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아니 내가 다닐 때는 국민학교였다.
5월의 미술시간이면 어김없이 우리는 카네이션을 만들었다.
빨강이나 분홍 색종이로 꽃을 만들고 초록색 색종이로 꽃받침을, 그리고 흰색 도화지로 리본을 만들어 그 안에는 연필심에 침을 발라 굵고 진하게 글씨를 썼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모님께 쓰는 편지.
"형, 누나들과 싸우지 않겠습니다.  부모님 말씀 잘 듣겠습니다.  앞으로는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와 같은 뻔한 레퍼토리로 편지를 써서매년 반복되는 어버이날에 카네이션과 함께 드렸다.
그때 부모님 가슴에 달아 드렸던 큼지막한 색종이 카네이션은 지금도 아련하다.
우리집에는 형제가 많아 각자 만들어 온 카네이션이 남으면 동네에 혼자 사시는 분께 달아 드리곤 했었다.  그런 까닭인지 그날은 가슴에 붉은 카네이션을 달지 않은 어르신을 찾기 어려웠다.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넉넉했던 시절이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어버이날이 찾아왔건만 나는 업무와 행사 등을 핑계로 찾아 뵙지 못한 채 아침에 전화만 한 통 했었다.
어머니 목소리에 가슴이 짠했다.
수일 전에 꽃배달 주문을 했으니 잘 받아 보시기야 했을 터이지만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 가슴에 정성을 다해 달아 드렸던 색종이 카네이션 만이야 했을까.
무엇이 그리 바쁜지...
카네이션은 종이에서 생화로 바뀌고, 나 대신 누군가 그 꽃을 배달했겠지만 그때의 정성은 세월에 쓸려 온데 간데 없고 나는 다 늦은 저녁에 이렇게 자책의 글을 쓰고 있다.  효도도 배달이 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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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는 보수주의자로 사세요.
이념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대한민국에서 보수주의자는 그들이 저지른 모든 죄가 용서됩니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파라다이스요 유토피아입니다.
방송국에 가스통을 들고 진입해도, 군화발로 여학생을 무참히 때려 스트레스를 풀어도, 공금 횡령을 해도, 조직 폭력배를 시켜 아들의 원수를 갚아도, 세금 한 푼 안 내고 재산 상속을 해도, 주가조작을 해도, 전화 도청을 해도, 차별대우나 인권 탄압을 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경제를 살리기 위해 했다고 말하면 됩니다.  아, 잊을뻔 했군요.  휠체어를 한 대 준비해야 합니다.
혹시 법정에 가실 때는 마스크를 쓰고 휠체어를 타야 합니다.  최대한 가엾게 보여야 하는 것이죠.  혹시 더 나쁜 짓을 할 계획이 있으시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모든 것은 용서 됩니다. 대한민국에서는.  꽃동네 아시죠?  그곳에 천 원쯤 기부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지출한 돈이 아까우시면 단체 하나 만들면 됩니다.  국가에서 엄청난 액수의 재정지원을 해주니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대한민국에서 진보주의자로 사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를 해도, 참교육을 실천해도, 국장의 사회를 보아도, 노래를 불러도, 재밌는 말로 사람들을 웃겨도,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도 그들은 모두 ’빨갱이’가 됩니다.
빨갱이가 정확히 뭔 뜻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분위기로 보아 나쁜 뜻을 지닌 말임은 분명합니다.  
저는 이런 까닭에 보수주의자로 살려고 하는데 그들이 받아줄 것 같지 않습니다.
위장전입이나 땅투기의 경력도, 병역면제의 혜택도 받지 못한 때문이죠.
저도 딱히 그들과 어울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이너 보수주의자로 살려고 합니다.  그리고 형편이 되면 전동 휠체어도 한 대 주문할까 합니다.  꽤나 비싸더군요.
아, 강남에 코딱지만한 오피스텔이 있는데 위장전입도 해야겠군요.
혹시 여러분이 진보주의자라면 결혼식 사회도 서지 마세요.  기부도 하면 안 됩니다.  노래를 불러도, 코메디를 해서도 안 되죠.  특히 록음악은 더더욱 안 됩니다.
그래도 끝까지 진보주의자로 남으시겠다구요?  고집이 세시네요.
그렇다면 묵묵히 노동만 하세요.  콧노래도 흥얼거리지 마세요.  웃긴 얘기로 사람을 즐겁게 해서도, 남에게 자선을 베풀어도 안 됩니다.  일기도 쓰지 말고 트위터질도 안 됩니다.
혹시 골프를 하신다면 뇌물을 받지 않았나 해서 법정에 설 수도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보수주의자가 된다면 법은 이제 존립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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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만났던 사람을 보면서 깊이 깨달은 것이 있었다.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일수록 ’연대’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흔히 잘못 인식하는 것 중에 ’인맥’이라는 용어가 있다.  내 생각에 ’인맥’은 경제적 여건이나 사회적 지위가 비슷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해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일시적 결합 쯤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혹시 그렇지 않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어 그 까닭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약자의 입장에서 강자를 알고 지내는 것을 ’인맥’으로 생각하며 자랑스럽게 그 사실을 떠벌릴 수 있겠지만, 강자의 입장에서 약자를 알고 지내는 것을 동일하게 생각하느냐의 문제이다.  강자에게 그것은 부끄러운 사실일 뿐이고 자랑할 만한 일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이것은 마치 짝사랑 하는 사람이 자신도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여기서 ’인맥’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착각의 연속인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보듯이 한병태에게 엄석대는 ’인맥’이고 친구일 수 있겠지만 엄석대에게 한병태는 결코 ’인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약자의 입장에서 인맥은 ’연대’가 더 정확하다.  여기서 말하는 ’연대’는 봉사나 헌신에 가깝다.  자신의 이해타산을 목적으로 모이는 일시적 결합이 결코 아닌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연대는 강자를 이길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적 연대’에 깊은 불신을 드러낸다.  마치 선천적으로 ’연대’를 미워하는 유전인자를 타고난 듯하다.  그들의 DNA에 깊이 각인된 것처럼.
때로는 실소를 금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있는데 자신의 딴에는 한껏 머리를 써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모질게 대우하면서 취한 영리 행위가 마치 자신이 선천적으로 부자가 될 가능성을 타고 태어난 것처럼 자랑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약자의 주변 환경은 구조적으로 그런 기술을 배우고 익히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들이 취한 행동은 강자가 보기에 너무나 어설프고 서툴러서 순진해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같은 약자의 입장에서도 한두 번은 통하지만 장기적으로 묵인되는 것은 어렵다.  그러함에도 그들은 그렇게 한다.  금전적으로 부족하니 영리 행위는 그렇다 치더라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서로 돕고 사랑하지 않는 까닭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공되고 자신의 환경이 개선되는 것인데, 봉사나 헌신이 마치 오직 남에게 주는 것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피에르 신부님이나 테레사 수녀님, 또는 법정 스님이 보시기에도 그들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회적 연대’는 결국 자신을 위한 가장 빠른 영리 행위이자 가능성의 실현이며, 삶의 의미를 제공함으로써 시련을 극복하게 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인 것이다.  이것은 결국 나와 타인을 위하는 상생의 원리인 것이다.
내가 이 글에서 마르크스 주의나 공산주의를 선동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배려와 사랑의 실천은 결국 나를 위하는 길임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여러 자기계발서에서 사랑을 강조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인격적 대우나 절대적 믿음을 많이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의 작은 사랑과 봉사는 얼마나 큰 감동으로 기억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리 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고 지낼 때가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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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 오묘함에 매번 감탄하게 된다.

