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크래프트 전집 1 러브크래프트 전집 1
H. P. 러브크래프트 지음, 정진영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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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브크래프트의 책을 구매한 계기는 순전한 호기심이었다. 다양한 매체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을 들었고, 크툴루 신화에 관련된 보드게임도 하고 나니, 도대체 이 작가가 어떤 작품을 썼길래 사망한 지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영향력이 지대한지 궁금했다. 그가 소설에서 정면으로 내세운 '미지'의 공포는 설명이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현실과의 연결성이 끊어지고 말기에 전집을 읽기 전까지는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6권에 달하는 그의 전집 중 단 한 권만 읽었지만, 러브크래프트가 구축한 세계가 얼마나 방대하고 깊은지 이해하게 되었다.


 여기서 나는 그의 세계에 심취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쓴 것들은 대부분('모조리'가 아니다) 허구지만, 단편들이 공유하는 세계관은 한결같다. 단편들에서 얻어낸 조각들로만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은 분명 대단한 능력이다. 우리의 세계와 비슷해 보이면서도 어쩐지 다른, 뉴잉글랜드의 어딘가에 위치할 것 같지만 절대 존재하지 않는 '사일런트 힐(Silent Hill)' 같은 아컴과 인스머스는 이미 독자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 그가 묘사한 마을의 상세한 모습과 분위기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러브크래프트는 어떤 설명이 읽는이의 상상력을 극도로 자극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최근에 본 공포영화에서 깨달은 사실이 그의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하나는, 호기심이 위험하다는 것. 미지의 세계를 향한 호기심은 여행자 혹은 주변인의 운명을 파멸로 이끈다. 두 번째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공포를 만나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러브크래프트의 개인적인 삶으로부터 광기의 묘사를 이끌어내는 평론가들도 있지만, 공포라는 것은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전달될 수 없는 감정이다. 공포는 때로는 감정의 경계를 넘어서 인간의 정신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크툴루, 아자토스, 요그소토스와 같은 존재들은 지성의 영역 저편에 있기에, 그것의 개념을 만들어낸 사람조차 묘사할 수 없다. 마치 그것이 인간의 한계라는 듯이.


 작가가 단편들 속에 숨겨놓은 단서들은 이제 찾을 수 없다. 작가는 진실을 알고 있는 인물들을 모두 미치게 하거나 잔혹하게 살해했다. 심지어 자신조차 죽어버렸으니, 그가 만든 미지로 가득한 공포의 세상은 후대의 인물들에게 탐구의 대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허버트 웨스트가 살린 리빙 데드(living dead)의 행방, 네크로노미콘의 내용, 인스머스의 해변 등은 영원한 호기심으로 남으리라. 설령 확인한다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이는 살해당하거나 미칠 것이다. 그러니 모르는 게 약일지도 모른다. 

 

 나를 가장 무섭게 한 단편은 단연 현관 앞에 있는 것」이었다. 작품을 내내 관통하는 음산한 기운은 모든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극대화된다. 두 인간의 영혼을 바꾸려는 상상을 넘어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영혼을 잡아먹는 상상은 보는 이들에게 공포를 준다. '명석한 두뇌에 의지는 허약한' 인간을 노리는 악마의 이야기와 절친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서술자의 이야기가 공존하며 묘한 씁쓸함을 남긴다. 러브크래프트의 대부분의 작품이 그렇듯이, 완벽한 평화란 없다. 현상 유지이거나 도피일 뿐이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 악몽이 반복될 것이라는 불안은 페이지를 뚫고 미래로 흘러간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들이 아직까지 재생산되고, 해석되는 이유이리라. 


 나는 미지의 세계로의 초대를 기꺼이 환영한다. 내가 만들고자 하는 세계는 그와는 조금 다르지만, 충분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나는 범위가 닿는 곳까지만 갈 것이며, 그 이상은 시도하지 않겠다. 호기심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깨달았기에, 공포가 어떻게 인간을 무너뜨리는지 목격했기에. 나는 다시 한 번 책의 말미에 수록된 크툴루의 눈을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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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텍쥐페리의 글은 여전히 아름답다. 이것은 조종사들의 위대한 여정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에 그 구름들을 남겨본다.

