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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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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초엽 작가에 대해서는 학술대회에서 처음 접했으나, 『지구 끝의 온실』은 SF를 사랑하는 한 명의 독자로서, 순진한 호기심으로 읽기로 다짐한 책이었다. 인류세 논의, 한국 SF의 전망 등의 거창한 이야기는 제쳐두고, 멸망에 맞서는 인간들의 사투를 그린다는 점에서 참 반가웠다. 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나 디스토피아 문학에서 놓치는 것이 멸망의 과정인데, 『지구 끝의 온실』은 더스트 폭풍 이후로 찾아온 무수한 혼란과 그에 투쟁하는 인간들의 사투를 생생하게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문명 재건 이후의 시점에서 바라본 과거의 치열한 사투가 결코 현재와 무관하지 않기에 참으로 작가가 치밀하게 소설을 구상했구나 싶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지수와 레이첼의 불분명한 성이다. 이름상으로는 지수가 남자고 레이첼이 여자 같지만, 레이첼에 대해 '그'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렇고 지수의 성이 어딘가 불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내가 초반을 주의깊게 읽지 않았는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작가는 상당히 의도적으로 인물들의 성별을 감추어 놓는다. 아마도 남성, 여성이라는 구분을 하기에는 레이첼이 반은 인간이고 반은 기계이기 때문에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인간의 기준으로 모든 존재를 해석하는 대신, 인간 역시 하나의 종으로 분류하려는 그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작가의 말이 꽤 인상 깊었다. 오직 식물만이 내 소설을 구원해줄 생물이라는 것. 그녀 역시 자신이 만든 세계가 존재할 법함을 믿고 있었다. 인간의 기술력이나 서로에 대한 신뢰라는 얄팍한 가치로는 소설 속 세상을 구할 수 없었다. 오직 식물의 번식력, 자생력, 그리고 단결이 끝없이 증식하는 재앙을 막을 수 있었다. 모스바나는 처음에 인간에게 해로워 보였으나, 아니 어쩌면 인간에게 적대적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지구상에 퍼져나가며 더스트를 흡수했고, 자신의 본분을 다한 뒤에는 저절로 사라졌다. 그 모스바나를 간직한 레이첼은 지수를 제외한 어떤 인간에게도 이해받지 못했지만, 지구 끝의 온실을 끝내 간직했고 그것을 불태움으로써 도리어 모스바나를 전 세계로 퍼뜨리는 데에 기여했다.

 

 뇌가 기계로 되어 있는 레이첼은 어떤 것도 의도하지 않았다. 사랑이라거나, 인류의 구원자가 되겠다는 바람은 프로그래밍 되어 있지 않았다. 단지 레이첼은 한 명의 개체로, 종의 일부로 살아가고 싶었다. 나오미와 아마라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위협들에 맞서 프림 빌리지에 도달했으나, 그곳에서의 희망과 인간성은 외부 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다. 지구의 주인이라고 착각했던 인간들은 그 지위를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에 대한 지배욕을 멈추지 않는다. 돔 시티에 사는 사람들은 지구에 있는 모든 생물들 중 자신들만이 같은 종을 학대하고, 또 학살하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인간이 과연 무슨 자격으로 종들의 지배자를 자처한단 말인가? 더스트 시대가 남겨준 교훈은 이것이었다.


