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이 제갈량에게 말하다 1 - 탁월한 전략으로 승리를 추구하다 현대 심리학으로 읽는 《삼국지》 인물 열전
천위안 지음, 정주은 옮김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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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위안(陳禹安)은 심리를 통한 역사 연구의 선구자적 존재다.‘심리학이 제갈량에게 말하다’는 삼국지에 나오는 모사(謀士)와 지략(智略)의 대명사 제갈량을 현대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제갈량, 세상이 원하다(1부), 제갈량, 때를 알고 나서다(2부), 제갈량, 진가를 선보이다(3부), 제갈량, 승부수를 던지다(4부) 등으로 구성되었다.

 

융중에 살던 농부였던 제갈량은 모든 사람이 제갈량은 결코 출사할 사람이 아니라고 믿게 한 인물이었다. 융중은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양양시 서쪽 지점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으로 제갈량이 그의 청년 시기인 17∼27세까지 생활한 곳이다. 한번은 최주평, 석광원, 맹공위, 서원직(서서; 徐庶) 등 네 사람이 제갈량과 대화를 했었다.

 

제갈량이“자네들이 출사하면 어떤 관직에까지 오를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이 말에 네 사람이 제갈량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에 제갈량은 미소만 지었다. 간절히 원하지만 발설하지 않은 것이다. 매우 어려운 일임에 틀림 없다. 심드렁한 판매자 전략을 쓴 것이다. 제갈량은 준수한 용모와 체격조건은 물론 뛰어난 지혜를 가졌었다. 역사적 업적으로 말하면 제갈량은 진시황, 한무제, 당태종, 송태조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제갈량을 더 인정했다. 대중은 진실을 알면서도 꾸며낸 이야기를 믿고 싶어 한다. 제갈량에 필적할 사람은 주(周) 나라 문왕을 도와 주나라 800년 강산을 세운 강태공과 한고조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장량 등이다. 서서(徐庶)가 유비에게 제갈량을 천거하며 말했다. "제갈공명은 와룡(臥龍)입니다.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그를 쓰지 않으십니까?" 유비가 말했다. "그대가 데리고 오시오." 서서가 말했다. "이 사람은 가서 만나볼 수는 있으나 몸을 굽혀 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장군께서 의당 몸을 낮추시고 방문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유비가 제갈량을 직접 방문했고 세 번 만에 만날 수 있었다.

 

사마휘와 서서는 제갈량을 주나라 800년 강산의 기틀을 세운 강태공에 비유했다. 주문왕이 강태공을 자기 사람으로 만든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강태공은 서주의 반계(磻溪)에서 온종일 낚시질만 하면서 출사할 기회를 잡았다. 보통 사람은 끝이 구부러진 바늘을 사용하고 물고기를 유인할 미끼를 바늘 끝에 꿰어 낚시 한다.

 

그런데 강태공이 사용한 낚시바늘은 곧게 쭉 뻗어 바느질을 바늘과 다르지 않았다. 미끼도 꿰지 않았으며 물속에 가라안지도 않았다. 심지어 물에서 낚시바늘까지의 거리가 3척이나 되었다. 강태공은 낚싯대를 높이 들며 혼잣말로“물고기야 살고 싶지 않다면 직접 뛰어올라 낚시바늘을 물도록 해라.”라고 말했다. 강태공의 기이한 행동은 서백(西伯; 서쪽지방 제후들의 우두머리; ‘희창; 姬昌‘)의 귀에도 전해졌다.

 

희창은 병사 한 명에게 반계에 가서 강태공을 데리러 오라고 시켰다. 그런데 강태공은 그 병사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중얼거렸다.“물려라 물려라 물리라는 물고기는 물리지 않고 새우가 와서 시끄럽게 구는구나.”병사가 돌아와 이 말을 전하자 서백은 이번에는 관리 한 명을 보내 강태공을 모셔오게 했다. 그러나 강태공은 여전히 본 척하지 않으면서 낚시질에 여념이 없었다. “물려라 물려라 물리라는 큰 물고기는 물리지 않고 작은 고기가 와서 시끄럽게 구는구나.”희창은 그제야 강태공이 현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직접 찾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로부터 사흘 동안 희창은 채식만 하고 목욕재계한 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많은 예물을 준비해 반계에 있는 강태공을 만나러 갔다. 그런데 이번에도 강태공은 희창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낚시질에만 빠져있었다. 희창은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 때까지 강태공 뒤에서 공손하게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게 한 뒤에야 강태공은 희창과 대화를 나눴다.

 

주나라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주문왕이 강태공을 데려 가기 위해 겪은 큰 어려움의 정도와 훗날 강태공이 주문왕을 도와 주나라의 기틀을 다진 일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자와 후자를 인과 관계로 해석한다. 이는 우리가 곧잘 저지르는 착각이다. 유비는 자신을 주문왕에 비유하며 큰일을 이루려면 반드시 능력이 출중한 인재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출중한 인재를 얻기란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유비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악천후로 인해 제갈량을 데려가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원인으로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정성에 감동한 제갈량이 틀림없이 은거생활을 접고 자신을 도와주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게다가 눈보라를 동반한 추위는 유비 자신이 통제할 기회를 줬다. 다시 말해 자신이 이 추위를 이겨내기만 한다면 모든 일이 자기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도록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종종 우연을 필연이라고 믿음으로써 마음의 안녕을 찾는다. 자신이 원하는 부분에서 우연이 발생할 때 더욱 그것에 집착하게 된다. 우연이 필연을 부른다고 믿는 것이다. 그로 인해 안정감이 든다면 굳이 거부할 필요가 없다.

