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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52
알프레트 되블린 지음, 권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5월
평점 :
나는 줄곧 도시가 주인공인 소설에 매료되었다. 『눈먼 자들의 도시』가 그랬고, 『페스트』가 그랬으며, 『율리시스』가 그랬다.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모일 수밖에 없고, 다양한 군상이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는 그 공간은 모순적으로 나를 매료한다. 나는 도시에 살기를 원치 않으면서 도시에 살기를 선택한다. 도시의 체계에 대해 늘 불안함을 느끼면서 그 혜택을 누리며 살아간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 뒤에는 각종 추악한 범죄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나아지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에 만족한다. 현재로부터 약 100년 전에 묘사된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속 베를린의 모습은 서울 내지는 대한민국의 대도시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것이 이 고전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이다.
주인공 프란츠는 분명 선한 인물은 아니다. 전과가 있고, 출소한 이후에도 방탕한 생활을 끊어내지 못한다. 그의 주변 인물인 라인홀트나 미체도 자신의 욕망을 충실히 따르는 이들이다. 작중에 묘사되는 범죄자들 역시 잔혹하고 폭력적이다. 그러나 도시는 이 모든 인물들을 끌어안는다. 마치 화려한 조명의 도시 아래에 그림자가 필연적이라는 듯, 그들의 삶을 끈질기게 추적한다. 그리하여 작가인 알프레트 되블린이 묘사하는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은 성경 구절과 한낱 유행가가 한데 어우러지는 장소가 된다.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행동한다.
역사 의식에 대한 생각을 빼놓을 수 없다.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4년 동안 옥살이를 했던 프란츠 비버코프의 행적은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패배감과 가난에 고통 받았던 독일 자체를 연상시킨다. 서술자가 프란츠에 대해 바라보는 시선이 따갑듯이, 되블린은 독일의 과오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의 시선에는 어딘지 모를 연민이 느껴진다. 다시는 그러한 죄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듯이. 그러나 피조물의 범죄를 지켜보는 창조주처럼, 프란츠의 범죄와 고통과 심판에 대해 작가는 냉정하게 그 흔적을 따라간다. 소설 내에서 전쟁에 대해 언급되는 장면은 많지 않아서 현대의 독자는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전쟁의 여파가 모든 곳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말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작중의 모든 인물은 패전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소설가는 광고나 유행가 등 지극히 평범한 것들을 인용하여 마치 전쟁이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려는 독일 시민들의 모습을 조명한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 주로 사용되는 상징은 '도살장'이다. 도축되고 싶지 않아 저항하는 이들, 그러나 제사의 순서대로 정결하고 기계적으로 도축되는 가축들이 묘사된다. 어쩌면 작가는 도시 속의 인간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도 모른다.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어서 다른 사람들을 짓밟으면서 올라왔지만, 그래 봤자 먼저 도축될 뿐이라고. 도시가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억압하는 자와 차별 받는 자를 모두 품어주는 이유는 그것이 자비롭기 때문이 아니라 이루 말할 수 없이 무정하기 때문이라고. 분명 인간 속에는 한 도시, 한 우주와 같은 무수한 가능성과 생각이 있지만, 한낱 칼날 앞에 스러질 뿐이라고. 비관론적으로 접근하자는 것이 아니다. 도시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도시가 아니라면 사람들 틈에서) 현실을 분명히 직시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나의 쓸모를 결정하는가? 타인을 살해하고 난봉꾼처럼 살아가는 프란츠는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가축과 같은 존재인가? 살아가도 된다는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인가, 아니면 타인인가?
작중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인용해 본다.
고인들에게 명복이 있기를. 베를린에서는 1927년에 사산아를 제외하고 4만 8782명이 죽었다.
4570명은 결핵으로, 6443명은 암으로, 5656명은 심장병으로, 4818명은 혈관 질환으로, 5140명은 뇌졸중으로, 2419명은 폐렴으로, 961명은 백일해로 죽었고 어린아이들 중 562명은 디프테리아로, 123명은 성홍열로, 93명은 홍역으로 죽었으며 그 밖에 3640명의 영아가 죽었다. 총 출생 수는 4만 2696명이다.
죽은 사람들은 공동묘지의 자기 무덤에 누워 있고, 묘지기는 막대기를 들고 다니면서 휴지 조각을 쿡 찔러서 줍는다. (p.609)
지금도 이 도시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또 그만큼 죽지만, 나는 결코 그들의 인생을 알지 못한다. 숫자로 집계된 사람들 각자에게는 저마다의 인생이 있었을 것이다. 저마다의 도시와, 저마다의 꿈이 있었을 것이다. 이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운행되는지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죽고 태어나는데, 나의 삶은 전혀 변동이 없는 것처럼 보일까? 그 신비함에 다시 한 번 잠잠해진다. 많은 것을 배웠다고, 전부를 알 수는 없다. 나의 거창한 다짐과 행적은 공동묘지에 누워 있는 이들에게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며, 죽음이란 "막대기를 들고 다니면서 휴지 조각을 쿡 찔러서 줍는" 일과 같이 일상적이다. 생명과 죽음, 쾌락과 고통, 편리와 불편이 공존하는 이 도시에서 나는 어떤 것을 보려고 하는가? 도시가 주인공인 소설들은 나에게 언제나 질문한다. 그리고 말한다. 대답하지 않아도 되니, 단지 선택하라고. 도시를 구성하는 통계 속의 인간이 될 것인지, 그 마음 안에 도시 전체를 품는 자로 살아갈지 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여기에 적을 필요도 없다. 그 결과와 책임은 내 삶에 고스란히 드러날 따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