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커칸들이란 이름은 상당히 특이하다. 아니 희소하다고 해야 할까? 닐 슈빈의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에서 주커칸들이란 이름을 만났다. 생물학자가 여러 생물학자들의 이름을 인용한 책에서 만난 것인데 정확히 30년젼 읽은 ‘소리와 상징‘의 저자인 주커칸들이라 착각한 탓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주커칸들은 나 같은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음악계에서뿐 아니라 생물학계에서도 활약하는 사람이구나란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소리와 상징‘의 저자는 빅토르 주커칸들이고 닐 슈빈이 인용한 저자는 에밀 주커칸들이다. 과학철학자 케빈 엘리엇의 최신간 ’과학에서 가치란 무엇인가‘에서 소니아 샤란 이름을 만났다. 2021년 읽은 ’인류, 이주, 생존‘의 저자다.

 

’과학에서 가치란 무엇인가‘의 저자는 소니아 샤가 지난 수백년 동안 런던 인근의 늪이 많은 지역에서 말라리아로 죽은 사람들의 비율이 현대 아프리카 사하라 남쪽에서 죽은 사람들의 비율과 견줄 만한 정도였다고 보고했다고 말했다.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인류는 끊임없이 이동한다’는 부제를 가진 ‘인류, 이주, 생존’에서 소니아 샤는 이런 말을 했다.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있는 것 같은 기분 속에 살아온 나 같은 사람들에게 지난 몇십 년간 부상한 만물은 유전(流傳)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자연관은 역설적으로 소속감을 제공한다(335 페이지)는 말이다.

 

소속감이란 말이 안도감으로 다가온다. 이 책의 서평을 쓴 나는 당시 어떤 생각으로 이 구절을 받아들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서평을 들춰보니 당시 나는 소속감과 관련해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파르메니데스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대표 발언은 만물은 유전한다는 말의 반대 격인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말이지만 나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말에 주목하고 싶다.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말해지고 사유되지만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파르메니데스는 그런 말을 했다. 있음(존재)은 가능하지만 없음(무; 無)은 불가능하다는 차원이다. 이에 대해 이정우 교수는 존재와 사유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어떤 맥락에서는 존재가 사유를 넘쳐 흐르고 어떤 맥락에서는 사유가 존재를 넘쳐흐른다. 전자의 경우 존재에는 우리가 사유하는 것 이상의 차원들이 있다는 점을 말할 수 있고, 후자의 경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사유한다는 점을 말할 수 있다.”(이정우 지음 ‘세계철학사 1’ 129, 130 페이지)

 

기승전 연천 글이냐 할지 모르겠지만 재인폭포를 비롯 연천 지질공원과 역사 유적들에 대해 나는 존재가 사유를 넘쳐흐르지도 않고 사유가 존재를 넘쳐흐르지도 않는, 양자가 대체로 일치하는 글을 써야 한다. 이런 생각 속에 1월의 11번째 날이 흐르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밝기가 변하는 신성이나 태양 흑점의 변화와 같은 것들은 하늘 세계는 불변이어야 한다는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지 않던 동양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려져 있던 사실이었다.“ 패러다임에 대해 논한 글에서 접할 수 있는 흥미로운 사실 가운데 하나다. 천문학을 공부할 것인가? 아니면 동양사상을 공부할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읽기 세창명저산책 72
곽영직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곽영직 교수가 쓴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해설서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의 발전 과정을 패러다임과 과학혁명을 키워드로 분석한 책이다. 패러다임은 특정 시대인들의 견해나 생각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인식의 체계나 이론적 틀을 의미한다. 쿤은 물리학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으로 전공을 바꾼 사람이다.

 

쿤의 주 비판 대상은 논리실증주의였다. 그들의 핵심 내용은 명제의 의미는 그 명제를 검증하는 방법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를 검증 가능성 원리라 한다. 그들은 감각경험을 통해 검증할 수 있는 명제만을 다루는 과학과 검증이 가능하지 않은 무의미한 명제를 다루는 형이상학 가운데 형이상학 논의를 철학에서 배제하려고 했다.

 

미국식으로 변형된 논리실증주의(수용된 견해) 진영에서는 과학 발전 과정을 지식 축적적 과정으로 보았다. 쿤의 과학혁명 이론은 수용된 견해에 대한 반론이다. 쿤의 비판 대상이 된 또 하나의 주의는 칼 포퍼의 반증주의다. 포퍼는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반증가능성을 제시했다. 반증(反證)이란 어떤 사실과 반대되는 증거로 그 사실이 그릇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포퍼는 경험적 사실의 축적을 통해 과학이 진보한다는 생각에 반대했다. 포퍼는 반증이 발견되기 전까지 가설이 사실로 받아들여지지만 반증이 발견되면 가설을 폐기하고 다른 대안을 찾는다고 주장했다. 쿤은 자신의 과학혁명 모델을 증명하는 예로 물리학, 화학 외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지만 자신의 책에서는 주로 물리학의 발전 과정을 예로 들었는데 이는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이고 물리학자라는 자신의 한계 때문이라고 밝혔다.