 

제갈량은 융중의 초가에 은거할 때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를 연설한 바 있다. 이름하여 융중대책으로 핵심은 손권과 연합해 조조에 맞서자는 것이다. 이를 시행하기 위한 기본 전제는 유표가 다스리는 형주를 빼앗는 것이다. 저자는 제갈량의 일생일대의 실패를 유표가 다스리던 형주를 빼앗자고 유비를 설득하지 못한 것이라 말한다. 책의 마지막은 주유의 죽음을 논한 장이다. 주유는 적벽대전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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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도우실(左圖右室)의 배치로 살고 싶다. 왼쪽에 도서관, 오른쪽에 연구실이 있는 곳이다. 연구실이라 했지만 우리 소그룹이 함께 모여 책 읽고 담화를 나눌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말하는 것이다.(’도; 圖‘는 그림을 의미하기도 하고 도서관의 도이기도 하다.) 좌묘우사(左廟右社)에서 힌트를 얻어 왼편에 지도, 오른편에 역사책을 놓고 공부한다는 의미의 좌도우사(左圖右史)를 말하는 사람을 보고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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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 시행착오, 표절, 도용으로 가득한 생명 40억 년의 진화사
닐 슈빈 지음, 김명주 옮김 / 부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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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 슈빈의 '자연은 어떻게 발명 하는가'는 성실한 지적 노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암석을 깨며 수십 년을 보내는 동안 생명을 보는 관점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밝힌 저자는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알면 과학연구는 세계적인 보물찾기로 바뀐다고 말한다. 저자는 과학자에게 멸종이 시대에 뒤쳐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지적 활동에 계속 참여할 방법은 유전학과 발생생물학, 그리고 DNA의 세계에 뛰어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어떤 유전자 조합이 개구리를 송어, 침팬지, 인간과 다르게 만드는지 DNA 수준에서 물을 수 있다고. 저자는 연구자는 인생을 걸 만한 연구주제를 연구실이나 발굴현장에서 찾지만 자신은 강의실 스크린에 비춰진 한 장의 슬라이드에서 찾았다고 말한다. 저자는 날갯짓 비행이 진화하려면 날개, 깃털, 속이 빈 뼈, 높은 대사율 등 일군의 발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뼈가 코끼리처럼 무겁거나 대사가 도롱뇽처럼 느리다면 날개가 진화 한들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큰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 몸 전체가 변해야 하고 게다가 많은 형질이 동시에 변해야 한다면 어떻게 큰 진화적 변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저자는 폐로 공기호흡하는 물고기가 전 세계에 있었고 더구나 수억년 동안 지구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를 하며 변칙의 발견이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저자는 베시포드 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부레와 폐가 같은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같은 기관의 다른 버전이라고 주장한 사람이다. 저자는 놀랍도록 많은 물고기가 장시간 공기 호흡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수백종의 물고기가 자신이 서식하는 물에 산소농도가 떨어지면 공기를 삼킬 수 있다. 이 물고기들은 어떻게 이런 재주를 부리는 걸까?

 

폐어(肺魚)는 물속에 살면서 대체로 아가미로 호흡하지만 물에 산소농도가 떨어져 대사를 유지할 수 없게 되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고 공기를 마셔 폐로 보낸다. 공기 호흡은 기묘한 물고기에만 있는 기묘한 예외가 아니라 많은 물고기가 일반적으로 하고 있는 일이다. 폐라는 발명은 동물이 육지를 걸을 수 있게 진화하면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물고기는 동물들이 땅을 걷기 한참 전부터 폐로 공기 호흡을 하고 있었다. 물고기 후손들이 육지로 진출하면서 일어난 일은 새로운 기관의 등장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기관의 기능 변경이었다. 게다가 사실상 모든 물고기가 폐든 부레든 어떤 종류의 공기주머니를 가지고 있다. 공기 주머니는 물속에서 살기 위해 사용되었으나 나중에는 육지에서 살고 호흡하기 위해 쓰이게 되었다.

 

동물이 육지로 올라올 때 이런 변화는 새로운 기관의 탄생을 수반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다윈이 일반론으로 말했듯이 기능의 변화를 수반했다. 1861년 독일의 한 석회암 채석장에서 놀라운 화석 한 점이 발견되었다. 매우 잔잔한 호수 환경에서 퇴적된 것이다. 놀라운 것은 석회암에 깃털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생물의 실체가 아니라 틀만 남은 쥐라기의 인상화석이었다.

 

쥐라기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에 의해 명명되었다.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에 걸쳐 있는 쥐라 산맥의 독특한 특징의 지층을 보고서였다. 그곳에서는 소용돌이 모양의 껍질을 지닌 암모나이트라는 생물 화석이 많이 발견된다. 쥐라기는 소용돌이 모양의 껍질을 지닌 생물의 시대일뿐 아니라 공룡의 시대이기도 하다. 저자는 깃털은 조류만의 특수한 성질이 아니라 사실상 모든 육식 공룡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었다고 말한다.

 

육식 공룡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새처럼 되어 갔다. 저자는 묻는다. 공룡의 깃털은 무엇에 쓰였을까? 일부 고생물학자들은 깃털이 짝짓기 상대에게 매력을 과시하는데 쓰였다고 주장했다. 또 원시적인 솜털 모양의 깃털이 단열재처럼 작용해 체온을 높게 유지하는데 쓰였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어쩌면 깃털은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했을지도 모른다. 공룡에게 깃털의 역할이 무엇이었든 깃털의 기원이 하늘을 나는 것과 무관했다는 점은 틀림없다.

