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송어회를 먹었다. 설 당일에 밖에서 음식을 먹은 것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송어의 송이 소나무 송(松)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왜 소나무 송자를 쓰는 것일까? 송어의 속살이 소나무의 붉은 속살 같다고 해서 그렇다. 겉 껍질은 거북등처럼 갈라진 검은색이고 속살은 송어처럼 붉은 소나무는 참 특별한 듯 하다.

 

소나무는 특별한 위상을 차지한다. 그런 점을 헤아리게 하는 단어가 의송산(宜松山)이란 말이다. 의송산이란 소나무가 잘 자라는 산을 말한다. 조선 시절 이런 곳은 당연히 금산(禁山)으로 지정되었었다. 금산이 곧 소나무를 베지 못하게 조치를 취한 산인 것은 아니지만 금산의 대종(大宗)을 이루던 것은 소나무다.

 

소나무, 하면 고산(孤山) 윤선도가 떠오른다. 고산의 후손인 윤위가 고산 윤선도의 보길도에서의 행적을 기록한 ‘보길도지(甫吉島誌)’에는 소나무 이야기가 빈번하다. 1616년 권세가 이이첨을 고발한 병진소로 인해 최북단인 함경북도 경원(慶源)으로 유배를 가게 된 고산은 1618년 최남단격인 경상남도 기장(機張)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이동에만 1년이 걸렸다는 이 조치를 추위와 더위를 고루 겪게 하려는 의도라 말하는 이도 있다.(고미숙 지음 ‘윤선도 평전’ 98 페이지) 윤선도가 소나무를 가리켜 ‘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는가‘라고 말했지만, 그리고 우리는 습관적으로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다고 말하지만 소나무에게도 위험 요소는 있다. 그것은 추위이라기보다 온난화일 것이다.

 

검을 현(玄)자를 써서 송현(松玄), 현송(玄松) 등의 아호를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검을 현자와 바위 암자를 쓰는 현암서원(玄巖書院)도 있다. 현암(玄巖)과 현무암(玄武巖)의 차이는 무엇일까? 내 주된 관심거리는 소나무도 아니고 거북도 아닌 바위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새해(음력 1월 초하루)가 간다. 송어회로 육의 양식은 물론 생각 거리까지 준 친구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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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기 전에 꼭 한 번은 논어를 읽어라 1 - 청소년을 위한 논어 어른이 되기 전에 꼭 한 번은 논어를 읽어라 1
판덩 지음, 하은지 옮김 / 미디어숲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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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논어 관련 책을 몇 권 읽었다. 지치고 힘들 때 위안을 얻으려는 차원에서였다. 보기에 공자는 불우한 사람이었다. 가장 눈에 띄는 구절은 군자는 도를 지키지 못할까 걱정할뿐 가난을 근심하지 않는다(‘군자우도불우빈; 君子憂道不憂貧‘)는 말이다. 청소년을 위한 논어‘ 어른이 되기 전에 꼭 한 번은 논어를 읽어라’는 그런 문제의식을 이어가기 위해 읽을 책이다.

 

저자인 판덩은 ‘나는 불안할 때 논어를 읽는다’를 통해 만난 인물이다. 물론 청소년을 위한 논어 해설서이지만 어른이 읽기에도 유용할 것이다. 이 책이 비록 청소년들이 가장 관심 있어 하는 공부에 대한 부분만을 다룬 책이지만 공부는 청소년만의 것은 아니다. 저자는 논어는 공부를 위한 책이라고 말한다. 사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란 논어의 첫 구절이 말해주는 바이리라.

 

공자는 한 걸음에 정상에 도달하려는 욕심을 버릴 것을 조언했다. 누구나 한 걸음에 정상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니 아마도 공자는 한 걸음에 정상에 도달하려고 조급해 하는 마음을 경계한 것이리라. 평생 배워야 한다.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지혜라고 말했다. 그런 지혜는 쉽게 얻을 수 없다.

 

조금 다르게 보고 싶다. 진정으로 공부하지 않으면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게 된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은 충분한 공부가 전제되어야 하는 바다. 공자는 자공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질문해서 지혜와 학식을 얻기를 바랐다. 군자모도불모식(君子謨道不謨食)이란 말이 있다. 군자는 도를 추구하지 먹을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매일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자신을 혹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공자는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지식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공자는 사람을 몇 단계로 나누었다. 1) 태어날 때부터 아는 사람, 2) 배워서 아는 사람, 3) 곤경에 처해야 배우는 사람 등이다. 공자는 가슴에 궁금한 것이 가득 차서 답답해 하지 않으면 그를 계도해 주지 않고('불분불계; 不憤不啓') 표현하고 싶으나 잘 몰라서 더듬거리지 않는 한 그를 일깨우지 않으며('불비불발; 不悱不發') 한 방면을 가르쳤을 때 세 방면을 스스로 생각해 내지 않으면 반복해서 그를 가르쳐주지 않는다('거일우불이삼우반; 擧一隅 不以三隅反')라고 말했다.

