부정부패가 극심했던 명 조정은, 그 넘쳐 나는 생산물의 세수를 국고에 갈무리하지 못 하고, 탐관오리나 토호의 수중에 가로챔을 당했습니다. 이러니 국방상 긴요한 필요가 있는 이런 상황에 닥쳐서도, 군대를 자유로이 놀릴 경비를 마련하기가 오히려 어려웠던 거죠. 세상에, 그 광대한 대륙의 좁디좁은 섬나라의 경제를 부러워한다는 게 말이 되겠습니까? 다음으로, 유능한 경영인이었던 풍신수길의 지도 하에 척척 손발이 맞아 돌아갔던 당대 왜국의 행정 능력도 간과해서 안 될 일입니다. 이 책에도 잠시 이름이 언급되는 이시다 미츠나리 같은, 능력 위주의 등용 풍토에서 한참 성가를 높이던 유능한 관료의 활약도 대단했죠.

 

무엇보다, 세기 단위로 재어야 할 전국시대의 와중에 단련되고 단련된 무사와 일반 병(兵)의 전투력이, 동아시아 최고의 수준을 자랑했기에, 조선 아니라 그 어느 대국의 군대, 우리가 천병(天兵)이라 불렀던 명국군도 그 대적을 버거워했습니다. 북경에서 강화의 지침이 내려오자, 명군 진영이 환호로 가득했다는 게 바로 이를 증명합니다.

 

왜는 처음부터 우리 국토를 유린하기 위해 전쟁을 열었고, 명은 자체 방위를 위해 군대를 보냈을 뿐이니, 이제 서로의 속셈과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두 맹수는 어떤 선택을 취하겠습니까? 바로 강화이며, 그 다음 단계는 조선의 분할입니다. 명은 요동과 중원의 안위만 도모하면 그만이지, 속국(가슴 아프지만 현실이었죠)의 복수니 보호니  하는 것에는 관심 없습니다. 제 코가 석 자인데 누굴 돕겠습니까? 왜와 적당히 타협을 보아, 기존의 자기 세력권을 상하게만 하지 않으면 소기의 목적 달성입니다. 저자의 생각일 뿐인지는 모르지만, 책의 서술에 의하면 "명의 고위 인사들도 이미 황혼을 맞은 제국은 괜한 무리를 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과연 이로부터 불과 반 세기도 안 되어 주씨의 황실이 무너질 운명임을 그들도 어렴풋하게나마 감 잡고 있었을까요?

이제 이 책의 제목을 다시 보십시오.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입니다. 나라가 다시 만들어졌다(물론 체질이 조금도 개선되지 못했습니다만)는 역사는 우리가 배워서 압니다. 그런데, 왜 주어(혹은 주제어)가 류성룡일까요? 바로 여기서부터 저자의 집필 의도가 본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우리와는 파워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명, 왜 두 세력이, 자측의 현상 유지를 위해 탸협을 결정했다면, 이미 그 운명은 결정이 난 것입니다. 저자 송 전 교수의 말씀처럼, 영토 분할이 되거나, 모르긴 해도 한쪽의 세력권으로 완전히 넘어가서, 우리는 지금 "제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의 정체성과 삶을 지니고 영위하는 신세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는 그렇게 흫러가지 않고, 망했어야 자연스러웠을 나라는 용케 제 모습을 (초라하게나마) 유지한 채, 이후 일제가 탈아입구를 외치며 다시 현해탄을 건너올 무렵까지 버텨 왔습니다. 이게 어찌된 곡절이었을까요?

