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기장 이야기
송영애 지음 / 채륜서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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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맛과 멋을 찾아서

가마니, 절구, 새우젓 독, 바가지, 멍석, 신선로, 쌀뒤주, 제기, , 떡살, 옹기, 칠기, 고리, 구절판, 조리, 식칼, 가마솥, 도마, 술잔, 돌확, 수저, 채반, 맷돌, 소쿠리와 광주리, 밥상보, 주령구, ··저울, 막사발, 소반, 유기, 밥그릇, 찬장과 찬탁

 

하나 둘 이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그리 멀지 않은 시간 속에서는 분명하게 살아 우리의 일상과 함께한 물건들이다. 이들 중에는 여전히 우리의 식생활에 유용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이름마저 생소한 것들도 있다. 물론 나이 50을 넘긴 내 또래들에게는 거의 모두를 기억하는 공감대가 있을 것이다.

 

음식을 만들고 나눠 먹는 문화가 변하면서 일상적인 식생활 문화도 변했다. 먹는 문화의 변화는 많은 부분에서 동반된 변화를 초래하거나 역으로 살아가는 일상의 변화가 식생활의 변화를 이끌기도 한다. 이런 상호 작용에 의해 오늘날 우리들의 식생활 문화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 과정에서 위에서 언급한 도구들은 이제 장식용품으로 전락하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잊혀져가는 식도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 송영애의 식기장 이야기. 식기장은 식기를 넣어두는 장으로 그 장 속에 들어갈 만한 도구에서부터 음식을 만들 때 사용되는 갖가지 도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옛 어머니들이 식기를 모아 보관했던 식기장처럼 이 책에서의 식기장은 바로 그런 식기들의 이야기를 모아 둔 곳으로써 의믿 함께하고 있어 보인다.

 

누군가에게는 식도구가 단순한 음식을 조리하기 위한 도구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자부심이다. 떡살은 남한테 빌려주지 않는 집안의 권력이었다. 특히나 우리나라 식도구들은 유난히 시집살이와 관련이 많다. 며느리들은 친정과의 인연을 끊고 모진 시집살이를 견디라는 의미에서 칼과 도마를 받았다. 시집온 이후에는 친정아버지에게서 선물 받은 돌확에 서러움도 같이 갈았다.”

 

저자가 펼쳐가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김없이 도착하는 곳이 있다. 바로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의 밥상이다. 그 밥상에 밥을 비롯하여 음식을 올리던 사람들의 삶과 마음까지 고스란이 담았다. 발품 팔아 돌아다니며 만난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남은 흔적인 도구들에서 건져 올린 사람 사는 이야기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 역사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지역과 남녀를 뛰어넘어 결국은 옜 기억 속 어머니의 그 밥상으로 불러 모은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종가(宗家)전시가 열렸다. 웬일인지 운조루 쌀뒤주는 보이지 않았다. ‘쌀뒤주는 빌려주는 물건이 아니다, 전시하는 석 달 동안 쌀뒤주를 밖으로 내놓을 수도 없다, 운조루 쌀뒤주는 예전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집안 종부의 의지 때문이었다.”

 

음식을 대하는 옛 사람의 마음을 이보다 더 간절하게 담은 말이 있을까 싶다. 쌀뒤주에 담은 마음이 곧 밥과 사람의 관계, 그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마음이 곧 우리들이 보고 자랐던 음식문화였고 우리의 삶을 지켜준 정신이었다고 본다.

 

가만히 있어도 멋이 있고 바라만 봐도 낭만이 있고 만지기만 해도 그리움이 있는 서른둘의 식도구들을 찾아서 담아온 저자의 노고가 넉넉하고 따스한 이야기와 사진 속에서 빛나고 있다. 그 수고로움에 의해 우리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 멋과 맛의 본래 자리를 찾아가는 시간을 갖기에 충분하다.

