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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쯤이었다. 숲길에서 떨어진 꽃을 보고서야 꽃이 핀 것을 확인하는 일이 몇해를 두고 반복되었다. 독특한 수피가 좋고 만지면 맨질거리는 질감과 더불어 차가운 기운을 전해주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이 나무의 매력이다.

순박하기 그지없는 꽃을 피워 통으로 떨군다. 쉽게 상하는 꽃잎이 마침 장맛비에 이그러진다. 마지막까지 처절한 속내를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내놓고서야 다음 생으로 건너갈 수 있다는 듯 주저함이 없다. 그모습이 좋아 매번 나무 그늘로 들어선다.

한해의 절반을 무사히 건너왔다. 다시 맞이할 시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으니 내일도 한가지임을 의심치 않는다. 딱, 그 경계에서 피고지는 노각나무 꽃을 바친다.

헌화가, 

꽃마음을 온전히 누리는 것은 받는 이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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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암요. 처음 그곳을 간 것은 한밤 중 누군가에 의해 이끌려 갔다. 첩첩산중이지만 까만 밤하늘이 환하게 열린 곳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때 나눈 이야기 중 근처에 물매화가 핀다는 사실을 듣고 다음해에 다른 이를 채근하여 주인장의 안내를 받을 때 였다. 그후로는 물매화 필 때면 괜히 미안한 마음에 알리지도 못하고 살며시 꽃만 보고 온 것이 두번이다.

이미산 천태암에서 하룻밤을 묵고 내려온 길에 물매화 보는 일에 다리를 나줬던 이가 불쑥 그곳에 가자고 한다. 그 해맑았던 주인장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따라갔다. 갑작스런 일이지만 이런 일에 대비코자 차 안에 넣어둔 작은 차탁을 꺼내 들었다. 빈손으로 가기 애매할 때 요긴하게 쓰기 위해 준비한 것이 있어 다행이었다.

하늘은 여전히 넓었으며, 도자기 굽는 가마가 하나 더 늘었고, 매실나무는 더 컷고, 두마리 개가 주인보다 더 반겨 맞아 준다. 찾는 사람이 드물어 몹시도 반가운가 보다.

황소만한 몸집에 우락부락한 손이지만 순하디순한 눈매를 지녔다. 만들어 내는 도자기 모두는 만지면 깨질듯 아기자기하고 섬세하기만 하다. 주인장의 심성이 고스란히 담긴 것으로 이해한다.

주인보다 먼저 다실에 들었다. 마음을 사로잡는 모습 앞에 우두거니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정갈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분위기다. 다음을 기약하지도 못했지만 잠시 나눈 이야기로 든든함을 안고 산길을 나섰다.

마음에 담았으니 이젠 내것이나 매 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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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後小詠 다후소영

小甁汲泉水 소병급천수
破鐺烹露芽 파쟁팽로아
耳根頓淸淨 이근돈청정
鼻觀通紫霞 비관통자하
俄然眼翳消 아연안번소
外境無纖瑕 외경무섭하
舌辨喉下之 설변후하지
肌骨正不頗 기골정부파
靈臺方寸地 영태방촌지
皎皎思無邪 교교사무사
何暇及天下 하가급천하
君子當正家 군자당정가

차를 마시고 나서 작게 읊다

조그마한 병에 샘물을 길어다가
묵은 솥에 노아차를 끓이노라니
귓속은 갑자기 말끔해지고
코끝엔 붉은 놀이 통하여라
잠깐 새에 흐린 눈이 맑아져서
외경에 조그만 티도 보이질 않네
혀로 먼저 맛 보고 목으로 삼키니
기골은 바로 평온해지고
방촌의 마음 밝고 깨끗하여
생각에 조금의 사도 없어라
어느 겨를에 천하를 언급하랴
군자는 의당 집부터 바루어야지

*고려사람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시다. 저서로는 목은문고(牧隱文藁)와 목은시고(牧隱詩藁) 등이 있다.

