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미수의 학.예.사상 논고
윤사순 외 / 미수연구회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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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 허목 선생은 23세 때 부친 허교의 임지인 거창으로 가 용주 조경을 만나 종유(從遊)했고 문위(文緯) 문하에서 공부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생이 되었다. 한강 선생의 조카 사위인 장현광(張顯光) 문하에도 급문(及門)했다. 32세에 인조의 아버지(정원군)를 추존하자는 박지계(朴知誡)를 처벌한 것으로 인해 인조로부터 정거(停擧) 처분을 받았다.

 

미수는 후에 정거가 풀린 뒤에도 과거를 치르지 않았다. 이로부터 미수는 외조부 백호 임제를 본받아 전국 명소와 산천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호연지기를 길렀다. 미수는 56세에 처음으로 정릉(靖陵) 참봉에 제수되었다. 57세 되던 해인 효종 2년 시월에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었다. 대왕이 책을 읽다가 미심(未審)한 것에 부표(付標)한 것에 대해 답하는 역이었다.

 

62세 되던 해 정월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조지서(造紙署) 별좌(別坐)라는 관직을 받았다. 그해 6월 공조좌랑으로 승진했으나 사직하고 연천 구택(舊宅)으로 내려왔다. 미수는 이후 여러 차례 제수(除授)되었으나 의견만 올리고 물러나 연천으로 돌아오기를 거듭했다. 66세 때인 3월에 장령(掌令; 사헌부의 정 4품 벼슬)이 되어 경연(經筵)에 참여해 송시열이 정한 기해상복레가 잘못되었다고 소를 올렸다.

 

오례(誤禮)를 지적했다고 하여 9월에 삼척부사로 외보(外補)되어 시월에 부임하였다. 68세 때 가을 관직을 버리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몰두했다. 84세 때 숙종으로부터 저택을 하사받았다. 85세에 연천으로 돌아왔다. 88세 때인 1682년(임술년) 4월(숙종 8년) 병을 얻어 연관(捐館; 집을 버렸다는 의미로 죽음을 뜻함)했다.

 

선생이 젊었을 때 광주 자봉산(紫峯山中)에서 체득한 고전(古篆) 8분체는 우리나라 서예사상 혁명적인 업적이다. 선생의 서체는 사회의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선생은 승지 김수홍(金壽弘)과 함께 적서통용을 주장하기도 했다. 백호 윤휴(尹?)가 연천의 미수 선생 댁을 찾았던 점이 이채롭다.

 

예송 논쟁은 효종의 죽음으로 인해 빚어진 일이다. 소현세자가 죽음으로써 차자인 봉림대군(효종)이 왕이 되어야 하는지, 소현세자의 아들이 왕이 되어야 하는지 논쟁이 있었다. 봉림대군이 왕이 되었다. 효종이 죽자 모후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를 놓고 남인 계열과 서인 계열이 다투었다. 서인은 효종이 차자(次子)이니 자의대비가 1년을 입어야 한다고 했고 남인은 효종이 자차이지만 왕이 되었기에 자의대비가 3년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 이를 기해예송이라 한다.

 

갑인예송은 효종 비 인선왕후 장씨가 죽자 자의대비가 얼마의 기간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놓고 서인과 남인이 다툰 사건이다. 서인은 9개월, 남인은 1년을 주장했다. 미수와 윤휴의 예학은 당시 조선 예학의 고전적 경향을 대표하는 것이었고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학자들의 예론은 예학의 보편주의적 경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예의 분별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제왕가는 사서인(士庶人)과 달리 왕위 계승자에게 종법을 주게 되므로 효종이 장자의 지위에 있고 그에 대한 모후의 복(服)을 재최(齊衰)삼년으로 단정하게 된다. 재최(齋衰)는 흔히 자최(齊衰)라고도 한다. 자(齊)는 옷자락을 꿰매어 마름질한다는 뜻으로 옷의 끝단을 꿰맨 상복을 말한다.(衰; 상복 최, 쇠할 쇠)

 

예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효종이 왕위에 올랐더라도 차자(次子) 지위에는 변함이 없으며 그에 대한 복(服)도 기년(朞年)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의례(儀禮), 주례(周禮), 예기(禮記) 등의 고전에서는 주로 왕족 귀족들의 예를 기술하였고 이 때문에 신분적 특수성을 강조한 요소가 많았다. 고전 예악은 봉건체제와 귀족사회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예제가 신분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고 다르게 적용된다는 관념은 당연한 추세였다.

 

따라서 신분의 귀천, 지위고하, 존비의 차례를 분별하는 것이 예제의 한 기능이 되다시피 하였다. 그래서 천자 7묘, 제후 5묘, 대부 3묘, 사 1묘라든지 기지상(朞之喪) 달호대부(達乎大夫) 3년지상 달호천자(達乎天子)와 같은 차별관념은 말할 것도 없고 예는 서인(庶人)에게까지 내려가지 않고 형(刑)은 대부에게까지 올라가지 않는다 또는 사(士) 이상은 반드시 예악으로 절제시키고 중서(衆庶) 백성은 반드시 법수(法守)로 통제해야 한다는 발상이 보편화되었다.

