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비발~* > 알고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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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신화 속 신들은 시대에 따라 변신한다"
그리스 신화의 이해
이진성 지음 / 아카넷 / 560쪽 / 1만8000원


“제우스는 헤라와의 사이에서 아레스를 낳았고, 레토와의 사이에서 아폴론을 낳았어요. 프리아모스의 아들인 파리스는 메넬라오스의 아내였던 헬레네와 결혼해서….”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그리스 신화(神話)에 나오는 신(神)과 영웅들의 계보를 줄줄 읊는 것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진성 연세대 불문과 교수가 최근 출간한 ‘그리스 신화의 이해’는 벌써 몇 년째 계속되는 그리스 신화 붐을 보며 “이제 신화라는 ‘고전(古典)’을 제대로 읽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절실한 필요성을 느낀 결과물이다.

“그동안 그리스 신화 관련 서적은 대개 오비디우스의 ‘변신’이나 토마스 벌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등을 참고한 에피소드 중심의 서술이 많았습니다. 이런 방식은 독자들의 흥미를 돋우긴 하지만 ‘신화의 숲’을 보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됐죠.”

그보다 먼저 도대체 왜 우리나라에서 ‘그리스 신화 붐’이 일어났을까? 이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생활이 윤택해지고 문화가 발전할수록 지적 호기심이 늘어나게 됩니다. 외국여행의 기회가 많아졌고 서구와의 왕래도 흔한 일이 됐죠.

그런데 서양 문화의 원류인 그리스 신화를 모르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서양 문명 자체를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초창기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왔던 대학생들이 이제 부모가 된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그리스 신화를 읽힌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얘기다.

단지 그것뿐일까? “또 있죠. 그리스 신화에는 아이들이 열광할 만한 ‘재미’가 있습니다!” 신화에는 다른 문학작품에선 찾아볼 수 없는 환상성과 초현실성이 존재한다는 것. “600만불의 사나이나 수퍼맨 같은 SF 수퍼 히어로들은 모두 그 원형이 헤라클레스나 테세우스 같은 ‘영웅 신화’에 있단 말입니다.”

앞서 나온 ‘신화의 숲’ 이야기로 돌아가자. 19세기 중반에 미국에서 나온 벌핀치의 책은 당대의 베스트셀러였지만 몇 십년 전 우리말로 그 책이 번역됐을 땐 그렇지 못했다. “우리가 서양의 고대사와 지명·인명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신화의 총체적인 이해’를 노린 일종의 개론서다. 말이 ‘개론서’지 분량은 600페이지에 가깝다. 신화의 성격과 특징, 형성 과정을 먼저 제시한 뒤 ‘창세 신화’ ‘올림포스 신화’ ‘영웅 신화’의 3개 장으로 구분해 신화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뒤 그리스 신화의 역사적 변모와 연구사까지 소개했다.

“서구 문화가 세계성을 확보하게 된 원인이 바로 그리스 신화에 담겨져 있어요. ‘개념 중심’의 고전이 힘을 얻은 동양에 비해 서양은 리얼리티를 묘사하는 ‘작가적 상상력’에서 앞서 있었습니다. 바로 이 상상력이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용되고 반복되면서 서구 문화를 꽃피웠던 것이죠.” 예를 들어 중세 유럽에서 제우스 신은 십자가를 든 배불뚝이 수도승으로 표현되기도 했는데, 이는 ‘당대의 가장 도덕적인 인물’의 형상화였다는 것이다.


불문학을 전공한 이 교수가 그리스 신화에 관심을 가진 것은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몽펠리에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던 시절로 올라간다. 유학생인 그의 눈에 비쳤던 유럽문명은 온통 그리스 신화에 침잠되고 채색된 듯한 모습이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밀로의 비너스’,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라오콘’,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의 ‘비너스의 탄생’…. 서양문명 공통의 고전이라고 할 그리스 신화를 모르고선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그리스 오르페우스 신화를 소재로 ‘신화 및 신비주의적 발상’이란 제목의 박사논문을 써서 학위를 받았다. 이후 파리 10대학 신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있으면서 ‘신화 탐구 역정’을 계속됐다.

“새학기에 책 제목과 같은 교양강의를 개설했어요. 수강생이 300명 가까이 몰리는 걸 보고 젊은 학생들이 신화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걸 실감했죠. 강의실이 넘쳐 많은 학생들이 그냥 돌아갔습니다만….” 이 교수는 그리스 신화 중 가장 감명깊은 부분을 묻자 “인간의 욕망·질투·명예와 온갖 전쟁·영웅담이 펼쳐지는 트로이 전쟁이야말로 그리스 신화의 백미”라고 말했다.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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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예술의 뒷면에 어른거리는 경제의 그림자

예술의 역사-경제적 접근 … 이재희·이미혜 지음 / 경성대 출판부


 

경제의 ‘보이지 않는 손’은 예술에도 작용한다. 18세기 영국과 프랑스에 등장한 근대소설은 경제적 환경의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시장 경제가 확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역동하는 중간 계급의 생활세계를 사실적으로 그린 소설들이 유행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의 프랑스에서는 왕정과 귀족이 예술가를 후원하는 제도가 엄존했기 때문에, 소설가들은 비사실적인 우화와 귀족의 생활을 반영하는 에로티시즘에 탐닉했다.

세익스피어의 희곡에는 왕이나 귀족 등 고귀한 신분의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했지만, 18세기 영국 소설 ‘로빈슨 크루소‘는 전 세계를 무대로 부를 축적했던 당시 중간 계급의 세계관을 대변했다.

무인도에 홀로 떨어진 로빈슨 크루소는 28년 동안 금욕적으로 지내면서 쉬지 않고 일을 한다. 크루소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은 채 재화를 거두는 과정을 그린 이 소설은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지 않다는 중간 계급의 자유방임주의를 반영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보다 앞서서 자유주의를 예찬한 셈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어떻게 富를 축적했나

18세기에 바로크 미술이 섬세하고 우아한 로코코 미술로 넘어가면서, 화폭에는 궁정의 풍속이 아니라, 귀족들의 사냥과 아유회가 더 많이 등장하게 됐다. 위선적인 궁정 생활에 싫증이 난 귀족들이 그에 대한 반동으로 전원 생활을 이상화했기 때문이다.