 

생활의 변화는 그 생활을 유지시켜주는 환경과 조건의 변화와 직결된다. 이제는 사라져 가는 우리의 음식문화 속에 자리 잡았던 식도구들 역시 새로운 운명 속에서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그렇더라도 우리의 조상들의 삶의 정신이 담겨 있는 그 뜻만이라도 이어갈 수 있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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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쾌한 선들을

관통하는

고매한 기상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 달마도(達磨圖)

조선 17세기 중반, 종이에 수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윽한 눈매가 심상치 않다. 억센 매부리코, 풍성한 눈썹과 콧수염, 꽉 다문 입, 턱선 따라 억세게 뻗쳐 나간 구레나룻까지 옅은 색으로 얼굴을 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매에서 전해지는 묘한 느낌은 진한 먹색으로 굵고 빠른 붓놀림으로 그려진 옷에 의해 형성된 몸의 이미지 전체를 규정하기에 충분하다. 옷을 그린 외곽의 강한 선들에 의해 오히려 얼굴에 주목하게 되며 표정에서 전해지는 느낌을 온전히 받아 안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그림은 연담 김명국이 그린 달마도다. 조선 인조 때인 1636년 일본으로 가는 조선통신사의 수행화원으로 1636년과 16432차례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일본에서 그렸던 수많은 달마도 중 하나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구입하여 국내로 들어오게 된 그림이라고 한다.

 

달마는 인도스님이다. 염화미소의 가섭 이래 제28대 조사(祖師). 중국으로 건너와 '마음으로 마음을 전한다'는 선종의 가르침을 최초로 펼친 중국 선()의 제1대 조사가 되었다. 그는 9년 동안이나 벽을 마주하고 수련했다고 전해진다.

 

달마도를 보면 달마를 알 수 있다. 거침이 없고 군더더기가 없다. 본질이 아닌, 바탕이 아닌 온갖 부차적인 껍데기들을 모조리 떨구어 낸 순수 형상이다.” 그렇기에 극도로 단순화한 달마의 모습에서 달마가 지향했던 선()의 한 면모를 담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 또는 鳴國(1600~1662년 이후)은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도화서 화원. 술에 취하여 붓을 든다고 해서 취옹(醉翁)이란 호도 있다. 연담은 선종화禪宗畵 특히 사진에서 보는 달마도達磨圖를 잘 그렸다. 조선 후기의 미술평론가인 남태응은 그의 청죽화사(聽竹畵史)’에서 "김명국 앞에도 없고 김명국 뒤에도 없는 오직 김명국 한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라고 평하였다. 작품으로 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 심산행려도(深山行旅圖), 노엽달마도(蘆葉達磨圖), 기려도(騎驢圖), 관폭도(觀瀑圖) 등이 있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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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룡과 골목길 친구들 - 조선 후기 천재 여항인들의 초상
설흔 지음 / 한국고전번역원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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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외기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여항인들의 삶

