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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하나님 믿음의 글들 276
안재경 지음 / 홍성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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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직접 선물 받은 책은 『고흐의 하나님』이 처음일 거야. 미술에 조예가 없는 나는 고흐의 이름만 들었지, 그의 작품에 담긴 정서와 의미를 헤아릴 수 없었어. 고흐가 신학교까지 갔다가 쫓겨났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어. 하나님을 사랑했고, 가난한 자들을 품었기에 그들처럼 살고자 했지. 세상 모든 것을 사랑했기에 거듭되는 발작 속에서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리 아름답지 못한 작별임에도 기꺼이 받아들였나 봐. 혹자는 그의 인생을 실패했다고 여길지 몰라도, 그의 걸음걸음마다 하나님이 동행했다면, 결과만으로 빈센트의 인생을 평가하기에는 무리야.


 이 책은 고흐의 작품을 테마별로 전시하고, 친절하게 해설해 주는 큐레이터 같아. 전에는 눈여겨보지 않았던 그림들의 의미가 선명하게 박혀. <감자 먹는 사람들>에 성찬 공동체가 담겨 있다는 사실, <별이 빛나는 밤>에 주님과의 합일을 꿈꾸는 소망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조금은 다르게 보이는 것 같아. 빈센트의 삶과 그의 작품을 별개로 놓을 수 없어. 언어로 정보를 전달하는 것에 익숙한 나는 여전히 그림을 해석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지만, 어쩌면 미술이야말로 AI가 흉내낼 수 없는 인류 최후의 보루라는 생각도 들어. 화법이나 기풍은 흉내낼지 몰라도 그 안에 영혼이 없달까? 인생이 없는 존재이기에 어떤 그림에도 자신을 투영할 수 없겠지. 새삼스럽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야.


 빈센트의 삶을 들여보고 있노라면,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의 가사가 떠올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난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그래서 그는 유럽 전역을 걸으며 마주한 세상을 영혼에 담았어. 일본의 자연 친화적인 사상과 불교에 매료되기도 해. 거리를 방황하는 과부를 거두어 그녀와 그의 아이를 책임지려 하기도 해. 하지만 그의 삶은 결점투성이였어. 동생 떼오의 집에 머무르며 손님들에게 화를 퍼부었어.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했고, 그래서 평생 혼자였지.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겠다는 다짐은 빈센트에게 엄청난 절망이었을 거야. 눈앞의 사람도 사랑할 수 없는 무력함 속에 놓였겠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통과해야 하는 믿음의 여정도 고흐와 같을지 몰라. 주님께 내 삶을 드린다고 결단하고, 그분의 사랑을 닮고 싶다고 간구하지만, 전혀 변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좌절하지. 종교 공동체는 나를 인정해 주지 않고, 사람들은 나를 피하기도 해. 믿음이 충만해졌다가도 삶의 폭풍 속에 꺾이기도 하고,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의심이 들기도 하지. 그럴 때 나는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까? 막연하게 기도하고, 기다리라는 말을 해야 할까? 조심스럽게 제안하고 싶은 말은, 나의 것을 정말 모두 내려놓았는지 묻고 싶어.


 고흐에게는 그림이 자신의 정체성이었겠지. 이것을 포기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을 거야. "주님, 당신을 위해서라면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화가로서의 삶도 포기하겠습니다"라는 결단을 내리는 일은 어려웠을 거야. 그런데 신기하게도, 바로 그때부터 하나님은 고흐를 사용하기 시작했어. 더 이상 자신의 힘과 의지로 꿈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은사를 쓰기 시작한 거야. 주님께 내 삶을 드리는 것은 모든 소유와 욕망을 포기하고 교회 안으로 들어가라는 의미가 아니야. 그런 삶도 참 귀하지만, 자신의 구원밖에 이루지 못하지. 고흐는 다시 세상에 보내졌어. 외로움과 궁핍함이 함께 했지만, 그렇기에 낮은 자들과 위태로운 자들의 마음을 이해했을 거야. 그리고 비로소 그의 붓은 자신의 뜻이 아닌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었지. 누군가는 렘브란트처럼 기독교적 소재를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흐의 작품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할 거야. 그 말이 맞아. 하지만 다르게도 볼 수 있지. 그것이 예술의 특징이야. 정답을 강요하는 이 세상의 원리 속에서 정해진 답은 없다고 외치는, 시대의 흐름에 정통으로 거스르는 것이 문화의 옷을 입은 예술이 쓰임 받는 방식이겠지.


