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남아 있는 겨울의 잔재 그 칙칙함 속에서 봄볕의 위용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발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숨을 쉬면서 이미 숲에 적응된 눈을 가만히 들어 숲의 속살로 파고드는 햇살을 따라간다. 시선이 멈추는 곳에 꿈틀대는 생명의 몸짓을 본다.


눈맞춤, 햇살과 나무 그 사이에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때이기도 하지만, 때론 스스로를 잊어버리는 몰입의 순간이다. 이 경험이 주는 환희가 있어 생명의 꿈틀거림으로 요란스런 봄의 숲을 찾는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봄의 숲은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가슴을 펴고 설렘으로 다가올 시간을 마주하게 만들어주는 마법의 힘을 발휘한다. 알든모르든 모든 생명이 봄앓이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볕을 가득 안고 돋아나는 붉거나 연초록의 새순은 연약하기 그지없지만 무엇보다 강한 생명이 가지는 힘의 증거다. 먼 산에 피는 산벚꽃으로 봄이 익어가듯 사월의 숲에서 나의 봄앓이도 여물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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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말하였네'
-고규홍, 마음산책


"한 그루의 나무를 적어도 세 해에 걸쳐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 다 다른 나무에게서 다 다른 사람을 떠올리는 사람"


저자의 나무를 대하는 마음에 특별함이 있다. 이렇게 나무를 특별하게 볼 줄 아는 나무 칼럼니스트 고규홍이 그 사람이다. '이 땅의 큰 나무'를 비롯하여 '우리가 지켜야 할 우리 나무 1ㆍ2ㆍ3', '도시의 나무 산책기' 등 다수의 나무 이야기 책이 있다.


이 책은 저자 고규홍의 '나무가 말하였네 1ㆍ2'에 이어 발간된 책으로 옛시에 깃든 나무 이야기다. 이황, 김정희, 박지원, 정약용, 김시습, 윤선도, 황진이, 한용운, 왕유, 원매, 도연명의 시까지 나무를 말하는 옛시 75편을 엄선해 옮기고, 다정하고 세심한 감상과 사진을 더했다.


풀꽃에서 나무꽃으로 시선이 옮겨가는 때, 계절이 주는 선물처럼 옛시와 나무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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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벚꽃 진다고 황소 눈만큼이나 큰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 보이던 사내는 산 아래 벚꽃잎 떨어진 나무 그늘에 앉았다. 떨어진 벚꽃을 세며 손가락을 수도 없이 접었다폈다를 반복하더니 물기어린 눈가를 훔치며 힘없이 중얼거린다.


"때를 알고 지는 산벚꽃이 무슨 죄야. 너 보고픈데 못보는 애달픈 맘 주체하지 못하고 봄 탓으로 돌린 나 때문이지. 이제 숨 한번 크게 쉬었으니 돌아오는 봄까지 안녕ᆢ."


봄, 그대 마음을 봐 버려서 봄인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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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물'
왜 자꾸 마음이 그곳으로 가는 것일까. 몇 년 전 어느 시인에게서 억울한 영혼들이 묻힌 곳에는 어김없이 피어난다는 피나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일부러 꽂 필 때를 기다려 찾아갔다. 지천으로 핀 다른 꽂 보다는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피나물 곁에서 더 오랫동안 머무르다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더디게 옮겼다. 그 후로 눈에 밟히는 그곳의 피나물 모습에 꽃 피는 때를 기다려 해마다 다시 찾아간다.


샛노랗다. 꽃잎도 꽃술도 온통 노랑색이어서 더 강한 울림이 전해지는 것일까. 과한듯 하면서도 한없이 포근한 온기를 전해주는 것이 할 수만 있다면 저 무리 속에 누워 한동안 안겨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피나물'이라는 이름은 연한 줄기와 잎을 꺾으면 피血와 비슷한 적황색의 유액이 나와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여름이 되면 잎과 줄기는 없어지고 무 열매를 닮은 열매를 맺는다. 유사한 종류로 '애기똥풀'과 '매미꽃'이 있다. 주의깊게 관찰하면 구분이 어렵지 않다.