 

저자는, 서애 류성룡의 빛나는 지성, 성실함, 관료로서 갖춘 행동력, 상황 판단 능력, 그리고 "여기가 고비다" 싶으면 상황을 살피지 않고 몸으로라도 막고 보는 용기(그는 노년에 접어든 데다 그리 강건한 신체 조건도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오로지 종묘 사직을 돌보고 백성을 살피는 간곡한 마음을 지적합니다. 심유경이가 기패(旗牌)를 들고 왜군의 진영으로 향할 때, 서애는 그에 예를 표하기를 거부합니다. 이런 불경은 속국의 군주, 번왕이라고 해도 죽음으로 치죄할 수 있는 사안이었습니다. 명 제독 이여송은 대노하지만, 이미 수 차례의 접촉을 통해 그의 기품과 인격, 기량을 잘 알았기에 함부로 대하질 못합니다. 서애는 이미 명 조정과, "하급 관리에 지나지 않는" 이 제독의 속내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강화는 우리 조선의 이해에만 어긋나는 게 아닙니다. 이는 천조에의 위협입니다. 경기 이남의 백성들이 결국 왜에 의탁하게 되면, 이는 과연 장차 화가 되지 않겠습니까? 당장 갈 곳을 잃어버린 조선의 군사 장졸들이, 나중에 왜와 손잡고 중원을 노리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수백 년 간 명을 잘 삼겨 온 조선의 원수는, 곧 대국의 우환이기도 한 것입니다. 어찌 그들에게 발호의 온상을 제공하려 하십니까?"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노재상의 도도한 변설(이 표현은 책 원문과는 다르게 제가 재구성한 것입니다)에 이여송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강화는 곧 교활한 왜의 수작에 놀아나는 첫걸음이란 지적은 명 조정에도 흘러들어가고, 이에 전선은 고착되어 소위 사자(使者)라는 이들이 자신의 정부와 임금을 속이며 소득없는 지루한 협상을 빌미로 수 년의 세월이 지나갑니다. 마치 한국전 당시 리지웨이와 펑떠화이의 대치를 보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책에서 여러 대목에 걸쳐, "왜, 이 시점에서 왜군은 진군하지 않았던가. 왜, 명 -왜 양측은 그 시점에서 과감한 강화를 단행하여 실리를 조기에 거두고 물러나지 않았던가."의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습니다. 저자가 마련한 자체 대답은, "그저 수수께끼이며, 하늘의 도움이라는 말밖에 할 것이 없다."입니다. 그러나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어디 우연과 공짜가 개입하겠습니까? 책의 제목이 말해줍니다. 임금도 신하고 백성도 정신을 놓고 있던 시점에, 오로지 하늘에서 내려 준 현명한 노재상의 슬기가 밤을 대낮처럼 환히 밝혀, 우군 아닌 점령군, 피도 눈물도 없는 적군까지 감복하게 하여 무단한 행동을 주저하게 하였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저의 결론은 이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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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볼트의 대륙 - 남아메리카의 발명자, 훔볼트의 남미 견문록
울리 쿨케 지음, 최윤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이런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유 럽과 아시아의 세력 역전이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이뤄진 것 아닐까 하는 깊은 아쉬움이었습니다. 이래서 우리가 그들에게 뒤처졌구나, 심지어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도 그들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구나... 하는 생각.다른 한편으로, 나라는 개인으로, 한 인간으로서 행복한삶을 살고 내 이웃에게도 작으나마 기븜과 행복을 줄 수 있는 삶을 살려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신선하면서도 유용한 방향을 제시받기도 했습니다. 여 러 모로, 이 책은 어른도 어린이들도 읽고 나서 큰 감동과 교훈을 받을 수 있는 책이었고, 부모와 자녀가 함께 페이지를 넘기며 읽고 든 생각을 나누기에 참 좋겠다 싶기도 했습니다. 내용만 놓고 보면 어려운 구석도 있지만, 워낙 풍부한 도판이 질 좋은 백상지에 선명하게 수록되어 있어, 어린이라 해도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는 편집이라서입니다. 



알 렉산더 폰 훔볼트는 나면서부터(1769년생입니다) 갖은 행운과 축복으로 가득한 배경을 지닌, 그야말로 "입에 은수저를 물고 나온" 인생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입에 물고 나온 은수저는, 당사자가 변변치 못한 자질을 지녔거나 불성실한 태도를 가졌다면 얼마든지 남의 수중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가진 게 은수저밖에 없다면 이처럼 유리한 운수라 해도 어느 순간에 변화를 맞이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빼어난 지성과 성실한 마음가짐, 그리고 건전한 인격을 지닌, 정말 신이 한 몸에 온갖 축원을 다 베풀어 준 선택된 영혼이었습니다. 형 빌헬름처럼 그도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총명한 아이였고, 갓 스물이 넘어서 그는 벌써 공직에 입문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좋은 자리를 굳이 마다하고, 광업 기사처럼 평소에 그가 강한 흥미를 느끼고 있던 분야의 실습이 가능한 기회만을 골라 가집니다. 그가 재학 중이었던 대학에서도 탁월한 재능과 열정 덕분에 언제나 주목을 받았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구요.