 

의례(儀禮) 상복편의 신분과 지위에 따라 상이한 많은 복제(服制) 규정들도 이러한 사회적 예학적 통념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왕조예제를 집대성한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는 사서인의 예도 수록하긴 하였으나 그것이 신분 혹은 품계별로 정리되었고 대명집례(大明集禮)나 대명회전(大明會典) 등에서도 모든 전례가 황실례, 품관례, 서인례 등으로 분별되었다.

 

조선 초기에 완성된 국조오례의는 거의 전부 왕조례를 규정한 것이며 사서인의 예는 수편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제왕가의 예가 사서인과 다른 고유성을 갖는다는 것은 극히 당연하게 인식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가례(家禮)의 저자인 주자나 그 연구의 제일인자였던 사계 김장생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윤휴, 미수, 윤선도 등의 복제론에 이르러 절대적으로 강조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래 사대부 계층의 예서였던 가례를 제왕가에 적용하려는 노력이 조선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성리학을 국시로 한 조선왕조가 불교 의례를 유교식으로 대체해나가는 과정에 있었던 것인데 태종 - 세종대 제도 정비기에 미처 왕조례가 마련되지 못했던 부분에 가례의 활용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이 세종의 치상(治喪) 절차를 한결같이 주자가례에 의하도록 한 것이 그런 예다.

 

그래서 국조오례의의 흉례, 국휼 부분에는 특히 가례가 많이 수용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왕조를 사대부례와 동일시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미수의 학문은 가학으로 축적되어 온 근기(近畿) 내지 기호(畿湖)의 학풍을 겸습(兼習)하는 과정에서 독자적으로 이룬 것이다. 미수는 염락관민(濂洛關?)의 성리서 정도를 공부하던 시대에 박학을 추구한 드문 인물이다.

 

당시 박학은 위인지학(爲人之學)에 속하는 잡학으로 천시되었다. 물론 미수에게는 중심 분야가 있었다. 그는 육경(六經)을 근본으로 삼아 예악(禮樂)을 참구하면서 백가의 잡설들을 통람(通覽)하기에 발분, 노력할 수 있었던 것이 50년이었다는 말을 했다.

 

오늘의 예(禮)는 예절, 에티켓 정도의 의미이지만 당시의 예는 그런 의미는 물론 법률, 제도, 문화 일반을 두루 포괄했다. 다른 선비 같으면 벼슬 후 은퇴할 나이인 50대 중반까지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채 수많은 곳으로 피난, 유람, 이사하면서 학문을 했다. 미수의 생애는 50대 후반부터 타계한 해인 88세까지 노년기가 벼슬을 의욕적으로 하고 저술 역시 왕성하게 한 시기다.

 

미수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전성기에 태어나 당쟁이 격렬한 시기에 남인 중에서도 청남(淸南)의 대표자로 활약하다가 타계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과제인 우주론과 인성론을 논리적 분석으로 이론화한 학문이 되었으나 형이하학적 문제인 경세치용과 이용후생 등 실학에는 이용되지 못하였다. 미수는 이에 성리학에서 탈각하여 선진유학으로 회귀하여 육경(시서역예악춘추)에서 성인의 도를 찾아 명덕(明德) 신민(新民)하는 것을 여생의 임무로 자부하였다.

 

미수는 당시 유행하던 사단칠정론이나 이기심성설 같은 공소(空疏)한 형이상학적 논쟁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고문(古文)과 고자(古字)에 탐닉했다. 미수는 윤휴와 같이 경전에 대한 과감한 고증이나 선유(先儒)의 정설에 대한 대담한 비판을 용납할 수 없었다. 하물며 경전 자체를 부인하거나 장구(章句)를 개편하는 윤휴의 태도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미수는 그의 과격한 태도를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 그의 심오하고 독창적인 학문 태도를 긍정 평가하기도 했다. 이점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매도한 송시열과 같은 맹목적 주자 추종자들과 다른 점이었다.

 

미수에 대한 평가는 당대부터 상반되게 나타났다. 그의 글에 고기(古氣)가 있어서 훌륭하며 그의 상고정신은 단순한 복고가 아니라 주자학에 대한 도전으로 뒷날 실학사상의 근원이 되었다는 우호적인 설이 있는가 하면 그의 글은 시대에 맞지 않으며 그의 상고학 또한 선별적인 복고가 아닌 완전한 복고로 시대역행적인 학문태도라는 비우호적 평가도 있었다.

 

미수에 대한 근세 학계의 관심은 예론에 치우친 감이 있다. 미수의 상고학 학문 태도는 그의 도가적 의식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공히 반주자학적 의식하에서 형성된 것이다. 미수는 도가적 의식이 무위자연을 귀하게 여기는 것과 같이 선진(先秦) 고학(古學)이 후대의 유학보다 인위적인 면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상고학 정신은 선진 시대를 재현하려는 의도의 산물이 아니라 당시 학풍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도가적 의식은 임병(壬丙)양란 이후의 사회 안정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성리학에 대한 반발 의식이었으며 시끄러운 속세를 떠나 자연 속에 묻혀 살고자 하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부친 허교(許喬)는 도가적 인물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인물이다.

 

외조부 임제(林悌)도 반주자학적 의식을 가진 처사(處士) 시인이었다. 미수가 교유한 인물들 가운데 주자학을 신봉한 인물은 없었다. 위와 같은 배경에 의해 형성된 도가적 의식은 노장적 처사관을 수용했다. 성리학자들이 배척하는 처사 다시 말해 조수동군(鳥獸同群)하여 장저(張沮)와 걸익(傑溺)과 같은 생활을 하는 인물을 동경하고 이들을 수용하는 입장을 취했다.

