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언제나 옳다 - 감정을 다스리는 다섯 가지 마음처방전 아우름 17
김병수 지음 / 샘터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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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 깊은 메세지는 ‘우울할 때 움직이라‘는 것이다. Actions speak louder than 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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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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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살면서,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음을 느낀다. 때로는 그 일이 너무 거대해서 손쓸 의지조차 잃어버린다. 그리고 대부분은 어떻게든 흐름을 바꾸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상처를 받는다. 특히 인간관계는 사소한 변수가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버리기 때문에 누구도 쉽게 확신할 수 없다. 연인이, 가족이, 친구가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으로 괴로워진다. 그러나 그 나약함을 보여주지 못한다. 아픔을 드러내면 관계에서 주도권을 뺏긴다는 두려움이 거짓말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괴로워하다가, 가장 원하지 않은 순간에 최악의 방식으로 감정을 폭력적으로 표현한다. 결과는 해결은 커녕 사태를 심각하게 만들 뿐이다. 


 처음에 다자키 쓰쿠루는 친구들 사이에서 버림받은 일이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그와 가까이 지냈던 네 명의 친구들은 아무런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그와 손절했다. 다자키는 그 아득한 부조리 앞에서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버림받을 만한 이유가 있는 놈이라고, 나처럼 남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개성도 없는(그만 유일하게 이름에 색채가 없었으니까) 사람을 떠나는 게 당연하다고. 그 역시 처음에는 어려웠다고 고백한다. 거의 몇 달 동안 삶과 죽음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했다. 그러다 그의 연인인 사라가 쓰쿠루의 마음 속에 잠겨 있던 상처를 끌어올린다.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졌다 해도 아픔의 깊이는 변함이 없었다. 다자키 쓰쿠루는 용기를 낸다. 다시 마음의 어두운 방에 거짓말을 쌓아올리는 대신, 더 상처가 깊어진다 해도 진실과 마주하자고. 나는 그의 진실함에 마음이 움직였다.


 나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과거로 돌아갔다. 고등학교 때 만난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친구들은 고향에 남아 있고, 나 혼자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 점에서는 다자키 쓰쿠루와 평행선 상에 있다. 다만 나는 그 친구들과 갑자기 끊어지면 정말 힘들겠다는 상상만 해 보았고, 이름에 색채가 없는 청년은 실제로 이별을 겪은 뒤 오랜 시간 동안 아픔을 이겨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난다. 그의 삶이 부럽지도 않다. 그렇다고 안타깝지도 않다. 다만 작은 희망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솔직했다. 나와 그의 결과는 바꾼 것은 용기였다. 


 고통은 받아들여야 이해할 수 있다. 다자키 쓰쿠루가 차츰 밝혀낸 진실, 그것은 가볍지 않았다. 시로의 눈물로 시작된 그의 추방은 모두에게 상처를 주었다. 다른 친구들은 도망쳤고, 구루만이 해결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다자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다자키의 잘못이 되었다. 그때 아픔을 받아들이고 조금 더 솔직하게 다가갔다면 다섯 명의 미래는 바뀌었을까? 만약 내가 그룹의 구성원 중 일부였고 목격자의 입장이었다면 방관했을까, 아니면 어떻게든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을까? 나는 대부분 전자를 택했다. 내 문제가 아닌 그들만의 문제라고 여겼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만 내가 목격자가 아닌 입장이라면, 분명 용기가 필요하다. 아마 상처를 준 입장이라면, 나도 모르게 그랬을 것이다. 그 사람과 나는 다르다. 그래서 이해가 필요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내 잘못을 인정하자. 상처를 받았다면, 그것이 점점 커져 서로를 집어삼키기 전에 드러내자. 나에겐 그럴 권리가 있다. 관계를 망가지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자. 대신 최선의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자. 


 모든 일을 내 힘으로 해결할 수는 없음을 깨달은 뒤, 생각보다 단순한 방법이 떠올랐다. 함께 고민하고, 노력하자는 것이다. 다자키는 자신이 색채가 없고, 개성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는 나와 다른 사람이다. 색채는 개성이 아니니까. 그 역시 자신만의 특징이 있었다. 그 다름을 인정한 뒤에야 슬픔을 나눌 수 있다. 고민하고 노력해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관계가 오히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다 받아들이는 일이 버거울지도 모른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이 고통이 나를 살아있게 하는구나, 라고. 용기와 비난 사이, 희망과 망상 사이, 신념과 고집 사이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잠시 나를 내려놓자. 그리고 한 번의 기도를 올린다. 저 사람은 나와 다르다, 그 사실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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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누구나 이야기를 듣기 원하고 그래서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말 속에 진짜 이야기가 들어 있다고 상상하면서 우리 자신을 이야기 속의 인물로 대체시킨다. 마치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기만이다. 우리는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때로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어렴풋이 알기도 하겠지만, 결국은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삶이 계속될수록 우리 자신에 대해 점점 더 불확실해져서 우리 자신의 모순을 점점 더 많이 알아차리게 된다. 누구도 경계를 넘어 다른 사람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누구도 자기 자신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바로 그 간단한 이유로. (p.379~380)

