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숲에서 길을 잃었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매년 이맘때쯤 신록이 우거진 숲에 들어서면 대낮에도 어두컴컴하게 마련이고, 오르는 산이 초행길이라면 사방을 구분한다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다.  한참을 길을 잃고 헤매었는데 자신이 서있던 그 위치를 맴돌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두려움.  그 서늘한 기운을 아마도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강원도의 산골에서 길을 잃었던 적이 있었다.
지금처럼 놀거리가 많지 않았던 그 시절에 산은 아이들의 놀이터요, 자연 학습장이며, 조용히 생각에 잠길 수 있는 비밀 아지트였다.  또한 마땅한 찬거리가 없었던 시골에서 산은 계절의 풍미를 더해주는 보물창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봄이면 갖가지 산나물을, 가을에는 각종 버섯과 더덕이며 도라지로 또 한 계절을 살아갈 힘을 얻었으니 말이다.
어느 해 가을.  나는 친구 한 명을 대동하고 버섯을 딸 목적으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제법 높은 산으로 향했다.  그곳은 비 온 다음날이면 글쿠버섯이며 싸리버섯이 떨어진 솔잎을 뚫고 소복히 올라오는 곳이었다.  갈색 솔잎과 버섯의 색깔이 비슷하여 시선을 땅에 두고 집중하여 살피지 않으면 여간해선 찾기 어려웠다.  우리는 서로 떨어져 버섯을 따고 해가 지기 전에 만나자고 약속하였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버섯을 찾아 없는 길을 헤치며 돌아다녔더니 속도 헛헛하고 금세 해도 질 듯하여 친구를 여러번 반복해서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더럭 겁이 났다.  울창한 참나무 숲에선 하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사 나는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한동안을 헤매던 나는 나를 찾는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간신히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버섯 따는 재미에 나는 시간이 가는 줄도, 길을 잃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산자락이나 산의 정상에서 바라보면 그렇게 쉽게 찾을 듯한 길도 산의 중턱에 이르면 길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어린 나이에 알게 되었다.