 

공자가 밭일을 하는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을 보고는 자로(子路)를 시켜 나루터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도록 하였다. 자로가 장저에게 다가가 나루터가 어디 있는지 묻자 장저는 수레에 타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자로가 공자라고 말하자 장저는 공자라면 나루터가 있는 곳도 알 것이라고 말하고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은자(隱者)인 장저의 말에는 뜻을 펴기 위하여 주유열국(周遊列國)하는 공자를 비웃는 뜻이 담겨 있었다. 자로는 다시 걸익에게 물었다. 걸익은 자로가 공자의 제자임을 알고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것이 세상이거늘 누가 그것을 바꿀 수 있겠는가? 그대는 사람을 피하는 인사를 따르지 말고 세상을 피하는 인사를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오라고 말한 뒤 밭일을 계속했다.

 

자로가 돌아와 그들의 말을 고하였다. 공자는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새와 짐승과 더불어 살 수는 없다. 내가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누구와 함께하겠는가? 천하에 도가 행해지고 있다면 내가 바꾸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

 

미수의 시 가운데 공자와 안회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이 있다. “공자의 일흔 명 제자 중에서/ 어짊을 물은 이 몇몇 사람인가?/ 오직 안회란 분이 계시니/ 석달 동안을 어기지 않으셨네.” 공자의 제자라 해도 수준이나 지향점, 생각하는 바가 다 다름을 알 수 있다. 미수는 “인정은 본래 수없이 변하는 것/ 날마다 갈수록 세상일 복잡하다/ 친숙한 사람도 때로는 멀어지니,/ 언제나 똑같이 보기는 어렵다네..”란 글도 남겼다.

 

미수는 천지 자연과 인간을 같은 자리에 놓고 자연의 천태만상적 아름다움과 질서정연한 운행은 곧 인간의 글이고 그 글은 도덕과 같으니 도덕이 훌륭해지면 글도 융성해지고 도덕이 타락하면 글도 타락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미수의 대표작인 기언(記言)은 자신이 한 말을 기록한 문집으로 글을 위한 글이 아니다.

 

한영우의 연구에 따르면 미수는 자신의 학문을 고학(古學)이라 규정했다. 주자의 해석을 통해 이해되는 유학(儒學)이 아니라 육경고문을 직접 파고드는 원시유학을 말한다. 고학적 세계관에서 신화의 세계는 이상사회로 그려지고 단군의 존재는 부각되는 반면 주자학의 중화(中華)와 이융(夷戎)의 구별이나 존화주의는 배격된다.

 

상고(尙古)주의는 옛적의 문물을 숭상하여 표준·모범으로 삼는 주의를 말한다. 허목은 73세 때인 1667년(현종 8년)에 동사(東事)를 편찬했다. 이 해에 허목은 동사뿐 아니라 경설, 청사열전을 함께 저술, 편집하여 기언(記言)이라 하였다. 허목이 책을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은 현종 3년에 삼척 부사를 그만 두고 5년간의 휴식기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수는 73세의 고령임에도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대저작을 남길 수 있었는데 이는 그 자신이 학문에 대한 대단한 열정을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미수는 숙종 3년에 경설과 동사를 왕에게 바치면서 왕이 두 책을 제왕학적 교훈서로 참고하기를 기대했던 듯하다. 그는 경설을 바치는 차문(箚文)에서 공리(功利)를 진언(進言)하는 사람을 경계하고 3대 고(古)성인의 학(學)을 따라 정치할 것을 권고하였으며 동사의 내용을 설명하여 우리나라는 중국과 기후, 말, 풍속, 취미가 다른 방외(方外)의 별국(別)國)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또 단군으로부터 통일신라까지의 역사를 개관하고 칭송받아야 할 시대는 단군, 기자, 신라이며 경계해야 할 나라는 위만, 백제라 하여 경계의 기준을 전쟁을 좋아하느냐 좋아하지 않느냐에 두었다. 이는 당시 군비확장 정책과 벌호(伐胡) 운동을 의식하고 한 말이었다. 그래서 허목은 우리나라의 풍토적 조건, 그 풍토에 맞춰 형성된 농업 조건, 인심, 풍속 그리고 역사를 헤아려 그에 순응하는 정치를 하는 것이 부국안민의 요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동사(東事)’는 기전체의 사서다. 전통적 가치관에 의하면 서화는 대체로 선비들의 여기(餘技), 말기(末技)로 취급받았다. 때로 완물상지(玩物喪志)의 경계조차 없지 않았을 만큼 폄척(貶斥)을 당하던 분야이기도 했다. 그러나 비록 여기에 속하는 말기(末技)로 취급되었을망정 그것에 대한 관심과 교양은 사실에 있어서는 매우 컸다.

 

소동파가 한 '퇴필여산미족진 독서만권시통신(退筆如山未足珍 讀書萬卷始通神; 몽당붓이 산처럼 쌓여도 보배로운 것이 되기에는 부족하고 만권의 책을 읽어야 비로소 귀신과도 통한다.)'이란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서화는 고도의 교양과 높은 인격성을 전제로 한다. 미수의 고전(古篆)은 어떻게 보면 된 것 같기도 하고 덜 된 것 같기도 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부적 같기도 한 신비로운 명적(名蹟)이다.