 

축적에 의한 발전이라는 개념으로는 과학 발전 과정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자신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과학사학자들은 새로운 유형의 질문을 제기하고 지식의 축적에 의한 과학의 발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과학의 역사를 이해한다. 쿤은 정상(正常) 과학에 대해 검토하게 되면 과학적 연구 활동은 전문가 양성 과정에서 제공되는 ’개념의 범주 안으로 우리의 생각을 밀어넣는 활동‘이라고 말했다.

 

정상과학은 기본 전제와 다른 새로운 연구를 억제하지만 기존 규칙과 방법으로 풀리지 않는 문제가 발견되고 전문적인 예측과 맞지 않는 이상 현상이 반복해서 나타나면 정상과학은 위기에 처한다. 이때 비상적(非常的) 연구가 시작된다. 이를 과학혁명이라 한다. 과학혁명은 정상과학에서의 전통을 기반으로 하는 연구 활동에 전통의 파괴 가능성이 덧붙여진 것이다.

 

과학혁명의 대표적 예들은 흔히 혁명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온 위대한 발견들이다. 쿤이 제시한 과학의 발전 과정은 정상과학 이전의 과학 - 정상과학 - 과학혁명 - 새로운 정상과학 순으로 나타낼 수 있다. 정상과학은 하나 이상의 과학적 성취에 확고하게 기반을 둔 연구 활동을 말한다. 정상과학의 기반이 되는 과학적 성취는 특정한 과학자 사회가 일정 기간에 걸쳐 연구활동의 기초로 삼는 이론이나 개념체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 뉴턴의 ’프린키피아‘, 라이엘의 ’지질학‘ 등의 고전이 이루어 놓은 성취들은 많은 추종자를 이끌어낼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큰 동시에 모든 유형의 문제를 후대 연구가 그룹이 해결하도록 남겨 놓을 만큼 상당히 융통성이 있었다. 쿤은 이 두 가지 특성을 띠는 성취를 패러다임이라 정의했다. 즉 정상과학에서의 연구 활동의 기초가 되는 위대한 성취가 패러다임이다.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이와는 양립할 수 없는 다른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과학혁명이다. 이는 통상적인 발전 양상이다. 쿤은 패러다임이 확립되지 않은 ’정상과학 이전‘ 시기의 과학활동은 패러다임이 확립된 정상과학 시기의 연구 활동과 크게 다르다고 했다. 뉴턴 이전 시대에는 빛의 본질에 대한 널리 수용된 단일한 견해가 나타나지 않았다. 패러다임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는 의미다.

 

패러다임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특정한 형태의 더욱 심오한 정보를 수집해야 할 이유가 없으므로 수집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자료더미를 쌓는 데 그친다.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그 이론이 경쟁 상대들보다 더 좋아 보여야 하지만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론은 없다. 확립된 패러다임은 어떤 실험이 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지 알려준다.

 

패러다임이 확립되면 과학자들은 패러다임 자체를 정당화하기 위한 연구는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일은 교과서 저자들이 할 일이다. 교과서가 만들어지면 연구자들은 교과서가 끝나는 지점에서 연구를 시작할 수 있다. 패러다임이 확립되기 전에는 과학 서적이 일반인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쓰이지만 형성 후에는 패러다임을 공유한 전문가들만의 비밀문서처럼 바뀐다.

 

패러다임은 전문가 그룹이 시급하다고 느끼는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데 경쟁 상대들보다 훨씬 성공적이라는 이유로 지위를 획득한다. 그러나 더욱 성공적이라는 말은 단일한 문제에 대해 완벽하게 성공적이라든가 많은 문제에 대해 상당히 성공적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패러다임이 확립된 정상과학에서의 연구활동은 자연을 미리 짜인 고정된 상자 안에 밀어넣는 시도처럼 보일 수도 있다.

 

정상과학에서의 연구 활동은 패러다임이 이미 제공한 현상과 이론을 명료하게 하는 것이다. 패러다임이 없으면 무엇을 연구해야 하는지 결정할 수 없다. 쿤은 정상과학 안에서 사실적 과학 탐구 활동들을 세 가지 핵심적 유형으로 분류했다. 1) 사물의 본질에서 패러다임이 뚜렷하게 드러나도록 사실을 수집하는 활동, 2) 실험을 통해 패러다임의 예측을 확인하는 연구 활동, 3) 패러다임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 수행되는 경험적 연구 등이다. 

 

과학 활동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비상적인 문제들을 푸는 것이다. 비상적 문제는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정상 과학의 진보 과정에서 특별한 문제에 봉착하는 경우에만 나타난다. 쿤은 결과를 상세하게 예측할 수 있는 경우에도 과학자들이 그런 결과를 이끌어내는 방법에 흥미를 갖는 것은 정상과학에서의 연구 목표가 새로운 결론을 내는 것이 아니라 그 결론에 이르는 새로운 방법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라 보았다.

