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물빛에 핀

꽃이

좋아

돌아갈 수 없네

 

   

북산 김수철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번잡한 도시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가 보다. 경치 좋은 자연에 터를 잡고 시간에 따라 자연의 변화를 실감하면서 살고자 하는 것이 소망처럼 되어버린 현대 사회에서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한다. 요즘 내가 사는 곳에는 아침 안개가 자욱한 것으로 가을이 깊어 감을 알게 된다. 햇살이 번지면서 사라지는 안개를 보며 우리 사람들의 삶 또한 시간 앞에서 안개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김수철의 하경산수도깨끗하고 밋밋하고 슴슴하다라고 본 오주석의 말을 넘어서는 표현을 찾기 힘들 정도다. 시골마을의 넉넉한 여름 풍경이 그대로 담겨 있다. 딱히 시선을 붙잡는 곳 없이 시원하기만 하다. 다만, 바위의 덩치에 사람 사는 곳이 눌린 느낌이 들뿐 그것마저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몇 번이나 낚시가 물려 돌아갈까 생각했지만(幾回倦釣思歸去)

이번엔 또 물풀에 핀 꽃이 좋아 한 해를 더 머물겠네(又爲 花住一年)

 

참 세상에 이런 핑계가 있다. 서재 창틈으로 엿보이는 글 읽은 선배가 이따금 시골생활을 무료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올해는 대처로 돌아갈까 생각을 했지만 이번에 그만 물풀에 핀 꽃에 마음을 뺏겼단다. 이게 턱없는 소리라는 걸 누가 모르겠는가? 건너편 갈대숲이 강바람에 나부끼는 소리며, 집을 둘러싼 교목이 드리우는 넉넉한 그늘, 그리고 아침 저녁 아련하게 들리는 뱃노래 가락에 속병이 단단히 든 인물이 아니란 말인가?”

 

제시를 보는 오주석의 이야기 그대로다. 하지만, 핑계는 사람의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 아니겠는가? 딱히 이유를 댈 수 없는 것도 이런저런 핑계 삼기에 좋은 것이 주변에 마음 붙잡는 자연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저 먼 산 바라보며 마음 다독이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기에 말이다.

 

*북산 김수철은 생몰을 알 수 없지만 19세기에 활동한 화가다. 산수와 화훼를 잘 그렸다고 한다. 조선시대 화가들 중 비교적 늦게 알려진 인물이라고 한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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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의 품격 - 조선 지식인 문화의 정수, 한시 이야기
김풍기 지음 / 창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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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삶을 담은 한시(漢詩)

()가 일상에서 얼마나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올까? 특별히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현대인들이 시를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왜 그럴까? 시가 담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성찰하여 시인만의 언어로 표현된 시가 사람들의 일상에서 멀어진 이유가 무엇일까?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사라진 것이 원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들의 일상을 차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삶이 자신을 돌아볼 기회조차 빼앗겨버린 탓으로 돌리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한시 작품을 남겼던 옛 선비들에게 시란 어떤 의미였을까? 조선을 살았던 선비들의 일상은 시, , 화를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가 시를 짓고 글씨를 쓰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선비 된 사람으로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풍습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또한 선비 된 자의 사회적 의무가 관료로 진출해 뜻한 바를 펼치는 것이었던 시대에 시를 짓는 능력은 필수조건이었다.

 

조선을 이끌어온 한 축인 선비들을 웃고 울게 했던 시는 당연히 한시였다. 이런 한시가 한자가 일상에서 멀어지면서 동시에 한시도 멀어졌다. 그렇지만 조선 선비들에게 한시는 출세의 도구이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기회로 삼았기에 한시에 담긴 옛 선비들의 정서와 뜻은 살아남아 온전히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 한시를 보다 가깝게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김풍기의 한시의 품격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 주류 문화인 한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그 속에서 조선 지식인 사회와 문화를 읽어낸다. 한시를 매개로한 당시 사회적 환경을 읽고 있다. 한시를 공유하며 한시를 매개로 교류했던 사대부를 비롯한 승려, 중인들의 교류 속에서 당시 살았던 선조들의 삶의 풍경을 살핀다. 한시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시마와 같은 말이 등장했을까? 또한 옛것을 인용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던 문화에서 표절의 경계는 어디까지인지, 자존심을 건 문인들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게 전개되었는지, 날선 비평의 세계에서 한시가 어떻게 살아남아 전해지는지 등 조선 지식인 문화의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를 서슴없이 들춘다.

