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 포에버
구자형 지음 / 박하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왜 여전히, 그가 이토록 그리운 걸까

애써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늘 곁에 머무는 사람처럼 언제라도 부르면 데답할 것 같이 너무도 가깝게 기억되는 사람이 있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몇 십 가지라도 나열할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기에 그냥...이라 이름 붙여본다.

 

김광석을 기억하는 나만의 방법이다. 같은 시대를 살았으며 그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에 반응하는 방법은 달라도 지향점이 같은 사람들 틈에서 살았기에 자연스럽게 젖어드는 공감이 있다. 하여 그가 불렀던 모든 노래에서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보았고 그렇게 그의 노래 속에서 살았다.

 

80년대 중반 대학을 다니던 시절 유행했던 노래모음집이 있었다. 서울대 노래패가 만들었던 메아리가 그것이다. 노래를 통해 시대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 아픔의 해결을 모색하는 노래운동의 시작과 함께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던 때였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노래책이 아니었기에 복사본을 다시 복사하여 손에 들고 다녔던 책이다.

 

그 시대를 김광석은 두발로 걸으며 목소리에 담아 노래했다. 한창 절정의 노래를 보여주며 관객과 호응하던 중 세상을 등진 아쉬움이 크지만 그것만이 그를 기억하는 것의 전부는 아니다. 생전 그가 불렀던 노래 속에 담긴 그의 진정성이 살아남은 사람들의 지친 마음에 위안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80년대 중반이후 90년대까지의 한국 민중가요와 포크음악의 중심에 서 있던 김광석은 그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방송작가이자 음악평론가 구자형의 김광석 유고 19주기 기념작 김광석 포에버는 그렇게 김광석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아 그들이 기억하는 김광석을 되살리고 있다. 박기영, 안치환, 김창기, 김목경, 이상호, 김숙이, 백창우, 이동은, 이민영, 양병집, 김현성, 김보성, 김제섭, 임종진, 안규철, 박혜정, 임창덕, 류근... 음악동료, 작곡가, 선 후배, 노래비의 조각가 김광석 위패가 안치된 청광사 주지 광조 스님까지 김광석과 직 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었던 수많은 사람들과 김광석의 음악과 삶 속 기억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특히, 백창우에 의해 전해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199616일 새벽 4, 아무런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난 김광석을 그들은 기억하는 김광석에서 매번 새롭게 살아나는 김광석을 본다. 추모음악회, 뮤지컬, 방송프로그램에 등장을 하고, 온갖 영화와 드라마 속 노래 부르기 등 기억하는 방식을 각기 다르지만 그 다른 방식을 통해 노래에 담고자 했던 김광석의 마음이 전해지고 있다. 김광석이란 가객을 끝까지 오롯이 지켜주지 못하고 떠나게 만든 시대를, 세상을, 그리고 자신을 자책하며 부르는 진혼가다.

 

유난히 힘들었던 2014, 슬픔에 잠긴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노래하나 가진 것 없어서 더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김광석, 그의 노래를 듣고 싶은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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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5-01-30 2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냥. . ˝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어오는 날입니다. . 오랜만에 `서른즈음에`를 듣습니다. .참 아리게 맑은 노래네요. .

무진無盡 2015-01-30 20:54   좋아요 0 | URL
녜..그냥이요

[그장소] 2015-01-31 0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치지않은 편지.혼자남은 밤.타는 목마름으로.신청곡..요!^^
 

"하루

맑고

한가로우면

그 하루가

신선이라네"

 

 

소당(小塘) 이재관(李在寬, 1783~1838년 이후) 오수초족도(午睡初足圖)

조선 19세기 초반, 종이에 수묵 담채, 삼성미술관 리움

 

평상 위에 놓인 책 더미에 윗몸을 기대고 왼쪽 다리를 오른쪽 무릎에 걸친 채 나이 지긋한 선비 한 분이 깜빡 낮잠이 들었다. 오수삼매(午睡三昧). 적당한 볕에 살랑거리는 바람까지 그야말로 단잠이 될 것이다. 깊은 산 속 시골집이다. 마당에 낀 푸른 이끼를 보아 여간해서 찾아오는 손님이 없는 고요함과 한가로움, 느긋함과 편안함이 전부인 곳에서 책 읽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책을 읽다가 쏟아지는 졸음에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것이 그대로 잠이든 모습니다.