궁전 안에 시골집을 지어놓고 양치기 놀이를 즐겼던 귀족도 있었다. 그래서 당시 미술에서는 양치기 소년이 자주 등장했고, 그림 속의 양치기는 거친 노동에 시달리는 청소년이 아니라, 깊은 사색에 잠긴 채 양떼를 바라보는 기품있는 인물로 묘사됐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노동문학이 크게 떠올랐다. 후원자를 잃은 작가들이 실업자와 같은 처지로 전락하면서, 당시 증가된 노동자 계급에 심정적으로 동질감을 느꼈다. 작가들은 왕과 귀족에 이어 사회의 지배 세력으로 자리잡은 부르주아지를 비판하면서 하층 노동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그러나 노동 문학은 20세기에 들어와 문학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이 책의 저자는 그 이유에 대해 “노동자들은 19세기 후반에 문맹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노동문학에는 관심이 없었다”면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답답하고 비참한 일상 생활을 다룬 소설보다는 귀족과 중간 계급의 생활을 다룬 통속 소설을 읽으며 잠시나마 환상에 젖는 편을 택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생활을 다룬 에밀 졸라의 소설들은 주로 중간 계급에서 널리 읽혔다. 하층민들의 생활을 엿보는 재미를 통해 안락한 일상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중간 계급들 덕분에 졸라의 소설들은 당시로서는 드물게도 10만부 이상 팔리는 성공을 거뒀다는 것이다.

경제학자와 불문학자가 공동으로 펴낸 이 책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서양의 예술사를 훑어 가면서 시대별로 예술과 경제의 상호 작용을 확인시켜준다. 난삽한 이론보다는 풍부한 사례들을 대거 동원하면서 서양 예술에 드리워진 경제의 흔적을 명료하게 드러냈다.

(박해현기자 hhpark@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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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꾀 부린 자, 꾀로 망할 것이니…위선과 변명 꾸짖는 '성인 우화'
라퐁텐 그림 우화/ 장 드 라 퐁텐 지음/ 박명숙 옮김/ 시공사

여우의 초대 자리에서 황새는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그릇에 담긴 먹음직스런 음식들….

그러나 황새의 긴 부리로는 아무 것도 집을 수가 없었다. 환상적인 음식, 이 모든 것이 넓은 접시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새라고 답할 길이 없으랴. 황새는 여우를 청했다. 이번엔 모든 산해 진미가 목이 긴 병에 담겨 있었다. 하하! 세상엔 이런 복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우도 황새도 어느 쪽도 행복하지 못했다. 우린, 지금, 여우와 황새의 손님 초대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 퐁텐은 ‘황금 알을 낳는 암탉’을 들려주면서 “우리는 너무 일찍 부자가 되기 위해 오히려 순식간에 가난해진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라며 어른들의 탐욕을 직접 꾸짖는다.

끝없이 지키지 못할 약속을 거듭하는 ‘목동과 사자’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화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르다. 아주 작은 동물이라도 우화 속에서는 주인 역할을 한다. 단순한 도덕론은 지루함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통해서 교훈을 들려주는 것이다. 여러 종류의 꾸민 이야기를 통하여 가르치면서 즐겁게 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아는 이야기, 라 퐁텐의 ‘우화(寓話)’가 마침내 우리말로 모두 옮겨졌다. 본디 12권으로 이뤄진 책을 삽화를 곁들여 양장본 1권으로 묶었다.

황새와 여우가 서로 식사 자리에 초대해서 골탕을 먹이는 이야기, 멍청한 까마귀가 고기를 물고 있다가 “예쁜 목소리를 들려달라”는 여우의 꾐에 빠져 고기를 놓치는 이야기, 진수성찬과 맞바꾼 목걸이를 거부하고 멀리멀리 달아난 늑대 이야기….

솔직히 털어놓자. 라 퐁텐의 우화를 우리가 아는가.

그동안 우리가 읽은 우화는 어린이들을 위한 도서로 재편집돼 돌아다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교훈적이며 풍자적인 내용과 동·식물이 화자로 등장하는 형식이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라 퐁텐도 이솝도, 어린아이들을 염두에 두고 우화를 쓰지는 않았다. 우화는 그야말로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다. 거짓말에 익숙해 있고, 언제든지 온갖 궤변으로 자신을 변호할 준비가 되어 있는 우리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다.

이번의 우리말 완역본은 1834년에 프랑스에서 펴낸 초판본을 옮긴 것이다. 이 책은 고서적상 김준목씨가 이탈리아의 한 시골 마을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라고 한다. 시골 농부의 서재에서 100년이 넘도록 잠자고 있던 그 오래된 책의 느낌을 고스란히 살린, 심지어는 먼지와 곰팡이까지도 보여주고자 애쓴 표지 장정은 아름답다.

그리고 작품 한편 한편마다 판화가 구제의 세밀화가 문자를 이미지로 받쳐주고 있어, 책이 출간된 19세기의 정신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망외의 소득도 있다.

그렇지만 시적인 원문을 그대로 옮긴 데다가, 글씨의 크기도 작고, 어른들 세계의 실상을 엑스레이 필름처럼 환하게 드러내는 작품도 적지 않아 아이들에게는 적당하지 않아 보인다. 적어도 청소년은 되어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라 퐁텐의 애초의 의도가 그러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고대인의 영혼이 우리들 현대인의 몸 속에, 그리고 불투명한 삶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야기꾼 라 퐁텐의 이 마르지 않는 샘물을 천천히 맛보기를. 작가의 이름 라 퐁텐은 프랑스어로 ‘샘’이라는 뜻이다.

작품의 유명세와 달리 작가 라 퐁텐이란 인물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은 작가의 조국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다. ‘우화’ 몇 소절 정도는 누구나 다 암기할 정도로 유명한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물 됨됨이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런데 이 독특한 장르의 글인 ‘우화’의 성격을 알기 위해서라도 이 ‘기이한 역설’의 주인공인 그를 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장 드 라 퐁텐은 1621년 샹파뉴 지방에서 태어났다. 부르주아지 가문의 자식으로 부친에게서 적지 않은 땅과 함께 물과 숲을 관리 감독하는 직위를 물려받는다. 그리하여 거기서 들어오는 연금과 세금으로 부르주아의 안온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평범한 삶을 택하지 않는다. 라틴어로 된 고전과 당대의 시인들에게 매료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버리고 글쓰기를 선택한다.