 

물에 사는 동물이 땅에 진출했을 때 폐와 사지가 그렇듯 비행에 쓰인 여러 발명도 비행이 기원하기 전에 생겼다. 깃털은 물론이고 속이 빈 뼈, 빠른 성장속도, 높은 대사율, 날개돋친 팔, 경첩 같은 관절이 있는 손목은 모두 원래는 땅에서 민첩하게 뛰어다니며 먹이를 잡던 공룡에게 생긴 것이었다. 큰 변화는 새로운 기관의 탄생이 아니라 오래된 형질을 새로운 용도나 기능으로 전용함으로써 일어났다.

 

깃털은 새에서 하늘을 날기 위해 탄생했으며 폐는 동물이 땅에서 살 수 있도록 진화했다는 것이 그 동안의 통념이었다. 이런 생각은 이치에 맞고 자명하게 들리지만 틀렸다. 게다가 우리는 이런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100여 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깃털은 비행이 진화하면서 탄생한 게 아니었고 폐와 사지도 동물이 육상으로 진출하면서 진화한 게 아니었다. 생명사에 길이남을 이런 대변혁과 그밖의 변혁들은 기존 형질의 전용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생명사에 길이 남을 변화는 곧게 뻗은 탄탄대로를 걷지 않았다. 그 길은 우회로, 막다른 골목, 좋지 않은 시기에 출현하는 바람에 실패한 발명들로 가득하다. 다윈의 기능의 변화란 말은 생물의 몸에 생기는 발명의 대부분은 기존 형질의 기능이 바뀜으로써 생긴다는 것을 설명한다. 우리는 이 말을 발판삼아 기관, 단백질, 나아가 DNA의 기원까지 밝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물고기나 공룡, 사람의 몸은 수정된 순간에 완전한 형태로 출현하는 것이 아니다. 생물의 몸은 부모에서 자식으로 전달되는 레시피를 바탕으로 세대마다 새롭게 만들어진다. 발명의 씨앗은 레시피 안에 들어있다. 또한 다윈이 예견했듯 레시피가 어떤 조건에서 생겨났다가 다른 조건하에서 전용되는 방법으로도 발명이 탄생할 수 있다.

 

카를 에른스트 폰 베어 이야기를 하자. 그의 연구에 힘입어 이미 알려진 모든 동물 종의 모든 기관에 숨어 있는 보편적 연결고리가 드러났다. 깊은 바다에 사는 아귀목이든 하늘로 솟구치는 앨버트로스든 심장은 중배엽의 세포들에서 생기고 뇌와 척수는 외배엽에서 생기며 장과 위와 기타 소화기관은 내배엽에서 발생한다. 이 법칙은 지극히 보편적이어서 지구상에 서식하는 어떤 동물의 어떤 기관을 고르든 그것이 어느 배엽에서 발생했는지 알 수 있다.

 

종들의 초기 배아가 서로 비슷하다는 폰 베어의 발견에 다윈도 주목했다. 물고기, 개구리, 사람 등 다양한 동물이 공통의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동물들이 공통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다양한 종이 조상을 공유한다는 증거로 그 동물들이 배아 발생과정에서 공통 단계를 거쳤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한 게 있을까?

 

저자는 에른스트 헤켈 이야기를 한다. 찰스 다윈의 저서를 읽고 인생의 전기를 맞았다는 그는 개체 발생(배아 발생)은 계통 발생(진화사)을 반복한다는 말을 남겼다. 가령 쥐의 배아는 벌레, 어류, 양서류, 파충류의 모습을 차례로 거친다는 것이다. 저자는 헤켈이 주장하듯 동물의 배아에서 생명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면 생명의 역사를 추적하기 위해 굳이 중간형 화석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라고 반문한다.

 

배아 발생의 어느 단계에도 조상의 모습은 없었다. 인간의 배아는 폰 베어의 지적처럼 몇 가지 점에서 물고기 배아와 비슷했지만 다리를 가진 물고기든 오스트랄로피테쿠스든 인간의 조상처럼 보이는 단계는 발생과정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조류 배아가 발생하는 과정에도 시조새처럼 보이는 단계는 없었다. 헤켈의 가설은 틀렸지만 수많은 학자가 그의 가설에 영향을 받아 연구를 시작했다. 게다가 그 가설은 과학연구의 주제로 채택되지 않은 지가 벌써 100년이 넘었는데도 일각에 그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다.

 

1820년부터 1930년까지는 생물학에서 이른바 빅 아이디어의 시대였다. 폰 베어, 에른스트 헤켈, 찰스 다윈, 가스탱 등 수많은 연구자가 동물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법칙을 찾기 위해 동물의 몸 구조, 화석, 배아를 조사했다. 동시에 생명의 다양성을 가져온 메커니즘도 밝히고 있었다.

 

저자가 보는 게놈은 음악과 닮은 것이다. 같은 소재를 여러 방식으로 반복함으로써 무수히 다양한 곡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연이 작곡가였다면 역대 최고의 저작권 위반자로 등극할 것이다. DNA의 일부분부터 유전자와 단백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원본의 변형된 사본이다.

 

바바라 맥클린톡 이야기도 흥미롭다. 맥크린톡은 1983년 점핑유전자 발견으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사람이다. 인간 유전체의 40% 이상은 고대 바이러스 유전자의 흔적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들 가운데 인간 유전체 속의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점핑유전자’(jumping gene) 또는 ‘트랜스포존’이란 것들이 존재한다.