노랑매미꽃, 선매미꽃으로도 부른다. 홀로서도 빛나지만 무리지어 그 빛남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숲에서 마주하면 나비가 날아가는 듯한 연상이 되는데 '봄나비'라는 꽃말이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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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언어사전
이정록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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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 다시 새겨야할 동심언어

봄날노오란 개나리가 피어 있는 담장 아래 볕 바라기하는 마음과 닮았다따스하고 여유롭기에 무엇이든 다 품에 안을 수 있는 봄날처럼손에 들면 노랗게 봄물이라도 들 것 같은 속삭임이다책이 주는 느낌이 이 봄날의 볕처럼 따스함이 있다독특한 장정도 주목되지만 봄볕마냥 샛노란 표지에 혹시 손때라도 묻을까 염려되어 조심스럽다.

 

'동심언어사전', 사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니 형식은 짐작되는 바가 있으나 어떤 내용을 담았을지 몹시 흥미롭다이 책을 발간한 이정록은 2001년 김수영문학상, 2002년 김달진문학상, 2013년 제8회 윤동주 문학 대상을 수상했으며, ‘제비꽃 여인숙을 포함한 다섯 권의 시집과 동화와 동시를 쓰는 시인이다시인도 처음이고 시인의 글도 처음이기에 첫걸음 내딛는 아이 같은 설렘이 있다.

 

책의 독특한 형식에도 관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책을 주목한 이유는 따로 있다중고등학교 시절 교과서보다 문학작품이나 역사와 인문 서적에 더 관심을 가졌던 사람으로 영어사전보다 국어사전을 더 가까이 했던 경험 때문이다. 30여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하루에도 십여 차례 사전을 찾아 사용하는 낱말의 뜻을 확인하는 버릇이 있다이런 경험과 일상이 이 책 제목과 형식이 주는 흥미로움을 넘어 내용까지 주목하게 만들었다.

 

시인 이정록의 말에 의하면 이 책은 새로운 방식의 시집이다. '가갸날'부터 '힘줄'까지 익숙하거나 생소하거나 때론 의외의 낯선 낱말들로 쓴 316편의 시를 엮었다는 것이다낱말이 가진 본래의 뜻을 물론 낱말과 낱말이 만날 때 생동하는 새로운 의미와 재미와 성인과 아이들 모두의 상상력과 언어적 감수성을 깨우는단어설명서와도 다름 아니다이 책에 수록된 낱말은 모두 순 우리말로 된 복합어로 이루어졌다는 의미 또한 특별하게 다가온다.

 

개미허리가//아무리 잘록한 잔허리라도//맛있는 건 다 지나간다(개미허리 중에서)

사람이 따면//그제야 꽃이 핀다.//슬픈 꽃이 핀다.(꽃상여)

작은 싹눈과 꽃눈이//겨울눈이 되어//함빡눈을 맞습니다.(눈싸움 중에서)

애국 조회 때//한문팔면//그 흐린 군눈들이//언 운동장에 봄을 데려온다.(먼눈 중에서)

출생 기념으로//하느님이 주신 선물이지요.(배꼽시계 중에서)

내 잘못에는 경찰방망이//네 잘못에는 솜방망이//둘 다 마음으로만.(솜방망이 중에서)

 

시인의 시로 다신 탄생하는 낱말들처럼 단어에는 담고 있는 본래적인 의미도 있지만 단어와 단어가 만나 새롭게 형성된 이미지를 만들어 내어 본래의 뜻을 더 깊고 넓게 담아내기도 한다이런 작용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은 언어가 가지는 역할의 확장이며 사용하는 사람에게 상상력을 한층 강화시켜주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탁월한 선택이다낱말의 뜻에 관심을 가져온 사람으로 이런 감성과 상상력으로 가득 찬 시를 만난다는 것은 행운과고 같다낱말 하나하나가 전해주는 봄날의 기운이 가슴에 온기로 스며들어 봄앓이를 하게 만드는 것과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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