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이라고 했다. 해마다 이때쯤이면 먼 산 바라보듯 일부러 외면했던 꽃이 피는 곳이다. 멀기도 먼 곳이기에 마음 내기를 주저한 것이겠지만 때가 되면 만나질거라며 위안 삼기도 했다. 동강할미꽃이다.

1박 2일 일정으로 나선 길이다. 남쪽에는 안보이는 속이 노란 깽깽이풀도 실컷 보고 처녀치마의 넓은 치마를 들춰보기도 하면서 먼 길을 돌고 돌아 동강에 접어 들었다.

접첩산중, 해를 두어시간 보면 하루가 저물것만 같은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는 하늘아래를 구비구비 흐르는 강이더라. 도저히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풍경이 낮설어 눈은 흐르는 강물에 맡긴 시간이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 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 든다"

강물처럼 흐르는 정선 아라리 한대목 쯤은 들을줄 알았던 동강의 시간에 보고자 했던 할미 웃음도 보고 할미 옆에서 수염 느려뜨리고 느긋하게 곁을 지키는 할아버지 수염도 만져보았다.

불원천리 달려온 동강에 섬진강을 생각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는 모른다. 끝내 아라리는 듣지 못했고 남쪽 이방인의 시간은 짧기만 했다.

먼길 청해주고 기꺼이 시간을 함께해준 꽃친구 평상 선생님의 마음으로 가능했던 봄날이 더없이 포근했다. 함께 한 이인환 선생님의 사진으로 동강의 시간을 다시 더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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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고'

놓치고 싶지 않은 꽃이 어디 한둘일까. 그래도 선택하라면 빼놓을 수 없는 꽃이다. 매년 찾아가던 가까운 숲을 두고 멀리서 만났다.

 

청노루귀, 깽깽이풀 처럼 화려한 색도 아니다. 그렇다고 얼레지 처럼 요염하지도 않다. 그저 순한 백색에 줄기에 비해 다소 큰 꽃을 피운다. 까치무릇이라고도 부른다.

 

하여. 가냘픈 소녀를 보는 안타까움이 있고, 가슴 속 깊이 묻어둔 사연 하나쯤 간직하고 있는 여인으로도 보인다. 얼레지가 스크린 속 공주라면 산자고는 담너머 누이다.

 

향기로 모양으로 색으로 뽐내기 좋아하는 온갖 봄꽃 중에 나같은 꽃도 하나쯤 있는 것이 좋잖아요 하는 소박한 이의 자존심의 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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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춘探春

"매화는 얼음이나 백옥 같은 자태와 맑고 매운 절개가 있다. 나는 매화가 처사와 매우 닮아 있어 매우 사랑하였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날이 차고 봄이 늦게 오기 때문에 매번 섣달이 되어서도 꽃이 필 생각은 적막하기만 하였으니, 여러 다른 꽃들과 별로 다른 것이 거의 없어 내가 실로 이를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화분을 옮기고 방안에 넣어두어, 시를 짓고 술을 마시는 사이에 그와 더불어 몇 년을 지낸 다음에야 꽃이 일찍 피고 늦게 피는 것이 나에게 달려 있게 되었고, 이른바 납매臘梅라는 것도 종종 있게 되었다."

 

*홍태유의 조고매문弔枯梅文(말라죽은 매화를 애도하는 글)이다. 매화에 대한 지극정성이 상상을 뛰어 넘는다.

 

탐매探梅에 나선 이들의 이야기가 그림과 글로 남아 전해져 온다. 눈 내린 들판에 나귀 타고 가는 모습이나 매화 핀 초가집에 창을 내고 밖을 보는 모습이나 '매화는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말에 의지한 선비들의 정신이 담긴 글들이 그것이다.

 

이밖에도 강희안의 '양화소록'에는 매화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가득하다. 고매ㆍ설중매ㆍ도심매 등 지금은 거의 알 수 없는 매화 종류부터 매화분을 기르는 방법과 매화분을 방으로 들이거나 물을 데워서 주거나 하면서 꽃을 일찍 피우는 방법까지 옛사람들의 매화에 들인 정성이 가히 상상을 넘어선다.

