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와 모네 - 인상주의의 거장들 아티스트 커플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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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와 모네는 인상주의의 거장들이다.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사이이다. 그 둘의 관계를 해명한 김광우의 마네와 모네는 아티스트 커플 시리즈의 한 권이다. 저자 김광우는 철학 및 현대 미술, 비평을 전공한 분이다. 저자는 예술가의 창조성은 주변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전제한다.

 

마네와 모네의 특징 중 하나는 방대한 자료들을 실었다는 데 있다. 그래야 예술가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두아르 마네(1832 1883)올랭피아풀밭에서의 오찬으로 유명하고 클로드 모네(1840 1926)는 수련(睡蓮) 연작으로 유명하다.

 

마네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모네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마네는 인물화를 주로 그렸고 모네는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마네는 모더니즘을 연 사람이고 모네는 최초의 회화 혁명을 체계적으로 일으킨 사람이다. 마네와 모네는 일본 판화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응용했을 뿐 아니라 일본 판화를 그림의 배경으로 장식했다.(46 페이지)

 

모네와 마네는 행복한 시간을 공유했다.(171 페이지) 마네는 모네를 끝없이 도왔다. 모네는 마네에게 금전적 도움을 요청했다.(192 페이지) 모네는 마네 사후 마네를 위대한 화가로 기억되도록 적극 나섰다.(267 페이지) 모네는 마네의 작품이 루브르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다.(268 페이지) 둘의 관계는 고흐와 고갱의 그것과 달리 바람직한 것이었다.

 

인상주의란 말이 처음 생긴 것은 모네의 인상, 일출이란 그림을 본 루이 루르아에 의해서이다. 물론 루르아는 이 그림을 보고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나 쉽게 그렸는가라는 경멸조의 말을 했다.(166 페이지) 모네는 빛이 일기(日氣) 변화에 따라 사물에 일으키는 변화를 파악하고 그것을 영롱한 색조로 나타낼 줄 알았으며 빛이 사물에 닿아 분산되는 것을 상상하면서 순간적인 현상을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담았다.(15 페이지)

 

모네가 항상 같은 시간에만 그림을 그린 것을 쿠르베가 기이하게 여긴 것은 유명하다. 모네는 대상 하나하나에 대한 사실주의 묘사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빛이 시시각각 대상에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관심을 두었다.(97 페이지) 모네는 인내심이 많은 화가였다. 그는 바라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면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그리고 또 그렸다.(247 페이지)

 

마네의 불로뉴 해변1868년 작품으로 처음으로 인상주의 화법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마네는 사람들을 분명하게 묘사하지 않고 색을 적당히 쓱쓱 문지르는 것으로 처리했다. 이런 화법이 오히려 과학적인데 그것은 시선이 닿는 중심지가 아닌 주변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132 페이지)

 

마네는 많은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시인 보들레르이다. 마네는 보들레르의 시신이 안장(安葬)되는 모습을 장례식이란 제목으로 그렸다. 한편 시인 말라르메는 마네의 미학적 대변인으로 평가된다. 말라르메는 마네의 10년 연하이다. 보들레르는 마네의 11년 연상이다.

 

조르주 바타유는 마네가 그린 스테판 말라르메의 초상을 보고 위대한 두 영혼 사이의 애정을 표현하는 작품이라 극찬했다.(189 페이지) 모네가 그린 템스 강 풍경 시리즈 석 점은 스케치처럼 그린 인상, 일출에 비해 완성도가 높아진 것으로 평가받는다.(153 페이지) 1872년 모네는 작품의 질과 값에서 큰 결실을 맺었다.(157 페이지) 이런 점은 저자의 의도(예술가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하려는..)에 부합한다.

 

에밀 졸라의 나나가 출간되기 전 마네가 나나를 그렸다.(215 페이지) 마네는 평생 일곱 개의 화실을 전전했다.(223 페이지) 마네는 벨라스케스를 우상으로 여겼다.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시녀들)‘는 마네에게 영향을 주었다.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는 프랑스 철학자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분석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마네는 52세까지, 모네는 86세까지 살았다. 마네는 말년을 투병 속에서 보냈다. 마네는 현대 감각을 일깨워주고 떠난 화가로 평가받는다. 마네는 현대적 감각으로 그림의 주제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관찰하며 우발적인 변화라도 주의 깊게 살펴보라는 보들레르의 권유를 소중하게 받아들인 화가이다.(244 페이지)

 

반면 모네는 앞에서도 언급했듯 인내심이 많은 화가였다. 모네는 모파상과 친하게 지냈다. 같은 주제를 연속적으로 그리는 연작은 오늘날 많은 화가가 그리지만 모네가 건초더미 시리즈를 그릴 때만 해도 과거에 없던 획기적인 방법이었다.(278 페이지) 물론 모네의 가장 유명한 연작은 수련(睡蓮)‘ 연작이다.

 

프랑스 철학자, 과학자, 시인인 가스통 바슐라르가 꿈꿀 권리에서 다룬 모네론()은 유명하다. 모네는 지베르니(Giverny)를 유명하게 했다. 지베르니는 파리에서 약 75km 떨어진 곳으로 모네가 거주하며 작업한 마을이다. 모네는 종일 수련을 그리고 그렸다.

 

당시 모네는 아들 장을 먼저 떠나 보낸 70대의 노인이었다. 하지만 1차 대전 발발로 작업에 대한 도취는 중단되었다.(305 페이지) 이 장면은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마의 산을 내려오는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를 그린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연상하게 한다.

 

모네는 오랑주리의 타원형 전시실에 맞는 패널화를 그리려 했지만 백내장으로 시력이 나빠져 계획대로 하지 못했다. 오랑주리는 식물원이었다가 미술관이 된 곳이다.(참고로 오르세 미술관은 기차역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곳이다.)