 

공자의 이런 말과 취지가 비슷한 것이 맹자의 인이불발이다. 사람을 가르치되 그 방법만 지시하고 스스로 진수(眞髓)를 터득하게 함을 이르는 말, 세력을 축적하여 시기를 기다림을 이르는 말이다. 인이불발은 引而不發이다. 공자의 이런 교육방식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것이 주입식 교육이다. 저자는 교육이란 구멍 안으로 물을 한꺼번에 들이붓는 게 아니라 학생들의 마음속에 있는 작은 불씨가 활활 타오르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불비불발을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친구 사이에서 또는 사람을 상대할 때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 것이다. 물으면 답하는 것이다. 아는 척 하지 않는 기본이다. 온고(溫故)란 과거의 것을 반복적으로 뜯어보고 씹어보고 탐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는 셋이다. 1) 그렇게 했으나 얻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온고이부득(溫故而不得), 2) 속의 숨은 뜻을 깨닫는 것을 의미하는 온고이유소감(溫故而有所感), 3) 천천히 과거의 경험을 곱씹어보고 그 경험에 새것을 접목하여 새 아이디어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하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다.

 

온고이지신은 공부만이 아니라 삶에도 적용할 수 있다. 자공은 갱야 인개앙지(更也 人皆仰之)란 말을 했다. 군자가 만일 저지를 잘못을 뉘우치고 수정하면 사람들이 모두 그를 우러러보고 그러한 행동에 감탄하고 박수를 보낸다는 뜻이다. 공자의 말 가운데 묵이식지(默而識之)가 마음에 든다. 묵묵히 지식을 익힌다는 의미다. 기억력이 매우 좋았던 공자는 다양한 지식을 머릿속에 쌓고 묵묵히 그것을 익혔다.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도 공부를 많이 하면 두루 통하는 사고력을 통해 박람강기(博覽强記)할 수 있으리라. 두 번 세 번 곱씹은 뒤 질문하라는 말이 있다. 신중할 필요를 느끼는 나에게 가장 와닿는 말이다.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思而不學則殆)란 말이 있다. 배우기만 하고 스스로 사색하지 않으면 학문의 체계가 없고 사색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오류나 독단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말이다.

 

배운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될 수 있음을 알고 고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2천년전 공자가 만났던 문제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 잡기는 중요하다. 자로유문 미지능행 유공유문(子路有聞 未之能行 唯恐有聞)이란 말이 있다. 자로는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듣게 될까 걱정했다는 의미의 말이다. 새겨들을 말이다.

 

그런데 삶에는 실천과 관계 없는 지식을 배우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가르침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채 새 지식을 듣게 될까 걱정하는 것으로 바꾸면 어떨까? 저자는 섬세하게 상황을 살피는 매의 눈을 가지라고 말한다. 저자는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이란 말을 즉해 거인의 어깨 위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라는 말을 들려준다.

 

술이부작이란 공자가 전해져오는 것을 말하였지 새로운 것을 창작하지 않았다는 의미의 말이다. 저자는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포기하지 말라고 말한다. 스스로 한계를 긋지 말라는 공자의 말에 즉한 말이다. 전체 4장 가운데 4장의 마지막 세 챕터는 인상적이다. 배움의 끝판왕 락지자, 시간의 흐름이 멈추는 몰입의 경지, 목표 달성을 위한 두 가지; 초심으로, 한결같이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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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성찬이란 말의 한자 표기를 처음 확인했다. 산해진미가 아닌 산해진수라고 쓴 글을 읽고 진수가 무엇인지 궁금해 찾아 보니 진수는 珍羞였다. 문제는 수(羞)가 부끄러울 수로 많이 쓰이고 음식 또는 음식을 내놓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는 잘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진수성찬은 珍羞盛饌이다. 리(理)가 기본적으로 나무, 구슬, 돌의 무늬를 의미하는 한편 이성(理性)이나 이치(理致)를 의미하는 것은 큰 단절이라 볼 수 없지만 羞가 부끄러움을 의미하기도 하고 음식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은 진폭이 너무 크게 보인다. 비보(裨補)란 말의 반대격인 염승(厭勝)이란 말도 그렇다. 승(勝)은 이긴다는 의미, 좋은 경치의 의미 외에 넘치다/ 지나치다를 의미하기도 한다. 염승은 지나친 부분을 누르는 것을 의미한다. 한자의 매력이라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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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벨로퍼 윤선도 - 정원으로 서남해안을 경영하다
이태겸 지음 / 픽셀하우스(Pixelhouse)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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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시조 시인으로 먼저 알았고 예송논쟁을 통해 알았다. 이 외에 어떤 면모로 만나볼 수 있을까? 정원으로 서남해안을 경영했던 인물이리라. 물론 서남해안 경영을 시작한 시기보다 예송논쟁이 후다. 고산은 해남 윤씨로 그의 집안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고조부인 윤효정에게 시집온 해남 정씨로 인해 내리 내리 부유한 삶을 살았다.

 

디벨로퍼란 이름으로 윤선도를 규정한 책이 있다. 조경학 박사 이태겸의 ’디벨로퍼 윤선도‘란 책이다. 내가 디벨로퍼란 명칭을 안 것은 기농 정세권(鄭世權) 선생을 통해서다. 이 분은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최초의 디벨로퍼로 활약한 분으로 북촌 한옥 마을 조성의 주역이기도 하다. 디벨로퍼란 땅 매입부터 기획, 설계, 마케팅, 사후관리까지 총괄하는 부동산 개발업자를 말한다.

 

그럼 17세기 인물인 윤선도를 디벨로퍼로 규정하는 것은 타당한가? 타당하리라 본다. 당시 그런 개념은 없었지만 그런 역할은 있었기 때문이다. ’디벨로퍼 윤선도‘의 부제는 정원으로 서남해안을 경영하다이다. 윤선도는 유년기에 임진왜란을 겪었고 장년기에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겪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조직하여 해남에서 강화도로 향하던 중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심하여 배를 돌려 제주도로 향했다.

