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는 우리에게 반음(半音)의 의미를 가르칩니다. 반(半)은 절반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반(伴)을 의미합니다. 동반을 의미합니다. 모든 관계의 비결은 바로 이 반(半)과 반(伴)의 여백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반의 환희'는 절반의 비탄과 같은 것이며, '절반의 희망'은 절반의 절망과 같은 것이며, '절반의 승리'는 절반의 패배와 다름없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절반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절제할 수만 있다면 설령 그것이 희망과 절망, 승리와 패배라는 대적의 언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동반의 자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신영복, <더불어 숲>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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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4-02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반의 자리를 얻을수 있으리라는 의미...참 어려운 의미인것 같습니다.
저도 가끔 "삶은 선택의 경계선을 얼마나 현명하게 걸어가는냐의 문제다" 라고 떠들곤 했는데, 일맥상통하는것 같기도 하고...
참, 퍼갑니다.

stella.K 2004-04-02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구절을 읽으면서 거울 저쪽의 세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중학교를 갓입학했을 때 명찰이 미처 다 만들어지지 않아서 임시 명찰을 달고 다녀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두꺼운 도화지를 조그맣게 오려 제 이름 석자를 써서 가슴에 대고 거울을 비춰봤는데 왠걸 글자가 거꾸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 끝에 거꾸로 써 보았더니 거울에선 재대로 비췄습니다. 그렇다면 이대로 달고 학교를 가야하나 생각해 봤는데 결론은 그렇게 하지 않았죠. 만약 그렇게 하고 학교에 갔더라면 웃음거리가 되었을것입니다.
하지만 전 지금도 때론 거울 저쪽에서의 시각이 더 옳은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엉뚱하죠.^^
 

로마는 정복 전쟁이 정지될 때 무너지기 시작하여, 로마 시민이 우민화 될 때 로마는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로마가 로마 인의 노력으로 지탱할 수 있는 크기를 넘어섰을 때, 그때부터 로마는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아야합니다. 콜로세움은 이 모든 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상징탑이었습니다.

                                                  ...

로마제국은 과연 과거의 고대 제국일 뿐인가. 그것이 전쟁이든, 상품이든, 자본이든 정복이 정지되면 번영이 종말을 고하는 오늘날의 제국은 없는가. 우리들은 진정 로마를 동경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잠재우는 거대한 콜로세움은 없는가.

                                                             -신영복, <더불어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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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4-01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부쩍 서재 이곳 저곳에서 신영복의 글을 접하게 되네요. 이 김에 <더불어 숲>이나 다시 한 번 들춰봐야 겠단 생각이 듭니다! ^^
"우리에게는 우리를 잠재우는 거대한 콜로세움은 없는가.".......

stella.K 2004-04-01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정말요? 이 책 읽으면 읽을수록 정말 잘쓴 미문이란 생각이 들어요! 감탄하며 읽고 있습니다.^^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만들어 내려는 미지의 작업이다. 따라서 인식의 혁명이 먼저 요구된다.

                                                            -신영복, <더불어 숲>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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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과 광기로 가득한 작품은 치밀한 구성을 통해 가능했다”
생각의 즐거움 | 에드거 앨런 포 에세이 | 송경원 옮김 | 하늘연못 | 286쪽 | 8500원


▲ 이탈리아 카툰 사이트(www.fanofunny.com)에 소개된
미국의 시인·소설가·비평가 에드거 앨런 포(1809~1849).
어둠에 싸인 인간의 내면 세계를 공포와 환상, 광기와 풍자 등의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보여준 에드거 앨런 포<그림>는 오늘날까지 그 독창성과 천재성을 인정받고 있다. 근대적 계몽주의가 제공하는 합리적 이성을 거부한 그는 유령과 악마가 출몰하는 광기의 세계와 환멸적인 현실로부터의 탈주 등을 단골 주제로 삼은 시대의 이단자였다.

이 책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포의 에세이집으로, 그의 문학세계의 근거와 시의 창작원리, 예술론에 관한 수려한 산문 다섯 편을 싣고 있다. 상상과 환상으로 가득찬 그의 작품 경향과는 달리 산문들은 치밀하고 논리적이다. 이를 통해 세상 만물의 이치는 물론 인간의 심리 상태와 행동 양식 모두를 이성적인 추론을 통해 분석하고 증명해보이는 문학세계를 보여준다. 심지어 환상과 몽유의 세계조차도!