이런 그에게도 큰 불운이 닥치는데, 사랑하는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일입니다. 어머니 역시 막강한 배경을 지닌 가문 출신이어서, 알렉산더는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무렵 거금의 유산을 상속받게 됩니다. 분별 없는 젊은이라면 무익하고 소모적인 용도에 탕진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이 중 일부를 야심만만한, 그리고 생각만으로도 가슴 설레었던 프로젝트를 꾸리는 데에 투자하게 됩니다. 적도 인근의 남아메리카 대륙을 여행하고 생태계를 탐사하며, 동시에 그가 배우고 익혔던 자연과학 지식을 확인하고 발전시키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자금도 자금이지만, 각종 장비와 자료를 낱낱이 챙기고 점검해야 하며, 여행 자체의 기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꼼꼼한 계획을 짜야 합니다. 여행 준비 과정 자체가, 그의 능력과 지성, 끈기를 시험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의학 발전 수준이 일천했고, 사실상 제대로 된 지도도 없었던 오지 중의 오지를 탐사하는 일은, 거의 목숨을 건 모험이지 한가한 귀족의 소일거리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어떤 정체 불명의 풍토병에 걸릴지도 모르고,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야수의 습격을 받을 수도 있으며, 현지인들이 낲선 방문객에 호의적이리라는 장담도 못 하는 상황에다, 역설적으로 현지의 가장 큰 위험은 바로 같은 백인인 "(소위) 문명인"들로부터 올 수 있었습니다(정치적 상황이 그만큼 복잡했던 탓이죠).



어떤 의미에서 "1인 기업, 1인 탐사팀"이었다고 할 수 있는 청년 알렉산더는, 이 여행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통행 안전 확보 문제를, 당시 스페인 왕이었던 카를로스 4세를 만나 해결하게 됩니다. 명문 가문에서 자라 반듯한 외모와 매너, 그리고 빛나는 지성과 겸손한 인격을 지녔던 이 젊은이에게, 왕은 흔쾌히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을 들어 주기로 합니다. 알렉산더는 그러나 스페인의 적국이었던(말은 그렇지만, 이베리아 반도의 두 왕국은 이때 국력 상태가 거의 빈사 수준이었습니다) 포르투갈 왕실의 협조는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그의 탐사는 따라서 스페인령 남아메리카(여러 "부왕령"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의 경계를 넘어서지는 못합니다.



알 렉산더는 이보다 앞서, 세계 문화의 요람이자 계몽주의의 온상이었던 파리에서도 오랜 기간 체류를 하는데요. 이때 그는 봉플랑이라는 귀족 출신 친구를 알게 됩니다. 모든 면에서 죽이 잘 맞았던 그들이었기에, 이 대단한, 그리고 온갖 역경으로 가득할 여행을 이끌어나감에 있어 환상의 듀오를 결성하게 되죠. 1799년 서른을 갓 넘길 때, 그는 드디어 이 친구와 함께 "계몽주의 오 디세이"의 거대한 막을 열며 긴 항해의 돛을 올리게 됩니다. 책에는 아주 간접적으로만 언급되지만, 이 무렵 봉플랑의 모국 프랑스는 부르봉 왕실이 축출당한지 오래였고, 입법 의회의 성립과 전복,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통치, 그리고 절은 포병 장교 나폴레옹의 대두 등으로 어지럽게 정세가 변할 시절이었습니다. 