 

당시 보길도는 제주도로 향하던 윤선도가 풍랑을 피해 잠시 들른 곳이었다. 하지만 그는 보길도가 풍수명당이라는 사실에 마음을 돌려 그곳에 머물렀다. 윤선도는 전쟁 중 강화까지 갔다가 임금께 문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윤선도는 1637년 보길도에 자리를 잡은 이래 1671년 6월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약 13년 동안 모두 7차례에 걸쳐 보길도에 머물렀다.

 

그가 노년에 조성한 해남 일대의 정원들은 일생에 걸친 역경 이후에 세속적 삶에서 벗어나 이상향을 현실세계에 구현하려 했던 곳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디벨로퍼 윤선도'는 윤선도의 자연관이나 풍수지리 등에 기반을 둔 해석에 국한된 기존 윤선도 정원 해석에 관한 책과 달리 정원을 윤선도의 경제활동과 연관지은 책이다.

 

정조가 풍수에 관한 한 무학대사와 견줄 정도였다고 본 윤선도는 효종 승하 후에는 산릉을 정하는 직책을 맡기도 했다. 윤선도는 자연을 최고의 경지로 보았고 이상적인 물아일체의 환경이라 생각했다. 더불어 인간세상에서 자신을 격리할 수 있는 은둔의 장소이자 모든 근심을 털어내고 즐겁게 놀 수 있는 평온한 장소로 인식했다.

 

이상향에 대한 윤선도의 동경은 보길도에 정원을 만들기 전부터 이미 잠재되어 있었고 보길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접하면서 비로소 현실에 실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윤선도는 소학의 가르침을 중시하여 현실에서의 실천과 예악을 통한 수련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에게 예악과 경세치용은 같은 맥락으로 이어져 있다. 

 

부용동 정원은 윤선도가 섬에 들어간 1637년 2월부터 1668년까지 30여년의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졌다. 연구자들은 전통정원의 공간적 가치를 다음의 세 가지에서 찾고 있다. 첫째 정원은 도교, 유교와 성리학, 음양오행론, 풍수지리 등 동양사상이 물리적 형태로 표현된 곳이며 이러한 사상들의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둘째 후세에 발복(發福)을 지원하는 풍수지리가 정원에 입지를 결정하는 것에서부터 공간구성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게 직접 적용된다는 것이다.

 

셋째 건축물과 일체화된 외부 공간으로서 마당이나 뜰을 정(庭), 숲과 물 등의 자연물과 자연지형을 원(園)으로 보고 전통정원의 형태적 가치를 분석했다. 정원은 일차적으로 자연 형과 지세 등의 물리적 특성에 의해 좌우되고 2차적으로는 정원주의 경제력과 같은 사회적 배경에 의해 좌우된다. 조선조 선비들에게 은둔은 자연에 대한 희구와 현실적 역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어려운 현실을 피해 세상에서 격리된 명승을 찾아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것이었다.

 

부용동과 금쇄동 권역은 섬과 깊은 산속이라는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세상과 떨어져 있으며 경치 역시 뛰어나 은거지의 요건을 잘 갖추고 있다. 대부분의 섬은 식수와 농업용수를 구하기가 어렵다. 보길도 역시 1980년대 보길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물 확보가 어려워 살기에 척박한 곳이었다. 그러나 기존 연구에서 부용동 원림은 분지로 물 확보에 유리하며 농사를 지을 수 있고 육지와 적당한 거리에 있어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생활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윤선도 원림은 도가적 이상향 같은 빼어난 경치를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기본적 요건을 잘 갖춘 곳으로 평가된다. 부용동 원림을 도교적 이상향을 현실세계에 구현하여 은둔하며 자연을 즐기고자 했던 공간으로 보는 이유다. 부용동 정원은 윤선도가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연에 대한 자신만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공간으로 해석된다.

 

자신의 이상향인 신선세계를 현실세계에 구현하기 위해 정원으로 만들고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 윤선도가 세연정 일대를 향유한 모습은 예악을 통한 소학의 실천이라는 측면보다 유희 공간으로만 와전되어 현대에는 윤선도가 세연정 일대에서 사치스러운 위락 공간을 만들고 향락을 즐겼다고 비난받기도 한다.

 

윤선도의 원림 조성 목적을 은거라고 보는 시각이 있지만 짧은 시간 다수의 원림을 조영하여 동시에 경영한 점과 지속적으로 간척지 개간 등의 경제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원림의 조영을 다른 측면으로 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 산림천택이란 단순하게 산과 임야, 내와 못이라는 문자 그대로의 지시 대상을 넘어 바다, 갯벌 등을 포함한 농경지 이외의 여러 형태로 직접 산출물을 낳는 대지를 총칭한다.

 

조선사회는 초기에 산림천택의 사점 금지를 법제화 하여 산림천택을 공유적 성격의 토지로 묶어 두었다. 그러나 16세기 중반부터 산림천택의 사적 소유가 심화되었고 17, 18세기에는 사회 지배층에 의한 산림천택의 분할이 주요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해남 윤씨 가문은 일차적으로는 부의 증대를 위해 간척지를 개간하여 농토를 확충했다.