 아영이 살아가는 22세기는 안녕한가? 멸종의 위기를 넘긴 자들은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계속 노력한다. 기술에 의존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어리석은 시절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는 숙제가 있다. 잃어버린 종의 역사를 어떻게 복원할 수 있을까? 다시 인류가 번성했을 때, 어떻게 겸손함의 가치를 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종의 일부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류세 논의의 모순(인류가 모두 멸종한 다음의 시대를 논의하는 것이 인류에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이 다른 종들, 그러니까 동물, 곤충, 식물과 동등한 지위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실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고 구원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 방향이 늘 바람직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희망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왜 작가들은 절망으로 가득 찬 세상을 기어이 만들어내는가? 역설적이게도, 지금의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살면서도 마침내 그것을 이어가기로 다짐했기 때문이다. 문학이 왜 존재해야 하느냐고, 인류의 존망이 걸린 문제에서 소설가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작가들은 바보처럼 "읽어보라"고 대답한다. 그들은 말보다는 글이 편하니까.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도 바보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권한다. 어떻게든, 문학을 읽어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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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이야기 비룡소 걸작선 29
미하엘 엔데 지음, 로즈비타 콰드플리크 그림, 허수경 옮김 / 비룡소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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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없는 이야기』에 존재하는 가장 큰 적은 사나운 괴물이나 미지의 존재가 아니다. 아무리 강력한 존재라도 아우린의 부적 앞에서 순종하며, 환상 세계의 인물인 아트레유와 현실 세계의 아이인 바스티안 사이의 갈등도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독자들이 미하엘 엔데가 펼쳐놓은 환상 속 이야기들을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망각하는 사실은 무(無)가 그 자취를 감춘다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바스티안이 끝없는 이야기 안에 들어온 순간, 이야기는 시작되기 때문에 '무'가 끼어들 틈은 없다.


 이 작품에서 이름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지닌다. 상대방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음은 상대의 지난날을 이해하고, 현재를 공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름은 이야기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야 책방 주인인 코레안더 역시 환상 세계를 경험한 인물임이 드러나지만, 그에게는 환상 세계의 주인이자 어린 여왕의 이름이 '달 아이'가 아니었다. 즉, 그가 겪은 환상 세계는 바스티안이 상상한 세계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각 세계마다 원칙이 있고, 새로운 세계가 있다. 엔데는 모든 사람에게 본인만의 환상 세계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것이야말로 끝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각 사람의 상상력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정말 흥미롭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 책을 읽고 싶어 했다. 어린 시절에는 두꺼운 책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반드시 저 책을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집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책방에 꽂혀 있던 이 매혹적인 제목의 책을 마음속에 오랫동안 담아두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약 15년 뒤에야 이루어졌다. 어른이 되어 읽는『끝없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과 비교해 보았을 때, 시선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주요 소재인 '우로보로스'(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무는 뱀)도 그렇고, 환상 세계 속의 소재들이 여러 신화에서 차용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환상 세계가 분명 매력적이고, 바스티안의 모험도 흥미진진하지만, 나는 그 세계 속의 주인공이 될 수 없음을 인식했다. 나는 더 이상 책 속 세상으로 도피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물론 한 번도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책을 읽은 적은 없다. 이야기를 탐험하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바스티안처럼, 누군가에게 이야기는 훌륭한 피난처가 되기도 한다. 나는 이야기의 힘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야기에 대한 갈망은 여전하다는 것이다. 수많은 책들을 읽었고, 많은 것들을 보고 배웠지만, 나는 여전히 미숙하고 어리석기 때문이다. '무'에 대한 두려움도 여전하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기를 바랐고, 무지로 인한 실수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타인의 이야기를 읽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함을 분명히 안다. 그리고 가상의 이야기인 소설과 실제의 삶 중에 나는 더 재미 있는 쪽을 선호하는 편이다.


