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갈하다'

자연스럽다는 것 속에는 사람의 손길이 닿았지만 억지를 부려 욕심내지 않은 상태를 포함한다. 또한 시간을 거스르는 것이 아닌 앞서거니 뒷서거니 그 시간과 동행하는 것이리라. 그 가운에 정갈함이 머문다.

나무둥치 위에 가즈러히 흰고무신 한컬레 놓였다. 뒷축을 실로 꼬맨자리가 어설퍼 보이지만 단정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닫힌 문이라지만 조심스럽게 머리 위 글귀를 따라 읽는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토방에 놓인 고무신이 정갈한 주인의 마음자리를 닮았으리라. 굳이 청산별곡을 읊조리지 않아도 이미 마음은 청산 그 한가운데 머문다.

가만히 흰고무신을 들었다. 두 손으로 가슴에 대어보고 그 자리에 놓았다. 주인의 정갈한 마음자리가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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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닭개비
아침에 일어나 산책하듯 뜰을 거닌다. 아침을 깨우는 새들만큼 부지런한 꽃이 환한 미소로 반긴다.

색의 조화가 만들어낸 절묘함이다. 어울림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듯 멋과 맛을 함께 보여준다. 만개한 널 보려면 햇살 환하게 비치는 아침이 좋다.

꽃은 5월경에 피기 시작하고 자줏빛이 돌며 꽃줄기 끝에 모여달린다. 꽃받침조각과 꽃잎은 3개씩이고 수술은 6개이며 수술대에 청자색 털이 있다. 꽃은 아침에 피었다가 날이 흐리거나 오후가 되면 시든다.

식물체를 통해 환경의 상태를 알아낼 수 있는 식물을 지표식물이라고 하는데 자주닭개비가 방사선에 대한 지표식물이다. 오랜 기간 동안의 방사선의 노출정도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원자력발전소의 주변에 심고 있다고 한다.

자주달개비라고도 불리지만 국가표준식물목록에는 자주닭개비가 추천명이다. 이 곱기만 한 꽃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외로운 추억', '짧은 즐거움'이라는 꽃말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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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로白露'다.

가을의 기운이 완연히 나타나는 시점으로 삼는다. 백로는 흰 이슬이라는 뜻으로 이때 쯤이면 밤에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풀잎이나 물체에 이슬이 맺히는 데서 유래했다.

뜨거운 볕 아래 맥문동이 힘찬 기운으로 솟아오르는 물줄기를 배경 삼았다. 여름볕과는 분명 다른 질감으로 다가오는 볕이다. 가을날의 까실함이 여기로부터 오는 것은 아닐까싶다. 그 성질이 뭇 곡식과 과일을 영글게 하는 것이리라.

속담에 "봄에는 여자가 그리움이 많고, 가을에는 선비가 슬픔이 많다"라고 한다. 백로를 지나면 본격적인 가을이다. 혹, 반백의 머리로 안개 자욱한 숲길을 넋놓고 걷는 한 사내를 보거든 다 가을 탓인가 여겨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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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리향
안개 자욱한 가야산 정상에서 무수히 펼쳐진 꽃밭을 걷는다. 천상의 화원이 여긴가 싶을 정도로 만발한 꽃밭은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한다. 첫인상이 강렬하다.

연분홍 꽃이 바닥에 융단처럼 깔렸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겨우 보이는 꽃들이 무리지에 핀 모습이 환상적이다. 잎도 작고 꽃도 작지만 큰 무리를 이루니 제 세상이다.

'향기가 발끝에 묻어 백리를 가도록 계속 이어진다'는 뜻에서 백리향이라 했단다. 잎에서도 꽃에서도 향기를 품고 있으니 그 향은 땅끝까지 갈 것이다.

유사한 '섬백리향'은 울릉도 바닷가 벼랑 끝 혹은, 섬 전체 바위틈새에서 군락을 이루며 사는 우리나라 특산종으로 천연기념물 제52호라고 한다.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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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피고 지고 또 피는
우리나라 꽃

絶命詩
鳥獸哀鳴海岳嚬 조수애명해악빈
槿花世界已沈淪 근화세계이침륜
秋燈掩卷懷千古 추등엄권회천고
難作人間識字人 난작인간식자인

절명시
금수도 슬피 울고 산하도 요동치니
무궁화 세상 이미 망했네.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천고를 돌아보니
인간 세상 지식인 노릇 참으로 어렵구나.
-황현, 매천집 권5 경술고

*알고 보면 반할 꽃시(성범중ㆍ안순태ㆍ노경희, 태학사)에 삼십 팔번째로 등장하는 황현(黃玹,1855~1910)의 시 "絶命詩 절명시"다.

한여름 햇볕의 열기가 기승을 부릴 때부터 시작되어 가을까지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꽃이 무궁화다. 꽃 색깔이 다양하며 7월부터 10월까지 100여 일간 계속 피므로 무궁화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꽃 곧 나라 꽃이라고 익히 알고 있는 꽃이다.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의 행전안전부 국가상징을 찾아보면 국화로 무궁화가 올라와 있다. 이 책에서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무궁화를 국화로 공포한 것도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무궁화가 우리나라 상징하는 꽃으로 관련된 문헌으로는 '산해경', '지봉유설', '임하필기', '오주연문장전산고', '해동역사', '동국문헌비고' 등에서 '산해경'과 '고금기'를 인용하여 '근화'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꽃임을 말하고 있다.

출퇴근하는 길 곳곳에 무궁화가 보인다. 꽃의 색깔로만 대충 차이를 알 뿐 여러 가지 종류의 무궁화를 구분하진 못한다. 흰색으로 피는 꽃잎의 고급스러운 느낌을 보고서야 또다른 매력을 발견 하기도 했다. 봄이 삽목의 적합한 때라고 하니 꽃이 달리 피는 두어가지 나무를 눈여겨 봐 두었다. 봄을 기다리고 있다.

*'알고 보면 반할 꽃시', 이 책에 등장하는 꽃시를 따라가며 매주 한가지 꽃으로 내가 찍은 꽃 사진과 함께 꽃에 대한 내 나름의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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