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왜 대적자들에게 나타나지 않았는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총독 빌라도나 대제사장들 등 당시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인물 앞에 나타나셨다면 더욱 확실하게 주님의 부활이 입증되지 않았을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여러 차례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께서 만난 사람들의 면면을 떠올려 볼 때마다 의문이 생긴다. 왜 예수님은 대적자들에게는 나타나지 않고 여인들과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셨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지만,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기적 자체로 사람들을 믿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 이전에 행하신 많은 기적들을 살펴볼 때, 그런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사람들은 열광하고 기뻐했지만 결코 주님을 믿지는 않았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에 사람들은 놀라워했지만, 예수님께서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에 걸려 넘어져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버리고 떠나갔다.>
부활도 그러하다. 묘하게도 성경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대비한 사람들이 바로 주님을 죽음에 내어준 관원들임을 보여준다. 여인들이나 제자들이 기껏 주님의 시신에 바를 향료나 준비하고 있을 때, 관원들은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부활 후를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부활’이 사람들에게 엄청난 효력을 지닌다는 사실을 사탄도 잘 알고 있다. 요한계시록 말씀에 사탄의 지상 대리자인 ‘짐승’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흉내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짐승의 상처 입은 머리 가운데 하나가 죽은 듯하다가 다시 살아나 많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고 그 짐승을 따르며 숭배한다(계 13:3∼4). 짐승은 교묘하게 부활의 효과를 노림으로써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짐승을 따르는 것은 참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 기적은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조작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람들을 믿음에 이르게 하는 놀라운 증거이지만, 동시에 어떤 사람들을 믿음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이 있다. 부활이란 사람들이 믿음으로 나아오지 않는 이유로 자신들의 마음 속에 걸림돌이 있기 때문임을 깨닫게 해주는 빛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 부활하신 모습을 보이심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셨을지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걸림돌이 있는 한, 사회의 영향력이 있는 사람의 말이라 해서 무조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는 않는다.

 * 복음의 완성을 위해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여인들과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셨는가? 예수님께서 그들만을 찾아가신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그들이 증거해야 할 복음의 완성을 위함이다. 주님의 부활은 지상에서 기적 사건으로만 의미가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오신 일, 세상에서 행하시고 가르치며 살아가신 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과 연관돼 있다.
그뿐 아니라,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일도 연결돼 있다. 예수님의 부활이 놀랍고 신기한 일이지만, 그것을 별도로 떼어내 강조할 수만은 없다. 이전과 이후 모든 일들의 연속선상에서 부활을 바라봐야 한다. 이를테면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고, 부활 없이 십자가가 없다는 의미다. 어느 한 부분으로 결코 온전한 복음 증거가 되지 못한다.
사도행전에서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세우는데 그 자격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 1:21∼22).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 전체에 대해 목격자와 증언자가 돼야 하고, 특별히 부활의 증언자가 돼야 한다.
사도들이 일치된 부활의 증언자가 돼야 한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를 중시하신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요한복음 20장에 기록된 도마의 사건이 이를 말해 준다. 도마가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고집하는 것을, 흔히 우리는 좁은 시각에서 도마의 개인적인 의심에 초점을 맞춰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도마처럼 의심해서는 안 된다, 도마처럼 중요한 교회 모임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식의 설교들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좀더 넓은 시각으로 이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도마의 개인적 의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 아니라,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증언이 온전하고 충분하며 일치되도록 만들어 주셨다는 점이다. 그들의 증언이 충분하고 일치해, 이제 제자들의 증언을 직접 빌리지 않고서도 믿는 자들에게 축복이 되고 있다.

* 제자도의 완성을 위해
둘째, 예수님께서 여인들과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신 이유는 제자도의 완성을 위함이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사회적 영향력이나 유력함을 제자 선택의 조건으로 삼지 않으셨다. 오히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중에서 제자를 택하셨다. 그리고 지상의 삶에서 가장 귀한 기회들을 모두 제자들에게 사용하셨다.
예루살렘의 율법 교사들을 놀라게 하고 지혜와 권능이 탁월하신 주님께서 하필이면 왜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제자로 택하셨을까, 왜 자신을 좀더 빛내줄 수 있는 훌륭한 지위나 자질을 갖춘 사람들을 택하지 않으셨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계산 방식이다.
한편, 그랬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 제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려 할 뿐, 예수님의 삶을 자신들의 삶 속에 옮겨놓는 참 제자가 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탁월했다. 그들이 자질 면에서 그러하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하는 점에서 말이다. 주님께서 자신의 진수를 보잘 것 없는 제자들에게 전부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뛰어난 제자도의 본을 보일 수 있었다. 사회적으로 유력한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나 영향력을 이용해 예수님의 복음 전파를 거들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목숨을 내어놓고 덤비지는 않는다. 제자도의 완성은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실재에서만 가능하다. 이로 인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다른 사람이 아닌 제자들을 찾으셨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항상 놀랍고 즐거운 일일 수만 없다. 그것은 세상을 초월하는 죽음으로의 부름이기 때문이다. 이는 요한복음 21장 말씀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에게 장차 어떠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해 복선을 깔고 말해 주고 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곳에서 십자가의 죽음이 암시되고 있다. 이와 같이 십자가 죽음의 제자도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부활의 제자도이다. 이제 앞서 던졌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예수님께서 여인들과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신 이유는 증거 돼야 할 복음과 제자도의 완성을 위함이다.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증거 사명의 필요충분 조건이다. 그들이 세상에서 증거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전파는 죽음을 넘어서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사망을 불러 조롱할 수 있는 자가 이미 사망을 넘어 선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될 수 있다.