국가경제는 좋아지고 있다는데 체감하는 서민경제는 어렵기만 하다.
중산층이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뉴스를 자주 듣는다.  이럴 때마다 내게 드는 생각은 다들 중산층이라고 말하는데 중산층의 정확한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다.
개인마다 생각하는 기준이 다르고 그 차이도 천차만별이다.  
 경제협력개개발기구(OECD)는 전체 근로자를 소득 순으로 줄을 세웠을 때 정중앙에 있는 사람의 소득인 중위(中位)소득을 기준으로 50% 미만을 빈곤층, 50~150%는 중산층, 150% 이상을 상류층으로 분류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기준을 사람들은 납득이나 할까?
나는 다분히 문학적인 기준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산의 정상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상류층, 산의 중턱에 있는 사람은 중산층, 산자락에 있는 사람은 빈곤층이라고 분류한다면 조금 쉽지 않을까?
산의 정상이나 산자락에 있는 사람들은 길을 묻지 않는다.  아니 물어 볼 필요도 없다.  훤히 잘도 보이니 굳이 묻지 않아도 길을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중턱에 있는 사람들은 길을 끝없이 물어야 한다.  
우리네 인생도 그와 같지 않을까?  인생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분명 중산층이다.   그 기준은 명확하다.  책을 통해서든, 정상에 오른 사람에게든, 내가 가야할 길을 묻고 있다면 나는 지금 중산층인 것이다.  산자락으로 내려가게 될지, 정상으로 오르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올처럼 무덥고 습한 날씨가 지속된다면 통통한 버섯이 많이도 올라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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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 시(詩)란 잘 배열된 문장이나 화려한 수사(修辭) 또는 문학적 기교가 아닌 살아 있는 실재 또는 영혼의 유체이탈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 시는 단순히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암흑의 바다에서 건져올린 생동하는 그 무엇이며, 하늘에 둥둥 떠다니다 어느 시인의 눈에 띄인 실재적 대상이나 그 분위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를 '쓴다'기보다 '낚는다'거나 '건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곤한다.  
대체로 좋은 시인이란 마음에 매의 눈을 지닌 사람이다.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낚아채야만 시는 생명력을 얻기 때문이다.  시적 기교를 무시하거나 폄하하려는 뜻은 아니다.  시적 기교는 시의 생명력에 가치를 더하는 부차적인 것이기에 생명력이 없이 오직 기교에만 의지하여 시를 쓴다면 그야말로 죽은 시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뿐이다.
마음에 매의 눈을 지니고 더하여 장인의 세공술까지 겸비한 시인은 그리 흔치 않다.
그래서일까 시를 좋아하지 않는 독자는 '시는 어렵다'와 '시는 유치하다'는 입장으로 양분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시를 기피하는 합당한 이유는 아니라고 본다.  인성교육이 사라진 우리네 교육의 문제는 아니었을까?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입과 코와 마음이 열려있어야 한다.  이들을 통하여 음식과 공기와 인성(人性)이 끝없이 공급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생명력을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지난 주말에 분당의 한 대형서점에 갔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분당의 중심지에 위치한 탓에 젊은이들의 발길이 잦은 곳인데 그들의 차림새는 남녀를 구분할 것 없이 알몸이거나 겨우 가린 정도로 비춰졌다.  한여름의 오후 시간대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민망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짧은 치마를 입고 계단을 오르는 여자친구의 뒤를 책으로 가리며 뒤쫓는 남자를 '매너가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가관이다'라고 해야 할지...
다소 보수적인 내 성향을 감안하여 지나친 감이 없지는 않겠지만 나는 그곳에서 인성이 사라진 인간의 실체를 보았다.  인성이 사라지면 아주 작은 심리적 충격도 견디지 못할뿐만아니라 그들에게는 동물적 잔인함과 성적 쾌락의 탐닉만 남게 된다.
갈수록 잔인하고 흉포화 되는 범죄와 높은 비율의 성범죄는 결코 법으로만 제어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자살률 세계 1위라는 오명에 더하여 성범죄율 세계 1위라는 오명을 더할 날이 멀지 않은 듯하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내 마음의 주파수를 온 우주와 자연에 주파수를 맞추는 일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성을 마음껏 호흡하는 일이다.  
수없이 되내어 읽어도 늘 새롭게 느껴지는 시 한편을 곁에 둔다는 것. 생각만으로도 즐겁지 아니한가.  무더위 속에서도 한편의 시에 심취한 젊은이의 모습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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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산행길에는 늘 만나는 사람만 만나게 된다.
아침 운동이라는 것이 저마다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하는 것이라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만나는 사람은 한결같다.
그런데 새로운 인물과 마주칠 때도 더러 있다.
대개 그런 사람들은 월요일에 보게 되는데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세트로 구입한 듯한 운동복을 입고, 장갑과 모자와 심할 경우 선글라스까지 착용한 모습은 전문 산악인처럼 보이게 한다는 것과 몸에 걸친 것들이 모두 새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에게는 아침 운동이 마치 신성한 의식을 치르는 것과 같다.
그렇게 차려 입으려면 비용도 만만치 않았을텐데 대개는 길어야 사나흘이 지나지 않아 모습을 감추곤 한다.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은 얼굴도 익숙하려니와 그 차림새도 수수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사람이건 물건이건 오래된 것이 좋은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엊그제는 서모 개그맨의 부인이 운영하는 쇼핑몰 "쉬 이즈 앳 홈"이 구설수에 올랐었다.
 
대나무 소쿠리(33만원)                                              회색 쿠션(44만원)

