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산이 울렸다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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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너 그런 거 알아?  좋은 음악을 듣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곁에 있는 누군가를 붙잡고 나의 행복한 느낌에 대해 한나절 자랑을 늘어놓고 싶은 심정 말이야.  그래, 때로는 약간의 과장된 몸짓을 섞을 수도 있겠지.  만약 내 얘기를 듣는 상대방이 나의 느낌에 격하게 반응한다면 아마 더없이 좋을 거야.  어쩌면 내 수다는 한나절이 아니라 날밤을 샐 때까지 계속될지도 모르지.  마치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풋내기 청춘처럼 말이야.

 

나는 오늘 딱 그런 심정이야.  맘에 쏙 드는 그런 책을 만났거든.  할레드 호세이니라고 너도 들어봤을 거야.  못 들어봤다고?  <천 개의 찬란한 태양>과 <연을 쫓는 아이>를 썼던 그 작가 말이야.  읽지는 않았지만 제목은 들었다고?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워낙 책을 싫어하는 너로서는.  맞아.  우리나라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누렸지.  네가 기억할 정도면 아마 우리나라 국민의 반 이상이 적어도 책의 제목은 들어봤을 거야.  최근에 그 작가가 새로운 작품을 냈거든.  난 오늘 그 작품에 대해 얘기하려고 해.  그렇게 노골적으로 뚱한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어.  너도 들어보면 좋아할 테니까.

 

음, 무슨 얘기부터 시작해야 할까?  아, 그래.  할레드 호세이니의 작품에서 느꼈던 내 느낌부터 말하는 게 좋겠어.  뭐랄까?  내 생각에 그는 작품을 쓸 때 잉크대신 암청색의 짙은 슬픔을 듬뿍 찍어 글을 쓰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곤 해.  책을 읽으면 그다지 슬픈 내용도 아닌데 난 금세 슬퍼지곤 하거든.  나만 그렇다고?  그럴지도......  아프카니스탄 카불에서 태어나 지금은 미국에서 의사로 지내는 그가 내면에 그런 알 수 없는 깊은 슬픔을 품고 있다는 건 아이러니이긴 해.  몇 대목 읽어줄 테니까 들어볼래?

      

"아버지는 딱딱했다.  그의 눈은 똑같은 세상을 바라보았지만, 무관심밖에 보지 못했다.  끝이 없는 고생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세계는 비정했다.  좋은 건 아무것도 공짜가 아니었다.  사랑마저도 그랬다.  모든 것에 값을 지불해야 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고통이 화폐였다."    (p.42)

 

"그녀가 잔인하다거나 무정했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마르코스 씨, 나는 오래 살았습니다.  내가 오래 살면서 알게 된 것 하나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판단할 때는 겸손하고 측은히 여기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p.158)

 

"나는 반세기가 넘게 술레이만을 보살폈습니다.  나의 하루하루는 그와의 교류와 그가 뭘 필요로 하느냐에 따라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든 걸 자유롭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자, 그 자유가 환영처럼 느껴졌습니다.  내가 원했던 것이 대부분, 나한테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목적을 찾고 그걸 위해 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삶에 목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은 삶을 살고 나서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이라는 것도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 나는 그걸 다 이뤘으니, 목적도 없어지고 어찌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p.184)

 

어때?  그닥 슬프지 않다고?  그럴 수도 있겠지.  이 책은 570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이니까 그 일부를 읽고 판단하기는 어려울 거야.  더구나 너는 작가가 쓴 다른 작품도 읽어보지 않했으니 그렇게 느끼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라.  나는 가끔 할레드 호세이니처럼 처연한 슬픔이 묻어나는 이런 작품을 쓰는 작가를 만날 때면 그 사람이 처음부터 남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감정을 안고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어쭙잖은 운명론자 같지?

 

너무 보채지 마.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책의 내용을 말하려던 참이야.  네 표정을 보니 조금 지루해 하는 것 같은데?  나는 사실 네가 바라는 것처럼 아주 긴 애기를 짧고 간결하게 말할 자신이 없어.  더구나 너는 몹시 지루한 표정인데 말이야.  어떻게 하면 너의 흥미를 잃게 하지 않으면서 책의 내용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을까?  자신은 없지만 아무튼 시작해보자.  1952년의 아프가니스탄. 압둘라와 여동생 파리는 아버지, 새어머니와 함께 작은 마을 샤드바그에 살고 있었어. 날품을 팔아 근근이 살아가는 아버지 사부르는 끊임없이 일자리를 찾아야 했고, 그들 가족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했지.  친엄마를 잃은 압둘라와 파리. 요정이라는 뜻을 지닌 여동생 파리는 그때부터 압둘라의 모든 것이었던 듯했어.  깃털을 좋아했던 파리를 위해 공작깃털과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신발을 맞바꾸기까지 했으니 말이야.  파리에게 압둘라는 오빠라기 보다는 부모였던 거야.

