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遠者 近之積也 원자 근지적야"

먼 것은 가까운 것이 쌓인 것이다

*유성룡(柳成龍,1542~1607)이 원지정사(遠志精舍)라는 정자를 짓고 나서 직접 쓴 기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상하 사방의 가없는 공간이나 옛날로부터 흘러온 아득한 시간은 멀고도 먼 것이지만, 이것들은 모두 눈앞의 가까운 것들이 쌓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 내딛는 한 발짝은 지극히 사소하고 보잘 것 없을 수 있지만 결국 언젠가는 보이지 않는 먼 곳까지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잡은 관대는 손에서 따로 놀고 손가락은 제 구멍을 찾아가느라 바쁘다. 호흡은 짧고 입술은 이내 풀려 리드를 붙잡지 못한다. 그러니 소리를 기대하긴 멀었다.

간신히 피리 관대를 통과한 소리가 그대에게 닿길 바라는 것이 욕심인 줄 안다. 그래도 떠난 소리가 다시 내게 돌아와 그대 있음을 확인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아직은 그것이면 족하다. 쌓이고 쌓여 익어 언젠가 그대를 뚫고 하늘에 닿을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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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맞춤이다. 숲에 들면 한없이 느려지는 걸음걸이에 익숙하다. 좌우를 살피고 위아래도 봐야하며 지나온 길에 돌아도 봐야 한다. 높이를 달리하고 속도가 변하면 일상에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거기에 있다. 일부러 그렇게 봐야할 이유를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진행된 행동이다. 숲에 들어 생명을 만나기 시작한 후로 달라진 모습이다.

문득 눈을 들어 몇 걸음 앞 허공에서 멈춘 꽃을 본다. 자신이 본래 간직한 순한 빛을 발하고 있는 모습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순간이다. 눈에 들어오는 순간 주목하는 때를 놓치지 않으려는 반복된 행동의 결과 비로소 가능한 눈맞춤이다. 느린 움직임을 멈추고 내쉬는 숨마져도 조심스럽게 가만히 바라본다.

적절한 때와 장소 그리고 그 앞에 멈춘 내가 하나되어 꽃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다. 순백의 지극한 아름다움에 가슴이 먹먹하다.

꽃이 피었다고 그 꽃이 혼자 저절로 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제는 안다. 관련된 모든 인연이 정성을 다한 수고로움으로 꽃이 피듯이 사람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사람과의 만남, 그 만남으로 인해 형성되는 공감, 이 모두는 시간과 공간이 어우러져 꽃으로 피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대는 이미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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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애기나리'
일부러 발품 팔지 않으면 못보는 꽃이기에 기꺼이 나선 길이다. 길이 멀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꽃이 주는 설렘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인가를 만나기 위해 시간을 내고 일부러 찾아갈 수 있다는 것, 지금 내가 누리는 마음의 평화에서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한다.


워낙 작은 꽃들이 많고 또 그렇게 작은 꽃에 주목하다 보니 작게 느껴지지 않지만 이 역시 작은 꽃이다. 앙증맞은 크기에 연한 황백색의 꽃이 하나에서 둘, 더러는 네개까지 핀다. 얼굴 가득 자주색 반점을 가져서 더 눈길을 끈다. 작지만 꽃잎이 뒤로 젖혀져서 나리꽃의 특징을 보여준다.


금강죽대아재비, 금강애기나리의 새로운 이름이라고 하는데 '국가표준식물목록'이나 '국가식물종지식정보시스템'에는 아직 등록되지 않았다. 이 꽃처럼 꽃에 '애기'라는 이름이 붙으면 대부분 작고 앙증맞은 경우가 많다. 애기나리, 큰애기나리, 금강애기나리가 서로 비슷비슷한데 금강애기나리는 얼굴의 자주색 반점으로 구분하면 쉽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어 '진부애기나리'라고도 한단다. 애기처럼 귀여운 '청순'이라는 꽃말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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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참대'
무엇이든 때가 있나 보다. 같은 꽃을 매년 보지만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예년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높은 산 계곡가에서 환하게 반겨주던 그때를 잊지 못한다.