 

모네, 하면 가스통 바슐라르의 꿈꿀 권리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클로드 모네처럼 물가의 아름다움을 거두어 충분한 저장을 해두고 강가에 피는 꽃들의 짧고 격렬한 역사를 말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네도 거장이었지만 모네를 보며 거장이란 말을 더 떠올리는 것은 작품 때문이기도 하지만 긴 구십에 가까운 나이까지 그림을 그리다가 간 삶 때문이다. ’마네와 모네의 특징은 전기(傳記) 위주의 평이한 글이 인상적이라는 점이다. 같은 저자의 칸딘스키와 클레’, ‘고흐와 고갱’, ‘뭉크, 쉴레, 클림트’,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등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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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덕적도, 충남 태안 등을 공부하면서 인상파(仁上派)란 말을 생각한다. 고생대 데본기 퇴적, 페름기 대충돌 등과 연결되는 이 공부는 당연히 연천 지질 이해에 도움이 되는 공부다. 인상파(仁上派)란 인천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 하듯 기초부(基礎部)부터가 아닌 중간부터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문제는 인상(仁上)이 아니다. 공부 시작 시점에 처음부터 순서를 밟아 차례로 공부할 수 없었다 해도 건너 뛰거나 생략한 부분들을 찾아 꾸준히 공부하면 어느 순간 바른 궤도로 진입할 수 있다. 중요한 전기(轉機)를 잡아 전체를 염두에 두는 공부를 해 하나로 연결하는 비상 대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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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랜드캐니언, 오래된 지구의 기념비 - 노아 홍수가 그랜드캐니언을 설명할 수 있을까?
    캐럴 힐 외 지음, 노동래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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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애리조나주에는 세계적 지질공원이 하나 있다. 미국의 국립공원들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한 국립공원인 이 지질공원의 이름은 그랜드 캐니언 국립공원이다. 신비로운 대협곡으로 유명한 이 지질공원에 대해 정확한 학문적 분석을 하는 것은 지구 시스템을 바로 이해하는 한 방편이 될 것이다. 그것은 축복인 한편 과제다. 나는 이 과제 해결에서 더 나아가 내가 사는 곳의 지질에 대해 시사점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사는 곳의 지질이란 한탄강 세계 지질공원을 말한다.


    ‘노아 홍수가 그랜드 캐니언을 설명할 수 있을까?‘란 부제를 가진  ’그랜드 캐니언, 오래된 지구의 기념비‘는 열 명의 지질학자와 한 명의 생물학자가 함께 쓴 기념비적 저서다. 저자들 중 한 명인 웨인 래니는 자신들은 텔레비전, 전자 오븐, 휴대전화기를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과 동일한 수많은 과학적 방법과 기술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래니에 의하면 그들은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받아들이는 현대의 지질학자들이다. 물론 래니가 말했듯 지구의 지질학적 이야기를 탐구하고 발견하는 것은 종교적 신념에 대한 도전이 아니다.


    이 책에는 두 개의 틈(chasm)이란 단어가 나온다. 하나는 자연이 만든 틈이고, 다른 하나는 설명 모델 사이의 틈이다. 전자는 이 책이 다루는 콜로라도강과 그 지류들이 콜로라도 고원의 남서쪽 가장자리까지 깊게 깎아 만든 1.6km 깊이의 틈이고, 후자는 홍수 지질학과 전통적 지질학의 설명 모델 사이의 틈이다. 핵심적 진술은 지표면의 거대한 균열이 콜로라도강으로 덮인 것이 아니라 거대 협곡 자체가 콜로라도강에 의해 만들어졌다(17 페이지)는 말이다. 두 개의 틈(chasm)을 이야기했거니와 두 개의 다른 설명 체계 역시 필요하다. 하나는 하천학(fluvialism)이고, 다른 하나는 홍수 지질학(diluvialism)이다. 전자는 하천의 활동이 어떻게 지구 표면을 형성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고, 후자는 성경 그대로 4,500여 년 전에 일어난 1년 미만의 노아 홍수가 그랜드 캐니언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학문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전통적 지질학의 견해와 젊은 지구론자의 견해 모두 그랜드 캐니언의 지층과 깊은 협곡 틈들이 자연적 과정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과학적 조사의 대상이라는 데에 동의한다는 사실이다. 젊은 지구론자들의 논리적 귀결인 홍수지질학은 노아의 홍수가 인간만을 덮친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덮쳐 지구의 암석, 화석, 지형에 보존된 방대한 기록을 남겼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홍수지질학 vs 전통지질학의 구도는 격변론 vs 동일과정론의 구도이기도 하다. 격변론은 지구가 젊다고 반드시 믿은 것은 아니지만 지구의 역사가 한 번 이상의 격렬한 사건들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노아 홍수는 그 중 가장 최근의 사건이었으리라는 견해를 유지했다. 동일과정론은 자연법칙과 힘에는 일관성이 있어 현재 자연에서 일어나는 과정과 환경을 관찰함으로써 고대 암석을 형성한 자연의 과정과 환경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랜 관찰 결과 지구의 역사는 하나의 격변적 사건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물론 이는 노아 홍수를 부인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동일과정론은, 홍수 후의 큰 호수들이 격변적으로 비워짐으로써 그랜드 캐니언과 콜로라도 강이 급속하게 형성되었다는 격변론을 부정하며 그 협곡이 침식되는 데 수백만년이 소요되었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그랜드 캐니언의 모든 퇴적암 아래에는 여러 화성암이 관입된 변성암 기반(基盤)이 있다.(46 페이지) 홍수 지질학자들은 그랜드 캐니언에서 발견되는 넓은 변성암 지대의 기원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다.(47 페이지) 그랜드 캐니언은 신생대 동안 콜로라도 고원이 융기되어 이 지역에서 바다가 물러갔을 때 그때까지 쌓인 지층들 안으로 깎여 들어가 형성되었다. 