 

어느 날 압둘라와 파리 남매는 아버지와 사막을 건너 카불로 향하고, 그때까지 남매는 그것이 평생의 이별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이 소설은 큰 틀에서는 두 남매의 이별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그들을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를 소설 속에 담고 있어.  쌍둥이로 태어나 불행한 삶을 살았던 압둘라의 새어머니 파르와나와 쌍둥이 언니 마수마의 이야기, 파르와나의 오빠로, 부잣집에서 일하는 나비와 그가 사랑하는 여주인 닐라, 나비가 평생을 돌보았던 닐라의 남편 술레이만의 이야기, 미국으로 이민 가서 의사가 되어 안주하는 이드리스와 사촌 동생 티무르의 이야기, 프랑스 혈통을 가진 진보적인 여류 시인인 닐라와 그녀의 양녀인 파리가 술레이만과 헤어져 프랑스에 정착하여 살았던 길고 지난한 삶,  압둘라와 파리가 어릴 적 살았던 샤드바그의 과수원에 대저택을 짓고 부유하게 살아가는 타락한 전쟁 영웅과 그의 아들 아델 이야기, 전쟁이 끝난 후의 카불에서 구호반원으로 활약하는 그리스인 성형외과 의사 마르코스와 그의 어머니, 그리고 어릴 적 개에게 물려 불행한 삶을 살아야만 했던 탈리아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노년에 극적으로 재회한 압둘라와 파리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지. 흥미로운 것은 각각의 인생 이야기가 문학에서 다룰 수 있는 다양한 형식으로 기술되어 결코 지루하지 않다는 거야.  때로는 회상의 형식으로, 때로는 유언장과 같은 편지의 형식으로.

 

나는 그 중 나비가 마르코스씨에게 남겼던 편지 형식의 인생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어.  압둘라의 새어머니 파르와나의 오빠인 나비는 카불의 부잣집에서 요리사 겸 운전기사로 일하게 되지.  그가 주인으로 모셨던 술레이만은 처음부터 나비를 좋아했었어.  그래, 맞아.  술레이만은 동성애자였던 거야.  둘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이 있었지만 술레이만은 나비의 일상을 지켜보며 그의 모습 하나하나를 그림으로 남겨.  어느 날 그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그의 부인이었던 닐라와 양녀 파리가 프랑스로 떠나고 집에는 이제 나비와 술레이만만 남게 되지.  나비가 짝사랑하던 닐라가 떠난 후 술레이만이 자신을 그렸던 스케치북을 발견한 나비는 술레이만을 떠나려고 결심도 했었지만 결국 그는 술레이만이 죽을 때까지 곁을 지키고 마지막 순간에는 술레이만을 꼭 안아주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돼.  그 내밀한 이야기를 나비는 그의 집에서 구호활동을 하며 친해졌던 마르코스에게 편지로 남긴 거지. 
   

"술레이만은 나한테 결혼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인생을 돌아보면서 내가 어쩌면 사람들이 결혼에서 찾는 것을 이미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걸 깨닫고 있었습니다.  나한테는 편안함과 벗, 그리고 나를 언제나 환영하고 사랑하고 필요로 하는 집이 있었습니다."    (p.174)

 

"나는 반세기가 넘게 술레이만을 보살폈습니다.  나의 하루하루는 그와의 교류와 그가 뭘 필요로 하느냐에 따라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든 걸 자유롭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자, 그 자유가 환영처럼 느껴졌습니다.  내가 원했던 것이 대부분, 나한테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목적을 찾고 그걸 위해 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삶에 목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은 삶을 살고 나서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이라는 것도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 나는 그걸 다 이뤘으니, 목적도 없어지고 어찌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p.184)

 

나비는 그가 짝사랑했던 닐라가 프랑스에서 자살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술레이만이 자신에게 물려준 유산을 주인집의 양녀이자 자신의 조카인 파리에게 전해달라고 마르코스씨에게 부탁하지.