그는 인생을 달콤하게 해주는 일들이 늙어서 ‘시간이 날 때‘로 조금씩 미루어왔음을 깨달았다. 마치 실제로 언젠가는 시간 여유가 생기기라도 할 것처럼, 마치 삶의 끄트머리에서는 상상하던 그런 행복한 평화를 얻을 수 있기라도 할 것처럼. 하지만 평화란 없다. 어쩌면 승리로 없을지 모른다. 모든 우편기가 최종적으로 도착하게 되는 일이란 없는 것이다. - P23

내가 비난하는 건 그가 아나. 그를 통해 나타나는 것, 미지의 것을 앞에 두고 인간을 마비시키는, 그런 장애물이지. 내가 그의 말을 들어주고, 그를 동정하고, 그의 모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면, 그는 불가사의한 세계에서 돌아온 거라고 생각할 거야.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건 바로 이 불가사의뿐이거든. 더는 불가사의라는 게 없도록 해야 해. 사람들이 이 어두운 우물 속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면서 그 안에 아무것도 없더라고 말하도록 해야 해. 이 조종사도 칠흑 같은 밤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내려가도록 해야 하지. 손이건 비행기 날개건 그런 것만을 비추는 광부의 조그만 램프 같은 것도 없이 말이지. 미지의 것과 어깨 넓이만큼만 거리를 두도록 해야 하는 거야. - P71

"보편적인 이익은 개별적인 이익이 모여 이루어집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하죠." 한참 후 리비에르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을 값으로 따질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무언가가 인간 생명의 값어치를 능가하는 양 행동하지요…… 그런데 그건 무엇일까요?" - P89

이보게, 로비노. 삶에는 해결책이 없다네. 전진하는 힘이 있는 거지. 그런 힘을 창출해 내면 해결책은 뒤따라 나오는 법일세. - P105

자크 베르니스, 이후 세상을 날아다니면서 자네는 무엇을 배웠는가? 비행기를? 우리는 단단한 수정 같은 하늘에 구멍을 뚫으며 앞으로 천천히 나아간다. 조금씩 조금씩 도시들이 차례로 바뀐다. 거기서 뭔가가 구체화되려면 착륙해야만 한다. 이제 자네는 알고 있다. 이 풍요로움은 자네에게 아주 잠시 주어졌다가 바닷물에 씻기듯 시간에 씻겨 사라진다는 점을. - P141

멀리서 사람들은 상상을 한다. 떠날 때에 사람들은 미어질 듯한 가슴을 안고 애정을 포기하고 가지만, 동시에 땅속에 보물을 묻어두고 가는 듯한 야릇한 감정도 느낀다. 이러한 도피가 때로는 그토록 소중한 사랑을 증명하기도 한다. 어느 밤, 별이 총총히 박힌 사하라사막에서 저 멀리 있는 뜨거운 사랑을, 별이 총총히 박힌 사하라사막에서 저 멀리 있는 뜨거운 사랑을, 씨앗처럼 밤과 시간에 묻혀 있는 사랑을 생각하고 있으려니 그는 마치 누군가의 잠든 모습을 보기 위해 약간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한 느낌이 급작스레 들었다. 고장 난 비행기에 기대어 사막의 곡선과 지평선의 경사를 눈앞에 두고, 그는 자신의 사랑을 양치기처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다 그대로라니!" - P157

관습, 관례, 법처럼 자네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모든 것이, 자네가 도망쳐 나온 그 모든 것이…… 바로 인생의 테두리가 되는 거야.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기 주위에 지속되는 현실이 필요한 법일세. 부조리하다든가 부당하다는 건 모두 그저 말뿐이지. 그러니 자네가 데려간 주느비에브는 더는 주느비에브가 아니라네. (…) 그런데 자네는 아파트에서 그 많은 물건들을 치우듯 그녀에게서 그녀의 삶을 텅 비우게 하려는 걸세.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집을 이루고 있는 그런 물건들을 없애듯 말이야.
하지만 자네에게는 사랑이 곧 탄생과 같은 말일 거라고 생각하네. 자네는 새로운 주느비에브를 데려간다고 생각하겠지. 자네에게는 사랑이 영롱하게 반짝이는 눈빛처럼 느껴지겠지. (…) 어떤 순간에는 가장 단순한 몇 마디 말이 위력을 발휘해 아주 쉽게 사랑을 불타오르게 하지. 그건 맞는 말일세…….
하지만 삶은 분명 그와는 다른 것이라네. - P188