    콜로라도강에 의한 이 지역의 침식 중 대부분은 약 6백만년전부터 현재에 걸쳐 일어났다.(62 페이지) 느슨한 퇴적물이 암석이 되려면 압축(compaction) 및 교결(cimentation) 작용이 일어나야 한다. 방해석(方解石) 모래 같은 일부 유형의 퇴적물은 깊이 묻히지 않고서도 몇 년 안에 암석으로 굳을 수 있는 반면 대부분의 퇴적물이 압축 및 교결되려면 오랫동안 깊이 묻혀여 한다.(68 페이지) 탄산칼슘 입자로 구성된 암석을 석회암이라 하고 탄산칼슘의 가장 안정적인 동질이상(同質異像)을 방해석이라 한다. 방해석은 뜨거운 물보다 찬 물에서 더 잘 녹는 소수의 광물 중 하나다. 


    그랜드 캐니언의 측면 벽에서는 다수의 석회암 지층이 나타난다. 석회암이 해양 환경에서만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일부 호수, 특히 건조한 환경에서도 석회암은 발견된다.(72 페이지) 실험실에서건 현장 관측을 통해서건 홍수 물로부터 석회암이 형성된 사례는 보고된 적이 없다. 석회암이 형성되는 데는 퇴적 작용이 일어나는 오랜 시간 즉 홍수기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랜드 캐니언은 여러 차례 해수면이 전진했다 물러가고 간헐적으로 암석이 침식되어 소실된 증거를 포함하고 있다. 현대의 석회암 퇴적물은 조개껍데기들이 형성된 장소에서 가까운 곳에 퇴적된 탄산칼슘 껍데기들이 쌓인 결과이지 먼 곳에서 침식된 석회암이나 조개껍데기 및 석회 진흙 무더기가 옮겨온 결과가 아니다.(76 페이지) 캐런 힐, 스티븐 모시어는 그랜드 캐니언의 퇴적 구조물이 왜 오늘날 현대의 환경에서 형성되는 것과 똑같이 생겼는지 묻는다. 발톱 자국 같은 정교한 형태가 격렬한 홍수 속에서 보존될 수 있었는지 묻는다. 


    홍수 지질학자들은 동일과정론을 유물론 또는 진화론과 동의어로 취급해 악마화 하면서도 자신들이 젊은 지구론을 지지하는 증거를 발견하고자 할 때에는 사실상 동일과정론의 원칙을 적용한다. 가령 유명한 홍수 지질학자들 중 일부는 1980년 세인트헬렌스 화산 폭발이 그랜드 캐니언의 급격한 형성에 단서를 제공한다고 믿는다. 그랜드 캐니언의 암석은 화산재와는 완전히 다른 물질로 이루어졌다. 이 협곡의 수직 절벽의 거대한 규모는 이 절벽이 콜로라도 강에 의해 깎이기 전에 이미 암석으로 굳어졌음을 입증한다.(87 페이지) 


    홍수 지질학자들은 물리적 과정과 화학적 과정을 묘사하는 자연법칙이 창조주간, 에덴동산에서의 타락 이전 또는 노아 홍수의 다양한 시점마다 달랐다고 가정한다. 이는 동일과정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가정이다. 그랜드 캐니언에 노출된 대부분의 지층은 퇴적암이다. 대개 퇴적암은 방사성 측정법에 의해 직접 연대를 측정할 수 없다.(104 페이지) 방사성 측정법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광물이 생성된 연대이지 그것들이 굳어 암석이 된 연대가 아니다. 그랜드 캐니언 같은 곳의 퇴적암의 경우 기본적으로 해당 지역의 화석 기록과 전 세계의 화석 기록 사이의 비교에 기초해 연대 추정을 한다.(117 페이지) 


    이 협곡에서 가장 젊은 암석 중 일부는 테두리를 넘어 강 아래로 흘러내려 용암댐들을 형성한 용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용암댐은 고작 수백만년 내에 형성되었다.(112 페이지) 방사성 연대 측정법은 신뢰할 수 있는 물리법칙(가장 중요하게는 방사성 붕괴의 예측 가능성)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는 이 예측 가능성을 이용해서 원자로를 건설하고 의료장치를 개선하며 수백만 킬로미터 떨어진 행성 탐사선에 동력을 공급하기도 한다. 방사성 연대 측정법은 베수비오산 폭발과 같은 고대의 역사적 사건의 연대를 정확히 측정한다고 입증되었다.(114 페이지) 


    앞에서 틈(chasm)이란 말을 했지만 부정합은 시간의 틈을 대표한다. 부정합은 침식을 함축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117 페이지) 부정합이란 연속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랜 단절을 겪은 후 퇴적된 지질 구조를 말한다. 더 낮은 지층에 깎임이 생겨 만들어진 수로에 위쪽 지층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물질이나 독특한 퇴적물이 채워져 있다면 부정합의 증거다.(121 페이지) 홍수지질학자들은 지각의 틈들이 창세기의 큰 깊음의 샘들이라고 믿는다.(131 페이지) 


    홍수 지질학자들은 격변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즉 몇 일만에 산이 밀어 올려진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문제가 생긴다. 마찰 저항이 열을 발생시키는 것처럼 구부리는 것도 열을 발생시킨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암석이 급속히 구부러지면 모든 것이 부서지고 녹을 것이다.(134 페이지) 그랜드 캐니언의 지층들은 위아래로 관통해 이어지는 파쇄대(crack)로 가득 차 있다. 파쇄대는 단순히 갈라진 균열을 의미한다. 일단 파쇄대가 형성되기 시작하면 진흙 건열처럼 이후의 비로 다시 메워지지 않으며 시간이 지나거나 응력(stress)이 증가함에 따라 더 커질 수 있다. 