 환상 세계에서 수많은 여정을 겪었지만, 바스티안은 단 하루만큼 성장했을 뿐이다. 현실에서 그의 변화를 증명하려면,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가야 한다. 환상 세계의 나머지 부분은 아트레유가 채워줄 것이다. 만약 끝없는 이야기를 완성하고도, 현실 속의 '무'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의 여정은 헛된 것이다. 그의 삶에 남아 있는 관계의 공허함, 소통의 부재는 그 스스로 채워야 한다. 아버지와 소중한 하루를 보내고, 코레안더에게 진실을 털어놓고 나면, 바스티안에은 자신을 억압하는 것들에 대해 투쟁해야 한다. 물론 그 방식은 환상 세계와 다를 것이다. 그 안에서 그는 자신이 만든 이야기라는 이유로 제멋대로 행동하고 판단했지만, 현실에서는 그 역시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인식, 때로는 내가 기꺼이 생명의 물을 가져다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하며, 또 다른 주인공을 위한 초석을 마련해야 함을 인정하는 순간이 성장이 시작되는 때이다. 만약 당신이 세상의 중심에 놓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떠올려야 한다.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를 시작해 달라. 그 자리에 '무'가 자리잡지 않도록, 그 안에 누군가가 들어올 여지가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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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특별판) -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
카이 버드.마틴 셔윈 지음, 최형섭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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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는 원자폭탄을 남기고 떠났다. 그의 삶은 위대한 업적에 대한 과시나 찬란한 미래를 향한 기대보다는 과거에서 밀려오는 후회로 점철되어 있다. 트루먼 대통령과 만났을 때 "내 손에 피가 묻어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핵무기의 확산을 막기 위한 회담을 제안했을 때, "그것은 트리니티 바로 다음 날 했어야 했다"는 말 역시 그렇다.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한 순간, 인류의 역사는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American Prometheus)는 이 물리학자의 업적보다는 비운에 더욱 주목한다. 핵분열은 순간적이지만, 그 연쇄반응은 한없이 길고 고통스럽다. 인류사에 길이 남을 공을 세웠지만, 누가 그를 영웅으로 기억하고, 존경받는 롤 모델로 생각할까?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는 끝없이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지만, 누구도 그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과학은 분명 사고의 지평을 폭발적으로 넓힌다. 메리 셸리(Mary Shelley)가 창조한 가공의 인물인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그리고 오펜하이머는 각각 생물학과 물리학에서 대담한 시도를 했고, 그것을 성공시켰다. 프랑켄슈타인은 신의 영역이라 여겨졌던 생명을 만들었고, 오펜하이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들의 분열과 융합이 가시 세계 전체를 소멸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들의 창조물은 지극히 불완전하고 미약했으나, 발명가들은 인류에게 그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사실만으로 '프로메테우스'라는 별명을 얻기에 충분했다. 이 평전의 저자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운명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 행동의 결과를 담담하게 제시한다. 그 서사시 앞에서 독자는 절로 숙연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남아 있는 자들이다. 어떻게든 교훈을 얻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핵전쟁의 공포와 위협은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그러니 거대한 서사는 역사에 맡겨놓기로 하자. 원자폭탄이나 미시물리학이 주는 위압감이 강해질수록, 오펜하이머의 삶이 주는 여운은 약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기억하고 싶다. 평전의 특성상, 어떤 인물의 좋은 점과 업적만 드러낼 수 없다. 우리는 이 책에서 오펜하이머의 결함을 더 많이 발견한다. 그의 정신적, 육체적 나약함, 광기와 일탈, 편협함과 무책임(특히 가장으로서의)은 원자폭탄을 떼어놓았을 때, 오펜하이머를 초라하게 만들기도 한다. 한편, 나는 자신의 부족한 면모를 독특한 방식으로 극복해 가는 정신을 발견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되기 전, 오펜하이머는 저명한 물리학 교수였다. 그가 처음부터 강의를 잘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강의는 마치 기도문을 읊는 것처럼 단조로웠으나,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한편의 "공연"을 열었다. 드디어 음조의 변화가 생겼다. 중요한 부분일 때 목소리가 더욱 낮아지는 것이 흠이었지만. 강의록이 없이 말하다 보니 꽤 더듬기도 했지만, 항상 유명한 과학자나 시인의 말을 인용한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는 "청중의 얼굴을 보고 어떤 부분에서 이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파악하고는 즉석에서 설명 방법을 완전히 바꾸기도 했다. 한번은 단 한 명의 학생의 관심을 자극하기 위해 강의 시간 전체를 특정한 문제를 설명하는 데 집중하기도 했다."(273쪽) 오펜하이머는 나름대로의 강의 방식을 고안했고, 이것은 그의 천재성과 결합하여 많은 제자들을 물리학의 길로 인도하며 자신의 조력자로 만든다. 저자들이 뚜렷하게 강조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페이지 너머에 실존하는 그의 카리스마와 통찰력을 엿본다. 