 

정상과학의 연구활동과 퍼즐 풀이 사이에는 흥미 있는 유사성이 있다. 그림 조각들을 이용하여 전혀 다른 창조적인 그림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것은 올바른 퍼즐 풀이가 아니다. 퍼즐의 올바른 풀이는 빈 공간 없이 그림을 채워 미리 결정되어 있는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인데 이것은 새로운 그림을 찾아내는 창조적 작업이다. 결과를 미리 알기 때문에 퍼즐을 푸는 사람의 목표는 결과 그림이 아니라 결과 그림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정상과학이 급속도로 진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퍼즐 풀이에 해당하는 문제들만을 연구 주제로 삼기 때문이다. 정상과학의 연구 활동에서는 유용한 사실을 알아내려는 욕구, 새로운 영역을 탐사하려는 정신, 자연 현상에서 질서를 발견하려는 욕구, 이미 정립된 지식을 실험하려는 충동 등을 발견하기 어렵다. 측정 결과가 이론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거나 이론이 예측된 결과와 같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면 동료들은 그가 아무것도 측정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을 것이다.

 

퍼즐 풀이에서처럼 정상과학에서의 연구도 제한 조건에 얽매인다. 정상과학의 연구에서 불규칙한 부분이 완연히 드러나는 경우 과학자들은 이런 불규칙을 해소하기 위해 패러다임 안에서 실험 기술을 향상시키거나 이론을 더욱 명료하게 하는 연구에 도전하게 된다. 정상과학의 연구 활동은 고도로 결정적인 성격의 연구 활동이지만 모든 것이 규칙에 의해 결정되지는 않는다.

 

규칙이 패러다임으로부터 파생되지만 패러다임은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도 연구 활동의 지침이 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패러다임은 공유된 규칙이나 가정, 견해라기보다 정상과학 전통이 일관성을 갖도록 하는 원천이다. 과학자들의 연구 활동을 퍼즐 풀이에 비유하는 것은 그것의 타당성을 떠나 과학자들에게는 매우 불쾌한 것이 될 수 있다.

 

쿤은 패러다임이 규칙이나 공약보다 우선한다고 말한다. ’과학혁명의 구조‘에서는 패러다임이라는 말이 규칙이나 공약까지 포함하는 포괄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패러다임을 결정하는 것과 규칙을 결정하는 것은 약간 다른 종류의 작업이다. 과학자들은 패러다임의 완벽한 해석이나 합리화에는 동의하지 않거나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패러다임의 확인에는 동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과학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완벽한 한 벌의 규칙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전문가 그룹의 연구 전통에서 드러나는 일관성이다. 패러다임이 확립되기 이전에는 합법적인 방법, 연구 주제, 풀이의 표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지만 확립 후에는 논쟁이 점차 사라진다. 패러다임이 공격을 받는 과학혁명 동안에는 이런 논쟁이 다시 벌어진다. 규칙들과 달리 패러다임은 광범위한 과학자 집단에 공통적일 필요가 없다.

 

양자역학은 다수의 과학자 그룹에게 하나의 패러다임이기는 하지만 그들 모두에게 동일한 패러다임은 아니다. 물리학자들과 화학자들은 헬륨 원자는 원자인가 분자인가에 대해 다른 답을 한다.(화학자들은 하나의 원자로 이루어진 분자로 본다. 기체 운동론의 입장에서 보면 분자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물리학자들은 원자로 본다. 분자 스펙트럼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쿤의 설명에 의하면 정상과학에서의 연구 활동은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기 위한 연구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역사에서 수많은 새로운 이론이 나타났다. 쿤은 정상과학에서의 연구 활동이 정상과학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패러다임의 예측과 다른 결과를 나타내면 정상과학이 위기에 처하고 그것이 심각해지면 새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상 현상의 출현이 즉각적으로 정상과학의 위기를 불러오거나 패러다임의 폐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정상과학은 사실이나 이론의 새로움을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에 성공적인 경우라도 새로운 이론이 찾아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과학 연구에 의해 새로운 사실이 끊임없이 밝혀졌고 새로운 이론들이 창안되어 왔다. 이상(異常) 현상을 패러다임 안에 수용할 수 있도록 패러다임을 조정할 수 있는 경우 그것은 더 이상(以上) 이상(異常) 현상이 아니다.

 