 

점핑유전자는 유전체 내에서 새로운 돌연변이를 만들기 때문에 암이나 유전 질환을 유발할 수 있고 뚜렷한 기능이 알려지지 않아 유전체의 기생충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 진화를 이끄는 동력이기도 하다. 저자는 게놈은 지루하고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게놈은 활력으로 출렁이고 있다. 유전자가 중복될 수도 있고 기능 전체가 중복될 수도 있다. 유전자는 자신의 삶을 만들며 게놈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게놈에는 두 종류의 유전자가 있다고 생각해 보라. 하나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단백질을 만들고 다른 하나는 오직 돌아다니며 자신의 사본을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 다른 조건이 모두 같다면 사본을 만드는 유전자가 게놈에서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우리 게놈의 3분의 2가 LINE1과 ALU 같은 반복서열로 되어 있는 한 가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복 서열을 억제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게놈을 점령해버릴 것이다. 이런 기생 인자들을 멈출 수 있는 순간은 이들이 완전히 통제 불능이 되어 숙주가 죽고 이에 따라 그들도 사라질 때다. 개체 내의 점핑유전자가 통제되지 않고 폭주하면 그 개체는 죽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할 수도 없다. 이런 이기적 유전자와 숙주는 항상 긴장관계에 있고 심지어는 내전 상태다.

 

이기적 유전자는 자신의 사본을 만드는 것만이 목적인 반면 숙주 게놈은 그것을 필사적으로 억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유전자(gene)와 세포핵 속의 염색체(chromosome)의 합성어인 게놈은 유전 물질인 디옥시리보 핵산(DNA)의 집합체를 뜻한다. 생명현상을 결정짓기 때문에 흔히 '생물의 설계도' 또는 '생명의 책'이라 불린다.

 

점핑 유전자는 자신의 사본을 만들어 게놈의 여기저기에 끼워 넣는다. 맥클린톡은 점핑 유전자를 훼방꾼으로 보았다. 그것이 점프해 다른 유전자에 끼어들면 유전자의 기능이 망가져 병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저자의 동료 데이비드 린치는 점핑유전자에서 다른 역할을 찾아냈다. 점핑 유전자는 궁극의 이기적 분자다.

 

사본을 만들어 확산하며 게놈 안에서 증식해 나간다. 린치는 이런 점핑 유전자가 때로 새로운 일을 하는 유용한 돌연변이를 실어나를 수 있음을 깨달았다. 게놈 안에서는 점핑 유전자와 나머지 DNA가 예정된 내전을 벌이고 있다. 이기적 유전자와 이를 제어하려는 힘 사이에 언제나 긴장이 감돈다. 최근 들어 DNA가 점핑유전자를 제어하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저자는 우리 존재를 포함해 지금의 자연계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일어난 우발적 사건들의 산물이라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견해와 다른 내용을 말한다 .최신 과학과 거의 1세기의 연구는 우발적 사건의 내용을 바꿔 생명의 테이프를 재생한다 해도 몇 가지 결말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포유류의 진화에 대해 보자. 호주의 유대류 동물들은 나머지 세계와 격리된 상태로 1억년 이상 진화하며 여러 형태를 가진 다양한 종들을 탄생시켰다. 
 

그 결과는 확실히 무작위적이지 않다. 유대류 날다람쥐, 유대류 두더지, 유대류 고양이, 심지어 유대류 우드척 다람쥐까지 있다. 게다가 이 예들은 현생종만 말한 것이다. 지금은 멸종 했지만 과거에는 유대류 사자, 늑대, 심지어 검치호랑이까지 있었다. 격리된 대륙에서의 유대류 진화는 대개 세계 다른 지역에서의 포유류 진화와 비슷한 경로를 따랐다.

 

조너선 로소스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각 섬의 도마뱀들은 같은 섬에 사는 다른 도마뱀들과 가장 가까웠다. 섬마다 유전적으로 구별되는 도마뱀 개체군이 살고 도마뱀의 정착은 섬마다 따로 일어났다. 표류하던 도마뱀들이 언젠가 각 섬에 상륙했고 각 섬의 자손들이 새로운 서식지의 여러 환경 조건에 적응한 것이다.

 

각 섬에서 도마뱀들이 지표, 나무줄기, 나뭇가지, 수관의 생활에 적응해 나간 과정은 다른 섬들과는 독입적으로 진행된 진하 실험이었던 셈이다. 각각의 섬이 별개의 실험이었다면 진화는 같은 결과를 반복적으로 생산한 것이다. 생명사의 테이프를 각 섬에서 재생했다 해도 진화는 같은 방식으로 일어났을 것이다. 

 

이런 자연의 실험은 생명사가 우발적 사건들이 난무하는 불확실한 도박판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주사위가 어떤 눈이 나올지는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었다. 유전자와 발생이 몸을 만드는 방식, 환경의 물리적 제약, 그리고 진화사에 의해 특정한 눈이 나오기 쉽게 주사위가 설계되어 있었다. 각 세대의 생물들은 기관과 몸을 만드는 레시피를 물려받는다. 이런 유전 정보는 미래를 말해준다. 변화의 특정 경로가 다른 경로에 비해 일어나기 쉽기 때문이다. 모든 생물의 몸과 유전자 내부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혼연일체가 되어 있다.

 

린 마굴리스는 동식물과 균류의 몸을 이루는 세포에 주목했다. 이런 세포는 박테리아 세포에서는 볼 수 없는 복잡성을 지니고 있다. 각 세포에는 핵이 있고 핵 안에는 게놈이 있다. 핵 주위에서는 많은 작은 기관이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세포소기관들이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세포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기관이다.

 

식물 세포에는 엽록체가 있고 그 안에서 엽록소가 태양에너지를 이용 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광합성 반응을 수행한다. 마찬가지로 동물 세포에는 미토콘드리아가 있어서 산소와 당으로 에너지를 생산한다. 마굴리스는 이런 세포소기관들이 세포 안의 작은 세포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각각은 자체 막으로 둘러싸여 세포의 나머지 부분과 분리되어 있다.