 

진도 굴포리 간척지는 윤선도 때까지 약 200 정보(60만평) 가량의 간척이 이루어졌다. 진도 지역 간척의 목적은 가문의 전장 획득뿐 아니라 영토가 없어 굶주림에 시달리는 주민들을 구제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실제로 그들은 간척 후 농지 일부를 주민에게 나눠주었다. 진도 굴포리에는 지금도 윤선도의 간척을 기념하는 굴포신당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해남 윤씨 가문에서 섬 지역에 입안(立案; 개간을 위해서 미리 허가를 받는 일종의 임시적인 개간권)을 받은 목적은 간척지를 개간하여 농경지를 획득하고자 한 점도 있었지만 도서지역은 특산물을 획득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 윤선도를 포함하여 가문의 종손들은 해안 가까운 곳이나 섬 지역에 별서정원을 짓고 예술 작품을 창작하며 원림 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그러한 입지를 선택한 이유는 서남 해안 곳곳에 있는 경작지와 섬을 경작하기 위한 교두보 확보라는 실질적인 목적 때문으로 판단된다.

 

녹우당에 남겨진 고문서에 의하면 가문에서 개간한 간척지를 백성이 점유하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에 대한 입안 기록을 들어 가문의 땅임을 확인하는 기록들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가문의 전장 관리가 용이한 곳에 원림을 조성하고 가문의 경작지를 경영하였다.(녹우당은 해남 윤씨 가문의 종택으로 효종이 윤선도에게 내려준 경기도 수원의 사랑채를 해체하여 해로를 통해 해남으로 옮긴 건물이다. 윤선도는 효종의 ’대군; 大君’시절 스승이었다.)

 

윤씨 가문의 경작지는 해안과 도서지역에 위치하여 육로보다 해로를 통해 관리하기가 용이했으므로 별서정원은 주로 해안가 또는 섬에 조성하였다. 보길도의 윤선도 원림은 세연정, 동천석실, 낙서재, 곡수당의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세연(洗然)이란 주변 경관이 매우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하다는 의미다.

 

윤선도는 부용동 안산(案山) 중턱 위 석함 속에 정자를 지어 동천석실이라 부르고 수시로 방문하며 부용동 제일의 절승(絶勝)이라 하였다. 병자호란 직후인 1637년 2월 윤선도가 처음 입도할 당시 보길도는 공도(孔島)였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간 것이 우연이었는지 이전에 알고 있었던 곳이어서 간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보길도 입도 19년 후인 1655년(효종 7년) 소나무 보호를 위해 섬 주민을 모두 몰아내자는 논의가 있자 윤선도는 사람이 사는 것이 송금(松禁)에 이롭다는 상소를 올렸다. 윤선도는 상소에서 “신은 보길도를 사랑합니다. 그곳은 천석(川石)의 경치가 뛰어나서 귀신이 깎고 새긴 듯하니 인간 세상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라 했다.

 

윤선도는 자신이 보길도에 원림을 조영한 것이 소나무 보호, 관리에 도움이 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보길도는 소금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을 지니고 실재 소금을 생산하였던 만큼 경제적 가치가 높았다. 윤선도의 입도를 헤아리게 하는 대목이다. 해남 윤씨 가문은 해언전(海堰田) 간척과 도서(島嶼) 지역 경영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윤선도가 가주였을 시기에 윤씨 가문은 이미 화산 죽도와 맹골도를 경영하고 있었다.

 

세연지는 지금까지 위락공간으로 알려져 왔으며 부가적인 기능으로는 보길도 지역 농사를 위한 저수지로 잘못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에 보길도는 금산(禁山)이었다. 금산 주변으로는 화전 등의 경작이 엄히 금지되었다. 윤선도는 보길도에 염전을 만들어 소금을 생산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밀물과 썰물을 이용해 염전에 바닷물을 끌어들이고 농축시킨 뒤 그 물을 가마솥에 끓이는 자염(煮鹽) 방식으로 소금을 생산했다.

 

이 방법으로는 소량의 소금만을 얻을 수 있었다. 안정적인 목재 확보와 민물 공급이 관건이었다. 윤선도는 세연지에 연못과 보를 축조함으로써 제염을 위한 일정량의 수량을 상시 확보할 수 있었다. 윤선도는 많은 간척사업을 통해 수리시설을 잘 이해하고 이를 원림에 활용했다. 윤선도 말년 보길도에는 가족과 제자들이 함께 거주했다. 곡수당의 연지를 통해 늘어난 사람들에게 필요한 식수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윤선도는 문소동을 미래지향적인 풍수명당으로 여겼다. 이곳에 자신의 묘를 쓴다면 자손 대대로 번창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의 사후 묘지로서 낙점한 곳을 생전에 지키기 위해 그 일대를 정원으로 꾸민 것이다. 해남 윤씨 가문은 선박 건조 후 대여세를 받기도 하였고 경제적 가치가 높았던 제염 활동도 활발히 했다.

 

조선 시대 토지 제도에 따르면 윤선도가 금산이었던 보길도에 정원을 만들고 거주한 것은 사회적으로 허락받지 못한 행위였다. 그런데 윤선도는 병자호란 직후 금산 관리라는 명분으로 보길도에 거주했다. 보길도지에 세연정의 정자에 앉으면 앞의 솔숲 너머로 바다가 보인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숲이 무성하여 보이지 않지만 그 시절에는 바다로 전망이 열려 있어 배가 들고 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윤선도는 풍수 길지인 문소동을 자신의 사후 묫자리로 선택했으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30여년의 시간 자신의 풍수길지를 지켜야 했다. 윤선도는 매일 금쇄동, 문소동, 수정동을 산책했다. 산림자원 및 풍수길지를 감시, 관리하기 위한 목적에 따른 행동이었다.