 

"나는 그녀가 자살했다는 걸 알고 그다지 놀라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제 압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사랑을 하는 것처럼 불행을 느낀다는 걸 말입니다.  은밀하고 강렬하게,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고서."    (p.188)

 

프랑스에서 공부하여 수학자가 된 파리는 그녀 자신이 양녀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자랐어.  닐라가 그녀의 친어머니라고만 생각했던 거지.  닐라가 죽고, 그녀의 외삼촌인 나비마저 죽은 후 마르코스씨로부터 연락을 받고서야 그녀는 자신의 지워진 어린 시절을 찾으려고 해.  닐라가 죽은 후 파리가 했던 그녀의 독백은 내 가슴에서 오래도록 맴돌았던 것 같아.

 

"어머니, 당신의 자궁에서 잉태되고 자라면서 나는 뭐가 되어야 했나요?  희망의 씨엇이었나요?  당신이 어둠의 늪을 건너기 위해 구입한 표였나요?  당신의 가슴에 난 구멍에 댈 헝겊 조각이었나요?  그렇다면 내가 충분하지 못했죠.  충분 근처에도 못 미쳤죠.  나는 당신의 고통에 대한 진통제도 못 되었고 또 다른 막다른 골목이자 짐이었을 뿐이죠.  당신은 그걸 일찍부터 알아차렸던 게 분명해요.  그러나 당신이 뭘 할 수 있었겠어요?  전당포에 가서 나를 팔아버릴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p.310)

 

어때?  이제 이 소설에 조금쯤 흥미가 생기지? 내친 김에 마르코스의 이야기도 들려줄까?  음... 마르코스는 그리스 태생이야.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자랐어.  어머니에게는 어려서부터 절친했던 친구가 있었지.  둘은 사이가 너무 좋아서 성인이 되어 결혼한 후에도 곁에서 같이 살자고 굳게 약속했었어.  그러나 배우가 된 어머니의 친구는 개에게 물려 얼굴이 흉하게 된 딸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떠나.  그 애가 아까 말했던 탈리아야.  탈리아는 마르코스와 한 집에서 자란 셈이지.  누이처럼 말이야.  NGO활동을 하며 이곳저곳을 떠도는 마르코스를 대신해 탈리아가 어머니를 돌보기도 해.  마르코스는 사실 탈리아 때문에 성형외과 의사가 된 거야. 

 

"나는 오랜 세월이 흘러, 성형외과 의사로 실습을 시작할 때, 그날 부엌에서 탈리아에게 티노스를 떠나 기숙학교에 들어가라고 할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세상은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않으며, 살과 뼈에 가려진 희망과 꿈과 슬픔에 대해서는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걸 배우게 되었다.  그것은 그처럼 단순하고 불합리하고 잔인했다.  나의 환자들은 이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현재와 미래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그들의 골상의 좌우대칭, 눈 사이의 간격, 턱의 길이, 코끝이 이상적인 비전두각에 따라 정해지는지 알았다.  아름다움은 임의로, 어리석게 그냥 주어지는 엄청난 선물이다."    (p.464)

 

"나는 지금, 쉰여섯 살이다.  나는 그 말을 들으려고 평생을 기다렸다.  너무 늦은 걸까?  우리에게는 너무 늦은 걸까?  우리는, 어머니와 나는 너무 오랫동안 유랑했던 걸까?  나의 일부는 우리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살아가고, 우리가 얼마나 서로한테 안 맞는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덜 고통스러울지 모른다.  때늦은 말보다는 어쩌면 그게 더 나을지 모른다.  우리 사이에 가능할 수 있었을 것에 대한 어렴풋한 감지.  가슴 떨리는 감지.  그것은 회한만을 가져올 뿐이다.  회한이 무슨 소용인가?  그것은 /아무것도 되돌려주지 않는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되찾을 수 없다."    (p.485~486)

 

이제 내 얘기를 마칠 때가 된 것 같아.  조금 길었지?  하지만 네가 이 소설에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뻐.  그나저나 작가는 의사인데 뭐하러 소설을 쓰느냐구?  글쎄, 내 생각에 그는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너무나 많을지도 모르지.  가슴 속에서 흘러 넘치는 애기들을 아마 주체할 수 없었을 거야.  독자들에겐 더없이 반가운 일이지만 그는 꽤나 힘들지 않았을까?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할 길은 없다.  가령 이 순간이 그렇다.  내 어머니와 내가 오랜 세월 동안 같이했던 수많은 순간 중에서, 가장 빛나기도 하고 가장 큰 울림으로 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은 눈부신 햇살이 그녀의 피부에 반짝거릴 때, 어머니가 고개를 내려뜨린 채 어깨 너머로 나를 올려다보며 알라께서 얼마나 나를 착하고 강하게 만들었는지 아느냐고 묻는 모습이다."    (p.535)  

