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월매'

 

찬서리 고운자태 사방을 비춰
뜰가 앞선 봄을 섣달에 차지했네
바쁠가지 엷게 꾸며 반절이나 숙였는데
개인 눈밭 처음녹아 눈물어려 새로워라

 

그림자 추워서 금샘에 빠진 해 가리우고
찬향기 가벼워 먼지낀 흰창문 닫는구나
내 고향 개울가 둘러선 나무는
서쪽으로 먼길떠난 이 사람 기다릴까

 

*신라인 최광유 지음, 금둔납자 역

 

햇볕이 집에 그냥 있으면 죄를 짓는 기분이라 길을 나섰다.

봄이 어디까지 왔을까?

남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며 봄마중이라도 할 요량으로 낙안민속마을 위 금둔사로 향한다.

남해고속도로를 타다 승주에서 선암사 방향으로 시골 정취 물씬 풍기는 길을 간다.

산 속 길이기에 구비구비 넘어서 너른 낙안 땅을 바라볼 때쯤 나타나는 암자 금둔사

그곳 납월매를 만났다.

 

음력 섣달 납월(臘月)에 일찍 핀다 해서 납월매라고 했다.

엄동설한 봄을 알리는 그 붉은 마음에 기대어 나도 봄을 맞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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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5-03-07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활짝 핀 것보다 봉오리진 모습이 시선을 끄는 것은 앞으로 펼쳐질 시간들에 대한 기대 때문일까요?
두번째와 네번째 사진의 꽃봉오리가 참 이쁘네요. 실제로 보면 더 아름답겠죠?^^

무진無盡 2015-03-07 22:05   좋아요 0 | URL
마음에 담겨있는 모습대로 보인다더군요. 그리 보신거니 그럴거에요^^
 
불멸에 관하여 - 죽음을 이기는 4가지 길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3
스티븐 케이브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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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원히 살지 못하기에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다

76세의 아버지가 이 세상과 작별을 하였다. 내게 죽음은 그렇게 가까이 다가온 경험이 없어서였을까? 2년이 되어가지만 실감을 못하고 있다. 문득문득 생각나 그리울 때가 있긴 하지만 다시는 못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이렇듯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죽음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20대 초반 큰 사고로 입원치료를 마친 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인지도 모르지만 죽음이 세상과의 마지막이라 절망감이나 영원히 존재하고 싶다는 욕망 같은 것이 없다.

 

이런 내 경험을 일반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죽음을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경우와 막상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받아들이는 죽음에 대한 실감하는 정도가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도 싶다. 더불어 권력이나 경제적 부, 사회적 지위 따위를 현실에서 누리다 보니 그런 자신의 존재가 영원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해도 이해는 간다.

 

이렇게 영원한 삶이 정말로 가능한가?”, “영생이 그토록 갈망할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되는 불멸에 대한 인간의 욕망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살펴 이번이 유일한 삶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현실적이며 지극히 철학적인 명제에 대한 답을 얻어가는 과정을 담은 책이 영국의 대중철학자 스티븐 케이브가 지은 “IMMORTAL 불멸에 관하여.

 

생명체라면 갖게 되는 불멸에 대한 욕망은 인간에게 특히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어왔다고 전재한다. 이는 인간 만에 죽음에 대한 자각을 한다는 것이다. 하여, 인간의 역사는 곧 이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불멸에 도전하는 역사라고 봐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인류가 쌓아온 신화·종교·과학·역사를 통해 불멸의 욕망이 어떻게 인류의 문명을 이끌어왔는지 풀어내고 있다.

 

스티븐 케이브는 불멸하는 방법으로 네 가지를 제시한다. “생존·부활·영혼·유산이 그것이다. 인류가 이룩한 신화·종교·과학·역사를 통해 동서양의 구체적 사례를 제시하며 인류의 문명과 불멸에 대한 욕망 사이의 상관관계를 파헤치고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도출된 것이 바로 이 생존·부활·영혼·유산이라는 방법이다.“육체적으로 생존하거나, ‘부활을 통해 다시 살아나거나, ‘영혼으로서 존재하거나, ‘유산을 통해 기억되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는 영생을 얻을 자격이 있는가?”, “과학이 죽음을 이길 수 있는가?”, “신은 죽은 자를 되살릴 수 있는가?”, “나를 복제하면 나는 부활하는가?”, “내 영혼은 천국에 갈 것인가?”, “다음에도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는가?”, “어떻게 영원한 명예를 얻는가?”, “내 자식은 내 자신의 일부인가?”, “정말로 영원히 죽고 싶지 않은가?”

