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살림, 철학에게 길을 묻다 - 지구 살림의 길, 철학이 답하다
신승철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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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살림, 철학에게 길을 묻다‘는 후쿠오카 신이치의 ’생명해류‘에서 언급된 갈라파고스와 관련이 있다. 저자는 다윈은 갈라파고스에 가서 진화의 신비를 발견했지만 만일 그곳에 철학자가 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묻는다. 이는 현대문명의 대안을 구상하는 차원의 말이다. 물론 후쿠오카 신이치는 직접 갈라파고스 제도를 방문했고 저자는 그렇지 않다는 차이가 있다.

 

생명, 생태, 생활을 범주로 삼원 다이아그램을 그린 저자는 자신의 책이 세상을 관조하도록 만드는 창문이 아니라 거주지를 벗어나서 세상에 들락날락하며 접속을 만들어내는 창문이 되기를 희망한다. 1부 동물, 생명 그리고 철학/ 2부 세 가지 생태학/ 3부 탄소 중독적 문명/ 4부 에너지, 석유 정점/ 5부 성장의 한계 등으로 이루어졌다.

 

저자는 객관적인 진리가 있다는 플라톤의 실재론에 맞서 반실재론의 입장에서 강의록을 준비했다. 저자는 철학이 네모는 네모다라는 식의 고정관념 대신 네모가 세모가 되고 세모가 원이 되고 원이 별표가 될 수는 없는지, 되어서는 안 되는지를 묻고 그 답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은 다채로운 변화를 유발하는 잠재성의 뾰족한 측면을 개념화하는 작업이며 이에 따라 현실세계는 욕망과 사랑, 정동의 비표상적인 흐름이 갖는 잠재성 자체이지 표상적인 고정관념으로 이루어진 실재가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저자의 책을 통해 과학, 실험실 등에 대해 알 수 있음은 다행이다. 저자에 의하면 근대 과학은 서로 연결된 종합적 현실을 어떻게 분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실험실이라는 이상적인 평균 상태의 공간이 필요해진 것이다.(23 페이지) 생명 각각의 개체가 갖고 있는 특이성과 창의적인 능력이 모두 보편적이고 추상화된 질서 속에 놓이는 것이 실험실 공간이다.

 

플라톤의 보편적 형상은 어떤 개체적 속성도 배제된 채 똑같은 조건에 갇힌 실험동물의 모습과 같다. 플라톤의 실재론과 동물실험실을 연결시켜 사유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 사람은 프랑스의 과학자 철학자인 브뤼노 라투르다. 라투르는 돼지 뇌 3,000개를 녹여서 만든 TRF라는 물질은 실험실에서는 실재하지만 자연환경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물질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쿼크 입자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에 의하면 쿼크 입자는 사실상 과학 실험실에서만 존재하지 자연환경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듯 반실재론의 질문은 의학, 생명공학, 과학 등에서 당연히 진리라고 여기던 것들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플라톤의 이데아 세상은 현실 세상을 넘어 아주 다른 진리의 공간을 조성했으며 그것은 마치 실험실과도 같은 이상화된 공간일 뿐이다.

 

원자 단위 이하의 물질에 빛(광자)을 쏘는 순간 이미 그 물질은 튕겨져 나가거나 변화해 버린다. 눈으로 보고 관찰하는 것조차도 하나의 개입이다. 저자는 반실재론자다. 반실재론이란 지식이란 스스로의 힘과 삶이 구성한다는 점에서 구성주의다. 객관적인 진리를 밝히는 것이 철학의 목표가 아니며 진리는 스스로 자기 생산하고 구성한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기성 아카데미에 기반한 사람들로부터 진리의 추구를 포기하는 것 아니냐는 강력한 항의를 들어야 했다.

 

저자는 이에 진리는 그 일을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고, 뜨겁게 그 일을 해낼 사람이 만들어지고 열정과 욕망, 열정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구성적 실천의 순간에 등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분리시키고 격리시켜 이상화하는 방식 즉 분석적 실재론의 방식이 아니라 공유지에서의 연결과 접속, 접촉을 통해서 암묵지, 노하우, 집단지성, 오픈 소스 등을 추구하는 것이 생태적 지혜라고 말한다.

 

데카르트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생명의 고통에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생각들의 인식론적 기반 중 많은 부분이 데카르트로부터 비롯되었다. 공장식 축사에서는 동물을 생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존엄이 배제되어 있는 단어인 도체(屠體)라고 부른다. 도체는 반도체나 물체와 유사하게 들리는 말이다. 사전적 의미로 도체는 도살한 가축의 가죽, 머리, 발목, 내장 따위를 떼어낸 나머지 몸뚱이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데카르트는 신체를 가진 존재가 아닌 의식하는 존재만을 주체로 간주했다. 저자는 동물을 대하는 태도가 인간을 대하는 태도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데카르트의 기계 개념에 반대되는 것이 들뢰즈, 가타리의 기계 개념이다. 이는 데카르트의 기계학처럼 하나의 큰 구조에 종속되어 부품처럼 움직이는 폐쇄되고 코드화된 기계가 아니라 그 자체가 자기 생산하며 외부에 대해 열려있는 네트워크나 생태계 ,공동체와 같은 자율적인 기계로 구상되었다.

 

이러한 기계 개념은 자동적인 기계가 아니라 자율적인 기계를 의미하며 동일성 반복의 기계 혹은 반복강박 기계가 아닌 차이 나는 반복의 기계 혹은 편위 운동의 기계를 의미한다. 데카르트의 자동기계 개념을 비판한다고 해서 기계 전부를 거부하고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계 작동은 신체와 동물들에 대한 경멸 속에서 구축되었던 자본주의 문명을 고장내고 자율적인 움직임을 도모하는데 사용될 수도 있다.

 

또한 동물을 자동 기계라고 간주하는 근대주의는 이에 대한 반박으로 등장한 생명에 대한 존엄성에 대한 문제 제기의 반격을 받았다. 이 문제제기는 근본주의 노선인 동물권리론과 현실주의, 점진주의, 개량주의 노선인 동물복지론 사이에서 과정적이고 진행형적인 동물보호운동 노선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근본주의와 현실주의의 이러한 긴장관계에도 불구하고 생명은 기계가 아니며 공장식축산업은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하다는 공통된 인식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생태중심주의는 생태계라는 연결망의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능력에 주목하면서 각각의 개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따로 분리되거나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는 일종의 시스템적 사유로 나아간다. 저자는 피터 싱어의 유정성(有情性) 논의가 수동의 정동에만 머물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가 대안으로 내세우는 개념은 스피노자의 정동 개념이다. 스피노자는 능동의 정동인 기쁨과 수동의 정동인 슬픔을 구별하면서 서로에게 윈윈이 되고 기쁨이 될 수 있는 민주주의의 구도를 구상한 바 있다.