 삶의 이유에 대해 고민하고 있니? 사실 정답은 나와 있어. 사랑하기 위해서야. 그러나 막상 세상에 발을 들이면 말로는 너무 쉬웠던 사랑이 삶으로 옮기기에는 너무 어렵다는 걸 알게 돼.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해. 때로는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니까. 언제나 정답을 알고 난 후에 실천에 옮기는 것이 지혜롭고, 그렇지 않은 자를 미련하다고 말하는 추세야. 먼저 사랑을 받아야만 그에 대해 반응하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세대야. 그러나 항상 사랑은 먼저 마음을 여는 자에게 허락되더라. 사랑이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사랑의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납득하려면, 결국 주님의 시선을 갖출 수밖에 없어.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한 유일한 존재니까. 전부를 이해하지 못해도 일단 순종하는 자에게 사랑의 실마리가 주어지더라. 기꺼이 실패하고, 기꺼이 상처 받고, 기꺼이 낮아지고, 기꺼이 손해 보는 네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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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기본 진리 (포켓북) 베스트 라이브러리
존 R. 스토트 지음, 황을호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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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하나님을 알기 전까지, 나에게 그분은 '가장 합리적'이라고 납득할 만한 분이었다. 숱한 종교들과 철학에서 기어코 결점을 발견해내는 나의 성정은 기독교를 "밑져야 본전"이라고 여기고 믿게 만들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 믿음은 보답 받을 것이고, 만약 죽음 너머가 허무에 그친다 해도 그게 살아 있는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는 질문을 내세우며 나의 얄팍한 믿음을 합리화했다. 그러나 몇 년 전 사랑으로 나를 깨뜨리신 이후, 얼마 전 그분이 나를 끝내 구원하실 것을 확신한 후, 진정한 믿음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나 납득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음을 알았다. 『기독교의 기본 진리』은 내가 도달한 이 지평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많은 성도들이 목도한 곳까지 왔음을 알려주는 좋은 지표가 되었다.


 세상은 눈앞에 보이는 결과에만 집중한다. 현재 펼쳐진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자들의 끈질긴 사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지 못한다. 또한, 끝내 자기 자신을 극복하지 못한다. 자신을 부인할 수록 참 생명을 얻고, 자신을 드러내려 할 수록 사망에 가까워짐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존 스토트도 동감한다: "진정한 자기 부인은 진정한 자기 발견이다.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요,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어떤 이들은 과학 기술과 온갖 사상이 시대를 이끌고, 개인주의와 자본주의가 보편적인 가치가 된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시대적이고 미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전하는 것에 위축된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참된 복음이 필요한 시기이다. 지식은 넘쳐나도 진리는 제한되어 있다. 모든 것이 영상과 텍스트로 변환되어야 하는 시대에, 언어가 담을 수 없는 사랑의 가치는 너무나 왜곡되고 축소되어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나의 친구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돈과 사회적 지위가 결코 해결해 주지 못하는 삶의 근본적인 결핍이 보인다. 하루 속에서 즐거움을 찾아 헤매고, 인생의 정답을 찾고 싶어 몸부림치지만, 하루 속의 작은 불친절과 불운에도 절망하고, 확실하지 않은 미래에 체념한다. 이 고통스럽고 위태로운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것은 똑같은데, 분명 그들이 나보다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데, 왜 나의 마음은 이토록 여유가 넘치고 그들의 마음은 메말라 보이는가? 거기에는 한 가지 정답만 남아 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 부활하심을 영접하고, 그 사실을 삶으로 전파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 과업을 신실하게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 아래에서, 어떠한 불안과 위기도 나를 뒤흔들 수 없다.