 오펜하이머의 가족은 어떨까? 키티는 오펜하이머가 세상을 떠난 지 5년 뒤, 병으로 사망한다. 아들인 피터는 아버지의 정체를 숨기며 평범하게 살고, 딸인 토니는 연약한 자아에 괴로워하다가 마음의 고향인 세인트존에서 자살한다. 그리고 메카시즘의 광풍 및 오펜하이머에게 닥친 불운의 여파로 학계에서 추방된 동생 프랭크는 대학교에 복직을 한다. 그리고 그는 1969년에 '익스플로러토리움'(Exploratorium)이라는 과학 박물관을 설립한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이 박물관에 대해 이렇게 기술한다.


 두 형제가 예술, 정치에 몰두하며 사는 동안 배운 모든 것들이 익스플로러토리움에 집약되어 있었다. 프랭크는 "익스플로러토리움의 목적은 사람들이 그들을 둘러싼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게 해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물질세계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면, 사회적, 정치적 세계 역시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면 모두 침몰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892쪽)

 

 이 "모든 사람에게 권력과 즐거움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세워진 과학 박물관은 현재까지 계속 운영되고 있다. 오펜하이머는 남아 있는 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단순히 샌 프란시스코의 작은 만에서서 유지되는 박물관 하나만을 놓고 하는 말이 아니다. 어쩌면 세상이 멸망한 위협을 무릅쓰고 원자폭탄을 발명하려고 애썼던 이유가 동생의 염원과 같았을지도 모른다. 물질세계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는 순간, 사회적, 정치적 세계를 비롯한 질서가 무너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일까? 그러므로 남아 있는 자들은 이해하려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세계의 원리를 파악해야 한다. 꼭 물리학이 아니어도 좋으니,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해를 포기하는 순간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곳에 내장되어 있는 원자폭탄의 연쇄 반응이 시작되는 때일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그 순간을 목격하지 못했지만, 남아 있는 자들은 어떨까? 그들의 시선은 어디로 향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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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와 죽을 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6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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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망각의 반대편에 서 있다. 잊힘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누구나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어 한다. 죽음은 망각으로의 지름길이기에, 그것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은 당연한 것이다. 전방의 최전선에서 매일의 죽음을 목격하는 병사에게 간만의 휴가란 얼마나 달콤할까! 선전 속에서 늘 승리하는 조국의 품에 돌아가는 것, 아니 솔직해지자면 2년 만에 가족을 볼 수 있다니, 그래버가 느낄 환희란 엄청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파괴된 고향과 실종된 부모였다. 그의 가족은 전쟁의 폭격 속에서 소실된다. 이야기가 경과되면서 그래버의 가족도, 그래버 본인도 망각의 물결에 휩쓸린다. 누가 그들을 기억해 줄까? 


 나는 유럽 문학이 너무도 좋다. 돌이켜 보면, 내가 문학을 사랑하기 시작한 계기도 유럽 작가의 소설들이었다. 영국의 조지 오웰, 프랑스의 카뮈와 생텍쥐페리, 아일랜드의 제임스 조이스, 포르투갈의 주제 사라마구 등이 떠오른다. 어렸을 때 읽었던 레마르크의 『개선문』이 준 인상이 여전히 선명하다. 전쟁 속에서도 꽃피우는 사랑은 늘 강렬한 느낌을 준다. 역경을 뚫고 희망을 꿈꾸는 것은 그 자체로 멋진 일이다. 레마르크가 독일 작가였다는 사실은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반전 소설의 대가인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나치 세력으로부터 탄압을 받고 국적을 박탈당했다는 사실 역시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이 소설의 줄거리와 전개는 여느 전쟁 소설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전선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생생한 묘사는 레마르크의 특기이며, 그로 인해 상실되는 인간성과 참혹함은 많은 전쟁 문학에서 봐 왔던 것이다. 그들은 인류의 역사를 통째로 바꾸어놓은 전쟁의 한복판에 고립되어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에게 기억에 남는 부분은 중간 장면들이었다.『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구성은 '러시아-독일-러시아'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히려 그래버를 절망과 위기에 몰아넣는 공간은 전장 한복판이 아닌 그의 고향 일대이다. 특히 엘리자베스와 결혼을 작정한 그래버가 그녀의 아버지가 수용소에 있다는 사실이 들통날까 봐 노심초사하는 부분은 전쟁이 다른 나라뿐만 아니라 독일의 시민들까지 불행하게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히틀러의 독재 체제는 독일 군인들과 국민들을 가해자로 만드는 동시에 피해자로 바꾸었다. 그들은 서로를 불신하고 비밀 경찰에 폭로하며 전국민적 세뇌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불편한 진실까지 고발하는 것이 반전 문학의 의무임을 생각한다면, 레마르크는 제 역할에 충실한 셈이다.