* 부활의 제자로 부르시다
오늘도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부르시고 계신다. 세상의 출세에 목숨을 건 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증거를 위해선 그 목숨을 내놓지 않는다. 넓고 쉬운 길을 가는 사람들은 진정 필요한 곳에서 빛을 발하는 부활의 증인들로 나서기가 매우 어렵다.
죽음의 길을 가라. 남들이 회피하고 마다하고 좁은길을 택하라. 부활의 증인이 되기 위해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전부 내어주신 그분처럼 살아야 한다. 힘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 앞에서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따랐던 그 사람들 앞에서 부활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셨던 그분처럼 살아야 한다.
우리는 번제단을 지나 성소로 나아가야 한다. 타지도 않고 묻히지도 않은 자아를 가지곤 부활의 제자도를 이룰 수 없다. 오늘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죽음의 문턱을 넘어 모두 타버린 옛 자아의 무덤 위에 새롭게 돋아나는 싹이 되어 새 창조의 권능을 펼치고 이루는 영광의 사역을 감당하는 제자들을 부르신다.

글·최승락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이다.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우리도 부활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복음의 핵심으로,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대속은 부활을 통해 승인되고 확인되었다. 따라서 부활의 부인은 십자가의 부인을 결과한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을 불신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역사적 사실과 구속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인류를 품고 죽은 대표적 행위였던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도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 15:20)고 강조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모든 그리스도인의 부활과 연결해 설명하고 있다. 부활의 ‘첫 열매’ 즉 ‘아프아르케’라는 말은 고린도전서 15장 20절과 23절에서 사용되었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 즉 ‘프로토토코스’라는 말은 골로새서 1장 18절과 요한계시록 1장 5절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부활의 첫 열매인가?

 * 소생과 부활의 차이점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다.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다시 살린 사건(왕하 4장)이나 예수님이 나사로를 다시 살린 사건(요 11장) 같이 숨을 멈춘 사람의 호흡과 생기를 회복시키는 소생(resuscitation)과 부활(resurrection)은 완전히 다른 현상이다. 오늘날 상당수의 경우에 인공 호흡이나 전기 충격 등으로 숨을 쉬지 못하는 사람들을 회복시키며, 죽은 사람이 기적적으로 생기를 회복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노쇠하고 언젠가 죽게 된다. 그러나 부활이란 고린도전서 15장 42∼44절에 정의된 대로 네 가지 특성을 가진 새로운 육체, 즉 부패하지 않고 영광스러우며 강하고 신령한 육체로 변화되는 현상(transformation)으로 죽음을 극복하고 다시 죽지 않으며 영원히 살게 된다.
이와 같은 부활이 일어난 사람으로 예수님이 최초이며 그 후 오늘날까지 다른 부활이 없었기 때문에 이는 전무후무한 현상이며 성도들의 부활은 그의 재림 시에 일어나게 된다. 마태복음 27장 52∼53절에 예수님의 십자가 및 부활 사건과 함께 다수의 성도들이 무덤에서 나와 사람들에게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초대 교회의 구성원 중 부활한 사람이 있다는 기록은 전무하고 사도행전이나 서신서에도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또 그것이 소생이었는지 부활이었는지 그리고 일시적인 출현이었는지 영속적 존재이었는지 모호하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과 같은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것이 진정한 부활이라면 그리스도의 부활에 선행할 수 없고 예수님이 시작한 부활의 후속으로 봐야 한다.
모든 인류는 범죄함으로써 죽음에 종속되었고 따라서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죽음을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문에 아직 음부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소생은 가능하지만,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음부의 문을 열고 나오는 부활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

* 언약과 대표성의 원리에 따라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부활의 첫 열매인 이유는 바로 그 다음 절에서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1∼22).
여기서 언약과 대표성의 원리가 나타난다. 하나님은 언약 구도에서 인류를 공동체적으로 관계하시는데, 성경에는 두 개의 언약 공동체가 등장한다. 하나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을 대표와 머리로 하는 인류 공동체이고, 또 하나는 두 번째 아담이라고 표현된 그리스도를 대표와 머리로 하는 신앙 공동체이다. 하나님은 대표들과 계약 관계를 맺으며, 그 대표의 계약 준수 여부에 따라 그를 대표로 하는 공동체의 모든 소속원들이 상벌간에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원리는 전혀 부당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며 모든 인간 사회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사회 계약 이론이다. 본인의 동의 여부에 상관없이 한국에 태어나 한국인이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국의 모든 법률이나 전통을 준수해야 하는 의무 아래로 들어가며, 이를 어겼을 경우에 형벌이나 불이익을 받게 된다. 또 한국의 통치자나 외무장관이 한국을 대표해 타국과 관계하며 그들이 조인한 협약의 영향을 국민들의 동의 여부에 상관없이 모두 적용 받는다. 이런 원리와 현실은 국가 공동체뿐 아니라 각종 사회 집단이나 가정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가 대표하는 모든 공동체를 위한 공적 행위이며 그 결과와 혜택도 모든 공동체에게 적용된다.
아담의 실패가 인류 공동체에게 큰 피해를 가져왔다면, 그리스도의 성공은 신앙 공동체 전체에 큰 은택을 가져 왔다. 그것은 생명과 부활이 중심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고 부활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먼저 성취하고 개척한 길을 모두 따라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가 대표하는 공동체 모두의 죽음이며 마찬가지로 그의 부활도 모두의 부활인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머리인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며 분리할 수 없는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일어나게 된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범죄와 실패로 인해 사망과 죄와 율법과 사탄의 종속 상태로 전락하였고, 그 결과로 언젠가 모두 죽음에 이르고 심판 때까지 죽은 자의 세계인 음부(陰府)에 갇히게 된다. 예수님도 무죄였지만, 신앙 공동체의 대표로서 모든 구성원들의 죄악을 담당했기 때문에 죄인의 죽음을 당했고 따라서 음부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그의 보혈과 대속이 모든 죄과를 만족시켜 하나님께서 용서하셔서 더 이상 음부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음부의 문을 열고 최초의 부활을 실현하였다. 그리스도인도 아담의 인류 공동체에 속해 있기 때문에 죽음과 음부의 길을 가야 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신앙 공동체에 속해 있기 때문에 죽음과 음부로부터 해방, 즉 부활의 길을 가도록 돼 있다.

