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있는 널 보러 길을 나섰다.

마침 봄소식을 전해주는 비까지 내려 나선 길을 축복하는 날이다.

오랜 기억 한자락을 차지하는 너이지만 이제 막 보고 돌아선 아쉬움처럼 남아있었기에 조금은 무거운 발걸음이다.

 

그동안 너무 많은 애를 썼나보다.

차가운 겨울 바닷바람으로 키워온 수줍고도 진한 그리움을 찾아주는 사람들 가슴마다 나눠준다는게 쉬운일이 아니었던게지. 더군다나 하도많은 시간동안 같은일을 반복했을 널 이해 못하는건 아니다.

...

 

하여, 지금 네 모습이 마치 이제는 뒷방에서도 서러운 퇴기같아 보여도 너를 탓하지 못한다. 너의 향기와 색에 목숨까지 사랑한다고 외치던 그 많던 사람들의 욕심과 우둔함을 탓할밖에ᆢ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비종 2015-02-22 1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때로는 존재 그 자체보다 환경에 의해 정체성의 일부가 정의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똑같이 붉은 꽃이라도 동백에게서는 강인한 정열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매서운 겨울 바람에 맞선 생명력, 삭막한 무채색 사이에서 `그곳에 가면 있는` 따스함이 많은 의미를 부여하게 합니다. 향기가 없는 대신 빛깔로만 새를 유혹한다는 점도 왠지 어울려 보이구요. 향기조차 꽁꽁 얼어붙어 버릴 듯한 계절에 적절한 생존 방식으로 여겨집니다.
얼마 전에 읽은 카피라이터 정철 님의 「한글자」에 나왔던 글귀가 생각나네요. `꽃은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아름다움은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라구요^^
 
섬 택리지 - 강제윤의 남도 섬 여행기
강제윤 지음 / 호미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문학적 시각으로 바라본 바다와 섬

내게 섬은 로망 중 하나다.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하지만 바다와 섬은 늘 가보고 싶은 곳이며 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어릴 적 바다 근처에서 살았다는 것도 그 이유 중하나일 것이며 삼면이 바다고 섬 또한 부지기수로 많은 남쪽 땅에서 살았다는 것도 한몫 차지할 것이다. 그렇게 가까이 바다와 섬이 있지만 섬이나 바다에 주목하지는 못했다. 아니, 주목하지 않았다는 말이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던 중 2006년 발행된 일상과 역사를 가로지르는 우리 바다 읽기라는 주강현의관해기라는 책을 통해 바다와 섬 그리고 그 속에 살아왔던 사람들에 관심을 가졌다. 나에게 '관해기'는 바다를 인문학적으로 살피는 첫 책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후 강제윤의 '섬 택리지'를 만났다. ‘숨어사는 즐거움을 발간하던 보길도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섬을 떠돌기 시작한 것으로부터 강제윤이 섬에 주목하여 자신의 발로 섬을 찾아다닌 지 십 여 년이 지났다고 한다. 그렇게 발로 쓴 섬 탐사여행기가 일곱 번째 책으로 묶였다. 그 책이 바로 섬 택리지 : 강제윤의 남도 섬 여행기.

 

'섬 택리지'는 조선시대 영조 때 이중환이 지은 우리나라 지리서 택리지에서 따온 제목이라고 한다. 이중환의 책처럼 본격적인 지리서는 아니지만 이중환의 택리지가 뭍과 사람 사이에서의 인문학적인 관계를 살폈다면, 섬 택리지는 바다와 섬이라는 자연환경과 인간 생활을 인문학적인 시각에서 살폈다.

 

도초도의 고란리는 이 나라에서 돌담들이 가장 완벽히 보존된 마을 중 하나지만 나그네에게 발견되기 전까지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장산도와 신의도의 백제시대 고분들과 흑산도에 삼국시대 존재했던 국제 해양도시의 유물들을 비롯해,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어업 유물인 생선을 절이는 데 사용한 간독들이 섬의 풀숲에 파묻혀 있다.”