장마철로 접어들었다고 하나 비는 여전히 만나기 어렵다. 습기 많은 날이라 더운 공기가 정신을 더없이 탁하게 만든다. 차디찬 물에 발 담그고 물 흐르는 소리나 듣고자 하나 그것도 나와는 먼 일이라 생각 속에서만 머문다. 이런 날에는 가만히 앉아 차 달이는 향기를 떠올리는 것도 스스로를 다독이는 좋은 방법이다.

정갈하게 만든 차와 맑고 깨끗한 물이 있다면 굳이 솥까지 갖출 필요가 있겠는가. 여기에 정성을 더하여 달인 차를 마주할 수 있다면 그만이다. 잘 우려진 차를 마시기 적당한 온도까지 기다렸다가 한모금 마신다. 입안에 번지는 향과 맛에 집중하다보면 평화로운 마음을 누리기에 이만한 것도 없다.

비 소식은 먼 곳에서만 들리지만 흐려지는 하늘에서 비를 예감한다. 창가에 맺힌 빗방울을 상상하는 것과 차 달이는 향기를 떠올리는 것이 서로 다르지 않다.

더운 여름이기에 더 좋은 차맛을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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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坐自彈琴 독좌자탄금
獨飮頻擧酒 독음빈거주
旣不負吾耳 기불부오이
又不負吾口 우불부오구
何須待知音 하수대지음
亦莫須飮友 역막수음우
適意則爲歡 적의칙위환
此言吾必取 차언오필취

홀로 앉아 거문고 타고
홀로 잔 들어 자주 마시니
이미 내 귀를 저버리지 않고
또 내 입을 저버리지도 않았네
어찌 꼭 음률 알아주길 바랄 건가
함께 마실 벗 기다릴 것 없구려
뜻에만 맞으면 즐겁다는
이 말을 나는 따르리라

*고려사람 이규보(1168~1241)의 시 '생각나는 대로' 다. 어쩌다보니 요즘 이 옛사람의 시를 자주 만난다. 시간을 초월하여 情이 통하는 것일까 싶다가도 그냥 피식 미소지으며 나를 돌아 본다.

혼자서 잘 노는 것이 나이들어가는 이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 들었는데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知音지음을 얻는다는 이야기는 선택받은 이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면 혼자 즐기는 獨樂독락이야말로 즐거움의 으뜸이 아닐까.

더위에 지친 일상에 꽃이 건네는 미소가 참으로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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井戱作 정희작

不對靑銅久 부대청동구
吾顔莫記誰 오안막기수
偶來方炤井 우래방조정
似昔稍相知 사석초상지

우물에 비친 얼굴을 보고 장난삼아 짓다

오랫동안 거울을 보지 않았더니,
내 얼굴이 통 기억이 나지 않아
우연히 우물에 막 비친 모습은
전에 어디서 얼핏 본 듯한 녀석일세

*고려사람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시다. 무신정권기를 살며 당대의 명문장가였다. 저서로 동국이상국집이 있다.

거울을 본적이 있던가? 아침 마다 수염을 깎으면서도 제 얼굴이 가물가물 하는 것이 셀카가 일상인 시대를 살면서도 남의 일이라 여겼으니 제 얼굴 볼 의지가 없는 것으로 봐야 한다.

옛사람들이야 방법이 없었으니 겨우 물에 비친 얼굴 보는 것이 전부였을 것이라 제 얼굴 잊어 먹은 게 이해가 된다.

뭔가 어색함을 피할 방법이 없어 프로필도 뒷모습이다. 이것도 큰 마음을 낸 결과이니 무엇이 제 얼굴 보기를 이토록 어렵게 하는 것일까. 세상 보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 산 속 꽃에나 눈길을 둔다.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때를 놓치지 않고 숲에 들어 꽃을 찾는 것은 혹 잊어버린 제 얼굴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어리석음은 아닌지. 전생의 기억을 찾아 헤매는 일이 만만치 않다.

꽃에서 제 얼굴을 만날 수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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