 

미수로 하여금 선풍도골(仙風道骨)의 풍모와 고고(高古)한 문장, 기이한 전법(篆法)을 쓰게 한 근거와 저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선진(先秦)고문(古文)만을 숭상할뿐 한당 이하 근세의 작품에 대해서는 좀처럼 평가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은(殷)주(周) 고대의 전적과 이사(李斯)의 소전(小篆) 이전의 고문자들이다.

 

은주고대의 전적이란 고문상서를 주축으로 하는 공벽(孔壁)고문(古文: 한무제 때 공자의 구택에서 나왔다는 일련의 고문서)들이다. 소전 이전의 고문자란 과두문자를 필두로 하는 갑골, 종정(鐘鼎) 등을 말한다. 미수는 요청이 있을 때마다 고문 또는 고전으로 응수(應酬)했다.

 

허목을 사사한 성호 이익은 허목의 서첩에 발문을 붙이며 이때 일을 거론한다. “미수 선생은 매사 옛것을 좋아하여 사소한 편지나 만필이라도 과두문자의 획으로 예서를 썼다. 벌레 주둥이, 새 발톱 모양의 글씨가 완연히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어서 참으로 기이하다.”

 

미수는 나는 일찍이 웅연석벽에서 돌에 새긴 이상한 글씨를 보았는데 그 글씨는 괴괴하고 기기하여 어떤 것은 내려 그었고 어떤 것은 가로 그었으며 혹은 합쳐지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는 등 변화가 진정 놀라웠다고 썼다.

 

미수는 그것을 기회의 작용으로 이루어진 귀신의 자취라고 단정했다. 주목할 점은 미수가 웅연석문을 감상한 이후 진(秦) 이후 나타난 서체에 대해 인식의 변화를 일으켰다는 점이다. 척주동해비는 미수 전서의 대표작이다. 미수의 유작을 가장 먼저 필사하여 정리한 사람은 선생 사후 2년인 1684년(숙종 10년) 승지와 황해 감사를 지낸 권수(權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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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富)의 미술관(니시오카 후미히코); 예술

2. 조선의 유학자, 조식(허권수); 역사

3. 우연이 만든 세계(션 캐럴); 생물학

4. 패자의 생명사(이나가키 히데히로); 생물학

5. 과학은 미래로 흐른다(에른스트 페터 피셔); 과학

6. 잠자는 죽음을 깨워 길을 물었다(닐 올리버); 고고학

7. 이 모든 것을 만든 기막힌 우연들(월터 앨버레즈); 과학(빅히스토리)

8. 과학으로 보는 문화유산(신은주); 문화과학

9. 생명해류(후쿠오카 신이치); 생물학

10. 역사학 너머의 역사(김기봉); 빅히스토리

 

2022년 발간책들 중 베스트 10(서평 작성)을 골랐습니다.(읽은 순서) 예술 한 권, 역사 한 권 외 생물학, 문화과학, 빅히스토리, 고고학 등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사회학, 철학 등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지질학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이 모든 것을 만든 기막힌 우연들에 지질 내용이 들어 있고 생명해류에서도 지질이 중요하게 다루어졌습니다. 서평을 작성하지 않은 책들 가운데 지질학 책들도 읽은 것이 있습니다. 2023년에 출간될 책 가운데 어떤 책을 처음으로 고를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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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기원 - 예일대 최고의 과학 강의
데이비드 버코비치 지음, 박병철 옮김 / 책세상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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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물리학, 판 구조론, 지구 내부 화산 원리 등을 연구하는 예일대학교 교수 데이비드 비코비치의 책이다. 그는 말랑말랑한 과학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책은 전체 여덟 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 우주와 은하, 2장 별과 원소, 3장 태양계와 행성, 4장 지구의 대륙과 내부, 5장 바다와 대기, 6장 기후와 서식 가능성, 7장 생명, 8장 인류와 문명 등이다.

 

저자는 어두운 밤 하늘을 이야기하며 그것은 우주의 시작임을 언급한다. 우주의 나이가 무한대라면 즉 시작이 없다면 밤하늘은 어둡지 않을 것이다. 무한대의 나이를 가정한다면 아무리 멀어도 빛이 도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나이가 유한하고 공간이 팽창한다는 것은 우주에게 생일이 있다는 의미다.

 

우주의 경계면 바깥에는 빛도, 물질도, 에너지도 없고 시간과 공간도 없다. 세상에 그런 공간이 어디에 있냐고 물을 필요는 없다. 세상이란 우주의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경계 바깥이 어떤 곳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애써 상상할 필요는 없다. 우주에 존재하는 질량과 에너지의 70%는 암흑 에너지이고 25%는 암흑물질이다.

 

별과 행성, 인간 등 우리에게 친숙한 물질은 나머지 5%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들은 거의 대부분 수소와 헬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는 은하와 같이 큰 규모의 우주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인간의 한정된 감각으로는 그들의 존재를 느낄 수 없다. 최초의 기체 구름은 주성분이 수소와 헬륨이었기 때문에 이로부터 지구와 같은 행성이 탄생할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다.