 비난과 경멸과 원망은 얼마든지 환영한다. 참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가난과 실패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르는 주제에 한가한 소리를 한다고, 세상의 경쟁 속에서 낙오한 자의 비겁한 자기 변명이라는 내면의 목소리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불쑥 튀어나오곤 하니까. 그러나 나는 반대로 묻고 싶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영원한 가치가 있는가? 돈을 많이 번다고, 불멸의 명예를 얻는다고 해서, 원하는 사랑을 얻는다고 해서, 간절히 염원했던 꿈을 이뤘다고 해서, 그로 인한 기쁨이 무한했다면, 세계는 이렇게 고통 받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성경에 적힌 복음을 더 이상 과소평가하지 않겠다. 그것은 이성과 감정과 논리와 언어를 초월하여 인간의 영혼을 근본적으로 바꿀 힘이 있다. 기독교의 기본 진리는 철저히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한다. 말씀을 삶으로 담아내는 것은 진정 내 힘과 의지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지 못하면,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용서하는 명령에 도저히 순종하지 못한다. 어쩌다 친절함을 베푸는 것은 가능해도, 마음 속의 우물은 금방 메마르고 만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죄는 사랑의 반대편에 선 모든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나 자신도 확신을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범죄와 폭력과 증오가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을 오해하고, 자신의 이해 범위로 축소시킨 인간의 잘못이다. 사랑은 절대적으로 선하다. 사랑이 아니었으면, 이 놀라운 구속의 역사는 시작되지도 않았다. 창세기에 묘사된 인류의 타락과 뱀의 머리를 밟을 자에 대한 예언, 동정녀에게 나신 메시아와 마침내 십자가에 매달려 언약을 성취하신, 그 영원히 찬양받아 마땅할 이야기는 사랑이라는 이유로만 설명이 가능하다. 사랑은 납득한다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먼저 죄에 가려져 창조주를 알아보지 못한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믿음이 없이는, 이 사실은 읽기에도 거북한 정보에 불과하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에만 자진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된다. 우리의 작은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비하면 무색할 정도다. 만일 심판받아야 마땅한 우리를 위해 수치와 고통을 당하신 그분의 사랑의 위대함을 한 번만이라도 접하게 된다면, 우리가 행할 길은 오직 하나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분을 어찌 부인하거나 거절할 수 있겠는가? (p.191)

 

 그러므로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파되어야 한다. 만약 그 사랑의 실마리라도 맛본다면, 그 자의 인생은 근본적으로 변화된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신비가 이해되고, 전에 누리지 못한 감격이 그 이에게 남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 해도 세상을 더욱 사랑하여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상관 없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드러나는 결과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남들이 실패했다고 조롱해도, 그의 마음에 그리스도가 계시다면 다시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결코 손상되지 않는 가치이며, 피조물인 인간과 절대적으로 구별된 존재이신 하나님께 닿을 수 있는 통로이다. 그 사랑을 믿는 자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그렇기에 나는 더 이상 세상의 논리와 그리스도의 복음 사이에서 타협하지 않겠다. 나로부터 나오는 미약한 능력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역사하실 것을 믿으며 나아가겠다.


 이제는 말을 아껴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예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놀라운 섭리가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 묵상들을 모두 나누고 싶으나, 진리는 본래 언어를 거치는 순간, 진리가 아니게 된다. 주를 모르는 자들이 기독교를 '역설'적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도저히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이들을 미친 사람쯤으로 여기게 된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그러한 시선은 개의치 않는다. 하나님은 바로 그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으니까. 올바른 복음은 오직 말씀으로만, 그리고 말씀을 드러내는 삶으로만 전해질 수 있음을 신뢰하며, 나는 이제 당당히 이 길을 걸어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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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처 마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9
윌리엄 골딩 지음, 백지민 옮김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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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간만에 읽으면서 실시간으로 충격을 받은 책을 만났다. 이 책에 대한 사전 정보는 거의 없었다. 어렸을 때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파리대왕』을 집필한 윌리엄 골딩의 또 다른 책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페이지에 나타난 글자를 쫓아가며 읽기에 바빴다. 서술자는 바다 한복판에 떨어진 주인공의 시점을 따라가며, 그가 점차 신체를 되찾아가고 바위 섬에 표류한 이후 구조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마틴이 과거에 이루지 못했던 바람들이 왜곡되게 실현되며, 마틴은 자신이 만든 환상을 보고 미쳐간다. 그때 검은 번개가 나타나 그가 만든 가짜 세상을 파괴하고, 마침내 마틴 자신마저 파괴한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야 해군이었던 핀처 마틴은 방수 장화를 벗을 틈도 없이 죽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독자인 내가 느낀 충격은 마틴이 죽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모두 핀처 마틴이 만든 환상이었단 말인가?