 

섬진강에 매화 피면 보자던 벗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흡족하게 내리는 봄비와 더불어 강을 따라 부춘골로 길을 나섰다. 안개 낀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봄 기운이 그곳은 이미 봄 한가운데 있었다.

 

섬진강가 숨겨두고 싶은 곳에서 느긋한 시간을 함께 한다. 강을 배경으로 꽃핀 고매古梅에 물 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넉넉한 자연을 품고 한 시절 넋놓고 지내도 좋을 곳이다. 간혹 찾아 마음에 선물하고픈 곳이다.

 

다소 어수선한 세상이라 밖으로 나서길 꺼려할 수밖에 없고 사람 모이는 곳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문 밖으로 나서길 권한다. 매화 핀 강가나 한적한 산길을 걸어보며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 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시우時雨, 단비다.

벗과 더불어 오는 봄을 한발 앞서 마중가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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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리'

수많은 식물들 중에는 보고 또 봐도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있고, 어떤 것은 스치듯 한번의 눈맞춤으로 뇌리에 각인되어 잊히지 않은 것도 있다. 그 식물이 갖는 특성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보는 이의 감정과 의지에 따라 크게 좌우될 것이다. 첫 눈맞춤 이후 내 뜰에 들여왔는데 올해 더 풍성한 꽃을 피웠다.

 

히어리, 잎도 나오지 않고 아직 찬기운이 남아 있는 봄날 가느다란 가지에 땅을 보고 길게 자라듯 피는 꽃을 셀 수도 없을만큼 많이 달았다. 연노랑인듯 연녹색이듯 오묘함 색감에 역사 속 옛사람들의 귀걸이를 닮은 듯 생긴 모양도 독특하다. 여기에 가을 단풍까지 한몫 단단히 하는 나무다.

 

히어리라는 이름은 순수한 우리 말로 발견 당시 마을 사람들이 뜻을 알 수 없는 사투리로 '히어리'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이것이 그대로 정식 이름이 됐다고 한다. '송광납판화松廣蠟瓣花'라고도 하는데 이는 처음 발견한 곳이 송광사 부근이어서 그대로 따왔고, 꽃받침이나 턱잎은 얇은 종이처럼 반투명한 것이 특징인데, 밀랍을 먹인 것 같아 납판蠟瓣이라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특산식물로 지리산을 대표하는 깃대종이기도 하다. 봄 숲속에서 새들이 노래하듯 봄 소식을 전해준다. '봄의 노래'라는 꽃말이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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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_읽는_하루

물새 발자국 따라가다

모래밭 위에 무수한 화살표들,
앞으로 걸어간 것 같은데
끝없이 뒤쪽을 향하여 있다

저물어 가는 해와 함께 앞으로
앞으로 드센 바람 속을
뒷걸음질치며 나아가는 힘, 저 힘으로

새들은 날개를 펴는가
제 몸의 시윗줄을 끌어당겨
가뜬히 지상으로 떠오르는가

따라가던 물새 발자국
끊어진 곳 쯤에서 우둑하니 파도에 잠긴다

*손택수의 시 '물새 발자국 따라가다'다. 앞만 보고 가는 것처럼 살아가지만 실은 걸어온 뒤쪽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뒤를 돌아보는 일, 꽃이 피고 새가 날며 내가 오늘을 사는 힘일지도 모른다. 지금 누리는 봄도 다 겨울 덕분이다.


'시 읽는 하루'는 전남 곡성의 작은 마을 안에 있는 찻집 #또가원 에 놓인 칠판에 매주 수요일에 올려집니다.

#곡성 #곡성카페 #수놓는농가찻집 #곡성여행 #섬진강 #기차마을 #나무물고기 #구례통밀천연발효빵
전남 곡성군 오산면 연화길 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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