결혼을 하여 아이까지 하나 두었지만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족을 버리고 파리로 올라가 독신의 자유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다. 사교계를 드나들며 시적 재능을 펼칠 기회를 찾은 것이다. 하지만 문학적 영광은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당대의 권력자인 재무총감 푸케에게 시를 지어 바쳐 그의 총애를 받았지만, 그것도 푸케의 실각과 함께 끝났다. 성공을 갈망하며 여러 권의 에세이를 남겼고, 그 가운데 하나는 훗날 시학 이론서에 이름이 오르지만, 4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라 퐁텐은 내내 별볼일없는 작가로 지내야 했다.

‘우화’는 라퐁텐에게 거의 유일한 성공을 안겨주었다. 이 성공으로 그는 후원자를 얻는다. 오를레앙 공작 부인, 라 사블리에르 부인, 그리고 에르바르 가문. 하지만 뒤늦은 성공 탓인지는 몰라도 건실한 부르주아의 삶과는 거리가 먼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사상적인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실제적인 삶에서도 그러했다. 술과 도박·매춘으로 모든 재산을 탕진하여 그가 죽었을 때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런 면모 때문에 그는 태양왕 루이 14세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왕에게 얌전하게 살겠다는 약속까지 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서약이 있은 뒤에도 라 퐁텐은 여전히 순종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 자유사상가들과 교류하며, 제도 바깥의 삶을 살아나간다. ‘우화’는 계속 이어졌고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러한 형식의 글쓰기 자체가 문학 제도의 바깥에 있는 것이었다.

그를 얌전하게 만든 것은 병이었다. 생의 마지막 회한 때문이었을까? 종부성사(終傅聖事)를 받기 위해서 그는 자신이 쓴 글을 부정했다. 그의 묘비명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장은 그가 왔던 것처럼 가버렸다/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많은 재물을 하찮게 여겼다/ 시간으로 말하자면, 그것만큼은 잘 쓸 줄 알았다/ 시간을 절반으로 나누어서/ 반은 실컷 잠자는 데/ 나머지 절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썼으므로.’

그의 ‘우화’에는 이렇게 라 퐁텐의 삶이 그려나간 궤적이 밑그림으로 남아 있다. 한편으로는 부르주아지의 교양과 섬세함이,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가로서의 자유의지와 비판의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물론 때때로 그것이 도덕적 차원에서의 일탈과 방종의 모습을 띠긴 했지만, 그 둘은 우리들 인간 자신에 대한 신랄하면서도 예리한 통찰의 시선을 빚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라 퐁텐의 ‘우화’는 창작이 아니다. 그러나 소박하면서도 꾸밈없는 문체는 시적인 품격을, 그리고 가장 효율적인 이야기 구성과 함께 인간존재와 삶을 들여다보는 작가의 지적인 시선은 뛰어난 산문가의 특성을 그에게 부여해주었고 프랑스 문학의 전통으로 자리잡는 풍자의 세계를 열어 보이는 데 선구자가 되었다.

그의 친구인 몰리에르의 희곡 작품과 함께 사랑과 미움, 우정과 배신, 지혜와 어리석음, 성공과 질투 등등 우리들 삶의 내장에 대한 보편적인 통찰로 이어진다.

(박철화·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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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왜 대적자들에게 나타나지 않았는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총독 빌라도나 대제사장들 등 당시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인물 앞에 나타나셨다면 더욱 확실하게 주님의 부활이 입증되지 않았을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여러 차례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께서 만난 사람들의 면면을 떠올려 볼 때마다 의문이 생긴다. 왜 예수님은 대적자들에게는 나타나지 않고 여인들과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셨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지만,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기적 자체로 사람들을 믿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 이전에 행하신 많은 기적들을 살펴볼 때, 그런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사람들은 열광하고 기뻐했지만 결코 주님을 믿지는 않았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에 사람들은 놀라워했지만, 예수님께서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에 걸려 넘어져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버리고 떠나갔다.>
부활도 그러하다. 묘하게도 성경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대비한 사람들이 바로 주님을 죽음에 내어준 관원들임을 보여준다. 여인들이나 제자들이 기껏 주님의 시신에 바를 향료나 준비하고 있을 때, 관원들은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부활 후를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부활’이 사람들에게 엄청난 효력을 지닌다는 사실을 사탄도 잘 알고 있다. 요한계시록 말씀에 사탄의 지상 대리자인 ‘짐승’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흉내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짐승의 상처 입은 머리 가운데 하나가 죽은 듯하다가 다시 살아나 많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고 그 짐승을 따르며 숭배한다(계 13:3∼4). 짐승은 교묘하게 부활의 효과를 노림으로써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짐승을 따르는 것은 참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 기적은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조작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람들을 믿음에 이르게 하는 놀라운 증거이지만, 동시에 어떤 사람들을 믿음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이 있다. 부활이란 사람들이 믿음으로 나아오지 않는 이유로 자신들의 마음 속에 걸림돌이 있기 때문임을 깨닫게 해주는 빛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 부활하신 모습을 보이심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셨을지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걸림돌이 있는 한, 사회의 영향력이 있는 사람의 말이라 해서 무조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는 않는다.