가격이 조금 과한가?
앤틱이라면 다 용서가 되는 세상 아니던가.
한동안 더위가 심했던 탓인지 큰 웃음을 선사하는 분들이 종종 눈에 띈다.
무더위에 지친 국민들에게 살신성인하여 웃음을 주려는 그 모습이 눈물겹다.
같은 날 강모 국회의원이 대통령까지 거론하는 저질 개그로 우리에게 큰 웃음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왠지 한참을 웃다가도 뒷맛이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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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누구나 턱턱 막히는 순간이 있다.
평소 같았으면 눈 감고도 걸었음직한 익숙한 길에서 몇번이고 부딪히고 넘어졌던 기억처럼 순탄하던 내 인생길의 작은 돌부리에 걸려 앞 못 보는 맹인처럼 나뒹구는 순간, 우리는 좌절하게 된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에 겨워 축제를 즐기는데, 나만 홀로 불행의 나룻배를 타고 외딴 섬으로 향하는 듯한 느낌 또는 애정 어린 손길로 나를 감싸주던 삶의 미소가 한순간에 돌변하여 내 멱살을 부여잡고 마른 바닥에 사정없이 내동댕이 치는 듯한 그런 기분.
나는 그 흙바닥에 누워 대상 없는 그 누군가에게 돌팔매질이라도 하고 싶었던 그런 기억은 내 남은 인생에서 두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잔혹한 신이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오늘 만났던 후배의 한탄에 나는 그보다 더한 일도 겪었노라 말한들 그의 고통이 감해지지 않음을 알기에 나는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내가 그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지고 싶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을까?
다정한 말 한마디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나를 야속하다 여기지는 않을지...

88년, 남편과 아들을 연이어 잃었던 소설가 박완서가 생각났다.
그녀가 사는 이 나라에는 올림픽 축제로 떠들썩했건만 온몸으로 아픔을 견뎌야 했던 그녀를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었을까?
 "자식을 앞세운 에미는 밤에 편히 잠들지 못한다. 추운 날은 내 자식이 얼어붙은 딱딱한 땅속에서 추위에 떨 것 같아 따스운 잠자리가 오히려 가시방석처럼 고통스러워 전전반측 잠 못 이루고, 더운 날은 더운 날대로 그 깊은 땅속에서 답답하고 무서워 어찌 견디나 싶어 쾌적한 냉방을 거부하고 홀로 가슴을 쥐어뜯는다." (`에미 마음, 여자 마음` 中) 고 썼던 그녀의 상실은 세월에 흘러 아득할 터, 이제는 여느 봉분과 다를 바 없는 동그마니 작은 묘소가 그녀의 아픔을 위로하고 있을 것이다.

살다보면 나만 홀로 겪는 듯한 그런 일들이 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 나 아닌 누군가에게도 언제든 찾아오는 그런 일임을 뒤늦게 알게 된다.
내가 사는 하루하루는 인생의 작은 퍼즐조각이라고 하지 않던가.
죽음을 앞두고 내 인생의 전체 그림을 완성했을 때, 혹시 아는가?  그때의 아팠던 순간이 무지개로 빛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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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어릴수록 기후 적응력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조금만 더워도, 조금만 추워도, '죽겠다.'는 말이 거침없이 튀어 나오니 말이다.
이것은 비단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도 아닌 듯하다.
겨울이면 옷을 껴입고 산책하는 강아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고, 여름이면 혀를 길게 빼고 헉헉대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인다.

매일 아침 마주치는 외국인 아가씨가 있다.
내가 운동을 마치고 산을 다 내려올 때쯤이면 배낭을 매고 산을 오르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오늘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 간단한 인사와 짧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인데 캐나다 출신인 그녀가 우리나라의 여름을 견디는 것이 조금 신기하다 느낄 때가 가끔 있었다.
"Good morning." 하고 인사를 건네자 늘 그렇듯 그녀는 서툰 한국어로 "안녕하세요?"하고 말한다.  그리고 웃는다.
"It's so hot and sticky. isn't it?" 하고 말하자 그녀에게서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Ya, but I like summer.  I've never experienced hot weather like this in Canada.  So I enjoy the summer now."
나는 순간 그녀의 긍정적인 인생관이 좋았고, 새로운 것을 즐기는 그녀의 젊음이 부러웠다.
"Have a good day."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고 산을 내려왔다.
약한 바람이 등에 흐르는 땀을 걷어가지는 못했지만 내 마음의 더위는 훨씬 옅어졌다.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더위도, 추위도,  순간일 뿐이다.
지나간 젊음을 한없이 그리워 하듯, 계절의 순환도 그런 게 아니겠는가.
내게 허락된 짧은 시간을 헛된 불평으로 허비하며 지내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고 또 반성해 볼 일이다. 
비가 한바탕 쏟아지다가 그쳤다.
후끈한 열기와 눅눅한 습기가 온 방안을 휘감고 있다.
나는 그녀처럼 오롯이 여름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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