 

내 기억력이 조금 더 좋았더라면, 그리고 내가 말을 잘하는 달변가였더라면 네게 이것보다는 더 재미있게 말해줄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쉽네.  하지만 네가 만약 이 책을 읽게 된다면 그때는 너와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 거야.  물론 그렇게 되리라고 나는 기대하고 있어.  어쩌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가슴에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지도 몰라.  오늘 내가 들뜬 모습으로 네게 들려주던 이 순간의 기억들도 네 가슴에서 조용히 편집되고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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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셉을 잡아라 - 모든 기획자를 위한 닌텐도식 아이디어 정리법
다마키 신이치로 지음, 이랑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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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언제부턴가 우리는 '컨셉(concept- 정확한 외래어 표기로는 콘셉트)'이라는 단어를 일상어처럼 쓰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처음에는 마케팅이나 기획, 또는 디자인 계통에서 그들만의 전문용어로 쓰였음직한 이 단어가 요즘에는 어떤 상황에서건 무시로 쓰이고 있다.  마치 과학용어인 DNA가 일상어처럼 쓰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의 저자인 다마키 신이치로는 '컨셉이란 세상을 보다 좋게 바꾸는 동시에 당신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나는 이것도 다분히 자의적인 정의라고 이해한다.  사실 말이란 어떤 상황에서 쓰이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닌텐도 Wii를 직접 기획했던 저자는 자신의 경험과 다년간의 연구를 통해 깨달았던 컨셉의 힘과 영향력에 대해 이 책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의 필요성은 업무 연관성이 있는 독자에게 한정될지도 모른다.  어떤 필요에 의하지 않으면 가독력도 떨어지고,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어떤 깨달음도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 독자로서의 내가 리뷰를 쓰고자 하는 이유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컨셉의 위력을 이 책을 통하여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컨셉은 어디에서든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게임기를 만들려는 회사는 물론 당신이 시작하려고 마음먹은 어느 곳에서도 컨셉이 필요합니다.  컨셉은 다양한 현장에서 출발점에 서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죠.  이를테면 혁신적인 상품이나 서비스를 기획하려는 사람, 새로운 회사를 세워서 사업 방향을 잡으려는 사람, 회사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은 사람, 좋은 아이디어를 내보라는 상사의 요구에 막막한 사람 등."    (p.11~12)

 

이 책에서 저자는 좋은 컨셉을 만들기 위한 준비 도구로 종이와 펜, 함께 생각할 좋은 동료들을 들고 있다.  저자는 방에서 혼자 즐기던 게임을 가족들이 함께하는 거실로 이끌어내는 획기적인 컨셉을 세움으로써 닌텐도 Wii를 전세계적인 히트 상품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이면에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고 그들의 need에 맞추려고 했던 저자의 노력이 한몫했다.  제품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우리는 간혹 자신만의 아집과 편견에 빠져 결국에는 처참한 실패로 마감하는 사례를 종종 본다.  사업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도 이와 다르지 않다.  컨셉 워크란 결국 타인을 이해함으로써 내게 속한 아집을 조금씩 지워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타인을 바꾸는 것은 법칙, 과거, 사회 구조를 바꾸는 것보다는 간단하고 실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타인을 바꾸는 것 역시 힘들다.  타인이라는 표현 속에는 언제나 경쟁사라는 개념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업계가 나쁘다, 경쟁사가 너무 강하다, 라고 한탄하는 일은 쉽지만 실제로 업계나 경쟁사를 바꾸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지 상상이 갈 것이다."    (p.244) 

 

 저자는 우리가 컨셉을 잡기 위한 다섯 단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경쟁사의 부러운 점, 우리 회사의 부족한 점, 업계에 대한 불만 늘어놓기.

둘째, 동료들이 발언한 불만사항 중에 숨겨진 정보나 생각을 끌어내 불만을 최대화할 것.

셋째, 지금까지 나온 불만과 생각들을 비슷한 주제들로 묶어서 그룹화할 것.

넷째, 그룹들 중에 우리가 나아가고 싶은 방향으로 화살표를 그릴 것.

다섯 째, 나아가고 싶은 방향(원하는 컨셉)의 사이사이에 문제점은 없는지 다시 한 번 불만과 불안감을 정리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것.