 퀸이 윌리엄 윌슨이라는 인물로 자신을 감춘 것도, 블루가 지미 로즈라는 이름을 숨긴 이유도 자신을 모르기 때문인가. 아이도 스스로를 안다. 스스로를 모르는 우리는 어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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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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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왼손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남편의 눈에 분명 그녀의 왼손은 그대로였지만, 아내는 그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살아간다. 남자는 이 부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김숨의 「왼손잡이 여인」이라는 소설의 내용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망상과 신념의 대립은 「채식주의자」에서 더 거칠게 표현된다. '나'는 아내가 꿈에서 날고기를 먹는 자신을 발견한 뒤, 고기류를 일절 먹지 않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선 그는 그게 말이 되느냐며 화부터 낸다. 그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불이익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아내에게 일방적인 폭력을 행한다. 그녀를 '채식주의자'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폭력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으로 묘사된다.

 

 회식이 있어 늦게 들어온 밤이면 나는 술기운에 기대어 아내를 덮쳐보기도 했다. 저항하는 팔을 누르고 바지를 벗길 때는 뜻밖의 흥분을 느꼈다.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아내에게 낮은 욕설을 뱉어가며 세 번에 한 번은 삽입에 성공했다. 그럴 때 아내는 마치 자신이 끌려온 종군위안부라도 되는 듯 어둠 속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 행위가 끝나는 즉시 그녀는 옆으로 돌아누워 이불 속에 얼굴을 숨겼다(p.39~40).


 주변 사람들, 심지어 가족들조차 그녀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급기야 영혜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주먹을 휘두른다. 그래도 여자는 침묵을 지킨다.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야 단서가 나온다. 그녀는 날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영혜의 행동 뒤에는 저항하려는 욕구가 담겨 있었다.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섬김을 강요하는 남편, 아내가 남편을 보필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시선(마치 모든 인간은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듯이)들에 말이다. 물론 이 저항 방식이 현명했는가에 대한 여부는 각자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소설은 언제나 여지를 남기고, 나는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몽고반점」에서도 이어진다. 이번에도 남자의 일방적인 시선에서 이루어지는 전개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욕망을 채워가는 과정에서, 영혜는 고기를 먹지 않은 이유를 밝힌다.


 그러니까…… 이제 알겠어요.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 걸.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 걸(p.143).


 다소 모호한 답변을 남긴 영혜의 진실은 「나무불꽃」에 이르러서야 드러난다. 영혜의 마음과 가장 비슷하지만, 정반대의 선택을 한 언니의 시선을 통해서 말이다. 그녀 역시 일방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에게 상처를 받은 존재다. 「몽고반점」에서 그녀의 남편은 영혜를 예술의 도구이자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하다가, 아내에게 발각되고 만다. 그로 인해 남편은 도망치고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두 자매를 버린다. 영혜의 언니가 버틸 수 있는 이유는 하나뿐인 아들 때문이었다. 두 여자는 아직도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정신병원에서 또 다시 폭력을 당하는 영혜의 모습을 지켜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그 저녁, 영혜의 말대로 그들이 영영 집을 떠났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그날의 가족모임에서, 아버지가 영혜의 뺨을 치기 전에 그녀가 더 세게 팔을 붙잡았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p.192). 

 

 영혜의 행동은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투쟁이었다. 폭력의 씨앗은 아버지였다. 손이 거친 그녀의 아버지는 유독 영혜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그 주먹은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난 가족모임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영혜의 기억 저편에는 자신을 물었던 개가 아버지에 의해 끔찍하게 죽는 장면이 남아 있다. 자신도 그 개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육식을 끊었다. 자기 자신의 얼굴을 먹는 일을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남편은 고기반찬을 해 주지 않는 아내에게 화를 냈고, 회사 사람들은 고기를 먹지 않는 영혜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폭력의 순환이 아버지를 통해 되돌아왔을 때, 이미 그녀의 삶은 끝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굴레는 끝나지 않는다. 처제에 대한 욕망을 실현하려는 그의 폭력은 상당히 무섭고 피부에 와 닿는다. "저 여자가 먼저 허락했으니,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일상에 도처한 폭력의 변명거리다. 계약서에 서명했으니,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저 사람은 이제 내 것이다. 영혜가 승낙한 순간, 두 사람의 관계는 친족이 아니라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관계로 변한다. 권력을 이용한 폭력의 현장이 꽃의 형상과 어우러지는 바람에 정신이 혼미했지만, 영혜의 언니가 등장하는 순간 정신을 차렸다. 그것은 명백한 억압이었다. 그리고 영혜에 마지막 남은 신체적 자유가 박탈당하는 순간, 그녀는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정신병원에서 그녀에게 미음을 먹이려던 이들은, 오래 전 나무가 되어버린 존재에게 고기를 강요하는 정신이상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결국 이 여자에게 닥칠 폭력의 운명은 끝나지 않았다. 주변 인물들이 그러하듯.


