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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사람에게

잊혀질 과거를 덧씌우는 일은

얼마나 잔인합니까

당신,

나는 빈 전화에 나의 목소리를 전하며

고목처럼 질긴 이 잔인함에

한없이 자책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떠난 후에 알게 되는 것,

그 미래형의 단어를

남들은 다 알고 있는 그 의미를

첫닭이 울기 전에

아니라고 아니라고 아니라고

세 번을 부정하는 못난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세수도 거른 아침은

또 다시 바쁜 저녁을 맞을 테지만

현재형의 사랑은 영영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진실과 마주할 밤이 너무 두렵습니다.

 

 

 

아주 오래된 노트를 뒤적이다 낙서처럼 끄적인 시 한 편을 발견했다.

사랑의 경험도 많지 않은 나로서는 선명하게 그 기억이 떠오를만 하건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찾을 수가 없었다.

'미시 경제학' 노트에 적힌 이 시의 말미에는 이어 쓰기 위해서 적어 놓은 여러 단어들만 난무할 뿐 제대로 이어진 문장은 없다.

이렇게 답답할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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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나의 이야기일 수도, 또는 글을 읽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의 탓으로, 또는 남의 탓으로, 또는 원인을 찾기 어려운 불가항력으로 어려움에 직면하곤 한다.  그 어려움이 경중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려움을 겪는 당사자에게는 하나의 어려움일 뿐이지 그 무게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을 때가 많다.

일단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면, 시간의 경과에 따라 반응하는 행동양상도 변한다.

그것은 어쩌면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과 비슷할지 모르겠다.

퀴블러 로스가 말한 죽음의 5단계에 의하면 부정(Denial), 분노(Anger), 타협(Bargaining), 우울(Depression), 수용(Acceptamce)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어려움에 직면하였을 때, 나의 경험으로는 이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느끼곤 한다.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럴 리가 없어!'라고 부정하며, 조금 지나면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생각으로 분노하게 되고, 이 상황에서 주변 환경과 타협함으로써 다른 돌파구가 있을 것이라는 미련을 두기도 한다.  결국 이도 저도 가능성이 없으면 극심한 슬픔에 빠지게 되고, 그런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종국에는 현실을 수용하기에 이른다.  물론 순서가 뒤바뀌거나, 단계를 뛰어 넘을 수도 있겠고, 미처 수용 단계에 이르기도 전에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끝까지 영위하려는 사람에게 있어 이러한 과정이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본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어려움을 빨리 극복하고, 새로운 삶에 적응하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 아니겠는가.

나의 경험을 되짚어 보면, 극도의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감정에는 오직 자만심(또는 허세)과 오기만 남는다는 것이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 허세를 부리고, 다른 사람의 충고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오기로 똘똘 뭉쳐져 있는 그 사람을 주변의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비난과 멸시로 그 사람을 대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상황을 역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부풀리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약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오기를 부릴 수밖에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만심이나 오기는 주변에 있는 가까운 사람에게도 마음의 상처만 줄뿐, 어려움에 처한 당사자에게 정말 필요한 위로와 협조를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그리고 자만심과 오기만 남았으니 그에게는 위로와 기도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성인군자는 주변에 존재하지 않는다.  비난과 멸시가 심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은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이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어려움에 대처하는 본인과 주변 사람들의 인식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본인은 힘들더라도 빨리 수용하고 자신을 최대한 낮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주변 사람들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일관하더라도 그를 가여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조건을 갖추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주변의 협조에 의지하는 것보다 본인의 마음을 통제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내가 마음을 돌려 나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없더라도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 태도가 절실하다.  왜냐하면 나를 도와줄 의무가 그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마음이 변하는 순간 새로운 희망이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피어나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것이 살아가는 방식이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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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의 일이다.

결혼 10년 만에 첫 아이를 얻고 그 아이를 위해 100일 기도를 온 어떤 부부가 있었다.

그때 스님이 하신 말씀은 이랬다.

  "자기 자식이라고 어떻게 저리 편애할 수 있을까?"

나는 순간 당황했다.

당시 나는 결혼도 하지 않은 학생의 신분이었지만 오히려 스님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나는 속으로 '당연한 거 아냐? 스님도 참 웃기는 사람이네'하고 생각했었다.

 

곧 있으면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 중 하나인 설이 다가온다.

즐겁고 행복해야 할 명절 모임에서 싸움과 분란이 일어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대부분은 자주 만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이해의 부족이 원인이지만 가깝다고 느껴서 무심코 내뱉은 말이 빌미가 되는 경우도 있다. 부부간에도 사소한 말다툼이 심각한 불화로 진행되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들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개인의 영역을 보장해 주지 않는 우리의 문화에도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우리가 유지하는 모든 관계가 원만하게 유지되기를 바란다면 필수적으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각각의 개인에게 반드시 보장되어야 하는 불가침의 영역을 존중하고 부당하게 침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공동체 문화에서 성장한 우리가 개인의 사적 영역을 인정하고 보장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단순히 가깝다는 이유로, 연장자라는 이유로, 또는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개인을 옭죄는 일은 삼가야 한다.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는 일.