 

이런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을 없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누구나 알 수 있듯 이 네 가지 방법 중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유산이다. 이는 앞에서 언급했듯 이번이 유일한 삶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명제로 이어지며 불멸을 생각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주목하여 현실의 자신을 성찰하고 이에 대한 올바른 대안을 찾자는 취지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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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담가계 - 소박하고 서늘한 우리 옛글 다시 읽기
이상하 지음 / 현암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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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물과 같이 심심하고 냉담한 글의 참맛을 느끼다

사람의 사귐, 그 사람들의 사귐의 내용이 되는 멋과 풍류에 관심을 갖다보니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는 것이 옛사람들의 그림과 글이다. 이중 그림이야 시각적 표현이 중심이 되다보니 글 보다는 쉽게 접하게 되고 또 그 공감대를 형성하기에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글은 높은 장벽으로 인해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장벽이란 현실적으로 한자문화권에 살았다고는 하지만 그 한자로부터 소외된 교육으로 인한 것이 가장 크다고 할 것이다.

 

눈 밝은 사람들의 노력에 더불어 어렵사리 얻어 보는 글로나마 그 내용을 짐작하게 되고 그 속에 담겨진 멋과 풍류를 쫒아가다 보니 더딘 걸음일 수밖에 없다. 그것도 어딘가? 하지만 그 역시 만만찮은 벽에 부딪치고 만다. 그 첫째가 해설자들의 편견에 싸인 해석이거나 어설픈 주석에 의해 온전히 전달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또한 옛사람이 쓴 고전을 지금의 시선에 맞추어 바라보며,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데 주력하는 바람에 고전이 내포하고 있는 정확한 의미를 놓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용케고 이런 벽을 통과했다고 하더라도 읽는 이의 무딘 감성으로 인해 원문이 담고 있는 맛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상하의 냉담가계는 옛사람들의 글에 대한 현대인들의 태도를 보고 옛글이 너무 쉽게만 도구적으로 읽히는데 대한 아쉬움으로부터 출발한다. 고전이란 원래부터 맹물처럼 서늘하고 담담한 고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책, 옛글 특유의 맛없음마저 깊은 맛으로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고전 길라잡이를 꿈꾸며 출간한 책이다. ‘냉담가계는 이상하 교수가 한국고전번역원의 고전의 향기코너에 2년간 연재했던 글들을 바탕으로 수정, 보완해서 꾸려졌다.

 

그렇다면 맹물과 같이 심심하고 냉담해서 그 뜻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는 고전을 왜 읽는 것일까? 그것은 옛사람들의 글이나 삶의 방식에는 지금 이곳에서 얻을 수 없는 깊은 지혜와 울림이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보인다.

 

텅 빈 마음에 빛이 생기나니’, ‘가난해도 즐거울 수 있다면’. ‘살구꽃은 봄비에 지고’, ‘고전은 원래 냉담한 법이니’, ‘세상은 물결이요, 인심은 바람이라등 총 5부로 엮은 글은 맹물과 같이 심심하고 냉담해서 그 뜻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는 고전의 글맛을 알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이산해, 이황, 홍대용, 임억령, 남효원, 김시습, 김정희, 안정복, 권철신, 김창협, 박지원, 퇴계와 고봉 등이 벗들과 나눈 편지글이 중심이기에 격식에 구애됨이 없이 진솔한 내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이름 있는 선비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부인과의 말다툼 등과 같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나 학문하는 학자로써의 자세, 선비의 삶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에 대한 이야기들을 엿볼 수 있다.

 

책에 담긴 50편의 글을 따라가며 읽다 보면 옛글 읽기의 즐거움과 옛글을 읽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맹물과 같이 심심하고 냉담하다는 옛글에 담긴 사람의 따스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번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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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노루귀, 노루귀'


네가 불러서 온거야~^^

몆번의 헛걸음에 부를 때까지 기다리자고 애써 다짐 했다.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란걸 이니까.

 

조금 이른 퇴근에 널 볼 수도 있을 것 같아 무작정 숲으로 들어섰다.

눈을 크게 뜨고도 만나지 못하다가 오늘도 아닌가 보다 하고 돌아서는 순간

ᆢ널 본 것이다.그것도 쌍으로 본다. 네가 불러서 온 거야~^^

 

네가 눈에 들어오고 나니

이곳 저곳에서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건네는 친구들을 볼 수 있었다.