 

정동은 기본적으로 외부로부터 촉발된다는 점에서 수동이다. 그래서 수동의 수동으로서의 정동인 슬픔이라는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정동이 동물에게 분명히 있지만 더 나아가 수동의 능동으로서의 정동 즉 서로 상호 긍정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쁨의 정동 역시도 있는 것이다. 정서가 감정이 발생할 수 있는 근원이라면 정동은 그 저변에 흐르는 힘과 에너지다. 정동이 움직일 때의 마음이라면 감정은 꼼짝 안 할 때의 마음이다.

 

감정은 우발적인 사건과 표상에서 발생하는 정서표현 양식이고 정동은 표상과 표상, 사건과 사건을 이해하고 횡단할 때 생기는 강도, 온도, 밀도, 속도와 같은 강열도의 정서 변환 양식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공동저작은 욕망과 무의식을 주제로 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성과 의식 중심의 기존 서양철학과 달리 우리 내부에 있는 욕망의 야생성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아주 심원한 무의식과 욕망의 지연도 속에서 자본주의는 정신분열증과 유사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이 두 사람의 지적이다.

 

정신분열증은 야생성이 억압된 동물들에게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정형행동에 비유될 수 있다. 정형행동은 자유롭게 대지와 영토를 뛰어놀고 움직이고 자라는 욕망이 억압되는 순간 만들어지는 협착과 폐색 이후의 심상을 의미한다. 자본주의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욕망의 야생성을 억압하여 가족, 국가, 신 내부로 감금해야 하며 그 때문에 마치 야생동물이 철창에 구속되면 보여주는 모습처럼 무의식에 구속복이 생겨 정신분열증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이 억압되어 구속된 정신분열증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욕망의 야생성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탈주로와 지평을 개척한다는 것이 두 사람의 주장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본주의 아래서 가족이라는 세포 단위로 관리되고 있는 인간들이 원래는 광야에서 늑대 무리처럼 횡단하고 이동하고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야생동물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일관되게 서술하고 있다.

 

그들은 욕망을 분출하여 색다른 집단을 이루는 것을 분열이라고 주장하며 자본주의에서의 정신분열증과 구별하였다. 분열은 야성적인 욕망이 폭발할 정도로 생명 에너지와 활력이 넘치고 흐르는 상태를 의미한다. 현존 문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책들에 대해 반문명증이라는 규정을 내리면서 공격한다. 이 두 사람이 아이, 광인, 여성, 동성애자 등 소수자 주체성 내부에서는 생명의 에너지와 활력의 역동성과 같은 사자와 늑대의 야생성을 지상에 등장시키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함께 쓴 ’천 개의 고원‘에는 동물 되기에 대해 언급한 장이 있다. 되기의 개념은 스펙트럼이 매우 넓어서 사람마다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이 되기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고 나서였다고 말한다. 스피노자에게 되기는 변형이라는 개념으로 나타내는데 쉽게 생각해서 자신의 입장이나 위치에서 벗어나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사랑하고 신체가 변형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상대의 정동에 감응하여 사랑하기에 자신의 몸과 마음이 미세하게 달라지는 것을 느끼는 것이 변형이며 동일성의 철학처럼 사랑하기에 같아지는 것이거나 커먼즈나 공통성의 철학처럼 사랑하기에 닮아가는 것과는 궤도를 달리한다. 철학적으로 ’되기’는 흐름의 전통을 형성해왔고 ’이기’는 존재의 전통을 형성해왔다. 물론 주류의 철학은 이기의 전통이 장악하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동물 되기는 인간 자신에 대한 야생적 생명력을 되찾자는 개념이다. 이것은 현존 문명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반역적이고 역행적으로 느껴질만한 개념이다. 보통 생태주의라는 개념은 자연생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가타리는 우리의 마음과 사회적 관계로까지 그 개념을 확장시킨다.

 

가타리에게 마음 생태학, 사회생태학, 자연생태학이라는 개념이 세 가지 생태학이다. 저자는 전체론적 입장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생태계라는 개념을 나무와 숲의 비유를 통해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따로 떨어져 있는 나무 100그루보다 서로 연결되어 숲을 이룬 나무 50그루가 외부 환경에 더 잘 맞설 수 있다고 한다. 숲 내부에는 외부환경과 구분되는 내부환경이 생겨서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속성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전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질서로서의 생태계의 윤곽이 어렴풋이 느껴졌다고 저자는 말한다. 머레이 북친의 사회생태주의는 인간에 의한 인간에 대한 지배가 인간에 의한 자연에 대한 지배의 원인이 된다고 본다. 그리고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의 최고 형태는 계급 문제를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이기에 반자본주의 투쟁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태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또한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 양상이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 형태로 나타난다는 에코 패밀리즘도 사회생태주의와 공명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 가타리는 ‘세 가지 생태학’이란 책에서 마음생태, 자연생태와 더불어 사회생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사회적 관계와 배치의 변화 없이 생태위기에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 인식의 전제조건에 질문을 던지면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감행했다. 인식은 대상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인 마음의 문제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제기한 것이다. 즉 인식주체의 문제인 어떻게 인간의 인식이 가능한가, 어떻게 이성적인 사유가 가능한가?의 문제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핵심적인 질문이었다.

 

인간의 인식은 한계가 있으며 결국 대상 그 자체를 알 수 없고 인식의 그물망에 걸려든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토성 그 자체는 알 수 없으며 망원경에 비친 토성이라는 영상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근대사회에서는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개념이 중요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자연과의 관계회복으로의 전회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칸트의 선험적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이성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자연을 파악할 수 없다는 함의를 갖고 있다. 선험적이라는 개념은 자연도, 생명도 인간이 없다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다. 칸트는 선험적이면서도 종합적인 판단으로 수학이나 자연과학, 물리학 등을 사례로 든다. 칸트는 자신의 선험적 종합판단이 필연적이면서도 정보량을 확장하는 합리적인 인식능력이라고 스스로 평가하지만 단지 사고 실험이나 논증구조 개념의 구도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저자는 칸트의 종합판단은 생태계의 원리로서의 종합이 아니라 단순히 사고실험에 기반을 둔 인식의 방법론상에서의 종합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범주와 도식을 통해서 세계를 파악하려는 칸트의 복잡한 그물망을 보면서 사실 그러한 그물망으로도 대상 세계인 자연을 완벽히 파악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오히려 인간의 인식이나 앎은 자연의 일부만을 파악할 수 있을뿐 자연과 생태계 전체를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물(物) 자체를 이야기하는 칸트는 겸손하게 말할 것이다. “내가 아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지만 남달리 정교한 방법을 갖고 있다.” 자신을 낮추면서도 어필하는 그의 말이 상당히 호소력 있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저자는 생명의 구성주의를 언급한다. 이는 ‘앎 = 함 = 삶‘의 구도를 갖는다. 이는 학(學)이라는 아카데미아 전통이 아닌 습(習)이라는 도제조합의 전통을 복원하는 것이다.(172 페이지)

