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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탐라유람기
처음부터 느긋했다. 몇해 동안 같은 시기에 짠물을 건너는 경험이 그리 만들기도 했겠지만 한결 여유로운 마음가짐이 느긋함을 불러온듯 싶다.

그것은 바다를 건너는 마음뿐만이 아니었다. 그토록 쫓아 다니던 꽃 앞에서도 느긋한 여유를 부린다는 것과 더 많은 꽃을 보기위해 몸을 잽싸게 움직이던 예전과는 분명히 달라진 점이다. 1년 사이에 달라진 벗들의 허약한 몸을 탓하기보다는 한결 여유로운 마음가짐이라 여기기에 몸 간수 못한 벗들을 책망할 수도 없다.

불타는 태양 아래 바닷빛 닮은 하늘과 적당한 바람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할 것 없이 벗들의 백발을 날린다.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훔치는 손길에도 여유가 넘친다.

거문돌들의 뾰쪽한 마음들이 속내를 감추지 않는 바닷가다. 여전히 조심스런 발걸음을 옮기며 참나리, 갯장구채, 해녀콩, 섬쑥부쟁이, 엉겅퀴, 개맥문동, 타래난초ᆢ 피고지는 꽃들 사이에 단연 돋보이는 황근의 은근한 미소는 찌는 더위를 날려버리기에 바람보다 더 강한 매력을 뽐내고 있다. 첫눈맟춤 이후 통째로 마음을 훔처간 황근을 본 것만으로도 이번 탐라유람의 팔할은 이룬 셈이다.

곶자왈을 품고 있는 올티스의 길고 긴 여름밤은 벗들과 꽃피운 이야기의 향기는 담장을 넘어 바람과 어울리고, 반가운 벗이 왔다고 마중나온 노루와 마침 지붕 너머로 떠오른 초승달이 알듯모를듯 미소를 건넨다.

다음날 새벽 잠을 깨운 새소리와 함께 느긋한 하루를 연다. 꽃에 대한 애정은 둘째가라면 서운해할 교래폔션의 뜰은 언제나 정겹다. 유독 이뻣던 지난해 금꿩의 미모를 잊지 못해 지나치지 못했던 마음에 환한 꽃등이 켜진다.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는 화분들은 탐라 특유의 꽃들로 넘치고 꽃을 나눠주는 눈가엔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더 반가운 미소다.

한라산의 속살을 보러 길을 나섰다. 무엽난과 흑난초는 우거진 숲에서 무거운 습기와 더불어 살아기에 땀을 흘리는 것은 예으라도 되는 양 연신 흐르는 땀방울을 훔칠 생각도 없다. 못보나 싶었던 실꽃풀도 그곳에서 만났다.

이제 꽃은 뒷전으료 밀려나고 헤어짐의 시간을 어떻게 더 알차게 보낼지가 중심에 선다. 사계해안의 참나리가 산밤산과 형제섬을 놓고 누구와 더 잘 어울리는지 내기하는 것이 만만찮다. 벗들과는 상관없이 바다 가운데 형제섬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별은 짧아야 한다고 했던가. 늘 건너 간 것보다 건너 온 것이 더 풍성하다. 시간이 남아 한곳을 더 간 벗들의 놀림을 뒤로하고 오른 비행기 창문으로 솜털구름으로 가볍다. 이내 짠물을 건너올 벗들과의 시간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꽃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벗들의 마음이 이토록 장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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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쯤이었다. 숲길에서 떨어진 꽃을 보고서야 꽃이 핀 것을 확인하는 일이 몇해를 두고 반복되었다. 독특한 수피가 좋고 만지면 맨질거리는 질감과 더불어 차가운 기운을 전해주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이 나무의 매력이다.

순박하기 그지없는 꽃을 피워 통으로 떨군다. 쉽게 상하는 꽃잎이 마침 장맛비에 이그러진다. 마지막까지 처절한 속내를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내놓고서야 다음 생으로 건너갈 수 있다는 듯 주저함이 없다. 그모습이 좋아 매번 나무 그늘로 들어선다.

한해의 절반을 무사히 건너왔다. 다시 맞이할 시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으니 내일도 한가지임을 의심치 않는다. 딱, 그 경계에서 피고지는 노각나무 꽃을 바친다.

헌화가, 

꽃마음을 온전히 누리는 것은 받는 이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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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암요. 처음 그곳을 간 것은 한밤 중 누군가에 의해 이끌려 갔다. 첩첩산중이지만 까만 밤하늘이 환하게 열린 곳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때 나눈 이야기 중 근처에 물매화가 핀다는 사실을 듣고 다음해에 다른 이를 채근하여 주인장의 안내를 받을 때 였다. 그후로는 물매화 필 때면 괜히 미안한 마음에 알리지도 못하고 살며시 꽃만 보고 온 것이 두번이다.