    다수의 지층에 걸쳐 펼쳐져 있는 긴 파쇄대는 이 균열이 형성되기 전에 모든 지층이 이미 암석으로 굳어져 있었음을 증거하는 명확한 표시다.(138 페이지) 홍수 지질학 모델이 옳다면 그랜드 캐니언에는 한 종류의 단층만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랜드 캐니언에는 역단층과 정단층이 모두 존재한다. 이는 서로 다른 기간에 압축력(한곳으로 밀어붙임)과 장력(잡아당겨 뜯어냄)이 작용했음을 암시한다. 암석이 가소성 변형을 일으키려면 고온, 느린 이동속도, 구속압력이 결합되어야 한다. 암석이 떨어져 나갈 때는 넓은 펼쳐짐이, 한곳으로 밀릴 때는 물결 모양의 접힘이, 불규칙하게 융기하거나 침강할 때는 넓은 구부러짐이 발생한다.(143, 144 페이지)


    암석층에서 구부러짐이 발생하면 각 층에 치유되지 않는(다시 메워지지 않는) 많은 균열이 만들어진다.(145 페이지) 퇴적물이 잡히면 부드러운 물질이 쉽게 바스러져 틈을 채워서 치유되지 않는 파쇄가 거의 생기지 않는다.(146 페이지) 화석을 가지고서도 홍수지질학자들의 모순을 제시할 수 있다. 즉 여러 범주의 유기체들은 함께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화석은 노아의 홍수 때 파묻힌 동물들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의미다.(151 페이지) 저자는 거대한 물의 벽이 모든 대륙에서 밀려들었다면 왜 해양생물과 육지생물이 뒤섞여 있지 않는가?란 질문을 한다.(151 페이지) 


    가장 낮은(오래된) 지층에서 가장 높은(젊은) 지층으로 갈수록 복잡성과 다양성이 증가한다. 거대한 쓰나미가 모든 대륙에 충돌했다는 홍수 지질학자들의 말을 따르면 모든 육상생물의 형태가 해양 퇴적물과 섞여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 그룹의 유기체가 다른 그룹을 대체하는 전 지구적 차원의 동물적 대체(代替)는 이 모든 현상이 최근에 일어난 단 한 번의 격변적인 홍수의 결과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극도로 당혹스러운 사태일 것이다. 


    저자는 '홍수 지질학자들의 주장처럼 노아 홍수가 전 세계적이었다면 왜 공룡의 유해가 그랜드 캐니언의 지층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더구나 발자국은 격렬한 홍수의 어느 단계에서도 보존되지 않을 텐데 왜 더 높은 그랜드 스테어케이스 암석의 여러 지층에서는 공룡 발자국들이 온전하게 남아 있을까?'라고 묻는다.(161 페이지) 


    화석은 특정 순서로 발견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 있는 패턴을 보여준다.(164 페이지) 이런 패턴은 생물 공동체가 살았던 유형의 환경, 생태계의 역동성, 한 그룹이 다른 그룹으로 대체되는 변화를 반영하는 특징적 화석으로 구성된다. 동물상 연속의 원칙이 있듯 식물상 연속의 원칙도 있다. 식물 화석의 복잡성이나 다양성은 젊은 지층으로 갈수록 점진적으로 증가한다. 홍수 지질학자들은 다양한 분류 체계를 통해 눈에 보이는 화석 식물의 분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지만 화석 기록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화석(포자와 꽃가루)의 분포를 설명하려는 노력은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오늘날의 지질학자들은 그랜드 캐니언의 형성에 작은 물과 오랜 시간이 아니라 많은 물과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콜로라도강이 언제 어떻게 거대한 카이밥 융기 지대(또는 아치)를 깎고 길을 냈는지, 그리고 이 고지대가 깎이기 전 물은 어디로 흐르고 있었는지가 논쟁의 중심에 있다.(197 페이지) 


    저자는 실제의 과학 연구는 미로를 헤쳐 나가 정확한 길을 이해하는 일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출발점과 끝나는 지점을 볼 수 있는 종이 위에 그려진 미로가 아니라 여러 길을 실험해보아야 출구를 찾을 수 있는 실제 미로 안에 들어와 있는 경우다. 저자는 젊은 지구론자들이 과학계에 존재하는 의견 불일치를 과학적 근거의 빈약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 이런 의견을 제시한다. 즉 의견 불일치는 특정 세부 사항에 관해 논의가 진행중인 어떤 불확실성이 존재한다는 의미이지만 불일치를 해결하고 나면 궁극적으로 더 많은 이해에 도달하고 확실성이 증가한다는 것이다.(201 페이지) 


    우리가 보고 있는 암석을 만들어내기 위해 전대미문의 메커니즘이나 신비한 힘이 필요하지 않다.(215 페이지) 그랜드 캐니언의 많은 지층, 구조물, 단층은 확실히 강력한 힘들이 작용했음을 나타내지만 모두 지구의 정상적인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느린 과정도 있고 빠른 과정도 있지만 모두 정상적인 과정이다. 중요한 점은 각각의 지층이나 특성에 대한 설명들이 해수면 상승과 하강, 서서히 움직이는 지각판들이 지각을 들어올리고 내리는 더 큰 이야기 안에 잘 들어맞는다는 사실이다.(229 페이지) 


    저자는 홍수 지질학자들의 설명은 지속적으로 관찰된 적도 전혀 없고 상호 배타적인 메커니즘에 의존한다고 설명한다. 가령 방대한 화석 기록은 전 세계적인 홍수가 모든 대륙을 휩쓸었다는 증거라고 주장하지만 그 홍수가 어쩐 일인지 그랜드 캐니언의 어떤 지층에도 생쥐, 갈매기, 고래, 개구리, 튤립 또는 가재 화석을 단 하나도 남기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홍수 지질학자들의 신조와는 달리 홍수 지질학이 다른 세계관들과 구분되는 지점은 성경에서 발견되는 구절들에 대한 집착이 아니다. 오히려 홍수지질학의 뚜렷한 특징은 성경 안이나 밖의 모순되는 증거를 고려하지 않으면서 사실로 받아들여진 성경 안의 특정 구절들에 대한 특정 해석 방식을 고수한다는 점이다.(233, 234 페이지) 