 

한편의 시가 갖는 힘은 실로 막강했다.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에서 그 신분제도를 무력화 시기도 했고, 권력의 길로 나아가는 과거시험의 당락을 결정지으며 술한잔에 밥까지 공짜로 얻어먹을 수 있는 호구책이 되기도 했다. 이런 시에 대한 당시 지식인이었던 선비들의 열망을 짐작을 넘어선 자리를 차지한다고 봐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한시를 두고 선비들이 느꼈던 희노애락을 살펴 한시의 존재가치를 드러내고 있다고 보인다.

 

일상에서 멀어진 한시에 대한 애정으로 한시를 다시 읽고 그 한시에 담긴 사람의 감성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책으로 반갑다. 한시의 창작 배경이나 한시를 누렸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시를 독자들에게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배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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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달을 보았는가

 

 
개기월식이라고 붉은 달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다. 늘 다른 모습의 달이지만 달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그 모습으로 있다. 다만, 눈에 보이는 것이 다른 달로 느끼게 할 뿐이다. 달에 주목하며 살아온 시간이 제법 된 나에게 달을 담은 그림 하나가 언제나 머릿속에 있다. 깊어가는 가을 밤 아주 잘 어울리는 그림이다.

이 그림을 떠올리게 된 계기가 있다. 이른 퇴근으로 억새 사이로 반짝이는 석양을 바라보다 익숙한 무엇이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분명 비슷한 이미지를 어딘가에서 봤는데...잠시 후 김홍도의 그림 한 점이 오버랩 되었다.

‘소림명월도’ 우리가 익히 아는 조선 후기 화가 단원 김홍도의 그림이다. 풍속화가로 인식된 측면이 강하지만 산수, 인물, 화조, 시 등 다양한 부분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이 ‘소림명월도’를 김홍도의 작품이라고 하면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흔하게 보이는 풍경이고 눈을 사로잡을만한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강한 끌림이 있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을 보고 있는 듯 현장감이 살아있다. 겹쳐진 나뭇가지 사이로 달이 가려져 있지만 그 존재가 확실히 드러난다. 조선시대 유명했던 산수화, 진경산수와는 다른 맛이 분명하다. 일상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으나 일상에서 느끼는 평범함 보다는 달과 나뭇가지들이 품어내는 아우리가 심상치 않다. 익숙하지만 그 익숙함을 넘어선 경지가 있다.
 
살아 당시 이미 절정기에 이르고 왕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화가 김홍도에게는 자신을 거듭나게 할 무엇이 필요했을까? 추운 겨울을 대비하여 자신을 돌아보는 계절이 가을이다. 자연뿐 아니라 사람도 이와 닮았다. 유독 가을을 건너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말없이 더 튼 울림으로 전달되는 성찰의 이미지가 전해진다.

김홍도를 김홍도답게 알게 하는 가장 어울리는 그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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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 나는 그들의 비밀을 알고 있다
이재운 지음 / 책이있는마을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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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믿지 말라

권력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 한 나라의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의 생각은 그 나라 온 국민의 일상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정치가 일상과는 멀어져 보이지만 숨 쉬는 것 빼고 하루를 살아가는 전 과정에서 정치와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숨 쉬는 것조차 정치와 관련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일상에서 그것을 느끼며 정치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간극이 정치가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이나 개인의 사익을 추구하는 바탕이 아닌가 싶다.

 

오늘날 대통령을 중심으로 정치가들이 보여주는 모습에서 권력의 근거가 되는 국민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국민의 일상이나 삶에는 관심 없고 권력의 유지나 집권을 위한 그들의 밥그릇 싸움 말고는 보이지 않으니 한심하기만 하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면에는 그들을 뽑은 국민들의 선택도 반성해아 할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권력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의 역사와 그 시간을 함께해 온 것이기에 우리 역사에서도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역사적 사실로 꼽을 수 있은 것이 조선사의 얼룩을 만들었던 당쟁이 아닐까 한다. 특히, 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사건을 보면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없다는 권력의 속성을 여실히 볼 수 있다.