몸이 자꾸 가려워서 살펴 보니, 눈에 띄는 게 없습니다. 구비해 간 도구 중 현미경이 있어 이를 이용해서 관찰해 보아도, 그저 가는 금 몇 개가 그어져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는 유럽 등 구세계에 존재하지 않고, 이 무덥고 습한 오지에만 서식하는 특이한 기생충이었습니다. 귀족 출신으로 험한 환경에 노출된 적이 없는 그들이었지만, 강인한 의지와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삼아 갖은 난관을 이겨 나갑니다. 원주민 중에서도 그저 게으르고 무심하게, 백인 이방인들과 거리를 둬 가며 응대하는 이들도 있었고, 알 렉산더와 봉플랑의 몸에서 일일이 벌레를 떼 내어 주는, 자상한 듯 쿨한 성격의 여인도 있었습니다. 오지에는 정말 각양각색의 기이한 생명체들이 있었습니다. 고도도 높고 모든 걸 부패시킬 기세로 밀려 오는 습기 때문에 산소부터가 희박한데, 이런 곳만 즐겨 서식하는 혐기성 곤충 때문에 탐사는 더욱 애를 먹습니다. 날씨가 너무 더워 악어조차도 배겨낼 수 없는 상황이라, 동면이 아닌 하면(夏眠)으로 혹서를 넘기는 모습도 보이고, 그런 악아를 잘못 밟아 깨워 십년감수하는 모습도 나옵니다. 가장 장관이었던 건 전기뱀장어의 모습이었습니다. 유럽이나 미국에는 분포하지 않는 생명체인데, 여 러 마리가 힘을 합치면 엄청난 고압의 전류가 나오므로, 이들은 현지에서 여러 마리의 말을 끌고 가서 뱀장어 사냥에 나섭니다. 위력은 과연 대단해서, 그 큰 말이 쇼크 때문에 기절하고, 다른 말에 밟히거나  물에 빠져 죽는 녀석들이 속출했습니다. 알렉산더는 한번 전기를 방류한 녀석은, 양분 섭취와 휴식을 통해서만 재충전이 가능함을 이미 알았기에, 큰힘 들이지 않고, 원주민들에게 가히 공포의 대상이었던 이들 뱀장어를 포획합니다.


그의 형 빌헬름에 대해서도 따로 꼭지를 뽑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 풍경, 기적 같은 장관, 그리고 낯선 생명체, 생소한 토질과 지형... 흠볼트는 미리 철저한 공부와 추론을 통해 머리 속에 꽉 짜 놓은 프레임 속에 이 모든 사항을 정리하고 노트와 책에 기록하고 보이지 않는 거대한 체계에 종합했습니다. 6개월 동안 온갖 죽을 고비를 넘기며 다시 대서양을 건너 돌아옵니다. 그새 유럽의 정세는, 계몽주의에 기반한 혁명의 사상과 운동의 기운이 대륙을 휩쓰는 형편이었으나, 훔볼트는 별 동요를 보이지 않습니다. "(정치는) 베를린의 그들이 걱정하라고 해요." 최고 명문 귀족 출신이면서도 모국의 귀족보다는 파리의 풍운아 친구들에게 더 유대감을 느꼈던 그는, 이런 혁명의 물결 역시 시대의 필연이라고 여겼습니다. 껄렁한 리버럴이 아니라, 이론적 바탕과 확고한 실물적 근거를 두고서만 입을 열고 글을 썼던 그였기에, 언제나 그의 주변은 경청자와 칭송자들로 가득했습니다. 탁상 공론에 그치지 않고 전문 기술자나 현지인보다 더 능숙하게 기구를 다루고 테크닉을 구사할 줄 알았던 다빈치적 지성인, 부를 소홀히하지 않으면서도 고귀한 목적을 위해 초개처첨 볼 줄도 알았던 그는 여러 모로 20세기의 천재 비트겐슈타인과 닮았습니다. 사람이 사는 땅 어디라도 그의 지성과 열정, 끈기의 덕을 직간접으로 입지 않은 인류가 없기에, 비단 남아메리카 뿐 아니라 오대양 육대륙이 모두 그의 바다요 대륙이라 하겠습니다. 왜 우리 동양에서는, 유한 귀족 계층이 호조건을 자본삼아 보다 건전한 용도에 쓸 줄을 몰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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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전쟁 생중계 - 고려의 역사를 뒤흔든 10번의 전투 전쟁 생중계
정명섭 외 지음, 김원철 그림 / 북하우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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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를 공부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지형과 군세(軍勢), 당대의 병장기가 상세히 드러난 도판이 부족할 경우,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상황이 전개되었는지 상상이 어렵다는 점입니다. 유명한 전쟁, 인류 역사의 향방을 바꿔 놓은 전쟁의 경우, 길게는 한 달, 수 개월을 지속한 경우도 있지만, 오케하자마 전투나 세키가하라 결전, 파니푸트 회전처럼 불과 몇 시간 만에 결판이 난 것도 있습니다. 이 경우, 기록자의 상세한 묘사가 없다면, 대체 왜 그토록 중요한 전투가 삽시간에 그런 빠른 결말을 보게 되었는지 이해하기란 지극히 어렵죠.