    저자들은 홍수 지질학은 비과학적일뿐 아니라 비성경적이라 말한다. 로마서 1장은 창조주의 신성이 그분의 물리적 피조물인 자연에 드러난다고 선언한다.(234 페이지) 자연이 진실한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신뢰받을 수 없다면 이 진술은 홍수 지질학자들의 하나님 이해에 무엇을 말해줄까? 저자들은 홍수 지질학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부합하는 자료나 데이터만을 취한다고 말한다. 인상적인 말은 과학은 자료가 이끄는 곳으로 가도록 허용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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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제프 세파흐의 ‘먼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처음에는 먼지가 없었다. 원시 가스뿐이었다.“ 팀 그레고리의 ‘운석(隕石)’에 이런 챕터가 있다. ‘가스에서 먼지로, 먼지에서 세계로’. 가스는 수소와 헬륨 등으로 이루어졌고, 먼지는 규소, 얼음 등으로 이루어졌다.(요제프 세파흐는 먼지는 우리 몸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무거운 원소들로 구성되었다고 말한다.)

    요제프 세파흐는 먼지는 너무도 가벼워서 공기가 데리고 올라가는 모든 것이라는 말을 인용했다. ‘먼지’는 읽고 있으나 흐지부지 상태이고 ‘운석’은 아직 사지 않았다. ‘먼지’를 비롯 다른 읽지 않은 책들을 읽어야 ‘운석’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관리가 필요하다. 팀 그레고리가 지질학자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지질학자겸 우주화학자가 정확한 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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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에서의 질문 - 뜰은 좁지만 질문하는 인간은 위대하다
      김풍기 지음 / 그린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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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에서의 질문은 무엇일까? 아니 정원에서 옛 선비들은 어떤 질문을 했을까? 저자 김풍기는 옛 사람들이 지냈던 뜰, 자신이 살았던 뜰은 몹시 작고 소박할지는 몰라도 거기서 만난 우주 삼라만상과 드넓은 사유의 지평은 장엄했노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부제가 '뜰은 좁지만 질문하는 인간은 위대하다정원에서의 질문은 이곡(李穀), 서거정(徐居正), 안평대군, 이수광, 미수 허목(許穆), 문무자 이옥(李鈺), 천수경(千壽慶), 장혼(張混), 박죽서(朴竹西) 등의 정원 관련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저자는 자신에게 일상 언어 생활에서 가장 친숙한 단어는 정원(庭園)이라 말한다. 저자는 이황의 제자인 권호문(權好文; 1532 - 1587)의 용례를 제외하고 대체로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사람들이 사용한 용어가 정원이라 설명한다. 원림(園林)은 집 안의 공간 및 집 주변의 숲을 두루 의미한다. 고전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정원보다 원림이 조금 더 넓은 범위를 포함한다.(39 페이지)


      저자는 뜰이라는 단어를 전문용어로 쓸 것을 제안한다. 박은영의 말대로 마당은 평소에는 비워 두지만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로 사용되는 곳이기에 뜰이란 단어가 적당하다.(41 페이지) 집 울타리의 경계를 넘어서 주변의 숲까지 연결되는 개념으로 뜰이라는 단어를 쓰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울타리 경계 안을 지칭할 때는 유용하다. 부제인 뜰은 좁지만 질문하는 인간은 위대하다는 허균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아무리 누추하고 초라한 집에 산다고 해도그곳에 군자가 살고 있다면 문제가 있겠는가?”가 그것이다.


      가정(稼亭) 이곡(李穀)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다. 저자는 문신호령 가금불상(門神戶靈 呵禁不祥)이란 입춘방을 써 붙인 적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대문을 지키는 신령이여 상서롭지 못한 것들을 꾸짖어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란 의미다. 이곡이 살았던 고려 후기는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의 부마국이었던 시기이며 국정 문란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의종 때 일어난 무신란을 시작으로 고려는 제국으로서의 풍모를 잃고 혼란기로 접어들었다


      고려 후기 신흥사대부들은 원나라가 국가의 학문으로 생각한 성리학을 한층 깊이 공부하는 한편 원나라에서 시행하는 과거에 응시해 급제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곡은 어려운 사정 때문에 관직 생활을 저버릴 수 없었다. 가난한 이곡에게 귀거래(歸去來)는 요원한 일이었다. 이곡은 환해(宦海) 또는 환해풍파를 떠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 했다. 이곡이 마당 한켠에 작은 텃밭을 마련한 것은 원나라의 수도 북경에 머물던 1342년이다. 이곡은 원나라 과거인 제과(制科)는 물론 고려의 과거에도 급제한 이력의 소유자다.


      이곡이 원나라에 간 것은 지원(至元)에서 지정(至正)으로 연호를 바꾼 원나라 순제를 축하하는 충혜왕의 축하 표문인 하개원표(賀改元表)를 받들고서였다.(본문에는 '하기원표賀改元表'라 나오는데 이는 오류인 듯 하다. 는 고칠 개란 글자로 이는 원나라가 원표를 바꾼 것을 반영하는 바른 단어이다.) 저자는 정원에 대해 상세히 잘 아는 것으로 보아서 실제 경험이 많은 듯 하다. 저자는 사람이 아무리 많은 관심과 손길을 준다 해도 작물 성장과 결실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는 자연이 주는 거대한 혜택이나 재해라 말한다.(57 페이지)


      이곡은 자신이 돌보는 채마밭에서 소출이 적게 나오자 천하의 작황을 근심했다. 이는 노자가 말한 '문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의 일을 안다(불출호정지천하; 不出戶庭知天下)'는 구절을 연상하게 한다.(61 페이지) 서거정편에는 대마망북(代馬望北)이란 말이 나온다. 변방에서 태어난 말은 북쪽을 바라본다는 의미다. 같은 의미로 호마망북(胡馬望北)이란 말도 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는 팽택령(彭澤令)으로 근무하던 중 지역을 감찰하러 온 관리를 접대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자 봉록으로 받는 쌀 다섯 말 때문에 이런 소인에게 허리를 굽힐 수는 없다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간 뒤 쓴 글이다.


