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는 일마다 실패하였다는 한 사람을 만났다.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남들처럼 잘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던 그는 필요하다면 전국 안 가본 곳이 없고, 안 만난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래도 여전히 자신의 태도에서 확실히 변했다고 자신있게 내세울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
한동안 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나는 본인에게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한마디로 제 의지가 부족한 탓이겠죠."라고 말하며 체념한듯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잘못된 점을 인식하고 자신의 사고를 행동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나를 포함한 대다수 일반인에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거창하게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의  '인지 부조화론'을 들먹이지 않아도 나의 사고와 행동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는 방법, 즉 나의 사고와 행동을 일치시키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단순히 자신의 빈약한 의지력을  탓해야 할까?
오래 전부터 내가 생각했던 인지 부조화 현상은 일종의 '문명병'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고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비하는 것이 자신의 사고를 지배하게 되었다.  과거의 원시사회에서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미래'라는 단어가 현대인에게는 문신처럼 각인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나의 결심이나 행동 변화에 있어 미래형의 언급은 치명적인 약점을 갖게 마련이다.  '나는 달라지겠다' 또는 '나는 달라질 것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켜질 것이라 믿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말 속에는 미래의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현재와 미래에는 아무리 그 간극이 미세하다고 하더라도 시간상의 간격이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그 시간의 벌어짐에서 우리는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약간의 유예를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것이 자신의 '의지 부족 '이라 인식하게 되고 한없이 자책하게 되는 빌미로도 작용한다.
종국에 나는 하나의 결심마저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바보'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은 어쩌면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지속될지 모른다.
관건은 나의 결심과 실천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상의 간극을 없애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에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매순간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한 시간 전의 '나' 또는 방금 전의 '나'와 현재의 '나'는 느끼지 못했어도 분명 달라져 있다.
이러한 사실을 확연하게 깨닫는 것, 현재의 나는 달라져 있음을 인식하는 자체가 변화의 출발이다.  우리는 매순간 변화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렇게 인식하는 순간 나의 결심과 행동 사이의 간극이나 부조화는 소멸되고 만다.
인식의 틀을 미래가 아닌 현재에 맞추는 행위는 의지가 아니라 각성의 문제이다.

나의 생각을 그에게 말했을 때, 그의 얼굴에 피어나는 환한 미소를 볼 수 있었다.
찰나의 짧은 순간에도 그는 변해 있었다.
매순간 변화하는 사람들이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우습지 않은가.
변화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연현상이다.  우리가 의지를 갖고 행동할 때만 선별적으로 발생하는 특별한 사건이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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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을 차근차근 살펴보면 옛사람의 생각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생각의 방향이나 영역 면에서 일정한 틀을 유지하는 것은 굳어진 화석처럼 반복되는 관습 속에는 행동과 더불어 생각도 대물림되고 있음이다.

책에 비유하자면 초판에서 내용만 살짝 바뀐 개정증보판 정도라고나 할까?

이런 까닭에 과학의 놀라운 발전에 비해 인문학의 수준이 늘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진실이라고 믿어온  생각들은  여전히 진실이라 믿고 따르게 되고, 타인의 생각이 내 생각인 양 수용하는 데 너무도 익숙하기 때문이다.

생각의 스펙트럼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행위, 즉 '의심'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은 잊혀진 지 오래다.  그것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혀지고 있다.
그러므로 √3이 무리수임을 증명하기 어렵듯이 우리가 잘 알고 있고 당연하다 여겼던 것들은 오히려 설명하기 어렵다.  간혹 우리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잘못된 내 생각의 몇몇을 바로잡아 본다.

 

1. '기적'과 '절망'의 거리는 우리의 생각처럼 멀지 않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생각보다 일찍 오면 '기적'이 되고, 조금이라도 늦게 오면 절망이 된다. 

    우리는 그 거리를 알지 못한다.

2. 시간은 항상 일정한 속도로 흐른다.

   우리는 가끔 게으름으로 뻗대면 시간이 천천히 흐를 것이라 믿는다.

3. 중독은 자신이 싫어하는 대상과 마주할 용기가 없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리는 중독이 좋아하는 대상으로 끌리는 현상이라 이해한다.

   중독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을 끊는 것이 아니라 싫어하는 것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가능하다.

4. 사랑을 지속하기 어려운 것은 일상에서 비이성적 시간이 차지하는 비중이 과도하게 커졌기 때문이다.

   이성과 감정은 늘 균형을 유지하려는 속성이 있다.

5. 우리는 돈을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을 넘어선 탐욕을 미워하는 것이다.

6.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순간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것은 분산된 가능성이 한곳으로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것은 추락할 여력이 남아있다는 뜻이다.

   바닥을 딛지 못하는 허공에서 우리는 희망을 말하곤 한다.

7. 사랑에 욕심이 개입하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헌신할 것을 강요한다. 

