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분야만의 책을 검색하는 탓에 발견하지 못했으나 특정 개념으로 검색을 해서 알게 된 책이 김나현 교수의 '모빌리티 렌즈로 보는 현대시'란 책이다. 책은 인문학의 하위 분야인 교양 인문학 분야로 분류되어 있었다. 시를 분석한 책이니 시평론 분야로 분류될 수도 있었지만 시평론이든 인문학이든 거의 찾지 않았으니 특정 개념을 키워드로 해 검색하지 않는 한 찾지 못했을 것이다.
5장 '모빌리티의 시공간성'에 실린 '허수경 시 깊이 읽기'로부터 많이 배웠다. 시인이 고고학을 전공하고 쓴 시 가운데 '시간언덕'이란 작품이 있다. 김나현 교수는 이런 말을 한다.
"발굴 현장은 우리의 공간 경험을 새롭게 뒤흔든다. 물리적 이동의 차원에서만 생각하자면 발굴이란 꼼짝도 하지 않고 한자리에서 수행하는 작업이므로 수평적 이동이 0에 수렴한다. 일상적으로는 경험하지 못하는 수직적 이동, 즉 아래로 파내려가는 이동만이 경험된다. 그리고 이 수직적 이동도 움직임이 거의 없다. 몇 센티 아래로 내려가는 데 몇 달이 소요되기도 하는 것이 발굴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작 1미터를 이동했을뿐인데 완전히 새로운 연대기가 펼쳐지게 된다. 이런 경험은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불러온다. 현재 내가 점유하고 있는 공간은 나의 장소라고 인식되고 이런 장소 경험을 통해 우리는 로컬 정체성을 구성해 간다. 하지만 시간대를 이동하면 이 장소는 나만의 장소가 아닌 것이 된다. 몇 백 년, 몇 천 년, 몇 억 년을 건너가면 전혀 다른 세계 속 장소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허수경의 시는 시간을 관통하는 수직적 모빌리티를 통해 새로운 시적 상상력을 열어간다.“
한때 진지하게 들춰보다가 최근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고고학에 흥미를 느끼게 하는 글이다. 지층이 뒤집히지 않는 한 아래일수록 과거라는 점에서는 지질학도 같다. 차이는 지질학은 파내려가지 않고 노두를 대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시인은 "...사진을 찍고 난 뒤 바닥을 다시 삽으로 판다 한 삼십 센티 정도 밑으로 내려가자, 다시 토기 파편들, 돼지뼈, 소뼈, 진흙개, 바퀴, 이번에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곡식알도 나온다.."란 말을 한다.
고구려의 3대 강안평지성에 속하는 연천의 문화유적지 호로고루가 연상된다. 소, 말, 개, 사슴, 멧돼지, 노루 등 적어도 여섯 동물의 뼈와 탄화곡물까지 나온 곳이 호로고루다. 모빌리티를 연구하는 인문학자의 눈에 들어온, 즐겨 읽었으나 최근 소원했었던 시의 주인공에 대한 평론을 통해 잊고 지내던 고고학에 대해 생각하게 되어 좋다. 모빌리티 시각으로 지질현상을 분석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