 

윤선도의 정원은 미학적 측면에서 무릉도원의 은일(隱逸) 공간이 아니라 원림 경영(經營) 차원의 공간이었다. 이중환은 지리, 생리, 인심, 산수를 가거지(可居志)의 입지조건으로 꼽았다. 지리는 풍수설에 의한 입지와 관련된 항목이다. 생리는 기름진 땅과 물자의 활반한 교역과 수운(水運)이 가능한 것과 관련된 항목이다. 넷 중 하나라도 모자라면 살기 좋은 곳이 아니다.

 

이중환은 스스로 사회적 이상향을 이 땅에는 없는 곳<비지지지; 非地之地>으로 꼽았다. 하지만 윤선도는 이상향을 부분적으로나마 실현했다. 윤선도가 만든 정원,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룬 행위는 도교적 이상향과 사회적 이상향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사회경제적 공동체로서의 이상향의 조건을 갖추었다.

 

윤선도는 가문의 전장(田莊) 경영, 지리와 해양, 자원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가문의 경작지를 간직하고 관리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에 원림들을 조성했다. 그곳에서 그는 꿈꿔왔던 이상향으로서 금쇄동과 부용동 원림을 꾸몄고 유학자로서 소학(小學)을 실천하는 공간으로 삼아 노래와 시를 지으며 정원을 향유하였다.

 

그간 단편적으로만 알던 윤선도를 확연히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윤선도와 소학의 관계도 새롭게 다가왔다. 사놓고 읽지 않고 있었던 ‘윤선도 평전’을 읽어야겠다.

 

역사와 관련이 깊음에도 읽지 않은 평전을 조경학 박사의 글을 읽고 읽어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왠지 낯설다. 그럼에도 좋은 자극을 받았음에 감사한다. 미수 허목의 십청원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얻지는 못했다. 경제와 생거(生居)의 의미를 음미한 시간이었다.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그의 가문이 중국을 통해 입수한 새로운 분야의 책이 윤선도의 행보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란 점이다. 그의 호 고산(孤山)은 독야청청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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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인문학으로의 초대 - 역사.철학.사회학을 관통하며 입체적으로 보는 교양과학 입문서
노에 게이치 지음, 이인호 옮김 / 오아시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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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본에서 과학(科學)이란 말이 등장한 것은 그들이 쇄국정책을 버리고 서구 문물과 지식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기였다. 에도시대(1603 - 1867)가 끝나고 메이지시대(1868 - 1912)가 시작된 19세기 후반을 말한다. 과(科)란 벼 화(禾)와 말 두(斗)의 결합어로 '되나 말 등의 용기로 곡물의 양을 재는 것'을 의미한다. 농작물의 양을 재며 품질을 평가한다는 뜻에서 등급을 정하기 위해 일정 조건을 생각하고 규정을 정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19세기 중반 제2차 과학혁명기에 과학자라는 전문직업인이 등장했다. 즉 그 시기 이전 살았던 갈릴레이나 뉴턴은 자연철학자였다. 갈릴레이는 자신의 연구 분야를 철학이라 불렀고 뉴턴은 ‘프린키피아’를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 불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질서 있고 규칙적인 운행을 반복하는 우주를 코스모스라 불렀다. 카오스와 대립되는 코스모스는 여성의 장신구를 의미하는 코스메틱(화장품)과 어원이 같다.

 

코스모스는 영원히 계속되는 필연적인 질서이며 그 자체가 로고스(이치)를 내포하고 있다고 받아들여졌다. 코스모스라는 말을 우주라는 의미로 쓴 사람들이 피타고라스학파다. 우주의 수학적 질서를 탐구한 피타고라스학파의 사상은 플라톤 사상으로 이어졌고 후일 과학혁명 시기에 갈릴레이와 케플러에 의해 부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상계의 물체는 아이테르(에테르)라는 불생불멸의 고귀한 물질 즉 5(번째)원소로 이루어져 있고 지상계는 생성, 소멸, 변화를 반복하는 불완전한 세계, 천상계는 영원한 질서가 지배하는 부동, 불변, 완전한 세계라 보았다.

 

지상계 물체의 자연운동(외력에 의하지 않고 일어나는 운동)은 시작과 끝이 있는 상하수직 운동이고 천상계 물체의 자연운동은 오직 원운동뿐이다. 원이야말로 시작과 끝이 없는 완전한 도형으로 생각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을 장소 변화, 양적 증감, 질적 변화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보았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돌이 아래로 떨어지는 현상꽈 식물이 자라는 현상을 모두 운동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이를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자연운동과 달리 외부에서 힘이 가해짐에 따라 하는 운동을 강제운동이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체의 운동 속도는 물체에 가해진 동력에 비례하고 매질의 저항에 반비례한다고 보았다. 매질의 저항이 0일 때 즉 진공에서는 물체의 속도가 무한대이며 이는 물체가 A 지점과 B 지점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는 명백히 불합리하다. 그렇기에 진공은 존재하면 안 된다. 즉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

 

고대 그리스의 우주론은 중세 기독교 세계에 그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고대와 중세 사이에는 커다란 단절이 존재했다. 그리스 과학의 정수(精髓)는 동방 비잔틴 제국을 통해 아랍으로 전해져 그곳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해나갔다. 아랍으로 전해진 그리스 과학은 12세기가 되어서야 유럽으로 역수입되었다. 12세기 르네상스는 문학이나 예술이 아니라 학문(과학) 부흥 운동이었다. 이는 근대과학이 성립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2세기의 일대 번역 운동을 통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의 수학이 유럽 세계로 다시 전해졌다. 유클리드 기하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 논증 정신이 그리스 과학의 특징이라면 연금술로 대표되는 실험 정신은 아랍 과학의 특징이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기독교 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결합했다. 스콜라 철학이 탄생한 것이다.

