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思悼'
왕이어야 했던 아버지와 아들이고자 했던 세자, 그 사이의 간극을 넘지 못한 비극이 '임오화변'이었을까?


이 영화의 주인공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선(愃)이다.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으로 세자에서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고,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굶어 죽었다. 이후 영조가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내린 시호가 ‘사도(思悼)’이며, 정조가 다시 ‘장헌 세자(莊獻世子)’로 시호를 바꾸었다.


'자격지심自激之心'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스스로 미흡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사도'를 보는 동안 떠나지 않은 단어다.


왕, 아버지, 아들, 세자, 어머니, 아내ᆢ수많은 사회적 관계를 자신의 처지를 기준으로 생각하여 지극히 염려하는 마음인 이 자격지심이 극단적으로 발휘될때 나타나는 현상이 영화의 그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다.


"왕이라고 언제나 칼의 손잡이를 잡는 경우는 없다. 칼끝을 잡지 않으려면 공부를 해아한다." 아버지 왕의 시각이다. 그렇기에 강하게 키우려했다. 그에 비해 아들 세자의 시각은 "허공으로 날아간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로 표현된다. 숨쉬조차 버거운 강박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두고 어떻게 보느냐하는 것은 후대사람들의 선택의 영역일 것이다.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것에서 역사라고 예외는 없다. 오히려 더 극단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보게된다. 이 자기중심적인 시각은 철저히 현실적이며 정치적이다. 이 정치적 시각을 빼면 역사를 볼 이유는 많이 감소된다.


이준익의 사도에는 이 시각이 대단히 축소되어 있다. 권력을 바라보는 아버지와 아들의 감정과 지향의 간극이 극단적으로 그려졌다는 말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현실의 무엇을 바라보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 '사도'는 굉장한 속도로 관객을 몰입으로 이끌어간다. 그 중심에 '역사 상 가작 비극적인 가족사'가 있다. 사도세자를 보는 시각의 대표적인 것은 '당쟁에 의한 희생'이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사도세자의 삶과 당시 상황을 보고자 함에 있다. 이 시각이 임오화변의 전체를 대변하지는 못할지라도 정치를 배재한 사건의 본질은 없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시각이라는 것이다.


탄탄한 시나리오, 선이 굵은 주연배우들의 연기, 몰입도의 최고 등에도 불구하고 영화 '사도'에서 아쉬운 것이 여기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정성을 다한다는 것'
막연한 꿈이었다. 가능할거란 생각도 못했다. 그래도 심장은 뭐라도 해야한다고 자꾸 부추킨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일, 무엇에 주목해야 가능해지는 걸까?

그 중심을 '간절함'으로 보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 역시 그 간절함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이 간절함을 이루는 길은 '정성'에 있다. 지극정성의 그 정성이다. 하여, 정성이 조금씩 쌓였는지 닿지 못할거라 짐작했던 것이 어느 사이 희미하게나마 산 너머의 하늘빛으로 나타났다.

이제, '귀한 사람 정성으로' 라면 이루지 못할 것 없다고 확신한다. 시공간의 제약도 방해못하는 감통感通에 심통心通을 확인하며 어느덧 눈빛에 깃든 마음까지 본다.

불가능이 가능으로 질적변화한 그날 그 새벽의 바다에 다시 섰다. 같은시간 같은 바다 위지만 그날과 또다른 심장박동이 감동으로 온다. '그대 여기까지 잘 왔다'고 눈부신 빛으로 감싸는 새벽 빛이 가슴 깊숙히 박힌다.

오늘 이곳 바다 위에 굳건하게 설 수 있었던 의지처는 '중용 23장'에서 찾았다. 정조대왕에 주목했던 영화 '역린'에서 왕 정조는 상책의 입을 빌려 중용 23장을 대신들 앞에서 설파한다. 왕의 입이 아닌 상책의 입이였기에 그 울림은 더 깊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베어나오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것이다." (중용 23장)

其次는 致曲이니 曲能有誠이니 誠則形하고 形則著하고 著則明하고 明則動하고 動則變하고 變則化니 唯天下至誠이야 爲能化니라
기차는 치곡이니 곡능유성이니 성칙형하고 형칙저하고 저칙명하고 명칙동하고 동칙변하고 변칙화니 유천하성성이야 위능화니라.