 이 소설의 세계에 초대되려면 상당한 인내력이 요구된다. 작중 초반부는 현재 상황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게, 아주 모호하게 쓰여져 있다. 인간이 아닌 주어들이 계속 나타난다. 읽으면서도 이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아가 자신의 상태와 주변의 상황을 인지하게 되면서 독자 역시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나중에 그것들이 모두 죽음을 인정하지 않던 핀처 마틴이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도, 쉽게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독자는 적어도 자신이 인지한 것은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은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은 누가 뭐래도 믿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 아닌가?


 핀처 마틴은 뛰어난 연극 배우가 되고 싶었다. 그의 자아를 지배하는 것은 구조되기 위한 간절한 노력보다는 바위섬의 구성물에 이름을 짓고, 각자에게 역할을 배분하는 일이었다. 그는 그 소극장에서 기필코 주연을 맡는다. 배우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해군에 입대해야 했던 현실 때문인가,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에 대해서도 갈팡질팡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정의하는 일뿐이었다.


 크리스토퍼 해들리 마틴. 마틴. 크리스. 나는 언제나의 나 그대로다! (p.103)

 

 이런 식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행위는 곧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욕망을 마음껏 발휘하는 마틴의 모습을 정당화한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아야 한다고, 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미 사망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떼를 쓰는 그의 영혼의 자작극이다. 독자는 마지막 장에 나타난 타인의 증언을 통해 차가운 진실을 마주한다. 그가 만든 세상은 검은 번개에 의해 파괴되었다. 검은 번개가 나타나든 그렇지 않든, 마틴의 죽음은 확정적이고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마틴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착각이다.


 우리는 모든 타인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이 글을 쓰는 나는,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분명히 살아 있다. 현실이라는 것은 개인의 환상 속에서 전개되지 않는다. 계속 흐르는 시간선 위에 서 있는 우리는 주어진 것들을 받아들이며 어디론가 흘러간다. 스스로 만든 바위 섬과 망망대해 위에 갇힌 마틴과는 분명 다르다. 꼭 그럴까? 우리 마음 속에는 과거에 이루지 못한 꿈과 욕망이 없는가? 나에게도 많은 후회와 아쉬움과 원망과 미련이 있다. 나는 가끔 그것을 해소하는 상상을 한다. 가상의 세계 속의 나는 아주 잘 나가기도 했다가, 성인만큼 선량하기도 했다가, 추악한 범죄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상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인식하는 순간, 나는 어떤 것도 변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조금 씁쓸해 한다. 환상은 그토록 무섭다. 그것은 우리를 일시적으로 죽인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세상이 있다. 상상력이 부족한 핀처 마틴에게는 이루지 못한 과거, 한눈에 들어오는 바위 섬, 구조되지 못할 미래가 전부였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더 큰 세상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만든 세상 속에서 우리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마침내 성취를 거두어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렇다면 그 이후는? 현실이라는 검은 번개가 모든 환상을 박살 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나는 언제나의 나 그대로다"라고 외치며 자신을 위해 살아가자는 결심을 되새기는 일뿐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 진리를 명분으로 삼아 스스로 만든 세계에 갇힐 필요도, 타인을 마음대로 하려는 욕망을 간직할 필요도 없다. 마틴의 영원 같은 시간 속에서 나다니엘은 얼마나 많이 죽고, 메리는 얼마나 고통 받았을까? 아무리 그 세계가 가짜라고 해도, 그에게 그럴 권리가 있을까? 


