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_읽는_하루

아주 넓은 등이 있어

종이를 잘 다루는 사람이고 싶다가
나무를 잘 다루는 사람이고 싶다가
한때는 돌을 잘 다루는 이 되고도 싶었는데
이젠 다 집어치우고

아주 넓은 등 하나를 가져
달[月]도 착란도 내려놓고 기대봤으면

아주 넓고 얼얼한 등이 있어
가끔은 사원처럼 뒤돌아봐도 되겠다 싶은데

오래 울 양으로 강물 다 흘려보내고
손도 바람에 씻어 말리고

내 넓은 등짝에 얼굴을 묻고
한 삼백년 등이 다 닳도록 얼굴을 묻고

종이를 잊고
나무도 돌도 잊고
아주 넓은 등에 기대
한 시절 사람으로 태어나
한 사람에게 스민 전부를 잊을 수 있으면

*이병률의 시 '아주 넓은 등이 있어'다. 내가 내 등에 얼굴을 묻고 한동안 숨을 가다듬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으면 가을볕의 뽀송함을 품은 등이 아주 넑은 등이 아니라도 무방할 것이다. 시월의 마지막날 가을볕의 온기를 품는다. 내 좁은 등에 기댈 누군가를 위해ᆢ.

'시 읽는 하루'는 전남 곡성의 작은 마을 안 찻집 #또가원 에 놓인 칠판에 매주 수요일 올려집니다.

#곡성 #곡성카페 #수놓는_농가찻집 #핸드드립커피 
전남 곡성군 오산면 연화리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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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국'
국화는 노란색이어야 하고 산국이 피어야 국화 피었다고 할 수 있다. 산국 피었으니 온전히 가을이다. 올망졸망 노란 색이 환하다. 중양절 국화주 앞에 놓고 벗을 그리워 함도 여기에 있다. 국화주 아니면 어떠랴 국화차도 있는데ᆢ.


산에 피는 국화라고 해서 산국이다. 국화차를 만드는 감국과 비교되며 서로 혼동하기도 한다. 감국과 산국 그것이 그것 같은 비슷한 꽃이지만 크기와 향기 등에서 차이가 있다. 산국은 감국보다 흔하게 볼 수 있고 가을 정취를 더해주는 친근한 벗이다.


뜰의 가을날 한때를 수놓던 구절초가 시들해지니 그 옆자락 산국도 핀다. 일단 노랑색으로 이목을 끌어 발길을 유도하더니 그보다 더 끌림의 향기로 곁에 머물게 한다.


개국화·산국화·들국이라고도 하는 산국은 감국과 비슷하게 피면서 감국인 것처럼 흉내를 내는 것으로 보고 '흉내'라는 꽃말을 붙은건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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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들로 향하는 마음에 잠시 쉴 틈이라도 내라는듯 하늘이 뿌옇다. 날씨와는 상관도 없다는 듯 살랑이는 바람결에 부질없이 마음만 설렌다. 설악산엔 첫눈이 낙엽만큼 쌓였고 단풍도 이미 진다는데 남으로 내려오는 가을의 걸음걸이는 어찌이리 더디기만 하는지. 

하늘 높은줄 모르는 메타세콰이어도 술지마을의 천연기념물 은행나무도 여전히 푸르기만 하다. 어쩌다 만나는 억새는 부풀었고 쑥부쟁이만 겨우 보라빛을 떨궈내고 있다. 이곳의 가을은 어정쩡하다.

볼따구가 터질듯 부풀어 오른 장두감에 가을볕이 앉았다. 더운 한낮과 차가운 밤을 연거퍼 맞이하고 된서리도 맞아야 속내가 붉어져 비로소 제 맛이 들 것이다. 푸르기마한 감잎에 단풍들 날을 감도 나도 기다린다

계절이나 사람이나 매 한가지. 때맞춰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와야 한다. 괜히 서성거리다가는 된서리 맞는다.

남녘의 단풍잎은 반쯤만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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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닥토닥, 숲길 - 일주일에 단 하루 운동화만 신고 떠나는 주말여행
박여진 지음, 백홍기 사진 / 예문아카이브 / 2018년 10월
평점 :
품절


숲, 그 특별함을 일상으로

지난 늦은 봄 이른 길을 재촉하여 안면도 솔숲을 찾았다제법 먼 길이었지만 이른 아침 솔숲 향기를 맡으며 그 숲에 핀 꽃을 보고자 함이었다아침 햇살이 채 숲으로 들기 전이라 느긋한 마음으로 솔숲을 걸으며 찾고자 하는 꽃의 위치와 분포 정도를 확인하는 동안 소나무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고 그 빛을 받은 꽃을 마음에 품듯이 카메라에 담았다숲에서 벗어나 만나는 가슴 후련하게 확 트인 서해바다는 덤으로 얻은 행복이었다.