무관심으로 일관하여 데면데면한 관계가 되어서도 곤란하지만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 상대방에게 간섭이나 모욕으로 비춰진다면 그 또한 곤란하지 않을까?

부모와 자녀, 아내와 남편, 가까운 친지 간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행위가 바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고 진정한 '사랑'이다.

 

스님의 말씀은 '편애'가 집착이나 간섭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어슴푸레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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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받고 주는' 관계가 아닌 '주고 받는' 관계이다.
'받고 주는'관계는 거래일 뿐이고 결코 사랑이 아니다.
먼저 주는 곳에는 사랑이 싹트고,
먼저 받으려는 곳에는 욕심이 자란다.
마음의 크기는 항상 같아서
욕심을 키우면 사랑이  작아지고
사랑을 키우면 욕심은 점점 작아진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거래에 익숙해져 사랑도 받은 후에 주려 한다.
처음부터 잘못된 방법으로 시작된 사랑이 어찌 성공할 수 있으랴.
먼저 주지 않으면 사랑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를
나의 방식만 고집하다 우리는 매번 사랑에 실패한다.
그리고 실패의 책임을 늘 남의 탓으로 돌린다.
진실로 사랑을 원한다면 나의 방식이
거래인지 사랑인지 되짚어 볼 일이다.

=========나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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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크릿>이후 봇물처럼 흘러나온 자기계발서는 이제 서점의 한 구석을 차지하던 옛모습은 간 데 없고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인기 코너가 되었다.

자기계발서가 이렇게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은 차치하더라도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책이 선을 보이는 작금의 상황에서 나에게 맞는 책을 고르는 일도 쉽지 않을 뿐더러 자신이 선택한 책에서 무엇을 취할 것인가의 문제도 새로운 고민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다.  우리가 자신의 여가시간을 쪼개어 책을 읽을 때에는 투자한 시간만큼의 효과를 거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기계발서를 두루 섭렵했다 자신할 수 없는 내가 '자기계발서는 왜 읽는가', '자기계발서는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하여 짧은 메모라도 남기고자 하는 것은 내가 이런 문제로 고민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누군가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지 않을까 하는, 나의 지나친 오지랖 때문이다.

자기계발서는 저자의 의도하는 방향에 따라 그 내용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사람들의 잘못된 습관이나 행동, 계획과 방법, 개인의 능력과 한계 등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개선하는데 주력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의 지나친 욕심, 불안감, 자아상실 등 내면의 문제를 다루는 책들도 있다.  최근에는 둘을 적절히 통합한 책들도 있지만 그 내용의 깊이가 떨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이렇게 더욱 다양한 종류의 자기계발서들이 출판되고 현란한 광고로 독자들을 유혹할수록 독자들의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킨다.

사실 자기계발서는 그다지 재미도 없고, 커다란 감동을 주는 것도 아니며, 문학서적에 비해 가독력도 떨어지는데 우리는 왜 자기계발서에 열광하는가?

그 이유는 현대인의 지나친 경쟁의식에 있다.  나의 능력을 향상시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싶은 욕망, 누군가로부터 쫓기는 듯한 불안감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하는 바람은 현대인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갖게 되는 불치병이다.  이러한 공통심리를 교묘히 파고든 책이 자기계발서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시험을 앞둔 학생이 게임에 몰두하는 것이나, 신입사원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것을 볼 때 그들을 머리가 나쁘다거나,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아니면 게으르다고 평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들은 단지 일의 우선순위를 모를 뿐이다. 

이렇듯 어떤 일에 있어 우선순위는 성적이나 기업의 손익, 개인의 물질적 풍요와 빈곤 등 그 결과가 상이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일정 기간을 잘라서 바라본 결과일 뿐 능력이나 태도의 차이라고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러나 정해진 기간을 인지하고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것은 분명 개인의 능력이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항상 정해진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무엇을 먼저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100'이 될 수도 '0'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불행히도 개인의 성공과 실패를 평가함에 있어 우리는 그 결과에만 집착할 뿐 그 시간에 그 사람이 무엇을 하였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일의 우선순위를 잘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경험에 의존하는데 단 한 번의 인생을 사는 우리로서는 당연하게도 어떤 일에 허둥대거나 중요한 일을 앞에 두고도 하찮은 일에 몰두하게 된다.  우리는 분명 인생이라는 기간 내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또는 자신이 정한 앞으로의 기간 안에 무엇을 먼저 처리하고, 원하는 결과를 어떻게 얻을 것인가와 같은 우선순위와 방법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자기계발서'를 읽어야 한다.  분명한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기계발서'가 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 역할은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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