 나는 이 소설을 삶과 망각 사이를 누비는 그래버의 여정으로 받아들였다. 그에게 삶이란 언제 끝나도 이상하지 않은 위태로운 순간의 연속이자,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가치였다. 그는 부모님의 존재를 기억해야 했고, 파괴된 옛 집을 간직해야 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와의 사랑을 통해 미래를 기약하고 싶었다.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아무도 그를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그 모든 수고가 무슨 보람이란 말인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겠지만, 조국의 영광이니 총통의 인정 따위는 아무렴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그래버에게 아이를 낳자고 설득하는 부분은 이 소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들 중 하나인데, 여기에서도 그녀의 숨은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아기라고! 우리가 이 전쟁에 적응한 것처럼 그 애도 자라면서 새로운 전쟁을 맞이하게 될 테지. 그 애가 태어날 세상이 얼마나 비참할지 한번 생각해 봐. (…) 평화로운 시대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지금까지 거기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우리 주위는 온통 황폐해졌고 대지는 오랫동안 독으로 가득할 거야. 그런데 어떻게 어린애를 가질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바로 그래서 필요한 거예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왜?" 

 "애들을 그런 환경에 맞서 싸우도록 교육하기 위해서죠. 만일 현재와 같은 사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야만스러운 사람들만 아이를 낳게 된다면 어찌 되겠어요? 그렇게 된다면 누가 이 세상에서 정의를 다시 실현할 수 있겠어요?" (p. 478~479)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 엘리자베스는 확고한 입장을 띤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그래버를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도 숨어 있다. 이번에 휴가가 끝나서 전장으로 떠나면 부모님을 잃은 그래버를 누구도 기억할 수 없다. 엘리자베스가 기억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죽음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어서, 남아 있는 자를 과거에 남겨두기만 할 뿐이다. 그녀는 그래버의 자식을 낳음으로써 그를 기억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훗날 그 아이가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였는지, 지금은 어디 있는지 물었을 때, 자연스럽게 전쟁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기억 방식은 아주 대담하고 거친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망각 대신 삶을 택했다. 그래버가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했듯이, 엘리자베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를 지켜준다. 


 기억하는 일은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간직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존재를 지금의 삶에 끌어들이려는 빠듯한 노력이다. 나는 그래버와 엘리자베스 부부처럼 전쟁을 겪은 사람도 아니고, 큰 상실을 겪은 적도 없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인생을 기억해야 하는 책임감을 느낀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타인을 위해서라도, 기억의 행위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 기억이 지금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돌이켜 볼까? 아, 우리는 기억으로 구성된 존재임을 잊고 있었나 보다. 제목은 바뀌어야 마땅하다. 기억과 잊힘 사이를 누비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다. 나의 마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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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6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임종기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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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는 번뜩이는 상상력 뒤에 당대 사회의 모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작가이다. 자전적 소설인 『킵스』(Kipps)에서는 신사(gentleman) 계급의 허울을 폭로하고, 『모로 박사의 섬』(The Island of Doctor Moreau)은 생체 실험 및 동물 학대를 비판하며, 『우주 전쟁』(The War of the Worlds)은 제국주의와 일상적인 삶에 매몰된 사람들에 대해 경고한다. 그의 과학적 상상력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의 유무는 어떻게 보면 크게 중요하지 않다. 웰스에게 특별한 소재란,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담아내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과학 소설(Science Fiction)의 본질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이다. 과학적인 장치들이 말이 되면 그 나름대로 섬뜩한 일이다. 소설 속의 일이 언제든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공포는 상상 이상이다.


