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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푸념이나 넋두리를 하는 것보다 더 손쉬운 일을 찾기도 어려울 듯싶다.

앞으로의 굳은 맹세나 결심을 듣기는 어렵지만, 푸념이나 넋두리는 익숙하게 들려온다.

내가 우선 그렇고, 아내도 별반 다를 바 없고, 주위의 사람들도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약속이나 한 듯 그렇게 비슷한 행위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푸념이나 넋두리는 습관이요, 일종의 배설행위이다.

우리의 육체가 음식을 먹고 배변행위를 통하여 그 잔여물을 몸 밖으로 내보내듯이, 우리의 마음도 불필요한 찌꺼기를 일정한 시점에서 푸념이나 넋두리를 통하여 밀어낼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이해득실이 존재하고, 우리의 잘못된 인식이 저변에 깔려있다.

먼저 우리가 범하는 일반적 오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음식의 섭취보다는 배변행위가 더 사적이고 은밀한 행위로 인식한다.

실상은 정반대이다.  음식의 섭취는 개인의 취향이나 기호에 따라 매우 다양하고, 경제적 여건과 같은 외부적 환경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배변행위는 모든 생물체가 취하는 공통의 행위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유아기 이후로 배변행위를 자연스러운 인체활동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반면에 마음의 문제에서는 이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맹세나 결심을 음식의 섭취로 본다면 이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 속한다.

그러므로 자신만의 결심은 남에게 내보이기 어렵고, 자신이 바라는 바를 이루는 에너지원으로서 그 본래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겪는 실패와 좌절은 소화과정을 거친 음식의 찌꺼기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배설행위를 통하여 마음의 밖으로 나가게 된다.  이는 우리 육체의 배변행위와 너무나 닮아있다.  그러나 육체의 배변행위나 마음의 배설행위에는 모두 에너지가 소모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적당한 에너지의 소비를 통한 배변행위는 육체의 건강을 도모하지만 설사와 같은 지나친 배변행위는 에너지의 고갈로 이어지듯, 마음의 배설행위도 그 정도가 적당할 때는 나와 듣는 상대방에게 실보다는 득이 크다.

즉, 적당한 푸념이나 넋두리는 듣는 상대방에게 나에 대한 친밀도를 높이며, 공감대를 형성하게 하고, 나 또한 스트레스 해소를 통한 기분의 전환을 맛볼 수 있다.

반면에 지나친 넋두리나 푸념은 나와 상대방의 에너지를 고갈시켜 지치고 피곤하게 한다.  여기서 보듯이 마음의 배설행위는 육체와 달리 상호의존적이다.

즉, 내가 그 정도를 조절하지 못하면 나와 상대방의 에너지가 동시에 고갈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푸념이나 넋두리의 정도를 잘 조절할 필요가 있다.

나와 너의 기분 전환에 알맞은 푸념은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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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모른다

너도 나를 모른다

모르는 나와

모르는 너는

백지처럼 하얀 인연에

그렇게 편지를 쓴다.

 

네가 있는 자리에

또는 내가 있는 자리에

낯선 언어가 배달되던 날

평면의 일상에

숨죽인 메아리로 살아있느냐

 

오늘이 그리운 이에게

어제의 흔적은

습관처럼 메마른 자판을 스치운다.

 

모르던 사람들은

모르는 우리들로 남아있다.

 

 

 

<나의 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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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사람에게

잊혀질 과거를 덧씌우는 일은

얼마나 잔인합니까

당신,

나는 빈 전화에 나의 목소리를 전하며

고목처럼 질긴 이 잔인함에

한없이 자책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떠난 후에 알게 되는 것,

그 미래형의 단어를

남들은 다 알고 있는 그 의미를

첫닭이 울기 전에

아니라고 아니라고 아니라고

세 번을 부정하는 못난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세수도 거른 아침은

또 다시 바쁜 저녁을 맞을 테지만

현재형의 사랑은 영영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진실과 마주할 밤이 너무 두렵습니다.

 

 

 

아주 오래된 노트를 뒤적이다 낙서처럼 끄적인 시 한 편을 발견했다.

사랑의 경험도 많지 않은 나로서는 선명하게 그 기억이 떠오를만 하건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찾을 수가 없었다.

'미시 경제학' 노트에 적힌 이 시의 말미에는 이어 쓰기 위해서 적어 놓은 여러 단어들만 난무할 뿐 제대로 이어진 문장은 없다.