      서거정 만큼 귀거래를 시문으로 노래했던 사람도 드물다.(67 페이지) 서거정은 세종 대에 벼슬을 처음 시작한 이래 여섯 임금을 모시면서 45년간 외직을 거치지 않고 오직 서울에서만 지낸 보기 드문 인물이다. 서거정은 한양 주변의 여러 시골에서 별서(別墅)를 운영했다. 그중 가장 자주 등장하는 곳은 불암산 부근이라는 양주 토산 별서와 한강 옆 광진 부근의 몽촌 별서다. 서거정에게 뜰은 권력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아름다운 자연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주는 공간이었다.


      서거정은 소나무, 대나무, 연꽃, 매화(松竹蓮梅)를 원중사영(園中四詠)으로 읊었다. 서거정은 집 뜰 안의 정자를 사가정(四佳亭), 뜰을 사가원(四佳園)으로 지칭했다. 저자에 의하면 은거(隱居)는 대체로 속세에서 바쁜 사람들의 미래 모습으로 제시된다.(77 페이지) 서거정은 자신의 집을 유거(幽居)라 표현했다. 원래 산속 깊은 곳에 있어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다. 귀거래할 형편이 되지 않았던 서거정은 은거지와 같은 공간을 자신의 별서에 마련했다. 사람들은 별서에서 경영하는 뜰이 아무리 아름답고 고요하다 한들 귀거래를 할 수 없기에 벼슬 속으로 은거하는 이은(吏隱)을 감행했다.('시은; 市隱'은 저잣거리에 은거하는 것으로 가장 위대한 은거라고 칭해진다.)


      덕이 높고 어진 사람이 낮은 관직에 있으면서 권력과 상관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의미다. 저자는 가장 화려한 시절에 가꾼 안평대군의 뜰을 조명한다. 저자는 고려 말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에 나오는 청학동(靑鶴洞)이 무신의 난이 가져온 어지러운 세상을 벗어나고 싶은 지식인들의 욕망을 투사한 것이라면 안평대군을 비롯한 그 주변의 문인들에게 무릉도원은 무슨 의미였을까? 묻는다. 안평대군에게 비해당(匪懈堂)은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이상향의 대체물로 보인다. 비해당은 세종이 안평대군에게 내린 당호다. 비해(匪懈)는 시경과 장재의 서명에 나오는 이름이다


      안평대군은 자신의 뜰에 꽃과 나무를 심고 귀한 식물도 사이사이에 넣어 비해당 뜰이 저절로 차별화되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96 페이지) 안평대군이 가장 친애했고 단종에 대한 절의를 끝내 지켜내었던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의 시를 보자.“손수 심은 오동나무/ 봄이 되자 푸른 잎 가지런하다/ 언제나 완전히 자라서/ 가지 위에 봉황새 와서 깃들려나,“...


      특별히 정치적 의미를 담지는 않았지만 안평대군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기를 바라거나 안평대군이 자신의 능력을 활짝 펴는 날을 기대한다는 의미로도 읽힌다.(98 페이지) 안평대군이 비해당 뜰에 구현한 무릉도원 혹은 이상향은 동시대의 가장 빛나는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다. 석가산(石假山) 이야기를 하자. 조선 전기 문인들의 글에 석가산 관련 기록에 제법 있다.(109 페이지) 조선 전기 문인들 중 제법 이름이 난 사람들 중 형편이 괜찮은 사람들은 자신의 뜰에 석가산과 같은 것을 조성해 놓고 즐기는 풍조가 있었다.


      시은(市隱), 귀거래(歸去來)보다 적극적인 방법이 석가산으로 뜰을 꾸미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이 가산(假山)을 꾸민 기록이 있다. 명산을 오르고 바다를 보며 유서 깊은 고적을 두루 돌아봄으로써 호연지기를 기르고자 하는 기행(紀行) 열풍이 일어난 것은 15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그 중심에 성임, 성현, 채수, 서거정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의 기행은 천하의 대관(大觀)을 돌아보는 '수양과 풍류가 공존하는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석가산 조성은 집 안으로 자연을 가지고 와 자연의 정취를 그대로 즐기는 방편이었다.


      걷지 못해 부득이 산수화를 모아 벽에 걸어놓고 감상하는 것이 성에 차지 않아 한 것이 석가산 조성이다. 기묘한 돌과 항아리, 주변을 흐르는 물을 활용하여 자기만의 완벽한 자연을 구축하고 동시에 아름다운 화초와 나무들을 심어 석가산이 자연의 축소판일 뿐 아니라 완벽한 원림으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하였다.(116 페이지) 가산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돌로 만드는 석가산, 옥을 이용하여 만드는 옥가산, 나무뿌리를 이용하여 만드는 목가산 등이다.(박경자의 조선 시대 석가산 연구라는 책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석가산 조성은 대체로 도선(道仙)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보였다. 무릉도원은 배를 타고 물길을 거슬러 오르다가 기암괴석으로 가득한 동굴을 지나야 만날 수있거니와 괴석문화와 관련을 가진 석가산은 이상향의 축소판으로 해석될 수 있다.(127 페이지) 지봉 이수광도 뜰을 만들었다. 그의 당호는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의미의 비우당(庇雨堂)이다. 겨우 바람과 비를 가린다는 의미의 근비풍우(僅庇風雨)에서 유래한 이름이지만 외가쪽 선조(先祖) 유관(柳寬)의 청백리로서의 면모를 함축한다.