 

이처럼 저자가 발품 팔아 섬을 돌며 발견한 돌담이나 독살 같은 유형의 보물이 적지 않다. 그밖에도 삼백 년 된 국보급 옛 선창이나 독살, ‘원안의 논같은 해양문화 유적과 어업 유물이 뿐 아니라, 뭍을 그리워하는 섬사람들의 애환을 담은 가거도 할머니의 민요, 제주도 이어도 사나의 흑산도 버전이랄 수 있는 흑산도 해녀 할머니가 불러주는 진리 뱃노래와 같은 구성진 들노래 등이나 흑산도 진리 당집의 피리 부는 소년과 처녀귀신의 사랑 이야기, 비구니와 비구의 사랑이 놓은 애틋한 노둣돌 이야기 등 무형의 보물들이 산재해 있음을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섬 역시도 개발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곳이다. 방조제나 조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 파괴되는 갯벌과 문화유산, 해안도로를 내기 위해 어부림(魚付林)을 파괴하고 천 년 된 당집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체육공원이 들어서는 것을 보는 안타깝다.

 

남도 섬을 여행하며 인문학적 시각으로 섬을 읽어보자는 강제윤의 시각이 따스하다. 섬 문화와 해양 유산, 역사와 지리, 인물 등 유형과 무형의 숨어 있는 보물을 발견하고 이를 어떻게 보존하며 지킬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결국 섬이라는 단절된 공간이었기에 가능했을 사람의 이야기를 이제는 주목해 보자는 말 일 것이다. 강제윤, 그가 있어 섬이 더 가까이 다가온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비종 2015-02-14 07: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공간으로서의 `섬`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육지와 떨어져있지만, 바닷속으로는 연결되어 있으니 온전히 동떨어진 공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육지인 듯 육지 아닌 육지 같은 너ㅎㅎ `섬`은 `시`와도 같습니다. 과감하게 생략된 부분이 물 밑에 잠겨있다는 점에서. 시를 감상하는 사람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해석을 하듯이, 섬도 바라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여러 의미를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사람들 마음 안에 있는 섬을 생각합니다. 추상적이긴 하지만 저마다 섬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뭔가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고독과 함께 부록처럼 자유가 주어지는.
 

"차고 맑은

가을,

성근 숲,

달이 뜬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병진년화첩 중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

조선 1796, 종이에 수묵 담채, 삼성미술관 리움, 보물 제782

 

그 달을 보았는가

개기월식이라고 붉은 달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다. 늘 다른 모습의 달이지만 달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그 모습으로 있다. 다만, 눈에 보이는 것이 다른 달로 느끼게도 한다. 달에 주목하며 살아온 시간이 제법 된 나에게 달을 담은 그림 하나가 언제나 머릿속에 있다. 깊어가는 가을 밤 아주 잘 어울리는 그림이다.

 

이 그림을 떠올리게 된 계기가 있다. 이른 퇴근으로 억새 사이로 반짝이는 석양을 바라보다 익숙한 무엇이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분명 비슷한 이미지를 어딘가에서 봤는데...잠시 후 김홍도의 그림 한 점이 오버랩 되었다.

 

소림명월도우리가 익히 아는 조선 후기 화가 단원 김홍도의 그림이다. 풍속화가로 인식된 측면이 강하지만 산수, 인물, 화조, 시 등 다양한 부분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소림명월도를 김홍도의 작품이라고 하면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흔하게 보이는 풍경이고 눈을 사로잡을만한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강한 끌림이 있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을 보고 있는 듯 현장감이 살아있다. 겹쳐진 나뭇가지 사이로 달이 가려져 있지만 그 존재가 확실히 드러난다. 조선시대 유명했던 산수화, 진경산수와는 다른 맛이 분명하다. 일상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으나 일상에서 느끼는 평범함 보다는 달과 나뭇가지들이 품어내는 아우리가 심상치 않다. 익숙하지만 그 익숙함을 넘어선 경지가 있다.

 

'소림명월도'에 대해 오주석은 가장 심상(尋常)한 것이 가장 영원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가을이 어느 가을인가? 지난해 가을인가? 이백 년 전 가을인가? 계절과 자연에 대한 이 완벽한 감정 이입은 보는 이의 숨길을 턱 막을 지경이다...... ‘소림명월도는 사람이다. 가을을 보고 그것을 느꼈으나, 마음에 잔물결 하나 일으키지 않고, 있는 가을 그대로 관조할 수 있었던 사람, 스스로 자연과 하나가 됐던 김홍도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살아 당시 이미 절정기에 이르고 왕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화가 김홍도에게는 자신을 거듭나게 할 무엇이 필요했을까? 추운 겨울을 대비하여 자신을 돌아보는 계절이 가을이다. 자연뿐 아니라 사람도 이와 닮았다. 유독 가을을 건너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말없이 더 튼 울림으로 전달되는 성찰의 이미지가 전해진다.