 * 복음의 완성을 위해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여인들과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셨는가? 예수님께서 그들만을 찾아가신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그들이 증거해야 할 복음의 완성을 위함이다. 주님의 부활은 지상에서 기적 사건으로만 의미가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오신 일, 세상에서 행하시고 가르치며 살아가신 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과 연관돼 있다.
그뿐 아니라,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일도 연결돼 있다. 예수님의 부활이 놀랍고 신기한 일이지만, 그것을 별도로 떼어내 강조할 수만은 없다. 이전과 이후 모든 일들의 연속선상에서 부활을 바라봐야 한다. 이를테면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고, 부활 없이 십자가가 없다는 의미다. 어느 한 부분으로 결코 온전한 복음 증거가 되지 못한다.
사도행전에서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세우는데 그 자격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 1:21∼22).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 전체에 대해 목격자와 증언자가 돼야 하고, 특별히 부활의 증언자가 돼야 한다.
사도들이 일치된 부활의 증언자가 돼야 한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를 중시하신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요한복음 20장에 기록된 도마의 사건이 이를 말해 준다. 도마가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고집하는 것을, 흔히 우리는 좁은 시각에서 도마의 개인적인 의심에 초점을 맞춰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도마처럼 의심해서는 안 된다, 도마처럼 중요한 교회 모임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식의 설교들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좀더 넓은 시각으로 이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도마의 개인적 의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 아니라,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증언이 온전하고 충분하며 일치되도록 만들어 주셨다는 점이다. 그들의 증언이 충분하고 일치해, 이제 제자들의 증언을 직접 빌리지 않고서도 믿는 자들에게 축복이 되고 있다.

* 제자도의 완성을 위해
둘째, 예수님께서 여인들과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신 이유는 제자도의 완성을 위함이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사회적 영향력이나 유력함을 제자 선택의 조건으로 삼지 않으셨다. 오히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중에서 제자를 택하셨다. 그리고 지상의 삶에서 가장 귀한 기회들을 모두 제자들에게 사용하셨다.
예루살렘의 율법 교사들을 놀라게 하고 지혜와 권능이 탁월하신 주님께서 하필이면 왜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제자로 택하셨을까, 왜 자신을 좀더 빛내줄 수 있는 훌륭한 지위나 자질을 갖춘 사람들을 택하지 않으셨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계산 방식이다.
한편, 그랬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 제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려 할 뿐, 예수님의 삶을 자신들의 삶 속에 옮겨놓는 참 제자가 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탁월했다. 그들이 자질 면에서 그러하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하는 점에서 말이다. 주님께서 자신의 진수를 보잘 것 없는 제자들에게 전부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뛰어난 제자도의 본을 보일 수 있었다. 사회적으로 유력한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나 영향력을 이용해 예수님의 복음 전파를 거들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목숨을 내어놓고 덤비지는 않는다. 제자도의 완성은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실재에서만 가능하다. 이로 인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다른 사람이 아닌 제자들을 찾으셨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항상 놀랍고 즐거운 일일 수만 없다. 그것은 세상을 초월하는 죽음으로의 부름이기 때문이다. 이는 요한복음 21장 말씀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에게 장차 어떠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해 복선을 깔고 말해 주고 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곳에서 십자가의 죽음이 암시되고 있다. 이와 같이 십자가 죽음의 제자도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부활의 제자도이다. 이제 앞서 던졌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예수님께서 여인들과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신 이유는 증거 돼야 할 복음과 제자도의 완성을 위함이다.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증거 사명의 필요충분 조건이다. 그들이 세상에서 증거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전파는 죽음을 넘어서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사망을 불러 조롱할 수 있는 자가 이미 사망을 넘어 선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될 수 있다.

* 부활의 제자로 부르시다
오늘도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부르시고 계신다. 세상의 출세에 목숨을 건 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증거를 위해선 그 목숨을 내놓지 않는다. 넓고 쉬운 길을 가는 사람들은 진정 필요한 곳에서 빛을 발하는 부활의 증인들로 나서기가 매우 어렵다.
죽음의 길을 가라. 남들이 회피하고 마다하고 좁은길을 택하라. 부활의 증인이 되기 위해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전부 내어주신 그분처럼 살아야 한다. 힘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 앞에서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따랐던 그 사람들 앞에서 부활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셨던 그분처럼 살아야 한다.
우리는 번제단을 지나 성소로 나아가야 한다. 타지도 않고 묻히지도 않은 자아를 가지곤 부활의 제자도를 이룰 수 없다. 오늘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죽음의 문턱을 넘어 모두 타버린 옛 자아의 무덤 위에 새롭게 돋아나는 싹이 되어 새 창조의 권능을 펼치고 이루는 영광의 사역을 감당하는 제자들을 부르신다.

글·최승락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이다.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우리도 부활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복음의 핵심으로,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대속은 부활을 통해 승인되고 확인되었다. 따라서 부활의 부인은 십자가의 부인을 결과한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을 불신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역사적 사실과 구속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인류를 품고 죽은 대표적 행위였던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도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 15:20)고 강조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모든 그리스도인의 부활과 연결해 설명하고 있다. 부활의 ‘첫 열매’ 즉 ‘아프아르케’라는 말은 고린도전서 15장 20절과 23절에서 사용되었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 즉 ‘프로토토코스’라는 말은 골로새서 1장 18절과 요한계시록 1장 5절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부활의 첫 열매인가?

 * 소생과 부활의 차이점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다.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다시 살린 사건(왕하 4장)이나 예수님이 나사로를 다시 살린 사건(요 11장) 같이 숨을 멈춘 사람의 호흡과 생기를 회복시키는 소생(resuscitation)과 부활(resurrection)은 완전히 다른 현상이다. 오늘날 상당수의 경우에 인공 호흡이나 전기 충격 등으로 숨을 쉬지 못하는 사람들을 회복시키며, 죽은 사람이 기적적으로 생기를 회복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노쇠하고 언젠가 죽게 된다. 그러나 부활이란 고린도전서 15장 42∼44절에 정의된 대로 네 가지 특성을 가진 새로운 육체, 즉 부패하지 않고 영광스러우며 강하고 신령한 육체로 변화되는 현상(transformation)으로 죽음을 극복하고 다시 죽지 않으며 영원히 살게 된다.
이와 같은 부활이 일어난 사람으로 예수님이 최초이며 그 후 오늘날까지 다른 부활이 없었기 때문에 이는 전무후무한 현상이며 성도들의 부활은 그의 재림 시에 일어나게 된다. 마태복음 27장 52∼53절에 예수님의 십자가 및 부활 사건과 함께 다수의 성도들이 무덤에서 나와 사람들에게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초대 교회의 구성원 중 부활한 사람이 있다는 기록은 전무하고 사도행전이나 서신서에도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또 그것이 소생이었는지 부활이었는지 그리고 일시적인 출현이었는지 영속적 존재이었는지 모호하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과 같은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것이 진정한 부활이라면 그리스도의 부활에 선행할 수 없고 예수님이 시작한 부활의 후속으로 봐야 한다.
모든 인류는 범죄함으로써 죽음에 종속되었고 따라서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죽음을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문에 아직 음부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소생은 가능하지만,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음부의 문을 열고 나오는 부활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