모든 이론이 패러다임을 형성하지는 않는다. 패러다임이 확립되기 이전이나 대규모 패러다임의 변화가 진행중인 경우 과학자들은 발견 방법이 명료화되지 않은 추론적인 이론을 전개한다. 실험 결과와 이런 이론의 예측이 일치하여 이론이 명료화되는 경우 발견이 이루어지며 이론은 패러다임의 지위를 확보한다. 쿤은 무엇을 예측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면서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새로움이 모습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빛을 입자의 흐름으로 본 뉴턴의 입자 이론은 회절이나 편광과 같은 이상 현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후에야 파동 이론으로 대체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은 오랫동안 놀랍도록 잘 맞는 천문학이었지만 행성의 위치와 세차운동에서는 오차가 존재했다. 이런 오차를 줄이는 것이 정상 천문학의 과제였다. 그러나 그런 시도들이 복잡성을 증가시키거나 한 문제의 해결이 다른 문제를 불러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해 기존의 천문학 패러다임이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었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는 연구를 시작하기 위한 선행조건이 되었다. 달력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교회의 압력 즉 세차 운동이라는 퍼즐을 풀어야 했던 사회적 압력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지구가 우주 중심에 정지해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비판했던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처럼 이들 역시 뉴턴역학의 절대 공간을 대체할 상대적인 공간으로의 전환이 새로운 관측 결과를 내놓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공간의 상대성에 관련된 문제들은 1890년대까지 아무런 위기도 야기하지 못했다. 전자기파가 에테르라는 매질을 통해 전파되는 파동이라고 믿었던 당시의 과학자들은 천체를 이용한 실험과 지상 실험을 통해 에테르를 확인하려고 했다. 많은 과학자들은 광행차를 측정하여 에테르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했다. 그러나 실험을 통해 에테르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게 되자 이 문제는 이론물리학자들에게로 이전되었다.

 

기존 이론의 붕괴를 가져온 실패가 오랜 세월에 걸쳐 인식되어 왔던 형태였다는 점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실패는 해당 과학 분야에서 위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던 기간에도 계속 관측되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위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는 이런 실패들이 무시되었다. 쿤이 비판하는 과학 발견 이론 중 하나는 칼 포퍼의 반증 이론이다. 포퍼의 반증 이론에 의하면 과학자들은 기존 이론에 반하는 증거가 발견되면 기존 이론을 폐기하고 새로운 이론을 만든다.

 

그러나 쿤은 기존 패러다임의 예측에 어긋나는 이상 현상의 출현으로 야기된 정상과학의 위기에 과학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포퍼의 반증 이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과학자들은 위기에 처한 패러다임을 보며 믿음이 흔들려 다른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을 위기로 몰고 간 패러다임을 쉽게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이상 현상을 반증 사례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이 확립되어 있는 정상과학에서는 패러다임에 위배되는 이상 현상이 아무리 많이 나타나도 새 패러다임 후보가 나타날 때까지 기존 패러다임을 폐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쿤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폐기하는 것은 기존 이론에 반하는 반증이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 후보와의 경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과학자들은 이상 현상에 부딪혔을 때 패러다임의 다양한 명료화를 궁리하고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 이론을 수정하려고 한다.

 

그들은 이상 현상의 발견과 이들을 패러다임 안에 수용하려는 시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기존 패러다임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체하지 않은 채 기존의 패러다임을 포기하는 것은 과학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반증 사례들을 포함하지 않은 과학 연구는 없다. 정상과학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정상과학의 바탕을 이루는 패러다임에 대한 반증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과학에서 진실과 거짓이 확실하게 밝혀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상과학은 이론과 사실이 더 가깝게 일치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고 그런 노력은 확증 또는 반증을 조사함으로써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많은 경우 이상 현상들은 풀이 과정이 밝혀질 때까지 방치되기도 한다. 뉴턴의 원래 계산 이후 달이 지구에 가까워지는 근지점에 대한 예측이 관측 결과와 맞지 않는다는 이상 현상이 방치되었다.

 

하나 이상의 이상 현상이 정상과학의 위기를 유발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단순한 변칙 이상의 것이라야 한다. 패러다임과 자연의 일치 사이에는 항상 함정이 숨어 있다. 모든 이상 현상에 주목하는 과학자는 제대로 된 과학 연구를 수행할 수 없다. 여러 갈래의 수정을 거침에 따라 정상과학의 규칙들은 점차 모호해진다. 아직 패러다임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패러다임에 합의하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든다. 그렇게 되면 이미 풀었던 문제의 표준적인 풀이도 의문의 대상이 된다.

 

정상과학이 처한 위기는 연구 활동에 어떤 영향을 줄까? 모든 위기는 패러다임이 모호해짐과 더불어서, 그리고 그에 따라 정상과학의 규칙들이 해이해짐에 따라 시작된다. 이런 맥락에서 위기 기간의 연구는 패러다임이 존재하지 않던 시기의 연구와 유사해진다. 다만 이 기간의 연구에서는 패러다임이 존재하지 않던 시기보다 견해 차이의 폭이 작으며 견해 차이가 더욱 명확하게 정의된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새로운 기반을 바탕으로 그 분야를 다시 세우는 것으로 연구활동의 방법과 응용은 물론 가장 기본적인 이론의 일반화조차 변화시키는 재건 사업이다. 패러다임의 이행 시기에는 옛 패러다임에 의해 해결되는 문제와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해결되는 문제들이 많이 중복되겠지만 완전히 중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위기에 처한 과학자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추론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고 성공하는 경우 새로운 패러다임에 이르는 길을 열게 된다.