보급 상황이나 병력의 정예도(精銳度), 수적 우열의 객관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길 법하지 않은 편"이 승리를 거두었다면, 우리는 그런 마법 같은 승리를 쟁취한 야전 사령관, 혹은 병사들에게 어떤 비결이 있었는지 진심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이런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전략전술상의 멋진 예를 찾으려면 굳이 먼 나라를 보러 시선을 돌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 리 민족이야말로, 위기에 몰렸다 하면 반드시 숨은 저력을 드러내고 기지와 슬기를 발휘하여 난국에서 벗어나는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그 중에서도, 대륙에 약체 정권(송 제국)이 들어선 이유 때문에 언제나 큰 폭의 변동과 불안 위험에 시달려야 했던 고려 시대라면, (역설적이지만) 이런 멋진 예를 찾아 볼 여지가 더 많습니다. 거란, 여진, 몽골이라는 세 유목 민족이,"우리도 대륙의 지배자로 나서지 못할 바 없다"는 각성과 자각을, 약체 송 제국의 치세에, 그리고 그보다 앞서 당말, 5대 10국의 혼란기에 의미심장하게 이루었던 것입니다.


조선은 상대적으로 명과 청이 상대적으로 동아시아 일대를 안정적 장악을 보인 시기 동안에 존속했기 때문에, 갑자기 열도에 통일 세력이 들어선 때와, 바로 명청 교체기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대규모 전란을 치를 일이 없었습니다. 또, 이 책 저자인, 정- 신 두 분의 견해에 따르면, 자주성과 진취적 정신이 보다 투철했던 고려 시대야말로, 민중이 주체가 되어 효율적이고 대담하게 외세에 저항 할 수 있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제목이 말해 주듯이, "생중계"란 명칭에 전혀 부족함이 없이, 저자들은 대화체를 빌어 고려사 동안 치러진 10차례의 큰 전쟁을, 스포츠 중계의 박진성이 떠오를 만큼 생생하게 해 냅니다. 전쟁을 스포츠에 비유하는 것은 다소 진중치 못하거나, 휴머니티에 반하는 분위기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만, 무수한 인명과 재산이 손실되는 전쟁을 굳이 통하지 않고, 인간의 승부욕과 호승심, 혈기를 잠재우려 고안된 게 바로 스포츠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을 있었던 그대로 정확히 이해하려면, 우리는 마치 스포츠 중계의 생생함과 정확한 묘사를 방불케하는 역사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도 하겠습니다.