 * 신앙 공동체의 집단적 부활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공과 승리는 일순간에 완성되지 않고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며 이 시기를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사이에 해당하는 종말(eschaton)이라고 부른다. 구약에서 부활이 예언(겔 37:12∼13, 단 12:2) 되었는데, 그것은 한 사람의 부활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들의 집단적 부활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모든 부활의 시작이며 첫 열매이다. 마치 첫 열매가 모든 추수를 예시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의 전체적 부활을 예고한다. 물론 이 기간 동안에 그리스도인도 육체적 죽음을 경험하지만 부활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을 사는 것이며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사망에 종속되는 삶을 살지 않는다. 더욱이 종말의 과정이 끝나는 재림 때에 살아있는 성도들은 일시적인 죽음도 겪을 필요가 없다.
이런 종말론적 맥락이 첫 열매를 언급하는 고린도전서 15장 20절 이하에서 나타나고 있다. 부활은 그리스도가 그의 몸된 교회를 사용해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24절)까지 보류되며, 결국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다”(26절). 그런 다음 전체적인 부활이 일어난다. 우리의 부활은 사망 자체를 포함해 모든 흑암의 세력을 완전히 멸절한 후에 일어나기 때문에 아직 육체적 변화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부활을 예시하고 보증하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을 때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영생의 삶을 살 수 있다.

글·이정석 풀러신학교 조직 신학 교수이다.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사실인가>

“예수 때로 삼류 소설에서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시체를 찾지 못하게 되는 일이 가끔 발생한다. 하지만 실제로 무덤이 비는 사건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예수의 빈 무덤 사건은 어디에서도 시체를 찾지 못한 경우가 아니다. 사건은 그가 산 채로 사람들에게 나타났거나, 죽은 채로 사람들에게 나타났거나, 죽었다가 살아나서 사람들에게 나타난 세 가지 경우 중에 하나이다. 복음서의 설명을 믿는다면, 이것은 시체가 사라졌다는 문제가 절대 아니다. 실제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후 여전히 살아 있다는 문제 그리고 지금도 살아 있는 문제다.
지금까지 빈 무덤은 예수 부활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으며,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예수의 말을 결정적으로 증명해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은 고리도전서 15장 17절에서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 예수의 시체가 무덤에 있었는가
부활에 관해 누군가에게 이 문제를 증명해 보라고 한다면, 최선의 선택으로 부활에 관해 세계 최고 전문가로 알려진 윌리엄 레인 크레그 박사를 만날 것을 권한다. 크레그 박사는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그곳에서 부활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뮌헨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예수의 무덤이 비어 있었는지 살펴보기 전에, 먼저 예수의 시체가 무덤에 안치된 것이 사실인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시체는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게 넘겨졌다.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믿어지지 않는 내용이다. 이 점에 관해 크레그 박사는 고린도전서 15장 3∼7절에서 사도 바울이 예수께서 장사 지낸 바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첫 번째 증거로 제시한다.
예수를 무덤에 장사한 사람이 왜 아리마대 요셉인가, 그는 실존 인물인가 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크레그 박사는 부활에 관한 복음서의 기록들이 모두 다르다면서 아리마대 요셉은 모든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등장한다고 설명한다. 복음서들 중에서 가장 기록 연대가 빠른 마가복음에 따르면, 산헤드린 공회 전체가 예수를 사형시키는 데 표를 던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해 누가복음에서 의구심을 갖게 하는데, 누가는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 처형에 관한 투표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고린도전서에도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표현은 없다. 그 점을 근거로 예수의 영혼만 부활하고 육체는 무덤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크레그 박사는 유대인들의 관습과 사고에 대해 설명한다. 유대인들은 죽은 사람의 살이 썩어 버린 후 뼈들을 모아 상자에 담아 놓고 부활할 때까지,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의인들을 살리시고 그 사람들이 최후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같이 모일 때까지 보존하도록 했다.
따라서 그가 부활했지만 아직 시체는 무덤에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겐 모순된 생각이라며, 장사되고 삼 일만에 살아나셨다는 기록은 함축적이며 분명히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 어떻게 무덤을 지켰는가
예수가 무덤에 묻힌 것이 사실이라면, 다음은 어떻게 무덤을 지켰는가 하는 문제이다. 크레그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무덤 입구 밑에는 홈이 파져 있었다. 따라서 원반 모양의 큰 바위가 그 홈에 자리를 잡으면 무덤 입구를 완전히 막게 된다. 그런 다음에 그보다 조금 작은 돌을 사용해 바위를 지탱하게 했다. 바위를 굴리려면 최소한 남자 몇 명이 필요하다. 무덤을 지키는 일에 실패한다면 곧 죽음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훈련된 군인들이 24시간 무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대인 지도자들이 왜 파수꾼을 두고 무덤을 지키게 했을까 하고 크레그 박사에게 물었다. 예수가 부활할 것과 제자들이 예수가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꾸며 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그들이 부활을 예언한 예수에 대해 제자들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박사는 “도굴을 방지하거나 유월절 기간 동안 일어날 수도 있는 소동으로부터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고 간략하게 대답했다.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이 로마 군병인지 유대 군병인지는 모른다. 박사는 두 경우 모두 가능성을 두고 있었다. 마태가 파수꾼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성전을 지키는 군병들보다 로마 병사들을 가리킬 때가 더 많았다. 요한복음에는 유대인 지도자들의 명령을 받아 로마 백부장이 부하들을 이끌고 와서 예수를 체포한 것으로 기록한다. 따라서 무덤을 지킨 파수꾼들이 로마 군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 복음서의 빈 무덤을 믿을 수 있나
부활을 공격하는 많은 비평가들이 가장 주요하게 문제 삼는 것이 바로 복음서의 기록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 중에 부활하신 후 첫 아침의 빈 무덤에 관한 기록이 복음서의 신뢰성에 큰 손상을 입힌다고 주장한다. 복음서의 기록은 대략 이렇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무덤에 장사 지낸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후 첫 주일 아침에 그를 따르던 몇몇 여자들이 무덤을 찾아왔다. 빈 무덤을 발견한다. 천사들이 예수가 살아났다고 전해 준다.
에딘버그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마이클 그랜트는 다분히 회의적인 역사가이다. 그러나 그마저 빈 무덤을 인정했다. 저서 「예수: 역사학자가 본 복음서」에서 그가 한 말이다. “분명히 빈 무덤에 대한 복음서의 묘사는 각각 다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고대 문헌을 연구할 때 적용하는 똑같은 기준을 복음서에 적용해 본다면, 실제로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충분한 증거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빈 무덤에 관한 복음서의 진술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우리가 빈 무덤 이야기에 관한 여러 개의 독립적인 증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마태와 누가가 마가복음에 대해 알고 있다 하더라도 각각의 내용들은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의 이름과 수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어떤 복음서도 그에 대한 완벽한 명단을 제공하지 않는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의 이름은 복음서에 모두 등장한다. 따라서 복음서의 저자들은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 중 몇몇에게서 이야기를 들었고, 직접 대화를 나눈 여인들의 이름만 기록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함께 무덤에 갔지만, 기록되지 않은 여인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예수는 실제 꼬박 하루 동안 무덤에 있었고 나머지 이틀은 하루 중 일부 동안에만 무덤 속에 있었다. 예수가 자신의 예언을 성취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아니냐고 크레그 박사에게 물어봤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유대인의 날짜 계산법에 따른 것이라고 박사는 설명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부분적인 하루일지라도 온전한 하루로 계산했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후와 토요일 그리고 주일 아침 동안 무덤에 계셨다. 당시 유대인들의 시간 관념으로 꼬박 삼일인 것이다.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법학자 중 한 사람이던 노먼 앤더슨 경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했고 하버드 대학의 종신 교수였으며 런던 대학에서 학장으로 재직했다. 그는 평생 동안 법률적 관점에서 이 주제를 연구한 끝에 한 마디로 결론을 내렸다. “빈 무덤은 부활을 논박하는 모든 이론들을 단숨에 파괴해 버리는 단단한 바위와도 같다.”