 

세포소기관은 세포내에서 둘로 쪼개지는 방법 즉 출아를 통해 증식한다. 먼저 길쭉하게 늘어났다가 덤벨처럼 가운데 부분이 좁아진다. 그런 다음 양쪽이 분리되어 두 개체가 된다. 세포소기관은 심지어 세포핵의 게놈과는 별도로 자체 기능까지 갖추고 있다. 그런데 세포소기관의 게놈은 핵의 게놈과는 매우 다르다.

 

핵 안에서는 DNA 가닥이 돌돌 말려 있지만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에서는 DNA 가닥의 끝과 끝이 맞물려 단순한 고리를 이룬다. 자체 막과 DNA를 가지고 스스로 증식하는 이런 세포소기관들을 보며 마굴리스는 뭔가를 떠올렸다. 이런 특징을 전에 단세포 박테리아와 남조류에서 본 적이 있었다. 박테리아와 남조류도 출아로 증식하고 비슷한 막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엽록체나 미토콘드리아의 게놈과 매우 비슷한 모양의 게놈을 가지고 있다.

 

동물과 식물의 세포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세포소기관들은 아무리 봐도 이들이 속한 세포의 핵보다 박테리아나 남조류와 훨씬 더 비슷해 보였다. 마굴리스는 진화사에 대한 과감한 새 이론을 제창했다. 엽록체는 원래 자유 생활을 하던 남조류로 다른 세포에 포섭되어 그 세포를 위해 에너지를 공급하는 대사 일꾼으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토콘드리아도 원래 자유 생활을 하는 박테리아였으나 또 다른 세포에 합병되어 에너지를 생산하게 되었다. 두 사람과 같이 별개의 생물이 융합해 더 복잡한 새로운 개체를 만들었다는 마굴리스의 생각은 과감한 것이었다. 모든 복잡한 세포는 두 가지 계통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세포핵 계통이고 다른 하나는 한때 자유 생활을 했던 남조류와 박테리아 조상들의 계통이다.

 

자신의 이론이 입증된 후 마굴리스는 "나는 내 가설이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옳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인간은 지식의 공백을 희망, 기대, 두려움이 조금씩 버무려진 우리 자신의 선입관으로 매우는 경향이 있다. 우리 뇌는 점처럼 흩어져 있는 과거 사건들을 연결해 한 변화가 다음 변화로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선형적인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경향이 있다. 잃어버린 고리라는 말을 우리는 수도 없이 들었다. 이 말은 진화가 마치 하나의 고리가 다음 고리로 거침없이 이어지는 하나의 큰 사실인 것처럼 들리게 한다.

 

우리가 자연의 다양성을 조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들도 수백 년 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십 년 전에 전임자들이 고안한 것을 가져와 수정한 것이다.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한 알의 모래 알갱이에서 우주를, 한 송이 야생화에서 천국을 본다고 말했다. 보는 방법을 알면 모든 생물의 기관, 세포, DNA 안에서 수십 년의 역사를 볼 수 있고 나아가 우리가 지구상에 나머지 생명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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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연의 역동적 형태 우든북스 시리즈 6
데이비드 웨이드 지음, 최수홍 옮김 / 시스테마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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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理)는 자연의 질서와 패턴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자이크처럼 죽은 것으로서의 패턴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 인간관계, 인간의 최고의 가치에 구체화되어 있는 어떤 것으로서의 패턴을 의미한다.“(조지프 니덤 지음 ‘중국의 과학과 문명’ 중에서) 이 구절은 데이비드 웨이드의 ‘이(理), 자연의 역동적 형태’에서 인용된 말이다.

 

저자는 이를 게슈탈트 즉 사물에 내재되어 있는 패턴의 발현으로 본다. 이는 완전히 다른 환경이나 아무 연관이 없는 현상에서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구조가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서양 과학은 항상 패턴에 관심을 보였다. 사실상 패턴 인식이야말로 과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의 책에서 보여 주는 것 같은 준대칭 형태들이 진지하게 연구할 가치가 있는 대상이 된 것은 근래의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과학자들은 대칭의 개념을 대폭 확장하고 경직된 고전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이에는 동양 우주관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이원론이라는 철학적으로 아직 서구 사상이 선망하지 않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 근본적으로 역동적 형상을 의미하며 특정 순간 정지된 찰나에 포착된 어떤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또는 더욱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특정 형태의 관련되어 있는 에너지의 근본원리 같은 것이다.

 

본문에 암모나이트(문어, 오징어의 조상격인 두족류) 화석의 봉합선이 나온다. 저자는 암모나이트 화석이 굽이치는 큰 강을 하늘에서 본 모습을 연상시킨다고 말한다. 봉합선은 물결 모양의 선들을 말한다. 절단면을 매끈하게 광 낸 대리석이 아름다운 이유는 다양한 색상뿐 아니라 먼 지질시대에 일어났던 격렬한 형성과정의 한 순간이 포착되어 있는 듯한 느낌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변성암은 실제 극한의 열과 압력 아래에서 형성된 것들이다. 동양에서는 오랫동안 도자기 표면에 생긴 잔금에 미적 가치를 두었다. 반면 서구에서는 그것을 잘못된 결함 즉 문제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두 세계의 가치관이 얼마나 다른지 말해 준다. 도자기의 깨진 듯한 잔금은 유약과 도자기 본체의 수축률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 도자기의 잔금은 바짝 말라서 갈라진 땅이나 페인트와 겔이 마르면서 나타나는 잔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모든 잔금은 축적되어 있던 스트레스가 분출되어 나가는 통로 곧 힘이 가는 선이라고 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인식하는 동양문화에서 잔금을 매력적으로 본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형성되는 위계적 순서에 따라 크거나 작은 잔금들이 생긴다. 지질 구조 체계와 도시의 도로 계획 등의 많은 형태들 역시 이러한 위계적 체계를 가지는 이의 형태를 띤다.