 

그렇다면 주기율표에 나와 있는 그 많은 원소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리튬, 베릴륨, 탄소, 산소, 질소, 납, 철 등 헬륨보다 무거운 원소들은 별의 내부에서 핵융합반응을 통해 만들어졌다. 우리 태양은 핵융합 과정에서 에너지를 방출함으로써 중력에 의한 수축을 버티면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태양의 중심 온도는 1,500만도c다. 질량이 태양의 15배 이상 되는 별들은 중심 온도가 1,500만 도c에 도달해도 멈추지 않고 계속 수축하면서 무거운 원소를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온도가 1억도c에 도달하면 헬륨이 핵융합반응을 일으켜 탄소와 산소를 만들고 이보다 큰 초거성들은 핵융합을 여러 번 반복하여 철까지 만들 수 있다.

 

무거운 원소를 생산하는 핵융합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헬륨 원자핵인 알파입자의 융합이다. 양성자 2개와 중성자 2개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세 개의 알파입자가 두 차례 반응을 거쳐 탄소로 변환하는 3중 알파입자 반응은 매우 드물게 그리고 어렵게 일어나는 사건이어서 산소보다 무거운 원소가 생성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필수 과정이자 반드시 넘어야 할 장벽이기도 하다.

 

태양계에서 수소와 헬륨 다음으로 흔한 물질은 알파입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지구와 생명체를 구성하는 탄소, 산소, 실리콘, 마그네슘, 칼슘, 철 등의 핵심 성분이다. 지구의 생명체들이 탄소에 기반을 두게 된 원인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탄소는 알파입자 연쇄 반응에서 제일 먼저 생성되는 원소이기 때문에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으며 결합 능력이 뛰어나서 다양한 화합물을 만들 수 있다.

 

특히 생명의 기본단위인 유기분자는 주로 탄소와 수소의 화합물이다. 만일 원시지구에 각기 다른 원소를 생명의 기반으로 하는 생명체들이 무더기로 등장했다면 탄소에 기반을 둔 생명체가 압도적으로 유리했을 것이다. 생명 활동에 필수적인 질소와 인도 탄소에서 시작된 연쇄 핵융합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당신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원자들은 과거 어느 날 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단 물에 포함되어 있는 수소는 빅뱅 직후 만들어졌다. 별의 후손이라고 하면 무슨 외계인이나 신성한 존재를 떠올리지만 사실 우리가 별의 직계후손인 셈이다. 인간은 육지에 기반을 둔 생명체이고 최초의 생명체는 바다에서 태어났으므로 진화의 한 단계에서 우리의 먼 선조들에게는 물 밖에서 생명활동을 이어갈 만한 육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대륙은 지구에만 존재하는 특이한 환경이다. 그러나 대륙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이해하려면 지구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지구의 내부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려면 깊이 6,400km에 달하는 금속과 바위층을 직간접으로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구의 내부는 멀리 떨어진 은하보다 훨씬 관측하기 어렵다.

 

첨단 망원경을 이용하면 50 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은하까지 촬영할 수 있지만 6,400km에 불과한 지구의 내부는 아직도 태반이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지구의 내부에 관한 지식은 대부분은 지구를 관통하는 탄성파를 분석하여 알아낸 것이다. 이 분야를 지진학이라 한다. 지구의 평균 밀도는 5.5g/세제곱 cm다. 물의 밀도는 1g/ 세제곱 cm다. 돌의 밀도는 3g/세제곱 cm다.

 

대부분의 금속은 10g/ 세제곱 cm다. 그러므로 지구의 밀도는 바위와 금속의 중간쯤 되며 내부 깊은 것은 압력이 매우 높다. 지구 내부는 크게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졌다. 바깥은 가벼운 바위로 이루어진 얇은 지각이고 그 밑으로 지구 반지름의 절반에 해당하는 무거운 바위로 이루어진 맨틀로 되었으며 가장 깊은 중심부 맨틀보다 무거운 철 코어가 자리잡고 있다.

 

맨틀과 핵의 두께는 거의 같지만 맨틀이 핵을 에워싸고 있기 때문에 부피는 맨틀이 압도적으로 크다. 실제로 지구 전체에서 맨틀이 차지하는 비율은 80%가 넘는다. 밀도가 다르다는 것은 온도가 다르다는 뜻이다. 핵을 둘러싸고 있는 맨틀은 마그네슘, 철, 실리콘(규소), 산소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큰 별의 내부에서 핵융합을 거쳐 생성된 원소들이다.

 

지구의 표면을 덮고 있는 지각은 실리콘과 산소를 비롯하여 칼슘, 포타슘, 알루미늄, 나트륨 등 다양한 광물질이 섞여 있다. 처음 이 다양한 원소들은 골고루 섞여 있었으나 융해 과정을 거쳐 분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구의 맨틀은 매우 거대하고 느리게 움직이기 때문에 냉각 과정뿐 아니라 지질학적 변화 흔적까지 곳곳에 남아 있다.

 

시생대의 맨틀은 여전히 뜨거웠으나 몇 군데 중요한 지점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굳은 상태였다. 한편 우라늄, 토륨 등 불안정한 방사성 원소와 칼륨의 불안정한 동위원소가 붕괴하면서 발생한 에너지는 맨틀에 열에너지를 공급하고 있었다. 뜨거운 것은 위로 올라가고 차가운 것은 아래로 내려가는 현상을 열대류 또는 자유대류라 한다.

