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6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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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도 낮설면서도 익숙한 이야기가 또 있을 수 있을까?

어렸을 때 이 책을 어린이 문고본으로 읽은 것 같기도 하다. 워낙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아마도 그때 이 책을 완독하지 못했었나 보다. 이렇게 낮선 걸 보면 말이다. 단지 기억나는 건, 히스클리프가 입양되어 와서 머리 빗는 걸 가지고 밀고 당기고를 했던 것 하나가 생각이 난다. 난 왜 이것을 잊지 않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나름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꽤 다정한 사이였던 것으로 아는데 다시 읽어보니 참 낮선 방법으로 사랑했던 것은 아닌가 한다. 어쩌면 그리도 미워하면서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걸까?

보통 사랑을 한다면 따뜻하고 밝은 느낌 또는 불 같은 사랑의 이미지를 생각하지만, 미움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다는 게 참 흔치 않는 이야기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사랑과 미움을 교차하며 발전시켜 나가는 작가의 상상력은 가히 천재적이란 느낌이 든다. 또한 영국 특유의 안개에 쌓인듯 암울하고 스산한 사실적 묘사가 운치를 더한다.

 

이야기의 시작이요 얼개는 사실 간단한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아버지가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한 남자 아이를 데려와 양아들로 삼는다. 아버지는 양아들을 편애해 아들의 미움을 사고, 여동생은 그를 사랑한다. 하지만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사랑하지만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 뭐 대충 이런 얼개는 그동안 드라마나 여타의 애증을 소재로한 영화나 소설에서 보암직한 내용들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면서 또 그런 얘기네 하면 그건 실상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이 작품에서부터 그런 이야기가 파생됐을지 모르겠다. 중요한 건 작가마다 그런 얼개를 어떻게 요리하고 이야기 가능한 이야기로 만들 것이냐는 작가의 역량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탁월한 이야기 솜씨를 구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참 사촌끼리도 결혼이 가능한 옛 유럽의 결혼방식이 좀 특이하긴 하다. 어떤이는 바로 이점이 하나의 유럽 공동체를 만든는 원동력이 됐을 거라고 하기도 하는데 읽으면서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2대에 걸친 사랑과 증오의 가족사를 꼼꼼하게 그려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세대가 그렇게 삐뚤어진 사랑을 하고 그로인해 불행한 가족사를 그렸다고 한다면, 그 다음 세대는 그것을 어떻게든 바로잡으려고 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또 그런 것을 반복하며 가족은 대를 이어갈지도 모를 일이다. 

 

특이한 건 이 이야기가 각자 개체의 이야기가 아닌 누가 누구에게 고백하는 고백체에서 이야기로 들어가는 액자 소설격 형식을 띠고 있는데 이런 모든 것들이 아름답고도 스산한 명작을 탄생시켰다는 것이 놀랍다.

하지만 역시 그 어둡고 스산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흡입력이 있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고 읽는데 조금은 고전했다. 하긴 고전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가. 고전할 것을 마음 먹는다면 한번쯤 도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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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2-18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다 읽고 리뷰 쓰셨네요. 난 이 책을 30대 초반에 읽었는데, 진도는 그런대로 잘 나갔으되 큰 감흥은 없었는데, 어떤 글쟁이 친구가 이 책을 너무 재밌어서 세 번이나 읽었다고 해서 질투를 느꼈었죠. 내가 모르는 뭐가 있나 보네, 하면서... ㅋㅋ

취향, 경험의 차이인 듯.

이런 비슷한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아마 이 책에 열광하겠죠. 누구를 열렬하게 짝사랑 해 본 사람만이 <베르테르의 슬픔>에 빠지듯 말이에요. 베르테르의 슬픔은 두 번 읽었는데, 두 번째가 훨씬 좋아서 책이란 읽을 적마다 그 느낌이 정말 다르다는 걸 실감했어요.


2012-02-18 1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18 1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2-02-18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 이제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다 읽으셨으니, 샬럿의 제인 에어도 읽어보세요 ^^

stella.K 2012-02-18 14:23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럴려고.
이거 말은 꺼내놨으니 지켜야겠지?ㅋㅋ
제발 제인에어는 폭풍의 언덕 같지는 않게되길 바라고 있어.ㅠ

비로그인 2012-02-20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을 읽는 데 고전하셨군요 ㅎㅎ <폭풍의 언덕>은 제대로 읽은 기억이 안 나요. 한 번 들춰본 것 같기는 한데...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 아마 저도 스텔라님처럼 한 순간 이 책을 스쳐지나갔나봐요. 중학교 때 친구가 이 책을 추천해주었었는데, 저는 이 책이 뭔가 불길하고 마음에 안 들어서 대신 <제인 에어>를 감명 깊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

stella.K 2012-02-20 12:5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도 제인에어는 폭풍의 언덕 보다 재밌게 읽은
기억이 나요. 지금은 내용이 하나도 기억에 없지만.
뭐 수다쟁이님 말씀도 있고 하니 좀 덜 고전하리라 믿으면서
3월을 기약하렵니다.^^