 

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야기는 다양한 장르에서 다뤄져왔다. 하지만, 각기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여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한 문제제기만 있을 뿐 이렇다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미흡한 것이 아닌가도 싶다. 사도세자의 사건을 바라보는 눈은 노론응 중심으로 하는 그동안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이재운의 사도사제는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역시 자신만의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고 했다. 이는 자신의 가문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기존 노론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소론 온건파의 시각에서 살핀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조선의 당파는 동인과 서인, 그리고 서인에서 확장된 노론 소론 등으로 깊이와 무게를 더하며 갈라져 왔고 이 과정에서 당파의 권력을 잡기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며 심지어 왕도 바꾸는 일이 일어났다. 왕권이 약했던 왕은 그들의 세력에 의해 독살을 당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으니 얼마나 치열한 권력 싸움이었는지 잠작도 못할 정도다.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 역시 경종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이들 당파와 무관하지 않게 왕위 올라 그들의 지지 없이는 왕의 자리조차 위협받을 지경이었다. 이런 힘의 역학관계에 의해 희생된 비운의 왕세자가 바로 사도세자라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당파와는 상관없이 유지된 시각이다.

 

여기에 이재운 작가는 노론의 시각으로만 이야기되어온 그동안의 시각에서 소론 그것도 온건파의 시각으로 사도세자 문제를 살핀다. 이는 권력의 싸움에서 밀려나 일정정도 거리르 유지한 사람들의 시각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점은 있다. 하지만, 작가 이재운이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그동안 회자된 당파싸움이나 영조의 이야기 등을 지나치게 반복하고 있고 실질적인 시도세자의 이야기는 뒷부분에 극히 짧은 분량만을 할애하여 당파싸움의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도 내명부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라 텔레비전 역사 드라마의 흥밋거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한계를 노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될 정도다. 특히, 사족과도 같은 자신의 가문이야기를 중간 중간에 끼어 넣어 소설적 흥미도 반감시키고 있다. 뛰어난 성군의 자질을 가진 이미지와 정신병자의 이중적 모습에서 벗어나 사도세자의 진면목을 찾아간다는 출발점에 부합하지 못한 이야기 전개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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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야묘도추도(野猫盜雛圖)’

 

 

어이할꼬!

도둑고양이 잡으려다

우리 영감 먼저 잡겠소

 

그림이든 사진이든 순간의 포착이 생동감으로 살아나게 마련이다. 한가로웠을 한낮의 어느 시골집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혼비백산이다. 도망가고 쫓아가고 넘어지고 따라가는 장면을 기가 막히게 포착하고 화폭에 담았다.

 

야묘도추도’(野猫盜雛圖)'들고양이(야묘)가 병아리() 훔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김홍도, 신윤복과 함께 조선시대 3대 풍속화가로 불린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이 그렸다. 긍재 전신첩에 실려 있는 그림으로 종이에 수묵 담채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시골집에 한번은 봤을 것만 같은 장면이라 친근감이 앞선다. 고양이, 어미닭, 병아리의 움직임도 생동감 있지만 무엇보다 남자의 품이 그럴 듯하다. 탕건이 벗겨지는 것도 마루에서 넘어지는 것도 아랑곳없이 들고양이에게로 모든 관심이 쏠려 있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그림에서 오주석은 이 장면의 압권으로 마나님을 주목한다. 병아리쯤이야 별거 아닌데 귀하디귀한 서방님이 다칠세라 야단이다. "어이할꼬! 도둑고양이 잡으려다 우리 영감 먼저 잡겠쏘!!!"

 

주제가 요란하다 보니 그림의 구성요소들도 어디라 초점이 없이 화폭 전체에 널브러져 있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보면 구도가 치밀하기 그지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흐르는 시선이다. 뜰이 살구나무 가지도 이 방향으로 뻗어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시선은 바로 마나님은 영감을 보고, 영감 앞에는 암탉이 있고, 암탉은 다시 들고양이를 쫓고, 고양이는 영감을 놀리듯 뒤돌아본다. 떨어지는 탕건조차 이 중심선 위에 놓여 있다.”

 

야묘도추도를 통해 오주석이 본 김득신은 맺힌 데 없이 쓱쓱 그어댄 붓질로 생동감을 살렸고, 특히 잔가지를 바깥에서 안쪽으로 툭툭 쳐 넣어 봄날의 움트는 생명력을 시사한 솜씨가 단원 김홍도와 어금버금하다고 평한다.

 

그림을 읽어가는 맛은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은 자신의 감정일 것이다. 그 모든 구성요소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그 그림만의 감성이 자신과 만나 공감을 일으키는 지점이 그림을 보는 멋과 맛의 절정이 아닌가 싶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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