 

우리가 어떤 일의 시작 단계에서 하는 컨셉 워크란 결국 타인을 이해하고,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일 것이다.  타인의 불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자세가 어찌 컨셉 워크에서만 필요하겠는가.  우리의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것도 결국에는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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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평범한 말 한마디가 사람들의 마음을 적시기도 합니다.

다들 보셔서 알겠지만 고려대 게시판에 붙었던 한 학생의 대자보가 연일 이슈가 되고 있더군요. 저도 보았습니다.  특별하지 않은, 우리가 늘 듣고 말하는 <안녕하시냐?>는 한마디의 말에 저도 모르게 울컥했습니다.  왜였을까요?

 

8,9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저는 어쩌면 대자보 문화에 익숙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 당시에 제 주변의 친구들은 열성적으로 투쟁에 동참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그들과 의견을 나누고, 서로 위로하며, 때로는 울분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저도 이제 나이가 들고 보니 우리는 그때 어떤 사상적 연대보다는 같은 세대를 사는 젊은이로서의 일체감, '하나'가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에 더 열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들지 않는 젊음이란, 오염될 수 없는 젊음이란 언제나 외로운 법이고, 그 때문에 더 많은 위로와 관심이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의 젊은이들은 다들 뿔뿔이 흩어진 채, 각자의 방에서 본인의 외로움을 스스로 풀어야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이기주의라고 폄하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 또 누구는 사회적 문제에 저항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리고 국가 권력과 기성세대의 무관심이 너무도 높은 장벽으로 그들을 구속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다만 외로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외로움이 임계점에 다다랐을 뿐입니다.  <안녕하시냐?>는 한마디에 왈칵 울음을 터뜨릴 수 있는 것이 젊음입니다.  그 울음을 같이 보듬을 수 있는 것도 젊음입니다.  그렇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어려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어찌 기성세대의 눈으로 그들을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철부지 어린애라구요?  천만에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제 그들의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서로를 감싸주고, 때로는 연대하고, 같이 울음을 울어주지 못한다면 세상은 그야말로 사막처럼 변할 것입니다.  저는 그걸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한 학교에 붙었던 어느 학생의 자필 대자보보다 그것을 계기로 그들이 연대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 힘으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기를 또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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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 하십니까?>

어제 불과 하루만의 파업으로 수천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다른 요구도 아닌 철도 민영화에 반대한 이유만으로 4,213명이 직위해제된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본인이 사회적 합의 없이는 추진하지 않겠다던 그 민영화에 반대했다는 구실로 징계라니. 과거 전태일 청년이 스스로 몸에 불을 놓아 치켜들었던 '노동법'에도 "파업권"이 없어질지 모르겠습니다.

정부와 자본에 저항한 파업은 모두 불법이라 규정되니까요. 수차례 불거진 부정선거의혹,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이란 초유의 사태에도, 대통령의 탄핵소추권을 가진 국회의 국회의원이 '사퇴하라'고 말 한 마디 한 죄로 제명이 운운되는 지금이 과연 21세기가 맞는지 의문입니다.

시골 마을에는 고압 송전탑이 들어서 주민이 음독자살을 하고, 자본과 경영진의 '먹튀'에 저항한 죄로 해고노동자에게 수십억의 벌금과 징역이 떨어지고, 안정된 일자리를 달라하니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비정규직을 내놓은 하수상한 시절에 어찌 모두들 안녕하신지 모르겠습니다!

88만원 세대라 일컬어지는 우리들을 두고 세상은 가난도 모르고 자란 풍족한 세대, 정치도 경제도 세상물정도 모르는 세대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1997~98년도 IMF 이후 영문도 모른 채 맞벌이로 빈 집을 지키고, 매 수능을 전후하여 자살하는 적잖은 학생들에 대해 침묵하길, 무관심하길 강요받은 것이 우리 세대 아니었나요? 우리는 정치와 경제에 무관심한 것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단 한 번이라도 그것들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고 목소리내길 종용받지도 허락받지도 않았기에, 그렇게 살아도 별 탈 없으리라 믿어온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수조차 없게 됐습니다. 앞서 말한 그 세상이 내가 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만 묻고 싶습니다. 안녕하시냐고요. 별 탈 없이 살고 계시냐고요. 남의 일이라 외면해도 문제없으신가, 혹시 '정치적 무관심'이란 자기합리화 뒤로 물러나 계신 건 아닌지 여쭐 뿐입니다. 만일 안녕하지 못하다면 소리쳐 외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것이 무슨 내용이든지 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묻고 싶습니다.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  

 

 고려대 경영08 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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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12-14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말 한마디에 왈칵합니다. 안녕하십니까라면 그래도 덜했을 텐데 "들"이라는 한 글자가 제 눈에 자꾸 밟히네요....