책의 맨 처음에 나오는 토픽은 삼수채 전투입니다. 삼수채 전투라고 하면 낯설게 들릴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많은 피해를 끼쳤던 요(遼) 성종의 친정, 제 2차 거란의 침입 당시 국경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입니다. 결과는 물론 잘 알듯이 고려군의 궤멸이었습니다. 하지만 패배도 그저 앞으로의 희망을 짓밟아 버리는 패배가 있는가 하면, 전술적 차원에서는 패배이나 먼 관점에서 재기를 도모할 수 있는 "생산적 패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300의 테르모필라이 전투가 그것이죠. 고려군은 이 전투에서 압도적인 열세에 몰려 있었지만, 불굴의 투지와 투혼으로 적에게 의미있는 타격을 입힌 채 전원이 장렬히 죽음을 맞이합니다. 요 성종은 이후 개셩까지 점령하지만,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탓에 "피로스의 승리"만을 간신히 거머쥔 꼴이 됩니다. 그 직접적 여파가 바로 퇴각길에서 당한 흥화진 패배였습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동아시이 일대에서 당시 최강의 무력을 자랑하던 거란 측에 대해, 불굴의 항전 기백으로 가능한 한 최대한의 피해를 입힌 것은 바로 고려의 이름 없는 일반 민중이었습니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전혀 포기할 줄 모르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나치 독일의 바르바로사 공세에 맞서 "대조국 전쟁"을 치러 낸 러시아 민중을 연상하게 합니다. 중국의 고사에도 "애병불패"라는 말이 있듯, 한을 품고 의로운 마음으로 싸움에 임하는 민중을 당할 군대는 어디에도 없게 마련입니다. 직접 비교할 건 아니지만, 압도적인 화력의 우위를 보유하고도 번번히 현지 장악에 실패하는 현대 미군의 모습을 보면 이같은 진리가 재확인됨을 알 수 있죠.


저자들의 빼어난 관점은, 당대사 분석에 매몰되지 않고, 이처럼 시대를 넘나들며 일관된 원리와 이치를 규명하려 애쓴다는 것입니다. 중원의 북부에서 세력을 규합하며 새로운 패권 확립에 골몰하던 유목 민족은, 언제나 배후 공략을 걱정하여 우리 한민족에 대고 시비를 걸어 왔습니다. 저자들의 관점에 의하면, 이의 가장 앞선 선례는, 모용황의 전연이 개시했던 고구려 침공이라고 합니다. 이 저자분들의 <조선전쟁 생중계>에 의하면, 이런 패턴은 후금의 조선 침공에서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이자겸이라고 하면 우리는 마냥 부?적으로 보기 쉽지만, 새로이 국세를 떨치고 일어난 금에 대해 실용적 외교 노선을 그처럼 견지하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는 12세기 그 빛나는 문화적 안정기를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쟁이 없으니 사라센 무역상들은 중원을 건너 뛰고 예성강으로 유입되었고, 이는 지역 경제의 특수(特輸)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운 관의 여진 정벌은 분명 우리 입장에서는 위세를 떨친 대외적 업적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저자들은 여기서 대단히 균형잡힌 관점을 유지합니다. 마치 베트남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져 국력을 의미 없이 소진했던 20세기의 미국처럼, 고려는 척박하고 비전이 보이지 않는 현지인들과의 투쟁에서 점점 지쳐갔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현명한 "출구 전략"을 마련해서, 명분과 실리를 적당히 챙기는 선에서 고려는 이 소득 없는 전쟁을 끝내게 됩니다. 이 때 무모하게 절멸전 따위를 시도했다면, 이후 아골타의 금 제국이 발흥했을 때 우리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임진란 당시 왜 측이 들고 나온 명분은 소위 "정명가도" 외에도, 원 제국과 연합하여 쳐들어온 고려군에 대한 복수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물론 여몽 연합군은 여러 전술상의 오류와 기상 이변(소위 가미카제) 때문에, 처절한 실패를 맛보고 말았습니다만, 이 대대적 원?이 일봄인들에게 끼친 심리적 영향은 상당했죠. 고려는 두 차례씩이나 왜를 정벌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사실은 향후 동아시아사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줍니다. 이 대목은 특히 상세한 그림과, 그림에 최적화된 설명("중계")이 제시되어, 내용의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전쟁이란 물론 그에 임하는 이들의 지혜와 심적 자세에도 많이 좌우되는 바 있지만, 마치 칼레 해전과 쓰시마 해전(러일 전쟁에서의)처럼, 우연히 개입되는 기상 현상의 변수가 때로는 어이없을 만큼 큰 변수로 작용하는 걸 새삼 확인하면서, 대자연의 위력 앞에는 언제나 무기력한 인간의 한계도 다시 확인하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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