   일말의 욕심도 없이 사랑할 수 있는 경우는 '신의 사랑'이 유일하다.

8. 버릇없는 행동은 예절을 지켜야 하는 까닭을 납득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

   우리는 그의 무례함만을 보고 있다.

9. 우리는 웃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웃고자 하는 그의 노력을 부러워 하는 것이다.

   웃음에는 항상 노력이 따른다.

10. 삶이 두려울 때는 현실이 어려울 때나 행복할 때 둘 다에 해당한다.

    우리는 현실이 어려울 때만 삶이 두렵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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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시장이 넓으면서도 참 좁구나'라고 생각하는 하루였다.

오후에 알지 못하는 어떤 아주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용인 즉 멀리 군산에서 올라왔다며 나를 꼭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를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에 만나 뵙기 전에는 말씀드릴 수 없노라며 완강히 버티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약속을 하고 집을 나섰다.

잘 차려입은 30대의 여인.

남편 몰래 여유자금 2000만원으로 시작한 주식투자는 곧 바닥을 보였고, 지인들로부터 빌린 돈으로 원금을 회복하려는 욕심에(어쩌면 원금보다 더 큰 이익을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그동안 여러 경로로 알게 된 주식 전문가(소위 '고수'라 불리는)의 정보를 받아 다시 시작한 주식거래, 잠시 원금을 회복하고 남을 정도의 돈도 벌어 보았지만, 조금만 더하고 그만두자 했던 것이 빌린 돈마저 잃고 말았단다.

그러기를 두어 차례 반복하니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 자신이 갚아야 할 빚이 2억대에 육박했더란다.  자신은 미대 동양화과를 졸업했고, 학원도 운영했었으며, 남편은 선생님으로 재직중이라 했다.  돈을 갚을 여력도, 남편 볼 면목도 없어 유서를 쓰고 나왔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다시 집에 들어가니 시댁에서 빚을 얻어 자신이 빌린 돈을 갚았더란다.  지금은 자신의 친정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을 거들고 있다 했다.  주식투자로 원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다면 원이 없겠다 했다.  그리고 자신이 거래하던 증권사의 직원을 통해 나의 연락처를 알게 되어 전화를 했노라고.

방법 좀 일러 달라며 매달렸다.

나는 들려줄 말이 없었다.  그녀의 입장은 일견 이해 못하는 바가 아니지만, 그리고 오죽했으면 그 먼 곳에서 예까지 찾아왔을까 동정심이 들기도 했지만, 나는 진실로 그녀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나라고 처음부터 수익만 발생했겠는가.  단지 여유자금이 많지 않았던 나는 그리 많지 않은 돈을 잃은 후, 주식 관련 서적과 챠트의 분석에 매달렸다.

주변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람을 소개할테니 만나서 배우면 어떻겠느냐 권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럴 마음이 없었다.  '남의 옷은 나의 몸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내게 맞는 방법을 찾고자 노력했다.  당시 시중에 출판된 주식 관련서적의 대부분을 읽었고, 새벽까지 챠트 분석에 심혈을 기울였다.  '제발 그만 자라'는 아내의 잔소리를 수도 없이 들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전업투자자가 되었다.

나이 들어 육체적으로 약해졌을 때 소일거리는 되겠다 싶어 시작한 주식투자가 직업으로 변한 것이다.  그동안 이런저런 곳에서 고액의 수강료를 지불하고 주식을 배웠지만 많은 금액의 손실을 보았다며, 자신을 가르쳤던 사람을 비난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자연과학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는 절대적 법칙을 찾기 어렵다.

주식시장은 더욱 그러하다.  사람들의 성격에 따라 스캘퍼,데이 트레이더, 스윙 트레이더,포지션 트레이더가 되기도 하고, 자금 규모에 따라 시장 주도자 또는 이른바 개미 투자자가 되기도 한다.  주식 투자자의 지식 정도에 따라 가치 투자자 또는 묻지마 투자자가 될 수도 있다. 그 외에도 많다.  이렇듯 다양한 변수를 지닌 투자자 개개인에게 어떤 강사가 만족스런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강사의 경험과 지식을 참고하여 자신만의 방법을 찾는다면 모를까.

주식시장은 확률적 법칙이 작용할 뿐이다. 확률을 아무리 높여도 100%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패턴을 연구할 뿐이다.또한 주식시장이 머니게임임을 인정한다면 시장 주도자의 심리를 분석하여 그들에게 편승하면 된다(개인적으로 소위 '작전'이라 불리는 주가조작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부정할 수도 없다).  절대로 대항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성격,자금 규모, 지식의 정도, 거래 환경 등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최근에 오프 라인의 삶을 지향하며 10여 년을 몸담았던 주식시장을 떠났지만, 남아있는 그들에게는 오직 자신의 방법만이 그들을 지켜줄 것이라 믿는다. 