 

기독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융합된 스콜라철학의 권위에 반기를 든 혁신 운동이 16, 17세기의 과학혁명이다. 역사학자 허버트 버터필드에 의하면 과학혁명은 기독교 출현 이래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다. 이에 비하면 르네상스나 종교개혁도 중세 기독교 세계의 단순한 일화일뿐이며 내부적인 교체극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에서 근대 역학(力學)의 기초를 세운 사람은 갈릴레이였다. 그는 운동론을 혁신했을뿐 아니라 자연관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갈릴레이는 자연계를 구성하는 실재적 성질은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1차 성질(크기, 모양, 개수; 個數’, 느리고 빠른 운동)뿐이라고 생각했으며 수치화할 수 없는 2차 성질(물체의 색, 소리, 맛, 냄새)은 자연 인식의 대상에서 제외했다.

 

감각적인 성질을 배제함으로써 질적 차이를 지니지 않는 공허한 공간 속을 색, 소리, 맛, 냄새를 지니지 않는 물체가 수학적 법칙에 따라 운동한다는 근대과학적 자연관이 성립했다. 그 후의 과학사는 색과 소리 등 정성적인 2차 성질을 하나둘씩 측정 가능한 물리량으로 만들어 수학의 언어로 번역해나가는 과정이었다.

 

만유인력에서 눈여겨볼 만한 특징은 거리가 떨어져 있는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원격작용이다. 이것은 강제 운동의 원인을 물체의 접촉에 의한 근접작용에서 찾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 원리가 폐기되었음을 뜻한다. 뉴턴의 연금술 관련 유고를 입수한 경제학자 케인스는 뉴턴을 최후의 마술사라고 평했다. 뉴턴이 과학혁명을 완성한 근대과학의 창시자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뉴턴은 현대과학자의 상에서 크게 벗어나는 최후의 르네상스인이었다는 사실도 기억했으면 한다.

 

고대와 중세를 지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은 우주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 또는 생명체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유기체적 자연관이라고 부를 수 있다. 물론 고대 그리스에서도 세계가 원자와 공허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연현상이 공허속을 운동하는 원자의 위치, 배열, 뭉침, 흩어짐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유물론적 사상도 존재했다. 그러나 원자론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자연관과 공존하기 어려웠기에 오랜 세월동안 비주류 이론 취급을 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첫 번째 의미가 자기 자신 안에 운동의 원인을 지니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자연이란 스스로 생장, 생성하는 영혼 같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유기적 존재이자 생명적 존재라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 형상론은 만물은 질료와 형상이 합성된 것이라는 사상이다. 집을 예로 들면 목재와 회반죽은 질료이며 완성된 집의 모양이 형상이다.

 

온갖 운동은 가능태인 질료가 현실태인 형상을 목적지로 삼아 나아가기 때문에 생긴다. 유기체적 자연관에서는 산천초목부터 시작해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가 각각 내부에 지니는 생명적인 원리에 바탕을 두고 목적지를 향하는 운동을 한다고 설명했다. 질료란 규정되지 않은 소재, 재료를 가리키며 가능태를 의미한다. 형상이란 소재와 재료를 한정하는 형태이며 현실태에 해당한다. 인간을 예로 들면 신체는 질료이고 영혼은 실체적 형상이다.

 

데카르트는 물체의 본성을 연장으로 간주했다. 물체란 생명적이고 정신적인 것을 전혀 포함하지 않는 연장 실체란 의미이다. 근대과학은 12세기 르네상스를 통해 그리스 과학의 논증정신과 아랍 과학의 실험정신이 만나 형성되었다. 이는 연역법에 바탕을 둔 논증과학과 귀납법에 바탕을 둔 실험과학의 결합, 또는 합리적 방법과 경험적 방법의 결합을 의미한다. 근대과학의 방법론을 가설연역법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역적 논증(삼단논법의 이론) 구조를 설명했다. 또한 귀납적 논증을 중심으로 과학 방법론을 정형화했다. 연역법은 전제가 옳을 경우 반드시 결론이 옳지만 지식을 확장하거나 새 지식을 얻을 수 없다. 개별 명제에서 보편 명제를 끌어내는 귀납법은 지식을 확장할 수는 있지만 전제와 결론의 관계가 필연적이지 않으며 개연적(확률적)일뿐이다. 하지만 과학연구 현장에서 귀납법은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다.

 

수학이나 논리학 같은 형식과학과 달리 경험과학에서는 연역적 추론에만 의지할 수 없다. 자연과학이 경험과학인 이상 언제나 새로운 경험에 대해 열려 있는 것은 당연하다. 가설은 아무리 실험으로 검증됐다 해도 절대적인 진리의 자격을 획득하지 못한다.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경험으로 가설이 반증될 가능성은 언제나 남아 있다. 따라서 자연과학의 법칙에 수학, 논리학과 동등한 논리적 필연성을 요구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과학이론과 과학 법칙은 영원히 가설로 머물러 있으며 언제나 경험적 실험에 의해 수정되거나 폐기될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귀납법, 연역법, 가설연역법도 절대 만능의 방법론이 아니다. 확실히 이들은 근대 과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이론과 법칙을 발견 할 때는 논리적 추론만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유추나 은유 등 비형식적인 추론 방법이나 퍼스의 귀추와 같은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성에 관한 발상법이 새로운 발견이나 기성 이론을 타파하는 대담한 발상으로 이어지곤 한다. 따라서 과학 연구에서 방법론이 일정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긴 하지만 과학은 그것만으로는 발전하지 않는다.