* 언약과 대표성의 원리에 따라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부활의 첫 열매인 이유는 바로 그 다음 절에서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1∼22).
여기서 언약과 대표성의 원리가 나타난다. 하나님은 언약 구도에서 인류를 공동체적으로 관계하시는데, 성경에는 두 개의 언약 공동체가 등장한다. 하나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을 대표와 머리로 하는 인류 공동체이고, 또 하나는 두 번째 아담이라고 표현된 그리스도를 대표와 머리로 하는 신앙 공동체이다. 하나님은 대표들과 계약 관계를 맺으며, 그 대표의 계약 준수 여부에 따라 그를 대표로 하는 공동체의 모든 소속원들이 상벌간에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원리는 전혀 부당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며 모든 인간 사회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사회 계약 이론이다. 본인의 동의 여부에 상관없이 한국에 태어나 한국인이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국의 모든 법률이나 전통을 준수해야 하는 의무 아래로 들어가며, 이를 어겼을 경우에 형벌이나 불이익을 받게 된다. 또 한국의 통치자나 외무장관이 한국을 대표해 타국과 관계하며 그들이 조인한 협약의 영향을 국민들의 동의 여부에 상관없이 모두 적용 받는다. 이런 원리와 현실은 국가 공동체뿐 아니라 각종 사회 집단이나 가정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가 대표하는 모든 공동체를 위한 공적 행위이며 그 결과와 혜택도 모든 공동체에게 적용된다.
아담의 실패가 인류 공동체에게 큰 피해를 가져왔다면, 그리스도의 성공은 신앙 공동체 전체에 큰 은택을 가져 왔다. 그것은 생명과 부활이 중심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고 부활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먼저 성취하고 개척한 길을 모두 따라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가 대표하는 공동체 모두의 죽음이며 마찬가지로 그의 부활도 모두의 부활인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머리인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며 분리할 수 없는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일어나게 된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범죄와 실패로 인해 사망과 죄와 율법과 사탄의 종속 상태로 전락하였고, 그 결과로 언젠가 모두 죽음에 이르고 심판 때까지 죽은 자의 세계인 음부(陰府)에 갇히게 된다. 예수님도 무죄였지만, 신앙 공동체의 대표로서 모든 구성원들의 죄악을 담당했기 때문에 죄인의 죽음을 당했고 따라서 음부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그의 보혈과 대속이 모든 죄과를 만족시켜 하나님께서 용서하셔서 더 이상 음부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음부의 문을 열고 최초의 부활을 실현하였다. 그리스도인도 아담의 인류 공동체에 속해 있기 때문에 죽음과 음부의 길을 가야 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신앙 공동체에 속해 있기 때문에 죽음과 음부로부터 해방, 즉 부활의 길을 가도록 돼 있다.

 * 신앙 공동체의 집단적 부활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공과 승리는 일순간에 완성되지 않고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며 이 시기를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사이에 해당하는 종말(eschaton)이라고 부른다. 구약에서 부활이 예언(겔 37:12∼13, 단 12:2) 되었는데, 그것은 한 사람의 부활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들의 집단적 부활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모든 부활의 시작이며 첫 열매이다. 마치 첫 열매가 모든 추수를 예시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의 전체적 부활을 예고한다. 물론 이 기간 동안에 그리스도인도 육체적 죽음을 경험하지만 부활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을 사는 것이며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사망에 종속되는 삶을 살지 않는다. 더욱이 종말의 과정이 끝나는 재림 때에 살아있는 성도들은 일시적인 죽음도 겪을 필요가 없다.
이런 종말론적 맥락이 첫 열매를 언급하는 고린도전서 15장 20절 이하에서 나타나고 있다. 부활은 그리스도가 그의 몸된 교회를 사용해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24절)까지 보류되며, 결국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다”(26절). 그런 다음 전체적인 부활이 일어난다. 우리의 부활은 사망 자체를 포함해 모든 흑암의 세력을 완전히 멸절한 후에 일어나기 때문에 아직 육체적 변화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부활을 예시하고 보증하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을 때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영생의 삶을 살 수 있다.

글·이정석 풀러신학교 조직 신학 교수이다.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사실인가>

