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환승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버스를 타기 위해 대합실로 향했다.
칼바람이 부는 바깥 추위를 피해 대합실 내부는 그야말로 인산인해!
차표를 끊고 출발 시간을 보니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승차홈 앞의 대기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마저 읽지 못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였다.
낡은 승복을 입고 홀쭉한 걸망을 짊어 진 스님 한 분이 내 곁을 맴돌고 있었다.
마른 체구에 주름이 깊게 패인 얼굴, 사십대 후반이나 오십대 초반쯤 되었을까?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주위를 서성이면서도 말을 붙일 엄두가 나지 않았는지 기웃거리고 망설이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쭈볏쭈볏 하시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 혹시 절에 다니세요?"
나는 대학생 시절 지하철역에서 자주 보았던 '도를 아십니까?'하는 멘트의 그런 사람들을 떠올렸다.  스님의 말이 끝나는 것과 그 생각이 들었던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잘 훈련된 개의 즉각적인 반응처럼.
"안 다니는데요." 하고 야멸차게 대답했다.
스님은 그렇게 어렵사리 대화를 튼 나에게 기회를 놓칠새라 얼른 말을 이었다.
"제가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그러는데 혹시 삼천 원 정도 여유가 있으시면..."하고 말끝을 흐렸다.  유난히 선해 보이는 눈망울에 거짓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마음과 달리 엉뚱한 말이 튀어 나왔다.
"글쎄요.  저도..."
그것은 분명 거절의 말이었고, 당황한 스님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왜 그랬을까?  지인들과 어울려 식사를 할 때에도 몇 만 원쯤이야 아까워 하지 않고 잘도 내면서...  따라가서 주고 올까?'

한참을 그렇게 망설이기만 하던 나는 끝내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버스를 탔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떤 곳을 가더라도 타인으로부터 길을 묻거나, 어떤 부탁의 말을 유난히 많이 들어 왔다.  다소 왜소한 체구의 내가 만만히 보인 탓이었는지, 아니면 내 인상에서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부탁에 수도 없이 넘어갔고, 우연한 기회에 그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들려줄라치면 다들 내가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라도 되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요즘도 가끔은 야멸차게 거절하지 못할 때가 있지만 그 횟수는 많이 줄어들었다.

사람을 믿지 못하도록 그렇게 길들여진 탓일까?
그토록 선해 보이던, 정말 어렵사리 꺼낸 그 삼천 원의 부탁을 나는 끝내 거절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나는 그분의 뒷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종교와 상관없이, 어쩌면 우리가 섬기는 신이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시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가장 정중하게 대우해야 할 그분을 나는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돌려보냈다는 죄의식이 내 어리석음과 함께 머리를 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후에 동료들과 산행을 했다.
시무식의 연장선상에서 치러진 행사였고, 결코 짧지 않은 코스였으니 한해 동안 잘해보자는 취지가 무색하게 불평이 터져나왔다.
마뜩지 않아 하는 동료들과는 달리 걷기를 즐기는 나는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산을 올랐다.
등산객의 발길에 다져진 눈길을 산행의 초보자들이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았을 터, 여기저기서 비명과 가쁜 숨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산에서는 호흡을 고르고 가급적 말을 삼가는 것이 숲과 그곳에 사는 동식물에 대한 예의이며, 산이 내뿜는 평온한 에너지를 호흡할 수 있는 최적의 방책이다.
그러나 무례한 사람들은 거친 말과 행동으로 숲의 고요를 방해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들 위에서 군림하려 한다.  이럴 때 나무 하나하나는 저마다 모공을 닫고 사람들로부터 시선을 거둔다.
건강을 위하여 산을 오르건만 오히려 자연으로부터 나쁜 기운만 받으니 소득은 없고 손해만 보는 셈이다.

산에 오른 지 한시간쯤 지나서부터 푸슬푸슬 눈발이 날렸다.
묵묵히 걷기만 하는 내게 동료들은 한사코 말을 붙인다.  몇몇은 등산로 초입에 앉아 숫제 오를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렇게 서너 시간을 걸었다.
새벽에도 산엘 올랐으니 오늘은 다섯 시간 남짓 걸은 셈이다.
나른한 피곤이 몰려왔다.  기분 좋은 노곤함.