 

칸트의 인식론적 구성주의는 생명 활동이 전제되지 않은 인식의 그물망에 불과했지만 생명의 구성주의는 생명활동 자체가 스스로의 존재와 인식을 구성하는 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저자는 폴 비릴리오의 질주학(dromology)에 대해 이야기한다. 공간의 정치가 무력화된 곳에는 속도의 정치만이 존재하게 된다. 비릴리오는 전쟁에서 속도가 도입된 최초의 사례를 손자병법에서 찾는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지피지기 백전불태라는 구절로 유명한 손자병법은 사실 전쟁에 속도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병법서다. 이 책은 적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아주 기동적으로 적과 싸울 것을 제안한다. 비릴리오는 2500년전 손무가 보여준 ’속도를 전쟁에 도입하는 생각‘을 정치 전략적인 관점에서 분석한다. 손무 이전에는 전쟁을 적에 대한 무차별 기만이나 후방교란, 기동전과 같은 속도가 개입된 요소보다는 진지, 참호, 요새, 성곽 같은 영토적인 성격으로만 바라 보았다.

 

손자병법은 이후 전세계 군사전략가들에 의해 연구되었고 그 최종 결과물이 나치의 전격전이었다. 현대의 정치는 근본적으로 속도에 기반한 파시즘의 리듬으로 숨쉬며 작동한다. 오늘날 초국적 자본은 매끄러운 운동이 보여주는 속도의 정치를 통해 국가라는 차단벽마저 무력화시키려 한다. 파시즘의 전격전보다 더 빠르고 무시무시한 속도를 내는 일상이 민중에게 요구된다. 그 이유는 민중이 다른 생각을 품고 모여 거리를 점거하는 등의 특이한 방식으로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속도에 몸을 싣고 있는 직장인, 노동자, 시민들은 그것이 바로 자신을 파괴하는 것인 줄 꿈에도 모른 채 무작정 앞으로 달려가며 자동차에 몸을 싣는다. 오늘날 질주하는 자동차 문명을 멈추기 위해서는 시간의 바리케이드를 쌓아야 한다. 경쟁사회와 속도 사회에서 정지는 곧 죽음이지만 생명과 자연에게 정지는 지속이며 창조적 진화의 출발점이다.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인 자동차 문명 내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속도에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달려가며 그것이 자본주의 외부를 상실시켜 세계 어디에나 똑같은 삶을 인식하는 과정이란 것을 알지 못한다. 일본의 경우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태에 뜻 있는 시민들과 지식인들이 움직여서 매주 금요일 완전 재가동을 반대하는 자양화(紫陽花; 수국) 혁명이라는 시위를 조직했다.

 

2012년 7월 15일 도쿄 남부의 요요기 공원에는 20만명의 인파가 몰려 들었다. 이 집회를 주도한 수도권 반원전 연합은 처음에 시작할 때 30명을 목표로 한 집회가 20만명의 거대한 시위대로 확산되리라고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저자는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나 국가주의는 니체 본인의 입장과는 거리가 멀지만 니체가 초인을 이야기할 때 가치 창조자로서 생성과 긍정의 시각을 보이면서도 공동체나 사회가 가지고 있는 기존 가치를 모두 거부하고 기존의 사회적 관계망을 초극한 인물로서 초인을 설정한 점은 역사적 왜곡의 근거가 되었다고 말한다.

 

나치는 핵 개발을 시도했다. 이는 독일 우정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엄청난 물량과 인력이 투자되었지만 나중에는 나치가 핵개발이 될 때까지 전쟁을 끌면 불리하다는 판단해서 재정후원이 약화되었다. 당시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원리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아 유명해진 하이젠베르크는 베를린 물리 연구소 소장으로 나치의 핵무기 개발에 관여하고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나치의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중수(重水)를 실은 배가 연합군에 의해 파괴되었다거나 나치의 핵무기 기술이 미국의 핵개발 계획인 맨하튼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 등을 조사를 통해 밝히고 있다.

 

역사적인 실증조사가 어떻게 이루어졌건간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의 독일 점령은 나치 핵무기 개발을 중지시키고 그 기술력을 미국 등 연합국에 이전시키것으로 보인다. 나치의 핵개발 시도는 니체의 초인 사상이 핵을 통해 완결될 수 있다는 점을 직관적으로 의식한 결과로 나타났다. 아주 국지적이고 부분적인 영역에서의 원자들의 충돌이 연쇄반응으로 전체 사회를 파괴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원자 폭탄의 원리는 사실 가치 창조자이자 가치 파괴자인 초인 사상의 궤적을 따른다.

 

핵 에너지는 생명과 생태와 무관하게 색다른 움직임이 될 수 있다는 양자 수준의 가치 창조자인 초인의 다른 모습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핵 에너지는 파시즘의 숨결을 가지고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폴 비릴리오는 핵이야말로 현대 속도 문명의 최종적인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자본주의 문명이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값싼 석유였다. 석유는 태양에너지를 받아 증식했던 생명들이 1억년 가량 농축되고 발효되어 만들어진 고농도 에너지원이다.