“예수 때로 삼류 소설에서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시체를 찾지 못하게 되는 일이 가끔 발생한다. 하지만 실제로 무덤이 비는 사건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예수의 빈 무덤 사건은 어디에서도 시체를 찾지 못한 경우가 아니다. 사건은 그가 산 채로 사람들에게 나타났거나, 죽은 채로 사람들에게 나타났거나, 죽었다가 살아나서 사람들에게 나타난 세 가지 경우 중에 하나이다. 복음서의 설명을 믿는다면, 이것은 시체가 사라졌다는 문제가 절대 아니다. 실제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후 여전히 살아 있다는 문제 그리고 지금도 살아 있는 문제다.
지금까지 빈 무덤은 예수 부활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으며,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예수의 말을 결정적으로 증명해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은 고리도전서 15장 17절에서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 예수의 시체가 무덤에 있었는가
부활에 관해 누군가에게 이 문제를 증명해 보라고 한다면, 최선의 선택으로 부활에 관해 세계 최고 전문가로 알려진 윌리엄 레인 크레그 박사를 만날 것을 권한다. 크레그 박사는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그곳에서 부활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뮌헨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예수의 무덤이 비어 있었는지 살펴보기 전에, 먼저 예수의 시체가 무덤에 안치된 것이 사실인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시체는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게 넘겨졌다.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믿어지지 않는 내용이다. 이 점에 관해 크레그 박사는 고린도전서 15장 3∼7절에서 사도 바울이 예수께서 장사 지낸 바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첫 번째 증거로 제시한다.
예수를 무덤에 장사한 사람이 왜 아리마대 요셉인가, 그는 실존 인물인가 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크레그 박사는 부활에 관한 복음서의 기록들이 모두 다르다면서 아리마대 요셉은 모든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등장한다고 설명한다. 복음서들 중에서 가장 기록 연대가 빠른 마가복음에 따르면, 산헤드린 공회 전체가 예수를 사형시키는 데 표를 던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해 누가복음에서 의구심을 갖게 하는데, 누가는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 처형에 관한 투표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고린도전서에도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표현은 없다. 그 점을 근거로 예수의 영혼만 부활하고 육체는 무덤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크레그 박사는 유대인들의 관습과 사고에 대해 설명한다. 유대인들은 죽은 사람의 살이 썩어 버린 후 뼈들을 모아 상자에 담아 놓고 부활할 때까지,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의인들을 살리시고 그 사람들이 최후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같이 모일 때까지 보존하도록 했다.
따라서 그가 부활했지만 아직 시체는 무덤에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겐 모순된 생각이라며, 장사되고 삼 일만에 살아나셨다는 기록은 함축적이며 분명히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 어떻게 무덤을 지켰는가
예수가 무덤에 묻힌 것이 사실이라면, 다음은 어떻게 무덤을 지켰는가 하는 문제이다. 크레그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무덤 입구 밑에는 홈이 파져 있었다. 따라서 원반 모양의 큰 바위가 그 홈에 자리를 잡으면 무덤 입구를 완전히 막게 된다. 그런 다음에 그보다 조금 작은 돌을 사용해 바위를 지탱하게 했다. 바위를 굴리려면 최소한 남자 몇 명이 필요하다. 무덤을 지키는 일에 실패한다면 곧 죽음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훈련된 군인들이 24시간 무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대인 지도자들이 왜 파수꾼을 두고 무덤을 지키게 했을까 하고 크레그 박사에게 물었다. 예수가 부활할 것과 제자들이 예수가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꾸며 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그들이 부활을 예언한 예수에 대해 제자들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박사는 “도굴을 방지하거나 유월절 기간 동안 일어날 수도 있는 소동으로부터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고 간략하게 대답했다.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이 로마 군병인지 유대 군병인지는 모른다. 박사는 두 경우 모두 가능성을 두고 있었다. 마태가 파수꾼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성전을 지키는 군병들보다 로마 병사들을 가리킬 때가 더 많았다. 요한복음에는 유대인 지도자들의 명령을 받아 로마 백부장이 부하들을 이끌고 와서 예수를 체포한 것으로 기록한다. 따라서 무덤을 지킨 파수꾼들이 로마 군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 복음서의 빈 무덤을 믿을 수 있나
부활을 공격하는 많은 비평가들이 가장 주요하게 문제 삼는 것이 바로 복음서의 기록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 중에 부활하신 후 첫 아침의 빈 무덤에 관한 기록이 복음서의 신뢰성에 큰 손상을 입힌다고 주장한다. 복음서의 기록은 대략 이렇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무덤에 장사 지낸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후 첫 주일 아침에 그를 따르던 몇몇 여자들이 무덤을 찾아왔다. 빈 무덤을 발견한다. 천사들이 예수가 살아났다고 전해 준다.
에딘버그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마이클 그랜트는 다분히 회의적인 역사가이다. 그러나 그마저 빈 무덤을 인정했다. 저서 「예수: 역사학자가 본 복음서」에서 그가 한 말이다. “분명히 빈 무덤에 대한 복음서의 묘사는 각각 다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고대 문헌을 연구할 때 적용하는 똑같은 기준을 복음서에 적용해 본다면, 실제로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충분한 증거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빈 무덤에 관한 복음서의 진술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우리가 빈 무덤 이야기에 관한 여러 개의 독립적인 증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마태와 누가가 마가복음에 대해 알고 있다 하더라도 각각의 내용들은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의 이름과 수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어떤 복음서도 그에 대한 완벽한 명단을 제공하지 않는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의 이름은 복음서에 모두 등장한다. 따라서 복음서의 저자들은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 중 몇몇에게서 이야기를 들었고, 직접 대화를 나눈 여인들의 이름만 기록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함께 무덤에 갔지만, 기록되지 않은 여인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예수는 실제 꼬박 하루 동안 무덤에 있었고 나머지 이틀은 하루 중 일부 동안에만 무덤 속에 있었다. 예수가 자신의 예언을 성취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아니냐고 크레그 박사에게 물어봤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유대인의 날짜 계산법에 따른 것이라고 박사는 설명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부분적인 하루일지라도 온전한 하루로 계산했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후와 토요일 그리고 주일 아침 동안 무덤에 계셨다. 당시 유대인들의 시간 관념으로 꼬박 삼일인 것이다.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법학자 중 한 사람이던 노먼 앤더슨 경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했고 하버드 대학의 종신 교수였으며 런던 대학에서 학장으로 재직했다. 그는 평생 동안 법률적 관점에서 이 주제를 연구한 끝에 한 마디로 결론을 내렸다. “빈 무덤은 부활을 논박하는 모든 이론들을 단숨에 파괴해 버리는 단단한 바위와도 같다.”


글·리 스트로벨
탁월한 언론인으로 윌로크릭교회를 거쳐 현재 새들백 교회에서 구도자 사역과 구도자 전도를 위한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본 글은 두란노에서 출간한 「예수는 역사다」에서 허락 받아 발췌한 것으로, 미국 크리스천 도서 부분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부활 이후 성도의 몸은 어떻게 되는가>
 
“사람의 죽음 후에 있을 일은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철학자나 다른 종교인들 등 모든 인간의 최대 관심사이다. 실제로 죽음 후에 대한 내세 사상은 고금을 통해 전 세계에 보편화되었다. 석가는‘해탈을 통한 극락과 윤회’를 말했고, 플라톤이나 칸트 같은 철인들은 ‘영혼의 불멸’이나 ‘환생’을 가르쳤다. 하물며 바벨론의 ‘길가메시’ 시에도 ‘생명의 윤회설’이 등장하고 있다.
기독교는 초대 교회 시절에 교리 구성상 내세에 대한 인식이 미흡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내세에 대한 소망은 열정적이었다. 중세에는 내세에 대한 열망이 후퇴하고, 반 천년왕국의 견해가 성행했다. 천주교는 연옥설 같은 비성경적 교리를 용납하기까지 했다. 종교 개혁 이후 초대 교회의 종말관을 다시 회복했으나, 18세기에 자유주의가 종말론을 ‘양자’ 취급하면서 신학의 관심 밖으로 내몰고 말았다.
오늘날 잘못된 종말론에 맞서기 위해 다시 건전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면 죽음 이후와 관련해 영생 그리고 중간기 안식과 육체의 부활에 대해 간단하게 대답을 찾아보자.