글·리 스트로벨
탁월한 언론인으로 윌로크릭교회를 거쳐 현재 새들백 교회에서 구도자 사역과 구도자 전도를 위한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본 글은 두란노에서 출간한 「예수는 역사다」에서 허락 받아 발췌한 것으로, 미국 크리스천 도서 부분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부활 이후 성도의 몸은 어떻게 되는가>
 
“사람의 죽음 후에 있을 일은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철학자나 다른 종교인들 등 모든 인간의 최대 관심사이다. 실제로 죽음 후에 대한 내세 사상은 고금을 통해 전 세계에 보편화되었다. 석가는‘해탈을 통한 극락과 윤회’를 말했고, 플라톤이나 칸트 같은 철인들은 ‘영혼의 불멸’이나 ‘환생’을 가르쳤다. 하물며 바벨론의 ‘길가메시’ 시에도 ‘생명의 윤회설’이 등장하고 있다.
기독교는 초대 교회 시절에 교리 구성상 내세에 대한 인식이 미흡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내세에 대한 소망은 열정적이었다. 중세에는 내세에 대한 열망이 후퇴하고, 반 천년왕국의 견해가 성행했다. 천주교는 연옥설 같은 비성경적 교리를 용납하기까지 했다. 종교 개혁 이후 초대 교회의 종말관을 다시 회복했으나, 18세기에 자유주의가 종말론을 ‘양자’ 취급하면서 신학의 관심 밖으로 내몰고 말았다.
오늘날 잘못된 종말론에 맞서기 위해 다시 건전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면 죽음 이후와 관련해 영생 그리고 중간기 안식과 육체의 부활에 대해 간단하게 대답을 찾아보자.

 * 죽음이 끝인가 아니면 영생이 있는가
현대의 진화론이나 유전 공학은 영생을 부인한다. 현대 신학은 육체의 부활이 없는 영생을 믿고 있다. 또 어떤 신학은 인간의 죽음을 종말이라 보고 그것을 정상적이거나 자연적인 현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죽음은 비정상적이고 자연적이지 않으며 영생이 있다고 말씀하신다(창 3:6∼15, 롬 6:23). 특히 믿는 사람들의 죽음은 비정상적 징계와 훈련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다(히 12:6, 시 116:15, 벧전 4:12∼13). ‘징계와 훈련’의 의미는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각 사람의 날의 완성과 다른 영역 즉 천국으로 이전을 말하는 것이다.
영생에 대한 관심은 미래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라 욥이 고백했듯이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욕망, 즉 더 큰 날에 대한 자연적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욕망 때문이다(욥 19:26). 영생이란 말은 ‘죽지 아니함’에서 온 말인데,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근원적 영생이나 시작이 없는 영생과는 다르다(딤전 6:16 참조). 성경에서 인간의 영생을 말할 때 “죽음과 관계가 없으며 죽음의 밥으로 될 가능성이 없는 인생의 지복(至福) 상태를 가리키며, 이것이 인격적 영생 혹은 완전한 영생을 의미한다”(박형룡, 「내세론」, 27쪽).
고린도전서 15장 51∼54절 말씀을 보면 영생을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썩지 않음과 죽지 않음이다. 먼저 ‘썩지 않음’은 ‘불부패’를 말하며, 성령 안에서 현재 누리고 있는 평안과 희락과 같은 생명의 풍성한 질을 나타낸다. ‘죽지 않음’은 ‘불사’를 뜻하며, 미래에 시간과 양으로 풍성한 생명을 의미한다. 기독교는 영혼만 믿는 것이 아니다. 영혼과 육체가 같이 영생한다고 믿으며 그것을 인격적 영생이라 한다.