아이리시스 2012-02-20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빨리 읽으셨어요! '의식의 흐름' 기법이잖아요. 분명 잘 안 읽혀요. 잘 읽히는 사람은 좀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닐까..( '') 굉장히 빨랐어요. <제인에어>도 좋을 것 같아요. <테스>랑 3종 세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tella.K 2012-02-20 17:54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읽으면서 <테스>가 많이 생각나더만요.
근데 그게 의식의 흐름 기법이었나요?
그것도 모르고 읽었슴다.ㅋㅋ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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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의 저서들은 결코 만만이 읽히지는 않는다. 그는 전기작가로 더 많이 잘 알려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난 오래 전 그의 <체스>란 단편을 읽고 매료되었다. 그후 그의 책이 번역되어 나올 때마다 관심있게 들쳐보게 된다. 하지만 그의 사유의 깊이가 워낙 대단해 좋아는 하지만 선뜻 읽기에는 또 웬지 조심스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체스>를 읽었을 때의 감동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던터라 이번에 새롭게 그의 소설이 번역되어 나왔다는 것이 반가웠다.  

 

내가 <체스>를 기억하는 것은 그의 탁월한 심리 묘사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펼쳐 들었을 때 과연 <체스>에서 느끼는 그런 감동을 느낄 수 있을까 기대를 했는데, 역시나 그 기대를 져버리지 않아 나름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약간은 지루하고, 열린 결말을 보여주고 있어 약간의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하지만 작가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쓴 작품이라 작가의 염세적 사고가 그대로 녹아 있어 실제 주인공이 어땠을지 짐작이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번역자가 옮긴이의 글에서도 썼지만 '신데렐라'의 또 다른 버전을 보는 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데렐라'는 어두운 이면이 없다. 부잣집 딸이었지만 계모에 의해 신분이 강등이 되었으면서도 밝음을 잃지 않고, 늘 꿋꿋하고 왕자에 대한 사랑을 가슴에 품은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늘 밤 12시만 되면 가난한 재투성이로 변한 신데렐라의 속내는 드러나지 않는다. 솔직히 (적어도)오늘 날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의 세상에서 매일 가난와 부를 왔다갔다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자기 정체성이 많이 흔들려야 오히려 정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감춘 채 고난을 인내하면 백마탄 왕자를 만난다는(원뜻은 그런 뜻은 아닐 것이다. 고난을 인내하면 좋은 날을 맞이 한다는 것의 은유가 되겠지) 허무맹랑하기까지한 이 이야기는 오늘 이 시대에는 참 먹히기가 힘든 이야기가 되어버린 건 아닌지. 더구나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한 이 시대엔 오히려 일부러 적극적으로 결혼을 거부하기까지 한다. 그러니 백마탄 왕자가 나타나 준다는 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안다. 더구나 왕의 피가 흐르는 귀하신 몸께서 한낱 재를 뒤짚어 쓴 여자를 사랑한다고? 아무리 신데렐라의 원래 신분이 귀족이었다고 해도 그것은 현재를 대변해 줄 수 없다. 

 

그런데도 신데렐라 이야기는 인간의 욕망을 대변하는 이야기이도 해 신분상승의 욕망을 부채질 하기도 한다. 바로 내가 본 이 작품은 이 점을 파고 들어가 인간의 내밀한 단면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작품을 보면서 나라나 시대 배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상상하기가 별로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정말 상상해 보라. 우리나라도 그렇고, 세계 어느 나라를 봐도 그렇고, 진짜 부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중산층이거나 그 이하의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많다. 그러나 그들 중엔 또 가깝든 멀든 부자 친인척은 꼭 한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 그들이 2주간 부자들이 사는 세계를 보여 주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2주간 동안 크루즈 여행을 하며 온갖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면 그 기회를 마다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 크리스티네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물론 처음부터 나에게도 행운이...?! 처음엔 얼떨떨할 것이다. 그리고 무작정 좋아하지는 않겠지. 우리네 현실이라는 게 구차하기 이를 때가 없어 잠깐 어디를 다녀오는 것도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갈등하고, 준비를 많이해야 하는 것인가. 더구나 여행을 자주 안 해 본 사람일수록 그리고 생전 경험해 보지도 못한 것을 경험하게 된다면 더 많이 복잡하게 느낄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의 골이 깊으면 깊을수록 유혹도 깊은 법이다. 내 평생 이런 기회가 아니면 다시 올 것 같지 않은 기회를 그냥 흘려 보내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비록 한 순간의 꿈이어도 좋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나와 다른 삶을 잠깐 살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아니 오히려 바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영화 같은 삶이 아닌가. 