이미산 천태암에서 하룻밤을 묵고 내려온 길에 물매화 보는 일에 다리를 나줬던 이가 불쑥 그곳에 가자고 한다. 그 해맑았던 주인장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따라갔다. 갑작스런 일이지만 이런 일에 대비코자 차 안에 넣어둔 작은 차탁을 꺼내 들었다. 빈손으로 가기 애매할 때 요긴하게 쓰기 위해 준비한 것이 있어 다행이었다.

하늘은 여전히 넓었으며, 도자기 굽는 가마가 하나 더 늘었고, 매실나무는 더 컷고, 두마리 개가 주인보다 더 반겨 맞아 준다. 찾는 사람이 드물어 몹시도 반가운가 보다.

황소만한 몸집에 우락부락한 손이지만 순하디순한 눈매를 지녔다. 만들어 내는 도자기 모두는 만지면 깨질듯 아기자기하고 섬세하기만 하다. 주인장의 심성이 고스란히 담긴 것으로 이해한다.

주인보다 먼저 다실에 들었다. 마음을 사로잡는 모습 앞에 우두거니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정갈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분위기다. 다음을 기약하지도 못했지만 잠시 나눈 이야기로 든든함을 안고 산길을 나섰다.

마음에 담았으니 이젠 내것이나 매 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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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後小詠 다후소영

小甁汲泉水 소병급천수
破鐺烹露芽 파쟁팽로아
耳根頓淸淨 이근돈청정
鼻觀通紫霞 비관통자하
俄然眼翳消 아연안번소
外境無纖瑕 외경무섭하
舌辨喉下之 설변후하지
肌骨正不頗 기골정부파
靈臺方寸地 영태방촌지
皎皎思無邪 교교사무사
何暇及天下 하가급천하
君子當正家 군자당정가

차를 마시고 나서 작게 읊다

조그마한 병에 샘물을 길어다가
묵은 솥에 노아차를 끓이노라니
귓속은 갑자기 말끔해지고
코끝엔 붉은 놀이 통하여라
잠깐 새에 흐린 눈이 맑아져서
외경에 조그만 티도 보이질 않네
혀로 먼저 맛 보고 목으로 삼키니
기골은 바로 평온해지고
방촌의 마음 밝고 깨끗하여
생각에 조금의 사도 없어라
어느 겨를에 천하를 언급하랴
군자는 의당 집부터 바루어야지

*고려사람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시다. 저서로는 목은문고(牧隱文藁)와 목은시고(牧隱詩藁) 등이 있다.

장마철로 접어들었다고 하나 비는 여전히 만나기 어렵다. 습기 많은 날이라 더운 공기가 정신을 더없이 탁하게 만든다. 차디찬 물에 발 담그고 물 흐르는 소리나 듣고자 하나 그것도 나와는 먼 일이라 생각 속에서만 머문다. 이런 날에는 가만히 앉아 차 달이는 향기를 떠올리는 것도 스스로를 다독이는 좋은 방법이다.

정갈하게 만든 차와 맑고 깨끗한 물이 있다면 굳이 솥까지 갖출 필요가 있겠는가. 여기에 정성을 더하여 달인 차를 마주할 수 있다면 그만이다. 잘 우려진 차를 마시기 적당한 온도까지 기다렸다가 한모금 마신다. 입안에 번지는 향과 맛에 집중하다보면 평화로운 마음을 누리기에 이만한 것도 없다.

비 소식은 먼 곳에서만 들리지만 흐려지는 하늘에서 비를 예감한다. 창가에 맺힌 빗방울을 상상하는 것과 차 달이는 향기를 떠올리는 것이 서로 다르지 않다.

더운 여름이기에 더 좋은 차맛을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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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坐自彈琴 독좌자탄금
獨飮頻擧酒 독음빈거주
旣不負吾耳 기불부오이
又不負吾口 우불부오구
何須待知音 하수대지음
亦莫須飮友 역막수음우
適意則爲歡 적의칙위환
此言吾必取 차언오필취

홀로 앉아 거문고 타고
홀로 잔 들어 자주 마시니
이미 내 귀를 저버리지 않고
또 내 입을 저버리지도 않았네
어찌 꼭 음률 알아주길 바랄 건가
함께 마실 벗 기다릴 것 없구려
뜻에만 맞으면 즐겁다는
이 말을 나는 따르리라

*고려사람 이규보(1168~1241)의 시 '생각나는 대로' 다. 어쩌다보니 요즘 이 옛사람의 시를 자주 만난다. 시간을 초월하여 情이 통하는 것일까 싶다가도 그냥 피식 미소지으며 나를 돌아 본다.

혼자서 잘 노는 것이 나이들어가는 이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 들었는데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知音지음을 얻는다는 이야기는 선택받은 이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면 혼자 즐기는 獨樂독락이야말로 즐거움의 으뜸이 아닐까.

더위에 지친 일상에 꽃이 건네는 미소가 참으로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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