 * 사망과 부활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사망과 부활 사이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중간기 상태’이고, 사망과 부활 사이에 영혼이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교회사적으로 중간기 상태를 ‘최종 응보의 축쇄판’으로 보는 견해와 ‘의인의 영혼은 사후에 직접 천당으로 간다’는 관념이 대립하고 있다(박형룡 저서 120∼121쪽 참조).
네덜란드 개혁 교회는 이 문제와 관련해 비성경적 관념들을 여덟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는 사후에 연속된 존재가 없는 것처럼 말하는 유물주의, 둘째는 영은 하나의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겨진다는 영혼 재래설, 셋째는 죽은 자는 사후에 의식이 없는 상태가 된다는 주장, 넷째는 죽은 자의 영과 접촉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강신술, 다섯째는 죽은 자는 새로 영묘한 몸을 입고 일시적으로 존재한다는 견해, 여섯째는 사후에 불신자는 존재하지 않고 신자만이 존재한다는 조건적 불사설, 일곱째는 죽음이 하나님의 최초 창조의 일부였다는 주장, 여덟째는 죽은 후에 회심하는 모든 종류의 가능성에 대한 주장 등이다(W. J. 그리어, 「성경적 종말론 연구」, 139쪽).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한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말씀하신 ‘낙원’은 중간기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장소적 의미보다 신자의 영혼이 사후에 즉각적으로 ‘천국의 영광’에 들어간다는 것을 증거한다(고후 5:8, 박형룡의 저서 125쪽 참조). 물론 악인은 지옥 혹은 음부에 들어가는 것으로 본다(눅 16장의 부자 이야기). 그러므로 중간기 상태는 의식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고 죄와 그 부정적 결과가 소멸되며, 천사처럼 육체 없이 사는 것을 말한다.
개혁 신학자들은 이때 사후 영혼은 의식적일 뿐 아니라 활동적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영혼의 활동을 말하지만 이것을 과장해 영혼 ‘시련설’(試鍊說)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 몸의 부활은 만물의 부활을 의미하는가
과연 하나님의 나라에는 영혼만 반짝거리고 육체는 없는가? 인간 육체는 부활하지만 만물은 소멸될 것인가? 아니다. 영혼과 함께 육체와 만물이 부활한다. 부활은 인간 육체의 부활뿐 아니라 변형된 만물 즉 동물, 식물, 문화 등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부활은 인간 육체의 변형일 뿐 아니라 만물의 변형이고 유기적 재창조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부활은 현세에서 온갖 고난을 맛본 성도들에게 최대의 기쁨과 위로이다.
박형룡은 부활한 육체의 성질을 네 가지로 제시했다. “부활 후의 신체는 인생의 형상을 보유할 것이다. 미래의 신체는 지상에 있던 신체의 영화물일 것이다. 천상에서 우리는 친우들을 인식할 뿐 아니라 지상에서 서적을 통해 알던 선지자, 사도, 신앙 고백자, 순교자들을 소개 없이도 알아볼 것이다. 부활체는 썩지 않고 죽지 않으며, 강하고 영광스러우며 신령한 몸이 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완전한 구원이다”(박형룡의 저서 298∼301쪽).
특히 인간의 부활체는 현재 갖고 있는 육체와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관계를 갖게 될 것이다. 현재 모습을 유지하지만 늙지도 않고 병도 없으며 죽지도 않는 전혀 새로운 육체를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성격의 완전한 갱신과 변형의 부활 교리를 ‘만유갱신설’이라고 한다. 이것은 현재의 육체와 만물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완전멸절설’이나, 현재의 육체와 만물과는 전혀 다른 것이 창조될 것이라는 ‘완전재창조설’과는 차이가 있다.
만약 육체와 만물이 갱신하거나 변형되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거나(완전소멸설) 완전히 재창조(완전재창조)돼야 한다면, 신정론(神正論)은 진리로 판명될 것이며 사탄의 계획은 성공할 것이 분명하다(최홍석, 「천년 왕국과 종말」, 165쪽). 그러므로 부활은 은밀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일어날 것이며 신자들뿐 아니라 악인들도 부활하는 보편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악인은 고통의 심판을 받기 위해 육체로 부활하고, 선인은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을 맛보기 위해 육체로 부활한다.
부활한 후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심판은 예수님 안에서 의롭다고 인정된 자들이 자신들의 신앙, 증거, 생활에서 하나님을 위한 업적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 구원의 섭리에 나타난 지혜, 권능, 오래 참음 등을 고백한다.
죽음 이후의 삶은 거울을 보듯 아직은 희미하다.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해 모두 완전히 알 수 없을 뿐이지 불확실한 것은 아니다. 사실 성경의 계시는 확실할 뿐 아니라, 이미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고 앞으로 같은 성격으로 우리 모두에게 실현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현실화되기 전에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의 부활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 형벌의 부활이 있을 것이다.

글·성인경 한국 라브리선교회 대표로 「진리는 시퍼렇게 살아있다」 등 저서가 있다.

 

  <부활과 주일의 관계는 무엇인가>   

“부활절이 다가 왔다. 예수님께서 죽음과 흑암의 세력을 깨뜨리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첫 열매가 되심으로써 영원한 삶에 들어가신 날을 기념하는 부활절을 다시 맞으며 우리는 과연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 부활의 역사를 인정한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 앞에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역사성에 대한 상기(想起)는 언제나 중요하게 언급돼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지금도 살아 계시며 영원히 부활의 생명을 가지신다. 그러므로 부활의 역사성에 대한 부인은 결국 예수님의 모든 것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부활의 의미에 대해 아무리 학문적인 말을 많이 하고 그 의미를 풍성히 한다고 해도 부활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전적인 부인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 어떤 학자들이 생각하듯,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로 인해 새로운 존재 방식에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시체가 무덤에 있다고 해도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태도는 결국 부활 자체를 부인하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의 역사성을 추호(秋毫)도 의심하지 않는 성도는, 올해 부활절을 맞아 다른 측면에서 부활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는 부활절에 대해 일년에 한 번 부활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는지 깊이 반성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일년에 한 번도 제대로 진정한 의미의 부활절을 생각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부활의 역사성에 의문을 표하는 많은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정작 부활의 참된 의미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비판과 조롱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면 과연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