, 정조 시대를 중심으로 한 조선 후기는 기존 양반 중심의 획일적인 사상, 문화일변도에서 벗어나 북학파와 같은 실학자 층이나 여항인들처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사회의 중심부로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학문과 사상분야에서 홍대용을 중심으로 한 북학파가 있었다면 시, , 화를 통한 문화의 중심에는 조희룡을 중심으로 한 여항인들이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은 매화 그림으로 유명하지만 그림뿐 아니라 글로도 이름을 떨친 사람이며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당시 여항인들의 대표적인 시사 모임인 벽오사(碧梧社)의 중심인물이었으며 그 여항인들을 기록한 호산외기의 자자이기도 하다. 또한 그 당시 사대의 아이콘이기도 했던 김정희의 제자라고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김정희와의 관계가 일방적인 가르침을 받는 제자라기보다는 여항인들의 대표로 특별한 감식안을 가진 김정희의 평을 받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조희룡이 기록한 호산외기는 조선 후기 여항인 42인의 전기집이다. 각각의 인물의 행적을 기록하고, 편마다 호산외사, 즉 조희룡이 짤막한 논평을 덧붙인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여항(閭巷)은 원래 꼬불꼬불한 골목이란 뜻으로, 조선 후기 문헌에 의하면 서울의 비양반 계층의 생활공간을 의미한다. 이곳에 살았던 여항인들은 신분제 사회에서 능력이 있어도 높은 관직에는 오를 수 없었던 인물들이다. 그들은 문학과 예술 방면에 힘을 쏟았고, 그것으로써 자신들이 가진 재능을 펼치고, 자아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조희룡 역시 여항인이었고, 그런 그가 자기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호산외기이다. ‘호산외기에서 이향견문록’, ‘희조일사’, ‘일사유사로 이어지는 일련의 기록에서 주목했던 여항의 문인, 예술가의 삶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예술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설흔의 조희룡과 골목길 친구들은 바로 조희룡의 호산외기에서 14인을 선별하여 조희룡과 벗이 대화를 통해 그들의 삶에 주목한 이유를 찾아나가는 형식으로 구성된 이야기책이다. “제 눈을 스스로 찔러버린 화가 최북, 바둑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김종귀, 연못에 쌀뜨물을 붓고 달을 감상한 임희지, 시에 목숨을 걸었던 김양원, 필법만큼 인품도 높았던 김홍도, 나라 밖까지 소문난 역관 시인 이언진, 천재적인 재능을 펴지 못한 채 요절한 전기 등에 대해 벗과 나눈 이야기 속 중심은 여항인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 읽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쓸어 버리고, 엎어 버리고, 던져 버렸다이는 설흔이 호산외기를 통해 보았던 여항인들의 삶을 정리한 문장으로 봐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분명, 양반 사대부 중심의 사회에서 갇혀 살았지만 자신들의 삶을 구속한 한계를 벗어버린 사람들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주목한 것은 조희룡이 여항인들의 삶을 전기로 기록한 마음이나 설흔이 그들의 삶을 통해 읽어낸 마음이 공감대를 형성하여 통했다는 점이다.

 

설흔은 호산외기를 읽으며 그 글 속에 미처 담지 못했던 이야기가 무엇일까에 주목했다. 바로 행간 읽기. ‘조희룡과 골목길 친구들역시 그의 전작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추사의 마지막 편지, 나를 닮고 싶은 너에게등과 같은 맥락의 작품이다. 행간을 통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속마음을 헤아려 보고 기록으로는 마처 다 담지 못했던 무엇을 찾아내 새롭게 인물 탐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식은 인물들의 남다른 행적 뒤에 감춰진 고뇌와 좌절, 포부 등을 다양한 관점에서 살피고 풀어냄으로써, 그들의 고민을 지금 독자가 함께 공감하고, 나의 문제로 돌이켜 볼 수 있도록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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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개의 바위

다투어

빼어나고

만 줄기 계곡물

뒤질세라

내닫는데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 만폭동도(萬瀑洞圖)

조선 18세기 중반, 비단에 수묵담채

 

예 구부러진 늙은 장송 광풍(狂風)을 못 이겨 우줄우줄 춤을 출 제 / 원산(遠山)은 암암(暗暗) 근산(近山)은 중중(重重) 기암은 층층 매산(每山)이 울어 천리 / 시내는 청산으로 돌고 이 골 물이 쭈루룩 저 골 물이 콸콸, 열의 열두 골 물이 한데 합수(合水)쳐 천방저 지방저 월특저 방울저 방울이 버큼저 / 건너 병풍석(屛風石)에다 마주 꽝꽝 때려 산이 울렁거려 떠나간다

 

오주석은 이 그림 속에서 판소리 수중가의 중중모리 고고천변인데 자라가 뭍에 올라 난생처음 명산구경하는 대목을 떠올린다고 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시원스런 물소리가 울려 가슴을 두드리는 듯하다. 계곡과 나무 그리고 물의 흐름이 어우러진 소리가 어우러져 음악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저 자연 속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보이는 것처럼 생생한 소리로 들린다.