 * 죽음이 끝인가 아니면 영생이 있는가
현대의 진화론이나 유전 공학은 영생을 부인한다. 현대 신학은 육체의 부활이 없는 영생을 믿고 있다. 또 어떤 신학은 인간의 죽음을 종말이라 보고 그것을 정상적이거나 자연적인 현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죽음은 비정상적이고 자연적이지 않으며 영생이 있다고 말씀하신다(창 3:6∼15, 롬 6:23). 특히 믿는 사람들의 죽음은 비정상적 징계와 훈련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다(히 12:6, 시 116:15, 벧전 4:12∼13). ‘징계와 훈련’의 의미는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각 사람의 날의 완성과 다른 영역 즉 천국으로 이전을 말하는 것이다.
영생에 대한 관심은 미래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라 욥이 고백했듯이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욕망, 즉 더 큰 날에 대한 자연적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욕망 때문이다(욥 19:26). 영생이란 말은 ‘죽지 아니함’에서 온 말인데,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근원적 영생이나 시작이 없는 영생과는 다르다(딤전 6:16 참조). 성경에서 인간의 영생을 말할 때 “죽음과 관계가 없으며 죽음의 밥으로 될 가능성이 없는 인생의 지복(至福) 상태를 가리키며, 이것이 인격적 영생 혹은 완전한 영생을 의미한다”(박형룡, 「내세론」, 27쪽).
고린도전서 15장 51∼54절 말씀을 보면 영생을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썩지 않음과 죽지 않음이다. 먼저 ‘썩지 않음’은 ‘불부패’를 말하며, 성령 안에서 현재 누리고 있는 평안과 희락과 같은 생명의 풍성한 질을 나타낸다. ‘죽지 않음’은 ‘불사’를 뜻하며, 미래에 시간과 양으로 풍성한 생명을 의미한다. 기독교는 영혼만 믿는 것이 아니다. 영혼과 육체가 같이 영생한다고 믿으며 그것을 인격적 영생이라 한다.

 * 사망과 부활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사망과 부활 사이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중간기 상태’이고, 사망과 부활 사이에 영혼이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교회사적으로 중간기 상태를 ‘최종 응보의 축쇄판’으로 보는 견해와 ‘의인의 영혼은 사후에 직접 천당으로 간다’는 관념이 대립하고 있다(박형룡 저서 120∼121쪽 참조).
네덜란드 개혁 교회는 이 문제와 관련해 비성경적 관념들을 여덟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는 사후에 연속된 존재가 없는 것처럼 말하는 유물주의, 둘째는 영은 하나의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겨진다는 영혼 재래설, 셋째는 죽은 자는 사후에 의식이 없는 상태가 된다는 주장, 넷째는 죽은 자의 영과 접촉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강신술, 다섯째는 죽은 자는 새로 영묘한 몸을 입고 일시적으로 존재한다는 견해, 여섯째는 사후에 불신자는 존재하지 않고 신자만이 존재한다는 조건적 불사설, 일곱째는 죽음이 하나님의 최초 창조의 일부였다는 주장, 여덟째는 죽은 후에 회심하는 모든 종류의 가능성에 대한 주장 등이다(W. J. 그리어, 「성경적 종말론 연구」, 139쪽).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한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말씀하신 ‘낙원’은 중간기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장소적 의미보다 신자의 영혼이 사후에 즉각적으로 ‘천국의 영광’에 들어간다는 것을 증거한다(고후 5:8, 박형룡의 저서 125쪽 참조). 물론 악인은 지옥 혹은 음부에 들어가는 것으로 본다(눅 16장의 부자 이야기). 그러므로 중간기 상태는 의식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고 죄와 그 부정적 결과가 소멸되며, 천사처럼 육체 없이 사는 것을 말한다.
개혁 신학자들은 이때 사후 영혼은 의식적일 뿐 아니라 활동적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영혼의 활동을 말하지만 이것을 과장해 영혼 ‘시련설’(試鍊說)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 몸의 부활은 만물의 부활을 의미하는가
과연 하나님의 나라에는 영혼만 반짝거리고 육체는 없는가? 인간 육체는 부활하지만 만물은 소멸될 것인가? 아니다. 영혼과 함께 육체와 만물이 부활한다. 부활은 인간 육체의 부활뿐 아니라 변형된 만물 즉 동물, 식물, 문화 등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부활은 인간 육체의 변형일 뿐 아니라 만물의 변형이고 유기적 재창조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부활은 현세에서 온갖 고난을 맛본 성도들에게 최대의 기쁨과 위로이다.
박형룡은 부활한 육체의 성질을 네 가지로 제시했다. “부활 후의 신체는 인생의 형상을 보유할 것이다. 미래의 신체는 지상에 있던 신체의 영화물일 것이다. 천상에서 우리는 친우들을 인식할 뿐 아니라 지상에서 서적을 통해 알던 선지자, 사도, 신앙 고백자, 순교자들을 소개 없이도 알아볼 것이다. 부활체는 썩지 않고 죽지 않으며, 강하고 영광스러우며 신령한 몸이 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완전한 구원이다”(박형룡의 저서 298∼301쪽).
특히 인간의 부활체는 현재 갖고 있는 육체와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관계를 갖게 될 것이다. 현재 모습을 유지하지만 늙지도 않고 병도 없으며 죽지도 않는 전혀 새로운 육체를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성격의 완전한 갱신과 변형의 부활 교리를 ‘만유갱신설’이라고 한다. 이것은 현재의 육체와 만물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완전멸절설’이나, 현재의 육체와 만물과는 전혀 다른 것이 창조될 것이라는 ‘완전재창조설’과는 차이가 있다.
만약 육체와 만물이 갱신하거나 변형되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거나(완전소멸설) 완전히 재창조(완전재창조)돼야 한다면, 신정론(神正論)은 진리로 판명될 것이며 사탄의 계획은 성공할 것이 분명하다(최홍석, 「천년 왕국과 종말」, 165쪽). 그러므로 부활은 은밀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일어날 것이며 신자들뿐 아니라 악인들도 부활하는 보편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악인은 고통의 심판을 받기 위해 육체로 부활하고, 선인은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을 맛보기 위해 육체로 부활한다.
부활한 후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심판은 예수님 안에서 의롭다고 인정된 자들이 자신들의 신앙, 증거, 생활에서 하나님을 위한 업적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 구원의 섭리에 나타난 지혜, 권능, 오래 참음 등을 고백한다.
죽음 이후의 삶은 거울을 보듯 아직은 희미하다.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해 모두 완전히 알 수 없을 뿐이지 불확실한 것은 아니다. 사실 성경의 계시는 확실할 뿐 아니라, 이미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고 앞으로 같은 성격으로 우리 모두에게 실현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현실화되기 전에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의 부활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 형벌의 부활이 있을 것이다.