꼼쥐 2013-12-17 14:0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그랬습니다.
너무도 무관심한 채 소외되었던 개개인들이 그 한마디에 다들 마음의 벽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oren 2013-12-14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이 대자보를 읽었을 때만 해도, 대한민국 청년들의 기백이 겨우 이런 정도의 나약한 질문밖에 내놓지 못할까 싶어 연민조차 느껴질 정도였는데, 문득 눈으로 뒤덮힌 온통 꽁꽁 얼어붙은 세상을 폭주하는 '설국열차'의 꼬리칸에 올라탄 승객들이 겹쳐 떠올랐습니다. 마주하고 있는 여러 현실들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겨우 '뒤켠에서 모기만한 목소리로 웅성거리는 듯한' 글밖에 써붙이지 못할까 싶어 짠한 마음부터 앞서네요...

nama 2013-12-15 10:02   좋아요 0 | URL
이만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참으로 어려운 세상입니다.

꼼쥐 2013-12-17 14:07   좋아요 0 | URL
그것이 기성세대가 잘못 가르쳤기 때문인 것 같아요. 권력에 대항하며 자랐던 기성세대가 그 대가의 혹독함을 경험하면서 자식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하고 바랬겠지요. 하여, 체제에 순응하는 방법만 가르친게 아닌가 싶어요.
 
서천석의 마음 읽는 시간 - 때론 삶이 서툴고 버거운 당신을 위한 110가지 마음 연습
서천석 지음 / 김영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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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책을 고를 때 깊은 고민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어떤 장르의 책을 읽을 것인가'에서부터 '지금 내가 그 책을 읽어낼 수 있을까?', '살만한 가치가 있는 책인가?' 등 한 번 의문에 빠지기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이 쏟아집니다.  그러다 종국에는 '왜 읽는가?'의 대답하기 곤란한 근원적 질문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책 한 권 고르려다가 숫제 철학자가 되어야 할 판입니다.

 

그렇다고 매번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소설이나 시집과 같은 문학작품은 하나하나 따지기보다는 오히려 너무도 쉽게 구매를 결정하곤 합니다.  그렇게 샀던 책 중에는 쓰디 쓴 후회로 끝나는 경우도 있고, 의외의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이 환호성을 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도 인문학 서적이나 문학작품은 비교적 나은 축에 속합니다.  문제는 실용서나 자기계발서에 있습니다.  생각도 않고 덥석 집었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입니다.

 

이 책 <서천석의 마음 읽는 시간>은 대부분의 인터넷 서점에서 에세이로 분류되어 있더군요.  '옳다구나.'생각했습니다.  제목도 마음에 들고 단청무늬를 연상케 하는 화려한 겉표지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책의 내용은 제 생각과 많이 달랐습니다.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책의 내용이 좋고, 나쁨을 따지는 게 아닙니다.  정신과 전문의인 저자가 MBC 라디오 <서천석의 마음연구소>에서 청취자와 나눴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오히려 실용서나 자기계발서의 범주에 속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이왕 손을 댄 것이니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다른 분은 어떤지 몰라도 이런 책을 읽을 때는 주의할 게 있습니다.  책의 내용이 좋다고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읽다가는 어느새 책의 마지막 쪽을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다 읽었다.', '뿌듯하다.', '좋았다!'하는 느낌은 수도 없이 들겠지만 정작 책의 내용은 변변히 생각나는 게 없습니다.  우리가 실용서를 읽는 까닭은 실생활에서 써먹자는 데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럴 때면 마치 제가 법정에서 판결문을 읽은 듯한 느낌이 들곤 합니다.  내용도 모른 채 다 읽었다는 행위로서의 결과만 남았으니까요(이게 뭡니까. 우라질!).  물론 제 경험입니다.  하여, 요즘에는 제가 필요한 부분에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하며 읽습니다.  때로는 욕심만 과하여 밑줄을 긋는 부분이 자꾸 늘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밑줄 그은 부분만 재차 읽으면서 지워야 할 부분은 냉정하게 지워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필요치 않지만 앞으로 필요할지도 모르니 미래를 대비하여 기억하는 게 좋겠다구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밑줄을 그을 필요도 없습니다.  책 한 권을 통째로 외우면 되니까요.  뇌의 용량이 문제이겠지만 말이죠.