 『투명인간』(The Invisible Man)도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존재도 인간에 포함될 수 있는가?"에 대해 묻고 있다. 그리핀은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투명인간이 되는 데에 성공하지만, 투명화를 해제하는 법을 몰라 그대로 살아간다. 곧 그는 한계에 봉착한다. 옷을 구하지 못해 추위에 떨고, 물과 음식을 얻기 위해 곳곳을 전전한다. 사람들과 마차들은 그를 보지 못하고 지나치지만, 투명인간은 그들에게 화낼 수조차 없다. 어차피 그들은 영원히 남자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 투명인간을 맞닥뜨린 사람들이 그를 유령 또는 목소리로 받아들인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결국 혼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깨달은 그리핀은 폭력을 써서 마블을 자신의 시종으로 삼지만, 마블은 끊임없이 남자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또한, 자신의 조력자가 될 것 같았던 켐프는 끝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후반부는 켐프의 시점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독자들은 투명인간의 죽음에 안심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함이 남는다. 무엇이 그 평범한 과학자를 폭군으로 만들었을까?


 돌이켜 보면, 투명인간의 이야기는 신화에 이미 언급된 바 있다. 하데스의 모자를 쓰면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고, 플라톤이 쓴 『국가』에는 기게스의 반지를 낀 자가 투명해진다. 후자의 경우, 평범한 양치기였던 기게스가 끝내 왕국을 찬탈하는 결말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 작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극중 그리핀은 공포정치를 이용해 사람들을 통제하겠다고 선언하는데, 우리가 섬뜩함을 느껴야 하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웰스가 창조한 투명인간은 다른 사람을 볼 수 있지만, 투명하지 않은 사람은 그를 볼 수 없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신들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생각과 언제든지 그에게 죽을 수 있다는 불안에 시달린다. 그리핀은 정치의 특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살인도 불사하게 된다. 극한의 생존 위기와 사람들의 공포감이 그를 폭군으로 만들었지만, 그는 그 심리를 이용하여 마을을 지배하려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음식과 잘 곳을 구하는 불쌍한 인물이 계속되는 억압을 거쳐 서로를 사냥하는 지경에 이른다. 웰스는 이러한 현대의 비극, 현대 신화를 훌륭하게 매듭 짓는 몇 안 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다양한 매체들로부터 익히 들어온 투명인간이라는 소재, 그리고 『투명인간』이 보이지 않는 인간을 묘사한 최초의 작품이 아니라는 점에서, 21세기의 독자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야기의 힘에 있다. 이 짧은 소설에는 강렬한 힘이 있다. 불완전한 시야와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서 오는 긴장감은 과학 소설임에도 스릴러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소재의 과학적 설득력은 다소 빈약하지만, 웰스는 자신이 설정한 투명인간의 장점과 단점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야기에 사용한다. 독자는 출간된 지 120년 가까이 된 이 소설로부터 장르문학의 쾌감을 오롯이 누릴 수 있다. 한편, 이야기와 소재의 결합만으로 논의할 수 있는 거리가 무궁무진하다는 점에서 『투명인간』은 과학 소설의 아버지라 불리는 웰스의 작품들 중에서도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한다. 


 어떤 컨텐츠는 참신한 소재로 시작해서 다소 허무하게 끝나는 경우가 있다. 이때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실망감보다는 씁쓸함에 가깝다. 참신한 소재는 반드시 익숙한 이야기로 끝나게 되어 있다. 단지 시작하는 지점이 달라서 "이번에는 특별함을 유지하지 않을까?"라고 기대할 뿐이다. 그러나 소재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결국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여전히 이야기의 힘이다. 현재 생산되고 있는 무수한 컨텐츠들이 단순한 '우화'나 '신화'로 종결된다면, 그것들은 힘을 잃는다. 왜 창작자는, 예술가는 정신적, 물질적 고난 속에서 이야기를 짜내는가? 그것이 미약하게나마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설명되지 않는 동기야말로 위대한 서사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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