 

과학 연구는 수식과 논리적 추론에 얽매인 융통성 없는 과정이 아니라 과학자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창의력이 활약할 여지가 있는 역동적인 정신 활동이다. 뉴턴은 ‘프린키피아’에서 ”나는 가설을 세우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이는 과학적 가설이 아니라 데카르트식의 기계론적 가설을 의미한다. 데카르트는 우주를 신이 만든 하나의 커다란 기계 같은 것으로 보았다. 뉴턴은 물리학의 범주를 관측 가능한 현상의 범위 안에서 법칙을 탐구하는 일로 한정했다.

 

형이상학의 제거를 표어로 내걸었던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검증 가능성이라는 깃발 아래 전통적인 철학을 개혁하겠다는 대담한 시도를 했다. 다시 말해 유의미한 명제는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검증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유의미한 과학적 명제와 무의미한 형이상학적 명제를 구분하려 한 것이다. 칼 포퍼는 이와 같은 논리실증주의를 내재적으로 비판하고 극복하려 했다.

 

포퍼는 반증 절차를 기반으로 한 과학 철학을 전개했다. 이에 더해 반증가능성이야 말로 과학이론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생각했다. 반증가능성이란 해당 가설과 모순되는 관찰 명제가 논리적으로 가능함을 뜻한다. 즉 가설이 오류일 가능성의 정도를 의미한다. 포퍼는 이 개념을 바탕으로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설정하려했다. 포퍼는 반증 가능성이 클수록 과학적이며 작을수록 비과학적이라 주장했다. 이는 얼핏 상식에 어긋나 보인다. 반증될 가능성이 클수록 그 가설은 불확실하며 오류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퍼는 실제는 그 반대이며 부정적 요소처럼 보이는 반증 가능성이야말로 과학 이론이 갖추어야 할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내일은 비가 오거나 비가 오지 않을 것이다란 예보는 100% 확실하고 틀릴 일이 없는 예언이다. 하지만 이는 내일 날씨에 관한 어떠한 유용한 정보도 알려주지 않는다. 이에 비해 내일 오전은 맑겠지만 낮부터 비가 올 것이고 저녁에는 눈이 내릴 것이라란 일기 예보는 내일 오전에 비가 오거나 저녁에 눈이 내리지 않으면 명백히 반증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 비가 오거나 오지 않을 것이라란 일기예보보다 반증 가능성이 커졌고 일기예보에 담긴 정보량과 경험적인 내용도 늘어났다. 반증가능성이 큰 가설일수록 경험적 내용이 풍부해지고 과학적인 가설이라 할 수 있다. 항진명제처럼 반증가능성을 거의 지니지 않는 가설은 자연의 이치에 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하고 경험적으로도 무의미하며 비과학적이다. 포퍼가 주장한 바는 진정으로 과학적인 이론과 가설은 반증될 위험을 감수하며 대담한 예측을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포퍼는 반증 가능성과 이를 지탱하는 비판적 방법이 과학을 과학답게 하는 요소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의견을 명확하게 주장하되 만일 반증되면 이를 즉시 철회하는 과학자의 비판적 태도가 과학 탐구를 지탱한다고 생각했다. 포퍼는 ”다윈주의는 과학적 이론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으로서 다윈주의가 과학에 대해 지니는 가치는 대단히 크다.“고 말했다.

 

토머스 쿤 이전에 쿤과 유사한 주장을 한 사람이 N. R 핸슨이다. 그는‘발견의 패턴’이란 책에서 논리실증주의자가 관찰과 이론을 2분법적으로 나누고 관찰 언어와 이론 언어를 구분하는 태도를 격하게 비판했으며 관찰의 이론 의존성이라는 안티 체제를 제기했다. 핸슨은 본다거나 관찰한다는 행위가 단순히 대상을 쳐다 보는 것만이 아니라 대상에 일정한 의미를 부여하며 관찰한다는 개념을 포함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물리학 교과서에 윌슨의 안개상자에 나타난 소립자의 비적(飛迹) 사진이 실려 있다고 해 보자. 사진을 살펴보면 검은 배경 위에 하얀 선과 점이 산재하며 선 몇 개가 교차하고 있다. 만약 이 사진이 미술관 벽에 걸렸다면 보통 사람들 눈에는 추상화로 보이겠지만 물리학자가 보면 인공 원자핵 변환 흔적을 나타내는 사진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진을 알파 붕괴나 양자의 비적으로 인식하려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이론도 알고 있어야 한다. 의사가 X 사진에서 폐암 징후를 찾아낼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관찰이라는 행위는 이론적 배경이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일정한 지식과 이론이라는 색안경을 낀 채로 관찰을 수행한다. 이를 관찰의 이론의존성이라고 한다. 반대로 말하면 이론적 배경과 완전히 독립적인 순수한 관찰, 순수한 관찰을 통해 기술한 순수한 사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든 관찰이 이론을 전제로 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행위라면 관찰과 이론 또는 관찰 언어와 이론 언어를 명확히 구별할 수 없다.

 

그러면 관찰은 이론이 올바른지 검증하거나 반증하기 위한, 이론에서 완전히 중립적인 기반이 될 수 없다. 이는 곧 관찰된 사실을 통해 이론이 올바른지 그른지 판단할 수 없다는 뜻이며 이론이 관찰된 사실로 인해 반증되었다거나 부정됐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이론은 대체 무엇을 통해 부정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관해 핸슨과 쿤을 포함한 신과학철학 진영에서는 이론은 다른 새로운 이론으로 부정된다고 답했다.