그의 작품 창작의 원리를 밝히는 일은 팬터지, 추리, 공포문학의 원조로서 현대문학의 마르지 않는 문학적 원천의 한 줄기를 탐색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포는 ‘강렬한 독창성’이란 짧은 글에서 자신의 작품이 완성되는 과정을 한 단계 한 단계 상세히 밝히고 있다. “철저한 계산을 바탕으로 미리 결말까지 구상한 뒤 비로소 집필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분석 대상은 자신의 시 ‘갈가마귀(The Raven)’로 삼았으며, 시 창작이 ‘우연이나 직관’의 영역이 아니라 ‘수학문제의 정확성과 엄밀한 귀결’ 속에서 결말로 한 단계씩 나아가는 것임을 명확히 규명하고 있다.

‘갈가마귀’ 창작 과정에서 제일 먼저 고려한 것은 ‘길이’였다. 시는 한자리에 앉아 읽기에 너무 길면 안 된다고 규정한다. 시의 길이는 강렬한 격정과 영혼의 고양을 끌어낼 수 있는 시적 효과의 정도와 수학적 관계를 가져야 한다. 간결함은 시적 효과의 강렬함과 정확히 비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100행 정도가 적당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다음은 전달하고자 하는 인상이나 효과. 가장 강렬하고 고양되고 순수한 쾌락은 미(美)를 관조하는 데 있었다. 그 미를 가장 잘 나타내는 정조는 ‘애상조’였다. 미는 종류를 막론하고 가장 발전된 상태에서는 섬세한 사람을 눈물짓게 만들기 때문이다.

포는 극적인 예술적 효과를 위해 ‘짧은 반복구’ 활용을 구상한다. 이 반복구는 가장 울림이 좋은 모음 ‘o’와 발음이 쉬운 자음 ‘r’이 들어간 단어 ‘다시는 안 돼요(nevermore)’가 선정된다. 각 연 끝에 ‘다시는 안 돼요’라는 말을 단조롭게 반복하는 불길한 ‘갈가마귀’의 등장 단계까지 다다른 시인은 최후의 질문을 던진다.

“인류 보편적으로 가장 애상적인 주제는 무엇일까?” 명백히, 죽음이 그 답이다. “그리고 언제 이 가장 애상적인 주제가 가장 시적인 것이 될까?” 미(美)에 가장 가깝게 연결되어 있었을 때였다. 그렇다면 물을 것도 없이 ‘아름다운 여인의 죽음’이 세상에서 가장 보편적인 주제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것을 말하는 주체는 상(喪)을 당한 연인이 가장 적합했다. 작품의 장소는 고립된 사건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주의를 집중시키는 정신적 힘까지 발휘하는 닫힌 공간으로 결정됐다. 실제 작품에서는 여인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침실이 배경이 됐다.

언뜻 보기에 불길한 암시와 환상으로 가득찬 듯이 보이는 시 ‘갈가마귀’의 이면에는 이렇듯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치밀한 논리가 단단히 기초공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포 창작노트의 비밀은 ‘겉으론 시인, 속으론 논리학자’라고 할 수 있다. ‘천상의 미’를 추구한 탐미주의적 작품은 수학적 정밀함을 곁들인 구성, 운율과 격조에 대한 배려, 비애적 정서의 환기 등의 요소가 빈틈없이 배열된 고차방정식을 통해 가능했다. 그는 “작품의 독창성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충동이나 직관의 문제가 아니다. 독창성은 세심하게 추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 최홍렬기자 hrchoi@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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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사랑타령은 모두… 욕정일 뿐이야”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 실비아 플라스 지음 / 김선형 옮김 / 문예출판사 / 709쪽 | 2만5000원

작년 11월, 나는 노스햄튼의 스미스 대학에서 포에트리 센터가 주관하는 낭독회를 열었다. 그곳에서 만난 그 대학의 교수들은 모두 나에게 닐슨 도서관에 가보자고 제의했다. 왜냐하면 그곳이 실비아 플라스의 기념관이며, 그곳엔 그녀의 일기 원본이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물론 이번에 출간된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중 절반 이상이 그녀의 스미스 대학의 학생 시절과 강사 시절을 다루고 있다.) 그들 중에 특히 여자 교수들은 실비아 플라스가 그 학교 출신이라는 것, 재학 기간 중 400편의 시를 썼다는 점 등을 기꺼워 하는 눈치였고, 그 대학에선 해마다 수많은 실비아 플라스 강좌와 그녀와 관련된 행사가 열리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 얘기 끝에 시인이 일기를 남기고 죽는 것이 좋은가, 아닌가에 대해서 농담 섞인 토론을 했다.