 

쿤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확립에 기여하는 사람들은 나이가 젊거나 그들이 속한 전문분야에 새롭게 참여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런 사람들은 이전 활동들로 인해 기존의 패러다임에 구속 되는 일이 거의 없고 이상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기존의 규칙을 대치할 새로운 규칙을 쉽게 착상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자칫 과학자 사회를 나이로 기준으로 구분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이보다는 기존의 과학 전통에 얼마나 깊이 관여하고 있느냐에 의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과학혁명은 옛 패러다임이 양립되지 않는 새 패러다임으로 전반적 또는 부분적으로 대치되는 비축적적인 발전 과정이다. 기존의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되는 사건을 왜 혁명이라고 불러야 할까?

 

쿤은 정치혁명과 과학혁명의 비교를 통해 이 물음에 답을 찾으려고 했다. 정치혁명이 기존 제도가 주위 상황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들을 더 이상 적절하게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이 정치적 사회 집단에 팽배하면서 시작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 혁명도 기존의 패러다임의 자연 현상에 대한 다각적 탐사에서 더 이상 적절하게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과학자 사회에 점차로 증대될 때 시작 된다는 것이다.

 

과학혁명은 과학자 사회가 기존의 패러다임을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택하는 과정이다. 과학자 사회는 양립되지 않는 두 가지 패러다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러한 선택에서는 패러다임 자체가 논의의 주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특정한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한 설득은 순환논리에 빠지게 된다.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그룹들이 자신들의 패러다임을 옹호하는데 상대방이 인정하지 않는 패러다임을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론이 꼭 이전 이론과 양립할 수 없는 이론인 것은 아니다. 새로운 이론이 예전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던 현상을 다룰 수도 있고 이전 이론보다 수준 높은 이론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보다 낮은 차원의 이론들을 크게 변형하지 않고 포함할 수 있다. 새로운 이론들이 모두 이와 같다면 과학의 발전은 원칙적으로 축적적이다. 과학발전에서 새로운 지식은 다른 모순되는 지식을 대치하기보다는 무지를 대치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새로운 이론을 축적적으로 쌓는 일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이상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제한된 새로운 이론은 기존의 이론이 예측했던 것과는 다른 예측을 내놓아야 한다. 만약 두 이론이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있는 것이라면 두 이론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러나 두 이론이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면 새로운 이론이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기존의 이론을 파괴하고 그 자리를 대체해야 한다.

 

패러다임은 과학자들에게 지도뿐 아니라 지도를 만드는 데에 필수적인 방향까지 제시한다. 패러다임을 익히면서 과학자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는 이론적 방법과 기준을 모두 획득하게 된다. 패러다임이 변하면 문제와 제안된 풀이 모두의 타당성을 결정짓는 기준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과학자는 익숙한 환경에서 새로운 게슈탈트를 형성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한 후의 그의 연구 세계는 이전의 세계와 같은 표준으로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사람이 무엇을 보는가는 그가 보고 있는 대상에도 달려 있지만 이전의 경험과 개념이 무엇을 보도록 하는지에도 달려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처음 제안된 후 50년 동안에 예전에는 불변이라고 여겼던 하늘 세계에서의 많은 변화를 찾아냈다. 밝기가 변하는 신성이나 태양 흑점의 변화와 같은 것들은 하늘 세계는 불변이어야 한다는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지 않던 동양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려져 있던 사실이었다.

 

이전의 과학자들이 흔들리는 돌을 보았던 곳에서 갈릴레이가 진자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임페투스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에 의해 가능했다. 진자는 패러다임에 의해서 유발된 게슈탈트 전환과 비슷한 것에 의해 실체를 갖추게 되었다. 게슈탈트 전환이란 관점(어떤 것을 전경으로 보고 어떤 것을 배경으로 보느냐의 문제)을 바꾸어 같은 것을 보면서도 전혀 다른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패러다임의 전환에 의해 세상이 변하지는 않지만 패러다임이 변하면 과학자들은 다른 세계에서 연구하게 된다. 쿤은 과학혁명 동안에 일어나는 일들은 자료의 재해석 이상의 무엇이라고 주장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택한 과학자는 자료의 새로운 해석자가 아니라 세상을 다르게 보이도록 하는 안경을 낀 사람과 비슷하다.

 

과학자들은 끊임없이 관찰 결과를 해석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해석은 특정 패러다임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런 해석들은 이미 존재하는 패러다임을 정련하고 확대하고 명료화하는 정상과학의 연구 활동이다. 이런 해석 작업들은 패러다임을 정련할뿐 수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행하는 조작과 측정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들여서 수집한 것이다.