 

나 역시도 그것은 만만치 않은 유혹일 것이고, 당연히 그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물론 한번도 상류사회의 삶을 살아 본적이 없으니 그것을 욕망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욕망하지 않는다'가 과연 정직한 말일까? 어렸을 적, 우리 집은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너무도 평범한 집안이라 정말 사돈의 팔촌이라도 좀 유명한 사람이 있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물론 나중에 안 일이긴 하지만, 아버지의 왕고모(이건 또 어떻게 계산이 되는 촌수인지 현깃증이 날 지경이다)쯤 되시는 분이 자유당 시절 유명한 작가라는 것도 알았고, 알만한 명망있는 집안의 딸이라는 것도 알았다. 처음엔 이걸 알고 나름 좋긴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평생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과 나의 삶이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가깝게 지내던 형제도 물건너 살면 이름만 형제고 남이나 나름없는데 촌수도 잘 가늠이 되지 않는 분이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이냔 말이다.

그래도 이 욕망은 수시로 나를 자극했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은 얘기하기도 쑥스럽고 싫지만, 난 사춘기 시절 한 때 미국에 계신 나의 막내 작은 아버지가 나를 데려가 공부시켜 주길 집착적으로 바란 적도 있다. 미국에서 그렇게 잘 사신다는데 어려서 나를 그리도 예뻐하셨던 조카의 팔자 좀 고쳐주시면 안 될까? 바란 적도 있었다. 그뿐인가? 우린 흔히 결혼을 신분상승의 도구로 잘 이용하려고 하지 않는가. 그건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다.  본 소설은 바로 그런 주인공의 욕망을 잘도 건드려주고 있는 것이다.

 

분명 돈이 많으면 잘 살 기회도 많아지고, 사랑에 성공할 확률도 많아지며, 좋은 배우자를 만나 안락한 삶을 영위할 확률도 많아진다. 사람이 거지로 살다 부자로 신분이 바뀌어 사는 것은 그 적응이 빠르다. 그러나 부자가 가난한 사람이 되어 적응하며 살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가난한 자가 추락을 경험하는 것 보다 몇십 배 또는 몇백 배의 강도로 사람을 절망하게 만든다. 더구나 2주 후엔 누더기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 심리 상태를 경험하게 될까? 물론 잠시 공항상태를 경험하겠지. 하지만 그 잠시가 제 3자가 말하는 '잠시'일뿐 경험하기에 따라선 당사자에겐 억겁의 시간일수도 있을 것이다. 크리스티네는 안타깝게도 다시 누더기로 돌아왔을 때 자신이 겪어야 하는 심리적 충격에 대해선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저 생각지 않은 행운을 즐겨보고 싶었을 뿐이다. 또 누가 아는가? 자신이 바로 신데렐라가 될지. 거기엔 그녀의 어머니도 한몫했다. 그러면 더 이상 거절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가난한 삶을 연명하다 부자의 세계에 편입된 우리의 크리스티네는 부자들이 베풀어주는 세례에 정신줄을 놓고 있는 것마는 아니었다. 나름 부자들이 어떻게 처신하고 행동하는지를 인지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체로 그녀는 부의 안락함을 만끽해 그것을 종종 잊어먹거나 합리화 시켰던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바로 주인공 크리스티네와 주변 인물을 통해 계급사회를 교묘하게 때로는 신랄하게 꼬집어 대기도 한다. 어느 사회건 계급을 무시하며 사는 것은 쉽지 않다. 공산주의건, 민주주의건 계급은 잊기마련이다. 이것이 없는 사회야말로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유토피아겠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이상향일뿐이다. 형제지간에도 개인차가 있어 판이한 운명을 살기도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이 계급을 결정 짓는 것은 또한 학교일 것이다. 학교는 사람을 평준화시켰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학교만큼 사람을 서열화시키고 차별을 시키는 곳도 없다. 인간으로 태어나 처음으로 사회를 경험하는 곳에서 이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어디를 간들 이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을까. 공동체 정신을 지향하는 것이 아닌 이상 경쟁사회에서는 이것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크리스티네가 자신의 사고와 상류사회를 비교하는 그것에서 또는 그녀의 신분이 들어나는 과정에서 나는 묘하게도 쓰라린 학교 경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고, 나와 종류가 다른 인간에 대해 사귀는 것을 얼마나 부담스럽고, 경계해 왔는지, 또 유유상종이라고 비슷한 사람끼리 똘똘뭉쳐 틈을 내주지 않는 것에서 크리스티네도 그러했을 것이란 감정이입이 어렵지 않았다. 사실 부의 세계가 베풀어주는 세례가 크면 클수록 그녀가 감내해야 하는 굴욕도 그만큼 컸다. 

 

그래도 바라기는 크레스티네가 자신의 현실로 돌아왔을 때 얼른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나름의 또 새로운 삶을 살아가길 바랬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현실로 돌아왔을 때 허탈하다 못해 현실은 몇백 배 참혹한 것으로 느껴졌지만(더구나 어머니도 돌아간 상황이 아닌가) 그래도 사랑할만한 사람을 만나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것은 오히려 동반자살을 모의하는 것이 되어버렸고, 그 전에 크게 한탕할 것을 모의하는 것에서 소설은 끝나버렸다. 이것은 확실히 말했지만 작가의 사고관을 그대로 반영한 결말이다. 소설의 배경은 전후 오스트리아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그것은 참혹함, 피폐함, 공허함등을 대변했을 것이다. 희망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여기서 복구하고 좋은 사회가 되어도 계급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이나 평화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작가의 염세적 세계관을 그래도 보여준다.    