 

이 책의 저자인 서천석 님은 정신과 전문의답게 삶의 난관에 부딪힌 사람들의 여러 고민에 대하여 때로는 명쾌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대안을 제시합니다.  작심삼일로 끝나는 저질 의지에 대하여,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방법에 대하여,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하여, 면접장에서 긴장을 없애는 방법에 대하여 등 우리의 일상에서 빈번하게 마주치는 갖가지 문제들에 대해 세심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꼼꼼히 읽는다고 읽었는데도 생각나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이제는 제가 밑줄을 그었던 부분을 옮겨 적을 차례입니다.  이 책을 읽었던 다른 분들의 생각과는 많이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분들과 공감하기 위해 430쪽에 이르는 책을 통째로 옮겨 적기에는 독수리 타법의 제 능력으로는 무리가 따를 듯합니다.

 

"물론 이런 질문도 가능합니다.  꼭 용서를 해야만 치유가 가능하냐고.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형참사를 당한 사람들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면 빨리 용서한 사람일수록 더 나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알고 보면 희생자가 하는 용서란 진짜 용서이긴 어렵습니다.  그저 과거를 벗어나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자기의 존엄성을 세우려는 몸부림입니다.  이처럼 용서는 자기 자신을 위한 행동이지 내게 피해를 입힌 상대를 위해서 하는 행위는 절대 아닙니다."    (p.64)

 

"혹시 상대가 뭘 바라고 있다면 그냥 그것을 선물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또 받고 싶은 선물이 있다면 굳이 상대의 정성을 시험하지 마시고 몇 가지 정확히 말해주세요.  그래야 선물 주고받기의 시간이 불안과 실망이 아닌 행복으로 채워질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p.155)

 

"상대의 감정을 충분히 들어주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는 상대에게 내 감정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내 감정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먼저이다 보니 상대의 감정을 들어줄 여유가 없는 것이죠.  하지만 상대의 감정을 들어줄 때 내 감정 역시 상대에게 전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p.298)

 

"어느 길을 선택하든 그 길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 결과를 결정합니다.  따라서 선택을 할 때는 어느 쪽이 내가 더 나 자신을 몰입시킬 수 있는가에 기준을 두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선택한 방향에 충분히 몰입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좋은 선택을 한 겁니다."    (p.331)

 

"똑같아 보이는 습관도 그 속에 숨어 있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찾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실험을 해보는 것입니다.  막연히 의지를 강조하는 것은 우리를 자책감에 빠뜨릴 뿐입니다.  그보다는 습관의 출생 비밀을 알아내는 탐구정신이 나쁜 습관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줄 것입니다."    (p.334)

 

어떻습니까?  내가 왜 이 책을 실용서에 편입시키려는지 감이 잡히시나요?  제가 밑줄을 그었던 부분은 이보다 한참이나 더 많았습니다.  제가 구식이라 그런지 이렇게 타이핑을 치는 것보다는 손으로 직접 적을 때 기억도 더 잘 되고 좋더군요.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다 옮기기에는 제가 힘에 부치는군요.  기억하세요.  실용서는 법정의 판결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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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긴다는 것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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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여백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어딘가 빈 구석이 있는, 세상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바람과 같은 사람이 좋다.  계절로 치자면 겨울과 같은 사람이다.  하여, 언젠가부터 나는 겨울을 좋아하게 되었다.  낙엽이 지는 것이 아니라 여백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고 쓰셨던 박경리 작가처럼 삶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믿었다.  세월이 더해질수록 여백이 드러나는 삶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삶의 여백은 겨울의 눈밭이요, 지고지순한 '자유'의 등가어이다.  조르바가 그랬듯 인간은 곧 자유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유를,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사랑하는 일일 것이다.  나는 요즘 내 삶과는 하등의 상관도 없는 지식의 짐들이 하나씩 지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아는 게 힘'이라는 젊은 시절의 구호는 나이가 들며 차츰 흐릿해진다.  즐거운 일이다. 

 

이윤기 님의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를 읽었다.  어제, 오늘 중국발 미세먼지로 한반도가 몸살을 앓는 마당에 한가하게 책 나부랭이를 붙잡고 앉아있는 것도 물색없는 짓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쩌랴.  책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 것을.  게다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윤기 작가의 빼어난 글솜씨에 어찌 빠져들지 않을 것인가.  우리나라 번역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이윤기 작가.  내가 작가의 글을 처음 읽었던 것은 모르긴 몰라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의 글이 어찌나 자연스럽고 매끄럽던지 번역서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작가로 인해 행복했었다.