 

그것들은 과학자가 보는 무엇이 아니라 더 기본적인 지각작용의 의미에 대한 구체적 지표들이다. 수용된 패러다임을 정련하는 데 유용하다는 이유로 탐사 대상으로 선정된 것들이다. 다른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실험 조작을 하고 다른 종류의 자료를 수집한다. 태양을 전통적인 명칭인 행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했던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은 행성과 태양이 무엇인지만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천체가 종종 종전과는 달라보이게 되는 세계 속에서 유용한 구별이 지속될 수 있도록 행성 의미를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돌턴은 화학자가 아니라 물에 의한 기체의 흡수 및 대기에 의한 수분의 흡수와 관련된 물리적 현상을 다루던 기상학자이다. 따라서 돌턴은 당시의 화학자들과는 다른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었다. 돌턴으로부터 화학자들이 취했던 것은 새로운 실험 법칙이 아니라 화학을 수행하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혁명을 직접 경험한 당사자가 아닌 이상 연구를 수행하는 과학자나 문헌을 읽는 일반인들의 역사적 감각은 가장 최근에 있었던 혁명의 결과에만 한정된다.

 

교과서는 역사에 대한 과학자의 감각을 제거하고 최근에 있었던 혁명의 결과물만을 제공한다. 교과서는 서론이나 이전 시대의 거장들에 대한 산발적이고 단편적인 인용에서 역사의 편린만을 다룰뿐이다. 그러한 인용들로부터 학생들과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오랜 과학 전통의 맥을 잇고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느끼는 교과서 유도적 전통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다.

 

과학 교과서는 대부분 고도로 기능적이라는 이유로 과거 과학자들의 연구 중 패러다임 문제들의 서술과 해결에 기여했다고 평가되는 것들만 인용한다. 교과서에는 더러는 선택에 의해서, 더러는 왜곡에 의해서 이전시대의 과학자들이 최근에 있었던 과학혁명의 결과로 형성된 정상과학의 기준에 의해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연구를 수행했던 것처럼 설명되어 있다.

 

역사적 사실을 경시하는 태도는 사실성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전문 분야, 다시 말해 과학 전문분야의 이데올로기에 깊숙하게 그리고 기능적으로 침투해 있다. 그 결과 과학의 역사가 직선적 그리고 축적적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돌턴 원자론의 전개 과정에 대한 설명에서는 돌턴이 배수비례의 법칙과 같은 화학적 문제들에 대해 일찍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문제들은 그의 창의적 연구가 거의 완성되던 시기에 그것들의 더불어 비로소 그에게 떠올랐던 것이다. 돌턴의 과학적 업적을 설명하는 교과서에는 이전에는 물리학과 기상학에 국한되었던 일련의 질문과 개념을 화학에 적용시킨 것의 혁명적 영향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뉴턴은 중력에 의해 운동하는 물체가 이동한 거리는 시간의 제곱의 비례한다는 사실을 갈릴레이가 발견했다고 기록했다.

 

갈릴레오의 운동학을 뉴턴 자신의 역학으로 분석하면 그런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이와 관련해서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낙하하는 물체에 대한 그의 논의에서는 물체를 낙하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균일한 중력에 대해서는 물론 힘 자체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갈릴레이 시대의 패러다임 아래에서는 제기될 수 없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갈릴레이의 공으로 돌림에 따라 뉴턴역학이 가지고 있는 혁명적 성격이 가려진 것이다.

 

과학 발전과정의 혁명적 성격을 숨겨버림으로써 과학발전을 선형적이고 축적적인 것으로 만드는 교과서의 경향은 과학 발전의 핵심에서 일어나는 과정이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 버린다. 교과서는 학생들로 하여금 과학자 사회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빨리 익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함으로써 현행 정상과학의 다양한 실험, 개념, 법칙, 이론들을 개별적으로, 그리고 가능한 지속적으로 다룬다.

 

이것은 교육적인 측면에서는 성공적이지만 과학은 현대의 기술적 총체를 구성하고 있는 일련의 발견과 발명에 의해 현재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 교과서는 건축에서 벽돌을 쌓아 올리는 것처럼 과학자들이 당대의 교과서가 제공하고 있는 정보 더미에 또 다른 사실, 개념, 법칙, 이론들을 하나씩 추가해 왔다는 것을 암시한다.

 

자연을 더 잘 설명한다는 기준은 모호하고 그것을 비교하고 판단할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 외적인 기준에 의해 새로운 패러다임이 선택되는 일도 일어난다. 정상과학에 종사하는 연구자들은 퍼즐을 풀이하는 사람일뿐 패러다임의 검증자는 아니다 .특정한 문제의 풀이를 받는 찾는 과학자는 원하는 결과를 내놓지 못하는 접근법을 피해서 수많은 대안적 조건을 시도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패러다임을 검색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체스판의 말들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는 것과 같다. 그것은 주어진 규칙 안에서 해결책을 찾기 위한 것이지 게임 규칙에 대한 검증은 아니다. 패러다임에 대한 검증은 퍼즐을 풀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위기를 자초한 후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런 때에도 위기의식이 대안적 패러다임 후보를 출현시킨 후에나 검증이 일어나게 된다. 패러다임에 대한 검증은 특정한 패러다임과 자연과의 대비를 통해서가 아니라 두 개의 경쟁적 패러다임 사이의 경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어떤 이론도 그와 관련된 시험을 모두 통과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론이 입증되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증거에 비추어 그 이론이 개연성을 갖는지에 대해 묻게 된다. 그리고 그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서로 다른 이론들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증거를 얼마나 잘 성명하는지를 비교한다. 사실 입증은 마치 자연선택과 같아 특정 역사 상황에서 제시된 대안들 중 가장 적합한 것을 가려낸다.

