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 사람'

"'차거此居'는 이 사람이 이곳에 산다는 말이다. 이곳은 바로 이 나라 이 고을 이 마을이고, 이 사람은 나이가 젊으나 식견이 높으며 고문古文을 좋아하는 기이한 선비이다. 만약 그를 찾고 싶으면 마땅히 이 기문記文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쇠 신발이 다 닳도록 대지를 두루 다니더라도 결국 찾지 못할 것이다."

*혜환 이용휴의 산문이다. 이곳에 사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 이용휴는 이 사람에 대해 더이상의 다른 말이 없다.

궁금증에 결국 '이 사람'의 자리에 '나'를 대입해 본다. 어렴풋이 짐작되는 바가 없지는 않으나 이 또한 확실치 않으니 역시 아는 바가 미진한 까닭이리라.

비웠다. 무엇인가로 가득 채우기 위해 온 정성을 다했을 꽃의 진 자리다. 허망하거나 아쉬움이 아닌 뿌듯한 자부심의 자리로 읽힌다. 삶의 시간이 이와같아야 하는건 아닐까.

이 사람의 자리에 나를 대입해알고자 하는 것이 나라면 우선 이처럼 비워야하지 않을까. 스스로 젊다고 여기며 채우기에 급급했던 지나시간을 돌아본다. 나이를 든다는 것은 이렇게 스스로를 비워내는 일이고 대상과 조금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하는 것임을 비로소 안다.

볕 좋은 봄날 오후, 짧은 글을 길게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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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나들이
볕 좋은 봄날,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낯선 곳을 찾아가는 생소함을 어쩌지 못하면서도 선듯 길을 나선 것은 꽃 때문이다. 안내판이 없는 것은 당연하고 특별히 물어볼 사람도 없을 땐 그저 발품을 파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피고 지고를 반복하는 숲 속 복수초는 온 계곡을 노랗게 물들이고 씨를 맺는 개체까지 있다. 복수초의 계곡이라 칭해도 무방하리만큼 지천으로 피었다. 노오란 등불을 밝힌 하나하나에 눈맞춤하자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모든 들꽃이 언제 어느 곳에서 만나더라도 반가운 선두에 노루귀가 있다. 흰색, 분홍색에 청색까지 한자리에 피어 햇살을 받고 있다.


오늘 낯선 길을 작정하고 나선 것은 바람꽃들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피는 변산바람꽃에 이어 너도바람꽃, 만주바람꽃에 꿩의바람꽃, 남방바람꽃 등 바람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양한 종류를 다 볼 수는 없을지라도 하나씩 만나면서 눈맞춤해가고 있다. 변산바람꽃은 이미 봤으니 다음으로 너도바람꽃을 보고 싶었다.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찾느라 한동안 숲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그만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눈에 들어온다. 제자리에 서서 주변을 여러개체가 눈에 띈다. 너도바람꽃, 만주바람꽃에 꿩의바람꽃까지 한자리에서 세 종류의 꽃을 한꺼번에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활짝 열어젖힌 꽃봉우리 가운에 노오란 꽃술이 둥근원을 만들어 독특함을 보여주는 너도바람꽃과 많은 꽃잎을 일사분란하게 펼치면서도 대칭을 이루는 꿩의바람꽃을 처음으로 만났다. 지난해 추위 속에서 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서 밉상이었던 만주바람꽃이 노오란 꽃술을 가득 품고 빙그레 웃고 있다.


제법 긴 시간을 숲에서 보냈다. 여느 꽃나들이와는 달리 북적대는 사람도 만나지 않고 편안하고 행복한 꽃과의 눈맞춤을 했다.


복수초

복수초

노루귀

노루귀

너도바람꽃

꿩의바람꽃

만주바람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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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사이 내린 봄이 버들개지 고운 털에 붙잡혔다. 봄으로 자리를 내주는 것이 내키지 않은듯 이제는 겨울닮은 찬바람이 불지만 버들개지 털이나 겨우 붙잡히는 정도고, 먼산 높은 봉우리에 날리는 눈발은 땅으로 내려오지도 못한다.


어쩌면 춘설春雪을 만질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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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17-03-12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꼭 털이 복실한 양같네요~~

무진無盡 2017-03-12 23:16   좋아요 0 | URL
우연한 결과물이지만 제가 봐도 닮았습니다~^^
 

숨소리도 죽여가며 밤비가 내린다. 이제서야 돋아나기 시작한 복수초랑 수선화, 상사화 새싹들은 밤사이 이 비를 흠뻑 마시고 고개를 불쑥 내밀 것이고, 진즉 꽃망울을 맺은 청매와 홍매의 봉우리는 더 부풀어 오를 것이다. 내 뜰은 봄맞이로 소리없는 아우성이다.

봄맞이로 일렁이는 가슴을 잠시 누그러뜨리라고 토닥토닥 봄 비가 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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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0일


시간이 겹으로 쌓이는 동안 수 백년을 한 자리에 살았다. 곁을 내 주었던 그들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 버거웠지만 여전히 대를 이어오는 그들이 있어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음을 안다.

정월 대보름 어떤이가 두손 모아 합장하고 간절한 소망을 담은 꼬까신을 올려 놓았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지만 한해를 살아가는 동안 이 순간만큼 떨리는 가슴일 때가 없다. 그 꼬까신 위에 살포시 상서로운 봄 눈이 내렸다. 하늘의 마음이 꼬까신을 놓아둔 이의 마음에 응답하는 일이라 믿는다.

3월 10일 출근길 그 나무 앞에 멈추어 꼬까신에 오랫동안 눈맞춤 하며 간절함을 담았다.

1980. 5.18, 1987. 6.10, 2017. 3. 10 
내 눈으로 지켜본 역사의 그날이다. 살아 생전 오늘과 같은 날이 또 올까 싶을 정도로 의미가 크고 깊고 넓다. 고비마다 내딛었던 사람들의 마음이 서로 닿아 만들어낸 일이기에 오늘을 기억한다.

이제 다른 출발이기에 지금까지 왔듯 그렇게 다시,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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