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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갗을 뚫을 듯한 땡볕도 습기가 덜하니 견딜만 하다. 소나기라도 한판 지나갔으면하면서 비를 기다리는 것은 작물뿐 만은 아니다. 날기를 포기한 새들과 그늘에서 일어날줄 모르는 고양이, 그 모습에 눈길을 건네는 길손까지 흰구름 떠가는 하늘을 일부러 외면하고 있다.

마지막 꽃잎을 떨구는 연蓮이다. 색과 모양, 무엇보다 은은한 향기로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잠깐의 시간이었다. 하나 남은 저 잎마져 떠나보내야 비로소 다음으로 건널갈 수 있다. 연실을 튼실하게 키우고 다음 생을 기약하는 일이다.

볕을 더하고 바람을 더하고 비를 더한다. 무게를 더하고 시간을 더하고 마음을 더하는 동안 깊어지고 넓어진다.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은 자연이 열매를 키워 다음 생을 준비하는 사명이다. 어디 풀과 나무 뿐이랴. 존재하는 모든 것은 현재를 살아 다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관계의 결과물이다.

깊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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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은 폭염으로 숨 쉬는 것조차 버겁다하더라도 이미 아침 기온에선 서늘함이 느껴진다. 올 여름은 가뭄이라 습기를 좋아하는 녀석들에게는 좋은 때는 아닌가 보다. 두어번 걸음에도 눈맞춤을 못하고 있다.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해서 무엇하리"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의 일부다. 내게도 물, 돌, 소나무, 대나무, 달까지 다섯 모두 어느 하나라도 빼 놓을 수 없는 좋은 친구다.

오늘은 대나무竹에 주목한다. 대나무를 떠올리면 추운 겨울 눈쌓인 대나무밭의 시리도록 푸른 모습이 으뜸이지만 이 여름에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 여름날 대나무밭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며 바람결에 댓잎 부딪히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가 시켰으며 속은 어이 비었는가.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오우가 중 대나무竹를 노래한 부분이다. 엄밀하게 구분하면 대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다. 풀이니 나무니 구분에 앞서 대의 무리群가 가지는 곧고 푸른 특성에 주목하여 벗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파아란 하늘에 뭉개구름 둥실 떠간다. 모습으로만 보면 가을 어느 한 날을 뚝 떼어다 옮겨놓은 것 같은데 내리쬐는 햇볕은 인정사정이 없다. 이런날은 대숲에 들어 피리 연주자 김경아의 '달의 눈물'을 무한 반복으로 듣는다면 좋겠다.


https://youtu.be/kHBUhH_sZw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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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과 그늘 사이를 오가며 계절을 건너간다. 볕에 나서서 그늘의 소중함을 알고 그늘에 들어서야 볕의 존재를 확인한다. 이처럼 우리를 둘러싼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에게 본질로 이끄는 힘으로 작용하니 무엇하나 사소하게 볼 일이 없다.

진흙에 뿌리 내렸지만 꽃 피워 향기를 전하는 연꽃도 다르지 않다. 그 꽃이 지며 온 곳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사명을 마쳤으니 미련도 없을 것이다.

연꽃잎은 세상에 나와 반야(般若 : 일체의 사물과 도리를 밝게 통찰하는 더없이 완전한 지혜)를 얻었을까?

반야용선(般若龍船)이 경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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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듯 하지만 불쑥 치닿는 감정이 있다. 버거운 일상에서 지난날을 돌아보게 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그것이다.

사회적 약자들이 꽃길을 걷게 하고자 했던 이가 그 몸 마져 버렸던 날이다. 꽃에 물든 마음은 어디에 깃들어 있을까.

"꽃에 물든 마음만 남았어라
전부 버렸다고 생각한 이 몸속에"

*벚꽃과 달을 사랑하며 일본의 헤이안 시대를 살았던 가인으로 다양한 작품을 남긴 '사이교'의 노래다.

강한 볕과 맞짱이라도 뜨려는듯 강렬한 기운을 전하는 꽃이다. 강물의 품 속에 핀 꽃을 보기 위해 허리를 숙여 몸을 낮춘다. 스치는 풍경이 아니라 일부러 주목하여 멈추는 일이고, 애써 마련해둔 틈으로 대상의 색과 향기를 받아들이는 정성스런 마음짓이다.

꽃은 보는 이의 마음에 피어 비로소 향기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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鶴 학

人有各所好 인유각소호
物固無常宜 물고무상의
誰謂爾能舞 수위이능무
不如閑立時 불여한입시

사람마다 각자 좋아하는 바가 있고
사물에는 원래 항상 옳은 것은 없느니라
누가 학 너를 춤 잘 춘다고 했나
한가롭게 서 있는 때만 못한 것을

*백거이白居易(772-846)의 시다. "不如閑立時 불여한입시" 크게 덥다는 대서大暑에 의외로 신선함을 전하는 바람결에 놀란다. 때문인가. 이 싯구가 문득 떠올라 오랫동안 머문다.

요동치는 세상에서 중심을 잡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 그러하니 나 또한 그 요동에 너무도 쉽게 휩싸이게 된다. 말이 많아지고 시류에 흔들리는 몸따라 마음은 이미 설 곳을 잃었다.

긴 목을 곧추 세우고 유유자적 벼 사이를 걷는 학의 자유로움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숲 속의 꿩도 그 이치를 안다는듯 고개를 곧추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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