 

오수초족도(午睡初足圖)는 송나라의 당경(唐庚, 1071~1121)이란 사람의 글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그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산은 태고인 양 고요하고 / 해는 소년처럼 길기고 하다 / 내 집이 깊은 산 속에 있어 / 매양 봄이 가고 여름이 올 때면 / 푸른 이끼는 섬돌에 차오르고 / 떨어진 꽃이파리 길바닥에 가득하네 / 문에는 두드리는 소리 없고 / 솔 그늘은 들쭉날쭉하니 / 새 소리 오르내릴 제 / 낮잠이 막 깊이 드네."

 

많은 옛 선비들이 꿈꿨던 삶이 아니던가. 자연 속 소나무와 학이 어우러지는 풍경 속에서 책 읽고 시 쓰는 선비의 일상에 차 한 모금은 그 무슨 호사도 아니리라. 속세를 벗어나 자연의 품속에서 은일의 삶을 누리고 싶은 선비의 마음이 가득하다. 그렇다고 모두가 속세를 벗어나 그림 속의 선비처럼 살 수는 없다. 하여, 이루지 못한 마음을 담아 그림으로라도 그 삶의 맛과 멋을 간직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새 소리 오르락내리락하는 중에 낮잠이 막 깊이 든(금성상하禽聲上下 오수초족午睡初足)” 모양이다. 화제 끝에 찍은 인장은 "필하무일점진(筆下無一點塵)"이다. "붓 아래 세속의 띠끌 한 점도 없다." 하루 맑고 한가로우면 그 하루가 신선이니까.

 

이재관(李在寬, 1783~1838년 이후)의 호는 소당(小塘)으로 작은 연못이라는 뜻이다. 태조 어진을 복원해 감목관(監牧官)을 지냈다. 산수, 인물, 영모, 초상에 모두 능했고 남종화법의 문인화를 즐겨 그렸다. 그의 산수 인물화는 소재와 분위기 등에 있어 이인상(1710~1760)과 윤제홍(1764~?)의 영향을 받았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대담하고 시원스럽다. 수묵은 묵직하고 투박한 듯 하지만 깨끗하고 맑은 담체를 곁들여 여유롭고 높은 정신의 세계를 잘 구현해 냈다. 일본인들이 좋아해 매년 부산에 들어와 작품을 사 갔다고 한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월간미술, 2009)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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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5-02-04 15: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후감상화네요. 보기만 해도 여백의 삶이 그려내는 풍경이 부럽습니다. 점점 치열해지는 삶 속에서 가끔은 쉼표처럼 그려지는 시간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려면 욕심부리고 움켜쥐고 있는 많은 것들을 하나 둘씩 버려야겠죠? 사실 제 한 몸 살아가기에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거늘. . .
(이 와중에 저 인간의 신발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며. . ㅎ)

무진無盡 2015-02-04 20:50   좋아요 0 | URL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는...
(그러게요..잠에서 깬 것도 아니고 어디 갈 곳도 없는데 신발이 안중에나 있을까요? ㅎㅎ)

나비종 2015-02-04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 마음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주인이 맨날 일만 시킨다고 저 동자승필 나는 아이가 감췄거나, 아님 아궁이에 넣고 불 때는 중인지도. . 부채들고 눈치보는 중ㅎㅎ)

무진無盡 2015-02-04 21:16   좋아요 0 | URL
그 마음 달리 먹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
(여기도 갑을관계? ㅎ)

나비종 2015-02-04 2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장 바뀌기 어려운 것이 사람 마음인 것 같아요. 그러다가도 순식간에 바뀌기도 하구요.^^
(이런. . 그럼 이건 역사적인 관점이 도입되는 건가요? 낮잠자는 저 노인 중심으로 서술된 제목하며ㅋㅋ 구석에서 열라 일하는 저 아이는 그저 새들과 함께 배경화되어. .)
 
조선상고사, 국사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 역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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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가 아는 역사가 얼마나 진실일까?