 

저자는 위도가 높은 추운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혹독한 겨울 가끔 찾아와 유리창을 장식하는 우아한 문양의 서리가 생각지 않은 위안이 된다고 말한다. 나에게는 절리(節理)는 한자이고 서리의 리는 한글이지만 같은 차원으로 보인다. 아니 지구 대기 중의 수증기가 지상의 물체 표면에 얼어붙은 것을 서리라 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게 여겨진다.

 

겉으로 보기에는 닮았지만 아스팔트 포장의 균열 패턴과 도자기의 잔금은 근본적으로 다르게 생성된다. 두 형태의 차이는 물질의 성질에서 온다. 아스팔트는 근본적으로 탄력이 있지만 도자기 유약은 탄력이 없다. 또한 도자기 표면의 잔금이 더 직각에 가깝게 교차된다.

 

나무껍질 모양은 탄력성 있는 물질이 갈라질 때 생기는 대표적인 모양이다. 나무는 껍질 바로 안쪽에 있는 층이 성장해 굵어지는데 이때 바깥쪽 나무껍질은 팽팽하게 당겨진다. 이 문제에 대한 대책으로 나무들은 종마다 다른 전략을 진화시켰다. 소나무는 껍질을 세로 방향으로 갈라지게 하면서 아스팔트 균열과 다르지 않은 방을 만들어 낸다. 반면 밤나무는 팽창하는 힘을 우아하고 부드러운 나선형 고랑 모양으로 유도한다.

 

모든 종은 자신만의 독특한 이를 가지고 있다. 이로써 종을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숙한 나무에서는 갈라진 껍질에 새로운 물질이 더해지며 그 결과 참나무에서 보는 것처럼 균열이 더 깊고 뚜렷해진다. 지의류의 조형적 습성은 그 겸손한 존재에 걸맞게 단순하지만 계속 성장해나가면서 여러 층이 쌓여 이루어진 결과 무척 복잡하고 아름답다.

 

지의류가 자라는 것과 똑같은 패턴을 산화 갈륨의 표면 형성에서와 같은 일부 화학반응에서도 볼 수 있다. 식물에서 잎이 나는 차례는 정확하게 수학적으로 규정된다. 그 유명한 피보나치 수열을 따른다. 그러나 양배추와 같이 좁은 공간 내에 배열이 국한되는 경우에는 잎들이 서로 먼저 자리를 차지하려 경쟁하기 때문에 복잡하고 혼돈스러운 덩어리가 만들어진다.

 

양배추는 말하자면 식물의 끝눈이 비대해진 것인데 연속적으로 자른 단면을 보면 각기 다른 속도로 성장한 잎들의 기하학적 배열이 어떻게 깨지는지 알 수 있다. 질서정연한 형태에서 훨씬 불안정한 형태로의 진행은 형태와 에너지라고 하는 양대 원칙이 상호작용할 때 창발하는 복잡성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양배추 같은 예에서 이런 고도의 유추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의 영원한 매력이기도 하다.

 

기하학적 이상 상태는 자연의 어느 곳에서도 실현되기 아주 힘들다. 용암이 이상적으로 완벽하게 균일한 물질이라면 그물망이 아니라 정육각형 패턴이 형성될 것이다. 두 유리판 틈 사이에 생긴 비누 거품막도 질서와 패턴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두 유리판 틈 사이에 생긴 비누 거품막이나 세포들이 우아하게, 그리고 역동적으로 당겨지면서 배열된 곤충의 날개는 최적의 경제적 형태라는 원리를 공유한다.

 

현무(玄武) 이야기가 흥미롭다. 북방의 수호신인 현무는 거북이와 뱀을 합친 도상이다. 현(玄)은 검은색을 뜻하고 무(武)는 거북의 딱딱한 등갑이나 비늘을 뜻한다. 현무는 대체로 중국 전한 초까지 거북의 모습으로 표현되다가 언제부터인가 뱀이 거북을 휘감고 있는 도상으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고대 중국인들이 거북은 암컷만 있을뿐 수컷이 없다고 생각하여 머리 모양이 비슷한 뱀을 수컷으로 짝지은 결과다. 암수 한 쌍으로 표현되는 남방의 수호신인 주작(朱雀)에 대한 대응으로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강과 강의 지류는 모든 형태의 이 중에서 가장 우리에게 친숙한 모양이며 액체가 흐르는 많은 종류의 관 체계 특히 동물과 식물의 기본적인 순환계와 아주 비슷하다. 강의 형태는 모든 종류의 액체가 흐르는 통로의 전형일뿐 아니라 지구의 물 순환 과정에서 가장 활발한 단계에 속한다. 그런 면에서 중요한 에너지 이동 패턴이라고 할 수 있다.

 

강의 형성에는 우선순위의 역설이 있다. 강은 지형을 만들고 지형은 강을 담고 있다. 강이 지형을 만든 것이 먼저인지 지형이 강을 담은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 인간의 논쟁처럼 무엇이 먼저인지는 분명치 않다. 사실 이런 형태로 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성이 분명히 느껴진다. 그렇다면 이것은 거의 플라톤적 실제의 선주 문제를 인정하는 것이다.