 

맨틀은 물론이고 바다와 대기, 행성과 별, 그리고 당신의 책상 위에 놓인 커피 잔에서도 항상 일어나는 현상이다. 지구 대류는 태풍과 뇌우를 일으키고 태양 대류는 흑점을 만든다. 단 대류가 일어나려면 물질의 유동성이 높아야 한다. 그래야 뜨겁고 가벼운 물질과 차갑고 무거운 물체가 쉽게 자리를 바꿀 수 있다. 맨틀은 고체 상태였지만 긴 시간 규모에서 볼 때 유체처럼 행동한다.

 

빙하가 높거나 흔들리지 않고 갈라지지도 않으면서 이동하는 것과 비슷하다. 대류는 유체가 열을 식히는 방법 중 하나다. 지표면 근처의 차가운 물질이 대류를 타고 가라앉아서 내부의 뜨거운 물질과 섞이면 전체 온도는 내려간다. 중심부의 뜨거운 물질이 대류를 타고 위로 올라가 표면의 차가운 물질과 섞일 때도 빠른 속도로 열이 손실된다. 그러므로 지구는 자신과 같은 크기의 거대한 돌덩어리보다 식는 속도가 빠르다.

 

그래도 맨틀 대류 자체는 워낙 느리게 진행되기에 인간적 관점에서 보면 거의 정체 상태나 다름없다. 외핵은 액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쉽게 흐를 수 있고 주성분이 전기적 도체인 철이기 때문에 전류를 실어나를 수 있다. 외핵에서 일어나는 유체운동은 주로 대류와 지구 자전에 의해 발생하며 여기에 걸려 있는 외부 자기장에 의해 전류가 발생한다. 이 과정은 발전기의 작동 원리와 비슷하다.

 

지질학자들은 판구조론 혁명을 불러일으킨 1등공신으로 해저확장의 발견을 꼽는다. 지구의 표면이 움직이고 있다는 아이디어가 처음으로 대두된 것은 1930년대였는데 당시 유행했던 대륙이동설은 판구조론과 사뭇 다른 이론이었다. 독일의 기상학자 베게너가 처음 제안했던 대륙이동설은 대륙이 대양 지각을 밀어내면서 마치 빙하처럼 표류 한다는 이론(후일 이런 식의 이동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인 판구조론은 지표면 전체가 몇 개의 조각으로 나뉜 채 각자 상대적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개개의 조각 위에 놓인 대륙들은 판이 이동할 때마다 무임승차한 승객처럼 따라서 움직인다는 이론이다.

 

지각판이 갈라진 이유는 미스테리다. 우리가 아는 한 다른 행성 표면은 여러 조각으로 갈라져 있지 않다. 해저 확장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지각판들이 서로 멀어지는데 한 지역에서 멀어지면 다른 지역에서는 가까워져야 한다. 하나의 판이 이웃한 판으로부터 멀어지면 반대편의 또 다른 판 아래로 파고 들어가는데 섭입대는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지질구조판이 처음 생성된 뜨거운 지역에서 멀어지면 차갑고 무거워지면서 서서히 흐르는 맨틀 쪽으로 가라앉기 때문이다. 해양에서 분출한 용암이 물과 반응하면 각섬석(角閃石; amphibole)이나 사문석(蛇紋石; serpentine) 같은 함수광물(含水鑛物)이 생성된다. 함수광물이 맨틀의 특정 깊이(약 100km)에 도달하면 온도와 압력이 너무 높아 수분을 밖으로 토해내는데 이 수분은 섭입판의 상부로 올라왔다가 근처의 맨틀바위로 유입된다.

 

이렇게 수화(水化)된 바위는 마른 바위보다 쉽게 녹기 때문에 수분을 머금은 맨틀에 용해된다. 실리카를 가장 많이 함유한 마그마는 화강암으로 이는 차가운 용해 과정의 전형적 산물이다. 화강암은 지각이 녹았다가 굳고 또 녹으면서 지금도 계속 생산되고 있다. 이는 가벼워서 맨틀에 가라앉지 않기 때문에 욕조 배수구 위에 떠다니는 장난감처럼 섭입대 근처에 계속 쌓인다.

 

그러므로 화강암은 지각 위에 점점 더 두껍게 쌓여 대륙지각의 기초가 되었을 것이다.(124, 125 페이지) 맨틀에 섞여 있던 규산염과 화강암이 융해와 분리를 반복하면서 대륙을 이룰 정도로 누적될 때까지 20억년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다. 초대륙의 이합집산 주기를 윌슨 주기라 한다.(윌슨은 캐나다의 지질학자 '투조 윌슨; Tuzo Wilson'의 이름에서 따온 말이다.)

 

지질구조판과 물은 오랜 세월 지구 환경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왔다.(지질구조판, 물, 적절한 온도는 삼각대의 다리처럼 하나가 존재하기 위해 둘이 필요한 관계였다.) 두께가 100km에 달하는 판의 경계면 전체를 매끄럽게 만들 정도로 물이 많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토록 압력이 높은 곳에 다량의 물이 많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빠르게 변형된 판의 경계면에 자연스럽게 노출된 바위들은 특히 작은 광물 알갱이를 함유하고 있는데 이런 바위를 압쇄암이라 한다.