 

김홍도를 김홍도답게 알게 하는 가장 어울리는 그림이 아닐까?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월간미술, 2009)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비종 2015-02-14 1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홍도의 선이라고 생각해왔던 분위기와 전혀 다르네요. 사람의 고정관념이란 얼마나 오류가 많은 건지. 풍속화 아닌 다른 그림들을 접하면서 김홍도라는 화가를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그림에서 끌림이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그림의 특정 부분에 감정이입이 되기 때문이라 생각하는데요, 흐린 선인듯 시선을 끄는 달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묘합니다.(이 와중에 텔레토비의 햇님이 생각난다는^^;)
 
슬픔을 권함
남덕현 지음 / 양철북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이제 우리 슬퍼할 권리를 찾자

연암 박지원의 글 중 사장(士章) 애사(哀辭)에는 나는 매양 모르겠네. 소리란 똑같이 입에서 나오는데, 즐거우면 어째서 웃음이 되고, 슬프면 어째서 울음이 되는지. 어쩌면 웃고 우는 이 두 가지는 억지로는 되는 게 아니다. 감정이 극에 달해야만 우러나는 게 아닐지. 나는 모르겠네. 이른바 정이란 어떤 모양이건대 생각만 하면 내 코끝을 시리게 하는지. 그래도 모르겠네. 눈물이란 무슨 물이건대 울기만 하면 눈에서 나오는지. 아아, 남이 가르쳐주어야만 울 수 있다면 나는 으레 부끄럼에 겨워 소리도 못 내겠지. 아하, 이제야 알았다. 이른바 그렁그렁 이 눈물이란 배워서 만들 수 없다는 걸.”라는 대목이 있다.

 

울기만 하면 눈에서 나오는 물이 눈물인데 그 눈물이 나올 수 있는 근원에 슬픔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하여, 슬픔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눈물은 그 슬픔을 치유하는 중요한 기회가 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는 슬픔을 올바로 받아들이고 그와 동반되는 울음을 울 수도 없는 현실을 강요하고 있다. 박지원은 눈물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눈물을 배워서라도 슬픔을 치유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울음을 울 수도 없는 현실을 강요하는 사회에 적극적으로 슬픔을 권하는 사람이 있다. 2013충청도의 힘으로 주목 받았던 남덕현이 그 사람이다. 그는 나는 슬플 때 가장 착하고, 슬플 때 가장 명징하며, 슬플 때 가장 전복적이다.”라며 슬픔이 가지는 본래적 의미를 인문학으로 풀어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도처에 죽음, 가난, 차별 등으로부터 서러움을 안고 살아간다. 특히, 2014년은 세월호 사건 이후 대다수 국민들은 슬픔을 전재로 한 분노를 다스릴 수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강요받은 위로와 희망에 슬퍼할 기회조차 빼앗겨 정당한 슬픔을 치유해야할 권리조차 상실한 것이다. 이런 사회적 환경에서 어설픈 희망과 기쁨보다는 차라리 절절한 슬픔과 절망이 고단한 삶을 치유할 수 있다며 남덕현은 그 슬퍼할 권리를 되찾자고 억설한다.

 

남덕현은 슬픔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하여, 묶인 개, 늙은 어미와 이웃 노인들, 스치는 바람뿐 아니라 수시로 자기 자신을 직시하며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한다. 그 질문 속에는 해학의 미학이 함께하기에 슬프지만 웃음이 동반한다. 남덕현은 이렇게 일상적인 자신의 주변 뿐 아니라 죽어간 세월호 아이들과 굴뚝 위의 노동자들을 보면서 그 슬픔의 사회적 가치에 주목한다. 그냥 슬퍼하는 시늉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으로 슬픔이 스며들어 있는 현장에 당당하게 서 있다. 억눌린 슬픔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 말이다.