 

사실 어떤 에너지원도 석유 만큼 농축 비율이 높지 못하다. 기후 위기 상황의 도래는 성장과 축제가 끝났으며 다른 방식의 문명을 수립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재의 문명은 미래세대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모든 것을 탕진하고 소모하겠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할 것 같다. 이런 생각은 석유에 기반해서 성장과 발전을 이루었던 근대화 과정에 대한 향수와 낭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축제는 끝났고 무대는 철거되고 있다. 기후위기에 따른 생태계 파괴와 생물대멸종의 위기가 너무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는 가톨릭 가정의 안정되고 안락한 분위기에서 성장하였으나 나치 정권에 동조한 프랑스 비시정권의 비굴함과 이에 동조하는 기성세대의 위선에 대한 반항심 속에서 청년시절을 보냈다. 푸코는 대학 시절 온몸을 자해한 채 교정에서 발견된 적이 있는데, 그것이 동성애에 의한 자기혐오와 수치에 의한 것인지 기성세대의 혐오와 니체 사상에 의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는 결국 정신병원에 가게 되었고 그 속에서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를 만났다. 그의 책 ’광기의 역사‘의 소재이기도 한 그 시기의 경험은 그가 근대의 주체와 진리를 의심하게 되었던 내재적인 이유가 되었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현대인들이 사용하는 에너지의 양은 봉건제 때의 말 20필과 하인 20명에 해당하며 도시 중산층의 삶의 수준은 세종대왕이 누렸던 생활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화석연료 이전 모든 에너지는 소수의 권력에 집중되어 있어서 개인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수많은 영역에서의 미시 권력은 개인에게 분산되고 우리의 모든 삶에 침투 하였으며 마치 네트워크 효과처럼 개인의 삶 구석구석에 침투해서 순환하는 에너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푸코가 언급한 권력의 미시 물리학은 화석연료 기반 없이는 불가능하다. 화석 에너지는 자본주의의 통속적 삶을 사는 사람들 사이에 미시적인 관계 영역에서 안락한 삶을 살 수 있게 만들고 주체를 생산해낸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롭고 자율적인 삶이 아니라 사실은 통제사회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푸코에게 배치는 권력이 개입되어 있는 미시 관계망의 일체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힘의 관계가 관철되는 공간이다.

 

이러한 배치에서 생명체의 삶은 주조되거나 포획된다. 기후위기로 인한 화석 문명 이후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문명의 시작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가올 문명을 준비하고 미래세대에게 새로운 희망을 약속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존의 사람 중에서 외부로 던져 버린 많은 부분들을 복권해야 하며 마을과 주변에 살아가는 마을 주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알고 있는 오래된 지혜에 접속해야 한다.

 

그렇다면 화석 문명 외부는 죽음과 공포의 외부가 아니라 새로운 활력과 즐거움의 외부일 것이다. 화석문명 이후의 희망은 경제체제와 시스템의 외부를 향해 열려 있을 때 가능하며 동시에 외부는 우리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재생에너지 기반의 삶을 살고 있는 공간은 유일하게 마라도였다. 마라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양광 에너지 등을 이용하여 섬의 에너지 수요를 자체조달 했다. 그러나 마라도 관광객들을 위한 카트 전기 차가 급격히 늘어나더니 이를 충전하기 위해 더 많은 전기가 필요해졌고 결국 외부에 에너지를 의존하게 되었다. 시장의 논리에 따라 에너지 자립마을 마라도가 중앙에너지에 의존하는 섬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저자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이라고 이야기 했던 정신역동학 과정이 우리의 삶과 욕망에 작동하고 있으며 탄소 중독적인 삶과 관련되어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심지어 기후변화에도 무의식이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2008년 탄소발자국이라는 개념이 창안되었다.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갈 때 발생하는 탄소를 빨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면적을 환산한 수치다.

 

하지만 보이지 않던 탄소 소비 수치를 숲의 면적으로 환산하여 보이게 한다 해도 탄소를 배출하는 삶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다. 이는 프로이트가 언급했던 ’무의식이 의식화되면 치유된다는 자유연상 기법‘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상처나 트라우마의 원인을 알게 되더라도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배치가 바뀌지 않으면 정신적 어려움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중독이라고 할 만큼 탄소를 소비하는 통속화된 삶의 방식은 무의식적인 삶의 배치의 영역에 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아주 기이한 책이다. 한때 스피노자주의자로 분류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빨갱이 취급을 받는 것 만큼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1632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부유한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스피노자는 평생 하숙집에 살며 아주 소박하게 살았으며 초월적 신의 덕목인 검소, 순수, 겸양을 자신의 내재적 삶의 원리로 삼았다. 철학사에서는 흔히 스피노자를 합리론자로 분류하지만 그의 사상 내부는 냉철한 합리론이 가지고 있지 못한 인간의 따뜻한 사랑과 욕망에 대한 탐구로 가득하다.

 

더욱 합리론자들이 거부하는 욕망을 끌어안음으로써 인간 내부의 역동적인 활력과 정서를 만드는 욕망과 정동을 철학의 주제로 만들었다. ’에티카‘는 첫사랑이 젊은이들의 신체를 변용시켜 감정의 기복과 호르몬 작용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변용이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변용은 신체 조성이 부드럽게 또는 연약하게, 딱딱하게 바뀌는 현상으로 자신의 외부의 것을 감싸 안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변용을 되기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스피노자의 사상은 사랑과 욕망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즉 사랑과 욕망이 공동체적 관계망에 나타날 때 그것은 관계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티카‘를 읽다 보면 공동체적인 관계망에 사랑과 욕망의 내재적인 움직임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우리 사회의 아주 가까이에 있는 유한하고 국지적인 생활 세계에 대한 미시적인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예속되었기 때문에 슬프고 무능력해지는 예속인의 삶과 자유롭게 때문에 사랑과 욕망으로 충만하고 기쁨이 넘치며 역능으로 가득 찬 자유인의 삶을 대조하면서 서술한다.

 

사실 예속과 복종은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진단이다. 모든 초월적 권력의 작동원리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숨어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삶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삶과 자유를 향항 욕망으로 가득하다. 스피노자는 자신을 후원하던 공화파 드 비트 형제가 정치적 반혁명에 의해 살해되었을 때 이에 맞서 피켓시위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그의 친구들의 간곡한 만류와 제지로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책의 후반부는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서술 되어서인지 자유인의 사랑의 행동과 공동체의 기쁨의 관계망이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신념으로 가득하다.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신이 자연에 내재한다는 사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범신론을 아주 오해하는 것이다. 신은 가까운 사람과의 사랑 속에 내재하는 것일 수 있다. 스피노자의 범신론의 원리는 신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신은 자연과 생명, 신체에 내재하는 것이라는 대답이 될 수 있다.

 

무한하게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신이 아주 구체적인 사물이나 신체 양태로 드러나는 것이다. 작은 공동체 내에 사랑은 유한하며 국지적이지만 신의 사랑이 내재되어 있고 그 사랑의 관계망이 무한히 조합되고 연결되어 서로 영향을 줄 가능성을 품고 있다.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유한한 자연, 사물, 생명이 연결되어 무한히 결합되고 변용되는, 무한으로 이행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자연을 응시한다.