그녀와 헤어진 지금, 나는 내가 걸어갈 새로운 사업의 방향과 그 방법을 고심하고 있다.

그녀의 축쳐진 어깨가 나를 몹시도 아프게 한다.

할 수만 있다면 선녀의 장옷이라도 훔쳐서 그녀에게 입혀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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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교리 시간에 신부님으로부터 지적을 받았다.

지난 주일미사의 영성체 의식에서 자격도 갖추지 않은 내가 의식에 참여하려 했다는 것이다.(오늘 비로소 알게 된 것이지만 영성체 의식은 세례를 받은 자만이 참가할 수 있단다.)  무지는 커다란 죄악이라는 말에 느꼈던 무안함이란......

공개적으로 창피를 주려는 의도를 갖고 했던 말은 아니었겠으나 낯이 뜨거워지는 것은 어찌할 수없었다.

"사람들 대부분은 기독교의 계율이 의도적으로 조금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진심으로 믿는다."는 키르케고르의 말이 떠올랐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기분이 우울하다.

날씨가 나의 내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어느 한 사람의 생각이나 기억이 타인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으로 변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타인의 내면에 닿을 수 없듯 말과 표정, 행동 등의 외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나의 내면은 수시로 변함고 있음을 알고있다.

자연은 이 원리를 너무나 잘 인식하고 있다.

절대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지 않고 항상 외적인 모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위장한다.

나의 마음은 쉽게 휘둘린다.  미련하게도.

어쩌면 시시각각 변하는 자신의 마음을 인식조차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허다할 것이다.

 

성경의 주제는 모순을 모순 자체로 받아들이라는 것에 있다.

탄생부터 모순적인 인간이 모순을 해석하려 들면 모순과 모순이 만나 더 큰 모순을 잉태하고, 실타래가 꼬이듯 혼란 속에 빠지고 만다.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오롯이 나의 생각만을 더듬는 것은  생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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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아들과의 전화 통화.

"XX야! 오늘 뭐했어? 날씨가 따뜻했는데 밖에 나가 놀았어?"

"....음..나가 놀지는 않았고 나가서 머리 깎았어."

"그랬어?"

아들 녀석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한 마디 한다.

"그런데 아빠, 머리가 약간 바가지야."

그때 전화 수화기를 통하여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

엄마가 옆에 있어서 내게 큰소리로 자신의 불만을 말하지 못했나 보다.

"아빠, 내일 설악산 간다고 일찍 자래.  대명콘도 알지?  할아버지, 할머니랑 아침 일찍 출발한대.  엄마가 전화 짧게하고 자라는데....."

"응, 그래.  알았어.  양치는 했어?"

"응.  자기만 하면 돼."

"그래.  그러면 잘 자고 재미있게 놀다 와."

전화를 끊고, 머리를 깎은 아들 녀석의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내가 어렸을 때는 이발의자의 등받이가 높아 의자의 양쪽 팔걸이에 판자를 올리고 그 위에 앉아 머리를 깎았었다.  녹슨 바리깡에 머리가 찝혀 화들짝 놀라고, 아픔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냈었다.  오죽하면 머리를 다 깎고나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겠는가. 

이발의자를 내려와 타일이 다 떨어져나간 세발대에 머리를 숙이면 빨래비누로 짧은 머리를 박박 비누칠하던 이발소 주인의 손놀림도 잠시 플라스틱 머리감개의 고문이 다시 시작되었다.  아프다는 내색도 못하고 빨리 끝나기만 빌어야 했던 어린 시절 모습은 지금 생각하면 그저 안쓰럽기만 하다.감은 눈으로 흐르던 비누거품을 닦을 새도 없이 파란 플라스틱 조루의 물세례를 받고나면 드디어 길게만 느껴지던 이발 의식(?)이 끝난 것이다.

짧아진 머리 탓에 선선한 바깥 바람에도 추위를 느꼈었다.

그  시절만 해도 자신이 원하는 머리 모양을 선택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 머리는 하나같이 빡빡 밀었거나 상고머리가 대부분이었다. 

아들 녀석은 자신의 머리 스타일이 제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내게 자신의 심정을 전하려 했나 본데 그 나이에는 엄마의 의견에 따라 머리 모양이 결정되니 낸들 무슨 수가 있겠는가.

머리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요즘 젊은 엄마들의 행태에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직은 어리고 연약한 아이의 머리에 독한 염색약을 사용하여 염색을 해주는가 하면, 파마를 하는 경우도 보게 된다.

중금속이 뒤섞인 염색약과 파마약의 성분도 성분이려니와 도대체 누구 좋으라고 그렇게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가끔 염색이나 파마를 한 꼬마의 모습을 볼 때는 그 부모가 혹시 계모, 계부가 아닌지 의심부터 하게 된다면 나의 생각이 너무 보수적이라고 비난 아닌 비난을 퍼부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연약한 아이의 피부에 독한 확학약품을 퍼붓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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