역사에 관심을 갖고 독학(?)해온지 제법 시간이 흘렀다. 관심 분야의 책을 접하고 저자를 따라가며 하나 둘 알가는 사이에 똑 같은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바로 내가 알고 있는 역사가 진실일까? 하는 질문이다. 주요 관심분야가 조선사에 편중되기는 하지만 그 조선사는 우리의 역사 중에서 비교적 기록이 많이 남아 있어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도 같은 질문이 떠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그보다 오래전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어떨까? 특히 고대사 영역에 해당하는 역사에 대한 기록의 진실성 여부는 우리민족의 시원의 관한 문제이기에 그 중요성은 더 높다고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아갈수록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는 역사교과서의 기록과 다른 주장들이 제법 등장하고 그 주장들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조선의 실체, 고구려의 강역, 한사군 설치지역 등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극명하게 다른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대한 그 진실성 여부도 도마에 오른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제기는 조선시대 유득공의 발해고를 비롯하여 다수 있었지만 근대에 들어서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독립운동으로 뤼순감옥에서 투옥 중인 신채호가 19316월부터 10월까지 조선일보조선사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을 엮은 것으로, 신채호가 순국한 지 12년이 지난 1948년에 출간되었다. 조선상고사는 단군시대부터 백제부흥운동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1총론에서 제11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까지 모두 11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미완의 저서이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원문은 지금의 우리말과 큰 차이가 있어 내용을 이해하며 읽는 것이 쉽지 않고 또한 신채호의 기억력에 의지한 부분이 많다보니 연도나 명칭 등에 오류가 다소 있다고 한다. 이 책은 역자 김종성에 의해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원문을 현대어로 바꾸고, 명백한 오류를 바로잡는 한편, 원문에 없는 해설과 주석을 별도로 추가함으로써 독자들이 보다 쉽고 정확하게 우리 고대사의 참모습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신채호는역사는 역사 이외의 다른 목적 때문에 기록해서는 안 되지만우리 상고사는 작자의 의도에 따라 많은 사실 관계가 달라진불완전한 역사라 규정한다. 특히 묘청이 유교도 김부식에 패배한 이후 이 땅에 유교도가 득세하게 되었으며, 그 영향으로 중국을 높이고 스스로를 낮춰 역사를 서술하는 경향이 지배하게 되었다고 단언한다. 이는 신채호가 유교도 김부식과 그가 서술한 삼국사기를 비판하는 주된 이유다. 또한 내란의 빈발과 외적의 출몰이 우리나라 고대사를 쓰러뜨리고 무너뜨렸다는 안정복의 의견에 대해 내란이나 외환보다는 조선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 조선사가 쓰러지고 무너졌다고 밝힌 까닭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신채호는 단군, 기자, 위만, 삼국으로 이어지는 기존의 역사인식 체계를 부정하고, 대단군조선, 삼조선,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새로운 역사인식 체계를 설립했다는 점과 훼손된 단군의 시대를 재조명함으로써 고조선이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었음을 명확히 규명했으며, 동부여와 북부여의 역사를 서술함으로써 두 나라를 우리 민족의 근원으로 포함시켰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한 김부식에 의해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었던 백제에 대해 주목한 것도 기존의 역사서와는 다른 시각이다.

 

신채호는 그 당시 현존하는 서적들을 갖고 장단점을 파악하고 대조하여 1천 년 이상 역사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거나 축소된 우리 고대사를 바로잡고자 했다.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삼국사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단군의 시대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해 서술하고, ‘대중국 투쟁의 선봉에 선 고구려의 역사를 중요하게 기록한 것 등은 작자의 의도로 사실 관계가 달라진 불완전한 역사를 제대로 서술하고자 한 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채호 이후 한동안 묶여 있었던 우리 역사 바로 알기 차원에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의 역사학자 이덕일이 의해 우리 안의 식민사관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제기 되고 있는 것도 신채호가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올바로 정립하고자 했던 동일한 맥락에서 분명하게 주목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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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5-02-04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에 대한 시각을 제일 처음 바꿔준 책은 <하워드 진, 교육을 말하다> 였습니다. ˝모든 역사는 주관적이며, 하나의 관점을 대변한다.˝는 말은 이전까지는 교과서가 진리인 듯 배웠던 학창시절을 뒤흔들만한 충격이었죠. 왜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을까 하는.
역사라는 분야는 제 관심 분야가 아니기는 하지만, 알고는 있어야 하고 여러 관점에서 쓴 사실들을 듣고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긴 그 `사실`이라는 것도 서술자의 시각에서 보는 진실이겠죠.
<삼국사기>에서 보여주는 과거가 다는 아니었군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사가 선주민들에게는 피빛 침략사가 되었던 것처럼.
역사를 기술하는 이들은 늘 힘이 있는 부류이기 때문에, 하층민이나 조명되지 않았던 이들의 삶을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구요.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게 하는 글입니다.