 

이런 나들이는 눈 쌓인 이른 봄부터 서리 내리는 늦은 가을까지 꽃을 본다는 핑개로 산으로 들로 다닌다때론 높고 험한 산을 오르기도 하지만 대부분 숲길에서 머문다그러는 사이 꽃이 피고 지는 숲은 다정한 벗이 되었다.

 

'토닥토닥숲길'은 바로 이런 숲과 그 숲을 찾아가는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번역가 아내 박여진과 기자 남편 백홍기가 전국을 누비며 찾아낸 가장 걷기 좋은 아름다운 산책길 62곳을 소개한다.

 

오래된 시간의 흔적을 따라 걷는 강화 교동도에서 출발한 여정은 여운이 짙게 남는 신비한 숲 영월을 지나 흔적만 남은 성곽 아래 평화로운 공주를 거치고 늙은 느티나무를 따라 세월을 돌아보는 괴산에 머물다 발길 닿는 곳마다 삶이 반짝이는 바닷가 마을 남해 미조항천하마을물건마을노도에서 멈춘다북에서 남으로서쪽에서 동쪽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 나선 길이지만 무리수는 두지 않는다.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어쩌다 한번 있을까 말까하는 년 중 행사처럼 치루는 거창한 나들이가 아니다그들이 여행길에서 만끽했던 모든 맛과 멋의 중심에서 주목한 것은 쉽고 일상적이며 반복된’ 나들이에 있다.큰 비용이나 거창한 준비가 없어도 되는 나들이그 중심에 걷기가 있고숲이 있고마을이 있으며사람이 있다. "일주일에 단 하루 운동화만 신고 떠나는 주말여행"이기에 가볍고 부담스럽지 않다뿐만 아니라 여행안내서 답게 현지의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정보가 담겨있다.

 

인근 큰 도시에서 이웃마을로 이사 온 부부와 길을 나섰다차로 10분이면 도착하는 그곳에는 임도가 나 있고 그 임도를 차로 오를 수 있고 산 중턱에 조그마한 암자가 있다암자 밑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임도를 따라 한적한 숲길을 걸었다암자의 유래와 지금은 사라진 비자나무를 이야기한다모퉁이를 몇 개 돌아서 만나는 반대편 산 아랫동네를 보며 자신이 이사 온 마을의 위치를 확인하며 이사 오길 잘했다며 환하게 웃는다숲길을 벗어나며 도시락 싸 들고 다시 찾자는 약속을 한다.

 

굳이 먼 길을 나서지 않아도 좋다는 이야기다이 책의 주인공들이 주말마다 길을 나서듯 가까운 곳을 반복적으로 찾아서 걷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그곳이 어디인가도 중요하지만 얼마만큼 자주 누리느냐에 주목하고자 한다그것이 '토닥토닥숲길'이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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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복숭아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차례 모이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 서지에 연꽃이 피면 구경하기 위해 한 차례 모이고, 국화꽃이 피어나면 한 차례 모이고, 겨울에 큰눈이 오면 한 차례 모이고, 세모에 화분의 매화가 피면 한 차례 모인다. 

모일때 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준비하여 술을 마시며 시가를 읊조릴 수 있게 해야 한다.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부터 준비물을 마련토록 하여, 차례대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까지 한 바퀴 돌아가 다 끝나면 다시 시작하여 돌아가게 한다." 

*정약용의 '죽난시사첩서竹欄詩社帖序'에 나오는 문장의 일부다. 죽난시사는 정약용 선생이 시詩 짓는 사람들과 만든 차茶 모임이라고 한다. 나이가 4년 많은 사람으로부터 4년 적은 사람까지 모이니 15명이었다. 이들이 모여 약속한 것이 이 내용이다.

누구는 운치와 풍류를 이야기하고, 누구는 벗의 사귐을 이야기하고, 누구는 전원생활을 이야기한다. 따지고 보면 이와 비슷한 모임이 없지는 않을 것이지만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가 바뀌어 남쪽으로부터 꽃소식이 전해지면 복수초 필때 한번, 변산바람꽃 필때 한번, 노루귀 필때 한번, 깽깽이풀 필때 한번, 병아리난초 필때 한번, 솔나리 필때 한번, 바위솔 필때 한번, 상사화 필때 한번, 물매화 필때 한번, 금목서 필때 한번, 대나무에 눈꽃 필때 한번 만나 서로 꽃보며 가슴에 품었던 향기를 꺼내놓고 꽃같은 마음을 나눈다. 

챙길 준비물은 따로 있을 까닭이 없다. 꽃 담을 폰이든 카메라든 이미 있고, 그것이 없어도 꽃보며 행복했던 눈과 코 마음이 있기에 빈손으로도 충부하다. 꽃이 시들해지는 때가 가까워오니 꽃보며 만난 사람들이 더 그리워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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