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
논에 물잡고 모내기를 시작할 때쯤 더운기를 품은 바람따라 흔들거리며 주목받는 것이 있다. 다시 '삐비' 꽃 피는 시절이 왔다. 모내기 하는 논에 새참 이고 들고가는 논둑에 하얗게 피어 춤추던 그 삐비다. 아직 피지 않은 어린 이삭을 씹어 단물을 빨아먹던 어린시절을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풀이다. 은백색 비단털로 둘러싸인 벼꽃이삭이 인상적이다.


'삐비껍질'이라는 말에 등장하는 그 삐비를 말한다. 속살은 이미 파 먹었기에 껍질만 남은 쓸모 없는 삐비를 비유로 인간관계에 적용한 사례다. 존재감을 무시당할 때 "내가 삐비껍질로 보이냐?"라는 말에 등장하는 그 삐비다. 삐비 껍질만도 못한 사람들이 제 잘났다고 목소리 높이는 부끄러움이 상실된 세상에 흔들리는 삐비가 지천이다.


다시 시골마을에 정착하며 어린시절 추억이 하나씩 새롭게 다가온다. 그 가운데 이 삐비도 있다. 당시로는 귀한 껌대신으로 애용되기도 했다. 삐비, 띠풀의 전라도 사투리다. 어린 시절의 그 천진난만의 마음처럼 '순수'라는 꽃말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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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소식에 어김없이 흐려지는 하늘이다. 한바탕 쏟아내고 나면 마음까지 후련해지지 않을까. 갑작스럽게 더워진 날씨에 적응 못하는 것은 때를 잃고 피는 꽃들만이 아닌듯 싶어 가라앉은 기분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하루다.

숲을 걷다 발걸음을 멈추는 순간이다. 때와 장소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빛의 향연이다. 숨조차 죽이고 집중하여 이 순간을 온전히 가슴에 담는다. 시선만 움직여도 금방 사라지는 빛의 향연을 누리는 나의 방법이다.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한다. 다양한 조건들이 어우러져 지금의 내가 있다. 책, 숲, 꽃, 피리ᆢ. 그 사이를 이어주는 중심에 귀한 사람들이 있다. 무엇 하나라도 더하거나 뺄 것이 없다. 앞으로도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무엇이 빠지거나 더해져 나를 만들어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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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서 여름으로
녹음이 짙어진 숲에 이미 여름으로 들어서고 있다. 살랑이는 바람결에 숲 향기가 가득하고 걷는 발걸음도 그리 느긋해서 좋다.


5월 끝자락의 숲엔 아찔한 향기를 전하는 때죽나무 향기로 가득하다. 여름으로 가는 길목이라 봄꽃은 이미지고 없고 여름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드문드문 보이는 꽃들로 꽃에 대한 열망을 채우기에는 부족한 때가 지금이다. 그래도 어디냐. 볼 수 있고 이름 부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더 무엇이 필요할까.


함박꽃, 노각나무 꽃 피는 6월을 기다린다. 그때는 무등산이다.


백아산 하늘다리

때죽나무

꿀풀

쥐오줌풀

매발톱

노루발풀

삿갓나물

백당나무

고광나무

매미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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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로디테 - 감각의 향연
이사벨 아옌데 지음, 정창 옮김 / 영림카디널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사랑도 요리처럼