나는 자살한 예술가들의 신화를 믿지 않는다. 자살하지 않고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살한 예술가가 남긴 깨끗하고 넓은 백지 위에다 자꾸만 무언가를 쓰려고 한다. 그 예술가의 삶이 정지되었다고 하는데도 한참이나 남아 있는 백지가 부담스러워서일까. 아니면 여전히 살아가느라 지리멸렬함을 견디고 있는 자신의 백지가 한심스러워서일까. 어쨌든 사람들은 그 예술가가 남긴 백지 위에다 무언가를 끄적거려야만 자신의 생의 알리바이가 성립된다고 믿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심지어는 살아서 자신의 신화를 완성하려고 덤비는 예술가도 있는 것 같다. 이런 저런 이유로 요절한 예술가의 삶은 나날이 뚱뚱해지고, 그의 순진하고 단순했던 생의 시간들은 신화라는 덧칠로 괴팍해지고, 주인공도 없는데 나날이 길어지기까지 한다.

실비아 플라스도 그런 사후 대접을 받은 사람들 중의 하나가 아닐까. 서른 살에 어린 두 아이 앞에 먹을 것을 두고 가스 오븐에 머리를 처박아 자살한 여자의 짧은 생에 관해 무수한 글들이 쓰여졌다. 그녀의 삶은 난도질되었고, 부풀려졌으며, 소비되었다. 자살 사건은 수십 명의 정신분석의들에 의해 분석되면서, 끝없이 우리 앞에 반복 상연되었다.(심지어 BBC는 영화로 만들 거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는 남성 세계에 의해 희생된 여성 시인의 전형, 혹은 갖가지 신화의 베일을 둘러쓴 여신이 되었다. 심지어 남편이었던 테드 휴즈는 아이들이 읽을까봐 두려운 나머지 자신과의 적나라한 관계가 드러나는 마지막 나날의 일기 한 권은 폐기한 채(그는 ‘그 당시 나는 망각이 생존의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했다’라고 썼다.) 그녀의 일기를 출간했으며, 그녀가 죽은 후 35년이 지나서야 그녀를 기리는 88편의 시(‘생일 편지’)를 쓰기도 했다.

이번에 번역 출간된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는 고백적 언술 방법과 여성으로서만이 발화할 수 있는 시적인 언어들, 그리고 그 언어들의 구축 원리를 스스로 체득한 자의 내면 세계를 보여줌과 동시에 어린 처녀에서 성숙한 성인으로 커가는 한 여성의 평범하나 입체적인 삶을 치사할 정도로 솔직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모든 생의 경험들을 이 일기 쓰기를 통해 시의 근원에 다가가는 몸짓으로 탈바꿈시킨다. 마치 그녀는 시를 위해 헌신하는 하녀, 창녀처럼 보이기까지 한다.(물론 덤으로 구역질 0나도록 처절한 세속적 욕망과 망설임들을 읽을 수 있다.)

“신경체계의 작용이란 얼마나 복잡하고도 오묘한지.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는 전화기의 전자음은 자궁벽을 따라 짜릿한 기대감을 전송한다. 전화선 너머 거칠고, 건방지고, 허물없는 그의 목소리에 창자가 꽉 죄어온다. 대중 가요의 ‘사랑’ 타령을 모두 ‘욕정’이라는 단어로 바꾼다면 아마 훨씬 더 진실에 가까워질 텐데.”(1959년 대학 신입생 시절의 일기)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등대로’의 한 대목을 읽을 때는 거대한 스미스 대학 강의실 한가운데서 온몸에 전율이 좌르륵 흐르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녀의 자살, 1953년 여름, 나는 그녀의 자살을 재현하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다.”(1957년의 일기)

“글쓰기가 나의 건강이다. 차가운 자의식에서 벗어나 만사를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다면, 내게 어떤 의미인가, 내가 뭘 얻을 수 있는가를 따지지 않는다면.”(1959년의 일기)

이 일기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남성들이 써내려간 히스토리에 자신의 몸을 처단하는 히스테리로 반항한 한 여성시인의 시의 가면들이 오히려 진정성이었음을, 지독히 정상적이었음을 깨닫는 진한 아픔이 밀려온다. 그리고 죽어서도 남들에 의해 쓰여지고 있는 온갖 신화의 덧칠을 정직한 일기와 죽음의 형식으로 완성한 시들로 떨쳐내려는 여성시인의 안간힘이 느껴진다.

(김혜순·시인·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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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벤치 2004-03-27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야 죽어도 결코 유명해질리야 없지만, 몇년에 한 번씩 일기 내지 잡문을 태워버리지요 십대 후반에 자살소동을 몇 번 벌인 이후로 생긴 버릇이지요, '죽음의 이유는 죽은 당사자만이 알 수있는 것, 타인은 남의 죽음을 수학공식처럼 풀어내지 말라 '는 유서를 남기고...지금은 아주 건강하게 살고 있어요 몸은 좀 망가졌지만 ...
실비아 플라스의 시를 읽으면 예전의 제 목소릴 느끼곤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