 이 추측은 틀릴지 모른다. 영혜의 생각이 직접 드러난 적은 없었으니까. 꿈들조차 장면의 사실적인 묘사였을 뿐이다. 하지만 말과 행동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녀는 말하지 않고, 단지 보여줬을 뿐이다. 우리는 판단할 수 없다. 이해가 우리의 몫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나무라고 여기는 여자를, 폭력으로 얼룩진 그녀의 삶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평론가도 말한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도 이해의 한 방편이라고. 고기를 먹는 나는 채식주의자를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너를 모른다. 그래서 나는 너를 이해하기 위해 침묵한다. 때로는 침묵이 수만 마디를 대신한다. 그러니 지켜보자. 기다리자. 그래도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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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사물
조경란 지음 / 마음산책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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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쓰는 일을 사명이자 오락으로 생각하는 이에게 다른 사람의 글을 보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큰 모욕이다. 절대 저자와 같은 생각을 품을 수 없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뭐라도 적어야 한다. 소설가가 자신의 삶을 녹여내며 "글쓰기란 이런 것이다", "작가는 이런 사람이야"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어떻게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을까? 아직 미완성되었다 해도 저항하는 것이 의무이다. 그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사물에는 추억이 담겨 있다. 사물은 추억의 주인공이 아니다. 주변 인물들을 비추는 거울일 뿐이다. 지극히 평범한 사물들 틈에서 과거를 하나하나 추려내는 것은 현재를 조금만 희생하면 가능한 일이다. 사물 뒤로 시간과 공간이 함께 움직이고, 사람들이 나타나고, 감각들이 느껴지다가, 마침내 나의 생각이 도착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것은 매개체일 뿐이다. 


 책, 들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너무 어려운 일이다. 어렸을 때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이나 내 인생의 책을 고른 뒤, 그 사물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진부하다. 서점에서 헌 책의 냄새를 맡으며 행복한 고민을 했던 기억은 이제 흐릿하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과 함께 읽었던 책을 떠올린다. 선생님 한 분을 탁자 가운데에 모시고 중고등학생 몇몇과 그들의 엄마(아빠는 없었다, 맹세코)들이 책 한 권의 한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다같이 토론했었고, 그 청소년들 사이에 내가 있었다. 당시 나는 꽤 적극적이었고 책의 분야가 무엇이든 간에 그 독서 모임에 참석했다. 어쩌면 선생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의 경험이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계속될 것만 같았던 5년 간의 수업은 꿈처럼 갑자기 끝났고, 여전히 나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와 함께 가는 것은 오직 『어린 왕자』뿐이다. 1년마다 나는 그를 찾아간다. 아직 어른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아직 어른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화투, 는 내가 계획한 기억의 파편들 중 일부다. 나는 그 순간을 기록해 놓았다. 2016년 9월 13일, 학교 과방에 모여 동기들과 선배들이 모여 화투 치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나. 나는 여전히 화투 치는 법을 모른다. 만약 알았었다면 그 현장에 나도 참여했으리라. 선후배의 구분 없이, 삶의 고민을 잠시 전부 떨쳐버리고, 오직 화투를 치는 그 순간에만 집중했던 우리의 모습을 나는 기억하고 싶었다. 화투 사진을 컬러로 뽑아 전시해 놓고, 제목은 '20160913'으로, 어떠한 부가 설명도 없이 감상하게 하고 싶었다. 과연 그 사진을 본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할지 너무 궁금했다. 이해할 수 없어 비난하며 지나가거나, 나처럼 사물을 통해 추억 속으로 빠져들거나, 선택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보여준다. 말하지 않는다.

 

 사진, 을 글로 표현할 수는 없다. 그러니 풍경 묘사나 분위기에 대한 설명 따위는 하지 않겠다. 내가 올해에 기억하려는 것은 내 친구가 홀로 앉아 바깥을 바라보는 모습이 찍힌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다. 별 다른 이유는 없다. 기억하려는 나의 의지만 남아 있다. 글 쓰는 이의 주변인이 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불편한 일이다.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기록의 대상이 되어버리니까. 내 친구는 자신의 사진이 언급되고 있는 것을 알까? 알게 되면 좋아할까, 아니면 꺼림칙할까? 하지만 내 주변에 존재하는 이들을 모두 배제할 수는 없다. 때로는 나도 이야깃거리가 되니 그런 식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 사물에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이 묶여 있다. 사물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느니, 한 사람 한 사람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 더 빠르고 유익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함께 했던 그 순간을 누군가 기억해 주었으면 싶다. 

 글 쓰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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