 이제 타인을 마음대로 다루고 지배하는 세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왜곡된 탐욕은 인간의 정신을 망가뜨린다. 수병들의 시신을 거두는 캠벨과 데이비드슨은 마틴이 고통을 받았을까 걱정한다. 그리고 죽은 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나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이 만든 세상 속에서 스스로를 학대하고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영혼들이 있다. 대서양 한복판이 아니라, 21세기 대한민국 도처에 말이다. 인간의 필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영원히 이 순간을 살아갈 것처럼 지금을 낭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그들의 현실을 바꿀 수는 없으나, 적어도 그들을 안타까워 하고 싶다. 그리고 묻고 싶다. 당신이 만든 세상은 안녕한지, 그곳에 진정한 평안이 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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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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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거다. 펜을 들어 첫 문장을 쓰기까지, 아니 생존자들을 만나 아픈 기억을 되뇌이기까지, 비극에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이겨내기까지. 소설은 그 허구성 때문에 종종 평가절하되기도 하지만, 차라리 『소년이 온다』는 이 모든 것이 꿈이었길 바라게 만든다. 다름이 아니라, 권력이 휩쓸고 간 자리가 너무나 황폐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욕망은 지배욕이다. 상대의 삶과 죽음을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것이 초래한 수많은 역사적 비극에도 불구하고 여실히 그 힘을 떨치고 있다. 권력은 종종 그 지배욕이 당연한 것인양 착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권력이 행사된 자리에는 생명도, 인간성도, 희망도 찾아보기 힘들다. 소년의 이름과 꿈과 권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차곡차곡 완성된 이 소설의 페이지마다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해야 했을까?"라고 질문했다. 내국인에게 반동분자라는 누명을 씌우고, 얼마든지 잔인하게 학살해도 된다는 허가를 내렸다니, 그리고 자신의 승진과 돈을 위해 그것을 기꺼이 수락했다니, 원하는 자백을 듣기까지 수감자들의 신체와 정신을 마음대로 유린하다니, 어떻게 같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이럴 수 있을까? 누가 그들에게 이러한 권리를 부여한 것인가? 그 수많은 질문에 위정자들은 "권력"이라고 대답하고, 억울하면 힘을 기르라고 나를 도발한다. 그렇게 세상에 부조리가 판친다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다면, 네가 힘을 길러서 그것을 바꿔 보라고 다그친다.


 그러나 역사는 알고 있다. 그날 광주 사람들이 강했던 이유는 한 명 한 명이 연약했기 때문임을 말이다. 진정한 힘은 약자에게 있다. 물론 고문과 학살에 희생된 이들과 그들의 유가족은 무슨 말이냐고 따질지도 모르겠다. 그때 우리에게 충분한 힘이 있었다면, 아니 애초에 전두환의 집권과 비상계엄을 무력화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이 있었다면,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그 체제가 올바르게 작동했더라면 5·18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시작점을 더듬어 가보자. 개인은 세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아무리 힘을 기른다 한들, 어떤 노력을 한다고 해도 몰아치는 파도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다. 그날 광주 시민들이 보였던 작은 용기는 거대한 권력에 휩쓸렸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그 자리에는 황폐함만 남아 있었다. 밝혀지지 않는 진실에 통곡하고, 찾아내지 못한 유골들에 애통해 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이 밝혀짐에 따라 변화는 시작된다. 동호, 정대, 은숙, 선주, 진수, 성희....... 권력이 군홧발과 탱크로 짓밟았던 사람들의 몸에서 영혼이 솟아난다. 그 어떤 무기와 억압으로도 끊어낼 수 없는 순결한 정신이 다른 이들의 마음으로 이전된다. 그곳에 있었던 어떤 이들의 희생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또 다시 수많은 이들이 고통과 죽음으로 민주주의를 수호했다. 그 대가로 어떤 이들은 사랑하는 이들을 잃거나 영구적인 장애를 얻기도 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시간을 돌렸을 때 몇 번이라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 대답하리라. 고결한 양심은 그런 것이니까. 자신의 안위와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나의 손해와 실패를 무릅쓰고 진실을 밝히려는 마음은, 인간의 역사를 피로 얼룩진 지배욕에 맞서온 강력한 힘이니까.