무진無盡 2015-02-04 20:53   좋아요 0 | URL
2001년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라는 책을 보며 우리 역사학계의 현실을 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럴싸한 직함을 가진 사학자들의 이면이 어찌나 구리던지요. 아마도 그후로부터 본격적으로 관심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권력 앞에서도

제 모습

생긴 대로,

나는야

옆으로 걷는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 해탐노화도(蟹貪蘆花圖)

조선 18세기 말~19세기 초, 종이에 수묵담채, 간송미술관

 

옛 그림을 읽는다는 것은 그 속에 담고 있는 상징을 읽는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다. 두 마리의 게가 갈대를 붙잡고 있다. 게와 갈대 무슨 사연이 있어 그림에 같이 등장하는 것일까? 그것도 두 마리의 게와 함께 말이다. '게가 갈대꽃을 탐하는 그림 즉 해탐노화도'는 과거시험을 앞둔 사람에게 그려주는 그림이다.

 

오주석의 설명에 의하면 갈대 로()의 옛 중국 발음은 나귀 려()와 매우 비슷하다고 한다. 나귀 려는 원래 임금이 과거급제자에게 나누어주는 고기 음식을 뜻하는 것이란다. 그 뜻이 발전되어 전려(傳驢) 또는 여전(驢傳)이라고 하면 궁중에서 과거급제자를 호명해서 들어오게 하는 일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게 두 마리가 갈대꽃을 물은 것은 소과(小科)와 대과(大科)에 모두 합격하라는 뜻이요 꼭 붙들고 있는 것은 붙어도 확실하게 붙으라는 의미다.

그뿐이랴? 게는 등에 딱딱한 껍질을 이고 사는 갑각류이니 그 딱지는 한자로 갑이 된다. 즉 게의 껍질인 갑은 천간(千干)인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중의 첫 번째이니 바로 장원급제를 의미하는 것이다.”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이해할만하다, 하지만 김홍도는 한발 더 나아간다.

 

해룡왕처야횡행(海龍王處也橫行)”

"바다 속 용왕님 계신 곳에서도 나는야 옆으로 걷는다!"

 

화제를 그럴듯하게 써놓았다. 과거에 붙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붙은 다음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왕 앞에서 쭈뼛거리지 말고, 천성을 어그러뜨리지 말고, 되지 않게 앞뒤로 버정거리며 이상하게 걸을 것이 아니라, 제 모습 생긴 대로 옆으로 모름지기 옆으로 삐딱하게 걸을 것이다"라는 의미다. 횡행개사(橫行介士)는 게의 별칭인데 게는 말 그대로 옆으로 횡행한다는 말이고 개사는 강개(慷慨)한 선비란 뜻이다.

 

요즘 정치현실에 딱 맞는 정문일침(頂門一針)이다. 그렇다면 요사이 정치인들은 어떨까? 권력이 무엇이기에 예나 지금이나 그 권력 앞에서는 사람의 목숨도 아랑곳하지 않은 것일까? 출사표를 던질 때의 마음은 어디가고 자신의 목소리도 없다. 대의도 명분도 없이 오직 자신이 속한 정치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벌이는 비굴한 모습도 부끄러운지도 모른다. 옛사람들의 출사 하는 마음가짐을 배워야하지 않을까?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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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7 2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진~ 기행이군요.오늘은..!^^
시제는 니 맘 잘 닦아라..(너무 건너 뛰나요? 아니죠?!^^)
오늘은 경제.정치. 두루 두루..아..예술까지..