* 주일마다 부활을 기념한다
엄밀히 말해 그리스도인들은 매주일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해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부활과 관련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 날에 함께 모여 모든 인류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리며 찬양한다. 또한 그분의 뜻을 나누고 그 뜻대로 살자며 서로 권면하고 격려한다. 이것이 주일에 성도가 모이는 이유이고 주일의 참된 의미다. 그래서 우리는 일 년에 한 번이 아니라, 주일마다 부활의 의미가 가득하게 보내야 한다.
성도는 매주일 예배를 위해 모일 때마다 인간의 구속을 이루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려는 마음으로 가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지 않는 주일과 예배는 그 본질이 상실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주일 예배 때마다 부활의 주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이 넘쳐 나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인류 구속의 의미를 분명히 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구속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매주일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부활절 기념은 무의미해진다. 주일을 부활의 의미로 충실하게 보내는 교회는 매주일을 부활절로 보낼 수밖에 없다.

매일 부활의 생명으로 산다 매주일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 보내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일의 삶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일으킴을 받아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매주일을 부활의 의미가 가득하게 살려면 우리는 매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일으킴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몸의 온전한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살아야만 한다.
이것이 성도로 살아가는 진정한 길이다. 따라서 참된 성도로 산다는 것은 매일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일이다. 부활을 믿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참여해 그분의 부활 생명 안에서 사는 것이다. 우리는 순간마다 중생으로 인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얻은 부활 생명의 빛에서 살아가며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해 교회가 늘 강조하는 ‘이미 … 그러나 아직 아니’의 구조가 있다. 주님의 부활에 연합해 우리는 중생에서부터 이미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성도는 부활의 생명에 참여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아직 아니’의 측면도 있어서, 우리는 바울처럼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순간마다 육체, 즉 부패한 인간성의 잔재를 죽이고 영을 살려가야 한다. 날마다, 순간마다 말이다. 그것이 주님께 주일을 의미 있게 드리는 길이고, 따라서 매일과 매주일을 제대로 보낼 때 해마다 부활절을 의미 있게 맞을 수 있다.

 * 주님의 부활에 참여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보아야 한다. ‘과연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매일, 매순간을 그분의 부활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또 ‘나는 매일, 매순간을 부패한 인간성의 잔재를 죽이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이런 자문을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사로 잡혀서 살지 않는다. 자신의 과거나 현재의 욕심에 사로 잡혀서 살지 않는다. 자신의 미래나 무엇을 이루어야 한다는 욕심의 열망에 사로 잡혀서 살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빛에서 자신의 욕심에 대해 죽은 사람으로 살게 된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새 생명에 참여해 살아간다.
이제 성도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행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의 뜻을 성취해 간다. 성도의 삶이 변화할 때 교회의 진정한 의미가 성취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성도는 주님께 행하는 순종을 개인의 공로로 여기지 않는다.
올해 부활절에 모든 성도는 순간과 매일 그리고 주일마다 부활의 의미로 충만한가 스스로 깊이 있게 자문했으면 한다. 우리의 부족한 모습에 대해 애통해야 한다. 더불어 우리의 삶에서 부활의 의미가 잘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모두 성령님께 의지해 힘써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성도들이 변할 때 세상은 달라진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 부활 생명의 힘을 드러내는 길이다.


글·이승구 국제신학대학원대학 조직신학교수로 「개혁 신학 탐구」, 「성령의 위로와 교회」 등 저서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현대 명작 단막극 선집 - 국내외 단막극 16편과 해설
김성희 엮음 / 연극과인간 / 2000년 4월
평점 :
품절


좀 부끄러운 얘긴지는 모르겠지만,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이 작품을 많이 보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많이 읽는 것(희곡을)이 좋은가 의문을 가졌었다. 하지만 작가에게나 연출가에게나 또는 연극을 사랑하는 관객(독자)에게나 희곡은 많이 읽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비로소 새삼 깨달았다.

이 책을 역은 김성희 씨도 이 책의 머릿말에서, "희곡의 독서가 보편화되어 있지 않으면 문화산업으로서의 드라마가 발전하기 힘들다."라고 그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그는 헤겔의 말을 인용해, 희곡이 시와 소설의 특성을 다 갖춘 변증법적 형식이라 하여 가장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래서 그럴까? 사실 몇몇 작품은 좀 얼른 와 닿지는 않았다. 몇몇 작품이 나에게 어렵게 느껴지는 건, 일상어가 아닌 시어에 가깝고 초현실적인 감이 없지 않아서 인지도 모르겠다. 예를들면, 장정일의<어머니>나 오태석의 <교행>등. 

하지만 이근삼의 <막차탄 동기동창>이나 머레이 쉬스갈의 <타이피스트> 같은 경우는 여운이 꽤 오래 남았고, 나 개인적으로 단연 압권이라고 생각되는 작품은 뒤렌마트의 <황혼녘에 생긴 일>이란 작품이 좋았다. 작품이 갖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면도 인상적이거니와 탐정소설의 구도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작가와 독자의 존재 양식을 너무나 섬뜩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그 작품의 탁월함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나아가서 과연 이 사람이 누구며 이 밖에 어떤 작품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지 알고 싶어졌다.

이 책의 장점은 16 작품에 대해 작품 하나가 끝날 때마다 저자의 꼼꼼한 해설과 깊이 보기를 위해 몇가지 질문 사항을 써 놨다는 것일게다. 그러므로서 작품을 더 상세히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연극의 흐름에 맥을 짚어 볼 수가 있어 좋은 독서 체험이 되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메시지 2004-03-19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게 읽었습니다. 연극과 인간에서 나오는 희곡집들이 꽤 괜찮은 편이에요.
저도 희곡읽기와 연극보기 모두를 하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연극을 보러가기가 무척힘들답니다. 직장인이며 지방에 있기에....
 