      이수광은 경기도 장단(長湍)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자랐다. 지방관을 끝내고 잠시 한양에서 관직 생활을 하던 이수광이 계축옥사로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면서 택한 은거지가 비우당이다. 이수광은 비우당 앞뜰을 동원이라 칭했다. 작은 공간에 있다고 해서 인간의 생각이 작은 공간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인류의 위대한 유산인 서책이 있었고 문자를 통해 내가 여행한 옛 성현들의 정신세계를 정리하거나 새롭게 펼쳐낼 수 있었다. 들뢰즈는 이를 앉아서 유목하기로 규정했다. 이수광의 동서는 허균이다. 엄청난 장서가였던 허균의 책이 역모로 죽은 뒤 이수광에게 전해졌다.


      이수광은 허균의 동서였기에 허균이 이이첨 권력에 협력하면서 승승장구할 때 협력할 만도 했지만 은거를 택했다. 지봉(芝峯)은 비우당 부근의 상산(商山)의 한 봉우리다.


      저자는 꼬장꼬장하고 근엄하기 그지없었던 미수의 삶에서 아름다운 순간을 기록한 글을 발견한 것을 뜻밖이라고 설명한다. 미수가 살았던 시대는 격변기였다. 미수는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시절에 태어나 중년에 병자호란을 겪었다. 미수가 경기도 연천에 자리를 잡은 시기는 부친 복상(服喪)에 참여한 시기로 보인다. 미수는 16332월 장례를 치른 후 3년상을 충실히 바쳤다. 복상이 끝난 이듬해인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12월 강원도 영동을 기착지로 해 피난했다. 이 때로부터 약 10여년을 떠돌며 한반도 여러 지역에서 우거(寓居)하다가 52세 때인 164612월 연천으로 돌아왔다.


      미수가 삼척부사를 사직하고 연천으로 돌아온 것은 68세 때인 1662년이다. 미수는 이듬해인 1663년 십청원기라는 글을 썼다. 십청원은 미수의 뜰 이름이다. 전나무, 측백나무, 박달나무, 비자, 노송, 만송, 황죽, 두충 등은 그가 십청원에 심은 가지가 길고 잎이 푸른 것들이다. 예송논쟁에서 미수는 윤휴와 함께 3년상을 주장했다. 십청원기를 쓴 것은 예송논쟁 당시 미수가 지니고 있던 마음속 풍경을 보여주는 단서이자 그의 주장이 수용되지 않은 데 따른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이었다. 미수는 산수유람을 좋아하지만 늙어 그것을 할 수 없어 돌을 쌓아 봉우리와 고개를 만들고 사이사이에 풀과 나무를 심었다고 말했다.


      미수는 천하의 산수를 모아 놓은 석가산이 있는 뜰에서 꽃의 영고(榮枯)를 보며 차라리 늘 푸른 나무가 마음에 와닿았다고 했다. 미수의 뜰에는 나무, 풀 외에 다양한 식물들이 있었다. 운은행(雲銀行), 녹나무, 풍향, 오동나무, 매화, 정향, 모란, 작약, 사간(射干), 파초, 석창포, 국화... 미수는 강회백의 정당매를 보고 감탄하기도 했다. 미수는 용주 조경에게서 대년누자를, 한산옹 송석호에게서 대년매화를 받아 뜰에 심었다. 밑둥이 오래 묵은 매화를 대년매화라 하고 노란 꽃술에 붉은 꽃이 피는 것을 대년누자라 한다.


      미수는 푸른 꽃받침으로 피는 청악매(靑萼梅)를 좋아했다.(은 꽃받침 악이다.) 미수가 살았던 연천은 미수 외에 사대부라고는 누구도 살지 않았던 곳이다. 미수는 연천에서 20년을 살며 느낀 숲속 생활의 흥취를 열 가지로 정리했다


      1) 3월에 산꽃이 만발하면 바위 모퉁이에서 산새들이 서로 지저귀는 것. 2) 숲이 깊어 해가 늦게 떠서 그늘진 벼랑으로 간밤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것. 3) 새벽녘 해가 뜰 때 첩첩한 산 쪽으로 맑은 노을이 드리운 것. 4) 비 그친 뒤 숲 너머에서 들려오는 시냇물 소리. 5) 비가 개고 앞 개울에 물이 불어나면 낚시터로 걸어나가 낚시줄을 손질하는 것. 6) 시내 바람이 비를 불러오거나 떨어지는 저녁 햇살이 산을 감싸는 것. 7) 저물녘 산 기운이 더욱 아름답고 숲 너머 마을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면서 만들어내는 어슴푸레한 빛. 8) 달밤에 움직이는 뭇 것들이 모두 고요해지면 홀로 앉아 숲 그림자가 춤추는 것을 감상하는 것. 9) 가을날 해 저문 골짜기에 안개가 피어오르고 단풍 든 붉은 나무는 천 겹으로 서 있는 것. 10) 쌓인 눈이 온 산에 가득한데 시냇가 울창한 소나무는 푸른빛으로 사랑스러운 것.


      문무자(文無子) 이옥은 소품문을 쓰지 말라는 정조(正祖)의 어명을 어겨 처벌받은 인물이다. 이옥이 만년에 터를 잡고 여생을 마치려 했던 곳은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와룡산 기슭이었다. 조선 사대부들은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꺾어 느긋하게 남산을 바라본다는 도연명의 시구절을 좋아했다. 이옥도 도연명의 시문을 읽고 자신의 뜰에 도연명의 문학적 풍경을 재현함으로써 자신의 고결한 정신세계를 드러내려 했던 것 같다. 당시는 세상을 등지고 은거를 택하는 것만으로도 시대를 비판하려는 의도를 표현하는 시대였다.