 

물론 다양한 자연과 생명의 양태들이 접촉하고 연결되어야 비로소 이런 무한한 변용이 가능하다. 생태계의 연결망이 가진 무한한 능력 속에서 생명이 탄생한 것이며 서로 관계하는 과정들 속에서 자연생태는 순환하며 재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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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에 닥치고 계산하라는 말이 있다. 물질이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라는 코펜하겐 해석이 당혹스럽지만 실재가 그러니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살 수 없다. 이 말을 지질학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지질학과 기독교 신앙'에 지질학은 물리학에 비해 비약이 많다는 내용이 있다. 내가 지질학을 배우며 이해하기 어려운 점을 자주 만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사정이야 어떻든 어려운 부분 앞에서 그냥 그렇겠지, 하고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최근 연천 지질공원의 대표 명소인 재인폭포에 관한 기본적이며 핵심적인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흥미롭고도 당혹스러운 사실이다. 그냥 그런가, 하고 넘어가지 않고 헤아리고 궁리한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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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너머의 역사 - 빅히스토리, 문명의 길을 묻다
김기봉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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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전공자 데이비드 크리스천이 제안한 빅히스토리는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우주, 지구, 생명에 대해서까지 논의 대상으로 삼는 학문이다. 빅히스토리는 인간이 역사의 주인공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시간과 공간을 우주로까지 확장해 인문학의 3문(問;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에 답을 제시하려는 학문이다.(263 페이지)

 

빅히스토리는 아직 기존 역사학으로부터 아마추어 역사로 취급받는다.(218 페이지) 그것은 빅히스토리가 고유한 역사학적 지식을 생산하지 못하고 과학사 지식을 병렬적으로 연결하는 스토리텔링에 머물러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빅히스토리는 나름의 서사 공식을 가지고 있다. 구성 요소, 골디락스 조건, 복잡성의 증가다.

 

빅히스토리는 불확실한 미래에서 인류가 생존하고 문명을 지속하기 위해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거시와 미시 세계를 연결하는 새로운 역사 서술 모델이 필요한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213 페이지) 최근 인류세란 말이 널리 언급되고 있다. 이 개념은 현생 인류가 지질학적 행위자로 등장해 여섯 번째 대멸종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를 반영한 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지구 생태계의 다른 존재와의 연관하에서 발생했음을 깨닫고 파괴적인 문명을 리셋할 수 있는 기본 값을 설정하는 것이다.(247 페이지) 그런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다방면에 걸쳐 여러 종류의 일을 다재다능하게 할 줄 아는 만능의 전문가(generalist specialist)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이란 종(種) 단위의 인간이다.

 

언어를 매개로 허구 세계로 들어가는 것도 적응이다. 그 과정에서 만든 것이 이야기다. 이야기는 슬기로운 생각을 하는 호모 사피엔스를 상호 주관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호모나렌스로 전환시켰다. 인간은 잡담과 수다를 떠는 종이다. 잡담과 수다는 이성적인 호모 사피엔스를 감성적인 호모 나렌스로 변환시켰다.

 

인간은 자신이 짠 의미의 거미줄에 매달려 사는 동물이다.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과거 - 현재 -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 그리고 시간의 흐름 속 세상이라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삶을 이해하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자유를 얻었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이야기는 남아서 미래 후손들에게 문화유전자를 전달한다.

 

픽션의 문법에 따르면 기억의 반대말은 망각이 아니라 상상이다. 신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창조력을 가지고 있다면 인간은 유에서 무(아직은 없는 것)를 떠올리는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 선천적 요인과 후천적 환경의 상호작용으로 생명체의 변이에 관해 설명하는 일반 이론이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다.

 

진화란 변화를 동반한 계승이다.(진화는 생식세포의 유전자에 생긴 우연한 돌연변이가 세대에서 세대로 계승되는 가운데 생존에 유리한 것이 자연선택되는 것이라고 말한 후쿠오카 신이치의 견해와 함께 새길 말이다.) 다윈이 진보와 구별하고자 한 진화란 생명체가 생식하고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돌연변이가 자연선택으로 살아남아 다양한 동식물 종이 생성되는 전개(unfolding)를 지칭한다.

 

자연선택이란 자연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선택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의 법칙이 아니라 편견과 감정에 휘둘려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객관적 사실보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배움을 통해 실재로서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획득한 정보나 지식을 토대로 뇌 속에서 우리 나름의 매트릭스를 구축해 그것을 토대로 주변환경을 우리에게 맞게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12 페이지)

 

이야기로 주조된 매트릭스에 사는 호모 나렌스라는 특성이 인간을 계산 불가능한, 시스템 오류가 일어날 수 있는 자유의지의 존재로 만든다.(85 페이지) 이야기 자아는 모든 경험을 말하지 않으며 가장 강렬했던 순간과 최종 결과에 초점을 맞추어 스토리를 구성하고 사태를 재생한다. 인간은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감각 세계 외에 이야기로 창조된 상호주관적 의미 세계에 산다.(89 페이지)

 

저자는 현재의 대학 체제에서 국부론이나 도덕감정론이 경제학과 또는 철학과의 박사 학위 논문으로 통과될 수 있을까? 묻는다. 칼레츠키는 아마 조롱이나 당하고 퇴짜를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종류의 저서를 쓴 학자는 대학교수가 되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여러 분과 학문으로 나뉜 대학의 학문적 현실이다.

 

오늘날 대학에 인문학자는 없고 국문학자, 영문학자, 사학자, 철학자 등 개별 학문 분야 전공자들만 있다. 하지만 그런 개별 인문학 분과학문조차 대학내에서 점점 설 땅을 잃어가고 있다. 애덤 스미스가 근대사회 형성과 존립의 토대로 상정한 사회와 정의라는 두 규칙은 사람들이 당위로서 공정한 관찰자에 대해 믿는 상황에서는 힘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신은 죽었다고 생각하는 탈주술화된 근대인에게 그런 형이상학적 가정은 허구일 뿐이다.

 

오늘날 인문학이 처한 난점은 인간이 더이상 만물의 척도가 될 수 없는 시대에 인문학의 역할과 가치를 어떻게 재규정할 수 있느냐다. 막스 베버는 전통시대의 모든 숭고하고 궁극적인 가치들이 공공 영역에서 추방된 근대의 지적 상황을 세계의 탈주술화라고 불렀다. 세계의 탈주술화로 일어난 합리화는 인문학을 학문의 최전선에서 후방으로 밀어내고 빈자리를 과학이 대신 채우는 것으로 인식의 나무를 재구축했다.

 

이런 패러다임 전환의 기폭제가 된 것이 17세기 과학혁명이다. 조르다노 브루노는 천동설을 배척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세계관을 지지하다가 이단 재판을 받아 화형 당했다. 브루노와 갈릴레오의 결정적 차이는 브루노는 연금술의 신인 헤르메스와 이집트의 신 토르의 영향을 받아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주장한 반면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통한 관측결과를 근거로 천동설의 오류를 지적했다는 점이었다.