 전출처 : 비발~* > 펌> 감독들의 3.12

"한나라당 의원들이 뒷짐지고 서 있는 장면, 공포영화를 보는 듯했다"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박찬욱 감독(42)

                                                                       
"요즘 파주에서 계속 영화 촬영중이라 '생중계'로는 보지 못했다. 저녁뉴스로 편집된 화면을 봤다. 내게 그날의 영상은 한 편의 '공포영화'였다. 의장석에서 끌려나와 통곡하고 있는 열린우리당 의원들 모습이 슬펐다기 보다 한쪽 편에서 뒷짐지고 있는 서 있는 한나라당 의원들을 보면서 괴괴한 느낌이었다. 뒤쪽 멀리 떨어져 최병렬 대표나 박근혜 의원 등 지도부가 당당하게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그랬다.

다들 생각이 비슷할 거라고 본다. 한심했다. 마음 한편에선 사회개혁이나 개선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하는 좌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한국 정치역사의 엄청난 퇴보다. 87년 6월항쟁이 떠올랐다. 그 때 청산하지 못한 기득권 세력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그들이 얼마나 끈질길 수 있는지, 또 그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얼마나 질긴지 이번 탄핵안이 통과되는 걸 보면서 실감했다."


--------------------

"돌아온 좀비들...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반드시 귀환한다"
- <조용한 가족> <반칙왕> <장화, 홍련> 김지운 감독(42)

"참담하다.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탄핵 결과에 대한 파장이 클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설마 가결이 되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국회의 정치수준은 영화감독의 상상력을 초월했다. 어떤 잣대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만약 지금의 탄핵정국을 시나리오로 쓴다면 유치하다고 충무로에서 퇴짜맞는다. 말도 안되는 상상력은 공감대를 얻지 못한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박수치고 만세 부르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한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그러니까 박수를 치고 좋아하는 것 아니겠나. 탄핵이 가져올 여파에 대해 판단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나. 물론 전에도 정치인들이 실소를 자아내는 장면은 여러 차례 연출되었지만 이번 사태는 그 정점이다.

탄핵에 찬성한 193명의 의원들은 괴상망측한 몰골의 '돌아온 좀비들' 같았다. 앞으로 나가던 역사를 거꾸로 돌려놓는 집단적 광기였고, 동시에 좀비를 맞이하는 기분이었다. 좀비들에게 역사가 발목이 잡힌 것이다.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반드시 귀환한다. 지난 역사 속에서 국민들이 잘하겠지 하면서 봐준 게 있다. 그 잔재가 망령을 불어들였다.

어쨋든 살아 있는 사람들과 좀비들과의 한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번 총선을 기점으로 다시는 좀비들이 살아오지 못하게 확실히 매장해야 한다.

-----------------------

 "힘으로 눌러버린 강간...결국엔 자위로 끝난 포르노 스펙타클" 
 [기고]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본 3·12 
 
그날 대통령 탄핵가결안을 통과시키는 국회의 스펙터클은 내게 정치적이라기보다는 포르노그래픽하게 보였다.

첫 번째 이유는 그걸 보는 내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협상과 토론의 중재에 의한 정치가 없었다. 그냥 힘으로 눌러서 벌이는 강간처럼 보였다. 그리고는 보는 우리에게 즐겁지 않느냐고 뻔뻔하게 물어보는 중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이유이다. 그건 사실상 했는데 당사자들은 안 했다고 생각하고 있거나(그래서 국민들이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혹은 안 했는데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여전히 자신들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갈 데까지 가서 다 보여주고 말았다. 그런데 그건 한 게 아니라고 우기고 있다. 애처로운 일이다. 거기서 오르가즘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그들이 잊어버린 것이 있다. 포르노그래픽한 스펙터클은 두 가지 약점이 있다. 그 하나는 흥분은커녕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아무리 잘해봐야 그건 자위행위로 끝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민주주의라고 착각한 포르노그래픽한) 스펙터클을 보여주었지만, 거기서 흥분한 연기는 가증스럽고 유치한 것이었다.

사실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포르노그래픽한 스펙터클을 보고 부끄러워하는 것은 항상 그걸 보는 사람들이지 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걸 보고 그냥 웃자면 익살스럽기도 하지만, 이 스펙터클에 함께 참여하라고 제안을 받으면 그건 끔찍한 일이다. 그러므로 광화문에 선 그 수많은 시민들이 노! 라고 말하는 것이다.

정말 그대들은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런데도 방송국을 찾아다니고 신문사를 끌어들이고 있다. 그러면서 중언부언하는 중이다. 무슨 말을 이렇게 복잡하게 말하느냐고? 그냥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같다'는 말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만 더.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 당신이 잘 해서 이 포르노스펙터클과 맞서면서 당신 대신 거리에 서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이 한국군을 이라크에 파병한 것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나의 차선이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브리짓 존스의 일기 - [할인행사]
샤론 맥과이어 감독, 르네 젤위거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이 영화는 재미있다. 로맨틱하고, 코믹하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르네 젤위거는 어쩌면 그렇게도 짜증나는 푼수역을 천연덕스럽게 잘도 소화해 내던지. 그것이 주인공이 갖는 캐릭터가 아닌가.

영화는 결혼 안한 여자들이 갖는 환상이나 강박관념을 가벼운 터치로 잘 보여준다. 예를들면, '바람둥이를 조심하라.' 그러나 그것 역시 주인공을 피해 가지 못했다. 어찌보면 그건 통과의례 같은 것이 아닐까? 조심하면 왜 조심해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 것인지, 어느 정도로 조심해야 하는 것인지. 등등. 사람들은 결과만 막연하게나마 알거나 씁쓸하게 안다. 전자는 경험을 안 해봤을 경우고, 후자는 해 봤을 경우일 것이다. 그리고 고민을 하지. 나는 이대로 독신으로 지내야 하는 것일까? 과연 나에게도 맞는 짝은 있는 것일까 하고.

