形解 진고개 신과의 문답
"내 자네에게 한번 물어보겠네. 나는 흙을 몸으로 삼고 물을 쓰임으로 삼고 있는데, 자네는 나를 흙이라 부르겠나? 아니면 물이라 부르겠나? 흙의 성질은 고요하고 물의 성질은 움직이니 나는 고요함과 움직임의 기회를 타야하나? 흙의 바탕은 무겁고 물의 바탕은 가벼우니 나는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 처해야 하나? 흙의 덕은 굳세고 물의 덕은 부드러우니 나는 굳셈과 부드러움의 중용을 취해야 하나? 흙빛은 흐리고 물빛는 맑으니 나는 맑음과 흐림이 나뉜 곳에 처해야 하나?
큰 덩어리는 감싸 안을 수 없고 가는 흙은 갈 수 없네. 한 움큼도 적다 할 수 없고 큰 덩어리도 많다 할 수 없지. 섞이거나 가라앉으며 때에 맞춰 나아가며, 깔끔하고 담박하여 하나의 이치를 안고서 편안함을 누리네. 만 가지 형상이 뒤엉켜 있어도 나는 홀로 그칠 곳을 알고, 온 세상이 맑고 높은 데에 머물고자 해도 나는 홀로 누추한 곳에 사네. 오로지 그대만이 변변찮아 내 질박함을 편안히 여기니 그대가 세상을 마칠 때까지 서로 보살피며 싫증내지 않도록 하세."
*한국산문선 7권 '코끼리 보고서' 홍양호(1724~1802)의 글 형해形解에 나오는 대목이다. 진흙길 고개인 진고개에 집을 짓고 사는 주인과 진고개 토지신과의 가상 대화다.
진흙泥을 구성하는 요소를 들어 진흙을 어떻게 치장하여 부를지에 대한 주인의 제안에 답하는 토지신의 이야기가 의미심장하다. 온갖 치장하는 말을 버리고 도공의 손에 의해 수많은 종류의 그릇으로 변신하면서 그릇에 걸맞는 직분을 묵묵히 수행한 뒤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누구나 무엇으로든 자신을 돋보이게 치장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간혹, 이런 노력이 부질없다는 생각에 이를 때가 있다. 무엇을 나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토우는 무월리 송일근 선생님 작품이다.
귀한 분의 부음訃音을 접한다.
황병기국악 연주가1936~2018, 향년 81세
선생님이 남기신 귀한 마음이 족적마다 두고두고 깊은 향기로 피어오를 것이다. 그분이 남기신 '소엽산방'을 가슴에 담고 '침향무沈香舞'를 대신 올린다.
#시_읽는_하루
그대 앞에 봄이 있다
우리 살아 가는 일 속에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어디 한 두 번이랴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오늘 일을 잠시라도낮은 곳에 묻어 두어야 한다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사랑하는 이여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추운 겨울 다 지내고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김종해의 시 '그대 앞에 봄이 있다'다. 꽁꽁 언 한겨울인듯 싶어도 어느 사이 봄이 코 앞에 있다.
'시 읽는 하루'는 전남 곡성의 작은 마을 안에 있는 #농가찻집_또가원 에 놓인 칠판에 매주 수요일 올려집니다.
#전남곡성 #곡성카페, #수놓는_농가찻집 #핸드드립커피 #또가원전남 곡성군 오산면 연화리 419
http://blog.naver.com/beesil3
'목련꽃 필 무렵 당신을 보내고'이복규 편, 학지사
이춘기(1906~1991)님의 일기다. 1961년부터 1990년까지 30년 세월이 하루도 빠짐없이 담겨있다.
1938년 생이셨던 내 아버지보다 한 세대 앞선 이가 몸으로 그려온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일기다. 다른 세대의 이야기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이어지던 기억 속 농촌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내 기억 속 아버지의 삶과도 다르지 않다. 앞선 세대에 대한 채무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감당하기에 버거운 무게로 다가온다.
어쩌면, 그리움일까.
된서리 내렸다. 잠깐 피는 꽃이다. 된서리 내렸다지만 특유의 알싸함은 무뎌졌다. 박무가 무진강산을 이룬 들판에 서서 차가움이 파고드는 가슴을 열어 머리의 혼돈을 깨운다.
해 뜨기 전, 안개 속에서 누리는 서리꽃 세상이 찬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