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건강진단을 받았고, 며칠 전 그 결과를 보았다.
결과는 그닥 나쁘지 않았다. 내 본 나이보다 신체 나이가 너댓 살 아래로 나왔으니 말이다.
담배를 끊는다면 0.8세가 더 줄어들 수 있단다.
그러나 그 결과만으로 기뻐할 수도 없는 것이 나도 이제는 가는 글씨를 읽을 때면 안경을 벗는 횟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신체 나이가 내 또래의 평균에 비해 조금 좋았다는 것일뿐 모든 신체기관의 노화가 멈춘 것은 아니라는 반증이렷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공자도 마흔을 넘기면서 시력이 나빠졌고, 예순에는 귀마저 어두워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확인할 길은 없지만 아마 그랬던 듯하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공자는 나이 마흔을 불혹(不惑), 예순을 이순(耳順)이라 했다.
시력이 좋다는 것은 장점도 되지만 그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다.
어차피 현미경처럼 세밀하게 보지 못할 바에야 더 작은 것을 남들보다 잘 본들 그 무엇이 달라질까. 오히려 우리는 잘 보게 됨으로써 내것과 네것,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고 편가름하며,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 자신의 욕심을 키울뿐이다. 공자가 눈이 어두워지면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리지 않게 된 것이 마흔을 넘기면서부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아 시력이 좋을 때는 스스로 좋다고 여기는 것을 좇아 많이도 욕심내었었다.
듣는 것 또한 그렇다.
안 들어도 될 소리까지 자세히 듣는 것은 타인에 대한 미움과 분란만 일으킬뿐이다.
지금도 청력에는 문제가 없지만, 젊은 시절에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이제는 알게 모르게 많이 못듣게 되었으리라.
인생의 후반기에 들어 시력과 청력이 떨어지는 것은 남은 기간 동안 욕심과 미움없이 살다 가라는 신의 섭리가 아닐까?
전기가 없던 시절에는 그나마 밤에는 눈과 귀를 쉴 수 있었는데, 밤도 대낮같이 밝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욕심을 키워왔으며, 또 얼마나 많은 미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지...
공자는 쉰에 이르러 지천명(知天命)이라 했다.
자신의 신체가 점점 쇠락하는 것을 인식하고, 하늘의 섭리를 깨닫는 것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이치인 듯하다.
내가 젊은 시절에 시력과 청력을 낭비하여 욕심을 키우고, 나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마음의 상처를 그 얼마나 보태었는지 반성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