이렇게 답답할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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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나의 이야기일 수도, 또는 글을 읽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의 탓으로, 또는 남의 탓으로, 또는 원인을 찾기 어려운 불가항력으로 어려움에 직면하곤 한다.  그 어려움이 경중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려움을 겪는 당사자에게는 하나의 어려움일 뿐이지 그 무게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을 때가 많다.

일단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면, 시간의 경과에 따라 반응하는 행동양상도 변한다.

그것은 어쩌면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과 비슷할지 모르겠다.

퀴블러 로스가 말한 죽음의 5단계에 의하면 부정(Denial), 분노(Anger), 타협(Bargaining), 우울(Depression), 수용(Acceptamce)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어려움에 직면하였을 때, 나의 경험으로는 이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느끼곤 한다.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럴 리가 없어!'라고 부정하며, 조금 지나면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생각으로 분노하게 되고, 이 상황에서 주변 환경과 타협함으로써 다른 돌파구가 있을 것이라는 미련을 두기도 한다.  결국 이도 저도 가능성이 없으면 극심한 슬픔에 빠지게 되고, 그런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종국에는 현실을 수용하기에 이른다.  물론 순서가 뒤바뀌거나, 단계를 뛰어 넘을 수도 있겠고, 미처 수용 단계에 이르기도 전에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끝까지 영위하려는 사람에게 있어 이러한 과정이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본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어려움을 빨리 극복하고, 새로운 삶에 적응하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 아니겠는가.

나의 경험을 되짚어 보면, 극도의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감정에는 오직 자만심(또는 허세)과 오기만 남는다는 것이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 허세를 부리고, 다른 사람의 충고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오기로 똘똘 뭉쳐져 있는 그 사람을 주변의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비난과 멸시로 그 사람을 대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상황을 역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부풀리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약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오기를 부릴 수밖에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만심이나 오기는 주변에 있는 가까운 사람에게도 마음의 상처만 줄뿐, 어려움에 처한 당사자에게 정말 필요한 위로와 협조를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그리고 자만심과 오기만 남았으니 그에게는 위로와 기도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성인군자는 주변에 존재하지 않는다.  비난과 멸시가 심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은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이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어려움에 대처하는 본인과 주변 사람들의 인식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본인은 힘들더라도 빨리 수용하고 자신을 최대한 낮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주변 사람들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일관하더라도 그를 가여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조건을 갖추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주변의 협조에 의지하는 것보다 본인의 마음을 통제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내가 마음을 돌려 나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없더라도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 태도가 절실하다.  왜냐하면 나를 도와줄 의무가 그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마음이 변하는 순간 새로운 희망이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피어나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것이 살아가는 방식이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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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의 일이다.

결혼 10년 만에 첫 아이를 얻고 그 아이를 위해 100일 기도를 온 어떤 부부가 있었다.

그때 스님이 하신 말씀은 이랬다.

  "자기 자식이라고 어떻게 저리 편애할 수 있을까?"

나는 순간 당황했다.

당시 나는 결혼도 하지 않은 학생의 신분이었지만 오히려 스님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나는 속으로 '당연한 거 아냐? 스님도 참 웃기는 사람이네'하고 생각했었다.

 

곧 있으면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 중 하나인 설이 다가온다.

즐겁고 행복해야 할 명절 모임에서 싸움과 분란이 일어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대부분은 자주 만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이해의 부족이 원인이지만 가깝다고 느껴서 무심코 내뱉은 말이 빌미가 되는 경우도 있다. 부부간에도 사소한 말다툼이 심각한 불화로 진행되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들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개인의 영역을 보장해 주지 않는 우리의 문화에도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우리가 유지하는 모든 관계가 원만하게 유지되기를 바란다면 필수적으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각각의 개인에게 반드시 보장되어야 하는 불가침의 영역을 존중하고 부당하게 침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공동체 문화에서 성장한 우리가 개인의 사적 영역을 인정하고 보장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단순히 가깝다는 이유로, 연장자라는 이유로, 또는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개인을 옭죄는 일은 삼가야 한다.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는 일.

무관심으로 일관하여 데면데면한 관계가 되어서도 곤란하지만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 상대방에게 간섭이나 모욕으로 비춰진다면 그 또한 곤란하지 않을까?

부모와 자녀, 아내와 남편, 가까운 친지 간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행위가 바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고 진정한 '사랑'이다.

 

스님의 말씀은 '편애'가 집착이나 간섭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어슴푸레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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