 

그런 선택이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묻는 것은 유용한 질문이 못 된다.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데 사용될 수 있는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쿤은 칼 포퍼가 주장한 오류 입증(반증)의 역할은 이상 현상의 경험 즉 위기 유발을 통해 새로운 이론을 위한 길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했다. 당면한 퍼즐을 모두 풀 수 있는 이론은 없다.

 

이미 얻어진 풀이 또한 완전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런 불완전성이 이론 거부의 근거가 된다면 모든 이론은 어느 때나 부정될 수 있다. 단 한 번의 심각한 실패가 이론 폐기를 정당화한다면 모든 이론의 폐기를 막기 위해 오류 입증의 정도를 정하는 기준이 따로 마련되어야 한다. 적어도 과학사학자들에게는 사실 입증이 사실과 이론의 일치를 확립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이론들은 모두 대체로 사실과 일치했다. 그러나 어느 이론이 사실과 부합하는가 또는 얼마나 잘 부합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없다. 쿤은 패러다임에 대한 오류 입증보다 두 가지 경쟁적인 이론 가운데 어느 것이 사실과 더 부합하는가를 묻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패러다임 사이의 경쟁은 증명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는 종류의 싸움이 아니다. 혁명이라는 분수령을 가로지를 수 있는 의사소통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코페르니쿠스가 이루어낸 혁신은 단순히 정지해 있던 지구를 움직이게 한 것만이 아니라 물리학과 천문학의 접근방식을 새롭게 바꾼 것이었다.

 

패러다임 전환은 개종(改宗)에 비유될 수 있다. 옛 패러다임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벌이는 저항의 근원은 옛 패러다임이 결국 모든 문제를 풀어줄 것이라는 확신 즉 자연이 자신들의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틀에 들어맞을 것이라는 확신이다. 비록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개종은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개종은 과학자들이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일어난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가장 유력한 주장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옛 패러다임을 위기로 몰아간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이 위기를 야기한 문제들을 해결했다는 주장은 그렇게 확실하지 않으며 언제나 그렇게 떳떳한 주장도 아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보다 더 정확하지도 않았고 달력의 개량에 도움이 되지도 못했다.

 

이런 경우에는 그 분야의 다른 부분으로부터 증거가 유도되어야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예전의 패러다임 아래서는 문제되지 않았던 현상들을 예측하는 경우 특히 설득력을 갖는다. 코페르니쿠스가 예측한 금성의 위상 변화가 그가 죽은 후 60년이 지나 갈릴레이의 망원경 관측을 통해 확인되자 많은 전향자들이 생겼다.

 

쿤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옛 패러다임을 버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는 또 다른 종류의 사고방식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더욱 간결하다‘, ’더욱 적합해 보인다‘, ’더욱 단순하다’와 같은 개인적 심미적 감각이다. 경쟁에서 승리한 그룹이 승리의 결과를 진보 외에 다른 무엇이라고 판단할까? 자신들의 승리를 발전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들이 틀렸고 상대방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적어도 경쟁의 승리자들에게 혁명의 결과는 발전이어야 하며 미래의 과학자들이 그렇게 보도록 확신시킬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과학자 사회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통해 해결되는 문제의 수효와 정확도를 극대화하는 고도의 효율적인 장치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과학을 자연에 의해 미리 설정된 어떤 목표를 향해 다가가는 활동으로 간주하는 것이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과학에 그런 목표가 반드시 있어야 할까?

 

다윈 이전에도 진화론은 널리 퍼져 있었다. 다윈 이전의 진화론은 목적론이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목적론을 붕괴시켰다. 많은 사람에게 목적론의 붕괴는 다윈의 제안에서 가장 의미 깊고 수용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종의 기원’은 신이나 자연, 그 어느 것에 의해 설정된 목표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대신 주어진 환경에서 유기체들에게 작용하는 자연선택이라는 메커니즘을 더욱 정교하고 복잡하며 훨씬 더 분화된 유기체들의 점진적이지만 꾸준한 출현의 원인으로 제시했다.

 

생물학적 진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과학 발전의 전 과정 역시 미리 설정된 목표나 절대적인 진리의 도움 없이 일어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과학에서 발전이나 진보라는 말이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쿤은 진보가 아니라 변화라는 표현이 과학에 더 적절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유보적 입장을 취한다.

 

‘과학혁명의 구조’의 많은 부분에서 패러다임이라는 용어가 두 가지 다른 의미로 쓰였다. 한편으로는 패러다임이 특정한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서 공유되는 신념, 가치, 기술 등을 망라한 총체적 집합을 가리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집합에 속하는 한 가지 유형의 구성 요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모형이나 예제로 사용되는 구체적 퍼즐 풀이를 의미한다.