 

갈릴레오는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립을 종교와 과학 사이의 모순이나 불일치가 아니라 학문의 두 방법론 즉 사변적 논리로 이야기하는 것과 관찰 결과를 수학과 기하학의 원리로 푸는 것의 차이로 이해했다. 갈릴레오는 천동설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오류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의 신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갈릴레오를 교회의 탄압으로 불우하게 생을 마감한 과학의 순교자로 추앙하는 것은 후세인들이 만든 신화다. 갈릴레오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의 연구에는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 사례도 적지 않다. 그러나 과학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가 새로운 과학적 사실들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의 문제 제기로부터 세상을 보는 방식이 중세 기독교 믿음에서 과학적 사고로 바뀌었다는데 있다.

 

파울 파이어아벤트에 의하면 갈릴레오는 당시 가톨릭교회가 지동설을 하나의 가설로 용인했지만 갈릴레오는 지동설만 진리라고 고집스럽게 주장해 갈등을 야기하고 사건을 일으키게 되었다. 갈릴레오가 일으킨 바람은 종교보다는 학문을 바꾸었기에 과학 혁명이라고 불린다.

 

후설은 진자의 동시성과 낙하법칙 등의 객관적 세계는 발견했지만 생활세계를 수학이라는 이념의 옷으로 은폐하여 과학의 영역에서 추방한 갈릴레오를 발견의 천재인 동시에 은폐의 천재라고 말했다. 새로운 지식이 성립하고 세계관이 바뀌는 과정에서 혼돈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를 통해 주장했듯 이성의 빛은 광기의 그림자를 동반한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규범과 지식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기에 이성의 빈번한 추방 없이 진보는 일어나지 않는다. 파이어아벤트는 모든 상황에서 타당한 유일한 규칙 또는 오직 그것을 준거로 해서만 올바르게 기능할 수 있는 체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모든 것은 괜찮다고 주장했다.

 

자유로운 학문 세계를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오로지 과학지식에 근거해 세상에 질서를 세우고 인간을 이해하려는 과학주의의 결핍이 아니라 어느 한 세계관이 다른 세계관을 이단으로 처벌하고 금지하거나 비과학적이라고 비난하고 배제하는 지식의 독재다.

 

과학사도 문화사에 포함된다. 문화의 다양성은 생물학적 종의 다양성이 그러하듯 다른 문화와 관계를 맺고 접합하는 것으로 발현된다. 서로 다른 문화와 교류하고 충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확정성은 그들 각각의 세계에 반영되며 그것이 상호 문화적인 이해와 과학적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진리란 인간과 관계 없이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자기가 살고 있는 생활세계의 토대 위에서 의미를 추구하는 가운데 만들어진다. 오늘날 인류의 실존 문제는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고 지구와 우주에서 인간의 위치는 어디인지에 대해 재설정할 것을 요구한다. 빅히스토리의 선험적 조건은 인간 없는 역사는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는 것이다.(275 페이지)

 

인간만을 주체로 설정하지 않은 역사는 어떻게 가능한가? 관건은 인류 문명의 지속가능성을 지키고 실존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역사가 변해야 한다는 점이다. 중요한 문제는 역사가 과학이 되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인간 삶에 쓸모 있는 이야기가 되는가 아닌가다.

 

클로드 새넌의 말이 흥미를 돋운다.“우리는 과거를 알 수 있지만 통제할 수는 없다. 우리는 미래를 통제할 수 있지만 알 수는 없다.” 역사가는 인간, 시간, 공간의 3간(間)을 조합해 일관된 이야기로 역사를 쓴다.(251 페이지) 모든 이야기는 시작과 끝으로 구성된다. 그 둘을 연결해 스토리 라인을 형성하는 구조가 플롯이다.

 

역사라는 용어는 과거에 대한 기록으로서 성립한 것이 아니라 기록자가 탐구, 서술한 것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등장했다.(257 페이지) 이는 동서양 모두 그렇다. 역사가에 의한 기록으로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역사의 시작을 인류 탄생이 아닌 문자의 탄생으로 보는 관념을 낳았다. 이런 문자 중심 역사학은 과거 인류가 살았던 대부분의 시간을 역사 영역 밖으로 추방했고 우리는 무엇인가란 물음에 나오는 우리를 문자 기록을 남긴 자들로 한정하는 경향을 낳았다.

 

문자 기록을 남긴 자들은 대부분 지배자들이다. 그들에게 역사가 인류 전체가 아니라 왕조와 국가와 같은 특정 정치 공동체의 서사를 의미함에 따라 역사 이야기의 공간적 프레임이 생겼다.(258 페이지) 국가 간의 역사 분쟁도 역사 3간(間; 인간, 시간, 공간)을 조합해 자국사를 구성하는 문법 차이에서 기인한다.

 

일반적으로 한국사는 민족을 상수로 하여 시간과 공간의 매트릭스를 구성한다. 반면 한(漢)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은 민족이 아닌 영토를 준거로 하여 자신들의 역사를 규정했다. 중국은 고조선, 고구려 등을 중국사가 아니라 중국과 적대적이었던 오랑캐의 역사로 인식한 전통을 무시하고 주변국의 역사를 침탈하는 역사 공정을 벌이고 있다.(254 페이지)

 

진화의 플롯으로 빅히스토리 스토리텔링을 구성할 때 제기되는 문제 중 하나는 진화가 복잡성이 증가하는 방향성으로 진행되는 일반적 과정인가다. 물론 진화의 시계에서 늦게 등장한 생물일수록 자연선택을 통해 살아남는 과정에서 더 큰 복잡성을 갖는다. 하지만 그것이 우주 차원의 일반적 경향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인류는 1억 5천만년 동안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이 멸종하지 않았다면 생겨날 수 없었다. 단적으로 이 사실을 감안하면 진화는 반복 불가능하고 순전히 우발적인 사건임을 알게 된다.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신비는 유독물질이던 산소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원소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는 세균 덕분이다.

 

세균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세균은 수십억 년간 지구를 지배했다. 이들은 네 가지 혁신(광합성, 호흡, 진핵세포, 유성생식)을 통해 복잡성을 증가시킴으로써 지구환경을 바꾸었다.(281 페이지) 우리 몸의 30조 개 세포는 7년이 지나면 모두 바뀐다. 그럼에도 같은 나로 인식되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정체성을 만드는 기억 덕이다.