흰꽃이 많이도 피었다. 독특한 모양의 꽃술을 받치고 있는 속내가 노랗다. 이 노랑색으로 인해 비슷한 꽃을 피우는 다른 나무와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보여준다.


이 나무와 꽃만으로는 혼동하기 쉬운 나무로 말발도리가 있다. 물참대는 잎이 마주나고 표면은 녹색이며 털이 거의 없다. 줄기는 밑에서 많이 올라와 포기를 형성한다.


지리산 노고단 아래에서 첫눈맞춤하고 세석평전 오르는 계곡에서 풍성한 모습을 만났다. 올해 만난 꽃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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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꽃이 뭐라고

새벽길을 기꺼이 나서게 한다. 한겨울 눈밭을 헤치며 산을 오르게 하고, 가던 길 뒤돌아 오게 하며, 눈이 오는지 비가 오는지 해는 언제 뜨는지 날씨에 민감하게 만든다. 높이와 상관없이 산을 오르게 하며,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들로 강으로 불러낸다.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게 하며, 심지어 드러눕게도 만든다. 이 모든 곳이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섬진강 소학정 탐매로부터 시작된 꽃나들이는 이른 봄 하검마을의 계곡을 서성이게 하고, 불갑사 계곡에 들어 먼저 온 봄소식을 맞이하고, 칼바람 맞으며 백아산 구름다리를 건너게 하며, 때를 기다려 8시간 동안 무등산을 오르게 하고, 먼 길을 달려 안면도 소나무숲을 서성이게 하고, 연달아 3주를 노고단을 찾게 하며, 당일치기로 반야봉 정상에 오르게 하고, 30년 만에 다시 세석평전으로 부르고, 비오는 날 남덕유산의 능선을 걷게 하고, 태풍이 도착한 향적봉을 오르게 한다. 백운산의 정상 바위에 서게 하고, 회문산 서어나무를 껴안게 만들며, 안개 낀 동악산 정상 철계단을 내려가고 하고, 옹성산 바위를 걷게 하며, 호젓한 입암산 산성을 둘러보게 한다. 뒷산에 있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묘지를 수시로 살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낯설고 먼 길을 서슴없이 나선다. 스스로 만든 꽃 달력을 매일 반복해서 살피고, 꽃 피었다는 소식 혹시나 하나라도 놓칠세라 멀고 가까운 곳에 귀를 기울이며, 없는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불원천리 찾아간다. 꽃을 못 보는 때에는 모든 것이 꽃으로 보이는 환각을 감당하게 하고 지난 사진첩을 수도없이 반복해서 보게 만든다.

이처럼 결코 찾아오는 법이 없는 꽃을 찾아 기꺼이 시간과 돈을 들인다. 꽃이 부리는 횡포가 실로 엄청나다. 그렇다고 꽃의 갑질에 당하는 것만은 아니다. 아름다운 꽃 보며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고, 꽃향기 품어 사람과의 만남에 꽃향기를 전한다. 꽃 찾아 산과 들로 나도는 사이 몸은 꽃을 키우는 자연을 닮아 건강해지니 다시 꽃 찾아 나서는데 망설임이 없다.

꽃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매개한다. 꽃으로 인해 인연 맺게 하며, 맺은 인연을 끊게도 한다. 처음 보는 사람도 몇 년씩 알고 지낸 사람처럼 가깝게 만들며, 같은 꽃을 찾아 나섰다는 이유만으로도 벗으로 삼게 한다. 꽃 보다 못한 사람은 멀리하면서도 이내 꽃 마음으로 품어 꽃향기 스미게 한다. 나이, 성별, 직업, 사는 곳을 가리지 않고 꽃 안에서 이미 친구다. 모든 지청구를 감당하며 몸이 힘들어 하면서도 다시 먼 길 나서는 것을 반복하는 이유다.

꽃 닮아 환하고, 꽃 닮아 향기 나며, 꽃 닮아 순수하여 천진난만이 따로 없다. 
꽃 보듯 사람을 본다.

*같은 때에 같은 꽃이 불러 1년 만에 다시 세석평전에 올랐다. 새로운 꽃들의 귀한 대접을 받았다. 1년전 세석평전에 다녀온 후 쓴 글을 불러와 그 감회를 돌아본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참으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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