 

천 개의 바윗돌 다투어 빼어나고, 만 줄기 계곡 물 뒤질세라 내닫는데, 초목이 그 위를 덮고 우거지니, 구름이 일고 아지랑이 자욱하네(千巖競秀 萬壑爭流 艸木蒙籠上 若雲興霞蔚)”

 

화제 역시 그림과 썩 잘 어울린다. 내용도 그렇지만 글씨모양도 그림과 하나 되어 울림을 전해준다. 중국 명산을 읊었던 고개지(顧愷之)의 시임에도 이곳에 더 걸맞다는 오주석의 해설을 따라갈 수밖에 도리가 없다. 이곳 너럭바위에 세겨진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글씨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嶽 元化洞天)’로 금강산은 신선이 사는 산이며 조물주의 별천지지 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만폭동은 내금강(內金剛)에 이르는 넓고 큰 동구(洞口)이다. 금강산 여행길에 오른 일행은 내금강 입구인 만폭동에 올라 멀리 금강산을 바라보며 한없는 기쁨에 젖어 있다. 녹음 우거진 계절에 물소리조차 우렁차게 들려 그 심정을 돋구어 주기에 충분하다. , 동자를 대리고 일행과 함께 만폭동 너럭바위에 올라 멀리 바라다 보이는 곳을 손으로 가리키는 사람이 정선 본인은 아닌지...

 

정선(鄭敾, 1676~1759)은 영조 때의 화원으로 활약하면서 조선시대 화가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호는 난곡(蘭谷), 겸재(謙齋).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완성하고 성행시켰다. ‘금강전도’, ‘인왕제색도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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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집
송영화 지음 / 에세이스트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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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은 마음을 움직인다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가장 쉽게 도전하는 분야가 수필이 아닌가 한다. 형식이나 내용에 구애됨이 없이 솔직한 자신의 경험을 글로 옮기면 된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오로지 자신의 글을 써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가슴 타게 하는 일인지 말이다. 만만하게 봤던 수필에 뜨거운 맛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글쓰기의 어려움을 실감하게 된다. 수필 쓰기의 어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잘 써진 수필을 접하고 나서 그만큼 쓸 자신이 없을 때가 바로 그때다.

 

모든 글쓰기의 완성은 수필로 모아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의미는 글쓴이의 솔직한 내면의 반영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자신의 은밀한 부분까지 진솔하게 그려낼 수 있을 때 그 글이 가지는 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도 싶다. 짧지만 마음을 울리는 좋은 글 한편을 대하는 날 마치 그리웠던 님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는 것처럼 말리다.

 

송영화의 수필집 반집이 그렇다. 미사어구를 사용하거나 애써 꾸미지 않고서도 자신의 심정을 적절하게 전달하면서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을 불러오는 글쓰기다. 몰래 나선 여행, 오월, 그 푸름, X맨 명단, 오늘도 인샬라, 수라니말을 탓하면서도 등 총 5부로 구성된 반집에는 엄마로 딸로 어엿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그리고 문인으로써 자신이 일상에서 직접 겪고 느낀 일에 대한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특히, 수필집의 제목을 선정하는데 주요한 글이 되는 몰래 나선 여행7살 어린 아들이 바둑에 입문하고 장장 12년 동안 바둑 안에서 생활하며 프로바둑기사에 입눈하게 되는 과정을 그려가고 있다. 나약하지만 한 아들이 어느 날 바둑을 배우고 싶다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에 감동하여 바둑을 시작한 이래 입단하는 날까지 아들과 함께한 엄마의 마음이 담겨 있다.

 

야야, 백 집으로 이기나 반집으로 이기나 이기는 건 마찬가진데 뭐 할라고 자꾸 욕심을 부리노?”

 

철저히 승부를 가리는 것이 바둑이다. 그래서 반집이라는 말이 생겼을 것이다. 한집도 아니고 반집이라는 그 차이까지를 가르고 나서야 승부를 판가름할 수 있는 접전이었다면 이긴 자나 진 자나 실력은 거기서 거기일 것이지만 그 반집 때문이 승패가 갈리고 운명이 바뀐다. 그런 바둑의 세계에서 프로기사가 되기까지 바둑 하는 아이를 위해 이사도 하고 전국을 따라다니면서 뒷바라지 한 엄마의 마음은 그 반집 차이의 승부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마음이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이렇듯 송영화 수필집반집에 담긴 이야기들은 그렇게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겪었던 일들에 대한 감회가 서려있다. 저자의 어린 시절을 엿볼 수 있는 할머니와의 생활부분 역시 마찬가지다. 골무에 담긴 할머니의 마음씀씀이를 훗날이 되어서야 짐작할 수 있는 것이 되듯 나이를 들어가며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어떻게 달라져 오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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