 

양자역학에 닥치고 계산하라는 말이 있다. 물질은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라는 코펜하겐 해석이 합리적으로 이해 불가능하지만 실재로 그러하니 이유를 따지지 말고 그냥 수용하라는 주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식으로는 살 수 없다.(295 페이지)

 

우주가 아무리 크고 영원하다고 해도 그것은 지구라는 창백한 푸른 점에 잠시 머물다 가는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주가 내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우주에 관한 정보를 생산하고 의미에 관해 이야기한다.(298, 299 페이지) 인간은 과학 없이 생존할 수 없다. 그런 만큼 인간은 과학만으로 살 수 없다. 인문학이 충분조건으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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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이론 껍질 깨기 한강문화재연구원 학술총서 12
에이드리언 프랫첼리스 지음, 유용욱 옮김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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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드리언 프랫첼리스의 책이다. 원어 제목은 ‘Archaeological theory in nutshell’이다. 우리 말로는 고고학 이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지만 통과절차적 의미를 담아 고고학 이론 껍질깨기라 했다. 번역자는 이론은 강의실에서 주입식으로 배우고 도서관에서 암기식으로 익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경험적으로 터득하거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체험하던 것이 어느 시점에 구체화되어 개념어들이 언명 체계화하는 것일 뿐이라 말한다.

 

책 서두에 이런 글이 인용되어 있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는 사람이 거짓말쟁이라면 뭔가를 덧붙이는 사람은 신성모독자다.(토사포스 메길라; 토사포스; 탈무드 주석, 메길라; 에스더서가 수록된 유대교의 두루마리.) 마르크스주의 고고학에 가할 수 있는 비판점 하나는 발굴을 시작해 첫 삽을 뜨기도 전에 고고학자는 이미 그 유적에서 발생한 모든 일의 배후에 계급투쟁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에서 보듯 결정론적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가 중요한 동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보다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에 더 관심을 가졌던 데 비해 알튀세르는 사회가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고 강화하기 위해 수렴하는 제도들에 관심을 가졌다.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미치는 인공물의 위력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는 마크 레오네가 해석한 18세기 미국 메릴랜드의 귀족 윌리엄 파카의 정원이다. 파카는 자신의 지역 내 영향력이 쇠락하자 원근법과 착시현상을 이용하여 복잡한 형식의 정원을 만들었다. 그는 테라스를 연속적으로 만들고 정원의 화단을 대칭으로 배치해서 경관에 질서를 부여했다.

 

레오네의 해석에 따르면 파카가 정원을 꾸민 목적은 방문객들에게 정원 주인이 심오하고 박식하며 자연 법칙에도 통달했음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과시를 통해 파카의 훌륭한 지위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상한 방식으로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저자는 정치적이지 않은 페미니즘은 언어도단이라 말한다. 페미니즘 고고학의 핵심적 특징은 젠더화된다는 것이다. 젠더 관계가 인간 사회에서 항상 주요한 구성 요소였다는 의미다. 페미니즘 고고학의 목표는 여성들이 자신의 삶과 사회를 창조하는 데 고유한 작주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일뿐 아니라 남성 위주의 성적 편향을 폭로하고 그것을 타파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작주성; agency’에는 개인이 자기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어떤 힘에 종속된다기보다 개인 스스로가 삶을 능동적으로 창조하는 주체라고 보는 개념이 들어 있다.)

 

자연선택설이나 빅뱅이론은 세상에 대해 설명하는 생각들이지만 퀴어이론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이고 그 후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구조주의자들에 의하면 정신은 단지 주어진 정보를 걸러내고 이미 이전부터 존재하던 모종의 구조들에 따라 자료를 정리한다. 그리고 그 구조를 가지고 모든 의미가 통하도록 한다.

 

구조주의자들은 우리가 현실을 인식하고 문화를 창조하는 방식의 기저에 구조가 깔려 있고 궁극적으로 구조는 우리가 역사를 만들어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마르크스의 관점은 어떤 면에서 구조주의적이다. 레비스트로스도 구조주의적이지만 그는 마르크스와 달리 물질보다 정신의 구조를 우선시한다.

 

구조주의는 특정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원칙에 근거하기 때문에 맥락적 정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구조주의 고고학자들은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종 비판을 받는다. 만일 그대가 날것/ 익힌 것, 공공/ 사유 등의 이항대립이 시공을 초월해 보편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상징 자체의 의미를 다루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해석학적 이해는 물렁물렁하고 모호하지만 과학적 이해는 딱딱하고 익히 알려진 측정 방식을 통해 검증될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한다. 많은 고고학자들은 구조주의적 방법을 단지 본질주의의 또 다른 형태라고 본다. 고고학은 종종 하위계층(subaltern)의 경험을 재구성해 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롤랑 바르트는 예측가능성과 완결성의 느낌으로 얻는 감정을 즐거움/ 기쁨이라 부른다. 즐거움/ 기쁨의 사악한 쌍둥이가 주이상스(jouissance)다. 통념을 파탄내는 것, 기존의 고정된 범주를 무시하는 것이다. 저자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는 대신 상상력을 발휘해 자신의 고고학 유적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표현해보라고 말한다.

 

많은 고고학자들은 자신을 인류학자로 인식한다. 인류학자들은 개인의 삶과 경험보다 집단의 그것에 더 관심을 갖는다. 푸코는 보편적 진리는 없고 그것을 찾는 것은 환상이며 텍스트를 해독하는 것은 국지적 지식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풍요롭다는 말은 유적을 해석함으로써 고고학자들이 상상하는 지평을 확대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현상학은 인간이 주관적으로 겪는 경험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고고학에서는 지금은 아무도 없는 곳이지만 과거인들이 살던 유적을 그들의 감각을 통해 어떻게 느꼈는지 밝히기 위해 현상학을 채용한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는 정신이라는 것은 단지 감각을 통해 전달되는 날것 그대로의 정보에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데카르트가 생각한 것과 달리 사람들은 사물을 직접 경험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 자신들에 대한 자각,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이 만들어내는 한 다발의 필터를 거치면서 경험한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런 문화적 필터와 경험이 만들어내는 한 다발의 필터와 경험의 복합체를 아비투스라 불렀다. 사람들은 감각기관으로 입력된 정보를 아비투스의 영향을 받는 렌즈를 통해 처리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주변을 경험한다. 계량화할 수 있는 자료는 딱딱하지만 감각적인 정보는 물렁물렁하다.