 

모래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지만 힘이 가해지면 어디에 있든지 그 힘의 흔적이 남겨진다. 해변에 새겨진 매혹적인 잔 물결, 끝없이 펼쳐진 사막의 모래언덕 등 이들 형태는 자신만의 법칙에 지배되고 자신만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형태를 구성하는 물질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으로 갱신되지만 이 자체는 꽤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자연에는 삼각형 모양이 드물다. 그럼에도 다이아몬드의 표면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면 윤곽선에서 가장 두드러진 모티프는 정삼각형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다이아몬드는 완벽한 결정의 상징이다. 결정은 일반적으로 자연에서 가장 대칭적인 선들로 미리 결정된 격자구조의 일정 위치에 수없이 많은 동일한 원자들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서는 이렇게 흠이 없는 배열에서조차 원자의 위치 이탈로 발생하는 미세한 결함이 가득하다. 그것이 다이아몬드에 나타나는 삼각형 모양의 결정적인 원천이다.

 

식물의 순환 시스템과 동물 혈관 및 신경 시스템 사이에는 분명한 유사점이 있다. 이들은 묘하게도 강물이 흘러가는 형태를 떠올리게 한다. 이 모든 과정들의 공통된 인자는 언제나 그렇듯 에너지 전달이다. 따라서 이 정교한 형태들은 에너지 전달 통로라고 할 수 있다. 무화과나무, 백합나무 등의 도관을 볼 필요가 있다.

 

두 장의 유리 틈에 잉크를 흘린 후 유리를 떼어냈을 때 만들어지는 형태도 주목할 만하다. 기본적으로 잉크가 퍼진 것에 불과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복잡하다. 바다 식물이나 불꽃 등 다양한 형태를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단순한 최초의 형태에서 고도의 복잡성이 창발하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복잡성은 거의 자발적으로 발생한다. 스스로 창조된 우주의 모든 부분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도교의 중심 사상이다.

 

도덕경에 ”길은 측정 할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안에 형태가 담겨 있다.“는 말이 있다. 이의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전혀 연관이 없는 현상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유사한 결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모래 언덕의 띠와 얼룩말의 피부, 마른 진흙의 잔금과 기린의 무늬가 그 예다.

 

동물의 무늬에서 특히 이의 예를 풍부하게 발견할 수 있다. 동물의 무늬에는 다양한 기능이 있다. 수비나 공격을 위해 자신을 위장하고 경고하거나 적을 교란시키고 때로 성적 매력과 연관되기도 하다. 흔히 이런 여러 기능들은 혼재되어 있다. 동물의 외관은 항상 기능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생명체의 형태와 특정 이는 그냥 그렇게 되었을뿐이다. 이에 대한 궁극적인 분석은 창조의 수수께끼를 푸는 한 부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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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서 가치란 무엇인가 - 연구 주제 선정부터 설계, 실행, 평가까지
케빈 엘리엇 지음, 김희봉 옮김 / 김영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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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철학자 케빈 엘리엇의 '과학에서 가치란 무엇인가'는 가치 배제의 이상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편에 선 책이다. 가치 배제의 이상이란 가치가 과학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사회적, 윤리적 가치는 과학적 추론의 많은 중심적 측면에서 필수적이며 피할 수 없다. 저자가 경계하는 것은 과학이 잘못된 가치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한 작업은 과학에 미치는 가치가 언제 적절하고 언제 적절하지 않은지에 대해 밝힌 것이다.

 

저자는 과학이 어떤 분야에서도 가치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가령 물리학의 이론적인 분야에서조차도 과학자와 정책 입안자는 여전히 자신들의 주제를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쓸지, 새로운 발견을 어떤 프레임으로 어떻게 홍보해야 최선인지 등에 대해 판단해야 한다. 저자는 희망적 사고의 부적절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은 투명성, 대표성, 참여라는 세 조건에 집중한다.

 

과학자들은 가능한 한 데이터, 방법, 모형, 가정을 투명하게 다루어서 그들의 연구가 특정 가치에 의해 지지되거나 영향을 받는 방식을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게 해야 한다. 과학자와 정책 입안자는 사회적, 윤리적 우선순위를 대표하는 주요 가치를 포함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명확하고 널리 인정된 윤리적 원칙을 이용할 수 있으면 과학에 영향을 주는 가치의 지침으로 사용해야 한다.

 

윤리적 원칙이 잘 정착되어 있지 않으면 과학은 사회적 우선순위가 가장 높다고 여겨지는 가치의 역량을 최대한 많이 받아야 한다. 과학자, 시민, 정책 입안자들은 과학자를 비롯해 다른 이해관계자들이 적절한 형태로 참여하도록 장려해야 한다. 저자는 자신의 책이 목표로 하는 것은 가치가 특정(어떤 과정과 방법론을 택할지, 어떤 모형을 개발할지, 어떤 통계기법을 사용할지, 과학적 결과를 어떻게 설명할지) 결정들에 관련되는 방식을 강조하여 과학자들이 더 투명하고 더 사려 깊게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가치의 역할은 세 가지이다. 첫째, 가치는 연구 주제들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까다로운 결정을 내릴 때 도움이 될 수 있다. 둘째, 과학 연구의 공적자금을 배분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하며 어떻게 해야 최선인지에 대해 더 많은 질문을 일으킨다. 셋째, 민간 부분에서 자금을 지원하는 연구를 평가하고 이런 연구가 윤리적, 사회적 목표를 가장 잘 달성할 수 있도록 영향을 주는 방식을 모색할 때 중요하다.