무진無盡 2015-01-18 22:06   좋아요 0 | URL
누구든 삶은 다 예술입니다~ㅎ

나비종 2015-01-18 0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옛 그림은. . `시`와 같은 것이군요.
설명이 갑입니다.^^

무진無盡 2015-01-18 22:06   좋아요 0 | URL
옛그림만 그러겠어요
살아가는 동안 만나는 모든 것이 다 시 아니던가요? ^^

[그장소] 2015-01-19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음....삶은....계란.
삶은....걸레....
무진 님 눈이 예쁘군요..^^

이 넘의 더러운 세상..에잇! 아름다워!!

이런건 아니고요!
ㅎㅎㅎ
농 인거 아시죠?

무진無盡 2015-01-19 15:18   좋아요 0 | URL
그렇게라도 애쓰지 않으면 더 힘들잖아요 ^^

[그장소] 2015-01-19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무진? 애쓴다...할때..그..무진!!^^

무진無盡 2015-01-19 15:23   좋아요 0 | URL
없을무, 다할진ᆢ이면 어떻게 해석되나요? ^^
 
서재에 살다 - 조선 지식인 24인의 서재 이야기
박철상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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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학문과 아취를 상징하는 특별한 장소

삶의 근거지를 대도시에서 한적한 시골마을로 옮기며 가장 신중하게 생각했던 것이 나만의 서재를 만드는 것이었다. 조그마한 한옥의 구조에서는 내가 가진 책을 어떻게 정리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책을 정리할 겸 서재를 마련하기로 했다. 마당 한 켠에 직사각형의 구조물을 만들고 세 벽은 책을 둘 수 있는 공간으로 나머지 한 면은 밖이 훤히 내다보이게 유리창으로 만들었다. 아직 이름도 얻지 못한 서재이지만 한쪽에 책상하나 두고 나머지는 비워둔 열린 공간이다. 서재 주인의 허락도 없이 햇볕도 달빛도 자유롭게 드나들지만 나만의 꿈을 꾸고 실현해갈 터전으로 삼고 있기에 만족스런 공간이다.

 

이런 서재를 만들고자 했던 직접적인 이유는 옛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그들이 서재라는 공간에서 학문과 지향하는 바를 실천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를 알아가면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봐야 한다. 특히, 조선 후기 백탑파로 일컬어지던 무리들의 사람 사귐의 중심이 바로 그들의 서재를 통해 이뤄지는 것을 보았기에 서재 갖기를 더 간절하게 바랐는지도 모른다. 서재에 대한 꿈을 꾸게 만들었던 조선후기 선비들의 서재에 얽힌 이야기를 모아 서재와 서재 주인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담아 놓은 책이 있다.

 

박철상의 서재에 살다가 그 책이다. 저자 박상철이 주목하는 조선후기는 북학의 시대로 소중화 사상에 물들어 있던 사상적 경향성이 청나라와 청나라를 통해 유입되는 서양 사상과 과학기술 등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조선에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시기였다. 더불어 이러한 사상적 변화는 선비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재를 중심으로 선비들 간의 교류를 통해 취미와 풍류, 그리고 우정을 나눴던 모습이 그것이다.

 

홍재 정조(이성), 담헌 홍대용, 연암산방 박지원, 팔분당 이덕무, 사서루 유득공, 정유각 박제가, 여유당 정약용, 소재 신위, 일속산방 황상, 백이연전전려 조희룡, 완당 김정희ᆢ. 등 저자 박철상이 조선 후기를 살았던 쟁쟁한 학자이지 선비였고 문화예술인이었던 24인을 서재를 중심으로 그들의 학문, 삶 등을 살펴본다.

 

조선후기 지식인의 서재를 탐방하며 첫머리에 정조 왕을 살피는 의미가 제법 크게 다가온다. 저자가 주목하는 조선 후기에서 북학과 정조 왕을 빼두고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에 동의한다. 규장각을 중심으로 한 호학군주 정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들이 참으로 많으며 조선 후기를 대표한다라고 할 만한 선비들 중 정조 왕의 후원이 있었기에 그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여, 그 첫머리에 정조 왕의 서재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싶다.