 

쿤은 더욱 심오한 의미를 가진 패러다임의 두 번째 의미가 이 책이 불러온 논쟁과 오해의 원천이 되었다고 보고 추가 부분에서는 그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과학자 사회의 가장 중요한 성격 가운데 하나는 패러다임이 없는 시대로부터 패러다임의 시대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행이 일어나기 전에는 여러 갈래의 학파들이 그 분야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하게 된다.

 

이후 몇몇 주목할 만한 과학적 성취에 의해 다수의 학파가 하나의 학파로 수렴되어 더욱 효율적인 연구 활동을 시작한다. 정상과학의 위기가 항상 혁명에 선행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다. 쿤은 위기가 혁명의 필수요건이 아니라 통상적인 서막일뿐이라고 한다. 가치관은 항상 작용하지만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이 위기를 확인해야 할 때, 그리고 양립할 수 없는 방식 중에서 특정한 방식을 선택할 때 특히 중요하다.

 

‘과학혁명의 구조’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패러다임이라는 말이 각 문장에서 어떤 유형의 전문 분야(disciplinary) 행렬(matrix)을 나타내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하기에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어 읽기를 어렵게 한다. 전문 분야 행렬은 패러다임이란 말이 지닌 다의성으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쿤이 제안한 개념이다. 패러다임들, 패러다임의 부분들, 패러다임적인 것들은 모두 전문 분야 행렬의 요소를 이루고 있으며 그 요소들은 온전한 하나를 형성하여 총체적으로 작용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핵산과 기억, 욕망과 단백질의 가공할 혼합물이다. 저물어 가고 있는 이번 세기에는 핵산과 단백질이 우리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 다음 세기의 관심사는 기억과 욕망이 될 것이다. 이러한 물음들에 누가 대답해 줄 것인가?“ 프랑수아 자콥의 ‘파리, 생쥐, 그리고 인간’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책에는 그 유명한 전갈과 개구리 이야기가 인용되어 있다.

 

헤엄치지 못하는 전갈이 개구리를 설득해 등에 업혀 도강(渡江)하다가 개구리를 쏘아 죽임으로써 개구리와 함께 자신도 물에 빠져 죽은 이야기다. 자콥은 전갈은 멍청이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문장이 본령은 아니다. 전갈의 선택은 찌르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귀착된다고 말하는 자콥에 의하면 우리 역시 우리의 수준에서 우리의 방식대로 우리의 본성에 갇혀 있다. 이것이 본령이다.

 

자콥의 책은 이런 우울한 면만 보이지 않는다. 자콥은 인간이 구축한 세계관은 과학적이든 신화적이든 언제나 거의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유럽에서 과학과 예술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거의 언제나 함께 꽃을 피웠다는 말도 그렇다. 물론 과학과 예술은 몇 가지 차이를 갖는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남산도서관에서 택배 대출 받은 여섯 권 가운데 한 권인 닐 슈빈의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2022년 출간)를 읽고 있습니다. 닐 슈빈은 '내 안의 물고기'의 저자인 고생물학자입니다. 지질학의 한 분야인 고생물학은 진화생물학과 관련이 큰 학문입니다. 지난해 후쿠오카 신이치의 '생명해류'를 읽고 단서를 얻은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리고 어제 이정우 교수의 '세계철학사 3'권에서 후쿠오카 신이치의 '동적평형'이 생명을 동적평형이란 개념으로 분석한 인상적인 사례로 언급된 부분을 읽고 일이관지(一以貫之)라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올해는 생명을 주제로 한 책들을 많이 읽을 것을 다짐합니다. 닐 슈빈의 책 이후 정우현의 '생명을 묻다'를 읽을 것입니다.

 

이 책에 르네 데카르트, 자크 모노, 에르빈 슈뢰딩거, 후쿠오카 신이치, 리처드 도킨스, 마르쿠스 가브리엘, 아리스토텔레스, 루이 파스퇴르, 찰스 다윈, 리 밴 밸런, 프랜시스 골턴, 올더스 헉슬리, 그레고어 멘델, 바버라 맥클린톡, 스티븐 핑커, 매트 리들리, 윌리엄 해밀턴, 표토르 크로포트킨, 조던 스몰러, 필립 K. 딕, 앙리 베르그송, 폴 너스, 메리 셸리, 크레이크 벤터, 엘리자베스 블랙번, 필립 로스, 레이 커즈와일, 마이클 센델, 호프 자런, 한스 요나스 등의 생명관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생소한 사람이 몇 있지만 대체로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어제 '허미수(許眉叟)의 학(學), 예(禮) 사상(思想) 논고(論攷)'(남산도서관에서 택배 대출 받은)에서 미수 선생이 물을 이야기한 부분에서 잠시 멈췄었습니다. water가 아닌 物이었습니다.

 

후쿠오카 신이치의 목록에 '생물과 무생물 사이'라는 책이 있지요. 이 책을 읽을 때는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지금은 생물과 생명이란 단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물(物)에는 사물이란 뜻이 있지만 사람이라는 뜻도 있네요. 인물(人物)이란 말이 대표적 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