 

기쁨과 희망을 권해도 환영 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슬픔을 권한다는 것 자체가 역설이다. 하지만 그 역설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은 곧 나는 슬플 때 가장 착하고, 슬플 때 가장 명징하며, 슬플 때 가장 전복적이다.”라는 남덕현의 슬픔에 대한 성찰이 사람을 향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비종 2015-02-27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물을 마셔도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되고, 젖소가 마시면 우유가 된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가끔 리뷰나 페이퍼 등 글을 쓸 때를 되돌아보면, 슬플 때 마음을 울리는 글이 더욱 잘 써졌던 것 같습니다. 글이란 정직해야 하는 거니, 슬플 때 사람은 가장 정직한 자신의 모습과 마주 하게 되나 봅니다.
얼마 전 읽었던 「한글자」에서는 글에 대하여 이렇게 써 있더군요. ˝글을 쓴다는 건. . 바다를 바다라고 말하는 용기를 내는 것˝ 이라구요. 슬플 때 가장 정직해진다면, 슬플 때 쓰는 글은 용기를 동반하기도 하고, 그래서 가장 전복적일 수도 있겠네요^^
 
조선의 풍경, 근대를 만나다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엮음 / 채륜서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과 100여 년 전, 우리의 모습

우리음악에 정악과 민속악이라는 분야가 있다. 정악은 제례악을 중심으로 한 궁중음악을 민속악은 민간에서 생겨나 민중 생활의 일부로서 전해 내려오는 음악을 말한다. 민속악이라고 하면 민요·농악·판소리·선소리·잡가·풍물놀이·산조·시나위 등 민중이 창작하고 즐기던 음악을 말한다. 이 중 산조는 민속악에 속하는 기악 독주곡이다. 이 산조라는 부분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길게 잡아야 18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겨우 100여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국악의 대표적인 갈래로 인식되어졌다.

 

이렇듯 불과 100여년 사이 우리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맞았다. 하여, 조선이라고 하면 머나먼 이야기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모습은 언제부터 비롯되었을까? 현대 사회 이전을 근대사회라 한다면 그 근대사회의 직접적인 영향일 것이다. 우리에게 근대는 어느 시기로 구분되어야 할까? 보통은 개화기로부터 일제강점기까지를 근대라고 시대구분을 한다.

 

조선의 풍경, 근대를 만나다는 현대사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근대풍경에 주목하여 당시 변혁의 시기를 거치면서 찾아온 사회적 변화, 그리고 그 때문에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는 순간을 포착하여 그 시대를 대표하는 풍경 열 가지를 찾아 우리 삶 속에 어떤 과정을 통해 정착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저자들이 주목했던 욕망이라는 늪에 빠진 사람들’, ‘어른와 아이의 놀이 문화’, ‘만들어진 전통, 현대 한국인의 풍속을 주제로 선별한 열 가지 풍경은 속에는 인간의 욕망과 관련된 근대의 미적 기준과 성병에 주목하여 망의 늪에 빠진 근대의 시대상황을 설명하고,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통해 근대의 새로운 놀이 문화가 가진 의미를 살펴보고 서양식 장난감의 등장과 함께 일어났던 여러 일화를 다루었으며, 크리스마스는 물론, 어린이날과 꽃놀이, 현대의 결혼 문화가 어떻게 조선에 뿌리내리게 되었는지,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등을 살펴보고 있다.

 

조선이라는 전통사회가 밀려드는 외국의 사상과 기술, 문화에 급격한 변화를 강요받았던 시기를 시작으로 주권을 빼앗기고 일제강점기를 보내면서 전통의 것에서 벗어나 현대 생활양식을 이루게 된 문화의 변화를 살피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기본적 시각은 근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전통생활방식과 변화된 생활방식을 어떻게 수용하고 향유하는지에 있어 보인다. 이 시기를 주름잡았던 대표적인 풍경 속에 현대인들의 일상 속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과의 연관성을 포착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우리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누리고 있는 현대 한국인의 풍속은 신문화와 전통문화가 만나 탄생한 것으로 이것이 조선 사회에 정착하여 현대 한국 사회에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전통이 된 것이다. “현대문화가 전통과의 단절이 아니라 우리의 옛 전통문화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바로 이 지점이 이 책에서 근대의 풍경을 살피는 목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