 

쿤은 하나의 이론이 다른 이론으로 부정되는 상황을 하나의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으로 교체되는 패러다임 전환으로 봤으며 패러다임 변천이라는 관점에서 과학의 역사를 다시 한번 되짚어 보자고 제안했다. 논리실증주의와 비판적 합리주의 같은 기존 과학철학을 지탱하던 사상은 과학이 연속적으로 발전하고 지식이 점차 누적되다 보면 언젠가 진리의 전당에 도달하거나 근접할 것이라는 일종의 진보사관이었다. 하지만 쿤은 과학의 역사를 점진적인 진보의 과정이 아닌 패러다임 전환을 축으로 한 역동적이고 단속적인 전환의 역사라고 생각했다.

 

쿤은 그러한 단속적 전환을 과학혁명이라 불렀다. 물론 17세기 과학혁명은 일회적인 역사적 사실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며 쿤이 말한 과학혁명은 역사에서 여러 차례 일어날 수 있는 패러다임 전환을 뜻하는 일반명사다. 패러다임은 ‘과학 연구를 선도하는 모범 사례’, ‘일정 기간 연구자 공동체에 모델이 될 만한 문제와 해법을 부여하는, 일반적으로 인정된 과학적 업적’이다. 정상과학이란 어떤 특정한 과학자 공동체가 일정 기간 일을 진행하기 위한 기반으로 인정한 과거의 몇 가지 과학적 업적에 확고한 기반을 둔 연구다.

 

쿤에 의하면 위기란 정상과학 안에서 변칙 사례가 쌓여 패러다임에 관한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상황을 말한다. 패러다임 전환은 세계관 전환과 유사한 사상적 사건이며 사회적 요인과 역사적 조건뿐 아니라 심리적 요소까지 고려해야 하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원인으로 발생하는 사건이다. 마거릿 마스터만이란 여성 과학자는 쿤을 옹호하는 한편 비판했다. 비판의 요지는 패러다임이란 개념이 너무 모호하게 쓰였다는 것이다. 쿤은 패러다임 개념이 너무 다의적이었음을 인정하고 용어를 철회하고 전문분야기반, 모범사례라는 두 개념으로 구분해 용어를 정리했다.

 

하지만 패러다임이란 말이 원래 쿤이 내린 정의에서 벗어나 관점이나 생각의 틀이라는 널리 쓰이는 일상 용어가 되었고 쿤이 엄밀하게 정의한 전문분야기반, 모범사례란 말은 전혀 쓰이지 않고 잊히고 말았다. 쿤이 제기한 공약불가능성이란 말은 두 패러다임을 비교하는 것이 줄가능하다거나 다른 패러다임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 다른 패러다임 사이에서는 완전한 형태로 번역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둘 사이의 의사소통은 부분적으로만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쿤은 진리라는 개념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증명이라는 용어와 마찬가지로 이론 내에서만 적용할 수 있는 상대적 개념이라고 정의했다. 포퍼 측에 서서 쿤의 패러다임론을 격하게 비판한 임레 러커토시는 과학을 기술하는 기본 단위는 가설이 아니라 연구 프로그램이라 불리는 더 큰 단위라는 점을 강조했다. 로버트 머튼은 두 가지를 주장했다. 청교도주의(금욕적 개신교 정신)가 17세기 영국에서 근대과학의 발전을 촉진했다는 것, 17세기 영국에서는 경제적, 기술적 요구에 따라 과학 연구의 방향성이 좌우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과학사회학이라는 새 분야를 만들었다.

 

그는 과학자는 1) 공유성(communality), 2) 보편성(universality), 3) 무사욕(disinterestedness), 4) 조직적 회의주의(懷疑主義; organized skepticism) 등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CUDOS라 한다. 쿤 이후의 과학사회학은 과학지식사회학이라 불린다. 데이비드 블루어가 제시한 네 가지 스트롱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1) 인과성, 2) 공평성, 3) 대칭성, 4) 성찰성 등이다. 과학이 두 번째 과학혁명을 통해 19세기 말에 지적 제도이자 사회제도로서 모습을 갖추었듯 기술은 18세기 후반 근대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을 통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20세기 초까지 과학 연구는 대학 연구실과 실험실이라는 상아탑에서 과학자의 자발적인 호기심에 따라 이루어졌다. 하지만 점점 더 비싸고 커다란 실험장치가 필요해지면서 거대과학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과학자가 스스로 연구비를 마련하기 어려워졌고 그 결과 정부와 기업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진행하는 프로젝트 달성형 연구가 점차 활발해졌다. 과학은 이제 대학과 연구소 안에서 완결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사회와 강하게 연관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62년은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출판된 해다. 카슨이 화학 물질 오염의 가장 무서운 특징으로 꼽은 것은 복합오염이다. 복합오염이란 다양한 화학물질이 섞인 결과 그동안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물질이 생겨나 환경과 인체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가치중립적이라고 여기는 과학기술은 사실 몹시 다양하고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기에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측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선의로 사용하는 과학기술이 나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핵물리학자 앨빈 와인버그는 과학이 순수한 이론적 연구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와 경제 등 다른 영역과 교차하고 사회를 횡단하며 연구 개발을 진행함으로써 생기는 여러 문제를 트랜스사이언스라고 표현했다. 와인버그는 트랜스사이언스를 과학에 물을 수는 있으나 과학이 대답할 수 없는 여러 문제라 말했다. 환경문제, 공중위생과 건강문제, 원자력발전소의 안정성 등이. 구체적 사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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