아직은 수줍은 새색시 마냥 어설픈 미소뿐이지만 이렇게 만났으니

이 봄 내내 함께 하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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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5-02-26 1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이든 꽃이든 보고싶었던 대상을 보는 순간은 화한 기쁨입니다. 더군다나 기대하지 않고 만나는 것은. 제목에 쓰신 것처럼 그 대상이 불렀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신기한 순간입니다.(2015년 2월 24일 오후 *시, 내가 너를 만난 순간. . ㅋㅋ^^;)
가끔 빛이란 오묘한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예전에 천일홍을 사진으로 찍은 적이 있었는데요, 눈으로 볼 때는 분명 붉은 빛에 가까운 자주색이었는데, 사진으로 찍어보니 청색 비슷하게 나오더라구요. 사진은 세상의 빛을 거울처럼 그대로 재현한다고 여겨왔었는데,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구나 했더랬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최고의 사진기는 `눈`이라는 걸 새삼 느꼈구요.
청노루귀처럼 살짝 벌어진 봄이 점점 다가오는 날입니다^^

무진無盡 2015-02-26 16:49   좋아요 0 | URL
오늘쯤 그곳에 가면 청노루귀가 환한 미소로 반겨줄거고 새로운 벗들도 얼굴을 내밀었을 것인데ᆢ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나비종 2015-02-26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작은 야생화를 볼 때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떠올립니다. 허리를 굽히고 바라보면서 역시 겸손해야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접할 수 있구나 하구요.
봄의 대지가 가진 진가 중 하나는 평범하고 작은 야생화를 온 세상이 빛나도록 뿜어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송이 꽃으로도 두근거리는 심장 역시 빛나보이게 만들어주는.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김경주 지음 / 열림원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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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희곡이다. 연극의 무대에 올리고자 만들어진 극 대본이라는 소리다. ‘창문을 열어다오라고 외치던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 이야기도 시극이었다. 원래 시와 극은 하나였고, 시인은 곧 극작가였다. 이처럼 문학의 시작은 시와 극이 결합된 장르로 출발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요즈음엔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부분이 되었다.

 

김경주의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는 시극이다. “시극은 대사가 시의 형태로 쓰인 희곡을 말하는데, 산문적 구조를 갖고 있지만 각각의 글에 라임과 운율이 살아 있는 문학적 장르이다.” ‘희곡이 요즈음 접하기 어려운 분야가 된 것처럼 시극은 생소한 분야다. 그만큼 접할 기회가 없었다는 말이다.

 

희곡을 읽어가며 무대의 장면을 상상하듯 시극 또한 같은 방식으로 읽어 가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시극이라서 더 간단한 대사가 상징하고 있는 의미를 심사숙고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내용을 따라가기엔 어렵지 않다.

 

눈 내리는 밤, 버려진 바닷가의 작은 파출소. 김 씨와 파출소 직원, 사내가 등장인물이다. 내용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현재인지 과거인지도 모호하고 산 사람인지 죽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가장 편하게 들어오는 장면들만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감정의 흐름이 버겁다. 책의 제목 내가 가장 아름다웠을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에서 이미 짐작하듯 밝고 따뜻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이 제목을 차용한 것이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에서 장만옥이 흘러간 사랑을 회상하며 읊었던 대사라고 하니 그 감정과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으로 공감대를 만들어 가본다.

 

화양연화(花樣年華),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것은 없다. 결국 사랑이다. 사랑을 찾을 수 없는 밑바닥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을 만난다는 것이다. 무엇으로 만날까? “누구의 것이든 눈물은 따뜻하답니다. 사람은 바닥에 닿으면 그때서야 자신의 가슴이 가장 따뜻하다는 걸 배우죠.”눈물이 흐를 수 있는 상태로 만난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름다운 본질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가 된 이야기가 원 제목이라는데 어떤 특별한 이야기가 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삶이 시일 것이기에 우리들의 이야기도 시가 될 것이다.

 

보통의 경우 분문이 어려울 때나 더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 작품해설을 봅니다. 이 작품의 경우는 해설이 작품보다 더 난해합니다. 작품해설이 또 다른 창작이긴 하겠지만 일차적으로는 작품에 종속된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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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5-02-27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번이나 며칠의 시간을 두고 리뷰를 읽었습니다. 시극이라는 장르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동사서독`과 `화양연화`라는 영화도 검색해보았구요. 그런데도 이 포스트에 무슨 댓글을 달아야 할 지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겨우 제목만을 깊이 생각해봅니다. `사랑`이 주는 의미가 무얼까 하구요. 잘은 모르지만, 사랑은, 마지막에 아름답게 피어난 꽃이 아니라 꽃을 피우기까지의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비, 바람, 땀, 햇빛 같은 것들이 꽃에게 있어서는 사랑이 아닐까 하구요. 그의 소임을 다한 것으로 이미 충분하므로 이제 조용히 물러나는. 그래서 가장 아름다웠을 때 곁에 사랑하는 이가 없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