글·성인경 한국 라브리선교회 대표로 「진리는 시퍼렇게 살아있다」 등 저서가 있다.

 

  <부활과 주일의 관계는 무엇인가>   

“부활절이 다가 왔다. 예수님께서 죽음과 흑암의 세력을 깨뜨리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첫 열매가 되심으로써 영원한 삶에 들어가신 날을 기념하는 부활절을 다시 맞으며 우리는 과연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 부활의 역사를 인정한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 앞에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역사성에 대한 상기(想起)는 언제나 중요하게 언급돼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지금도 살아 계시며 영원히 부활의 생명을 가지신다. 그러므로 부활의 역사성에 대한 부인은 결국 예수님의 모든 것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부활의 의미에 대해 아무리 학문적인 말을 많이 하고 그 의미를 풍성히 한다고 해도 부활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전적인 부인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 어떤 학자들이 생각하듯,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로 인해 새로운 존재 방식에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시체가 무덤에 있다고 해도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태도는 결국 부활 자체를 부인하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의 역사성을 추호(秋毫)도 의심하지 않는 성도는, 올해 부활절을 맞아 다른 측면에서 부활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는 부활절에 대해 일년에 한 번 부활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는지 깊이 반성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일년에 한 번도 제대로 진정한 의미의 부활절을 생각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부활의 역사성에 의문을 표하는 많은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정작 부활의 참된 의미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비판과 조롱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면 과연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

* 주일마다 부활을 기념한다
엄밀히 말해 그리스도인들은 매주일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해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부활과 관련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 날에 함께 모여 모든 인류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리며 찬양한다. 또한 그분의 뜻을 나누고 그 뜻대로 살자며 서로 권면하고 격려한다. 이것이 주일에 성도가 모이는 이유이고 주일의 참된 의미다. 그래서 우리는 일 년에 한 번이 아니라, 주일마다 부활의 의미가 가득하게 보내야 한다.
성도는 매주일 예배를 위해 모일 때마다 인간의 구속을 이루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려는 마음으로 가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지 않는 주일과 예배는 그 본질이 상실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주일 예배 때마다 부활의 주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이 넘쳐 나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인류 구속의 의미를 분명히 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구속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매주일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부활절 기념은 무의미해진다. 주일을 부활의 의미로 충실하게 보내는 교회는 매주일을 부활절로 보낼 수밖에 없다.

매일 부활의 생명으로 산다 매주일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 보내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일의 삶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일으킴을 받아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매주일을 부활의 의미가 가득하게 살려면 우리는 매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일으킴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몸의 온전한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살아야만 한다.
이것이 성도로 살아가는 진정한 길이다. 따라서 참된 성도로 산다는 것은 매일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일이다. 부활을 믿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참여해 그분의 부활 생명 안에서 사는 것이다. 우리는 순간마다 중생으로 인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얻은 부활 생명의 빛에서 살아가며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해 교회가 늘 강조하는 ‘이미 … 그러나 아직 아니’의 구조가 있다. 주님의 부활에 연합해 우리는 중생에서부터 이미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성도는 부활의 생명에 참여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아직 아니’의 측면도 있어서, 우리는 바울처럼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순간마다 육체, 즉 부패한 인간성의 잔재를 죽이고 영을 살려가야 한다. 날마다, 순간마다 말이다. 그것이 주님께 주일을 의미 있게 드리는 길이고, 따라서 매일과 매주일을 제대로 보낼 때 해마다 부활절을 의미 있게 맞을 수 있다.

 * 주님의 부활에 참여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보아야 한다. ‘과연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매일, 매순간을 그분의 부활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또 ‘나는 매일, 매순간을 부패한 인간성의 잔재를 죽이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이런 자문을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사로 잡혀서 살지 않는다. 자신의 과거나 현재의 욕심에 사로 잡혀서 살지 않는다. 자신의 미래나 무엇을 이루어야 한다는 욕심의 열망에 사로 잡혀서 살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빛에서 자신의 욕심에 대해 죽은 사람으로 살게 된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새 생명에 참여해 살아간다.
이제 성도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행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의 뜻을 성취해 간다. 성도의 삶이 변화할 때 교회의 진정한 의미가 성취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성도는 주님께 행하는 순종을 개인의 공로로 여기지 않는다.
올해 부활절에 모든 성도는 순간과 매일 그리고 주일마다 부활의 의미로 충만한가 스스로 깊이 있게 자문했으면 한다. 우리의 부족한 모습에 대해 애통해야 한다. 더불어 우리의 삶에서 부활의 의미가 잘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모두 성령님께 의지해 힘써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성도들이 변할 때 세상은 달라진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 부활 생명의 힘을 드러내는 길이다.


글·이승구 국제신학대학원대학 조직신학교수로 「개혁 신학 탐구」, 「성령의 위로와 교회」 등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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