아프로디테여성의 성적 아름다움과 사랑의 욕망을 관장하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와 사랑의 여신이다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사랑에 있다대상을 두고 나와 대상 사이에 벌어지는 감정과 육체의 향연이 바로 아프로디테의 중심 내용일 것이라 짐작한다사랑 역시 상호 관계지만 한발 더 들여다보면 결국 대상과 상호작용에서 얻는 나의 감정에 어느 정도 만족하느냐의 여부가 핵심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 맥락에서 '감각의 향연'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 '아프로디테역시 중심 주제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기만족에 있다고 보인다그 자기만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환경을 조성해가는 중요한 고리고 선택한 것이 오감을 만족시키는 요리에 두었다즉 오감五感을 작동시켜 음식과 에로티시즘을 연결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 구체적인 실례를 수집하고 다양한 사례를 통해 스스로 주장하는 바를 증명해가고 있다저자는 세상의 모든 식재료에는 무한한 쾌락을 안겨주는 최음제가 담겨 있고그 안에서 우리는 북받치는 감정과 사랑하는 사람의 욕망을 마음껏 느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관계 속에서 열린 마음즉 공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소박하지만 서로를 사로잡고 만족시키기 위해 헌신하는 자세로 음식을 만들고 사랑을 나누는 게 곧 쾌락이라는 것이다또한자신의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에 아라비안나이트에서 모파상의 단편소설까지 동서고금의 역사와 신화문학예술에 담긴 음식과 사랑에 관한 담론을 위트와 해학을 담고 있다.

 

여기서 제기되는 이야기를 보면 의외로 음식을 대하는 문화적 가치의 차이가 존재함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의 독특한 음식문화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음식을 바라보는 시각의 중심을 성적 흥분을 불러오는 최음제에 두고 바라본다는 것이 가져오는 편견을 인정하더라도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확인한다.

 

부록처럼 첨부된 판치타의 최음제 레시피에서 제시하는 음식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끼리 육체적 사랑을 진행해가는 과정과도 같은 소스에서 드레싱(전희로 가는 길목), 오르되브르(처음 간지럼 태우고 깨물기),수프(서서히 달구기), 애피타이저(사랑의 유희), 메인요리(카마수트라), 후식(행복한 결말)으로 이어지는 음식의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특별히 음식에 관심이 없는 사랑일지라도 그럴싸한 모습으로 잘 차려진 음식을 보면 어떤 맛일까궁금증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다그런 음식처럼 정성껏 음식을 만들고 그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먹는 것과도 같이 사랑의 과정을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지극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요리 잘하는 남자가 사랑받는다는 말이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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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달'

나는 그믐날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날은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버리는 초생달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이 애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의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女王과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생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한등客窓寒燈에 정든 임 그리워 잠못 들어 하는 분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움켜 잡은 무슨 한恨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달을 보아 주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는 고요한 꿈나라에서 평화롭게 잠들은 세상을 저주하며, 홀로이 머리를 풀어뜨리고 우는 청상靑孀과 같은 달이다. 내 눈에는 초생달 빛은 따뜻한 황금빛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는 듯하고, 보름달은 치어다 보면 하얀 얼굴이 언제든지 웃는 듯하지마는, 그믐달은 공중에서 번듯하는 날카로운 비수와 같이 푸른빛이 있어 보인다. 내가 한恨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러한지는 모르지마는, 내가 그 달을 많이 보고 또 보기를 원하지만, 그 달은 한 있는 사람만 보아 주는 것이 아니라 늦게 돌아가는 술주정꾼과 노름하다 오줌 누러 나온 사람도 보고, 어떤 때는 도둑놈도 보는 것이다.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정情 있는 사람이 보는 중에, 또는 가장 한 있는 사람이 보아 주고, 또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준다.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 하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나도향羅稻香(1902-1926)의 수필 그믐달이다. 새벽, 다시 달을 본다. 필사하는 마음으로 글자마다 정성들이듯 자판을 누른다. 유난히 노랗게 빛을 발하는 그믐달을 마주하는 시간이다.

달이 좋고 달 중에서도 초승달과 그믐달에 더 주목하지만 늘 놓치기 쉬운만큼 아쉬움도 크다. 그래서인지 달이 뜨고 지는 때가되면 마음 한구석 늘 불안함이 따라 다닌다. 혹 놓치고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조바심이다. 다행이 노랗게 빛나는 달을 본다.

23일 8주기, 그믐달이 노랗게 보인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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