 

이 알갱이들이 바위를 부드럽게 만들어서 판의 경계면이 매끄러워졌고 판이 미끄러지면서 경계면 바위에 손상을 입혀 알갱이는 더욱 작아졌다. 아마도 대륙의 경계는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서서히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물 알갱이는 혼자 있을 때 서서히 커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바위는 일종의 치유과정을 거쳐 다시 견고해지고 이런 과정은 온도가 높을수록 빠르게 진행된다.

 

현재 바닷물의 총 무게는 맨틀 무게의 0.05%에 불과하다. 고체 맨틀의 대류는 아주 느리게 진행된다. 뜨거운 바위가 압력이 낮은 표면으로 올라오면 쉽게 녹고 녹은 바위는 대부분 대양지각이 되었다. 고체 맨틀의 일부가 녹아서 물과 이산화탄소를 흡수한 후 지표면으로 배달되면 화산을 통해 분출된다. 화산은 지면에도 있고 깊은 바닷속에도 있다. 그러므로 대기와 바다가 지구 내부에 존재했다는 가설도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고 있다.

 

대기의 압력이 1기압일 때 물은 100도c에서 끓지만 기압이 높으면 더 높은 온도에서 끓는다. 부엌에서 쓰는 압력솥은 이런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지구의 대기압이 60 기압이었던 시절 물은 200~ 300 도c에서도 액체상태로 존재했다. 정확한 비등점은 270 도c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물과 바위에 스며들면서 기온이 서서히 내려갔다. 온실효과가 완화되었기 때문이다.

 

날씨란 대기의 가장 낮은 층인 대류층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대류권의 고도는 지표면에서 약 10km까지로 이 영역에서 빠르고 변화무쌍한 열역학적 대류가 일어난다. 대류권 위의 공기층을 성층권이라 한다. 대류권과 달리 성층권에서는 위로 올라갈수록 온도가 높아진다. 성층권의 온도가 높은 이유는 오존 때문이다. 오존은 생성되거나 분해될 때 특정 파장의 자외선을 흡수한다.

 

오존층이 없다면 지구 생명체들은 자외선에 그대로 노출되어 심각한 피해를 입을 것이다. 동물은 식물에게 산소, 오존이라는 이중의 신세를 지는 것이다. 성층권은 고도 50km까지 계속된다. 성층권 위로 고도 100km까지를 중간권이라 한다. 중간권에서는 열복사가 훨씬 효율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성층권보다 온도가 낮다. 중간권 위로는 온도가 훨씬 높고 밀도가 희박한 열권이 있고 그 위로 1만 km까지를 외권이라 한다. 외권 밖으로 나가야 비로소 우주(행성간 공간)라 할 수 있다.

 

행성이 태양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물이 얼어붙고(화성), 너무 가까우면 증발해 버린다.(금성) 행성에 물이 존재하려면 골디락스 영역에 놓여 있어야 한다. 희귀 지구 가설에 의하면 지구는 은하수의 적절한 위치에 자리 잡은 덕분에 생명체 탄생의 적절한 환경을 확보할 수 있었다. 만일 우리의 태양계가 은하의 중심에 가까웠다면 초대형 블랙홀이 내뿜는 가공할 복사 에너지에 초토화 되었을 것이다.

 

또한 지구는 탄생 시기도 적절했고(생명이 필요한 원소들이 모두 만들어진 후에 탄생했다.) 물이 고체, 액체, 기체 상태로 존재할 수 있을 정도로 태양과의 거리도 적당했다. 천문학적 조건 외에도 지구는 지질구조판을 가지고 있어서 안정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달의 조력(潮力)에 의한 조수현상 덕분에 수상 생물이 육지생물 진화할 수 있었다.

 

조간대(潮間帶)에 사는 생물들은 물이 찼을 때 물속에서 살다가 물이 빠지면 육지 생활을 하면서 육상생물의 첨병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지구는 자전축의 공전면에 대하여 적당한 각도로 기울어져 있어서 계절이 주기적으로 변했고 그 덕분에 다양한 생명체가 출현할 수 있었다. 물론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행성이 떨어지거나 대형 화산이 폭발하여 생명체가 대량으로 멸종한 적도 있고 초대륙이 형성된 후에는 해안선이 급감하여 연안 생태계에 심각한 위기가 닥치기도 했다.

 

그러나 대량멸종이 일어날 때마다 지구의 생태계는 새롭게 정리되어 생물학적 다양성과 진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저자는 생명이란 화학반응을 이용해 주변 환경으로부터 물질과 에너지를 취하여 성장하고 번식하는 생물학적 개체를 말한다고 설명한다.(209, 210 페이지) 생명체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은 결과물이 반응 자체를 촉진한다는 점에서 자가촉매적이다.

 

무기화학반응 중 생명 활동의 특성을 그대로 빼닮은 것도 있다. 가령 불은 호기성 생물처럼 물질과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물과 이산화탄소를 만들어낸다.(광합성과 정반대) 불은 생명과 마찬가지로 더 많은 연료(나무, 잔디 등)를 소모하기 위해 멀리 퍼져나가고 발화할 때까지 연료를 태우면서 자신의 활동을 촉진한다. 그러나 불은 물이나 이산화탄소와 같이 단순한 분자만 재생산할 수 있다.