우리 곁에 늘 있는 것에 대하여 그 숨겨진 비밀을 어쩌면 그리도 잘 찾아내는지...
그리고 너무나 익숙하여 새로울 것이 없다 생각했던 것들을 어쩌면 그리도 새롭게 다가오게 하는지...
이를테면 김춘수의 시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싯구는 현대의 양자 역학을 너무도 절묘하게 설명하고 있다.
몸짓(wave)은 떨림이요,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 영혼의 교감을 통하여 실재하는 그 무엇으로 존재하게 되는 과정. 어떤 과학자가 이보다 더 절묘하게 양자 역학을 설명할 수 있을까?
김소월이 친구의 죽음을 보고 읊었다는 '초혼'에서 "부르는 소리는 빗겨 가지만/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라는 싯구에서 하늘과 땅 사이가 넓다는 익숙한 생각이 이 시에서 얼마나 새롭게 다가오는가.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는 또 어떤가.
"한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라는 싯구에서 어쩌면 낯설게 느낄 수 있는 서구 여인의 이름이 시를 통하여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와 이어진 듯한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가.
박목월의 시 '나그네'에서 "강나루 건너서/밀밭 길을//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 리"라는 구절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진양조의 유려한 가락이 보폭에 실리도록 한다.
천상병의 시 '귀천'을 읽노라면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에서 멀리만 하던 죽음이 오래된 친구와의 약속처럼 한결 편하고 가깝게 다가온다.
서정윤의 시 '홀로서기'에서 "기다림은/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좋다"는 구절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애환을 치료하였을까?
이것 뿐이랴! 
지금도 어느 곳에서 우리에게 전해줄 숨겨진 이야기를 한 편의 시로 옮기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으리라. 

시는 과학이요, 철학이요, 음악이며, 치료제이며, 그 모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알지 못하는 것과, 익숙했던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시를 통하여 느끼고 학습한다. 그 모든 시의 고마움을 가슴 깊이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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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원 벤치에서


침묵의 계절 겨울이 순례를 떠나는 날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
해묵은 편지를 읽었다

처음과 끝이 맞닿은 어느 곳에서
부유하던 너는 
기별도 없이 내게로 왔다

봄은 속삭이는 계절
소리치지 말 것
험한 얼굴로 인상쓰지 말 것
바람의 언어로 시를 쓰고
태양의 빛으로 그림을 그리는
그 오후를 방해하지 말 것
그렇게 숨죽이고 지켜볼 것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아련함이 흐르는 한낮

도시 저편에는 회색빛 게으름이 졸고
꽃이 피려는지
아이들 웃음이 맑다

봄은 속삭이는 계절

소리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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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작은 공원의 벤치에 앉아 ’우연’을 위한 빈 자리를 마련했다.
커피 한 잔으로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는 것을 보면 삶은 분명 축복이다.
4월의 날씨치고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부는데 여전히 꽃은 피고, 오가는 사람들은 
제 것인 양 봄을 즐기고 있었다.
짧은 글을 메모하고 자리를 일어서려는데 아쉬움에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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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0-04-15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이 시, 꼼쥐님이 쓰신 거에요?
우와~~ 대단하신데요^^
정말 멋진 시에요. 특히 저는 저 대목 쉿, 이라는 대목이 좋아요.
맨날 아이들하고 지지고 볶아서
봄이 속삭이는 소리도 놓치거든요^^

꼼쥐 2010-04-16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분한 칭찬이에요.
쓰고 보니 운율도 잘 안 맞고...
대부분의 엄마들은 그렇죠. 특히 아이가 어리면 더 시간 내기 힘들죠.
들러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