변화의 힘은 정성이었다. 간절함이 이루고자한 그 것으로 가는 여정의 안내자가 정성이었다. 다시 그날 그바다 위에 선 오늘 그 정성을 의지삼아 여기까지 멈추지 않았듯 앞으로도 멈추지 않고 걸을 것이다. 하나의 심장이니 그 심장 멈추는 날까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비종 2015-09-28 2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간절한 마음 끝에 매달리는 정성은 저 달처럼 빛이 나기에 다른 이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걸까요?
또르르 굴러내릴 것 같은 달이 이슬방울처럼 매달려있는 풍경이 좋습니다.
 

'마주본다는 것'
가능한일일까? 사람과 사람이 가슴과 가슴으로 만나 그 사람을 통째로 알아버리는 일이 정말 가능하기는 한걸까?

감정을 담지 않고 존재하는 수많은 장애물들은 객관적인 해법에 대입하면 답을 얻고 만다. 감정은 완고하고 수시로 변하기에 일정한 법칙이 없다. 

이미 벽을 두르고 상대를 대하는 모든 행위는 그래서 애초에 그 벽을 넘을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ㅈ출발한 경우와 같다. 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공정하지도 않고 또한 벽을 두른자의 일벙적 감정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라는 벽을향해 돌진하는 것은 그것이라도 해야만할 절박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절박함은 때론 기적을 만들어 왔음을 알기에 그 기적에 의지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다.

해를 마주보는 것은 여전히 버거운 일중 하나다. 그렇더라도 마주보지 않으면 일생을. 한번 볼까 말까하는 명장면을 볼 기회조차 없는 것이다.

나, 그대를 마주보고자 함은 이렇게 간절함 보테 기적이라도 불러오고 싶은 마음과 다르지 않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비종 2015-09-26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광이 매력적인 이유는 덧입혀진 색을 버리고 편견없이 윤곽으로 다가오는 대상 때문이죠. 해를 바라보는 지 주변을 바라보는 건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화면 가득 아름다운 장면이 다가온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마주본다는 건. . 용기를 필요로 하는 멋진 도전이라 생각합니다. 바라보는 대상과 그 주변을 통째로 안고자 하는 마음이죠. .
 

'멈출 수 없는 길'
닿을 수 있을까? 깊고 깊어서 그 끝을 모르는 곳, 바로 사람의 마음자리다. 그 본래의 마음자리에 닿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사람의 욕심이 끝도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반증은 아닐까?

시작은 누구나 한다. 그렇게 시작된 길을 가다 조그마한 걸림돌에도 넘어지면 일어나는 것 조차 버거워 한다. 넘어진 자리의 돌부리가 모든 것의 이유라도 되는 듯 과장하여 자신을 합리화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누구나 시작하지만 누구도 쉽사리 그 근본에 이르지 못하고 만다. 

허락된 곳이라면 그나마 수월할 수도 있지만 금지된 곳 또는 허락받지 못한 곳이라면 더 힘든 길임은 자명하다. 허락한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도 아닌 그 본래의 마음자리로 가는길.

혹ᆢ그곳에 닿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출발 한 길이다. 가다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중도에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그 길을 가는 것이 하늘이 허락한 내 사명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비종 2015-09-25 0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음자리라는 게 가늠하기 어려운 곳이라, 어쩌면 거리가 아닌 방향이 될 수 밖에 없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
 

'감어인'鑑於人
자신을 사람에게 비추어 보라는 말이다. 제자백가 중 묵자가 원전이다.


보여지는 모습으로 거의 전부를 판단하는 세상이라고 한탄들 한다. 그렇다면 보여지는 모습을 전부 무시하란 말인가? 보여지는 모습은 속내를 드러내는 중요한 방편이니 그 드러남을 통해 속내를 보는 통로로 삼는다면 드러남은 백분 활용해야할 측면이 된다.


속이든 겉이든 보여야 알 수 있다. 꽃들이 앞을 다투어 화려하고 특이한 자신만의 모양과 색으로 치장하는 이유는 그 속내를 드러내고자 함에 있다. 속내를 드러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 하자는 것이다. 그러기에 드러냄은 꽃에게는 곧 사명을 완수하는 중요한 일이다.


사람이 자기를 가장 잘 비출 수 있는 곳은 역시 사람이다. 나를 비춰주는 사람, 내가 비춰줄 사람을 얻고 그 안에서 사람의 본성으로 돌아가자. 하여, 외롭고 힘든 세상살이 조금은 위로 받고 의지하며 산다면 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감어인'鑑於人, 그대를 바라보는 내 방식이며 본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