      이옥의 글에는 수많은 꽃과 나무들이 등장한다. 이옥은 자칫 정치적인 문제를 건드려서 죄인이 될 수 있을 천문, 지리, 인간, 성리학이 아닌 집 주변을 아름답게 장식한 자연 속 삼라만상에 눈을 돌렸다. 이는 그가 평생 관심을 기지고 써 왔던 소품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했다.


      천수경(千壽慶; ? - 1818)은 조선 후기 여항문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여항(閭巷)은 도시의 좁고 굽은 골목을 의미하기도 하고 일반 백성들이 살아가는 마을을 의미하기도 한다. 천수경은 시사(詩社)와도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시를 짓고 술을 마시는 모임이 그것이다. 여항문학의 주요 구성원들은 중인(中人)과 서얼(庶孼)들이다. 18세기 전반 여항문학인들은 주로 한양 인왕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곳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의 서쪽에 해당하기에 서촌(西村)이라 했지만 옥류동(玉流洞), 필운대(弼雲臺) 등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중심으로 다르게 칭하기도 한다.


      중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굳이 여항인이라고 하는 것은 중인들과 서얼들이 함께 문학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240 페이지) 우리 문학사에서 여항인이 부상(浮上)한 것은 17세기 최기남을 중심으로 하는 삼청시사(三淸詩社)부터다. 최기남은 선조의 부마였던 신익성 집안의 궁노 출신으로 시를 짓는 능력 때문에 당대 양반 지식인들에게 널리 알려졌을뿐 아니라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이력이 있다. 천수경은 송석원 시사를 이끌었다. 옥류동 계곡이 처음부터 중인들의 터전이었던 것은 아니다. 임병(壬丙) 양란 이후 장동김문(壯洞金門)으로 알려진 김상헌 집안이 터를 잡고 살면서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김상헌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모친의 눈병 치료를 위해 샘물이 좋은 옥류동 골짜기로 들어왔다. 천수경의 뜰은 많은 벗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멋진 글을 낭송하면서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살롱인 셈이었다. 송석원 시사의 범례에 글로 모이고 신의로 맺는다(회이문사 결이신의; 會以文詞 結以信義)란 구절이 있다. 이이엄(而已广) 또는 공공자(空空子) 장혼(張混)은 평생 가난하게 살았지만 반드시 자신만의 뜰을 가지고 싶다는 소망을 평생 버리지 않았던 문인이다. 그는 마침내 작은 뜰 하나를 만들었다. 천수경이 송석원 시사의 맹주(盟主)였다면 장혼은 송석원시사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막후 실세였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장혼은 누리고 싶은 청복(淸福) 여덟 가지를 꼽았다. 그중 하나가 계곡 한 구역을 즐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꽃과 나무 천 그루를 심어서 즐기는 것이다. 이이엄은 장혼의 호이기도 하고 그의 당호이기도 하다. 이이(而已)는 뿐이다, 그만이다라는 의미이고 엄(广)은 집을 의미한다.


      혼자 지낼 때에는 헌 거문고를 만지고 고서를 뒤적이면서 그 사이에서 생활할 뿐이고, 생각이 나면 나가서 산속을 거닐 뿐이다. 손님이 찾아오면 술상을 차리라 하고 시를 읊을 뿐이고, 흥이 나면 휘파람 불고 노래 부를 뿐이다. 배가 고프면 내 밥을 먹을 뿐이고, 목이 마르면 내 우물물을 마실 뿐이다. 추위와 더위에 따라 내 옷을 입을 뿐이고, 해가 지면 내 집에서 쉴 뿐이다. 비 내리는 아침과 눈 오는 낮, 저녁의 석양과 새벽의 달빛 등 그윽한 거처의 신비한 정취는 다른 사람에게 말해 주기 어렵거니와 말해 주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날마다 혼자 즐기다가 자손들에게 남겨 주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니 이와 같이 된다면 다 이룰 뿐이다. 운수나 목숨의 차이는 나의 천명에 맡길 뿐이다. 그래서 나의 집을이이(而已)’라고 명명한다...“란 글을 보면 이이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박죽서(朴竹西)19세기를 살았던 여성 시인이다. 그는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를 이끌었다. 저자는 박죽서의 뜰을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가득한 뜰이라 표현했다. 유박(柳璞, 1730~1787)은 꽃에 미친 선비로 불리는 사람이다.


      책의 마지막 순서는 여암 신경준편이다.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은 전라도 순창을 근거지로 삼아 한양과 경기의 여러 지역에서 지내며 관직 생활 및 저술 활동을 한 인물이다. 신경준의 뜰은 순원(淳園)이라 불렸다. 내게 신경준은 지리학자로서 더 알려진 인물이다. 산경표는 신경준이 편찬한산수고문헌비고<여지고>를 바탕으로 하여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지리서다.


      신경준은 사람이 사물을 대함에 그 이름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좋아하는 것은 이름 너머에 있다....내게 꽃이 있는데 좋아할 만한 것을 구하였다면 꽃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하여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란 말을 했다.


      '정원에서의 질문은 저자 자신의 정원 및 꽃, 나무 등에 관한 경험이 바탕을 이루는 좋은 책이다. 정원에서의 질문을 통해 새롭게 만난 인물이 안평대군이다. 그를 비해당(匪懈堂)과 연결지어 이야기했을뿐 정원 관련 부분을 반영해 해설하지 못해 아쉽다. 이런 점은 송석도인 천수경(千壽慶)에 대해서도 해당하는 바이다. 안평대군, 천수경 공히 서촌에서 말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이엄 장혼 역시 그렇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반영해 해설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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