 

에틱(etic)한 접근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외부자의 시각을 취한다. 이런 접근은 과학적 방법의 기본적 요건이며 실증 가능한 관찰 결과인 사실을 가지고 통제 가능한 비교를 하려 한다. 이에 현상학자들은 이즈음에서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한다. 이런 석조 기념물을 이용하고 체험한 과거인들에게 경관 내에서 크기가 색깔이나 입지보다 더 중요한 특징이었다고 어디에 써 있기라도 한 것인가?

 

이런 에믹(emic)스럽거나 내부자적 접근은 현상학적 방법의 핵심이다. 각각의 유물들은 크기, 색상, 형태, 위치, 다른 유물들과의 관계 등 여러 가치 특성을 갖는다. 현상학적 접근은 전체를 하나로 이해한다. 실제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고고학은 일부 연역적이기도 하지만 다분히 귀납적이다. 저자는 과거에는 어느 시점이나 상관없이 모든 집단이 어두움에 대해 무섭고 위험하다고 여겼을까? 묻는다.

 

그 반대로 어두운 동굴은 뭔가를 편안하게 숨기거나 안락하게 숨어 있을 장소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물론 물렁물렁한 주관적 데이터를 주로 다루는 현상학적 입장만 취하면 뚜렷한 해답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경험주의자는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것만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실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관념론은 사고와 생각이 행동보다 선행하고 더 중요하다고 믿는 신조다. 기능주의는 문화적 관습 및 제도는 유기체가 생명 유지를 위해 신체 각 부위를 함께 작동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움직이거나 변화한다는 생각이다.

 

담론은 특정 집단의 사람들이나 특정 학문 분야 내에서 생각이 소통이 이루어지지만 노골적으로 언급되지는 않는 모종의 규칙들이다. 모더니즘은 종교나 선천적 지혜 대신 과학과 논리적 의사결정을 통한 인간의 진보를 강조한다. 목적론은 어떤 산물이나 결과를 미리 상정하는 모델이다.

 

아날학파는 역사서술의 한 방식으로 거대하고 장기적인 과정들을 강조한다. 이러한 과정들은 전통적 서사를 통해 역사로 구현되는 자잘한 사건들의 밑에 보이지 않게 내재해 있다.(기후나 지리적 여건들이 역사라 부를 수 있는 것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아비투스는 개개인이 특정 장소와 시간 속에서 성장하는 동안 터득하는 모든 태도, 범주, 무의식적 관습 등을 일컫는 말이다.

 

작주성은 개인이란 스스로 영향을 미칠 수 없는 힘에 갇힌 무력한 볼모가 아닌 그들 삶의 능동적 창조자라는 견해다. 주이상스는 불협화음 같지만 희열을 느끼게 해주는 감흥으로서 우리 머릿 속의 기본 가정을 배반하는 비익숙한 것들로부터 나온다. 해석학은 사물의 의미가 고유하지 않다고 가정한다. 해석이란 사람이 사물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적극적 과정이다. 해석학적 접근에서는 새로운 이해가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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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신이치는 제가 좋아하는 생물학자입니다. 2008년 ‘생물과 무생물 사이’, 2009년 ‘모자란 남자들’을 읽은 데 이어 2010년 ‘동적 평형’을 읽은 지 12년만인 올해 ‘생명해류’를 읽었습니다. 아니 만났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책을 선택해 읽은 것이지만 후쿠오카 신이치가 말한 대로 “작가를 발굴하고 치켜세우고 달래고 얼러서 글을 쓰게 하는 사람”인 편집자에 의해 세상의 빛을 본 책이 제 앞에도 나타났기에 저는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을뿐입니다.

 

앞의 세 책은 생물학 전문 책이지만 ‘생명해류’는 일정 부분 지질학과도 관련이 있는 생물학 책입니다. 제게는 정독한 세 권의 저자가 쓴 신간이지만 지질학과 연관이 없었다면 읽지 않았을 것입니다. 벌써 다음 작품이 기대됩니다. 이번에 읽은 ‘생명 해류’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작가는 혼신을 다해 작품을 쓴다. 작품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그리고 그때만의 에너지라는 게 있다. 그래서 비슷한 것은 이제 쓸 수 없다. 인생작은 2개일 수 없다. 두 번째는 언제나 빛바랜 하찮은 것일뿐이다.”

 

언제일지 모르나 다음에 나올 책은 ‘생명해류’와 다르되 지질학의 성과나 내용도 반영되는 책이기를 기대합니다. 세 권의 생물학 책에 이어 지질학적 내용이 반영된 책이 나온 것은 작가의 집필 계획 또는 사상의 변천에 따른 것인지 편집자의 의도를 따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작가는 평소부터 다윈이 탐험한 진화론의 산실인 갈라파고스 제도(諸島)를 그대로 밟기를 소망했었습니다.

 

그의 그런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갈라파고스 관련 강연 등을 보고 출판사측에서 탐사 제안이 온 것입니다. 저자는 다윈의 고향이라 불리는 갈라파고스는 사실은 가장 다윈적이지 않은 곳이라고 말합니다. 근거는 갈라파고스 생물들은 광대한 생태적 지위를 누리며 서로 자유롭게, 생존의 선택지를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존경쟁이나 자연도태의 압력에 노출되지 않고 오로지 좋아하는 장소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좋아하는 먹이, 좋아하는 행동양식을 선택하면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명해류’를 흥미 있게 읽은 것은 남미대륙에서 1000km 떨어진 태평양 한복판의 갈라파고스를 탐사한 생물학자의 지질 내용도 반영한 글이기 때문입니다. ‘생명해류’는 작년에 읽은 윌리엄 글래슬리의 ‘근원의 시간 속으로’와 대조적입니다. 이 책은 지질학자의 지질탐험기입니다.

 

대조적이라 했지만 이런 부분은 어떤가요? “이곳 바다에서는 바다를 둘러싸는 암석의 일부였던 원자가 표면에서 떨어져나간 뒤 조류(潮流)의 흐름에 따라 자유로이 떠다니고 있다. 이 원자는 단순한 열역학으로 싸인 대화를 통해, 바람에 실려온 먼지, 성간(星間)입자, 분해된 동물의 사체, 썩어가는 식물에서 온 다른 원자들과 뒤섞인다. 그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도, 인지하지도 못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나눈다. 그들의 대화는 하나의 개체로 통합되고 진화하면서, 생명체나 화학적 퇴적물 혹은 단순한 용해 분자를 구성하는 존재가 된다. 그들은 깊이 흘러들어가거나 바다의 표면으로 솟아오르고 증발한다. 히말라야 산맥의 눈송이가 되고 갠지스강의 홍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따금 우리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179 페이지)

 

"별이 바위에 스며들어 꽃이 되었다.”는 오규원 시인의 시 구절을 다시, 더 구체적으로 보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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