 

나라면 감정이입이 너무도 잘되는 이 소설의 결말을 어떻게 했을까? 작가는 인간 세계의 밑바닥을 보고 그런 결론을 내렸겠지만 난 아직 바닥을 보지 못했으니 다소 상투적일지 몰라도 가난한 사람은 또 그 나름의 가난한 사랑을 하게되는 것으로 끝을 맺었을지 모를 일이다. 왜 그런 경우가 있지 않은가, 너무 가난해서 그 가난을 반으로 나누려고 결혼하는 커플이 있는가 하면, 바로 가난 때문에 헤어지는 커플도 있다. 물론 가난 때문에 헤어지는 경우가 더 많지만 그거야말로 상투적이 아닌가? 소설은 이야기인만큼 인간의 상상을 더 강화시켜 줄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가난한 연인들의 사랑을 존중해 줄 필요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또 이들을 볼 때 일부러 그것을 강제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결말은 아닌듯도 하다. 즉 다시 말하면, 작가는 이 세대에 다시 한 번 태어나야 하는 줄도 모른다. 그리고 너무 불행하지 않게 세상을 바라봤다면 조금 더 나은 결말을 이끌어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스테반 츠바이크가 이 세대에 다시 태어나도 이 세대를 달가와 하지 않을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그러니 결말을 종용하지 말자. 차라리 다른 작가를 찾아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내가 만일 크리스티네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가득이나 불행한 처지에 지지리 운도 없는 남자를 만나 동반자살을 모의하고 그전에 한탕 크게 할 것을 동조하기 보다, 자신이 경험한 부자들의 세계를 까발리고 좀 더 부풀려 글을 써서 출판사를 찾아 갔을 것 같다. 그리고 누구도 전쟁을 원했던 사람은 없었다. 윗대가리들이 저질러 놓은 이 말도 안되는 놀음에 국민들만 죽어나가는 현실을 보라고 외쳤을지 모를 일이다. 사람은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은 그냥 있는 말이 아니다. 크리스티네는 애인을 잘 만나야 했고, 국민은 지도자를 잘 만나야 했으며, 독자는 작가를 잘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테반 츠바이크는 분명 내가 경외해마지않는 작가임엔 틀림없지만 이 작품은 좀 암울한 작품이라 이런 작가를 좋아하는 나에 대해 회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행을 말하는 소설은 가급적 안 읽는 것이 좋긴한데 문학의 거의 대부분은 허무주의를 담고 있어 행복한 소설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작가의 명성을 생각할 때 이런 판형은 정말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표지는 그렇다쳐도 재생지에 페이퍼백이라니. 예의가 없다못해 홀대하는 것 같아 아쉽다 약간 화도 났다. 이왕 책을 만들려거든 좀 더 생각하고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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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1-30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마도 '욕망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그 욕망을 포기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ㅠ.ㅠ


그나저나
작가의 명성을 파악하고 있는건지 못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머리를 쓰는 것인지
안쓰는 것인지 도대체...ㅋ

스텔라님 말좀 들어주면 어디 덪이라도 나나??


stella.K 2012-01-31 12:38   좋아요 0 | URL
이것도 저만 불만이잖아요.ㅋㅋ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요?
출판사에서 다음판 찍어낼 때 참고하라는 의미도 있죠.
참 오타도 쫌 보이더군요.
그러니 화 안 나갔어요?ㅋ

cyrus 2012-01-30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내용 궁금했었는데, 신데렐라의 또 다른 버젼이라니 누님이 언급한
<체스>랑 이 소설 꼭 읽어봐야겠어요. ^^

stella.K 2012-01-31 12:42   좋아요 0 | URL
작가의 소설은 정말 읽는 맛이 있어.
심리묘사를 정말 잘하고 얼개를 잘 짜놓거든.
근데 크리스티네는 정말 뒤로가면 약간 우울해져.
그거만 조심하면 좋은 것같아.
유럽 문학의 중후한 멋이 난 좋거든.
한번 읽어 봐.^^

차트랑 2012-02-02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증말 화 좀 나갔어요^^

stella.K 2012-02-03 12:54   좋아요 0 | URL
엇, 이책 사셨나요? 그죠? 화 나죠?

푸른기침 2014-06-30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전 장정일 때문에 <체스>를 읽었는데 참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뛰어난 전기작가지만 그의 소설이 전 더 좋습니다. 님의 서재 때문에 이런저런 추억에 잠기다 또 후다닥 갑니다.

stella.K 2014-07-01 13:16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작가는 체스가 제일 좋았던 것 같습니다.^^
 
고산자 - 2009 제1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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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리뷰는 나의 완소작가 박범신의 고산자가 되고 말았다.