베르니스, 자네는 어느 날 내게 고백했지. "나는 그다지 잘 이해되지 않는 생활, 완전히 충실하지도 못했던 생활이 좋았네.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조차 잘 몰랐어. 그건 그저 가벼운 욕망이었으니까 말이야……."
베르니스, 자네는 어느 날 내게 고백헀지. "내가 짐작했던 것은 모두 사물 뒤에 감추어져 있었네. 조금만 노력하면 마침내 이해하게 되고 알게 되고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지. 하지만 내가 밝은 세상으로 결코 이끌고 나올 수 없었던 그 친구의 존재 때문에 나는 괴로운 마음을 안고 떠난다네……." - P273

나의 동료여…….
그러고 보니 여기에 보물이 있었군. 자네가 그토록 찾아다니지 않았나?
이 모래언덕 위에서, 양팔을 십자 모양으로 벌리고 얼굴은 저 짙푸른 만을 향한 채 있는 자네, 그날 밤 자네는 어찌나 가볍던지…….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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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연습 - 세상에 생명을 주는 영적 훈련
카일 데이비드 베넷 지음, 정옥배 옮김 / IVP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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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책모임을 가져서 유익한 시간이었다. 다른 일정으로 인해 정해진 날짜에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공동체의 행사로 인해 모임이 취소되는 경우도 있었다. 여러 가지 사정이 겹치다 보니 10장도 안 되는 책 한 권을 다 읽는 데에 거의 5개월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한 장 한 장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었다고 할까? 귀찮음에 대한 변명처럼 들릴지 몰라도, 함께 소리내어 책을 읽으며 탐사하는 느낌을 주기 위해 책을 미리 읽어오지 않았다. 덕분에 책모임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나눔 위주로 진행하던 기존의 모임과는 달리, 정말로 낭독하고 글자의 소리를 들으며 그 자체로 나눔을 하는 방식이어서 새롭기도 했다. 


 『사랑 연습』이라는 책 역시 메세지는 간단했지만, 울림이 깊었다. 먼저 나를 자극시킨 것은 서론, '영적 헤로인'이었다. 저자는 수련회나 금식이라는 특별한 훈련으로 신앙을 단련하고, 거기에 그치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자신만을 위한 훈련을 멈추고, 이웃을 위해 삶에서 신앙을 보여주기를 촉구한다. 카일 데이비드 베넷의 진심은 한 문단 속에 정확히 담겨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개인적 만족이 넘쳐흐르거나 '긍정적인' 느낌을 듬뿍 누리는 삶이 아니다. 그것은 자극이나 흥분의 세례를 받는 삶이 아니다. 그것은 '황홀감'과 '한 방'이 연속되는 삶은 확실히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성부의 계획, 성자의 모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개혁되고 변혁된 생활 방식이다. 그것은 화해와 회복과 갱신의 삶이다. 그것은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삶이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소유하고, 생각하고, 먹고, 교제하고, 말하고, 일하고, 쉬는 것 같은 활동들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보이고 세상에 생명을 가져오는 방식으로 행하는 삶이다. (p.42)

 

 또한, 저자가 '악'이라는 말을 최대한 피하고 '기형적'이라는 표현을 쓰려는 것 역시 배려심이 돋보였다. 잘못된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일반화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들 역시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의 일부이며, 그 방식은 언제든지 고쳐질 수 있음을 암시하기 위해 이러한 표현을 쓴 것처럼 보인다. 확실히 그렇다. 기독교인들이 저지르는 흔한 실수 중 하나가 선악, 또는 이타심과 이기심이라는 이분법의 논리 아래 세상을 구별하려는 경향이니까. 그것을 판단하는 존재는 자신이 될 수 없음에도, 기독교인은 쉽게 결론을 내린다. 나 역시 이기적으로 행동할 뿐만 아니라, 이기적으로 생각하기에 그 덫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음을 인정한다.