 역사는 늘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말해야 할 것은 말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 찰나의 지배욕을 맛보기 위해 고결한 양심을 버린 이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영원한 악인으로 기록된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힘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했지만, 역사는 어떤 이도 그것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증언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끊임없이 "억울하면 힘을 가져야 한다"고 설득해도, "나는 여전히, 앞으로도 약자의 편에 서겠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권력의 밑바닥으로 갈수록, 나의 욕망을 포기할 수록 우리는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곳에는 어떠한 사상도 설명하지 못한 신비한 힘이 있다. 권력자들이 그토록 없애고자 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마음이 있다. 나는 그 힘을 믿고 나아가려 한다. 권력이 휩쓸고 간 자리는 황폐하지만, 그 자리에 다시 꽃을 피우는 방법을 우리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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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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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초엽 작가에 대해서는 학술대회에서 처음 접했으나, 『지구 끝의 온실』은 SF를 사랑하는 한 명의 독자로서, 순진한 호기심으로 읽기로 다짐한 책이었다. 인류세 논의, 한국 SF의 전망 등의 거창한 이야기는 제쳐두고, 멸망에 맞서는 인간들의 사투를 그린다는 점에서 참 반가웠다. 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나 디스토피아 문학에서 놓치는 것이 멸망의 과정인데, 『지구 끝의 온실』은 더스트 폭풍 이후로 찾아온 무수한 혼란과 그에 투쟁하는 인간들의 사투를 생생하게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문명 재건 이후의 시점에서 바라본 과거의 치열한 사투가 결코 현재와 무관하지 않기에 참으로 작가가 치밀하게 소설을 구상했구나 싶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지수와 레이첼의 불분명한 성이다. 이름상으로는 지수가 남자고 레이첼이 여자 같지만, 레이첼에 대해 '그'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렇고 지수의 성이 어딘가 불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내가 초반을 주의깊게 읽지 않았는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작가는 상당히 의도적으로 인물들의 성별을 감추어 놓는다. 아마도 남성, 여성이라는 구분을 하기에는 레이첼이 반은 인간이고 반은 기계이기 때문에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인간의 기준으로 모든 존재를 해석하는 대신, 인간 역시 하나의 종으로 분류하려는 그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작가의 말이 꽤 인상 깊었다. 오직 식물만이 내 소설을 구원해줄 생물이라는 것. 그녀 역시 자신이 만든 세계가 존재할 법함을 믿고 있었다. 인간의 기술력이나 서로에 대한 신뢰라는 얄팍한 가치로는 소설 속 세상을 구할 수 없었다. 오직 식물의 번식력, 자생력, 그리고 단결이 끝없이 증식하는 재앙을 막을 수 있었다. 모스바나는 처음에 인간에게 해로워 보였으나, 아니 어쩌면 인간에게 적대적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지구상에 퍼져나가며 더스트를 흡수했고, 자신의 본분을 다한 뒤에는 저절로 사라졌다. 그 모스바나를 간직한 레이첼은 지수를 제외한 어떤 인간에게도 이해받지 못했지만, 지구 끝의 온실을 끝내 간직했고 그것을 불태움으로써 도리어 모스바나를 전 세계로 퍼뜨리는 데에 기여했다.

 

 뇌가 기계로 되어 있는 레이첼은 어떤 것도 의도하지 않았다. 사랑이라거나, 인류의 구원자가 되겠다는 바람은 프로그래밍 되어 있지 않았다. 단지 레이첼은 한 명의 개체로, 종의 일부로 살아가고 싶었다. 나오미와 아마라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위협들에 맞서 프림 빌리지에 도달했으나, 그곳에서의 희망과 인간성은 외부 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다. 지구의 주인이라고 착각했던 인간들은 그 지위를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에 대한 지배욕을 멈추지 않는다. 돔 시티에 사는 사람들은 지구에 있는 모든 생물들 중 자신들만이 같은 종을 학대하고, 또 학살하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인간이 과연 무슨 자격으로 종들의 지배자를 자처한단 말인가? 더스트 시대가 남겨준 교훈은 이것이었다.


 아영이 살아가는 22세기는 안녕한가? 멸종의 위기를 넘긴 자들은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계속 노력한다. 기술에 의존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어리석은 시절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는 숙제가 있다. 잃어버린 종의 역사를 어떻게 복원할 수 있을까? 다시 인류가 번성했을 때, 어떻게 겸손함의 가치를 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종의 일부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류세 논의의 모순(인류가 모두 멸종한 다음의 시대를 논의하는 것이 인류에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이 다른 종들, 그러니까 동물, 곤충, 식물과 동등한 지위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실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고 구원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 방향이 늘 바람직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희망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왜 작가들은 절망으로 가득 찬 세상을 기어이 만들어내는가? 역설적이게도, 지금의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살면서도 마침내 그것을 이어가기로 다짐했기 때문이다. 문학이 왜 존재해야 하느냐고, 인류의 존망이 걸린 문제에서 소설가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작가들은 바보처럼 "읽어보라"고 대답한다. 그들은 말보다는 글이 편하니까.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도 바보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권한다. 어떻게든, 문학을 읽어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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