말았다.니.  그도 그럴 것이, 이책은 작년 마지막 주에 읽었는데 그러니만큼 대미를 장식하는 책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뭐 때문인지 한해를 넘겨버리고 새해에 읽은 첫책이 되고 말았다. 

 

 글쎄, 박범신 작가가 나의 완소작가라고 해도 그의 책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긴 하다. 언젠가 전작을 독파하고 싶은 욕심나는 작가이긴한데(문제는 생각만 있지 의욕을 내지 않고 있다는 게 문제다), 읽어 본 중에 이책은 다소 밋밋하다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그래서도 작년 대미를 장식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박범신 작가라면 적어도 나에겐 '뜨거운 문장'의 작가라고 생각했다. 이 뜨겁다는 것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는데,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하자면, 삶을 문장으로 태울 줄 아는 작가고, 에로틱한 문체를 구사할 줄 안다는 점에서 그런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고 본다. 

물론 그런 작가의 면면이 이책에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밋밋하다고 느끼는 건 뭐 때문인지 모르겠다. 특별히 클라이막스라고 보여지는 부분도 없는 것 같고, 주인공의 투지가 강하게 드러나지도 않는 것 같다. 그저 잘못 만든 지도 때문에 아버지를 잃어야 했던 고산자 김정호의 관조하는 듯한 자세가 이 소설을 강하게 이끌기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맨끝에 작가의 질문이 좋았다. 

고산자 김정호는 누굴까? 천주학쟁이로 핍박을 받거나, 문둥병자는 아닐까? 

도대체 왜 그는 대동여지도에 독도를 그려넣지 않아 일본인의 말거리를 만들었을까?중국과 아라사가 각각 제 것이라고 우기는 압록강 하구의 녹둔도나 두만강 하구의 신도는 대동여지도에 당당히 그려넣으면서, 왜 간도 일대는 모두 빠뜨렸을까? 대마도는 오키나와는? 대체 그는 어떻게 백수십 년 전에 그처럼 오차가 거의 없는 과학적인 축척지도를 그렸을까, 대동여지도 목판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을까. (작가의 말 중에서) 이런 모든 질문이 작가로 하여금 김정호를 형상화하고 싶었을 것이다. 거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서.

 

지구는 편편하였을 것이라는 사람의 일반적인 생각을 뒤집어 놓았던 것은 갈릴레오였다. 그런 것처럼 우리나라 지도는 토끼 모양을 하고 있다거나 호랑이가 꿈틀거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도 하는데, 어쨌거나 그런 모양을 발견하기 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백두산을 수차례 올랐다고 하는데 거기 올라서면 정말 우리나라가 그런 모양인 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 솔직히 내 나라나 남의 나라나 지도를 그리는 사람은 신기하다. 어떻게 그렸을까?

 

작가는 김정호를 고독한 자로 그렸다. 좀 더 탐험가적 인물로 지도를 그리기까지의 과정 보다 존재의 본질을 찾고 천하를 주유하는 인물로 그린 것이 어떻게도 주인공을 살려내지 못하는 범작이 되고 만 것은 아닌지.   

하긴, 아무리 기고, 뛰고, 날으는 작가라도 거기엔 반드시 범작은 있게 마련이다. 아쉽게도 이 작품이 그런 작품이 되고만 것은 아닌가 한다. 또 모를 일이다. 세월 흘러 다시 읽는다면 또 다른 읽는 맛을 느끼게 될런지. 

나는 이런 식으로 나의 완소 작가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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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1-06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하, 오늘 저도 새해 첫 리뷰를 한 번 써볼까, 하고 생각했는데 이모님께서 먼저 써주시니... 저는 박범신의 작품은 한번도 안 읽어봤어요.. 한국문학에는 영 미흡하기에.. 제목만 몇개 알지요. 마...말굽?

stella.K 2012-01-07 20:42   좋아요 0 | URL
이진이가 박범신을 읽기엔 좀 이를거란 생각이 들어.
사실 나도 박범신을 읽은지 얼마 안되거든.
그렇지. 의인이 고향에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문학을 사랑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아.
그래도 쉽게 저버릴 수 없는 것이 또한 우리문학이란다.
특히 나이들면 들수록!ㅋㅋ

프레이야 2012-01-06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의 은교 리뷰가 떠올라요. 님의 완소작가 박범신은 청년이더군요.^^
우리도 올해 나이 한 살 더 먹어도 청춘합시나. 건강하게요.
근데 '고산자'는 별셋, 범작이군요. 그럼요, 대가에게도 범작이 있게 마련이지요.

stella.K 2012-01-07 20:44   좋아요 0 | URL
어맛! 프레이야님 오셨네요.
새해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어요.
그래요. 나이 먹어도 청춘으로 살아요. 건강하게.
프레이야님 올해도 좋은 일 가득가득 넘쳐나길 빌어요.
새해 복 많이 받구요.^^

차트랑 2012-01-07 0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의 리뷰 완전 감동적입니다!!
도서를 선택하는데 더없는 정보를 주신 리뷰입니다.
저는 책을 얼마나 더 읽어야 이런 리뷰를 쓸수가 있는 것인지 ㅠ.ㅠ