 

 사랑 연습은 그러니까, 이타적으로 살아가라는 것 이상이다. 내가 모르는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연습이다. 정말 말도 안 되고 무모해 보이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처럼(Just Like Jesus) 살아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불가능한 길을 기쁘게 나아가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연습은 지극히 사소한 것에서 출발한다. 나머지 장들은 그것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2장은 소유에 대한 내용이다.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인처럼 살라는 것은 현실성 없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것을 원하시지 않으신다. 단지 기형적 소유 방식인 낭비벽과 탕진하기를 멈추고, 절약(여기서 말하는 절약은 당연히 일반적인 절약의 개념과 다르다. 단순히 돈을 아끼는 것을 넘어서, 이웃이 그것을 필요로 할 때 베푸는 것까지 포함한다)해야 한다는 것이 이 장의 요지이다. 다른 장들도 이런 식으로 나아간다. 기형적 방식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 말이다. 그 과정에서 흔한 개념의 재정의가 등장하고, 일상에서 실현할 수 있는 단계가 등장한다.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웃을 위해서라도 행동의 변화가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나는 아직 생각의 단계에 머물고 있다. 나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보다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 그리고 하루 중 시간을 내어서 이웃을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가치 있는 시도이지만, 여기서 멈춘다면 곤란하다. 다만, 매사에 최선을 다하려 하고 있다. 내가 속해 있는 다양한 그룹에서 일관되게 말이다. 때로는 버거워도, '섬긴다'는 말의 무게를 알고 있기에, 마음을 다잡는다.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 섬김은 일의 한 형태다. 그것은 수고하는 것과 실행하는 것을 포함한다. (…) 누군가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 혹은 그 사람을 위해 그 일을 해 주는 것이다. 우리가 종종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베푼 친절한 행동에 대해 어떤 보답이나 보상이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p.219)


 이타심을 넘어선 희생, 참 멋진 목표다. 그러나 자신이 없다. 당장은 그렇다. 그러니 연습해야 한다. 상처받더라도 먼저 다가가기, 손해를 보더라도 진심을 전하기. 그 아이가 이루었듯이, 나도 그래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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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합본 메피스토(Mephisto) 13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 / 책세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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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서는 그 광경에 끝끝내 익숙해지지 못했으며, 아무리 봐도 지루하지 않았다. (p.1165)


  많은 분량의 책을 읽을 때는, 작가의 생각이 은연 중에 담겨 있는 한 문장에 꽂히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주의깊게 읽지 않은 탓이겠지만 한 편의 에피소드가 강렬하게 기억이 남게 된다. 오래 전부터 독파하기를 고대했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내가 찾아낸 단 하나의 문장은 바로 이것이다. 이 뒤죽박죽 우주를 창조해 낸 더글라스 애덤스는 책 전체를 통해 "익숙한 건 지루한 거야"라고 말하고 싶어 했다. 그는 우주가 정체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곳은 항상 파괴되고, 재창조되어야 하며, 기존의 것은 폐기되고 새로운 질서가 부여되어야 한다. 시간, 공간, 방위, 선악의 구분조차 우주의 붕괴 속에서 무의미하다. 


 독자가 SF 장르에서 기대하는 대규모 전쟁이라던가, 미래에 존재할 법한 외계의 기술은 이 안내서에서 그저 하찮은 사건과 장치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 소설은 과학과 논리의 탈을 쓰며 자신의 상상을 합리화하는 부류들을 향해 비웃고 있다. 우주를 뒤흔드는 재앙의 원인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하다. SF를 기대하고 왔더니, 공간만 다르지 지구의 일반 가정집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더 우스꽝스럽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글라스 애덤스가 만든 이 뒤죽박죽 우주는 호불호가 꽤 갈린다. 나 역시 쉬지 않고 이어지는 넌센스에 잠시 지쳤지만, 은하수의 흐름을 타고 나니 한결 더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여행은 역시 '대체로 무해함(지구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주인공인 아서 덴트와 트릴리언 사이에서 태어난 랜덤은 존재론적 위기를 맞고 있었고, 가능성 투성이인 새가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지금까지 벌어진 상황 중 가장 기묘하면서 흥미로운 장이었다. 아서가 익숙해지지 못한 것도 '대체로 무해함' 속의 한 장면이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단지 그를 '지루하지 않게' 하려고 한 것이었다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가 한 평범한 인간의 흥미를 돋구기 위함이라면? 작가는 이런 민감한 질문을 보기 좋게 숨겨 두고 있다.


 그런 노력 때문인지, 안내서는 지루할 틈이 없다. 종종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동명의 안내서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 등장인물로 출현하니까). 그래서 왜 세상을 관통하는 지혜가 42인데? 어떤 기계가 대신 답을 해줄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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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언제나 옳다 - 감정을 다스리는 다섯 가지 마음처방전 아우름 17
김병수 지음 / 샘터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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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 깊은 메세지는 ‘우울할 때 움직이라‘는 것이다. Actions speak louder than 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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