 

그의 집은 세상에서 제일 작은 좁쌀만했지만, 그의 서재에는 온 세상이 들어 있었다황상의 일속산방에 대한 이야기다. 이처럼 북학과 연행의 시대였던 19세기를 살았던 선비들의 학문과 일상의 중심이 되는 "서재는 학문과 아취를 상징하는 특별한 장소였다." 조선시대 지식인은 서재의 이름을 호로 삼아 그 안에 평생을 기억하고자 했던 삶의 방향과 가치관을 담은 공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자 했던 지식인의 주된 활동 무대이기도 했다.

 

서재 이름의 의미와 그 서재 주인의 이야기가 중심인 이야기지만 조선 후기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선비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이야기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조선후기를 이해하는 것으로 봐도 될 것이다. 특히 홍대용, 박제가, 김정희로 이어지는 청나라 지식인 옹방강과 완원의 교류가 당시 조선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살피는 것도 이 시기를 이해하는 한 축으로 작용한다.

 

시대가 변해 이제 서재 문화는 사라졌다. 하지만, 조선 후기를 살았던 지식인들에게 서재가 갖는 의미가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에게도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부질없는 바람일까? 변화의 시대를 살아간 지식인으로서 그들의 삶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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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가난한 시인의 서재 조수삼 이이엄 편에서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조수삼의 이이엄에서 장혼의 이이엄으로 넘어가 조수삼은 사라지고 장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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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5-01-16 2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면이 바다인 우리 나라에서 삼면이 지혜의 바다인 곳을 꿈꾸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며. . 언젠가는 저도 그런 서재를 가질 수 있을까 꿈꿔봅니다.(음. . 얼마 전 알라딘 중고 매장에 몇 십 권. . 괜히 팔아치웠나?^^;)
서재 이름은 지으셨나요? 빛이 드나들고(설마 비는 안드나들겠죠?ㅋ), 유리창을 열면 바람도 드나드나요? 가끔 조용히 별빛도 스미겠지요?^^

무진無盡 2015-01-16 23:47   좋아요 0 | URL
덕분에ᆢ알라딘 중고 매장에서 가끔 책 구입하곤 합니다.
아직도 이름 짓지 못하는 것은 뜻이 확고하지 않거나 욕심이 과하거나 일거에요 ㅠ
새소리, 달빛, 간혹 잠자리도 들어옵니다. 그러나 아직 부르고 싶은 이 청하지 못했습니다

나비종 2015-01-16 2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지. .진!지. . 하셔서. . ㅎㅎ
(하아~ 이런 비루한 개그를ㅡㅡ;)
천천히 자연과 벗하며 지내시다보면 그 빛깔에 맞는 이름이 떠오르시겠죠^^ (춘수 오빠의 꽃이냐며ㅎㅎ^^;)

무진無盡 2015-01-17 00:01   좋아요 0 | URL
허~~
그렇지요 제가 ^^
안개비가 눈으로 바뀌어 오시는 풍경이 좋은밤입니다
달은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보고 있습니다 ㅎ

나비종 2015-01-17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라다보는 곳은 온통 아파트 불빛 뿐ㅡㅡ;
리치 오빠의 `헬로~` 들으면서 상상하니, 맘이 화해지는 느낌입니다. 안개비가 눈으로 바뀌어 오시는 풍경이 좋은 밤이라니. . ^^

무진無盡 2015-01-17 00:14   좋아요 1 | URL
얼마전까진 저도 아파트 불빛 속에서 살았지요. 이곳에서 세번째 겨울 보내고 있습니다.
아직까진 산과 들에서 만나는 벗들이 있어 더 좋은 곳입니다.
종종ᆢ혼자 놀기의 진수를 전해드리리다 ^^

해피북 2015-01-17 0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제가 젤 좋아하는 백탑파들이 있다니 당장 읽어보고 싶네요 정민교수님 책으로만 읽다가 다른분의 혜안을 들어보려니 기대도 되구요 ㅎㅎ

무진無盡 2015-01-17 21:23   좋아요 0 | URL
조선후기를 주름잡았던 선비들의 이야기를 한 곳에 모았습니다
꼭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