강력하고 날카로운 리뷰어를 만나, 감동먹고 갑니다~ 스텔라님~
이런 리뷰를 써주시는 한, 스텔라님은 저의 완소리뷰어^^

stella.K 2012-01-07 20:49   좋아요 0 | URL
에고, 부끄럽습니다. 사실 크게 감동 먹은 게 없어서
리뷰 쓰기에도 약간은 애매하더군요.
그래도 잘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앞으로 차트랑공님의 독서에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하네요.^^

페크pek0501 2012-01-08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틱한 문체를 구사할 줄 안다는 점에서" - 맞아요. 저도 예전에 박범신 작가의 에로틱한 문장들을 읽은 기억이 있어요. 그러고 보니 요즘엔 이 작가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네요.

밋밋하다고 느껴지는 것 - 저도 요즘 웬만한 책에선 큰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 걸 느끼는데, 나이탓도 있겠지만 우리 입맛이 고급스러워져서가 아닐까 생각해 봤어요. 음식도 그렇잖아요. 김치만으로도 맛있게 먹던 어린시절과 다르잖아요. 자꾸 더 맛있는 걸 찾게 되고...

그래서 책을 고를 때 예전에 비해 훨씬 신중해져요. 아주 좋은 책만을 엄선해서 골라 있게 돼요. ㅋㅋ

stella.K 2012-01-09 13:44   좋아요 0 | URL
내 말이요.ㅎㅎ
 
나의 이스마엘
다니엘 퀸 지음, 박희원 옮김 / 평사리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요즘 드라마 대세는 아무래도 <뿌리 깊은 나무>에 있지 않나 싶다.
탄탄한 스토리 구성, 좋은 배우들, 화려한 액션.  그런 것들이 어우려져서 볼거리가 풍부하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성공 요인은 그런 부수적인 것에 있지 않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의 정신과 그것이 탄생하기까지의 쉽지 않은 과정이 고스란히 들어나서 감동을 더하는 것 같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면, 세종대왕의 정신 때문이다. 오천 자나 되는 한문은 사대부와 있는 자들의 전위물이었다. 평범한 백성들은 동틀  때 일어나 하루종일 허리 한번 펴보지 못하고 계속 일만하다가 하루를 보낸다. 그들은 일만 하느라 글을 깨칠 시간이 없었고, 그렇지 않아도 양반들은 평민들이 언문을 깨치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것을 깨우치게 되면 자기들의 세계가 위협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세종대왕은 평민도 글을 깨우치고 자기네들이 사는 세상을 함께 인식해 주길 바랐고, 그들을 위한 세상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세종대왕님의 한글은, 사회적 신분의 격차는 많이 줄이는 개기를 가져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내재해 있는 근본적인 의식의 벽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채 지금은 자본주의란 이름으로 그 힘을 더 크게 키워오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부익부 빈익빈의 빈부격차를 지금도 계속 낫고 있다.
지금도 지구상의 반은 굶주림에 허덕이든가, 영양실조의 위기를 겪고 있다. 그것이 그들 나라의 경제적 구조의 문제와 기후 조건의 문제라고 떠넘기고 있지만, 거기엔 막강한 글로벌한 자본주의가 있는 것을 안다면, 다시 말해 그들의 탐욕 때문인 것을 안다면 이것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는 것은 우리가 결코 용납하거나 두고만 보아서는 안된다. 그래서 또 그것을 일깨워주는 저작물들이 속속들이 등장을 하고 있다.
그것은 확실히 반가운 일이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책들이 성인들에게만 국한되어 버린다면 자라나는 아이들은 어디가서 그런 책을 접해 볼 수가 있겠는가. 변화를 가능하게 하고, 그것을 주도해야할 사람들은 누구보다 어린 아이와 청소년들이다. 그들이 그만한 때에 그만한 깨우침을 받지 못하면 변화를 주도하기는커녕 변화에 순응하는 인간 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책이 나와 아이들에게 읽힌다면 그것은 뜻있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고릴라 이스마엘>이란 책의 후속작으로, 나는 아쉽게도 <고릴라 이스마엘>을 읽지 못하였지만(그렇지 않아도 그 책은 품절됐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고릴라 이스마엘의 시각에서 풀어 쓴 책이다. 고릴라라는 동물을 등장시킨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무엇보다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른 시각, 다른 기준으로 이 세상을 해석하고 바라보길 원하는 저자의 의도가 다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물을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생태학적 측면에서 바라보길 원했던 것 같다.  