퇴근 후에 가르치는 아이들은 오늘부터 목요일까지 방학이다.
쉬라고 하면 다들 좋아라 할 줄 알았는데 싫다는 녀석들도 있었다.
굳이 오겠다고 고집을 부린 두 녀석은 지금 자습중이다.
나의 숙소에도 모처럼 고요만이 가득하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눈꺼풀이라더니 나는 안간힘을 쓰며 밀어올리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제 늦은 시각이었다.
퇴근 후에 나의 숙소로 찾아든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한 아주머니로부터의 전화를 받았다.  자신의 아들을 맡아서 가르쳐 줄 수 없느냐며 상담을 하러 방문해도 되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괜찮다며 방문을 허락했다.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 소리가 울렸고, 곱게 차려입은 한 아주머니가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달리 대접할 것이 마땅치 않았던 나는 물 한 잔을 따라 건네주며 학생의 신상을 물었다.  아이들에게는 상담하는 동안 잠시 자습을 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아주머니의 대답은 나의 예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 아주머니가 원했던 것은 무료로 여러 명의 아이들과 같이 배우는 것이 아닌, 돈을 줄테니 자신의 아이만 따로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사정을 말하며 시간도 부족하고, 나의 지식도 부족하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장황하게 설명했다.   내 여건상 그분의 아이만 거절하는 것 아닌가 하는 미안함에 말이 더 길어졌는지도 모른다.  아주머니는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내다가 급기야는 지금 가르치는 학생들을 그만두게 하고 자신의 아이만 가르치면 육체적으로나 금전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아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내뱉었다.
결코 아이들이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본의 아니게 나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하여 들려준 것이었다.  나는 너무 당황하여 제발 돌아가 주십사고 사정했다.  그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이었는지 나가면서까지 이렇게 개인적으로 가르치는 것도 불법이 아니냐며 험한 말을 하셨다. 

남의 떡이 더 커보인 탓이었을까?
나와 같은 아마추어 초보강사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니...
우리는 가끔 자신이 누리는 것에 대한 감사보다는 남이 들고 있는 작은 것을 욕심내는 경우가 더 많은 듯싶다.  몹시 불안한 눈길로 "이제 우리는 더 배울 수 없는 것 아닌가요?" 하고 묻던 아이들의 힘없는 목소리가 지금도 쟁쟁하다.
  
2011년을 하루 앞둔 오늘.
오전에는 그동안 내가 바쁘다는 핑계로 미처 전하지 못했던 감사의 글을 쓰며 보냈다.
나 자신도 어쩌면 어제의 그분처럼 내가 누리는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보다는 남의 것에 대한 욕심만 부리며 1년을 보낸 것은 아닌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늘 하얗게 눈이 내렸다. 
늘 그렇듯 눈이 오는 날이면 사람들은 어린애처럼 감상적인 모습으로 변한다.
직장 동료들은 대학 시절 내가 쓴 낙서장을 들고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그리고 이 시에 이르러서는 다들 한마디씩 한다.  내가 조숙(?)했었나 보다고.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대학 2학년 무렵인 듯한데 나는 왜 이 글을 낙서처럼 적었을까?
그나마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감성이 살아있었나 보다.  글에 리듬이 살아있다.
비록 내용은 유치하지만, 오히려 지금은 그때의 리듬을 찾을 길이 없다. 

 나에게 하는 말

무례한 시련이 찾아와도
화내지 마세요.
미리 예정된 일이었는데
당신만 몰랐더군요.
’운명’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조금 편해질까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시련 뒤에는 감추어진
선물이 있다더군요.
시간의 빛에 하루쯤,
어쩌면 조금 더 길어질 수도 있겠네요.
어둠의 고통을 그 빛에 쪼이면
마법처럼 선물이 보인답니다.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아요.
쉽게 가버릴 기쁨이라
달갑지 않은가요?
그래도 
슬픔보단 기쁨이 좋겠네요.
다들 그러니까요.

교만함은 천성이에요.
억지로 바꾸려 하지 마세요.
겸손한 체 가장한들
의무로 기도한들
천성은 바뀌지 않아요.
어느 날 갑자기
눈물 뚝뚝 흘리며
제단 앞에 무릎을 꿇으면
그 순간에 바로
개벽하듯 달라지지 않을까요?

나를 알기 전의
행복은 소용없어요.
오히려
탐욕만 키울 뿐이죠.
봄이 오고 겨울이 오면
추위만 느끼겠지요?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행복에는 순서가 중요하죠.

사랑은 부족과 결핍의
합성어예요.
자선은 위선과 다르지 않죠.
반박은 사양할께요.
때가 되면 알아요.
더 높은 사랑이 있다구요?
그럴테지요.
하지만 나는 할 수 없으니
무슨 소용일까요?

내가 알아낸 것은
이것이 다예요.
좀 더 나이가 들면
내 글은 하얀 여백만 남지 않을까요?
지식은 사라지고
느낌만 남을테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모든 기억을 잊고
딱 하루만 살아봤으면 좋겠다
저 순백의 눈발처럼
모든 집착을 버리고
그렇게 무심했으면 좋겠다

동짓달 시계 위로
눈은 내리는데...
12월의 하늘은
12월의 눈물
더하고 뺄 것도 없는
12월의 한숨

한발 다가서면
한발 물러서는
영원의 시간 속에
눈발처럼 하루가 부서진다
그 풍경 위에  또 한해(年)가 쌓일 때면

갓 태어난 아이처럼
침묵으로 빚은 그리움이
눈(雪)처럼 쌓였으면 좋겠다
숲으로 이어진
하얀 여백의 길을
처음인 양 자박자박 걸어봤으면 좋겠다
그 길을 따라 아스라히
시간의 시선에서 벗어나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