대부분의 사랑 영화가 그렇듯, 사랑을 이루는 과정은 보여주지만, 그 이후에 어떻게 됐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에게 맞는 짝은 이 세상 어디엔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사랑을 지켜나가는 것은 역시 본인들의 몫인 것 같다. 그런데도 그 사랑을 못 만난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다 남의 사람이 되있어."라고. 얼마나 서글픈 현실인가.

내가 이 영화에 관과할 수 없었던 건, 일기가 갖은 특성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일기는 나만이 아는 얘기를 독백으로 쓴다. 거기엔 누구도 볼 수 없고 개입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일기에 갖는 보편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오늘 날 인터넷 사이트나, 자기 개인 홈페이지를 통해 공공연히 자신의 일기를 공개한다. 거기엔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 아직 쑥스러워서 그런지 공개일기는 확실히 100% 공개되지 않는 것 같다. 그저 내가 공개할 수 있는만큼만 공개되는 것같다.

일기는 어디까지 진실을 쏟아 부을 수 있을까? 솔직히 이 영화에서의 일기는 정말 일기라기 보단 메모나 낙서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메모나 낙서 같은 일기에서도 진실할 수 없는 주인공의 심리를 포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기란 필요없는 걸까?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일기는 쓸 때는 자기 자신에게(또는 위하여) 쓰지만 언젠가는 공개된다. 아니 어쩌면 무의식 중에라도 공개되길 바라면서 쓰고 있겠지. 개인사적 사료로서도 필요할 것이고. 내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족적을 남기고도 싶고. 또 잘하면 문학사(안나의 일기처럼)나 미시사적 관점에서 필요할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말이 생각이 난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기가 쓴 일기를 태워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고 그것을 실제로 태워버리기도 하지만, 또 언젠가는 그런 자신을 후회하게 된다고.

난 아직까지 그런 충동을 느껴 본적은 없다. 부담스럽긴 하지만. 다시 읽고 싶은 생각도 없고. 요즘엔 모아두는 건 좋은데 쌓아두는 건 왜 그리도 부담스러운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waho 2004-05-01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도 그렇지만 책도 가볍게 읽기 좋더군요. 전 글을 쓰는 버릇이 안 되어 있어서 일기는 초등학교 이후로 써 본적은 없지만 남의 일기를 읽는 것은 즐겁죠...비록 소설이라도...전 즐겁게 읽은 책입니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나 「고통의 문제」 등으로 이미 국내에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대단한 영적 통찰력을 지닌 작가이지 않는가? 내용이 쉽지 않은 면도 있던데….
지난해 영국에 갔을 때 잠시 머문 집 주인이 루이스의 애독자였다. 그에게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 한국어판을 보여 주며 “내용이 쉽지 않다”고 말하자, “쉽지 않은 게 아니고 깊이가 있다”고 대답하더라. 그 말에 수긍했는데, 정말 쉽지 않다기보다 그 깊이가 여느 작가들과 달라 ‘쉽지 않게 느껴지는’ 것 같다.

「예기치 못한 기쁨」에는 ‘C. S. 루이스 회심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지금까지 나온 루이스의 책들과 달리 지극히 사적인 고백들을 많이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그 점이 「예기치 못한 기쁨」의 큰 매력 중 하나다. 그리고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는 루이스의 어릴 적부터 청년기까지 사진들이 맨 앞에 별도 편집돼 있어 흥미를 더한다. 루이스는 머리말에서 “내가 어떻게 무신론자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하게 되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의 대답은 아주 성공적이다.

내용을 짤막하게 간추려 들려준다면?
루이스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고 상상하기를 좋아했다. 이미 다섯 살 때 직접 동화를 쓰고 그 동화의 삽화를 그릴 정도였다. 암에 걸린 어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회의를 가져다 준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 후 여러 학교를 거치면서 그는 희미하게 남아 있던 신앙의 그림자를 모두 지워버리고 마침내 중학교 시절에는 무신론자가 된다.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가기 전 커크 패트릭이라는 개인 교사에게 배우게 되는데, 패트릭은 무신론자에다 철저한 변증주의자였다. 그런데 그에게 배운 변증론적 사고가 나중에 루이스의 무신론을 깨는 무기로 쓰이게 된다는 점은 참 흥미로운 역설이다. 1929년 루이스는 여름 학기에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회심을 두고, 하나님께 ‘강제로 끌려갔기 때문에’ 제 발로 집을 찾아간 탕자보다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특별히 「예기치 못한 기쁨」에서 주목해 읽어야 할
포인트가 있다면?

루이스의 책들을 읽다 보면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할까?’하고 절로 탄성이 나오는 적이 허다하다. 「예기치 못한 기쁨」은 루이스의 생각의 속살이 오래도록 씹히는 책이다. 또한 이 책은 큰 틀에서 종교적 회심을 그리고 있지만, 문체나 글의 구성상 영문학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문체뿐 아니라 그 문체를 고스란히 맛보게 해 주는 번역, 자기 고백적인 생각, 사고의 편린들을 한 올씩 음미해 보라. 그리고 번역자의 분투를 보여 주는 역주(譯註)를 성실히 따라가 보라. 그러면 왜 다 읽고 난 사람들이 ‘이런 재미가 있는 책도 다 있네’라고 말하는지 알게 된다.


글·옥명호 홍성사 편집실장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설박사 2004-03-15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개인적으로 c.s.루이스를 좋아합니다만.. 이 책은 읽다가 말았습니다. 그 예기치 못한 기쁨을 발견하기까지 좀 지루하더라고요. 아마, 지금 읽으면 끝까지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stella.K 2004-03-15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읽지도 못했습니다. 전 귀가 얇아 남의 얘기 잘 듣는 편인데, 설박사님 때문에 이 책 고려대상이 되었네요. 저에겐 이 책이 '예기치 못한 슬픔'이 될 것 같습니다. 어쩌죠...흠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