사실 다른 종(種)은 몰라도 인간이란 종만큼 자연과 부조화하고, 자연을 이겨 먹으려 하는 종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엔 세상을 통제하려고 하는 이기심과 오만함이 항상 서려 있다. 이것을 그대로 방치해 뒀다가는 인류와 지구 전체의 종말을 지켜 보는 건 시간문제다.
모르긴 해도 인류라는 종도 어느 정도까지는 자연과 어울려 살았을거라고 본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계기로 인간은 지구를 파괴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구가 급속도로 병들기 시작한 건 최근 100년간에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다. 지구에 인류가 산지가 얼마나 됐는데 이 100년 동안 지구를 이렇게까지 병들 수 있게 만들었을까? 정말 생각만 하면 아찔하다. 과연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이 지구를 병들기 이전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런지 의문이다. 그래도 그 노력을 계속해 나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볼 때 '희망'(아니 그건 차라리 소망이라고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이라는 말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희망이 없다면 우리가 살아갈 아무런 근거는 없지 않는가.  

몇년 전부터 블루 오션이란 단어가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다른 가치. 다른 판단. 다른 기준. 지금 이대로의 체계와 가치로서는 이 세상을 살릴 방도가 없기에. 그래서 인류는 진화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진화하되 제대로 진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를 깨우칠 필요가 있다.
세종대왕이 참 위대하고 좋은 일을 했다. 우리 글이 있었기에 이 책의 우리말 번역판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읽지 않는다면 그건 우리 손해다. 읽어라. 그리고 깨우쳐라. 우리가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를.  

단지 이런 건 있다. 청소년을 위한 책이라면서 쉽게 읽혀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문장 하나 하나에서 느껴지는 건, 저자가 이것을 청소년의 눈높이에서 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 사려 깊은 사색이 느껴진다. 하긴, 청소년 책이라고 쉽게만 읽혀지는 책을 보라는 법있나? 그냥 오도독 생쌀 씹겠다는 각오로 읽으면 못 읽을 것도 없다. 그만큼 성인에게도 좋다는 말이다. 생쌀도 씹으면 그 나름의 맛있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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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1-11-27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소년책이라고 해놓고 어려운책 무진장 많습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도 선생님께서 청소년이 읽어야한다,
하고 말씀하셨는데. 하아, 첫 장읽고 바로 책 덮었지 말입니다 ㅋㅋㅋ
또 고전문학같은건 ㅠㅠ

stella.K 2011-11-27 20:26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정말 그 책 쉽게 볼 책은 아닌데...
그렇다면 진짜 청소년이 볼만한 책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번역이 더 쉬워져야 하는 걸까?
이 책도 청소년에게 쉽게 권할만한 책은 아닌듯 한데
그래도 미국내에선 무슨무슨 청소년문학상을 탓단 말이죠.ㅠ
 
소설 손양원 : 사랑과 용서
유현종 지음 / 홍성사 / 2010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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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목사에 대해선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가 주기철 목사와 함께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있다는 것과, 순교하기 전, 두 아들을 잃었는데 바로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 자를 양아들로 삼은 일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기독교의 유명한 일화다.

솔직히 순교자야 워낙에 기독교 복음 선교가 척박한 우리나라의 시대적 상황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쳐도, 어떻게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 자를 양아들로 삼을 수 있을까?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한편 인간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신실하게 주님을 따르고, 사랑과 용서의 원리에 입각해서 더 이상 미워하지 않을 수는 있을 것도 같다. 그를 다시 보지 않는다면 말이다. 또한 그것만으로도 큰일을 해내는 것이라고 우리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타인으로 부터 위로 받기를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원수를 가슴으로 끌어안고 보듬는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그건 바보 아니면 성자. 둘 중의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닫는 건, 물론 그런 식으로의 용서도 대단한 일이겠지만, 우린 또 그런 식으로 나 자신을 얼마나 많이 제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선을 거 왔던가를 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어느 때고 나 자신을 원하시되 100%를 원하지 않은 때가 없으셨다. 왜? 아들을 내어 주시돼 온전히 내어 주셨으니까. 나를 위해 십자가에 고난당하시고, 피 흘려 죽으셨다. 그러므로 나의 죄를 완전히 사해주셨다. 하지만 돌아보면 나는 하나님께 나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린 적이 없다. 내가 뭔데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 드릴 수 없단 말인가? 사랑하는 관계는 100%가 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게 진정한 사랑의 관계다. 누구는 온전히 100% 아니 그 이상을 내어 줬는데, 누구는 80%만 내어 준다면 그건 온전히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며 상대를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 혹자는 이렇게도 말한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 법이라고. 먼저 선의를 베풀면 뒤통수를 맞는 법이니 절대 사람을 믿지 말라며, 그것을 정당화하며 신념처럼 여기기도 한다. 물론 그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손양원 목사의 딸 동희 양이 두 오빠를 죽인 재선을 아들로 삼으려는 아버지 앞에서 울부짖었던 것에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손양원 목사는 그 부분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 드렸던 것 같다.

나는, 손양원 목사가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는 장면이 비교적 단순하게 묘사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름 그도 쉽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성경에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드렸던 사건과 오버랩이 되기도 한다. 우린 그저 단순하게 아무 생각 없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을 공부하다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아브라함도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을 때 나름의 고뇌가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 손양원 목사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본다. 더구나 하나도 아닌 둘이고, 그것도 확인 사살로 두 번 죽인 자이다. 어찌 보면 아비로서 비참했을 것이다.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넘어 모멸감까지 느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 것을 그저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덥석 아들로 삼을 수 있을까? 그에 대한 괴로움이 생략이 되어 아쉬움은 남지만, 대신 그의 딸이 울부짖는 것으로 작가는 그 부분을 대신 했다고 보여 진다.