 

"'글 읽기'에 관한 한 나는 황희 정승만큼 행복한 사람이다.  하지만 '글쓰기'에 관한 한 행복하지 못하다.  길고 짧은 소설을 차례로 써내고 있지만 조금도 행복하지 못하다.  나는 큰 빚을 진 사람이다.  나에게 '글 읽기'의 행복을 안겨준 많은 작가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이다.  부모의 사랑을 아래로 갚듯이 이 빚은 독자에게 갚아야 한다."    (p.36)

 

이 책이 나오기 전 나는 작가가 쓴 산문집은 모두 읽었었다.  <이윤기가 건너는 강>과 <무지개와 프리즘>, <시간의 강>과 <어른의 학교> 등.  나는 그들 산문집 중에 지금은 품절이 된 <무지개와 프리즘>을 유난히 좋아했다.  못 쓰는 글이지만 리뷰도 썼었다 (http://blog.aladin.co.kr/760404134/5191455).  불과  2년 전의 일이다.  그 책에서도 작가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작가 자신에 대해 말했었다.  '책 읽기'를 좋아하여 일본어와 영어를 배웠다는 작가에게 번역일은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작가는 이 책에서 모국어로서의 한글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곳곳에 드러내고 있다.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이 책을 읽기 시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을 느꼈었다.  나의 착각이겠거니 생각하며 읽었는데 웬걸 작가가 그동안 썼던 여러 책들에서 발췌한 것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게 아닌가.  책에 대한 실망에 앞서 좋아하는 책도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읽지 않는, 되는 대로 설렁설렁 읽고는 쉽게 치워버리는 나의 잘못된 독서습관이 부끄러웠다.  한 권의 책을 번역하기 위해 닳도록 사전을 뒤졌을 작가의 치밀함이 눈에 선하다.

 

"외국어 번역 공부, 나는 참 어렵게 했다.  많이 고통스러워하고, 많이 절망했을 뿐, 한 번도 만족을 경험하지 못했다.  길이 보이지 않는 곳을 많이, 그리고 오래 걸었다.  판화가 이철수는 길을 잃고 오래 걸으면 그게 곧 길이 되는 수도 있다고 위로하고, 시인 강연호는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고 격려하지만 그 위로와 격려는 들을 때마다 슬프다."    (p.116)

 

번역가 김석희 님도 그의 책 <번역가의 서재>에서 말하길 '지금도 일감을 앞에 두면 막막한 기분에 휩싸인다'고 했다.  글을 쓰는 일, 책을 번역하는 일은 결국 인간의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변화시켜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바꾸는 일일 터이다.  천지개벽의 주체인 것이다.  한 편의 글을 너무도 쉽게, 낙서하듯 쓰는 나의 태도는 과연 정당한가.

 

어제, 그제 중국발 미세먼지로 몸살을 앓았던 한반도는 이제 얼마쯤 제 모습을 되찾고 있다.  육신을 구제하기 위한 삶의 찌꺼기도 이 땅에 사는 모든 생명체에게 저토록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깊이 사유하지 않은 영혼의 찌꺼기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병들게 할 것인가.  짧은 글이라도  허투루 쓸 게 아니다.  정성을 다하여 책을 읽고, 깊이 사유하여 쓴 글이었음에도 작가는 자신의 글을 부끄러워하는데 나는 도통 부끄러움이 없는 인물이다.  반성하며 이 글을 쓴다.  오랜만에 보는 맑은 하늘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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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3-12-06 21:18   좋아요 0 | URL
저도 이윤기님의 글이 좋아서 그의 작품을 골라 읽었던 때가 있습니다.
꼼쥐님의 리뷰를 읽으니, 저도 빨리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꼼쥐 2013-12-07 20:12   좋아요 0 | URL
이윤기님의 글은 정말 좋죠? 왜 그렇게 빨리 가셨을까요? 오래도록 그분의 작품을 읽을 수 잇다면 좋았을 텐데....발췌본이기는 하지만 잘 가려 뽑았던 듯합니다.

김토끼 2013-12-22 20:43   좋아요 0 | URL
꼼쥐님 리뷰에서 정성이 느껴져요. 작고하신 이윤기 선생님에 대한 사랑도 느껴집니다^^

꼼쥐 2013-12-24 14:1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정말 좋은 작가는 너무도 쉽게 떠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