 

저자는 성(性)에 따른 인지능력 차이에 대한 연구 분야에서는 복잡한 과학적 증거들을 만나면 기존 개념에 도전하는 증거로 인정하기보다 기존 가정에 맞추어 해석하려는 심각한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이는 토머스 쿤이 말한 특정 이론에 대한 반증사례 앞에서 저항하는 또는 그 사례를 인정하지 않는 과학자들의 태도를 연상하게 한다. 저자는 자금을 선택할 때 사회적 가치만을 유일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저자는 우리는 또한 과학자들이 학문을 발전시키는데 가장 크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거나 자연 세계에 대해 가장 큰 통찰을 줄 것이라고 예상하는 프로젝트를 고려하고 싶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적 가치가 다양하므로 상충하는 우선 순위를 어떻게 다룰지 결정하기가 매우 어려울 때가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가치는 여전히 자금 지원에 대한 결정과 명백히 관련이 있다. 과학은 과학자들이 너무 공격적으로 말할 때뿐만 아니라 침묵할 때도 약해질 수 있다.

 

과학자들이 이용 가능한 증거가 특정한 결론을 뒷받침한다고 진정으로 믿을 때, 그들이 공개적으로 발언하도록 환영할 만한 가치가 부여된다. 객관성은 과학자들이 지나치게 확신에 찬 결론을 제시할 때뿐만 아니라 판단을 유보하도록 강요당할 때도 위협 받을 수 있다. 객관성이 과학자들에게 궁극적인 가치가 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고 해도 다른 모든 가치보다 객관성을 우선시함으로써 여전히 사회에 피해를 줄 수 있다.

 

사회는 과학계가 신중하고 객관적이라고 믿음으로써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위협이 출연했을 때 과학자들로부터 솔직하고 쉽게 이해되는 경고를 받을 기회를 잃을 수도 있다. 객관성이란 편견 없는 방식으로 정보를 제공하려는 노력뿐만 아니라 그 정보에 대한 오해를 막기 위한 노력도 포함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과학자들이 신중하게 발언할 때 대중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대중의 적절한 관심을 끌기 위해 과감하고 간결한 주장을 할 필요도 있으며 이것이 때로는 사회적으로 더 책임 있는 행위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과학자들이 결론을 설명할 때 그에 따른 주의사항과 불확실성을 함께 설명해도 언론을 통해 대중에게 전달될 때 이러한 명확성이 쉽게 무시되기도 한다. 99%의 통계적 유의 수준을 선택한다는 것은 어떤 실험결과가 우연히 일어날 가능성이 1%만 넘어도 과학자들은 그 가설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의 일부 분야에서는 90% 이상의 통계적 유의 수준을 선택하는 것이 실제로 일반적이다.

 

본문에는 환경규제를 이전의 공산주의의 위협과 견줄만한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위협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뛰어난 물리학자들 이야기가 나온다. 대중의 확증 편향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저자는 과학을 놓고 벌어지는 현대 사회의 많은 논쟁이 사람들 사이에 깊이 뿌리박힌 가치로부터 비롯된다는 깨달음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라고 묻는다.

 

많은 경우 완벽하게 중립적이고 가치가 개입되지 않은 정보 제공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은 어쩔 수 없이 어떤 가치들을 다른 가치를 보다 더 크게 지지하게 된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최선은 어떤 가치를 지지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지 성찰하는 것이다.

 

저자는 네 가지 사항을 확실히 할 것을 주장한다. 1) 새로운 연구 결과가 이전의 발견과 과학의 다른 분야와 어떻게 관련되는지 설명하기, 2) 과학적 결과가 궁극적으로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명확히 하기, 3) 결과의 본질에 대한 오해를 방지하기, 4) 사람들의 목표, 가치, 어젠다, 세계관에 미칠 잠재적 영향을 명확히 하기 등이다.

 

저자는 태피스트리 은유를 언급한다.(’태피스트리; tapestry‘는 여러 가지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 또는 그런 직물을 제작하는 기술을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태피스트리 은유에 따르면 과학적 추론은 과학자들이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모여야 하는 수많은 성분이나 실마리들로 짜인 태피스트리라고 할 수 있다. 태피스트리의 은유는 과학의 분야에서 적어도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강조한다. 1) 과학적 추론에서 분석적이거나 규칙에 지배되는 성분들은 가치에 영향을 받는 성분들과 서로 깊이 얽혀 있다. 2) 가치의 역할은 과학적 추론의 다른 측면으로부터 분석을 위해 분리할 수 있다. 3) 가치의 특정한 영향은 과학 전반으로 파는 효과를 낼 수 있으므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등이다.

 

저자는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가치를 완전히 투명하게 하는 것은 조금 비현실적이라고 인정되지만 데이터와 연구방법에 관련된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려는 과학자들의 최근의 노력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연구를 면밀히 조사하고 그 연구가 어떤 가치를 더 우대하는지 알아 볼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 정치, 윤리, 종교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견해가 엇갈릴 수 있지만 과학은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의 사유로서 결정을 내릴 때 출발점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정보의 원천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이 반론이 가진 문제는 그것이 최첨단 연구에 대해서는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의 일부 영역은 매우 잘 정착되어 있지만(예를 들어 물리학이나 화학의 기본원리를 생각할 수 있다.) 과학의 많은 부분을 그렇지 않다.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생물학적 요인, 독성 화학물질, 건강에 미치는 영향, 새로운 농업기술을 개발하는 최선의 방법을 연구할 때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여지가 많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가치의 역할을 인정하면 잃을 것은 적고 얻을 것은 훨씬 많다. 전문가들과 일반 시민 모두 어떤 결론이 가장 신뢰할 수 있고 이용 가능한 증거를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최우선인지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기 때문에 이러한 의견 불일치가 때로 과학의 객관성을 촉진할 것이다. 저자의 바람대로 공공기관, 민간기관, 시민 집단, 학자, 과학자의 사려 깊은 참여를 통해 가치에 기여하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방식으로 연구에 지침이 마련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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