하지만 또 어쩌면 손양원 목사는 처음부터 원수를 원망할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것은 사람 자체가 악해서라기 보단, 시대 자체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알지도 못한 채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 미쳐 날뛰는 자를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그저 탓한다면 시대를 탓하는 수밖에. 후에 판도는 완전히 바뀌어서 공산당에 부역한 자들을 색출해서 처단해야 할 때, 여느 사람 같으면 나라가 대신 원수를 갚게 해 주는구나 약간의 위로는 됐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손양원 목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그런 결단을 하지 않았더라면 한 생명이 그 자리에서 죽음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그는 단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알고 죽게 되길 바랐을 것이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암울하고, 짐승 같은 세대일수록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란 걸 하나님은 친히 손양원 목사로 하여금 증명케 하셨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무엇보다 책을 읽으면서 손양원 목사의 신앙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단순함’ 또는 ‘순전함’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단순하다는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말해도 믿지 않을 만큼, 인간은 단순하지가 못하다. 솔직히 단순해지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 솔직히 나 자신 신앙생활을 하면서 순간순간 얼마나 의심이 많은지, 얼마나 회의가 많은지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신앙은 단순해지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순전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토 달지 않고, 변명하지 않고, 이유 갖다 붙이지 않고, 그저 단순히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을 손양원 목사는 끝까지 지키며 보여줬고, 어떤 결기마저 느끼게 해 줬다. 하지만 한편 드는 생각은 과연 이런 사람이 오늘 날에도 존재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오늘 날은 우리는 너무나 풍요롭고 편안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너도 나도 기득권을 얻기 위해 발 버둥대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목사들조차 할 수만 있으면 좋은 교회, 될 수 있으면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경쟁을 하고 있다. 그런 세상에서 과연 손양원 목사 같은 올곧은 분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가려져 쉬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등불을 켜서 창문 아래 두지 않고 창가 위에 둔다고 하셨다. 그런 것처럼 착한 일, 옳은 일은 드러나게 되어 있으며 많은 사람의 본이 될 수 있도록 하신다.

지금 한국교회는 그 어느 때 보다 위기라고 말한다. 이런 때에 손양원 목사의 전기 소설을 읽는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깨닫는 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애국하는 길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상에게 절하는 것을 들어 신사참배를 거부한 손양원 목사는 물론 그의 부친 손종일 장로 같은 분이 계셨기에 우리나라는 일제통치에서 해방을 맞을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나라의 국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일본의 신사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지만, 다른 우상에 무릎 꿇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신앙의 선배들의 결기를 생각하면서, 나의 신앙은 지금 어떤지 다시 한 번 점검하고 되돌아 봐야할 때라고 본다.  

글이 참 막힘없이 유려하다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는 이미 역사 소설가로 잘 알려진 분의 글이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기독인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볼 수 있어 좋은 독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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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헨 2011-10-31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양원 목사님...학교 다닐때 읽었는데...제 믿음의 얕음을 절실히 느꼈죠.
새로나온 책인가보네요.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stella.K 2011-10-31 17:46   좋아요 0 | URL
아, 메르헨님도 크리스찬이시군요.
작가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현종 작가라서
마음이 가더군요.
이번 기회에 손양원 목사님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개기가
되서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근대사와 그 역사 속에서 기독교인의 역할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페크pek0501 2011-11-04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자는 이렇게도 말한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 법이라고. 먼저 선의를 베풀면 뒤통수를 맞는 법이니 절대 사람을 믿지 말라며, 그것을 정당화하며 신념처럼 여기기도 한다" - 이렇게 생각한다면 세상살이가 너무 살벌해요. 선의를 베풀고 그것에 대한 대가를 바라는 게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그 대가가 없으면 실망하죠. 그냥 베푸는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 모두... 베푸는 그 자체도 즐거움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뒤통수를 맞는다?, 우리 뒤통수 치는 사람, 되지 맙시다. ^^ 남 가슴 아프게 하면 즐거운가요? 원래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자고, 때린 사람은 괴로워 못 자는 법이죠. ^^

stella.K 2011-11-05 11:15   좋아요 0 | URL
와우, 어제 저의 서재에 오셔서 아주 훑으셨군요.
고맙습니다. 저는 오래된 서재라 그런지 옛날에
알았던 서재인들과도 서로 왕래가 뜸해졌어요.
지금 한창 활동중인 분들은 또 비슷한 시기에 서재 활동을 하신 분들
끼리만 친한 것 같고.
새롭게 누굴 사귀자니 그렇고, 옛 사람과 통하자니 그렇고.
제가 성격이 그래서 그런가, 오래된 서재인의 고충이 이런 거더라구요.
그래도 이렇게 님의 예방을 받으니 정말 반갑고 좋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