 

불은 습도에 강한 것과 약한 것이 따로 있지 않아서 주변에 습기가 많으면 그냥 꺼진다. 생명체는 물 이외에 포도당, 지방산, 아미노산, 뉴클레오티드 등 네 가지 기본 요소로 이루어졌고 이들은 다섯 종류(수소, 탄소, 질소, 산소, 인)로 이루어졌다. 수소는 빅뱅 직후 만들어졌고 나머지는 별의 내부에서 핵융합을 통해 만들어졌다.

 

지표면에 사는 생명체는 예나 지금이나 직간접적으로 광합성에 의존해왔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지구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사건은 생명체의 출현이고 두 번째는 광합성의 개발이다. 지구에 생물이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태양에너지와 급변한 대기, 그리고 광합성 덕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광합성을 어린 학생들도 아는 기초 지식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지금도 새로 발견되는 내용이 있을 정도로 복잡하다.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인간과 침팬지는 지금으로부터 700만년전에 진화나무에서 분화되어 각자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차드에서 발견된 초기 인류의 화석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가 이 사실을 입증한다. 인간이 침팬지와 작별을 한 결정적 계기는 직립보행이다. 대형 유인원도 두 발로 걸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직립보행의 가설들 중 셋이 눈길을 끈다. 1) 음식을 손으로 운반하면 은밀한 곳에 저장해놓을 수 있어 끼니때마다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 2) 먼곳까지 볼 수 있어 포식자를 피하고 음식을 찾는 데 유리하다. 3) 두 발로 서서 양팔을 휘두르면 몸집이 실제보다 커보여 상대방을 위협하여 우위를 점하거나 더 좋은 짝을 만날 수 있다 등이다.

 

직립보행은 체온을 유지하는 데도 유리하다. 우리가 땀으로 체온을 조절하게 된 이유중 하나는 호모 사피엔스가 빙하기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대기가 뜨겁고 습했던 5천만년 - 3천만년전에 태어났다면 다른 방식으로 체온을 조절했을 것이다. 사람의 땀은 춥고 건조한 날씨에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저자는 지질학자로서 재러드 다이아몬드가‘총, 균, 쇠’에서 제기한 근대사에서 식민지 확장 사업이 일방적으로 진행된 의문에 대해 논한다. 다이아몬드는 그 원인을 대륙의 방향성에서 찾는다. 대륙의 방향성을 결정한 것은 판의 구조다. 거대한 대륙의 한복판에 자리한 유라시아 문명은 주로 동서 방향으로 확장했기 때문에 제국 전체에 걸쳐 기후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체적인 기후대가 수백, 수천 km에 걸쳐 비슷하더라도 도중에 사막이나 강이 있으면 수십 km 간격을 두고도 환경이 크게 달라진다. 지질구조판 중 유라시아 판은 지질학적으로 유리한 점이 많았다.

 

대륙의 축이 동서방향으로 뻗어 있어서 기후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영토확장을 할 수 있었으며 다양한 농경민들이 모여들어 다양한 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다. 다른 대륙들은 대부분 남북방향으로 뻗어있기 때문에 기후가 비슷한 동서방향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어려웠고 남북으로 진출하면 국물과 가축들이 서식가능 지역을 벗어나 큰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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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 에너지, 물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지자기장, 지질구조판, 물이 있어 생명체가 번성할 수 있었던 유일한 행성"(데이비드 비코비치 지음 '거의 모든 것의 기원' 128 페이지)이란 말처럼 지구에 물이 많다. 하지만 담수는 제한적이고 그와 관련한 문제의식은 너무 미진하다. 기상 이변이 빈번하면 우리 몸에 물을 넣는 것조차 쉽게 할 수 없는 험난한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식량 위기 거론은 제한적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중지(衆智)를 모아야 할 주체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일각에서는 첨단의 미래 식량을 논의한다. 누군가 인간을 석기 시대의 심성을 가지고 중세의 사상에 묶여 21세기의 첨단 기술로부터 도움을 받는 존재(복합체)로 규정한 것이 기억난다. 혼란스러운 2022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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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이 다 간다. 올해 읽은 책 가운데 인상 깊은 책을 고르는 것은 미루고 오늘은 에른스트 페터 피셔 이야기를 할까 한다. 올 9월에 읽은 ‘과학은 미래로 흐른다’가 내가 가장 최근 읽은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책이다. 이 책 외에 내가 읽고 소장하고 있는 그의 책은 ‘슈뢰딩거의 고양이’, ‘아인슈타인과 피카소가 만나 영화관에 가다’, ‘빛보다 빠른 생각 아인슈타인’ 등이다.

 

최근 읽은 김기봉 교수의 ‘역사학 너머의 역사’에서 갈릴레이와 브루노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관련 자료를 찾다가 피셔의 ‘금지된 지식’이란 책을 만났다. 피셔의 ‘또 다른 교양’이 더 관심을 끄니 ‘금지된 지식’은 후일을 기약해야겠다.

 

제3장 유럽 근대 과학의 탄생이란 챕터에 수록된 글들이 눈길을 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 / 코페르니쿠스적 귀결 / 인간의 코페르니쿠스적 분열 / 가설과 그것의 실험 / 운동 속의 세계 / 운동의 법칙 / 빛의 운동 등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말만을 들어본 입장으로는 그의 이름 뒤에 전회는 물론, 귀결, 분열 등의 명사가 붙은 글들을 읽을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기대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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